Tuesday, January 31, 2012

한 날 묵상 - 창40:1-23 <하나님과 함께 함이 느껴질 때 간절한 소망과 바램은 생기게 마련입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고, 꿈대로 이루어짐을 통해 간절한 소망과 바램을 가졌을습니다. 그렇지만 그 간절한 바램과 소망은 결코 하나님의 때를 앞서지 않았습니다.>

한 날 묵상 - 창40:1-23 <하나님과 함께 함이 느껴질 때 간절한 소망과 바램은 생기게 마련입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고, 꿈대로 이루어짐을 통해 간절한 소망과 바램을 가졌을습니다. 그렇지만 그 간절한 바램과 소망은 결코 하나님의 때를 앞서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있는 곳에 형통함이 있는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요셉의 장기(?)인 꿈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꿈 해석과 해석되로 이루어짐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고난을 벗어날 한 줄기 희망처럼 다가왔지만, 이 또한 속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간절한 소망과 바램이 하나님의 때를 결코 앞서지 않았다.

1절 "그 후에"

2절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절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요셉이 갇힌 곳이라"
=> "그 후에"와 "곧"을 연결하여 읽다보면, 어떠한 손길을 느낄 수 있음을 성경은 의도적으로 말하고 있다. 요셉이 옥에 잡혀 들어가고,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신 "그 후에",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굽는 관원장이 옥에 갇히게 되었다. 
=> 그들의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그곳에 누구의 손길이 있었어!
 그들의 만남은 시종드는 요셉과 갇힌 자들이었지만, 단지 거기까지가 아니다. 그 이면에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보게 된다.
=> 하나님의 손길이 요셉이 가는 곳마다 형통하게 하였고, 또 한번 하나님과 함께 함에 누릴 수 있는 형통함이 요셉과 함께 할 두 관원장들 앞에 드러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또 다시 들어날 요셉의 형통함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어지는지 말씀을 통해 계속 살펴보자. 
 요셉의 또 다른 형통함의 이야기는 요셉의 장기인 것으로부터 꿈, 그리고 꿈해석으로 부터 시작된다.
꿈으로 시작됨.
5절 "옥에 갇힌 ...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6절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7-8절 "요셉이 .. 어찌하여 ...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 내게 이르소서"
=> 자신감. 확신. 거칠 것 없는 질주. 옥에 갇혀 그 신분이 시종드는 자가 어찌 이러한 기질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의 힘인가? 하나님과 함께 함이다.

꿈을 해석함.
9-19절 요셉의 꿈을 해석함.
 12절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 술 맡은 관원장
 14절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주소서"
=> 그에게 소망이 있었다. 나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18절 "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 떡 맡은 관원장

꿈이 실제로 이루어짐.
20-21절
 21절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22절 "떡 맡은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23절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 결코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14절에서 보듯이 소망이 있었고, 나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결코 그는 하나님의 때를 앞서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꿈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남.
창 41장에서 이어짐.

요셉은 관원자의 꿈이야기를 보면서 자신의 때를 보았을 것이다.
나의 꿈은 지금 어디가지 와 있는가?
꿈 -> 해석 -> 이루어짐 -> 하나님의 통치.

Monday, January 30, 2012

청.매.묵. 에스겔 22:17-31 <무너진 곳을 지키는 사람을 두라 찾아았지만 찾지 못하신 하나님. 오늘도 하나님이 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마지막 주자 그 한 사람이 당신이기를 원합니다>

청.매.묵. 에스겔 22:17-31 <무너진 곳을 지키는 사람을 두라 찾아았지만 찾지 못하신 하나님. 오늘도 하나님이 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마지막 주자 그 한 사람이 당신이기를 원합니다>

17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18절 "이스라엘 백성이 내게는 쓸모없는 찌꺼기처럼 되었다."
19절 "너희가 찌꺼기처럼 쓸모없게 되었으므로 내가 너희를 예루살렘으로 모을 것이다."

20절 "사람이 은과 구리와 쇠와 납과 주석을 모아서 용광로에 넣고 뜨거운 불에 녹이듯이 나도 내 불붙는 진노 속에 너희를 모아 녹여 버릴 것이다."
21-22절 "내거 너희를 모아 진노의 불을 내뿜으면... 이 성안에서 완전히 녹을 것이다."

23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24절 "'너는 진노의 날에 비도 없고 소나기도 내리지 않는 땅이다.'"

* 총체적의 부실덩어리 이스라엘.
25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음모를 꾸미고 으러렁거리는 사자처럼 잡은 먹이를 갈기갈기 찢는다."
26절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함부로 다루고 내 거룩한 성소를 더렵혔으며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지 않았고,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도록 가르치지 않았으며, 내 안식일을 기억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내가 그들 가운데서 더렵혀진 것이다."
 => 책임이 아주 큰 제사장.
 => 거룩함과 불경건함을 구별하여 가르치지 않았다. 오늘 목회자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이다. 위로와 축복의 말씀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도록 선포해야 한다.
27절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먹이를 뜯는 늑대와 같다. 그들은 불의한 이익을 얻으려고 피를 흘리고 사람을 죽였다."
28절 "예언자들은 헛된 환상과 거짓 예언으로 그들의 죄를 감쪽같이 덮으려 한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지도 않았는데도 '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고 한다"
 => 헛된 것을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 물을 흐리는 사람들.
29절 "그 땅의 사람들은 남을 속이고 훔치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학대하고 외국인을 속여서 정당한 보호를 받지 못하게 한다."

30절 "나는 이 땅을 위해 성벽을 쌓고 내 앞에서 서서 성벽의 무너진 곳을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두루 찾아보았다."
         "아무리 찾아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 "그 한사람을 찾아서" 성벽어디에 없는 그 한 사람. 장수든, 졸병이든, 목 좋은 곳이든, 좋지 못한 곳이든, 최전방이든, 최후방이든, 어느 곳에도 없는 그 한 사람. 오늘 우리가 그 한 사람이길 원합니다. 목 좋은 곳이든, 후미진 곳이든, 자신이 위치가 어디이든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됩시다. 그 한 사람이 성을 살리고, 세상을 살립니다.

31절 "그러므로 이제 내 분노를 그들에게 쏟아 부어 불 같은 진로로 그들을 멸망시키겠다."


Friday, January 27, 2012

한 날 묵상 - 창39:19-23 <억울한 누명, 현명한 방법은?>

한 날 묵상 - 창39:19-23 <억울한 누명, 현명한 방법은?>

 억울한 누명을 받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오직 양심으로만 답하십시요.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마십시오. 때가 되며, 무대가 될 때 말해도 늦지 않습니다. 먼저 양심을 하나님께 내어 보이는게 훨씬 중요합니다.
=> 억울한 누명을 받을 때 변명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19절 "그의 주인이 ... 심히 하지라"
=>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주님이 때가 되면 하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어느 것도 믿음을 이길 수 없다. 믿음이 있으니 무엇이든 승리한다.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한다는 의미는 매순간의 때에 늘 함께 해야 함이다.

20절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 흔히들 우리는 이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물론 힘의 논리로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지만, 힘의 논리로 나오는 사람에게 힘의 논리로 정면승부하는 것 또한 현명하지 못하다. 이 찰라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21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베푸시매"
23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 39장의 처음과 시작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이다. 그리고 그 사이의 내용이 요셉의 시험이다. 즉 억눌한 누명을 쓴 요셉이 어떻게 그 일을 처리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요셉은 하나님께 칭찬 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았다. 나아가 억울한 누명의 시험을 받더라도 자신의 힘이나 권력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함에 그에게 늘 형통함이 있었다는 말씀은 이처럼 요셉이 형통함을 누리는 삶을 누릴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음을 보게 된다.

*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
2장 세상과의 대화
언어는 그 사람을 말해주는 지표다.
 말의 신중함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당나라 대 주요 관직에 있다가 당이 망한 후에도 진과 한 등에서 벼슬을 지낸 처세의 달인 풍도가  쓴 <설시>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입은 곧 화에 이르는 무이요
 혀는 곧 몸을 베는 칼이니
 입을 닫고 혀를 깊숙히 감추면
 가는 곳마다 몸이 편할 것이라

말에서 충요한 첫번재 덕목은 호흡인데, 호흡을 고르기 위해서는 대화 도중 말을 하고 싶을 때 딱 2초만 쉬면 된다.
두번째는 설득력이다. 우리는 보통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때 신중해 보이는 사람의 의견에 더 귀를 기울인다.
세번째는 분노를 다루는 것이다.
네번째는 진실성인데, 말의 앞뒤가 일관하고 논지가 바로 서 있으며 실수는 바로 인정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평가를 자제하는 것인데, 그것이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특히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극히 주의해야 한다.
여섯번째는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말은 그 사람의 삶을 보여준다.
 말은 한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기 때문에 거친 언행을 일삼아온 사람은 아무리 감추어도 그것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낭중지추라고, 송곳은 언제가 주머니를 뚫고 나오게 되어 있다. 또 말과 행동에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참고 http://www.hislove.or.kr/new/sub08/sub_01.htm?tname=sub04&mode=view&idx=35&page=1&key=&keystring=&flag=%C8%F7%BA%EA%B8%AE%BC%BC%B0%E8

Thursday, January 26, 2012

청.매.묵. 에스겔 22:1-16 <나를 감싸고 있는 두 말씀을 보라! "여호와는 내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여호와라는 것을 알게 될것이다">

청.매.묵. 에스겔 22:1-16 <나를 감싸고 있는 두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라! "여호와는 내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여호와라는 것을 알게 될것이다". 의로운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옵니다. 주님께 돌아가면 심판은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의 참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죄로부터 자유입니다.>

오늘 본문을 싸고 있는 두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자.
 1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16절 "너는 내가 여호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계속되는 심판을 예언하는 말씀을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에스겔을 통해 주시는 말씀에 오늘은 큰 위로를 받습니다.
심판을 대할 때 두렵고 떨림이 있지만,
하나님이 왜 심판하셔야만 하는지를 알면 자유와 평안을 갖게 됩니다.

잘못하면 법원에서 판결을 받고 죄에 대한 형벌을 받습니다.
거룩한 양심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죄악이 드러나 판결이 되고, 심판을 받게 되면
마음이 홀가분해 질 거라 생각됩니다.
(롬 6:12-23. 22절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는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
 옛 것은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사는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시기 원한다면, 심판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돌아갑시다. 주님께 돌아간 인생은 더 이상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의 지난 날의 잘못, 나의 죄악들이 마음을 스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면 나를 품어주실 주님을 보게 됩니다.

-----------------------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공의의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은 죄악에 대한 공의입니다.

2-3절 하나님의 심판은 먼저 그들이 저지른 혐오스러운 죄악을 알고 난 후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의 심판은 그들의 죄악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3-5절 범죄한 이스라엘
6-12절 구체적인 죄악을 나열.


Wednesday, January 25, 2012

한 날 묵상 - 창 39:7-18 <누구에게나, 어느 때에나 유혹은 있게 마련이다. 성[ 性 ], 게으름, 속임수, 거짓.. 수없이 나를 유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결국 유혹을 이기는 힘은 스스로를 이기는 힘에서 나온다. 결국, 마음의 문제다. 심령에 날마다 새롭게 함을 입힐 때 유혹의 욕심에서 벗어 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어느 때에나 유혹은 찾아온다. 성[ 性 ] 게으름 속임수 거짓 마약 중독. 유혹을 이기는 힘은 스스로를 이길 수 있는 힘이다 그 힘은 심령에 날마다 새롭게 함을 입힐 때 온다

유혹을 이기는 힘(엡4:13-24)
-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온전한 데까지 이르느 자람이 있어야 한다.
엡 4:13-14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엡 4:21-22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결국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라.
엡 4:23-24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결국, 마음의 문제다. 심령에 날마다 새롭게 함을 입힐 때 유혹의 욕심에서 벗어 날 수 있다.

유혹에 넘어지는 자는 말씀을 이루지 못함(마13:22)
요셉이 유혹에 넘어져버렸다면, 그의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주신 약속의 말씀(꿈, 비전)들이 온전히 이루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가시떨기 나무가 있는 곳은 좋은 땅(?)일 수 있다. 땅은 좋았지만, 가시떨기 나무가 있어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이다.  염려와 유혹이라는 것이 그렇다. 좋은 땅에 많은 열매를 기다려야 하지만, 마지막까지 인내하지 못해, 결국 염려와 유혹에 넘어져 다른 사람이 열매를 거두게 될 때가 있다.
마 13:22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
7절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절 "요셉이 거절하며"
=> 요셉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유혹이 다가왔다. 성적 유혹과 넓은 길 유혹이다. 요셉의 때에 가장 위험한 유혹이었다. 청년의 때이며, 주변에 아무 연고도 없이, 도움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찾아온 유혹이기에 더욱 달콤한 유혹이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길을 갔다. 믿음의 길을 갔으면, 믿음에서 벗어난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 선택이 바로 험난한 고난의 길일지라도 그렇다.
 요셉은 또한 하나님의 훈련의 시간을 잘 통과하였다. 훈련을 통해 더욱 강한 믿음의 군사로 세워져 가는 사람들을 보라.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 신실한 일꾼을 세우신다.

 참고 -    http://saltandlight21.blogspot.com/2011/09/126-8.html (훈련받으실 준비 되셨나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가는 훈련은 무엇인가?
 첫째 인간의 생각을 버리는 훈련이다. (창12:11-13절)
 둘째,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훈련이다. (창12:17-20절)
 점점 더 거룩해지는 훈련은 하나님의 이끌림에 민감하게 더욱 더 반응할 때 성공적이 된다.
이끌림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 나의 생각이 틀릴 때 인정하고 돌아오자.
나의 실패로 주어진 환경을 하나님께서 바르게 세우실 때 그 상황을 감사로 인정하자.

10절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11-18절 유혹의 자리을 벗어나려면,
 - 그 자리를 빨리 떠나라(12절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 뒤돌아 보지말고, 다른 생각도 하지 말라(12절 "자기의 옷"이 생각나, 뒤를 돌아보거나, 다른 생각을 할 때, 또 다른 생각이 파고 들어 나의 결단을 흐리게 한다).
 -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까 예측하지 말라(거룩을 위한 결단은 하나님의 기쁨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

Tuesday, January 24, 2012

청.매.묵. 에스겔 21:18-32 <하나님은 바빌노리아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기에 위해 역사에 개입하셔서 유다의 죄를 깨우치이 원하셨습니다>

청.매.묵. 에스겔 21:18-32 <하나님은 바빌노리아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기에 위해 역사에 개입하셔서 유다의 죄를 깨우치이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역사에, 나의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우리 지금 이 순간에도 먼 미래에 대한 오늘의 계획(2012년 여름 단기 남아공 선교 가족이 함께 가기)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여러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방법을 놓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우리의 삶에 개입하심을 눈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역사를 사람의 손에 맡기시고, 참다운 자유를 주신 하나님.
그렇다고 방관자로 계시지 않고, 자녀들을 위해서 때로는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꼭 아버지의 마음을 봅니다.
 아이들이 이제 막 걸음마 할 때가 생각납니다. 그 때에 스스로 걷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였지만,
진정 홀로 걸어가야 하기에 스스로 걸을 수 있는 자유(?)를 주되,
손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탄과 한편으로 조바심으로 지켜보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니다 다를까 잘못된 방향으로 걸을 때 뒤에서 붙잡아주고, 넘어지려 할 때
손잡아 주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런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스스로 일어나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하며, 하나님이 펼치신 만물을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가꾸길 원하시기에 오늘도 우리에게 참다운 한 날을 주셨습니다.
혹여나 넘어져 다시 일어나지 못할까 지키시며 붙잡아 주시고,
때로는 넘어야 할 장애물을 놓으셔 더 강하게 하시고,
그러나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바로 함께 하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떠나지 말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오는 우리의 발걸음이겠지요.

오늘 본문도 바빌로니아왕을 유다의 역사로 끌여드리셔서 그들을 치게하십니다.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지요.
허나 하나님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23절 "바빌로니아 왕은 그들의 죄를 기억나게 해 줄 것이며"

우리가 죄가 하나님을 반역한 것이요, 하는 모든 일에 죄가 나타남이었습니다.
24절 "너희가 노골적으로 반역함으로 너희 죄를 스스로에게 드러내 보였다.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너희 죄가 나타나 있다"

---
21절 "바빌로니아 왕은 길이 갈라지는 곳에 이르러 화살을 흔들어 점을 치기도 하고 우상들에게 묻기도 할 것이며 희생 제물의 간을 살피기도 할 것이다"
22절 "점을 친 점괘는 오른쪽, 곧 예루살렘으로 가서 커다란 통나무로 성문을 허물고,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흙 언덕을 쌓아 성 안으로 들어가는 진로를 만들어 공격할 작업을 하라는 것이다"
23절 "바빌로니아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자들에게는 이것이 헛된 점괘로 보이겠지만"
=>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사람의 역사에 개입하시다.

Monday, January 23, 2012

크리스찬 지성인과의 가상 인터뷰 - 대 문호이자 위대한 불꽃, 그리고 불후의 명작


1828년 러시아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니콜라이 일리이치 톨스토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남.
1851년 군에 입대한 뒤 저술한<세바스트로폴 이야기>등 여러 개의 작품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함.
1857년 첫 유럽 여행을 떠나 농민 계몽 운동을 펼치는 한편 아이들을 위한 야학을 설립함.
1862년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 15년간 가정생활과 저술활동 매진.
13명의 자녀 둠. <안나 카레리나>, <전쟁과 평화>를 탄생시킴.
1876년 이른바 ‘내적 위기’의 시기를 겪은 후 종교적, 사회적, 도덕적 저술에 많은 시간을 바침.
1899년 만년의 대표적 <부활>을 발표함.
1910년 집을 떠나 방랑의 여행길 중 병을 얻어 아스타포보(지금의 톨스토이 역) 역장 관사에서 숨을 거둠.

prolog. <안나 카레리나>, <부활>, <전쟁과 평화> 등 워낙에 유명해서 읽지는 않았지만 제목만 들어도 마치 잘 아는 작품 같은 책이 한 두 권쯤은 있지 않나요? 오늘은 위의 유명한 세 작품들의 저자이신 레프 톨스토이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Q1. 안녕하세요, 선생님.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은 위에 말했듯이 제목만 봐도 친숙한 이름들이 많지만 아직도 많은 독자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궁금해합니다. 이 자리에서 살짝 이야기해 주실 수 있으세요?^^
A1. 그러고 보니 이제껏 인터뷰에서는 작품 설명 외에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 것 같군요(웃음). 저는 러시아의 툴라 시에서 15킬로미터쯤 떨어진 남쪽의 야스나야 폴랴나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지명 이름이 좀 길지요? 저의 아버지 쪽은 유서 깊은 백작의 집안이었고, 어머니는 그보다 더욱 명문가로 알려진 공작 집안이었습니다. 브로콘스키 집안, 이라면 근방에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으니까요. 간혹 제가 뜻밖의(?) 명문가 출신이라는 사실에 놀라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은데…아마도 저와 저의 형제들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먼 친척들과 할머니의 집을 전전하며 지냈기 때문에 살면서 귀족행세(?)를 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웃음).

Q2. 대학 이후 농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농사개혁에 뛰어드셨어요. 여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A2. 19세기 초, 소위 대학물을 먹었다는 지식 청년들의 슬로건은 농노제 아래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농민들을 구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16살부터 대학에 들어간 지식인 층이었으므로 대부분의 주변인들이 가담하는 운동에 뛰어든 것이었죠. 그러나 현실은 저의 비장한 각오와 달랐습니다. 실제로 날마다 부딪히는 농민들은 가난하긴 했지만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이나 의지가 없는 참으로 게으른 사람들이었죠.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이 아무리 개혁을 하면 뭐합니까? 막상 혜택을 받아야 하는 농민들은 자신들이 혜택을 받은 후의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을 귀찮아했습니다. 이런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인해 야심차게 세운 농사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목도한다는 것은, 욕심 많은 젊은 시절의 저로써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농사 개혁은 오랫동안 생각지도 않게 되죠.

Q3. 선생님이 평생에 걸쳐 연구하신 주제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문제인데요 이것은 어떤 계기로 인해 생각하게 되셨나요?

 


A3. 큰형 니콜라이의 도움으로 사관 후보생이 되어 고향을 떠났을 때 즈음부터였던 것 같아요. 강렬한 자극이 난무하는 도시에서의 생활에서 벗어나 조용한 전원 생활은 어지러운 제 마음에 진정제 구실을 해 주었죠. 코카서스라는 조용한 시골에서의 생활은 제 마음을 편안하게 다스려주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쓸 준비를 하게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정리된 마음을 종이에 옮기며 전 인간의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이때 시작된 고민은 1853년부터 시작된 러시아와 터키간의 크림 전쟁을 치르며 더욱 심화됩니다.
저는 장교로서 그 전쟁에 참전했는데 싸움터의 중심인 세바스토폴리라는 지역에 자진해서 출전했습니다. 그때 직접 체험한 전쟁의 비참함과 비인도성을 겪은 후부터 저의 작품에는 기자님도 말씀하신 ‘인간의 행복’을 여러 각도로 생각하고 묵상하는 성격이 짙어지게 되었습니다. 
1855년부터 1856년에 걸쳐 <현대인>에 실린 <<세바스토폴리 이야기>>는 이 때 톨스토이가 겪은 전쟁의 모습을 힘찬 필치로 묘사한 작품으로서, 그의 이름이 문단에 널리 알려지게 한 출세작이 되기도 했다. 1855년에 군대에서 나왔을 때의 그는 이미 눈부신 앞날이 약속된 새로운 젊은 작가로 변신해 있었다.

Q4.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저술 활동을 시작하셨나요?

 

A4. 군에서 제대한 이후 곧바로 문단에 들어갔으나 곧 환멸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끝까지 파고드는 저의 성격으로서는 소위 문인들이라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모순과 타협으로 지속되는 것으로 보였거든요. 요컨대 알맹이 없는 뜬구름 잡는 멋진 미사여구만 늘어놓는 모임으로 보였다는 말입니다. 미련 없이 문단을 박차고 나와 저는 유럽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서구의 훌륭한 문명 생활을 견학하고 나면 당시에 제가 구상하던 교육 사업 및 농민 계몽 운동에 많은 지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행 중에 저는 전혀 예기치 못한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파리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합법적으로 끊는다고 하는, 가장 야만적인 행위를 목격한 이후 ‘문명이란 진보될수록 오히려 인간 생활을 비뚤어지게 하며 인간의 영혼을 해치는 것’ 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이 충격적인 장면에서 처음 시작된 생각은 유럽 여행에서 돌아와 저술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Q5. 작품의 영감은 보통 어디에서 얻으시나요?

 

A5. 제 작품의 상당수가 15년간의 결혼 생활 중에서 나왔습니다. 참으로 바쁘면서도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이었죠. 13명의 아이들과 아내가 만드는 아늑한 환경과 대 자연에 둘러싸인 저택에서 저는 차분하게 저를 돌아보고, 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한편,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할 수 있었습니다. 충분한 사색의 시간과 따뜻한 가정의 응원이 만들어내는 힘은 위대합니다. 저는 그 시기에 넘치는 영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에서 글을 쓰느라 아주 바쁜 시간을 보낸 걸로 기억하는데, <전쟁과 평화>라든지 <안나 카레리나>와 같은 작품도 이 때 쓰게 되었지요.

Q6. 많은 대표작 중에서 특히 말씀하신 <안나 카레리나>와 <부활>에서는 선생님 본인의 모습을 많이 투영시킨 작품으로 알려져 있어요. 어떤 부분에서 선생님의 삶을 찾을 수 있나요?

 

A6. 우선 <안나 카레리나>는 아름다운 유부녀 안나와 청년 장교 브로스키와의 뜨거운 사랑 그러니까 불륜의 주제를 중심에 두고 지주 레윈과 순진한 소녀 키티와의 평화로운 결혼에 이르는 조용한 사랑을 대치시킨 이야기로, 여기에서 제가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그리고 저와 아내인 소피야의 모습을 투영시킨 쪽은 레윈과 키티의 지고지순 하면서도 고요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이 두 사랑의 모습을 통해 제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도 끝내는 파멸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죄의 길(불륜)과, 시간이 흘러도 변함 없는 진리의 도덕률을 지키는 사랑을 비교하며 결국 이 도덕적 진리를 심판하시는 이는 하나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하죠. 이 <안나 카레리나>를 쓰는 저술 기간이 제 개인적인 사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 그 이후부터 저의 저술 활동은 신앙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뒤에 말씀하신 <부활>은 방황하던 청년시절, 저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고모 집에서 하녀를 유혹하고 버린 적이 있었고, 그 때문에 그 하녀는 일생을 망친 어두운 추억을 평생 지니고 살게 되었죠. 그 당시에는 하녀라는 천한 신분의 사람의 인생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세월이 지나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영접할수록 떨쳐내기 힘든 그림자 같은 기억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작품에서 제가 청년시절에 그 하녀에게 하지 못한 사죄를 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 해도 그 사람을 천시하고 무시하는 것은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짓밟는 행위라는 것을 너무 늦게 안 것이죠.
‘다른 어떤 작품을 통해서보다 톨스토이의 영혼에 곧바로 도달하는 맑은 눈동자를 볼 수 있다’ –로망 롤랑, 톨스토이의 <부활>에 대한 서평 중에서.

Q7. 선생님의 작품에는 신앙적인 색채가 짙은데요, 선생님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에 따르면 선생님은 묵상하는데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다고 합니다. 그 묵상의 시간을 독자들과 조금만 나눌 수 있을까요?


A7. 저는 창조주의 존재에 대해, 그리고 그분이 주신 삶에 대해 평생을 번민하고 사색했습니다. 요즘에는 교회를 비롯한 각종 단체에서 성경을 함께 공부하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모임이 활성화 되어 저처럼 어두움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 혼자 머리를 쥐어 뜯을 필요까진 없어진 듯 합니다만, 저는 주로 한적한 시골길을 홀로 걸으며 제 인생에 다가오신 하나님과 대화하려 무진 애를 썼습니다그러다가 알게 되었죠.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의 존재를 갈구하고 있는 이 순간만이 진정한 삶의 충실함을 느끼는 순간이라는 사실을요!
쉽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을 만나고,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이미 제 안에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과 사는 일은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삶 자체이시기 때문이죠. 더 나아가 민중 생활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도 우리를 만드시고, 이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며,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의 사명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는 일’이라는 깨달음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소망이 말년에 저의 창작 욕구를 더욱 거세게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Q8. 시대를 초월하여 진리는 영원하다라고 하셨는데요, 복잡다단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A8. 첫 번째,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말 것. 이성이 보여준 진리의 길에서 자신의 인생이 아무리 멀리 빗나갔더라도 진리를 두려워하지 말 것. 두 번째, 타인보다 자신이 정당하고 뛰어나고 독립적이라는 자만심을 버리고 자신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인정할 것. 세 번째, 인류의 영원한 내일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 즉 타인과 자신의 생활을 조화롭게 유지하고자 전력을 다해 본능과 맞설 것네 번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은 과거에도 불가능했고 먼 미래에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은 오직 현재, 바로 지금 이 순간만이 가능할 뿐이라는 것.


참고도서 : 인생이란 무엇인가/ 레프 톨스토이 지음, 채수동 외 옮김/ 동서 문화사
톨스토이, 길/ 레프 톨스토이 지음, 김 욱 옮겨엮음/ 지훈
부활/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 철 옮김/ 골든세계문학전집

이미지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Tolstoy

Book Summary "유배지에서 온 편지" - 정약용

"유배지에서 온 편지" - 정약용

두 아들에게 부치노라 2 - 이하 강진에서 귀양 살면서 쓰다. 1802년 12월 22일

오직 독서만이 살아나갈 길이다
 이 세상에 있는 사물 중에는 자연상태로 존재하여 좋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은 오히려 기이하다고 떠들썩하게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파손되거나 찢어진 것을 가지고 어루만지고 다듬어 완전하게 만들어야만 그 공덕을 바야흐로 찬탄할 수 있듯이 죽을병이 걸린 사람을 치료해서 살ㄹ여야 훌륭한 의원이라고 부르고 위태로운 성을 구해내야 장수라 일컫는다.
(중략)
폐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한 가지밖에 없다. 독서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깨끗한 일일 뿐만 아니라 호사스런 집안 자제들에게만 그 맛을 알도록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촌구석 수재들이 그 심오함을 넘겨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략)
 그네들이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뜻도 의미도 모르면서 그냥 책만 읽는다고 해서 독서를 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독서를 하려면 반드시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컬음인가. 확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를 할 수 없으며, 학문에 뜻을 둔다고 했을 때는 반드시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컬음인가, 오직 효제(효제)가 그것이다. 먼저 반드시 효제를 힘써 실천함으로 근본을 확립해야 하고, 근본이 확립되고 나면 학문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들고 넉넉해진다. 학문이 이미 몸에 배어들고 넉넉해지면 특별히 순서에 따른 독서의 단계를 강구하지 않아도 괜찮다.

세상을 구했던 책을 읽어라
 반드시 처음에는 경학(경학) 공부를 하며 밑바탕을 다진 후에 옛날의 역사책을 섭렵하여 옛 정치의 득실과 잘 다스려진 이유와 어지러웠던 이유 등의 근원을캐볼 뿐 아니라 또 모름지기 실용의 학문, 즉 실학(실학)에 마음을 두고 옛사람들이 다스리는 세상을 구했던 글들을 즐겨 읽도록 해야 한다. 마음에 항상 만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만물을 자라게 해야겠다는 뜻을 가진 뒤라야만 바야흐로 참다운 독서를 한 군자라 할 수 있다.

아비에게 효도하는 길
 어버이를 섬기는 일은 그 뜻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중략)
 네가 한번 생각해보아라. 부엌에 들어간들 무엇이 그리 손해가 되겠는가? 다만 잠깐 연기를 쏘일 뿐이다. 그런데 연기 좀 쏘이고 시어머니의 환심을 얻으면 효부가 되고 법도 있는 집안도 만드니 효도하고 지혜로운 일이 아니겠는갸?

---
 저서에서 제일 신중해야 할 일은 항목을 세워 분류하는 일이라 한다.  저서에서 가장 신중해야 할 일은 조례(조례)인데 이토록 뒤죽박죽 해놓아선 안된다.

 성의 공부는 모름지기 먼저 거짓말하지 않는 일부터 노력해야 한다. 한마디 거짓말하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큰 죄가 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니 이것이 성의 공부로 들어가는 최초의 길목임을 명심하거라.
---
"시경"에 있는 모든 시는 충신 효자 열녀 진실한 벗들의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의 발로로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런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시가 될 수 없는 것이며, 아름다움을 아름답다 하고 미운 것을 밉다 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그러한 뜻이 세워져 있지 아니하고 학문을 설익고 삶의 대도를 아직 배우지 못하고 위정를 도와 민중에게 혜택을 주려는 마음가짐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시를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니, 너도 그 점에 힘쓰기 바란다.

두 아들에게 부치노라 5

 남의 도움을 바라지 말고 도와주라
너희들은 편지에 항상 버릇철머 말하기를 일가친척 중에 한 사람도 긍휼히 여겨 돌보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개탄하였고, 더러는 험난한 물길 같다느니, 꼬불꼬불 길고 긴 험악한 길을 살아간다고 한탄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미워하는 말투니 큰 병통이다.
(중략)
 여러 날 밥을 꿇이지 못하고 있는 집이 있을 텐데 너희는 살되라도 퍼다가 꿂주림을 면하게 해주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중략)
 이런 몇 가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집에서 너희들이 위급할 때 깜짝 놀라 허겁지겁 쫓아올 것이며, 너희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달려올 것을 바라겠느냐? 남이 어려울 때 자기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서 남이 먼저 은혜를 베풀어주기만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지닌 그 오기 근성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큰 아버지 섬기기를 아버지처럼
 내 몸과 마음을 다해 남을 대할 줄도 모르고, 남이 먼저 자기에게 도움을 주기를 바라고, 가정에서 해야 할 처신도 잘 익히지 못했으면서 이웃살마들의 칭찬이나 바라고 있으니 될 법이나 한 일이냐.

 과일 채소 약초를 재배하도록
 절약하고 본농사에 힘쓰면서 부업으로 아름다운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이 남새밭 가꾸는 일이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아들과 제자들에게 보낸 이 편지글에는 자상하고 간곡한 아버지와 스승의 정이 넘치면서도, 그 밑바닥에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뜨거운 의지가 용솟음치고 있다. 다산이서한으로 전한 말들은 바로 이백년이 지난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신경림 시인.

 다산 정약용 선생은 민족 최대의 학자이자 시상가이며 탁월한 시인이다. 18년 동안의 유배생활에서 그가 쓴 이 서한들에는 구구절절 자상하고도 엄한 가르침과 절실한 마음이 담겨 있어 우리의 심금을 울리며 한 위대한 인간의 갈등이 느껴져 온다. 참다운 스승을 만나기 어려운 오늘,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꺠우침이 될 것이다. 임형택 성균관대 교수


 두 아들에게 부치노라(7) - 1803년 정월 초하루
폐족도 성인이나 문장가가 될 수 있다.
 새해가 밝았구나. 군자는 새해를 맞으면서 반드시 그 마음가짐이나 행동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나는 소시적에 새해를 맞을 때마다 꼭 일년 동안 공부할 과정을 미리 계획해 보았다. 예를들면 무슨 책을 읽고 어떤 글을 뽑아 적어야겠다는 식으로 작정을 해놓고 꼭 그렇게 실천하곤 했다. 때론 몇 개월 못 가서 사고가 발생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아무튼 좋은 일을 행하고자 했던 생각이나 발전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지지 않아 도움이 되었다.
 폐족에서 재주 있는 걸출한 선비가 많이 나오는 것은, 하늘이 재주 있는 사람을 폐족에서 태어나게 하여 그 집안에 보탬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귀영화를 얻으려는 마음이 근본 정신을 가리지 않아 깨끗한 마음으로 독서하고 궁리하여 진면목과 바른 뼈대를 얻을 수 이기 때문이다.

한 날 묵상 - 창 39:1-6 <이끌려 애굽으로 내려간 요셉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함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 좇음이 아니라 요셉도 하나님의 동반의 요청에 함께 순응한 모습입니다.>

한 날 묵상 - 창 39:1-6 <이끌려 애굽으로 내려간 요셉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함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 좇음이 아니라 요셉도 하나님의 동반의 요청에 함께 순응한 모습입니다.>
 요셉이 끌려 원치 않는 길로 갔지만 그가 누린 형통함의 비결이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좇아감"이 아니라 요셉과 "함께"하였습니다. 오늘 한 날도하나님과 함께 갑시다

 요셉이 끌려 원치 않는 길로 갔지만, 그곳에서 그가 누린 형통함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좇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짝사랑에 반응하여 함께 하기를 선택함이 바로 형통한 자의 모습입니다.


1절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 자신의 꿈과는 반대의 길로 강제로 내려가는 요셉.
 자신의 계획과 의지와는 반대로 이끌려 내려가는 요셉.
 그러나, 계속되는 요셉의 이야기에서는 요셉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2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의 ... 집에 있으니"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의 의미는, 하나님의 요셉과 함께 한 의미이면서, 동시에 요셉도 여호와를 떠나지 아니하였다는 의미입니다.
 "함께"라는 의미는 쌍방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결코 함께 하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방적인 것은 "좇아감"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요셉을 따라다녔다면,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의 가는 길을 좇아 다니시므로".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쌍방이 함께 걷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 형통함의 기준은? 하나님과 함께 함이다. 형통함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이 꾼 꿈에 따라 일일 척척 진행됨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함에 형통함의 비밀입니다.
 오늘 다른 형통함을 좇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기준의 형통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함을 좇아 형통함을 누리는 한 날이 되기를 원합니다.
 요셉의 형통함은 또 무엇인가? 꿈처럼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함께 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형통함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어디에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을 주셨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주 나타나실 때임에도 불구하고 애굽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의 형통함은 이러한 것과 전혀 다른 하나님과 함께 함의 모습입니다.

3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 형통함의 기준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잘못 생각하는 것중에 하나가 나만의 하나님입니다. 아닙니다. 내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믿음의 다른 사람뿐만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했는가? 바로 4-5절에서 이어집니다.

4절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5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 나는 얼마나 내가 섬기는 곳에 하나님의 복을 흘러 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는가? 혹 불평, 불만만 쏟아 내면서 동료, 상사, 후배들의 흉만 보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흘러 보내는 통로로 하나님은 요셉을 보디발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후에 계속 이어지는 간수장과의 만남(39:19-24절)에서도, 관원장(40:1-23절)과의 만남에도 동일합니다. 요셉이 가는 길에 하나님에 그에 주신 형통함은 만나는 사람마다 형통함의 복을 흘려 보냄으로써 그들이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형통함의 은혜를 누린 줄 알수 있게 되었습니다.

Friday, January 20, 2012

청.매.묵. 에스겔 21:1-17 <칼의 노래, 슬픈 노래. "사람아, 사람아" 사람을 찾으시고 그를 통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외침을 들어보라>

청.매.묵. 에스겔 21:1-17 <칼의 노래, 슬픈 노래. "사람아, 사람아". 사람을 찾으시고 그를 통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외침을 들어보라>

 우리를 향해 사람아, 사람아 부르시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어느 날 찾아올 심판이 아니라, 계속 예언되고 사방에서 미리 알려주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람아, 사람아. 온 사방에서 메아리 치게 하여라. 탄식하며, 허리가 끊어질 듯이 크게 슬퍼하며 외치고 부르짖으라. 칼의 노래, 슬픈 노래가 있게 될 날을 외치라."


왜 슬픈 노래인가? 왜 슬픈 노래가 아니란 말인가?

왜 슬픈 노래인가?
사람을 애타게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라! 아무런 반응이 없는 애절한 사랑을  보라!
 왜 슬픈 노래가 아니란 말인가?
왜 슬픈 노래인가?
탄식하며 허리가 끊어질 질듯이 크게 슬피 우는 사람의 울부짖음을 보라!
 왜 슬픈 노래가 아니란 말인가?
왜 슬픈 노래인가?
칼의 노래가 있을 것임을 외치며 부르짖어도 귀가 막혀 버린 백성을 보라!
 왜 슬픈 노래가 아니란 말인가?
왜 슬픈 노래인가?
 반드시 공의와 사랑이 한 마음에 가득찬 하나님을 보라!
 왜 슬픈 노래가 아니란 말인가?

2절 "사람아,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그 성전을 향해 예언하여라"
3절 "내가 너희를 치겠다. 칼을 뽑아 너희 가운데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을 모두 치겠다"
5절 "나는 칼을 다시 칼집에 꽂지 않을 것이다"
6절 "사람아, 탄식하여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허리가 끊어질 듯이 크게 슬퍼하여라."
9절 "사람아, 예언하여라."
10절 "나의 백성이 모든 경고를 무시하니 어찌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12절 "사람아, 외치고 부르짖어라"
14절 "사람아, 예언하여라. 손뼉을 힘껏 치고 칼을 두세 번 내리쳐라."

칼의 노래, 슬픈 노래.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외침.
16절 "칼아, 오른쪽을 내리쳐라. 칼아, 왼쪽을 내리쳐라. 칼날이 닿는 곳마다 어디든 내리쳐라."
17절 "나도 손뼉을 치겠다. 그러면 내 분노도 풀릴 것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 마음이 찢어진다. 칼의 노래가 들리니 마음이 갈기 갈기 찢어진다.

참고도서 - 김 훈 "칼의 노래"

Thursday, January 19, 2012

Book 이야기 "카라마조프의 형제" 중에서 - 실천적 사랑


눅 6:27:27-31; 마 18:21-25

실천적 사랑 - 사랑과 용서. 실천적 사랑은 노동과 인내이다.

--------------------------

그 사람의 말은 '나는 인류를 사랑하지만 나 자신에게 스스로 놀랄 때가 있다.

인류 전체를 사랑하면 할 수록 개개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 때문이다.
공상 속에서는 곧잘 인류에의 봉사에 대해 열렬한 생각을 품기도 하고 만일 어떤 기회에 갑자기 그럴 필요가 생긴다면 인류를 위해 정말 십자가라도 짊어질 듯한 심정이 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어떤 사람하고든지 단 이틀도 한방에서 같이 지낼 수가 없다. 

이건 실지 경험을 잘 알고 있다. 
누구든지 내 옆으로 다가오기만 하면 곧 그 개성이 나의 자존심과 자유를 압박한다.
.........

아뭏든 실천적인 사랑이란 공상적인 사랑에 비해 매우 냉혹하고 무서운 것이니까요.
공상적인 사랑은 재빨리 이루어지는 신속한 공적을 갈망하며 남들이 보아 주기를 바라는 법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마치 무대 위에서처럼 되도록 빨리 그것을 성취하여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고 칭찬을 받을 수만 있다면 생명을 내버려도 아깝지 않을 지경에까지 이르고 맙니다.

그렇지만, 실천적인 사랑은 노동과 인내 올시다.
-------------








한 날 묵상 - 창 38:1-30 < 유다와 다말. 이스라엘 자손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배려하심에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유다와 자신의 의무를 다한 다말을 보게 된다.>

한 날 묵상 - 창 38:1-30 < 유다와 다말>

 이스라엘 자손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배려하심에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유다와 자신의 의무를 다한 다말을 보게 된다. 비난이 빗발치는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혜로움과 투철한 사명의식으로 뚫고 나가는 기지를 다말에게서 보게 된다.

 여인이어서 안된다고 말하지 말라!
 홀로 있다고 두려워하지 말라!
 지혜와 사명의식을 가지고 달려가라! 그 길이 더욱 정통성이 있다면 더욱 그리하라!

그 여인이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마1:1)에 들어간 그 여인이다.
마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두려워 떨지 말고 나아가라!
 정통성이 있다면, 지혜와 사명감을 가지고 달려가라!
 주님! 저에게도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계속된 부담감을 주시는 감사합니다! 그러나 떨립니다. 두렵습니다. 이길 힘이 필요합니다. 계속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
1절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2절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5절 "엘", "오난", "셀라",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6-11절 아들들과 다말.
  7절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10절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11절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12-30절 유다와 다말- 상황 이해하기.

 유다
 => 자기 자신에게 관대(12, 16)
      순리를 따르지 않음. 당시의 관습을 따르지 않음(11절)
       잘못을 누위침(26절)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다말
 => 현숙함(14, 18, 25)과 투철함 사명감(??), 즉 자신의 의무를 다함
 유다 지파의 대를 잇게되었다. 지파의 정통성이 무너질 수 있었는데, 정통성에서 벗어나지 않게 됨.
 => 죽은 형제에 대한 의무(신명기 25:5-10) - 신 벗김 받은 자의 집(다말, 룻). 두 여인 모두 마태복음의 족보에 기록됨.

 베레스와 세라
=> 족보에 기록된 아들들.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마1:3)
 그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어떻게 지금의 상황을 어머니 다말과 함께 헤치고 나아갔는가?

 여호와
=> 신실하자를 찾음. 구원이 이방인까지 미치는 확장성.
   이스라엘 자손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배려.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뢰하여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다말의 유혹이 합법적인 이유* 비전성경p194. 
과부인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문을 들은 유다는 간음한 며느리를 끌어내 불살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며느리 다말이 가져온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보여주자 유다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어째서 유다는 며느리가 더 옳다고 말했을까? 유대 나라에는 형제가 아이 없이 죽으면 죽은 형제의 대를 이어주기 위해 친형제나 친척 중에서 죽은 형제의 부인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주어야만 하는 풍습이 있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죽자 그 동생 오난에게 형수와 동침하여 아이를 낳도록 했지만 오난은 그 아이가 자기의 자식도 되지 않고, 아버지 재산이 그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해 자식 낳기를 거부하다 죽었다. 유다는 남은 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주어 자손을 이어야 했지만 셀라도 오난처럼 죽을까봐 다말을 친정으로 보낸 후 불러들이지 않는 꾀를 썼다. 유다의 이런 행동은 이스라엘 자손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배려를 무시한 것이다. 혈통을 잇기 위해 창녀로 가장해 시아버지와 동침까지 한 다말 앞에서 유다는 그녀가 자기보다 옳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Wednesday, January 18, 2012

Book 리뷰 - "십자군 이야기 2"(시오노 나나미. 문학동네)


 십자군 이야기 두 번째는 "신은 그것을 바라신다!"는 한 마디로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되찾은 후 십자군 국가를 세운 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다시금 십자군 국가를 빼앗고자 하는 이슬람의 대반격이야기이다.
 두 번째 이야기에 제2차 십자군 원정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보기 좋게 패배하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십자간 이야기 2"는 첫번째 이야기와는 반대로 이슬람에 훌륭한 기사들이 끊이지 않고 등ㅈ아함을 보여주고 있다. 전략과 용맹이 뛰어난 기사들이 계속된 이스람이 예루살렘을 다시 회복하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한 편으로 흐르는 내용은 기사도 정신다. 십자군 기사와 이슬람 기사는 모두는 신사이다. 멋진 기사들에게는 종교적으로 차이가 있었지만, 종교의 차이만 빼면 모든 것에 인간미가 있었다.  물론 그렇지 못한 오직 종교적인 차이로만 사람을 살육하는 종교인들도 있었지만, 작가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말은 살맛나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 수많은 종교들이 있다. 종교들의 차이가 곧 전쟁이며, 목숨을 내어 놓은 일이 역사적으로 반복되었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어떠한 종교든 사랑을 말하지 않는가? 사랑을 말하면서 자기 민족만,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말 그대로 정말, 진실된 마음으로, 아무런 사심없이 사랑 하나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십자군 이야기에 나오는 수 많은 에피소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단 하나, 다시는 그런 전쟁이 없이, 세상에 사랑만 남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청.매.묵. 에스겔 20:40-49 <하나님의 고집은 거룩한 백성을 반드시 만들어 여호와께 나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스스로 회개할 때가 옵니다. 그 때가 오기전에 지금 당장 회개합시다. 지금 당장 예배의 자리에 나아갑시다. 회개와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과 거룩함을 드러내는 자녀들의 삶입니다!>

청.매.묵. 에스겔 20:40-49 <하나님의 고집은 거룩한 백성을 반드시 만들어 여호와께 나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스스로 회개할 때가 옵니다. 그 때가 오기전에 지금 당장 회개합시다. 지금 당장 예배의 자리에 나아갑시다. 회개와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과 거룩함을 드러내는 자녀들의 삶입니다.>

 계속된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심판을 견디고 남은 자들, 즉 하나님의 말씀따라 심판속에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구별하여, 그들을 이끌어내어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호와께 돌아온 백성들은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하나님을 배신했던 그 대를 부끄럽게 여기고 회개할 때가 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온전히 예배할 때가 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몸과 마음입니다.
 이렇께까지 하나님이 고집스럽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지 않을 때 심판이 있으며 심판이 있은 후에 이런한 회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심판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스스로 회개할 때가 오기 전에 지금 당장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야 합니다.

-------------
40절 "나의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섬길 것이다"
         "거기서 내가 너희를 맞아들이고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첫 추수한 예물과 온갖 거룩한 예물을 받을 것이다."
41절 ".. 여러 민족들 가운데서 데려올 때, ... 여러 나라에서 너희를 모을 때에 너희를 아름다운 향기로 받아들이겠다."
 =>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보다 우리 자신을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예물로 받아주십니다. 여호와께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냄을 기억하자. 44-45절 말씀처럼 우리의 죄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기꺼이 받아주십니다. 나아갑시다! 여호와께로!

         "그 때에 내가 여러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너희 가운데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


42-43절 "너희 스스로를 미워할 것이다."(v43)
  => 하나님께 나아갈 때. 스스로 회개할 때가 옵니다. 이 때가 오기전에 지금 당장 회개하십시오! 지금 당장 주님께 돌아오십시오.

44-45절 "너희 악한 길과 부패한 습성에 따라 벌을 주지 않고, 내 이름을 위해 너희를 너그럽게 대할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46-49절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빌로니아 유배지에서 유다 왕국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며 심판을 예언합니다.
 선포.  예언.  불 심판




Tuesday, January 17, 2012

Think Orange - 효과적인 가르침을 위한 습관 & 핵심진리

Think Orange - 효과적인 가르침을 위한 습관 & 핵심진리
   (오렌지 사고의 다섯 가지 필수 요소. 필수 요소2. 메시지를 정제하라)

효과적인 가르침을 위한 습관 - Habits for Effective Teaching
 규칙적이고 반복적이고 적용하며, 더 유능하고 효과적인 교사가 되는 데 도움을 주는 습관들이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메시지를 정제하는 원칙을 바탕으로 두고, 리더와 커뮤니케이터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우리가 커리큘럼에서 사용하는 구체적인 적용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각인 : 깊은 인상을 남기라.
 그들이 알기 원하는 딱 한 가지가 무엇인가?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은 그 가장 중요한 원칙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적용 : 상황에 맞추라.
 그들이 나가서 무엇을 하기 원하는가? 당신이 말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여주라.

반복 : 기억에 오래 남게 하라.
 아이들이 절대로 잊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적절한 문구를 작성했으면 그것익이 각인될 때까지 반복하라.

경험 : 그들의 것이 되게 하라.
 어떻게 그들이 메시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어떤 경우에는 말하지 않고 학습을 촉진시키는 경험을 만들어주는 것이 더 유익하다.

개인화 : 실제가 되게 하라.
 당신 개인의 삶에서 그들에게 모범을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 있는가? 한 사람이 보여주는 본보기가 천 마디의 말보다 더 분명하게 요점을 설명해줄 수 있다.

이행 : 연결시키라.
 그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 아이들을 계속 참여시키려면 프로그램 간의 순조로운 이동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3-14).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적게 말하고, 목적을 말하고, 분명히 말하라.
때로는 말하지 말라.
그러나 말할 때는 언제나 크게 말하라.
무엇을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
신중하게 생각하라.


핵심 진리 - Key Truths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세 가지 중요한 관계를 중심으로 
경의를 느끼게 하라.
 그러면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경이로움과 그들을 햐안 그분의 사랑에 계속 놀라워하며 성장하게 된다. 

발견할 수 있도록 자극하라.
 그러면 어린이와 청소녀들이 정체성이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의해 결정되고, 그분의 영과 진리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발견의 삶을 추구하게 된다. 

열정에 불을 지피라.
 그러면 어린이와 청소녀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발을 내디디셨을 때 하셨던 일을 하려는 열정을 갖게 된다. 

한 날 묵상 - 창 37:12-36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드러나시지 않으지만 역사하고 계십니다.>

한 날 묵상 - 창 37:12-36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드러나시지 않으지만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드러나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서 늘 역사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이러한 흐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팔려가는 인생에서도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분노와 울분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지금의 현실을 보십시오. 현실이면에서 나와 함께 하셔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의 흐름을 정리하면 이렇다.
이스라엘의 요셉에게 심부르시킴(v13) -> 요셉이 이스라엘의 심부름에 순종(v13) -> 요셉이 세겜에서 형들을 찾지 못함(v15) -> 요셉이 형들을 찾으로 도단으로 감(v17). 결코포기 하지 않음. -> 요셉의 형들이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죽이고자 꾀함(v18) -> 르우벤이 죽이지는 말자고 함(v21) -> 구덩이에 요셉을 집어 넣음(v24) -> 요셉이 애굽 사람들에게 은 이십에 팔림(v28) -> 아버지 이스라엘의 애통(v34) ->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림(v36).

하나님의 이끄심의 흔적들. 다른 말로 고통의 연속들. 
 1) 15절 세겜에서 한 사람을 만남. 만나지 않았더라면?
 2) 21절 르우벤이 생명을 해치지 말자고 함. 말하지 않았더라면?
 3) 25절 길르앗에서 오는 이스마엘 사람들을 만남. 만나지 않았더라면?
 4) 36절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림. 보디발에게 팔리지 않았더라면?


12절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떼를 칠 때에"
13절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는 요셉.
14-17절. 도단으로 이동한 형들을 찾아 나서는 요셉.
      => 책임과 성실. 아버지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고자 함.
  15절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 그에게 물어 이르되"
  => 왜 여기서 집으로 갈 수도 있었는데,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가?

18절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절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누구인가? 꿈 꾸는 자인가?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보는가?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나를 잊혀진 존재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이다.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꿈과 이상을 가진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자들이 되자!

20-22절 요셉 죽이기를 모의.
   21절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23절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23절하-24절 형들이 요셉을 잡아 구덩이에 던짐.

25-36절. 애굽으로 팔려가는 요셉.
 => 요셉의 팔려가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큰 흐름에서 요셉을 이끌어가는 한 힘을 보아야 한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드러나시지 않으지만, 역사하고 계시다.


한 날 묵상 - 창 37:5-11 <요셉의 꿈과 형들의 미움. 가족의 비극의 시작인가? 가족의 은혜인가?>
http://saltandlight21.blogspot.com/2012/01/375-11.html
하나님은 꿈을 통해 요셉을 부르셨다. 요셉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요셉에게 찾아오는 것은 형들이 미움, 시기였다. 형제들끼리의 갈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요셉의 이러한 갈등은 결국 아름다운 이야기로 끝을 맺게 된다. 요셉의 꿈으로부터 시작된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주도권이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모든 사건과 상황들을 이끌어가신다. 이 때 요셉은 항상 하나님편에서 서 있었다. 그 편이 가장 지혜롭고, 모든 문제를 가장 잘 풀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Monday, January 16, 2012

청.매.묵. 에스겔 20:27-39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고집스러운 징계 아닌 징계을 하시는 방법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청.매.묵. 에스겔 20:27-39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고집스러운 징계 아닌 징계을 하시는 방법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하나님을 떠나 헛된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다.
 하나님의 징계방법은 고집스럽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가신다(38절).
 하나님의 징계방법은 헛되게 품은 생각을 이루어지지 안헥 하시고, 직접 그들을 직접 다스리신다(32-33절).
 하나님의 징계는 떠나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오게 하신다(34절).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을 잘 살피시고 또 언약을 맺으신다(37절).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들은 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 이상 더럽히지 않게 하신다(39절).

 하나님의 징계방법은 참으시고, 참으시고, 또 참으신다. 그렇게 참으시고도 부족한지 떠나 백성을을 향한 또 참으신다. 하나님은 떠난 백성을 향해 고집스럽게도 그들을 품으시고 돌아와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더 이상 더럽히지 않기를 기대하신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고집스러운 징계 아닌 징계의 방법이시다.

27절 "반역함으로 내 이름을 더럽혔다"
28절 "그들은 높은 언덕과 잎이 무성한 나무를 보고 그 곳에서 제사를 드렸다."

31절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지만 나는 너희가 내게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32절 ".... '우상을 섬기고 싶다'라고 하지만 너희마음에 품은 생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 헛된 생각을 막으시는 하나님. 우상을 섬기고 싶다는 헛된 생각이 막으신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그 길을 결코 허락치 않으시고, 막으신다.
33절 "분노을 쏟아 너희 다스리겠다"
34절 "이방민족들로부터 너희를 모아들이겠다"
37절 "내가 너희를 잘 보살피고 언약을 맺을 것이다"
38절 "나는 그들을 지금 살고 있는 땅에서 인도하여 나오게 할 것이나, 이스라엘 땅으로 절대로 들여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 떄에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다."

39절 "너희가 내 말을 들은 후에는, 너희의 예물과 우상들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 이상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Saturday, January 14, 2012

이번주 설교 : 에베소서 5:8-17 "빛의 자녀답게 살아라!"

에베소서 5:8-17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마태복음 5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null)
영화 도가니라고 아십니까?
황 감독은 영화 `도가니`를 통해 2000년부터 5년간 비인간적인 성폭력과 학대로 얼룩진 장애인 학교의 은폐된 진실을 고발, 장애인 인권 침해와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경각심을 촉구했다. 이 영화 덕분에 일명 `도가니법`으로 불리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특례법 개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영화 `도가니`의 황동혁 감독이 `2011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로 선정됐다.
영화 도가니는 어두운 세상을 밝힌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어두움에 영원히 묻힌 놀라운 일을 이 땅에 드러나게 했습니다.
 
세상을 밝게 하는 일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의미입니다. 누구나 이러한 인생을 꿈꿀 것입니다.
 
어두움을 밝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든, 교회를 다니지 않던지, 어두운 세상을 빛추어야 한다는 강한 부르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일을 통해 스스로 만족하거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원하거나, 정치에 뜻을 두거나, 후대에 이름을 남기려 합니다.
 
그렇지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이건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모두가 감당해야 하는 사역입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밝게 비추는 삶이란 의미있는 삶입니다.
나에게 드러나는 빛을 한 사람이 받던, 많은 사람들이 받던 숫자는 다르지만 방향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찬의 삶입니다.
 
8절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러한 빛의 삶은 어느 특정한 시간에만, 특정한 장소에서만, 특정한 사람들에게 행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상시로, 어느 순간, 누구에게나 반드시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16절 말씀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빛으로 사는 사람을 가리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
 
크리스챤을 포함해서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 부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꼭 필요한 사람.
있으나 마나 하는 사람,
있어서는 절대 안되는 사람.
 
여러분은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나는 과연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있어서는 절대로 안되는 사람입니까?
있으나마나 하는 사람입니까?
꼭 필요한 사람입니까?
 
“Linchipin 린치핀이란 영어 단어가 있습니다.
책도 있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쓰는 단어입니다.
뜻은? (조직계획 등의) 핵심이 되는 인물. 꼭 필요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자동차 바퀴를 연결하는 쇠막대기를 고정시키는 핀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없으면 조직이 무너져 내린다는 의미입니다.
그저 그런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핵심적인 역할을 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소모품입니까? 아니면 린치핀입니까?
핵심적인 사람이 된다는 의미는 차이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남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나만의 계획과 행동으로 나아갈 때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실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자기계발이 필요합니다.
 
좋은 학벌이든, 능력이든, 힘이든, 권력이든, 재물이든, 나만의 특별한 것, 어느 누구나 따라올 수 없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이러한 것들을 가질 수 있도록 자기계발을 통해서 인정받아서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학벌이든, 능력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으로 세상을 비추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의 빛이셨습니다.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수 많은 무리들이 따라다녔습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따르던 무리들은 춤을 추었습니다.
 
이 보다 더 빛나는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진짜로 예수님을 빛나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지만, 그에게 사랑이 없었다면, 수 많은 무리들은 아침 안개와 같이 곧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 생전에는 따라 다녔을지 모릅니다.
혹시나 하면서 기적을 바라면서요.
예수님 생전에 어떤 병고침을 받기 위해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놀라운 기적을 위해서, 로마를 전복하기 위해서,
 
그러나 사랑이 없었다면 2천년이 지난 지금에는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섬기었기 때문에 지금도 빛으로, 등대로 수 많은 사람들을 어둠에서 인도할 수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추는 사랑의 빛은 지금도 힘들고 소망없는 사람들에게, 낙망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십니다. 참 소망이십니다.
세상을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영원히 비추는 진정한 힘은 사랑입니다.
진정한 빛은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이지성씨가 쓴 자기계발서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 인문고전을 읽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끈 지도자가 되었고, 지금도 세상을 이끌어 가고 있다고 말하면서
세상을 리더하기 원한다면 인문고전 서적을 많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더라고요.
 
그 책에서는 세상을 이끈 리더가 되기 위해서 조건으로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은 인문고전을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고전에는 짧게는 100년의 인생에서 1000년의 인생이 담겨있기 때문에 인문고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말합니다. 인문고전을 읽으면 인생을 살아갈 길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리더가 되기를 원한다면 인문고전 서적만 읽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거기에 사랑이 있어야만 한다고 세상의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말하더라고요.
 
그의 책의 일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깨닫기 위해서는 영안이 열려야 한다. 쉽게 말해서 하늘의 은총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인문고전은 제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인간이 쓴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다가간다면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한편으로 사랑이 간절함보다 훨씬 중요하다. 사랑은 곧 인문고전 독서의 목적과 관련된다. “나는 왜 인문고전을 읽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천재가 되기 위해서, 창조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 업무능력을 하기 높이기 위해서, 회사를 잘 경영하기 위해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등등, 그렇다면 왜 천재가 되어야 하고, 왜 창조적인 사고를 해야 하고, 왜 업무능력을 높여야 하고, 왜 회사를 잘 경영해야 하고, 왜 부작 되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유일무이한 답은 사랑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아시죠? 드라마... 전 보다 말았습니다.
거기서 세종이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내어 놓고 한글을 내어 놓았는가?
그가 애타게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바로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는 드라마의 표현으로 미쳐갔고, 그는 목숨을 내어 놓았고, 그는 자식을 내어 놓아야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을 모아 놓고 한 말이 있습니다.
내 유일한 소망은 백성들이 원망하는 일과 억울한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농사 짓는 마을에서 근심하면서 탄식하는 일이 영원히 그치는 것이요. 그로 인해 백성들이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내 지극한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백성을 사랑한 그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아니고 무엇으로 이것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세종대왕이 한글을 내어 놓아서 지금까지 우리에 위대한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존경받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는 한글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도 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요?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겠습니다.
세종은 오직 백성을 위하여 마음으로 유교에 찌든 사대부 지식인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써가면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창조했다. 어디 그뿐인가, 정치, 경제, 과학, 의학, 군사, 법률, 학문, 눙업 등 백성들의 삶과 관련된 거의 모든 영역에서 백성을 위해 분투했고,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왕도 따라오지 못할 찬란한 결과물들을 만들어냈다. 심지어는 여자 노비들을 위하여 100일에 달하는 출산휴가 제도를 만들었고, 같은 노비인 남편도 한 달 동안 아내를 돌볼 수 있도록 했다. 재위 기간 내내 고안, 노인, 병자, 죄수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기본권을 직접 챙겼음은 물론이다
 
무엇이 이렇게 그를 이끌었을까요?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서 보면, 마태복음 514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반드시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사명입니다. 세상의 빛이며, 어두운 곳을 환하게 비출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반드시 해야만 한다. 그게 한 사람이든, 열 사람이든, 수 만, 수 백만, 수 억의 사람이든 너희들은 반드시 세상의 빛이 되어야 된다는 강력한 명령입니다.
 
무엇으로 세상의 빛이 되기 원하십니까?
 
나는 가진 것이 없어서,
돈이 없고,
능력도 없고,
권력도 없고,
힘도 없어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시겠습니까?
 
아니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핑계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핑계를 할 수 없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누구나 세상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또한 그렇게 실제로 사셨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를 세상의 빛으로 만드셨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그를 고아에게 나아가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그를 과부에게로, 죄인 세리에게로, 보잘 것 없는 어린아이에게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배신 때리고 도망쳐버린 제자들에게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자기를 저주하면서 자신의 길로 가버린 베드로에게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빛이 되셨고, 다시 가야할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가 가야 할 길을,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을, 고아들이, 과부들이 가야 할 길의 빛이 되시기 위해서, 자신을 배신하고, 저주하고, 세상이 보잘 것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그를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섬김으로 자리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좀 쉬었다가.....)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데 우리에게 뭐가 필요합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무엇이 또 필요하나요?
 
우리는 때가 되어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너는 왜 사람을 사랑하지 않음으로서 세상에 빛으로, 등대로 살아가지 않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저는 돈 없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다고 하실 것입니까?
저는 능력이 없어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저는 권력이 없어서
저는 좋은 회사의 사장이 아니어서
저는 목표로 하는 것을 다 아직 다 이루지 못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핑계는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하는 그 마음뿐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또 핑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을 몰라주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사랑했는데, 그 사람이 내 사랑을 몰라주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의 착한 행실은 진정 사랑하는 그 마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의 사랑의 마음은 착한 행실로 세상을 비추게 될 것이며, 나아가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며 빛을 보았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빛이 되어 사람에 앞에 비출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사랑의 행실을 보고 우리안에 그들을 인도할 빛이 있음을 그들로 알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각자의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될 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십니다.
 
하나님의 영광 받으심이,
여러분이 좋은 대학에 가는 것에,
여러분이 좋은 직장에
여러분이 돈 많이 버는 것, 그것 자체에 있지 않음을 반드시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 받으심은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여, 그 사랑의 착한 행실로, 그들을 섬기며 나아갈 때 드러납니다.
 
세상의 빛이 되십시오.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며, 우리를 부른 부르심이며, 우리에게 감당하라고 주신 미션입니다.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의 빛입니다.
무엇으로 세상의 빛이 될까는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안에 있습니다.
어떠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 원하든지 그 안에 사람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꼭 필요함을 기억하기 원하니다.
진정한 빛,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세상의 빛, 등불이 되고 싶다면 사람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또한 진정으로 그러한 꿈을 꾸는 우리 청소년부 친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