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ly 23, 2013

불쾌한 기분, 낙심, 분노 - 국제제자훈련원

불쾌한 기분은 전염성이 있다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 (잠 22:24-25)
분노는 전염이 될까? 그렇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분노에 감염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상대방이목소리를 높여서 당신도 그렇게 한 경험이 있는가? 이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에너지가 전달된 것이다. 분노는 전염성이 있다.
당신이 부적절한 분노가 깊이 들어와 있는, 습관적인 분노의 생활방식을 바꾸고자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면, 분노를 다스리는 법을 아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해야 한다. 교회의 유익 중 하나가 그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교회 공동체에 속하고 소그룹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긍정적인 가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은 습득된 것이다. 습득된 것이기에 고의로 잊을 수도 있다. 부모들이 분통을 터뜨리고 냉정을 잃을 때마다 자녀는 부적절한 분노의 본을 배운다. 부모는 가르치고, 자녀는 배우는 것이다.
오늘 다음과 같이 기도해보지 않겠는가?
“하나님, 저는 제 분노를 다스리기로 결심합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제 분노를 조절할 것입니다. 전에는 넘어졌지만, 오늘 저는 새롭게 결단합니다. 제가 분노의 대가를 깨닫도록 도와주소서. 분노는 언쟁과 실수를 불러오고 어리석은 일을 하게 하고 온갖 종류의 곤경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버지여, 제가 반응하기 전에 심사숙고 하도록, 지혜를 갖고 스스로 ‘내가 왜 화가 났는가? 나는 무엇을 정말로 원하는가? 그것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라고 묻게 도와주소서. 제가 제 분노 저변에 있는 원인을 보게 하옵소서. 분노를 적절히 풀 수 있게 하시고, 더 이상 폭력, 고함, 투덜거림, 또는 겉으론 참으면서 속으론 원망하는 것으로 표현하지 않게 도와주소서. 제 분노에 대해 인정하고, 주님과 다른 사람들과 제 자신에게 그것을 고백하도록 도우소서. 아멘.”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당신은 잘못된 사람들과의 관계로 분노를 다루는 방법에 영향을 받은 적이 있는가?
  • 당신은 성장할 때, 분노를 표현하는 법을 어떻게 배웠는가? 자녀에게도 동일한 방법을 물려주고 있는가?

낙심을 다루는 다섯 단계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사 26:3)
삶 속에서 낙심을 다루는 다섯 가지 간단한 단계가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스스로에게 물으라. “내가 초래한 일인가?” 성경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라고 말한다. (갈 6:7b) 우리는 삶 속에서 스스로 초래한 일로 인해 낙심할 때가 많다.
스스로에게 물으라.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로마서 8:28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나쁜 일들도 많지만,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맡기면, 부정적인 것까지도 들어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실 수 있다. 거슬리는 일도 보다 그리스도를 닮아갈 기회로 사용하라.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8은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한다. 나쁜 상황으로 인해 감사할 필요는 없지만, 나쁜 상황에서 감사할 수는 있다. 낙심은 변장하고 찾아온 복일 수 있다.
낙심을 재미있고 유머러스한 사건으로 바꾸라. 성경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고 말한다. (잠 17:22) 유머감각은 분노와 좌절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해독제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으로 당신을 채우시길 구하라. 왜 그래야 하는가? 고린도전서 13:5은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말한다. 사랑은 희생하는 것이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가, 또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가 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끊임없는 낙심에 직면하셨지만 결코 성내시지 않았다. 주님은 늘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내셨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일에 너무나 바빠서 인생의 우선순위가 사람들에게 있음을 잊는다.


분노를 다스리기로 결단하라
“[사랑은] … 성내지 아니하며” (고전 13:5)
성경은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는 “사랑은 결코 화를 내지 않는다.”라는 말이 아니다. 사실 때때로 사랑의 행위에는 화가 나는 것도 포함된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집인 성전이 시장처럼 된 것을 보시고 화를 내셨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 사람에게 화가 날 수 있다. 그 분노는 의롭게 보일 때도 있고 이기적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보통은 우리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가장 화 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물학적 구성에 화를 내는 능력을 넣으셨다. 화가 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것이 파괴적인 행위로 자신을 몰고 가도록 허락하는 것이 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도 분노하신다고 말한다.
화가 나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을 조절하는 법은 배울 수 있다. 분노를 다스리기로 결단하면 그것은 ‘의무’라기보다는 ‘자산’이 될 것이다. 즉 “그게 바로 나야. 화가 나는데 어떡해? 난 화를 참을 수 없어.”라고 하는 것처럼 분노에 대해 변명하고 정당화하는 것을 그치게 된다.
분노는 통제될 수 있다. 당신은 누군가와 말다툼이 시작되어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 바로 그 때 전화벨이 울렸던 경험이 있는가? 자신이 화를 얼마나 빨리 다스릴 수 있는지 보라! 당신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분노를 훨씬 잘 통제할 수 있다. 화를 다스리기로 결단하라.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라. “저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화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인 성전이 시장처럼 된 것을 보시고 화를 내셨지만, 예수님을 ‘화 내는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는 “그게 바로 나야. 화가 나는데 어떡해? 난 화를 참을 수 없어.”라는 주장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 당신이 마지막으로 버럭 화를 낸 때는 언제인가? 오늘의 교훈을 참고로 앞으로는 그 화를 다르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분노의 대가를 기억하라
“어리석은 자는 성급하게 굴고 신중한 사람은 오래 참는다.” (잠 14:17, 공동번역)
성경은 통제되지 않은 분노에는 늘 가격표가 붙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다음 구절과 연관 지어 확인해보라.
  •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잠 15:18)
  •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잠 29:22)
  • “어리석은 자는 성급하게 굴고 신중한 사람은 오래 참는다.” (잠 14:17, 공동번역)
성경은 말한다. “자기 가족을 괴롭히는 사람은 얻는 것이 없으며 미련한 자는 지혜로운 사람의 종이 될 것이다.” (잠 11:29, 현대인의 성경)
화를 참지 못할 때마다 우리는 지는 것이다. 번번히 분통을 터뜨리면 될 일도 안 된다. 영어에서 위험(danger)은 분노(anger) 앞에 d만 더 붙인 것이다. 분노는 위험하다. 분노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명성, 배우자, 직장, 건강까지.
몇 년 전에 읽은 인간 심장에 대한 의학 연구에 따르면, 삶 속에서 적의나 반감을 줄이면 수명이 연장된다고 한다. 부모들이여, 기억하라. 우리는 분노를 통해 아이들에게 자극을 줌으로써 단기적인 이득(자녀가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지게 될 것이다. 분노는 늘 스스로 소외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분노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보다는 쫓아내기 마련이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대신, 분노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의 필요에 대해 냉담하고 당신에 대해 화가 나게 만든다.
분노를 다스리는 법 중 하나는 그것 때문에 당신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과거에 분노는 당신의 의사 결정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 과거에 당신은 분노 때문에 인간 관계에서 어떤 대가를 치렀는가? 현재의 인간 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분노 - 반응하기 전에 생각하라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잠 29:11)
화가 났을 때, 충동적으로 반응하지 마라. ‘참음’은 화를 통제하는 데 훌륭한 도구이다. 이는 무한정 참으라거나 심지어 하루를 넘기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도 화가 난 상태로 잠자리에 들지 말라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참음’은 5분이다.
화가 나기 시작하면, 몇 분 동안 ‘타임 아웃’ 시간을 가지라. 잠시 상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이다. 잠시 멈춰 생각하지 않으면 잘못된 행동을 하기 쉽다. 반응하기 전에 심사 숙고해야 한다.
화가 나면 뒤로 물러서서 잠시 시간을 가지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성경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분노를 억제한다고 한 말에 주목하라. (잠 29:11) 이것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지혜로운 사람은 잠시 멈춰서 열을 식힌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선언문을 쓴 토머스 제퍼슨은 이렇게 말했다. “화가 났다면, 입을 열기 전에 열을 세라. 화가 많이 났다면 일부터 백까지 세라.”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화가 나는 이유를 이해하면 더 잘 인내할 수 있고, 심지어는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게 된다. (잠 19:11) 다음과 같이 자신이 화가 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질문 세 가지를 던져보라.
  • 나는 왜 화가 나는가?
  •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 그것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분노를 적절히 표출하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엡 4:26a)
화를 푸는 데는 유익한 방법도 있고 해로운 방법도 있다. 예를 들어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분노를 인정하기보다 화가 난 상태에 머물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화가 났는데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죄이다.
분노가 꼭 잘못된 것은 아님을 명심하라. 분노는 그것을 부적절하거나 파괴적인 방식으로 표출했을 때만 잘못된 것이다. 목사로서 내 경험에 의하면, 우리 중 대부분은 두세 살 때 분노를 표현하는 법을 배웠으며,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분노를 표현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지금은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얻고자 했던 목표가 화를 내기 전보다 더 멀어지게 되는 방식으로 분노를 표현한다. 부적절하게 표현된 분노는 의도한 것과 정반대인 결과를 낳는다. 사람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면 변화를 지속시킬 수 없다. 더 많은 분노와 소외만 초래할 뿐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한다.
분노는 결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분노는 다음 세 가지 중 하나의 증상이다. 상처, 두려움, 또는 좌절. 이 세 가지 때문에 우리는 화가 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잠시 멈춰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분노의 근원을 이해하면 적절한 방식으로 반응하고, 결과적으로 분노로 인해 “죄를 짓지” 않게 된다. (엡 4:26) 잠시 멈춰 마음을 가라앉힐 때, 스스로에게 다음의 질문을 던져보라.
  • 내가 상처를 받았는가?
  •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가?
  • 내가 위협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뭔가 귀중한 것을 잃고 있는 것 같은가?
  • 내가 좌절했는가?

분노 - 마음을 새롭게 다지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 (롬 12:2a)
행동하는 방식은 느끼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느끼는 방식은 생각하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행동 방식을 바꾸고 싶으면 사고 방식을 먼저 바꿔야 한다. 분노의 부적절한 관리가 습관화되어(툴툴대기, 울분 터뜨리기, 비난하기 등) 이를 바꾸고 싶다면, 먼저 정신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
가족상담가인 개리 스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라고 제안한다. “나는 화를 내는 것을 즐기는가?” “화를 내면 내가 의도했던 결과가 나타나는가?” “동일한 결과를 좀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얻을 순 없을까?” “나는 어떻게 달라질까?”
스몰리는 자신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 답을 적고 6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총 26번이 될 것이다) 큰 소리로 자신에게 읽어주라고 말한다. 또한 다른 사람 앞에서도 읽어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는 게 일이 많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이 습관을 바꾸는 것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분노를 통제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는가?
나는 자신에게 쓰는 편지에 성경 말씀을 인용하기를 제안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생각을 채우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게 될 것이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사실 분노하는 이들은 불안정한 사람들이다. 불안정할수록 더 많은 것들에 화가 나기 마련이다. 불안정할수록 더 예민해지고 더 짜증이 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얼마나 안전하고, 당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할 때, 당신은 화가 덜 나게 될 것이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에베소서 1장과 로마서 8장을 읽어보라.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분 안에서 얼마나 안전한지 가르쳐줌으로써 분노를 방지하는 성경 말씀들이다.


Friday, July 12, 2013

청년부 예배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 목회와 신학

<목회와신학>은 4월호 “예배”를 주제로 특집을 마련하면서 현재 한국 교회의 청년부 예배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살펴봤다. 
이를 위해 경배와 찬양 중심의 예배를 드리는 높은뜻푸른교회와 전통적인 형식 안에서 경건주의적 예배를 지향하는 100주년기념교회의 청년부 담당 목회자들을 만나 좌담을 가졌다. 정한조 목사(100주년기념교회)와 박용규 목사(높은뜻푸른교회)가 수고해주셨다. 


일시 3월 13일 화요일 오후 2시 
장소 높은뜻푸른교회
진행 정리 김문석 객원기자
사진 정화영 기자 

청년부 예배는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는지요. 
박용규 
높은뜻푸른교회는 주일 마지막 대예배인 3부를 대학청년부 예배로 드립니다. 저희는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찬양의 요소를 중시하는 예배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찬양을 통해 청년들이 예배에 보다 깊이 참여하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실제로 찬양은 신앙 고백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예배자의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하게 됩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분께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하지요. 
높은뜻푸른교회의 예배 순서는 비교적 간소합니다. ‘예배 부름-찬송-대표기도-찬양-광고 및 환영-성경 봉독-설교-봉헌-파송 찬양-축도’로 구성돼 있습니다. 예배가 시작될 때와 설교 전후에 찬양을 드리는데, 성가대 대신 찬양팀이 회중과 함께 찬양예배를 드리는 형식입니다. 찬양은 교인들이 예배를 준비하고 설교 말씀을 들으며 결단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또 예배의 각 순서를 하나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주기도 합니다. 
예배를 찬양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찬양 인도자 못지않게 예배 인도자와 설교자의 역할도 강조하면서 예배의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한조
저는 외국에서 목회를 하다가 100주년기념교회에 부임한 후 청년부 예배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고심했습니다. 여러 교회의 청년부 모임과 집회를 탐방하던 중 청년 중심의 찬양집회가 예전보다 많이 약화된 것을 알게 됐어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찬양 중심의 모임이 어떤 한계를 지녔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초래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100주년 기념교회를 찾는 청년들이 대예배 분위기처럼 말씀 중심으로 경건하게 드리는 예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한편 저희 교회는 청년부 예배를 따로 두지 않고 주일예배 5부에 청년들을 오게 합니다. 처음엔 그 예배의 설교를 청년부 교역자가 담당했는데 교인 전체가 동일한 하나의 말씀을 듣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현재는 담임목사님이 다른 대예배와 똑같은 설교를 하십니다. 
저희가 청년부 예배를 대예배와 구분하여 따로 드리지 않는 이유는 예배의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본질은 예배자의 자기 부인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지요. 저희는 이런 관점에서 예배의 형식(form)을 중요시합니다. 물론 형식 자체가 제사적인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건 아닙니다만 형식이 자유로운 예배에서는 예배자의 신앙적, 기질적 개성이 크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형식이 강조된 예배는 자기 부인으로 한 발 다가가게 합니다. 
청년들이 주로 모이는 5부 예배는 다른 대예배와 마찬가지로 ‘부름의 말씀-송영-주님의 기도-찬송-성시교독-신앙고백-송영-찬송-기도-송영-교회 소식-찬송-성경 봉독-찬양-말씀 선포-기도-찬송-예물 봉헌-봉헌기도-인사-찬송-축도-송영’ 순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 청년들이 순번에 따라 예배의 일부분을 담당합니다. 

<목회와신학>과 한국예배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예배” 콘퍼런스에서 안선희 교수(이화여대 기독교학부)는 한국 교회의 청년부 예배가 친대중문화적인 방향으로 치우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예배에서 찬양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예배가 지닌 다른 가치들이 약화됐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정한조 
한번은 어느 청년 집회에 설교를 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요, 찬양 인도자가 설교 전에 청년들을 세워놓고 1시간 동안이나 찬양을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어요. 찬양 인도자가 자신의 역할을 넘어선 것입니다. 
대부분 청년집회를 가보면 찬양이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또 찬양은 강하게 몰입되는 성격이 있는지라, 찬양을 부르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에너지를 소모했는지 자각하지 못합니다. 자신만의 리듬을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결국 그들은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상당 부분 소진해버려서 정작 설교 시간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찬양 중심의 예배를 드리려면 찬양 인도자와 설교자 간의 조율과 협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령 설교 전후에 찬양 시간을 얼마만큼 할애할 것인지를 서로 잘 합의해야겠지요. 
저는 받은 말씀을 토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보다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00주년기념교회 5부 예배는 청년들이 주축을 이루기 때문에 ‘경배와 찬양’ 형식까지는 아니지만 예배가 시작되기 전 20분간 찬양팀을 중심으로 함께 찬양합니다. 하지만 찬양 인도자는 찬양을 유도하는 행동이나 멘트를 하지 않습니다. 준비해온 찬양이 끝나면 자리에 들어가지요. 이후 10분간 오르간 연주가 흐르는 가운데 회중은 침묵으로 기도하며 예배를 준비합니다. 이처럼 찬양 인도자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이유는, 찬양이란 본래 예배자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끌어주는 것인데 찬양 인도자가 도중에 메시지를 전하면 오히려 예배의 흐름이 끊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회중이 찬양을 통해 가사를 묵상하며 기도하도록 돕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용규 
전반적으로 정 목사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은 건, 경배와 찬양 예배를 한 가지 양식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찬양예배에는 여러 형태가 있으니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희 교회 청년부는 예배 인도자와 찬양 인도자와 설교자의 역할 비중이 비슷하고 특히 전체적인 예배 조율은 예배 인도자가 합니다. 
한편 찬양 인도자는 청중과 교감하면서 자신의 의욕대로 찬양을 인도하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또 회중에게 일어나라거나 가사의 특정 부분을 따라해보라는 식의 인위적 요구도 삼가합니다. 정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인도자의 생각이 아니라 찬양에 담긴 가사 자체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찬양 인도는 청중과 지속적으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높은뜻푸른교회는 가급적 최신 CCM보다 청년들이 거의 알고 있는 찬양 위주로 선곡합니다. 조용한 묵상 찬양을 하기도 하고 활기찬 찬양을 하기도 하는데 분위기야 어찌되었건 대체로 “경배”를 주제로 한 찬양이 주를 이루지요. 찬양 예배는 콘서트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이기 때문입니다. 
열정적인 찬양이 자칫 에너지를 소모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찬양의 강도보다는 예배자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고 반응하는지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청년 예배는 문화적 친숙성을 바탕으로 열린 예배의 성격을 띠기도 합니다. 두 분은 예배를 통해 잠재적 복음 대상자들과의 문화적 접촉점을 마련하고 계신가요? 

정한조 
저는 ‘교회가 불신자와의 접촉점을 마련하기 위해 청년들의 성향에 맞춰 문화적 요소를 예배에 적용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의구심을 갖습니다. 일단 예배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이뤄지는 예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신자에게 친숙한 환경을 만들어 그들을 초청하는 예배도 의미가 있겠지만 예배의 본질을 지키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는 기존 신자에게도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저희 교회에서는 성시교독이나 성경봉독, 찬송 시간에 빔프로젝트를 사용하여 자막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각자 자신의 성경과 찬송가를 사용하게 합니다. 예배에 임하는 태도 역시 중요한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100주년기념교회는 청년 위주의 예배라고 해서 특별히 문화적 접근을 하고 있지는 않아요. 불신자나 새신자에게 비록 친숙하지 않은 예배일지라도 하나님은 그 예배를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불신자들은 오히려 세상과 완전히 다른 예배와 공동체 문화 속에서 더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100주년기념교회가 불신자들에 대한 복음적인 접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 외 행사에서는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문화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요. 가령 ‘가족 초대의 밤’을 마련해 믿지 않는 가족들을 교회로 초청하거나 ‘구역’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불신자들을 초청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박용규 
저희 교회 역시 예배에 특별히 문화적 접촉점을 마련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찬양 중심의 예배가 문화적 친근성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공동체 예배의 한 스타일인 것이지요. 다만 찬양 중심의 예배이다 보니 아무래도 처음 교회를 방문한 청년들이 예배를 딱딱하게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낯설게는 느껴질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문화적 공연과 사뭇 다른 분위기일 테니까요. 
따라서 정 목사님의 말씀처럼 기독교 예배는 형태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위한 예배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찬양예배 역시 하나님을 경배하고 말씀을 듣는 거룩한 ‘의식’으로서 그 의미를 갖는 것이고요. 

칼뱅은 예배의 중요한 요소로 ‘말씀선포, 성례, 공중기도, 교제’를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는 설교를 강조하다보니 예전적 전통이 상대적으로 약화됐습니다. 청년부 예배 안에 예전적 전통의 요소들이 있는지요? 

정한조 
100주년기념교회는 말씀 중심의 예배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예전 중심의 예배 형식은 아니지만 개신교 전통에서 말하는 필수 요소가 예배의 순서에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와 더불어 예배 형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절기도 중요하게 지킵니다. 저희 교회는 현재 주일 설교를 사도행전 강해로 진행하고 있는데요, 절기 때는 설교자가 강해 본문을 절기와 연관시켜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외에도 절기에 맞는 색을 현판이나 강단의 천으로 표시하고 교인들에게 절기 색에 맞는 복장을 갖추도록 권면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사순절 기간에 남성들은 예전색인 보라색으로 넥타이를 착용합니다. 교인들의 참여도가 높은 편입니다. 성례전의 경우 저희 교회는 주요 절기나 세례식 때 성찬식을 갖는데요, 공간이 협소하여 성례전을 자주 실시하지 못하는 게 아쉬운 부분입니다. 

박용규 
높은뜻푸른교회는 분립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예배 장소로 학교 강당을 사용하고 있어 전통적인 예전을 도입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교회는 예배에서 ‘말씀선포와 기도, 교제’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절기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절기 설교를 하고 절기에 맞춰 강대상을 장식하기도 합니다. 성찬식 예배는 주요 절기에 시행되고 있습니다. 

청년부에 대한 목회적 계획이 있으신가요?

정한조 
최근 청년들의 만혼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40세가 넘은 미혼 청년들, 이혼한 청년들이 신앙생활을 할 적절한 공동체가 없어요. 예배도 중요하지만 공동체 부분도 교회가 신경 써야 할 부분입니다. 이들이 교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공동체를 확대해가는 것이 현재의 고민이자 앞으로의 계획입니다.

박용규 
저희 교회도 만혼의 청년들을 위해 푸른다리 공동체를 만들고 갓 결혼한 교인들을 위해 젊은부부반을 운영하는 중입니다. 대학청년부를 보면 부원들의 연령이 천차만별입니다. 
저는 이들을 하나의 예배 안으로 묶어줄 수 있는 것이 찬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년들뿐 아니라 여러 세대가 찬양을 통해 예배의 기쁨을 경험하기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높은뜻푸른교회는 청년예배뿐 아니라 대예배에서도 장년들에게 맞는 찬양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찬양을 위한 예배가 아니라 예배를 위한 찬양입니다. 대학청년부의 예배 인도자와 찬양 인도자, 설교자 그리고 교인들 역시 각자의 위치에서 건강한 예배를 만들어가기 위해 함께 노력할 것입니다.

Tuesday, July 9, 2013

리더십 네트워크 640호 -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국제제자훈련원)

리더십 네트워크 640호 -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국제제자훈련원)

2013년 한국 기독교, 어디로 가야 하나?
미래를 선도하고 싶다면 지금부터 준비하라!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과 우려가 안팎으로 높아져 있는 상태에서 이에 대한 원인과 개선 방향을 통계자료에 의거하여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한국 교회와 교인에 대한 신뢰 또는 비신뢰의 정도와 그 원인, 그리고 제고를 위한 방안을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대략적 추측에서 오는 판단 오류와 개인적 신념에 근거한 주관적 주장의 문제점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기독교인(1,000명), 기독교인(1,000명), 목회자(500명), 크리스천 여론 선도층(20명) 심층면접조사로 구성된 이 책은 한국 기독교의 현황과 평가, 문제의 진단 등에 있어 보다 입체적이며 심층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며 또한 비기독교인과 기독교인의 의식과 행동에 대한 보다 신뢰성 있는 비교, 분석이 가능하며 500명에 달하는 목회자의 면접조사 자료를 이용하여 이를 일반 성도의 자료와 비교 연구를 통하여 목회자의 눈높이를 높여줄 지침서가 될 것입니다.
1. 기독교는 상업적이라 믿을 생각이 없다

“종교를 믿을 의사는 있으나 기독교로 개종할 의향이 없다”라고 응답한 응답자들에게 그 이유를 물은 결과, ‘상업적이라서’19.5%, ‘믿음이 안 가서/신뢰도가 떨어져서’12.2%, ‘자기중심적이라서’11.3%,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모습이 싫어서’8.1% 의 순으로 설문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는 한국교회가 불신자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에 대한 적나라한 모습일 것입니다. 종교는 가지고 싶으나 기독교로 개종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개교회주의, 물량주의, 상업주의에 빠져서 거대한 몸뚱아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으로 비춰진 것에 대하여 백번 양보해도 목회자들의 잘못이 없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영광을 목회자들이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생각해볼 때입니다.
2. 전도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최근 1년 내 전도한 경험이 있는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최근 전도한 대상이 누구인지 물어본 결과, ‘이웃/친척’이 47.2%로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다음은 ‘친구/선배’42.6% 순이었습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가족간의 전도, 노방전도, 공공장소에서의 전도는 크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또한 불신자를 대상으로 “기독교인으로부터 전도를 받았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91.5%는 ‘귀찮다’,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부담스럽다’, ‘거부감이 든다’, ‘짜증스럽다’등 부정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답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이는 더 이상 노방전도와 공공장소에서의 전도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절대로 변해서는 안되지만, 방법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 시대가 요구하고 원하는 방식의 전도가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게 됩니다. 아직도 2,30년 전의 전도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지는 않은지 불신자들의 표정과 반응에 대하여 둔감하게 반응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때입니다.
3. 하나님 앞에 ‘목회자’가 아닌 ‘나’ 란 존재를 세우다 

매주일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며, 무엇이 삶의 진리인지를 강구하고 설교하는 목회자들의 딜레마는 무엇인가? ‘내가 과연 삶과 신앙이 일치하는가?’에 대한 정답이 아닌 솔직한 자신의 고백을 들어보았습니다.

목회자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에서는 삶과 신앙의 일치정도를 물어본 결과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편’이라고 응답한 경우는 2.6%에 불과한 반면, 97.4%는 ‘일치하지 않는 편’이라고 답했습니다.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 각각에서 ‘매우 일치 한다’고 응답한 경우가 0.0%가 나왔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부끄러울 것이 없는 종으로 살겠다 고백하던 목회자들의 눈물나는 고백입니다. 왜 한국교회가 이지경이 되었는지를 한탄하며 몇몇의 좀더 큰 잘못을 한 목회자들을 정죄하기 급급했던 목회자에게 비수를 꽂는 설문의 결과입니다. ‘목회자’가 아닌 ‘당신’ 이라는 존재를 하나님 앞에 세울 때 ‘당신’은 뭐라 말하겠습니까?
4. 교회를 교회되게, 목회자를 목회자답게, 교인을 교인답게

한국 교회는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교회, 목회자, 교인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매우 낮을 뿐만 아니라, 과거보다 더욱 낮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 미래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며 이러한 낮은 신뢰도는 결국 한국 교회가 영성을 잃으며 세속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덕성을 잃고 있다는 현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성장을 멈추었고 쇠퇴의 징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종교로부터 멀어지고 있고 낮은 출산율로 인해 장차 교회를 이끌어갈 젊거나 어린 세대가 감소되고 있는 것과 같은 불가피한 요인도 있지만, 기독교 발전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결국 점차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목회자는 목회자답지 못하며, 교인이 교인답지 못하다고 하는 인식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너무 자만했고, 너무 과신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업적에 대해 자화자찬했고, 교만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성공 신화에 빠져서 교회가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으며, 교세가 기울어져 가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일이 생겨나고 있는 것일까?’, ‘한국 기독교의 문제는 무엇인가?’, ‘어떻게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라는 질문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보다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한국교회의 실상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설문을 통한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변화를 살펴보고 한국 기독교의 현실, 교인들의 신앙 실태와 의식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 교회의 내일은 과거 부흥의 추억에서 깨어나서 오늘의 문제적인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내적인 갱신의 노력을 얼마나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신자와, 불신자, 목회자와 크리스천 전문 오피니언들의 솔직한 의식조사를 통하여 알게 되는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에 대한 변화 추이는 교회가 교회답게, 목회자가 목회자답게, 교인을 교인답게 인도하는 촉매제가 될 것입니다.
※ 이 글은 ‘한국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이 ‘한국 갤럽’에 의뢰해 지난 1998년과 2004년에 발표한 ‘크리스천의 교회 활동과 신앙생활 분석’의 연장선상에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하여 2013년에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생활에 관한 총체적 분석 보고서의 내용중 발췌한 것입니다.

Thursday, July 4, 2013

José Mourinho writes a patriotic letter to Portuguese players

José Mourinho writes a patriotic letter to Portuguese players



I thought this an interesting perspective about national teams in a day full with qualifiers. Also helps to see the motivational genious Mourinho is and has always been. 


"I have been Portuguese for 47 years and a football manager for 10. Therefore, I am more Portuguese than a manager. Having said that, to make things clear, let’s go straight to the point.

National Teams are not spaces for personal glory, but rather for the glory of a country and, because of this, they should be spaces of deep collective emotion, empathy, and union. Here, with national teams, players are not simply professional footballers – above all, they are common Portuguesewho, because they play better than the Portuguese who are bankers, taxi drivers, politicians, fishermen, or farmers, have been selected to fight for Portugal. And when these chosen ones with a God-given talent get together to play for Portugal, they should do so with one thought on their minds – that they are not simply professional footballers (like those who play in clubs) but, moreover, they are common Portuguese who will do what others cannot do, that is, defend Portugal, its self-esteem, and its joy.  

Obviously, there are matters in Portuguese society that are incomparably much more important than football, than a win or a loss, than qualifying or not for a Euro or a World Cup. But the Portuguese who are going to play for Portugal – I repeat, I do not like to call them footballers – must know where they are going, what they are they going to do, why they are going, and what is expected from them.

For that reason, when the Portuguese Football Federation contacted me in order to become the National Team’s manager, what I felt, in my home, was pride; what I remembered were the hundredths and hundredths of people who, when I’m holidaying, approach to tell me how much they wish me to take this position. It took me, for the first time in my professional life, to make a decision based on emotion rather than rationality – leaving, albeit temporarily, a career plan that has taken me to where I am today.

Pardon my language, but the truth is my thoughts were – screw the negative consequences and the criticisms if I don’t win; screw the fact that I won’t have the time to train and implement the football that has taken me to success; for Portugal, I’ll go!

And this is what I wish to say to those chosen to play for Portugal: with the national team, you don’t display your prestige; you don’t go there for rewards; those who are there must only give – give theirhearts and souls, with no individualities or individualisms. With the national team, there are Portuguese who win or lose, but with their heads up; there is no resentment for sitting on the bench; there must only be room for pride and a positive attitude.

For a couple of days I felt and thought like Portugal’s manager. And I enjoyed it. But I must recognise that Real Madrid is a giant institution, who “bought” me from Inter, who pays me, and who cannot take risks with its associates and fans. Allowing their manager to leave, even if only for a few days, his working environment and to split his focus and his capacities would be unthinkable.

I believe, therefore, that the feedback coming from Madrid arrived to the Federation, causing the meeting between the two to be canceled and the request for my collaboration not to be made official. Much to my sadness and that of President Gilberto Madaíl.

Looking back, I emphasise, however, that such a decision is and was easy to understand. I am at the helm of a giant ship, which I cannot and should not leave for a second. Real made the right decision.

I was disappointed that I was not able to help the National Team, but at the same time I have the clear tranquility of someone who understands that in my hands I have one of the most prestigious jobs in the world of football.

Now, Portugal has a new manager and he should be looked upon by everyone as “our manager” and “the best”, until the day he stops being “our manager”. This strikes me as an exemplar motto: mine is the best! Well, if our manager is Paulo Bento, than Paulo Bento is the best.

As a Portuguese, from Paulo I expect independence, decision skills, organisation, work on support structures, strong mobilisation, and naturally, coherence in the construction of a team model that adapts to the characteristics of the Portuguese that are available to him. Honestly, I think Paulo has the conditions to achieve all of this and for that he will always have my support. If he wins, I, as a Portuguese, will win; if he loses, I, as a Portuguese, will lose. But I also want to win.

In the last meeting of the Champions League managers, when asked about the power of club managers or their loss of powers in this new football world, Sir Alex Ferguson said – and no one has more authority to say it! – that the power and leadership of managers depends on their personalities, but also relies very much on the structures that surround them. Clubs and presidents either weaken or solidify managers.

I send over these wise words for the National Team: everyone in this country should make the National Team’s manager a strong and protected man. And when I say everyone, I mean association, federation, and club leaders, capped and non-capped players, people who work in the media, and finally taxi drivers, politicians, fishermen, policemen, factory-workers, etc. We all must stand together and win. And if we don’t win, let us do it with honour.

But, I repeat, there are things in this country that are more important than football. Incomparably so… unfortunately.

I take this opportunity to wish every Portuguese manager – those who are in Portugal and the numerous ones who now work in so many countries in different continents – a season poor in sadness and rich in joys.

To Xico Silveira Ramos I manifest my confidence in his position as President of the National Football Managers Association.

Best regards to all, 

 

José Mourinho"




(Translated at the request of several members. Forgive my elementar English. Original text in Portuguese is here) 

한 날 묵상 - 막 4:21-25 <등경위의 등불은 비추는 역할 뿐 아니라 작은 티 도 크게 보이기에 늘 스스로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1. 연예인들이나 우리가 공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두 가지 마음이 듭니다.

2. 첫째는 부럽다. 진짜 부럽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게 무슨 부러운 것이냐?'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저는 성격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기에 그들의 주장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제 생각에는 많은 사람들에 인정받고 늘 관심이 대상이 되는 것은 생각해 보면 기쁜 일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3. 그런데 두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그들은 공인이라는 사실에 그들의 조그만한 실수나 잘못도 많은 사람들의 눈에 크게 비춘다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공인들에게도 마태복음 7장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비판하지 말라"를 적용하는 것은 성급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보면,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4. 왜 성급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게 되냐하면, 오늘 본 마가복음 4장 21-25절 말씀에 위의 마태복음 7장 비판하지 말라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5. 등경위의 등불은 깨끗해야 합니다. 그래야 빛을 멀리 밝게 비출 수 있습니다. 조그마한 티나 잘못이 있으면 멀리도 비출 수 없을 뿐 아니라, 밝게도 비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6. 공인은 공인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인정하지 않았을 지라도 자신이 첫번째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롤 모델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두번째로 살펴본 자신의 잘못이 일반 사람들보다 더 엄격한 것에 대해서 인정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7.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 구별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보실 때 세상의 공인으로 보십니다. 세상에 믿음의 사람으로 특별히 구별된 사람으로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8. 이는 우리에게 위의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9. 우리에게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과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10. 그러나 한편으로 티나 잘못에 대해 더 엄격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괜찬ㅅ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누릴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한 하나님 나라의 공인이기 때문입니다. 

11. 그래서 오늘 본문은 "등경위의 등불"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2. 21절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리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드려 함이냐"

13.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볼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아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야 합니다. 가끔 보면 세상에서 볼 때 저 사람이 과연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가는 사람을 볼 때가 있습니다.

14. 우리는 세상을 밝게 비추는 등불로서 등경위에 있서야 합니다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야 합니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라)

15.  우리가 의식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경고를 하십니다. 

16. 22절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17. 스스로 감추거나 드러내려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니다.

18.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19. 드러난 삶을 사십시요. 아니 드러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23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예수님의 말씀은 엄격하시면서 정확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20. 더불어 듣는자는 스스로 늘 조심해야 합니다. 24절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들었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21. 24절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2. 우리의 비춤으로 세상의 어둠은 밝게 비추게 됩니다. 빛이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어두움은 물러가게 됩니다. 빛이 많은 많을 수록 어두움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듭니다. 

23. 그런데, 어두움이 물러 가면서 쉽게 물러가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빛의 밝기를 줄이거나 완전히 끄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24절 "더 받으리니"라는 말씀처럼 더 엄격하고 아주 작은 티라도 더 크게 하려고 합니다. 

24. 우리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더 헤아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5. 더 헤아림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두려워 때로는 등불의 역할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등불은 반드시 등경위에 있어야 합니다.

25. 이게 바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소명이자, 짐어져야 할 십자가이며, 가야 할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입니다. 

26. 우리가 가는 이 길은 자신에게 큰 기쁨이자 유익입니다. 25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27. 오늘도 어떻게 하루를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28. 등불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등경위에 있어야 합니다.

29. 이 자리는 은혜이며 기쁨이자 떄로는 고난의 자리입니다. 

30. 십자가의 길이 그렇습니다. 영광의 길이자 고난의 길입니다. 영광만 취할 수 없고, 고난만이 있는 것이 아니빈다. 십자가의 길은 영광이자 고난입니다. 

31. 오늘 하루도 등경위에 있는 등불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그 길이 영광의 길임을 기억하고 걸어갑시다. 걸어갈 때 고난이 오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32.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사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33. 한 날 등경위의 등불로 세상의 어두운 곳을 밝게 비추어 어두움이 물러가는 은혜가 있는 십자가의 흔적의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34.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