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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ugust 28, 2013

하나님은 나를 지금도 보고 계실까? 어떻게 인도하실까?

요즘 밤만되면 걱정입니다.
잠이 도통 오지않아서 걱정입니다. 

늘 내 마음 속에서 가득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계실까?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보고 계실까?

대답은 늘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보고 계시고, 함께 하십니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어둠 깜깜합니다.
단 어느 것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밤이 되면 온 사면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제 마음의 온 사각은 그야말로 칠흑같은 어두움입니다.

마음이 답답하여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근심, 걱정이 한 가득이니 편히 잠을 잘 수 없겠지요...

그래도 늘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이렇게 일으켜 세워 주는 힘은 무엇일까요?
사실 하나님은 함께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전혀 보이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나를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왜나하면, 말씀이 그렇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내가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도 가정예배시간에 말씀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딱 그렇네요. 
"주의 말씀을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편 105절

말씀이 나를 살립니다. 
말씀이 나를 답답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말씀이 나에게 단잠을 줍니다. 

요즘 시편의 말씀이 참으로 마음에 와 닿습니다.
꼭 내 이야기를 하는 듯 합니다. 

말씀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똑같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더 가까이 해야 할 듯 합니다.
말씀은 사람과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들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힘이 있나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인간의 이야기이며, 바로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주신 분께 감사해야겠습니다.
말씀을 기록한 분께도 감사해겠습니다.
말씀을 전해 준 분께도 감사해야겠습니다. 

오늘 말씀이 주는 위로를 충만이 누리는 밤입니다.

2013년 8월 27일 늦은 밤을 보내면서 적어드랬습니다. 


Wednesday, June 19, 2013

내 마음의 밥상 - 시편 120편 2절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

내 마음의 밥상 - 시편 120편 2절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 

2절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주소서"

속이거나 이용하거나 교묘하게 말을 바뀌거나 
한두마디 확실치 않는 것을 
더 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진실만을 말할 수 있는 담대함이 있으면 좋겠다

거짓은 아니나 자신에게 불리한 말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말이 제 3자를 힘들게 만든다.

1. 항상 정직과 진실함을 갖는 담대함을 갖게 하소서
2. 나를 힘들게 어렵게 하는 거짓 입술과 속이는 혀로 부터 나를 지켜주소서
3. 거짓 입술과 속이는 혀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옵소서
4.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만이 세워지는 은혜 있게 하옵소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77045

'통계조작' 이명박정부, 어떻게 국민을 속였나?

지니계수·물가·인구추계 통계 조작 의혹... 국민들만 불쌍
6월 18일자 <한겨레> 1면과 4, 5면에서 전한 이명박정부의 통계 조작 행위는 국정원 선거 개입에 이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부가 정권 유지를 위해 통계까지 조작하고 발표시점까지 바꾸는 것은 국민을 속였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국기문란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는 일의 특성상 나는 각종 통계를 매우 많이 들여다보는데 그동안 분배지표를 들여다보면서 가졌던 '통계조작' 의구심이 그냥 심증만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소득 분배의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표인 지니계수가 노무현정부 때까지 계속 높아졌는데 경제위기가 시작된 이명박정부 들어 오히려 더 낮아지는 것으로 통계를 조작했다. 그런데도 이런 통계조작을 통해 이명박정부는 '노무현정부 때 악화된 소득격차를 개선했다'고 홍보한 것이다. 현실을 바꾼 게 아니라 통계를 조작해 사람들 인식을 조작하려 한 것이다. 이는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범죄행위다.

더구나 <한겨레> 보도를 보면 상대적으로 조금 더 현실에 가깝게 작성된 지니계수 지표가 포함된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의도적으로 대선 직후에 공표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말 이것이야말로 국민들을 우롱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통계는 정확한 현실 진단과 대책을 내놓기 위해 꼭 필요한 국가 운영의 필수 인프라다. 통계가 왜곡되거나 부실하면 국가 운영에 큰 문제가 생기고 결국 국민 다수에게 피해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이명박정부가 '고성장 기조'를 합리화하기 위해 했던 것처럼 보험료나 금반지 같은 것들을 물가개편 작업 때 넣지 않으면 물가 상승률이 실제보다 낮아진다. 실제로 2011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간 4.0%로, 한은의 물가통제 목표 상한선을 찍은 수치였다.

만약 이전 물가 체계를 그대로 가져갔더라면 그 수치는 4.4%로, 많은 언론과 국민들의 더 많은 분노를 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물가통계를 실제보다 낮게 나오도록 '마사지'하면 한은이 저금리 정책을 지속할 수 있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그 경우 실제 소비자물가 상승세는 계속 지속돼 대다수 일반가계에는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물가통계 '마사지', 저금리 정책 배경으로

기사 관련 사진
▲  이명박 전 대통령
ⓒ 유성호
사실 이밖에도 통계조작 의혹이 드는 건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향후 인구추계 통계라고 할 수 있다. 통계청은 2011년 새로운 인구추계 결과를 내놓으면서 갑자기 인구감소 추정 시기를 2018년에서 2030년으로 변경했다. 갑자기 무슨 사회경제적 큰 변화 발생한 것도 아닌데 12년이나 인구감소 추정 시기를 늦춘 것이다.

인구감소 추정 시기를 늦춰잡은 가정 몇 가지를 보니, 2007년 이후 출산력이 가장 높은 30대 전반 여성의 일시적 인구 증가가 향후 수십 년 동안 지속된다거나 이명박정부의 적극적 이민정책으로 인한 국제인구순유입이 지속된다는 식으로 매우 낙관적으로 가정했다.

이미 올 초부터 30대 전반 여성의 인구가 다시 감소세로 돌아서 출산율도 떨어지는 등 그 같은 낙관적 가정이 현실성이 없다는 게 드러났다. 그런데도 이렇게 낙관적 가정이 너무나 당연한 듯이 통계청 추계로 발표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각종 연구와 정책들이 이뤄지니 문제가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인구감소 시기가 늦춰지면 건설업계가 주택 공급을 더 지속해야 하는 명분이 되기도 해 결국 가뜩이나 공급 과잉인 주택시장이 더욱 과포화상태가 되게 만든다. 또한 부동산업계에서는 이를 근거로 인구감소 시기가 늦춰져서 2030년까지는 대세 하락이 안 일어난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억측이길 바라지만 나는 실제로 정부가 통계를 통해 부동산시장을 부양하기 위해 인구감소 시기를 늦추도록 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또한 인구추계가 좀 더 낙관적으로 달라지면 이를 바탕으로 한 국민연금재정추계도 실제보다 낙관적인 결과가 도출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통계 왜곡이 일으키는 문제는 심각하다.

기초통계 왜곡해 보도자료 내놓기도

또한 정부가 기초통계를 입맛대로 왜곡해 보도자료로 내놓는 사례들도 적지 않다. 자신들의 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통계까지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기획재정부가 실효 법인세율 부담 관련 통계를 왜곡한 경우다. 

2012년 들어 <한겨레> 등 상당수 언론이 삼성전자 등 재벌대기업들의 실효 법인세율이 매우 낮다는 보도를 잇따라 내놓자 기획재정부는 2012년 7월 19일 이를 반박하는 보도참고자료를 냈다. 당시 기획재정부는 보도참고자료를 통해 국세통계연보를 이용한 실효법인세율을 거론하면서 중소기업의 실효법인세율이 13.1%로 낮은 반면 대기업의 실효법인세율이 17.7%로 높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보도참고자료에서 기획재정부는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분류 기준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으나, '그림1'을 보면 과세표준 구간별 실효법인세율 변화 추이를 숨긴 채 자의적으로 나눈 중소기업과 대기업 분류를 통해 상황을 호도했다. 기획재정부가 중소기업으로 분류한 대상기업은 상대적으로 실효세율이 낮은 50억 원 이하 기업 23만2837개 기업이었다. 명목세율 10% 적용대상인 과세표준 2억 원 이하가 79.5%를 차지해 실효세율이 낮을 수밖에 없는 대상을 중소기업으로 잡은 것이다.

반면 대기업은 현행 최고세율 22% 적용 대상인 과세표준 200억원 초과 기업으로 잡았다. 언론은 삼성전자 등 극소수 재벌대기업의 실효법인세율 부담이 중견기업보다 오히려 낮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대기업의 범위를 넓게 잡아 사실상 '물타기'를 한 것이다.

기사 관련 사진
▲ <그림1> 이명박정부의 실효법인세율 왜곡 주) 2011년 국세통계연보 및 기획재정부 보도참고료를 바탕으로 선대인경제연구소 작성
ⓒ 선대인

'그림1'에서 볼 수 있듯이 실효법인세율이 '200억 원 이상~500억 원 초과' 구간을 지나면서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실효 법인세율이 오히려 낮아지고 있는 추세를 기획재정부가 감추려고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중소기업과 대기업을 자의적으로 구분해 실효법인세율을 제시하다 보니 '50억 원 초과~100억 원 이하', '100억 원 초과~200억 원 이하' 과표 구간 기업들이 기재부 분류에서는 통째로 빠져버렸다.

엉터리 통계에 코미디 속출... 국민들만 '불쌍'

꼭 통계 조작이나 마사지, 통계 왜곡이 아니더라도 실업률, 물가, 부동산 가격, 미분양 물량, 심지어는 GDP통계까지 현실과 동떨어지거나 부실한 통계들이 국내에는 수두룩하다. 그런 부실 통계들을 바탕으로 국가운영을 하니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제대로 대책을 내놓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통계가 엉터리니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실제로 모두가 체감하듯이 고용난이 매우 심각한데도 일시적으로 베이비부머 은퇴자들의 자영업 일자리가 많아지니 박재완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고용대박'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또 국민은행 주택가격은 3% 밖에 안 떨어졌는데도 4·1종합부동산대책 같은 대대적 부양책을 내놓는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결국 국민들이 불쌍할 뿐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몇 년 전 "일반 국민들이 부동산 호가에 속지 않도록 국토해양부 실거래가를 왜 국민들이 보기 편하게 만들지 않느냐"고 LH공사에 문의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담당자가 "위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라고 답했다. 이것이 과연 국민을 위해 일하는 정부요, 공공기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익히 알다시피 한국은 정보의 생산과 유통, 소비 과정이 기득권에 유리하게 왜곡돼 있다. 정부 정책이나 경제현상을 설명하는 증권사나 정부 산하 연구소, 재벌계 연구소 등은 이해관계나 '상부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광고에 목을 맨 상당수 언론들은 기득권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정보들을 주로 보도한다. 그런데 이 같은 정보 왜곡을 바로잡고 공익에 봉사해야 할 정부부터가 오히려 기초통계를 조작 또는 왜곡하고 있으니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했듯이 통계는 국가운영의 기초 인프라다. 이 인프라를 정권의 입맛에 따라, 또는 일부 정부 부처의 관료적 이해관계에 따라 조작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중대 범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박근혜정부는 정권의 입맛에 맞춰 통계 조작이나 왜곡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가뜩이나 부실한 통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통계 시스템 구축체계를 갖춰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선대인 기자는 선대인경제연구소 소장입니다. 선대인경제연구소는 99%가 1%에 속지 않는 정직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연구소의 연간 구독회원이 되시면 경제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 한편 연구소의 정직한 목소리를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Tuesday, May 28, 2013

시편 119편 - 주의 말씀을 사랑함 "시편 기자의 정다운 고백,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

주의 말씀만을 사랑해도
그 안에 즐거움이 있고,
그 안에 기쁨이 있고,
그 안에 참 평안이 있네요!
시편 119편에 나오는 시편 기자의 고백 "내가 사랑하는 주의 말씀"

(시 119:47)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시 119:48)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시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시 119:113)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시 119:119)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찌꺼기 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사랑하나이다


(시 119:127)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시 119:140)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시 119:159)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시 119:163) 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


(시 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시 119:167) 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Tuesday, May 14, 2013

죄의 고백은 ...

목적을 이끄는 삶을 위한 매일의 묵상

죄의 고백은 몸을 건강하게 해준다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뼈가 녹아 내렸습니다.” (시 32:3, 새번역)
죄를 고백하는 것은 건강에 좋다. 심리학자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이는 양심을 정화시키고 가슴에 응어리진 것을 털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 몸은 그것을 간직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 죄를 내면에 품고 있는 것은 마치 소다 캔을 뚜껑을 닫은 채로 흔드는 것과 같아서, 마침내는 폭발하게 된다.
시 32:3-5에서 다윗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뼈가 녹아 내렸습니다. … 나의 혀가 여름 가뭄에 풀 마르듯 말라 버렸습니다. 드디어 나는 내 죄를 주님께 아뢰며 내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털어놓았습니다. … 주님께서는 나의 죄악을 기꺼이 용서하셨습니다.” (새번역)
다윗이 자신의 죄를 내면으로 들이자, 그것은 신체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당신이 하나님과의 문제, 죄, 쓴 마음 등을 내어놓지 않으면, 당신의 몸이 그것들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의사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지었던 것, 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행했던 것에 대한 죄나 원한을 지우는 방법을 안다면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떠날 것이라고 말한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오늘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당신이 다른 이들에게 범한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구하는 시간을 잠시 가져보라.
  • 그런 다음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원망과 쓴 마음에 대해 기도하라. 이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써 더 나은 건강을 얻을 수 있게 해주시기를 구하라.
죄의 고백은 변화를 이끌어낸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창 32:27)
하나님은 우리의 주목을 끌기 위해 위기를 허락하신다. 그리고 그 위기를 사용하여 우리의 성품을 계발하신다. 우리가 변화되고 있는 신호 중 하나는 우리 자신이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남 탓하기를 그치고 “제가 제 인생의 문제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인생에서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돌파구임을 아신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셨다. 이는 매우 이상한 질문이다. 분명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고대 문화에서는 이름을 늘 그 성격에 따라 짓는다는 것이다. 이름이 그 사람됨을 나타낸다. 이름들은 ‘키 크다’, ‘키 작다’, 또는 ‘용감하다’, ‘게으르다’ 등등이 될 수 있었다. 이름은 그 사람에 대한 꼬리표였다. 그저 듣기 좋게 지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격이 나타나도록 지어졌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야곱’은 ‘사기꾼, 속이는 자, 거짓말쟁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은 그 이름대로 살았다! 야곱이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고백의 행위였다. 그는 “저는 속이는 자입니다.”라고 인정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진정으로 자기 죄와 결점과 잘못과 약점과 성격상의 결함을 인정하고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을 고백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결코 변화할 수 없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당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 당신은 누구에게 당신의 죄나 결점을 인정해야 하는가?

Friday, May 3, 2013

한 날 묵상 - 막2:13-17 <예수님은 누구를 제자로 부르시는가? 은혜입은 자로 알고 부르심을 받은 자임을 아는자들이다>

한 날 묵상 - 막2:13-17 <예수님은 누구를 제자로 부르시는가? 은혜입은 자로 알고 부르심을 받은 자임을 아는자들이다>

1.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나는 어느 부류의 사람인가?

2. 첫번째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제자들이다. 
예수님은 가르치시는 사역을 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사역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3. 13절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 두번째는 많은 세리들과 같은 죄인들은 예수님께 나아갔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다라 다녔다. 

5. 15절 "그의 집에(알패오의 아들 레위) 앉아 ...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6. 세번째 부류의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따지면서 방해하는 사람들이다. 

7. 16절 "바리새인들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8. 그렇다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분류되는 기준은 무엇인가?

9. 이는 구세주가 이 땅에 오시는 이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0.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정했더라도, 그들의 생각하는 구세주의 삶에는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의 행동들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1. 예수님은 이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말씀을하신다.
   17절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12.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이 땅에 오신것인가?

13. 나를 위해 오신 것이다. 이를 인정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죄인이다. 그리고 내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14. 내가 죄인임을 아느냐? 모르느냐?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섞이지 않게 된다. 

15. 그리고 죄인임을 인정할 때 그 삶이란 죄인이 아니라고 할 때와 삶과는 천양지 차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6. 어떻게 죄인임을 알면서 죄인이 아닌것처럼 행동할 수 있겠는가. 그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할 수 있겠는가...

17. 그렇다. 나는 죄인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나를 위해 오신 것이다. 나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그래서 감사한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18. 그렇다면, 세 부류의 사람들중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제외하고 제자들과 세리와 같은 죄인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남게 된다. 

19.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누구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세리같은 죄인들은 누구인가? 어떻게 그들은 구별되어 있는가?

20. 이는 죄인이 전부 다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21.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오셨고, 죄인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을 아는 죄인들은 제자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죄인임을 알았다면 제자가 되어야 한다. 

22. 우리가 죄인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왜냐하면 영원한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23. 그리고 죄인임을 아는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된다(이는 감사하게 될 것이다. 죽을 수 밖에 없었는데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4. 그렇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25. 이러한 은혜와 감사가 있다면, 자연스럽게 죄인의 삶은 제자의 삶으로 변해가야 한다. 예수님은 죄인인 나를 위해 오셨지만, 죄인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변해 제자가 되기를 예수님은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26. 예수님은 나를 부르러 오셨다. 그렇기에 부르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 나는 죄인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너무 큰 은혜를 받은 나는 이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27. 나는 지금 바리새인의 서기관인가?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죄인가? 은혜를 입고 부름받은 제자인가?

28. 나는 은혜를 입고 부름받은 제자이다.

29. 오늘도 그 은혜를 주시고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할 수 밖에 없다. 

30. 할렐루야!


=== 참고 자료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마9:9)

'세리와 죄인,' '세리와 이방인,' '세리들과 창기들' 같은 표현들은 당시 '세리'라는 말의 문맥적 의미를 제공한다. 교회의 권면에도 회개치 않는 자들은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도무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될 수 없는 부류의 전형으로 간주되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 사랑하는 것은 '세리도 이같이 하지 않느냐'는 산상의 교훈처럼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는 자기애의 대명사가 세리였다. 이처럼 예수님의 어법 속에서도 세리는 상종하지 말아야 하는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라고 하는 세리에게 다가가 '나를 좇으라'는 소명의 팔을 내미셨다. 게다가 하나님 나라의 초석을 다지고 기둥을 세우는 막중한 사도직을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 중의 죄인에게 맡기셨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마태의 지파적 출신을 규정하는 것은 자료가 빈약해서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다. 유다지파 소속의 예수님 혈통에도 최소한 두 사람의 '레위'가 있었듯이 '레위'라는 이름은 레위지파 밖에서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마태를 유다지파 소속으로 규정하고 코드인사 아니냐는 혐의를 제기하는 것도 불가능한 '유치함'은 아니겠다.

아마도 '레위'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부르심을 받은 레위지파 소속처럼 하나님께 쓰여지면 좋겠다는 부모의 기대감 속에서 작명된 이름일 것이다. '레위'라는 이름 대신에 '마태'라는 생소한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도 당시 세리직의 야비하고 부끄러운 생리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칼빈은 추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을 세리가 부자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보다 현란한 유흥의 접대(a divitibus lautius accipi) 를 기대하며 부자들만 건드리는 분으로 간주했던 참으로 기발한 발상의 소유자도 칼빈의 시대에는 있었던 것 같다.

이에 칼빈은 마태의 부르심을 계파나 부와 무관한 예수님의 값없는 선하심의 범례(specimen gratuitas suae bonitatis)이며 모든 부르심이 우리 자신의 의로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선전한 은혜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의 증거이며 전형(testimonium et typus)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어떠한 신분을 불문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은혜 앞에서의 평등에 대해서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다. 옳고 정당하다. 그러나 누가는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며 마태가 주님의 부르심과 더불어 '모든 것을 버렸다(καταλιπὼν πάντα)'는 사실을 굳이 언급한다. 그것은 부르심에 대한 마태의 반응이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마태가 자신을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totum dedisse) 복음의 모든 장애물을 버렸다고 설명한다. 죄인에게 구원과 최상의 부르심이 열려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죄인의 자리에서 그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죄의 자리에 머물러도 된다는 승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에서의 떠남을 의미한다. 세상이 괜찮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정하신 죄의 자리에 제도의 합법적인 돗자리를 깔고 머물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와 평등을 운운하는 것은 주님을 욕보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능멸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공의에 상응하는 우리의 변화도 수반한다. 사랑을 명분으로 공의를 짓밟거나 공의를 명분으로 사랑을 져버리는 것은 동일하게 위험한 편협이다. 타인에 대해서는 공의를 휘두르고 자신에 대해서는 사랑을 적용하는 것은 비겁하고 야비하다. 십자가의 제자도를 말씀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타인과 자신 모두에게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공의가 입맞추는 제자됨을 요구한다. 모든 사람들을 한없이 사랑하되 죄와의 단절은 철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
시편 85: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Tuesday, April 16, 2013

누가 내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상처를 멀리하지 않고 품어 줄 수 있는가? 시편 38편


시38:5-8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내 상처가 깊을 때 누가 내 곁에 있는가?

내가 사랑하는 자? 
내 친구들?
내 친척들?

이들은 내게 큰 힘이 되는 사람들이다. 내 마음에 위로를 주며, 나의 문제와 짐을 해결하며 나눠지는 분들이다. 아마도 끝까지 함께 할 이들이다.

그러나 내 영이 약하며 내 마음이 심히 무너질 때
내 영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들의 손길마져 부담스럽다. 진실하지 못하다. 일관성이 없다."
결국 그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그곳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때 그 순간에, 그 깊은 곳까지, 내 영혼 깊은 곳까지 
나를 품어주고 헤아려 주고 만져줄 자 누구인가?
내 내면 끝까지 내 상처를 품어주고 싸매어줄 자는 오직 한 분 뿐이다. 

그 분앞에
그 분앞에 나아가 내 모든 것을 맡기자.

"내가 사랑한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섰나이다"시38:1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시 38:15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시 38:21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38:22




Wednesday, December 5, 2012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위한 매일의 묵상 1079호

하나님 말씀은 거울이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약 1:22-25)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 말씀이 거울이라고 말한다. 거울은 우리 자신을 평가할 수 있게 도와준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내게 고쳐야 할 것이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성경이라는 거울을 둘 중 한 가지 방법으로 본다. ‘흘깃’ 보거나 ‘자세히’ 보는 것이다. 70년대 TV 시트콤 ‘해피데이즈(Happy Days)’에서 등장인물인 폰즈는 거울을 힐끔 보고 지나쳤다. 가다가 멈춰서 거울을 보고는 “안녕!”이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다른 건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자신은 완벽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저 힐끗 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다. 또, 허둥지둥 조급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흘깃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선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을 잠깐 보는 것으로는 인생이 변화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삶을 원하는가? 그러려면 하나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야고보서 1:22-25은 하나님이 복 주시는 성경 공부에 대한 청사진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성경을 읽고 해석하라. “…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
  • 성경을 기억하라. “…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
  • 성경에 반응하라. “… 실천하는 자니 …”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하나님 말씀을 힐끗 보지 않고 자세히 볼 때 하루의 삶이 어떻게 다른 것을 느끼는가?
  • 당신이 현재 경건의 시간을 위해 떼어 놓는 시간의 양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기억하고 반응하기에 충분한가?

성경으로 삶을 비춰보라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시 119:130)

모든 사람은 빛을 필요로 한다. 물리적 빛은 주변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고 장애물에 부딪히는 것을 피하게 해준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당신의 마음에도 빛을 비춰주기 원하신다. 성경은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시 119:130)

하나님은 빛 - 그분의 빛 - 을 모든 개개인에게 비춰주길 바라신다. 그분을 아는 진리로 우리의 마음과 그분이 뜻하시는 우리 삶의 다음 단계를 밝혀주기 원하신다.

성경적 묵상은 종종 그 빛을 켜는 열쇠가 된다. 우리는 그 빛에 마음을 흠뻑 적셔야 한다. 성경적 묵상은 우주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마음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삶에 빛이 들어온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당신이 색다른 관점으로 삶을 볼 수 있도록 도우신다. 시 119편 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 삶에 방향을 제시하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길 원하시는 길을 보여준다.

이 시편이 쓰여졌을 때, ‘등’은 사람들이 들고 다니던, 양초가 든 램프였다. 오늘날로 치면 손전등과 같은 것이다. 손전등을 들고 가면서 좀더 앞의 길을 보고 싶다면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갈 길을 몰라 헤맬 때, 하나님께서 길 전체를 볼 수 있도록 빛을 비춰주시길 구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저 다음 발걸음을 뗄 수 있을 만큼만 빛을 비춰주셨다. 우리가 발걸음을 떼면, 하나님께서 그 다음 발걸음을 디딜 수 있도록 빛을 비춰주신다.

하나님 말씀의 빛을 켜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시 119편 18절과 같은 하나님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당신은 하나님 말씀에서 놀라운 것을 보고 싶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눈을 열어 그분이 당신의 삶을 통해 하고자 하시는 것을 보여주시길 구하라.

하나님은 그 빛을 비춰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하나님이 도무지 알 수 없는 분처럼 느껴진 적이 있는가? 그러한 때, 당신은 답을 찾기 위해 하나님 말씀을 의지했는가?
  • 당신은 그저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해주시길 기다리는가, 아니면 그분의 명확성과 통찰력을 구하는가?
  • 성경을 그냥 읽는 것과 성경적 묵상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Friday, November 2, 2012

한 날 묵상 - 갈 3:1-5 <세상의 응원이 아닌 하나님의 응원의 소리를 듣는 한 날이 되어라. 어리석은 자들이여>

한 날 묵상 - 갈 3:1-5 <무엇이 옳은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은 우리를 보고 진정 어리석다고 하지만, 진정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그들이 진정 어리석도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1. 어리석지 않기를 바란다. 진정으로 그렇다.

2. 자녀들에게도 어리석지 않은 것을 꼭 가르치고 싶다. 진정으로 그렇다.

3. 세상은 세상의 것이 옳다 말하지만, 진정 옳은 것이 있다. 분명히 있다.

4. 시편14편에서 시인은 말한다. 1절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5. 진정 그들이 모른 것이 있었다. '하나님은 계시며 지금 역사하신다'는 사실이다.

6.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기에 그들은 펼쳐보이는 세상이 보기에 좋은 것들의 진짜 모습은 "그들이 부패했고 행실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는 모습이다.

7. 하나님은 지금도 찾아 나선다. "하나님을 찾는 자를 찾아 나선다"

8.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이 찾아 나선다.

9.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주셨다. 아니 더욱 뚜렷히 볼 수 있도록 주셨다는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인간이 너무 어리석어 예수님 이전에는 하나님이 계심에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 이후에는 더욱 또렷이 볼 수 있는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10. 예수님이 주신 은혜는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이다.

11. 결코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고서는 이러한 은혜를 누릴 수 없다.

12. 우리가 성령의 선물을 받은 것은 그 어떠한 율법의 행위가 아니다.

13.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는 온전할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14. 율법의 행위가 아니 말씀응 듣고 믿음으로 성령의 받았다.

15. 우린 눈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믿음을 수 있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다.

16. 이런 은혜를 누리는 우리에게 또 다른 어리석음이 찾아온다.

17. 하나님이 없다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다. 전혀 다른 또 다른 어리석음 성령으로 시작된 인생이 지금 육체로 마치려 한다는 것이다.

18. 이전의 육체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는 안타까움이다.

19.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셔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는데, 옛 습관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익숙한, 친숙하여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려 한다는 것이다.

20. 오호로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도다.

21. 하나님이 없다하여 어리석음이 아니라 성령이 온전히 역사하지 못함에서 새사람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육체의 행하려는 어리석움이로다.

22. 삶에서 육체로 이끌림이 아닌 성령에 이끄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23. 아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 보기에 어리석다 할 수 있다.

24.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은 우리를 어리석다 해야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25. '참 잘 살아가고 있구나'.

26. 힘! 내! 시! 게! 나! 사랑하는 친구야.

27. 오늘도 세상의 응원이 아닌 하나님의 응원의 소리를 듣고 살아가는 한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8. 샬롬.

===
1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이냐"
3절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고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5절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
참고
시편 14편
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싱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5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리로다
6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7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Monday, January 2, 2012

청.매.묵. 에스겔 5:1-17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이,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악하고, 주변의 열방보다 더 심각한 죄악성이 얼마나 더 깊은지를 말씀하고 있다>

청.매.묵. 에스겔 5:1-17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이,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악하고, 주변의 열방보다 더 심각한 죄악성이 얼마나 더 깊은지를 말씀하고 있다. 지금 나에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주변 사람보다 더 악하고 정직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지 자신을 바라보는 한 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고, 언약안에 있다는 사실은 반드시 드러나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의 은밀한 관계를  숙성된 참맛처럼 은은하게 드러날 때 믿음의 아름다움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렸습니다. 심지어 주변 나라들보다 더 악한 백성이었습니다. 언약을 지키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은 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1절 "이제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칼을 가져다가 네 머리카락과 수염을 깍아라"
 2-5절

* 하나님과 언약을 관계를 저버린 백성들...
6절 "예루살렘은 악을 저지르면서 내 율법과 규례를 거역하였다"
=> 약속은 지켜야 한다. 언약은 어떤 어려움이 예상되더라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일편되고 신실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우리가 지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에 금이 갔다.

       "그들은 주변 나라들보다 더악하여"
7절 "너희는 주변에 있는 나라들보다 더 소란을 피우며"
       "심지어 너희 주변 나라들의 규례도 따르지 않았다"
=> 세상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세상 사람들이 지키는 정직한 도덕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래도 진정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면 은혜를 주신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이다.
     겔 4-5장에 나오는 무시한 심판 앞에 희미한 소망을 보게 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소망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품으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를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전의 삶을 버리지 못하고, 똑같이 생활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믿음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믿음은 행동으로 들어나게 된다. 행동으로 들어난 믿음은 기록된 말씀이 드러나는 글이 된다.

* 예루살렘에 닥칠 하나님의 심판
(예루살렘에 닥칠 심판이 임의적이거나 불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예루살렘 성에 다가오는 심판은 마치 하나님이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생객해낸 임의의 재난이 아니다. 오히려 그 심판은 언약의 파기자들에 대한 저주의 집행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의 삶은 주변 열방들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했다(겔 5:7). NIV 적용주석 에스겔p129.)
8절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치겠다"
       "다른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벌을 내리겠다"
9절 "너희는 내가 역겨워하는 우상들을 섬겼으므로, 내가 전에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가장 무서운 형벌을 너희에게 내릴 것이다"
   17절 "내가 기근을 보내어 너희를 치고 들짐승을 보내어 너희 자식을 잡아먹게 할 것이다"
   -> 내릴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벌. 기근과 들짐승을 보냄.
10절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고, 자식이 그 부모를 잡아먹을 것이다"
=> 레위기 26장의 저주가 그들 중에 임할 것이다.

11절 "내가 맹세한다"
         "너희가 온갖 악한 우상과 역겨운 짓으로 내 성소를 더럽혔으므로 내가 더 이상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12절

13절 "내 분노를 다 쏟아 부어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이다"

14절 "내거 너희를 페헤로 만들어 너희 주변 나라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겠다"
15절 "주변나라들이 너희를 보고 비웃을 것이다"
         "너희는 그들에게 경고와 두려움이 될 것이다"
16절 "치명적인 기근을 보내어" "더 심한 기근을 보내어"


* 내가 내려 놓아야할 죄악은 무엇인가?

목적이 이끄는 삶을 위한 매일의 묵상 - 891호

“…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히 12:1b)

그 무거운 것이 무엇이든, 인생에서 효과가 없고 계속 당신을 끌어내린다면 그것을 놓아 보내야 한다.
죄를 규명하는 것은 쉽다. 그렇지 않은가? 죄는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하지 않는 것들이다. 당신은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살거나 재정을 건전하게 유지하기 위한 방법은 잘 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는가?
야고보서 4장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 자복으로 일어나라. 자복함으로 회복하라.
시편 32편 1-11절

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5 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6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8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Monday, December 26, 2011

일상기도 - 시 132:2 <기도가 나를 고요하고 평온함으로€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일상기도 p56. 당신의 마음이 아무리 피폐하고 아무리 은혜를 달라고 부르짖어야 한다 해도 부끄러워하지 말라. 그냥 기도를 시작하라.

Friday, December 16, 2011

한 날 묵상 - 창 30:25-43 <왜 귀향인가?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곳, 미래가 보이는 곳을 두고 야곱을 무엇이 다시금 혼란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는가?>

한 날 묵상 - 창 30:25-43 <왜 귀향인가?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곳, 미래가 보이는 곳을 두고 야곱을 무엇이 다시금 혼란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는가?>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삶은 쉬운 삶이 아니다.
 이상은 이상일 뿐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이상을 현실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래서 쉽지 않다. 더욱이 세상은 하나님을 모른다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따르는 우리를 이성적이지 못하다 멸시하고 무시하기 때문이다.
 야곱은 다시금 혼란속으로 들어가기로 결단한다. 바로 귀향이다.
 그는 죽음을 피해 고향을 뛰쳐 나왔다. 온갖 술수와 거짓, 속임으로 온갖 복을 취하고 도망치듯이 나왔다.
 죽음을 피해 나온 혼란속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벧엘에서 만났다.
  그 때에 약속의 말씀을 만났다. 수십년 동안 이루고 가꾼 성공과 사랑을 누리는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귀향을 결심한다.

  그는 다시 혼란속으로 들어가기를 작정했다. 형이 있는 고향으로의 귀향이다.
  약속의 성취를 위해 여호와를 가슴에 품고 혼란속으로 들어가기를 자초하고 있다.
 좇기다시피 혼란속으로 들어왔다면, 이젠 굳은 결심으로 혼란속으로 들어가기를 소원하고 있다.

 여호와를 만난자들이 가질 수 있는 이상이다. 아니 이상을 현실로 끌어드릴 수 있다. 이상은 이상일 뿐 현실이 아니지만, 야곱의 이상을 현실에서는 고난으로 다가올 줄 알았음에도 이상을 현실로 가져왔다. 왜? 지금 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25절 "라헬이 요셉을 낳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 몇 년후?

27-28절
 27절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심이 드러나다.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야 함을 알고 결단하는 야곱.
  => 약속의 성취다. 야곱은 기억하고 있었다. 약속의 말씀을 이은자로서 약속의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그를 귀향하게 하였다. 알 수 없는 혼란속으로 걸어가게 되었다.
 죽음을 피해 알 수 없는 혼란속으로 나와 하나님을 벧엘에서 만났다면, 이제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약속의 성취를 위해 여호와를 가슴에 품고 혼란속으로 들어가기를 자초하고 있다.
 좇기다시피 혼란속으로 들어왔다면, 이젠 굳은 결심으로 혼란속으로 들어가기를 소원하고 있다.
 여호와를 만난자들이 가질 수 있는 이상이다. 아니 이상을 현실로 끌어드릴 수 있다. 이상은 이상일 뿐 현실이 아니지만, 야곱의 이상을 현실에서는 고난으로 다가올 줄 알았음에도 이상을 현실로 가져왔다. 왜? 지금 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상을 꿈꾸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이상은 이 세상이 결코 인정하지 않는 현실이다. 세상은 거부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힘들다. 괴롭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아니 철저히 무시받고 냉담한 반응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의 이상을 이 땅 가운데 실현해 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꿈꾸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세상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벧엘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 서원한 벧엘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꿈꿀 수 있다.

28절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30절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 집. 여호와의 집. 성전. 말씀을 잇는다.
          나의 집을 어떻게 세워가야 할까? 누가 세워가야 할까?
 내가 스스로 집을 짓는 것은 헛된 행동이다. 우리가 수고가 헛될 뿐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집이 심히 아름다운 집이다.
 시 127:1-2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꼐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며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이다"

31-43절 야곱의 몫 정하기
 31-32절 방법
 33절 "나의 의가 내 대답이 되리라"
 37-43절
  42절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그렇게 함으로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된지라"
  43절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
  -> 야곱이 라반에게 올 때는 허겁지겁 피해 왔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되어 자신을 보니, 많은 것을 얻었다.


Sunday, December 11, 2011

한 날 묵상 - 창 29:1-35 - <홀로 세상에 뛰어들다. 아내를 만나고, 아이들을 갖고 한 가정의 가장의 되다>

한 날 묵상 - 창 29:1-35 - <홀로 세상에 뛰어들다. 아내를 만나고, 아이들을 갖고 한 가정의 가장의 되다.>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으로 인해 야곱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으로 인해 그의 신앙이 하란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부모를 떠남
 1절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 이르러"
 -> 홀로서기에 성공하다.

 2절 "본즉"
 주변 상황을 정확히 살피라. 자신을 정확히 바라보라.
-> 세상을 보는 눈을 가졌다.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라.
 =>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느껴진다.
     그 때에 라반의 식구를 만나다. 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위해 보내는 장면, 창세기 24장과 너무나 닮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가 이처럼 눈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여기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 인간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남 - 사람들과의 관계 
 4-13절
 4절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5절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6절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7절 "야곱이 이르되"
 10절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11절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일함 
 14-20절
 - 인내하라. 인내하라. 참고 견디라.
    무엇이 그를 이토록 인내하게 하였는가?
    바로 벧엘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벧엘을 통과했기에 인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이제는 전과 다른 힘이 있었다. 그 안에 여호와과 계신다.
 - 목표를 정하라. 그래야 즐길 수 있다(20절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같이 여겼더라"
 - 영원한 소유할 목표를 취하라. 금방 사라져 버리는 목표는 무의미하다.
    => 라헬과 결혼하기. 자기 집을 세우기(창 30:30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 인정받으리라. 먼저 좋은 조건을 제시하게 하라(15절. 창 30:29)
 - 악조건의 고용주에게도 성실하라(창 31:40.41). 열번이난 번복하는 라반.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31:40)

=> 그가 양치는 곳은 하나님이 계신 벧엘이자 성전이요, 양 치는 일은 예배며, 그가 맡은 양은 라반의 것인 동시에 하나님의 것이고, 그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야곱 DNA p124).

    결론 -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나님을 신뢰하라. 주인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주인의 이익을 위한 섬김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한 섬김이다. 섬김을 성실과 정직으로 심으라. 그러면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없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 시편 33편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며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그러나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자치히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b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결혼
 21-30절
  25 "나를 속이심은 어찌도미이니이까" -> 자신도 속였다. 이제 속임을 당했다.

 자녀출생(31절에서 "여호와"라는 말이 등장함)
 31-35절

 홀로 세상에 뛰어들다. 아내를 만나고, 아이들을 갖고 한 가정의 가장의 되다. 그러나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안에 있었다.
 31절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 때론 아픔과 슬픔이 있지만,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큰 계획과 섭리안에 있기에 아무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 어떤 이야기로 진행될지 알 수 없었지만, 야곱의 삶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계신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찾아오시고 일하신다.
 오늘 하나님은 없다 하지 말고, 하나님은 나의 일에 무관심하다 하지 말고, 여전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려보자.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라고 말하지 말고, 제 때에 찾아 오심에 감사하라.

=> 홀로 세상에 뛰어들어 살 길을 개척하다.
 그런데 결코 아버지의 유언을 잊지않았고,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았다.
 우리 아버지들이여 자기의 유언이 하나님의 말씀안에 있도록 하라. 아버지의 유언의 말씀만 잘 지켜도 하나님과는 결코 떠나지 않도록 유언하라.
  세상의 그 어떠한 것보다 하나님이 먼저며,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임을 자녀들이 삶에서 지킬 수 있도록 유언하라.

 야곱의 믿음의 성장의 단면을 창세기 30장 2절에서 볼 수 있다. 라헬과 야곱의 대화.
 창 30장 2절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Thursday, November 24, 2011

한 날 묵상 - 창 26:12-35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며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한 날 묵상 - 창 26:12-35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며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시편 33편
 13절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온유함으로 인내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신뢰하였습니다. 결국 아비멜렉이 찾아와 "여호와꼐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라고 고백합니다. 그랄지역에서 이삭이 우물 사건에 앞에 보인 믿음의 모습입니다.


12절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 이삭의 수익이 전해에 백배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보다 백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사실은 백배의 소득이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면 형통할 수 없다. 여호와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일상의 소득은 얻을 수 없다.
   땅은 정직하다. 노력한 만큼 얻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소출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수많은 것들이 있다. 늦은비, 이른비, 일조량 등이 그렇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복 주셔야 한다.

13절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 하나님의 이삭을 살피심.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하나님이 지시한 땅은 어디인가????

 WBC 창세기 하, p356
"내가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그 땅은 가나안인가? 아니며 그랄인가?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3절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것처럼 그랄을 의미한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니콜은 2절과 3절 사이에 대조적인 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2절의 '거하다'는 "브엘세바의 땅에서 영구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가나안 안에 있지만, 3절은 "그랄에 일시적인 이주민으로서 정착하다"로 이해한다. 


14-22절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 왜 다툼이 계속 일어났는가?
  15절 아브라함 때의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절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17절 이삭이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우거하며
  18-19절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 얻었더니"
  20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어"
  21절 또 다른 우물. 다툼
  22절 또 다른 우물.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르호봇.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 강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싸우지 않고 자리를 스스로 피하는 이삭.

26-33절 아비멜렉의 약조
 28절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씸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34-35절 에서는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금심이 됨.
 34절 "에서가 사십세에 헷 족속... 아내로 취였더니"

*충분히 상대방에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있을지라도, 선을 행하며, 함께 거하며 성실함을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삭은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음에도 불구하고 온유함으로 인내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신뢰하였습니다. 결국 아비멜렉이 찾아와 "여호와꼐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라고 고백합니다. 그랄지역에서 다툼이 일어날 때, 이삭이 우물 사건에서 보인 믿음입니다.

오늘 하루 억울한 일을 만나며, 한 줌도 안되는 상대를 만나더라도 교만하지 말고 선을 행하고 함께 거하며, 성실함으로 다가가기 원합니다. 
한 날 이러한 날을 기대하며 소원합니다. 
* 26장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이후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 생애의 초기 주제들과 유사하다.
25:19-34의 내용의 순서가 11:27-12:9과 유사하다.
26장과 12:10-14:19 내용이 유사다.

* 시편 33편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며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그러나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자치히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Wednesday, September 7, 2011

시편 37편 1-40절 <내가 여호와의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시편 37편을 가지고 함께 예배드렸다. 11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적극적으로 부모가 자녀들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 대해서 가르쳐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의 유익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WBC 주석에서는 시편 37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삶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삶의 기초가 될 때, 그 삶은 기쁨을 누리게 되고, 장수하게 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는 비결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인생을 편하게 만들어 주고, 고통을 맛보지 않게 해주리라는 사실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단 그것은(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상한 마음을 바로 잡아 줄 수 있지만, 마음이 상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영적으로 무너진 자를 회복시켜 줄 수 있지만, 그를 내려누리는 압력을 제거하지 못한다.
 또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기도할 때 고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지만, 고난이 오는 것을 전적으로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도서 5장 1절에서 “내가 해아래서 큰 폐단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렇게 말하고, 큰 폐단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폐단”은 히브리어로 보면, 고통, 질병, 슬픔을 묶어 회복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를 가르키는 말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한다할지라도 이러한 폐단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 질병, 슬픔을 피할 수 없으며, 그로인해 오는 마음의 상함을 포함한 비참함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할 때 우리는 그러한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회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참한 삶이 호시탐탐 노리는 삶에서 기쁨을 누리며 장수하며 행복한 날을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10년 1월 가정예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