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23, 2012

크리스찬 지성인과의 가상 인터뷰 - 대 문호이자 위대한 불꽃, 그리고 불후의 명작


1828년 러시아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니콜라이 일리이치 톨스토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남.
1851년 군에 입대한 뒤 저술한<세바스트로폴 이야기>등 여러 개의 작품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함.
1857년 첫 유럽 여행을 떠나 농민 계몽 운동을 펼치는 한편 아이들을 위한 야학을 설립함.
1862년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 15년간 가정생활과 저술활동 매진.
13명의 자녀 둠. <안나 카레리나>, <전쟁과 평화>를 탄생시킴.
1876년 이른바 ‘내적 위기’의 시기를 겪은 후 종교적, 사회적, 도덕적 저술에 많은 시간을 바침.
1899년 만년의 대표적 <부활>을 발표함.
1910년 집을 떠나 방랑의 여행길 중 병을 얻어 아스타포보(지금의 톨스토이 역) 역장 관사에서 숨을 거둠.

prolog. <안나 카레리나>, <부활>, <전쟁과 평화> 등 워낙에 유명해서 읽지는 않았지만 제목만 들어도 마치 잘 아는 작품 같은 책이 한 두 권쯤은 있지 않나요? 오늘은 위의 유명한 세 작품들의 저자이신 레프 톨스토이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Q1. 안녕하세요, 선생님.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은 위에 말했듯이 제목만 봐도 친숙한 이름들이 많지만 아직도 많은 독자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궁금해합니다. 이 자리에서 살짝 이야기해 주실 수 있으세요?^^
A1. 그러고 보니 이제껏 인터뷰에서는 작품 설명 외에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 것 같군요(웃음). 저는 러시아의 툴라 시에서 15킬로미터쯤 떨어진 남쪽의 야스나야 폴랴나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지명 이름이 좀 길지요? 저의 아버지 쪽은 유서 깊은 백작의 집안이었고, 어머니는 그보다 더욱 명문가로 알려진 공작 집안이었습니다. 브로콘스키 집안, 이라면 근방에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으니까요. 간혹 제가 뜻밖의(?) 명문가 출신이라는 사실에 놀라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은데…아마도 저와 저의 형제들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먼 친척들과 할머니의 집을 전전하며 지냈기 때문에 살면서 귀족행세(?)를 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웃음).

Q2. 대학 이후 농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농사개혁에 뛰어드셨어요. 여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A2. 19세기 초, 소위 대학물을 먹었다는 지식 청년들의 슬로건은 농노제 아래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농민들을 구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16살부터 대학에 들어간 지식인 층이었으므로 대부분의 주변인들이 가담하는 운동에 뛰어든 것이었죠. 그러나 현실은 저의 비장한 각오와 달랐습니다. 실제로 날마다 부딪히는 농민들은 가난하긴 했지만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이나 의지가 없는 참으로 게으른 사람들이었죠.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이 아무리 개혁을 하면 뭐합니까? 막상 혜택을 받아야 하는 농민들은 자신들이 혜택을 받은 후의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을 귀찮아했습니다. 이런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인해 야심차게 세운 농사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목도한다는 것은, 욕심 많은 젊은 시절의 저로써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농사 개혁은 오랫동안 생각지도 않게 되죠.

Q3. 선생님이 평생에 걸쳐 연구하신 주제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문제인데요 이것은 어떤 계기로 인해 생각하게 되셨나요?

 


A3. 큰형 니콜라이의 도움으로 사관 후보생이 되어 고향을 떠났을 때 즈음부터였던 것 같아요. 강렬한 자극이 난무하는 도시에서의 생활에서 벗어나 조용한 전원 생활은 어지러운 제 마음에 진정제 구실을 해 주었죠. 코카서스라는 조용한 시골에서의 생활은 제 마음을 편안하게 다스려주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쓸 준비를 하게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정리된 마음을 종이에 옮기며 전 인간의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이때 시작된 고민은 1853년부터 시작된 러시아와 터키간의 크림 전쟁을 치르며 더욱 심화됩니다.
저는 장교로서 그 전쟁에 참전했는데 싸움터의 중심인 세바스토폴리라는 지역에 자진해서 출전했습니다. 그때 직접 체험한 전쟁의 비참함과 비인도성을 겪은 후부터 저의 작품에는 기자님도 말씀하신 ‘인간의 행복’을 여러 각도로 생각하고 묵상하는 성격이 짙어지게 되었습니다. 
1855년부터 1856년에 걸쳐 <현대인>에 실린 <<세바스토폴리 이야기>>는 이 때 톨스토이가 겪은 전쟁의 모습을 힘찬 필치로 묘사한 작품으로서, 그의 이름이 문단에 널리 알려지게 한 출세작이 되기도 했다. 1855년에 군대에서 나왔을 때의 그는 이미 눈부신 앞날이 약속된 새로운 젊은 작가로 변신해 있었다.

Q4.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저술 활동을 시작하셨나요?

 

A4. 군에서 제대한 이후 곧바로 문단에 들어갔으나 곧 환멸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끝까지 파고드는 저의 성격으로서는 소위 문인들이라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모순과 타협으로 지속되는 것으로 보였거든요. 요컨대 알맹이 없는 뜬구름 잡는 멋진 미사여구만 늘어놓는 모임으로 보였다는 말입니다. 미련 없이 문단을 박차고 나와 저는 유럽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서구의 훌륭한 문명 생활을 견학하고 나면 당시에 제가 구상하던 교육 사업 및 농민 계몽 운동에 많은 지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행 중에 저는 전혀 예기치 못한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파리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합법적으로 끊는다고 하는, 가장 야만적인 행위를 목격한 이후 ‘문명이란 진보될수록 오히려 인간 생활을 비뚤어지게 하며 인간의 영혼을 해치는 것’ 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이 충격적인 장면에서 처음 시작된 생각은 유럽 여행에서 돌아와 저술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Q5. 작품의 영감은 보통 어디에서 얻으시나요?

 

A5. 제 작품의 상당수가 15년간의 결혼 생활 중에서 나왔습니다. 참으로 바쁘면서도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이었죠. 13명의 아이들과 아내가 만드는 아늑한 환경과 대 자연에 둘러싸인 저택에서 저는 차분하게 저를 돌아보고, 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한편,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할 수 있었습니다. 충분한 사색의 시간과 따뜻한 가정의 응원이 만들어내는 힘은 위대합니다. 저는 그 시기에 넘치는 영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에서 글을 쓰느라 아주 바쁜 시간을 보낸 걸로 기억하는데, <전쟁과 평화>라든지 <안나 카레리나>와 같은 작품도 이 때 쓰게 되었지요.

Q6. 많은 대표작 중에서 특히 말씀하신 <안나 카레리나>와 <부활>에서는 선생님 본인의 모습을 많이 투영시킨 작품으로 알려져 있어요. 어떤 부분에서 선생님의 삶을 찾을 수 있나요?

 

A6. 우선 <안나 카레리나>는 아름다운 유부녀 안나와 청년 장교 브로스키와의 뜨거운 사랑 그러니까 불륜의 주제를 중심에 두고 지주 레윈과 순진한 소녀 키티와의 평화로운 결혼에 이르는 조용한 사랑을 대치시킨 이야기로, 여기에서 제가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그리고 저와 아내인 소피야의 모습을 투영시킨 쪽은 레윈과 키티의 지고지순 하면서도 고요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이 두 사랑의 모습을 통해 제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도 끝내는 파멸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죄의 길(불륜)과, 시간이 흘러도 변함 없는 진리의 도덕률을 지키는 사랑을 비교하며 결국 이 도덕적 진리를 심판하시는 이는 하나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하죠. 이 <안나 카레리나>를 쓰는 저술 기간이 제 개인적인 사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 그 이후부터 저의 저술 활동은 신앙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뒤에 말씀하신 <부활>은 방황하던 청년시절, 저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고모 집에서 하녀를 유혹하고 버린 적이 있었고, 그 때문에 그 하녀는 일생을 망친 어두운 추억을 평생 지니고 살게 되었죠. 그 당시에는 하녀라는 천한 신분의 사람의 인생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세월이 지나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영접할수록 떨쳐내기 힘든 그림자 같은 기억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작품에서 제가 청년시절에 그 하녀에게 하지 못한 사죄를 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 해도 그 사람을 천시하고 무시하는 것은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짓밟는 행위라는 것을 너무 늦게 안 것이죠.
‘다른 어떤 작품을 통해서보다 톨스토이의 영혼에 곧바로 도달하는 맑은 눈동자를 볼 수 있다’ –로망 롤랑, 톨스토이의 <부활>에 대한 서평 중에서.

Q7. 선생님의 작품에는 신앙적인 색채가 짙은데요, 선생님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에 따르면 선생님은 묵상하는데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다고 합니다. 그 묵상의 시간을 독자들과 조금만 나눌 수 있을까요?


A7. 저는 창조주의 존재에 대해, 그리고 그분이 주신 삶에 대해 평생을 번민하고 사색했습니다. 요즘에는 교회를 비롯한 각종 단체에서 성경을 함께 공부하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모임이 활성화 되어 저처럼 어두움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 혼자 머리를 쥐어 뜯을 필요까진 없어진 듯 합니다만, 저는 주로 한적한 시골길을 홀로 걸으며 제 인생에 다가오신 하나님과 대화하려 무진 애를 썼습니다그러다가 알게 되었죠.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의 존재를 갈구하고 있는 이 순간만이 진정한 삶의 충실함을 느끼는 순간이라는 사실을요!
쉽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을 만나고,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이미 제 안에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과 사는 일은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삶 자체이시기 때문이죠. 더 나아가 민중 생활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도 우리를 만드시고, 이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며,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의 사명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는 일’이라는 깨달음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소망이 말년에 저의 창작 욕구를 더욱 거세게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Q8. 시대를 초월하여 진리는 영원하다라고 하셨는데요, 복잡다단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A8. 첫 번째,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말 것. 이성이 보여준 진리의 길에서 자신의 인생이 아무리 멀리 빗나갔더라도 진리를 두려워하지 말 것. 두 번째, 타인보다 자신이 정당하고 뛰어나고 독립적이라는 자만심을 버리고 자신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인정할 것. 세 번째, 인류의 영원한 내일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 즉 타인과 자신의 생활을 조화롭게 유지하고자 전력을 다해 본능과 맞설 것네 번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은 과거에도 불가능했고 먼 미래에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은 오직 현재, 바로 지금 이 순간만이 가능할 뿐이라는 것.


참고도서 : 인생이란 무엇인가/ 레프 톨스토이 지음, 채수동 외 옮김/ 동서 문화사
톨스토이, 길/ 레프 톨스토이 지음, 김 욱 옮겨엮음/ 지훈
부활/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 철 옮김/ 골든세계문학전집

이미지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Tolst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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