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anuary 10, 2012
Book 리뷰 & Summary -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
하이데거 "낯선 것과의 조우를 통해 이성이 시작된다"
- 의식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도전하라. 새로운 환경은 새로운 생각을 많이 이끌어 낸다. 그것을 통해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태도를 형성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다만, 이렇게 해서 새로이 행성된 태도들은 막 거푸집에 부은 시멘트반죽과 같아서 습관화하려면 오랜 시간 의시적인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습관으로 연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행동으로 연결하지 못한 생각', 즉 관념에 불고하다.
우리가 생각을 행동을 연결시키기 어려운 이유는 '저항의 중간지대'라는 뱅해물이 있기 때문이다.
- 관습을 깨려면 나쁜 습관부터 버려라.
생각은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생각은 문자의 정교한 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내 생각의 범위는 내가 알고 있는 문자의 범위이고, 생각은 그 문자의 조합을 넘지 못한다. 따라서 나의 생각을 넓히기 위해서는 많은 문자를 알고, 그것을 조합하는 방법을 익혀야만 한다.
우리가 문자로 된 것들을 익히고 다른 사람의 표현방식(사유)을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이유가 있다. 소위 '문.사.철'이라 불리는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사유를 두텁게 하고 내공을 쌓기 위해서는 결국 내 삶이 '새로운 자극 -> 도전 -> 생각 -> 축적된 사유 -> 태도화 -> 새로운 자극'으로 이어지는 순환고리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정보앞에서 현상을 보지말고 본질을 보라.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상은 복잡하지만 본질은 단순하다"라고 말했다.
- 침묵은 가장 능동적인 대화다.
침묵은 충동에, 감정에, 유혹에 흔들리는 나를 관찰하고 경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침묵의 순간 세계에 대한 사색이 시작된다. 침묵은 관성에 의한 모든 행위를 멈춘다는 의미이다. 침묵하는 순간 나는 상대방의 표현을 관찰하는 자가 된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시간과 함께하지만 침묵은 반대다. 침묵은 생각을 낳고 생각은 얼마든지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있다.
독일 바덴의 한 마을에서 의사로 일하며 다양한 저술을 남겼던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인간은 자신이 나온 침묵의 세계와 자신이 들어갈 또 하나의 침묵의 세계(죽음) 사이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언어 또한 두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다. 말은 순결함, 소박함, 원초성을 자신이 나온 침묵으로부터 얻는다. 그러나 미미한 지속성, 덧없는 사라짐, 허약함, 말이 자신이 명명하는 사물과 결코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은 두번째 침묵, 곧 죽음으로부터 나온다. ... 그러나 요즘 말 속에는 더 이상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침묵도 없다. 진정한 죽음이 없다. 오늘날 죽음은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라 수동적인 어떤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에서 죽음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죽음에 실패한다.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The World of Silence>
- 침묵은 또 다른 형태의 열정이다.
침묵을 통해 나를 관찰하면서 '자아' 혹은 '내면'이 성장한다. 침묵의 순간, 세계에 대한 나만의 사색이 시작되는 것이다. => 왜 고통이 유익인가? 나의 입을 막고, 생각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이 나를 성장시키고,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왜 고통이 유익인지를 알게 된다. '결혼식이 아니라 장례식장에서 가라' -> 침묵하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다. 결혼식에 성찰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침묵이 단순히 '말하지 않는 것'과 다르기 위한 전제조건은 그것이 반드시 사색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자 칸트는 산책은 침묵이지만, 천둥소리에 놀라서 말문이 막히는 것은 침묵이 아니다.
침묵한다는 것은 시작과 끝을 인식하는 것으로, 사람을 겸허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응시의 힘.
침묵은 응시를 낳는데, 응시는 사물을 스쳐 지나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크기는 내가 인식하는 시선의 범위만큼이다. 산속에 핀 꽃은 내가 인식하지 않는 한 꽃이 아닌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김춘수의 시 <꽃>에 등장하는 "내가 그 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구절도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인식할 때만 그것이 비로서 내 것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물을 응시하지 않고서는 그것의 의미를 온전히 인식할 수 없다.
청년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이다. 때로는 소소한 것을 뛰어넘어 큰 이상을 품어야 하겠지만, 반대로 나를 돌아보고 목표를 다지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는 대상을 정확히 바라보고 차분히 응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침묵의 시간, 사삭의 시간을 통해서만 초대할 수 있다.
청년이여!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 최소한의 침묵과 사색을 통해 나 자신을 관찰하고 바로잡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 극도의 몰입, 배움의 즐거움
- 학문에 대한 데카르트의 네 가지 규칙
1) 나 스스로 명확하게 '참'이라고 인정한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참'이라고 받아들이지 마라. - 계속 의문을 가지라.
2) 모든 문제를 큰 덩어리로만 바라보지 말고 가능한 한 자게 세분하라. - 건너뛰지 말고 완전히 이해하라.
3) 가장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대상에서 점차 단계를 밟아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에 접근하라. - 토대가 중요하다.
4) 어떤 항목도 빠지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모든 항목을 열거하고, 그것에 대해 광범위하게 재검토하라. - 완전할 때까지 복습하라.
사회인의 태도에 대한 네 가지 원칙
1) 자신의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가치에 복종하고 온건하며 신앙을 굳건히 하고, 극단적인 의견의 편에 서지 마라.
2) 행동을 치하는 순간에는 의연하고 명확한 태도를 취하라. 아무리 의심스러운 결정이었다 하더라도 일단 결정을 내린 다음이라면 완전한 확신을 갖고 그것에 따르라.
3 주어진 운명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 이전에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다스리는 데 주력하라.
4) 위 세 가지를 실천하는 바탕 위에서 일할 수 잇는 직업을 선택하라.
실제 공부는 미쳐야 이룰 수 있다. 원래 미친다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일상적으로 행하던 다른 무엇인가를 포기한 상태를 말하고, 정상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집착이 생겼다는 의미이다.
공부를 통해 식견이 깊어지면 자긍심이 생기고, 공부에 진짜 미치는 것은 바로 이 단계에서 시작된다.
- 나는 원본인가, 이미지인가
키치 - "싸게 만들다"라는 뜻의 독일어 '페어키첸'에서 유래된 말로 '저속한 작품'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저속한'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생각에 이르면 상황은 조금 복잡해진다.
가치 혼란의 시대에에 우리는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나는 원본인가, 이미지인가? 복제물인가, 대체물인가?
- 창의성은 타고나는 재능이 아니다.
창의성과 천재성을 오해하지 말자. 천재성은 특정 분야에 일반적인 범주를 뛰어넘는 능력을 선천적으로 타고났음을 뜻하는 말이다. 반면에 창의성은 선천적이건 후천적인건 '새로운 관계를 지각하거나 비범한 아이디어를 산출하거나 또는 전통적인 사고유형에서 벗어나롭게 사고하는 능력'(이철수, "사회복지학 사전""을 의미하는 말이다.
창의성은 발견이지 발명이 아니며, 하늘 아래 있는 것들의 새로운 용도를 발견하고 그것들을 재조합하는 능력인 셈이다.
<나는 걷는다 Longue Marche>와 같은 뛰어나 여행기를 읽고 자극을 받았다면 실제 내가 그 길을 따라 걸어봄으로써 영감이 얻어지는 것이지, 책 속의 사진 몇 장이 영감과 창의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창의성 영감은 눈과 피부, 근육과 뼈가 체험하는 현장에서 자극을 받고, 거기서 싹튼 호기심이 가라앉은 나의 의식과 무의식을 흔들어 새로운 조합을 이끌어내는 것이기 떄문이다.
- 진정한 행복은 과정의 몰에서 온다.
경제학에서 행복은 가진 것/욕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맹렬하게 분자인 '가진 것'을 키우려 하지만, 분자가 자라는 만큼 분모도 같이 자란다. 그 결과 상대적 욕망에 제동이 걸리지 않기 떄문에 분자가 아무리 늘어도 우리는 언제나 행복하지 않다.
인간의 오늘은 우연성과 필연성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것
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
=> 길에 글러다니는 조약돌이라면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문제갇 ㅚ면 그렇지는 못하게 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필연적이고 불가피적며 합목적이라야 한다고 바라고 있다. 모든 종교, 거의 모든 철학, 그리고 과학의 일부까지도 인류가 자기 자신의 우연성을 안간힘으로 다해서 부인하려는 인류 전체의 끈질기고도 영웅적인 노력을 임증해주고 있다.
과정에 있을 때만 찾아오는 행복
인류역사에서 수많은 선각자가 '행복'의 본질을 말해왔지만,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결정적인 고리 하나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행복하고자 하는 목표, 즉 우리가 가상한 행복의 세계가 원래 손에 잡히지 않는 미래형 갈망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막상 목표를 이루었을 때(이루지 못했을 경우에도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과거의 내가 세운 목표를 오늘 손에 주기고 있을 뿐, 그것이 또다시 미래에 내가 원하는 그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의 이성이 추구하는 행복의 개념 역시 단지 '요청 되는 것'일 뿐인 셈이다.
결국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는 셈이다. 이는 매력적인 이성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그 혹은 그녀를 얻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느끼는 가슴 떨림과 심장의 고동은 아프고 매혹적이지만, 막상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연애를 시작하면 그 감정은 처음과 달라진다. 더구나 서로를 만난 과정 자체가 우연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 나의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인간은 사물과 달리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지배를 받거나 질서에 소속되어 그렇지 않을 경우 불안하고 소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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