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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March 8, 2020

마가복음 4장 21-34절. 하나님 나라 운동 생명력 있게 하기 위해서는

 마가복음 4장 21-34절. 하나님 나라 운동 생명력 있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비유를 통해서 생명력을 가지고 자라나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을 합니다. 

 생명력.
 하나님 나라는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두움을 밝히 비추라. 이게 곧 생명력이다.
 등불 - 등경 위에 둔다. 22절. 잘 드러나도록 하라. 감추어 둔것이(어두운 것들이) 드러나도록 하라. 

 생명력 있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라. 
 들어라. 행하라. 24절. 도질, 되질, 덤으로 더 주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 운동하는 이들은 더 받을 것이요, 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자라남.
  하나님 나라는 자라나야 합니다. 38-29절. 하나님 나라는 저절로 자라납니다. 분명 지금도 자라고 있습니다.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낮 자고 일어나고하는 사이에, 씨 -> 싹 -> 이삭 -> 낟알 -> 열매 -> 추수.

 확장성.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누구보다 더 큰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정성은 섬김으로, 낮아짐으로 이루어집니다. 
 겨자씨 비유, 31-32절.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이성적 사고. 
 하나님 나라는 알아듣도록,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없다하는 이들에게, 다음세대에게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알아듣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는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나 뿐만 아니라 다음세대가 다른 세대가 되지 않도록 다음세대에도 알수 있도록, 설명해야 합니다.

 나의 작은 수고와 헌신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데 큰 역할이 되게 하소서. 



Sunday, February 9, 2020

중국 우한의 의사 리원량(李文亮, 1985~2020)의 죽음을 애도하며 핑위원이라는 분이 쓴 글


2020년 1월 전세계는 중국에서 우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두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많이 이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접촉을 꺼리고,
세계경제는 위축되고 있다.

처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발견했을 때
리원량 의사는 중국 공산당 정부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무시되었고, 그 후 일은 겉잡을 수 없는 상태로 이르게 되었다.

주님께서, 빨리 신종 코라나바이러스 사태로 고통 받는이들을
구원해주시고 백신, 치료제가 개발되고
더 이상 확산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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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한의 의사 리원량(李文亮, 1985~2020)의
죽음을 애도하며 핑위원이라는 분이 쓴 글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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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지 않았지만 나는 갑니다!
가야 할 시간, 나루터는 아직 어둡고, 배웅하는 이 없이 눈가에 눈송이만 떨어집니다. 그립습니다. 눈송이가 눈시울을 적십니다.
캄캄한 밤은 어둡고, 어두움에 집집마다 환하던 등불조차 떠올릴 수 없습니다. 일생 빛을 찾았습니다. 스스로 반짝인다 자랑했습니다. 온힘을 다했지만 등불을 켜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어젯밤 눈바람 무릅쓰고 나를 보러 왔던 여러분! 가족처럼 저를 지키며 밤새 잠 못 이루던 여러분 감사합니다. 하지만 연약한 인간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본디 평범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입니다. 어느날 하나님이 나에게 그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 나에게 태평한 세상에 소란피우지 말라며, 도시 가득 화려하게 피어 있는 꽃이 보이지 않냐고 말했습니다!
전 세계가 지금의 안녕을 계속 믿게 하기 위해 나는 단지 마개 닫힌 병처럼 입을 다물었습니다. 선홍색 인장으로 내 말이 모두 동화 속 꿈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왕관을 쓴 치명적인 황후는 반란을 위해 속세에 내려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천하는 다시 북적거렸습니다. 누구도 몰랐습니다. 거대한 비극이 곧 성문을 잠그리라고는.
이후 하늘이 대노하고 산하는 시들고 나는 병들었습니다. 내 가족까지 모두 병들었습니다. 우리는 천 송이 만 송이 눈보라처럼 송이송이 흩날렸습니다. 
봄이 오고 강물이 녹으면 가족과 만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 때가 되면 노란 유채꽃밭에 앉아 흩날리는 꽃 송이 송이 새며 하루 일 분 일 초를 보내리라 여겼습니다.
기다렸습니다. 어젯밤 눈 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내 머리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착하지, 나와 같이 가자. 인간은 가치가 없어! 이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비록 인간은 빈한하고 하늘은 따뜻한 곳이더라도 말이죠. 저승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기 두렵습니다. 고향을 떠올려도 다시는 가족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나의 기개는 보증서 한 장으로 죽었습니다. 나는 계속 햇볕이 비치듯 살아 생명을 노래하고 소나무 잣나무를 찬미하고 싶었습니다. 이 나라 이 땅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
이제 내 육신은 죽지만 한 줌 재가 되기 전에 조용히 고향의 검은 땅과 하얀 구름을 떠올립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니 바람은 마음껏 춤추고 눈은 새하얗게 티 한 점 없습니다.
삶은 참 좋지만 나는 갑니다. 나는 다시는 가족의 얼굴을 쓰다듬을 수 없습니다. 아이와 함께 우한 동호(東湖)로 봄 나들이를 갈 수 없습니다. 
부모님과 우한대학 벗꽃 놀이를 할 수 없습니다. 흰구름 깊은 곳까지 연을 날릴 수도 없습니다. 나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아이와 만나기를 꿈꿨습니다. 아들일지 딸일지 태어나면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사람의 물결 속에서 나를 찾을 것입니다. 
미안하다, 아이야! 나는 네가 평범한 아버지를 원했음을 잘 안다. 하지만 나는 평민 영웅이 되었구나.
하늘이 곧 밝습니다. 나는 가야합니다. 한 장의 보증서를 들고서, 이 일생 유일한 행낭입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의 모든 나를 이해하고 나를 동정하고 나를 사랑했던 모든 이들. 나는 당신들이 모두 동트는 새벽을, 내가 산마루 건너기를 기다릴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피곤합니다.
이번 생애 태산보다 무겁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새털처럼 가볍기를 두려워 하지도 않았습니다. 유일한 바램은 얼음과 눈이 녹은 뒤 세상 모든 이가 여전히 대지를 사랑하고 여전히 조국을 믿기를 희망합니다. 
봄이 와 벼락이 칠 때 만일 누군가 나를 기념하려는 이가 있다면 나를 위해 작디작은 비석하나 세워주기 바랍니다! 우람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왔다 갔음을 증명해 줄 수만 있으면 됩니다. 이름과 성은 있었지만 아는 것도 두려움도 없었다고.
내 묘지명은 한 마디로 충분합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하여 말을 했습니다(他爲蒼生說過話).”

Thursday, September 5, 2013

한 날 묵상 - 막 4:26-29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 - 자라남, 확장성>

1.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은 자라남에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은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3.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시절을 좇아 아름다운 단풍이 물들이듯이(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또한 시절을 좇아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4.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자라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5. 28절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씨 -> 싹 -> 이삭 -> 곡식

6. 심지어 어떻게 자라났는지 우리는 알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납니다.
 27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7.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나요?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8. 하나님이 누구시기에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나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9. 우리도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얼마나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크시고 놀랍고 간절하실지 우리는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10.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의 자라남을 위해 "씨를 땅에" 뿌릴 사람이 필요합니다. 꼭 씨가 땅에 사람들에 의해 뿌려져야 하듯이 복음의 확장을 위해 복음을 뿌릴 사람이 필요합니다.
  26절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11. 이는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 위해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복음을 세상에 뿌리며 복음을 세상을 보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12.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고전 1장 21절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13.  하나님의 지혜는 놀라워서 이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아는 전혀 없습니다.

14. 우리처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믿음을 갖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15. 한국에 선교사님들이 죽음으로, 또는 고통과 고난, 그리고 섬김으로 복음을 씨를 뿌려 한국교회가 세워져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었듯이,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복음을 씨앗을 우리가 뿌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16.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복음의 씨를 뿌렸기 때문에 내가 지금 복음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이 부르심에 기꺼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17.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표적이나 이적을 다른 지혜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18. 우리가 이 일에 기꺼이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하실 것입니다. 씨 -> 싹 -> 이삭 -> 곡식으로 자라는 하나님 나라의 커짐을 친히 하십니다.

19. 28절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 땅의 법칙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법칙입니다.

20. 우리의 씨 뿌림과 하나님의 자라남이 끝은 추수입니다. 29절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곡식이 익으니 낫을 대어 추수를 하게 됩니다.

21. 이는 심판의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에 열매는 추수할 것이고, 열매맺지 못하는 가라지는 밖에 버리워질 것입니다.

22. 우리는 최대한 가라지 대신에 열매맺는 씨를 뿌려야 합니다. 혹 씨가 자라는 과정에 가라지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3. 가라지도 추수의 그 때까지 두어야 합니다. 낫은 마지막 추수의 때에만 필요합니다.

24. 우리가 씨를 뿌리고 추수를 기다릴 때까지의 바른 신앙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25. 씨 뿌리고 추수할 시간 사이에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성에도 우리의 인내가 필요하며, 하나님을 신뢰함이 필요하다.

26. 하나님이 하셔야만 씨가 열매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씨가 곡식이 되는 일에 핵심 역할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그 사역에 우리의 섬김을 필요할 뿐입니다.

27. 이는 추수의 기쁨을 함께 누리게 하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이십니다.

28. 오늘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자라나가고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이 더디 일어나는 것에 초조해 하지 않으십니다. 인내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천국 찬치에 참여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29. 이 일을 위해 먼저 믿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복음의 씨를 뿌릴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함께 동역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쓰임받기 원합니다. 사명과 자발적 참여로 끝까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자라게 하심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30. 오늘도 그러한 한 날이 되시기 바립니다.

31. 샬롬과 평강을 빌며.. 할렐루야~~


===
26절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 하나님이 자라가게 하신다. 하나님의 전적은 은혜이다.

28절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 인간이 하는 것은 무엇인가?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 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이 은혜 주시지 않으면 결코 땅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씨 -> 싹 -> 이삭 -> 곡식

29절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 곡식이 있으면 낫을 대어 추수를 하게 된다.

 1. 가라지도 그 때까지 둔다.
 2. 낫을 될 때가 있다.
 3. 곡식을 추구할 때가 있다.
 4. 쭉정이는 밖에 버리울 때가 있다.
 5. 추수할 일꾼이 필요하다.
  26절 씨뿌리는 자도 필요하고, 29절 추수할 사람도 필요하다.

 씨 뿌리고 추수할 시간 사이에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 
=> 하나님 나라의 확장성에도 우리의 인내가 필요하며, 하나님을 신뢰함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하셔야만 씨가 열매 될 수 있다. 인간이 씨가 곡식이 되는 일에 핵심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하나님이 그 사역에 우리의 섬김을 필요한다. 추수의 기쁨을 함께 누리게 하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이시다.


* 비교

마태복음 13:31-33절에서는 누룩 비유가 포함되어 있음
33절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가복음 또한 눅 13:18-21절에서 누룩 비유가 포함되어 있음.
 20-21절 "내가 하나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룩 서 말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한 날 묵상 - 막 4:26-32 <겨자씨 비유와 '은밀하게 위대하게'>



1. 내 시작은 작았으나 내 나중은 심히 크리라.

2. "다른 생각하지 마십시오". 겨자씨가 우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3. 하나님 나라가 그렇습니다. 내가 하든, 내가 하지 못하든,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시간표를 제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제 시간에 맞추어 시계는 가고 있습니다.

5. 내가 지금 그 시간표에 함께 하든지, 하지 않던지 말입니다.

6. 원하기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함께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를 포함하여 믿음의 사람 모두가 말입니다. 

7.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아주 미약했습니다. 아니 초라하기까지 했습니다. 

8.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패배자였기 때문입니다. 

9. 예수님은 힘이 있으셨지만, 그 힘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야 죄를 이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승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 예수님의 패배는 그러나 패배가 아님이 선포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패배자가 된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부활로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11. 예수님의 죽음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겨자씨처럼 아주 작게 시작되었습니다. 

12. 그리고 예수님을 부활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이 시작되었습니다. 

13. 그리고 2천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가 자라 풀보다 커지고 큰 가지를 낼 만큼 커져 있습니다. 

14. 이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15. 이제 하나님 나라는 더욱 커질 것입니다. 지금의 가지보다 더 큰 가지를 낼 것입니다. 

16. 내가 거기에 있던, 없든 말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시간표입니다.

17. 그런데 바로옵기는 나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그 시간표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18. 이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안에 우리가 함께 하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가 커지는 일에 나도 하나님의 동역자로 함께 기억될 것이기 때문에 이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9.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시간에 우리가 함께 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20. 이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처럼, 이전의 세상적 욕망을 죽는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처럼, 예수님의 섬김만을 내 삶과 영혼가운데 살리는 일입니다. 

21.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시작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나의 죽음과 내 안에 예수님의 닮음이 살아나는 것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22. 하나님 나라는 커져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3.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확장되는 일에 동참합시다. 이는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코 혼자서 큰 일을 하려하지 마십시오. 그져 작은 것이면 족합니다. 

24. 오늘도 나의 작은 섬김과 나의 작아보이는 절제와 나의 작아 보이는 인내를 가정과 이웃과 친구와 직장 동료에게 실천함을 통해 작은 겾씨가 후에 자라 풀보다 커지며 가지를 내며 새들이  그늘에 깃들임만큼 되는 일에 함께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그리고 한 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30절 "또 이르시되"
 => 계속되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

30절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덯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절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절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4729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자주 비유를 통해 알려주셨다. 그중에는 겨자씨의 비유가 있다. 
"천국은 ... 겨자씨 한 알 같다"는 말씀이다(마 13:31).

이 겨자씨의 비유를 읽을 때 우리는 겨자씨가 커진다는 데 주로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나라는 커진다는 것이다. 큰 나무가 되서 공중의 새들이 깃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비유가 품고 있는 천국의 비밀이 있다면, 그것은 큰 나무가 되는 천국의 시작이 겨자씨 한 알처럼 작다는 것이다. 사실 이 첫 작음을 철저히 실감나게 느껴야 그것의 자란 후의 모습에 놀라게 될 것이다. 천국은 누룩과 같다고도 말씀하셨다(마 13:33). 누룩 비유에서도 우리는 누룩이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했다는 데 관심이 간다. 그러나 이 비유도 겨자씨 비유와 같은 비밀을 품고 있다. 하나님나라 자체가 눈에 안 보인다는 것이다. 안 보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진짜 작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을 금세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길바닥이 금으로 깔려 있고 나를 위해 주님이 예비하신 화려한 맨션이 있는 곳을 보면 누구나 바로 그곳을 천국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금 이 땅에 오시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키는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 신장보다는 분명 크실 것이고, 부드럽지만 위엄 있는 풍채, 서구적 마스크에 약간의 수염을 기른 훈남이 기적을 일으키면,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영광스러운 모습은 누구나 알아본다. 뭔가 있겠구나 싶어한다. 화려한 곳은, 영광스러운 곳은, 힘이 있는 곳은, 능력이 있는 곳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준다. 하지만, 초라한 곳은, 아니 그냥 수수한 곳은, 평범한 곳은, 힘이 없는 곳은, 중심이 아닌 후미진 변두리는, 그리고 그런 곳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런 이들이 하는 말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만큼 화려하지 않았다. 사마리아인, 앞 못 보는 사람, 못 걷는 사람, 한센병 환자, 못 듣는 사람, 들것에 실려 다녀야 하는 중풍병 환자 -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 현장에 있었다.

천국의 비밀은 이것이다. 겨자씨가 아무리 작아도 그 자체가 천국인 것이다. 씨는 예고편 천국이고, 그 씨가 자라 나무가 된 후에야 진짜 천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씨 자체가, 너무 작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그 겨자씨 자체가 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그것이 천국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을 팔아 사야 할 가치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겨자씨가 - 다 자란 나무가 아니라, 씨가 -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의미가 있는, 모든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나라라는 것이다.

누가 봐도 천국 같은 천국은 큰 고민 없이 얻고 싶어한다. 밭에 보화가 드러나 있다면 누구든지 그 땅을 살 것이다. 그런데, 그 땅이 그냥 맨땅으로 보이면, 그 안에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아는 사람만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산다. 맨땅을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사는 행동은 거기 숨겨진 보화를 모르는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미친 행동,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다.

서울 어느 달동네 바보 백수 방동구가 9년 동안 20000:1의 경쟁을 뚫은 '공화국' 최고의 엘리트 요원 원류한인지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여기 역설이 있다. 원류한이 뛰어날수록, 그래서 방동구 역할을 잘 할수록 그를 알아보기가 더 힘들다는 것이다. 먼지 나는 팔레스틴 땅을 걸었던 청년 목수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들, 가난한 자에게 전파되는 복음 속에서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예수의 사역이 아무리 초라해 보여도, 천국이 아무리 시시해 보여도, 그것이 진짜 예수님의 사역, 진짜 하나님나라의 일임을 알기에 모든 것을 쏟을 것이다. 천국은 위대하다. 그러나 은밀하다. 너무나 위대해 너무나 은밀하다. 그러나 그 은밀한 위대함을 보는 자, 그 눈이 복된 믿음의 눈이다.

전성민 /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참고, 예수, 한국 사회에 답하다 p93. 자신 안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 구현

Thursday, July 4, 2013

한 날 묵상 - 막 4:21-25 <등경위의 등불은 비추는 역할 뿐 아니라 작은 티 도 크게 보이기에 늘 스스로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1. 연예인들이나 우리가 공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두 가지 마음이 듭니다.

2. 첫째는 부럽다. 진짜 부럽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게 무슨 부러운 것이냐?'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저는 성격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기에 그들의 주장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제 생각에는 많은 사람들에 인정받고 늘 관심이 대상이 되는 것은 생각해 보면 기쁜 일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3. 그런데 두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그들은 공인이라는 사실에 그들의 조그만한 실수나 잘못도 많은 사람들의 눈에 크게 비춘다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공인들에게도 마태복음 7장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비판하지 말라"를 적용하는 것은 성급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보면,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4. 왜 성급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게 되냐하면, 오늘 본 마가복음 4장 21-25절 말씀에 위의 마태복음 7장 비판하지 말라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5. 등경위의 등불은 깨끗해야 합니다. 그래야 빛을 멀리 밝게 비출 수 있습니다. 조그마한 티나 잘못이 있으면 멀리도 비출 수 없을 뿐 아니라, 밝게도 비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6. 공인은 공인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인정하지 않았을 지라도 자신이 첫번째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롤 모델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두번째로 살펴본 자신의 잘못이 일반 사람들보다 더 엄격한 것에 대해서 인정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7.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 구별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보실 때 세상의 공인으로 보십니다. 세상에 믿음의 사람으로 특별히 구별된 사람으로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8. 이는 우리에게 위의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9. 우리에게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과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10. 그러나 한편으로 티나 잘못에 대해 더 엄격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괜찬ㅅ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누릴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한 하나님 나라의 공인이기 때문입니다. 

11. 그래서 오늘 본문은 "등경위의 등불"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2. 21절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리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드려 함이냐"

13.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볼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아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야 합니다. 가끔 보면 세상에서 볼 때 저 사람이 과연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가는 사람을 볼 때가 있습니다.

14. 우리는 세상을 밝게 비추는 등불로서 등경위에 있서야 합니다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야 합니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라)

15.  우리가 의식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경고를 하십니다. 

16. 22절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17. 스스로 감추거나 드러내려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니다.

18.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19. 드러난 삶을 사십시요. 아니 드러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23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예수님의 말씀은 엄격하시면서 정확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20. 더불어 듣는자는 스스로 늘 조심해야 합니다. 24절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들었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21. 24절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2. 우리의 비춤으로 세상의 어둠은 밝게 비추게 됩니다. 빛이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어두움은 물러가게 됩니다. 빛이 많은 많을 수록 어두움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듭니다. 

23. 그런데, 어두움이 물러 가면서 쉽게 물러가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빛의 밝기를 줄이거나 완전히 끄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24절 "더 받으리니"라는 말씀처럼 더 엄격하고 아주 작은 티라도 더 크게 하려고 합니다. 

24. 우리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더 헤아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5. 더 헤아림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두려워 때로는 등불의 역할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등불은 반드시 등경위에 있어야 합니다.

25. 이게 바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소명이자, 짐어져야 할 십자가이며, 가야 할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입니다. 

26. 우리가 가는 이 길은 자신에게 큰 기쁨이자 유익입니다. 25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27. 오늘도 어떻게 하루를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28. 등불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등경위에 있어야 합니다.

29. 이 자리는 은혜이며 기쁨이자 떄로는 고난의 자리입니다. 

30. 십자가의 길이 그렇습니다. 영광의 길이자 고난의 길입니다. 영광만 취할 수 없고, 고난만이 있는 것이 아니빈다. 십자가의 길은 영광이자 고난입니다. 

31. 오늘 하루도 등경위에 있는 등불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그 길이 영광의 길임을 기억하고 걸어갑시다. 걸어갈 때 고난이 오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32.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사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33. 한 날 등경위의 등불로 세상의 어두운 곳을 밝게 비추어 어두움이 물러가는 은혜가 있는 십자가의 흔적의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34. 할렐루야! 아멘!





















Thursday, June 13, 2013

한 날 묵상 - 막 4:10-20 <씨뿌리는 비유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를 깨닫다>

한 날 묵상 - 막 4:10-20 <씨뿌리는 비유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를 깨닫다>

1.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과 깊이 관련이 있다.

2. 말씀을 떠나서는 하나님 나라를 말할 없다.

3.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할지 난감하다.

4. 미국 바나그룹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의 18% 종교가 없는 사람의 9%가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바나그룹은 놀라운 사실이라고 코멘트를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기독교인의 아에 성경을 안 읽는다는 사실일게다.

5. 하나님의 나라안에 살아가기 원한다면, 반드시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말씀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6. 하나님의 나라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안에 살아 있습니다.

7. 하나님 나라에서 열매맺는 삶은 말씀에 마음에 잘 뿌리내리기면 하면 됩니다.

8.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할 수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말씀을 들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열매를 맺기가 쉽지 않습니다.

9. 왜냐하면, 이는 익숙한 나의 생활패턴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육체적 만족을 결코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10. 말씀이 우리 안에 열매맺으려 할 때 방해하는 것들은 세상의 것들입니다. 내 안에 익숙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문제입니다.

11. 나와 지금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12. 그런데 나와 지금 가까이 있는 것이 말씀이라면, 그는 반드시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때에 열매는 맺는 과실처럼 삶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13. 지금 내 가까이 무엇이 있는가? 스마트폰? 가족? 건강? 부? 명예? ...

14. 이러한 것들은 말씀이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어가는 절대 방해물들입니다.

15. 14절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위해 말씀이 우리 가운데 뿌려졌습니다. 말씀을 듣을 수 있고, 성경이 주어졌습니다. 그 뿐아니라 스마트폰안에 성경 어플도 널려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참으로 축복받는 세대입니다.

16. 말씀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15절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 말씀을 마음으로 듣지 않고 귀로만 듣는다.

17. 외적인 것들이 말씀이 잘 뿌리는데 방해가 됩니다. 말씀이 뿌리 내리는데 외적인 것들이 방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를 못가게 하시는 부모님, 가족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수 없도록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도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하여 말씀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예배를 참석하지 못할 만큼 분주한 것들이 나의 인생을 이끌어 갑니다.
16-17절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말씀을 빼앗겨 버리다.

18. 말씀이 마음에 울릴 때, 열매맺지 못하게 하는 방해들은 내 안에 내적인 것들입니다. 내면의 욕심입니다. 성령의 법과 사망의 법이 싸우는데, 성령의 법이 이기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18-19절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 내적인 요인이 문제다. 마음이 문제다.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지만, 이전 것들과 새 것이 싸울 때에 이전 것들로 인해 새 것이 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19.  열매 맺기 위해서는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20절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20.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맺는 것을 삶의 최우선에 둡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 맺는 것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로부터 능히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21. 오늘 한 날도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를 맺는 좋은 마음의 밭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2. 할렐루야! 아멘!

===
11절 "하나님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씨 뿌리는 비유
14절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절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 말씀을 마음으로 듣지 않고 귀로만 듣는다.

16-17절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말씀을 빼앗겨 버리다.

18-19절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 내적인 요인이 문제다. 마음이 문제다.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지만, 이전 것들과 새 것이 싸울 때에 이전 것들로 인해 새 것이 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20절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Friday, October 19, 2012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읽는 다니엘서 김회권


김회권 목사의 ‘하나님 나라 신학 강해 시리즈’ 제6권, 하나님 나라라는 키워드로 다니엘서 전체를 강해한 책이다. 어렵고 난해해서 부분적인 몇 가지 에피소드로만 알고 있던 다니엘서 전체를 읽고 묵상할 수 있도록, 권위 있는 주석과 해설 및 현실적인 적용점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특히, 묵시문학에 대한 해설, 신구약 중간기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예수께서 차용하신 “인자”라는 칭호 등에 대한 깊이 있고 탁월한 해설을 담고 있어,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뿐 아니라 성경을 통독하려는 평신도들에게도 유익한 강해서다.
바벨론의 세계주재권은 헛것처럼 사라지고 
인자(人子)의 나라만이 영영히 서리라!

다니엘서는 구약성경이라는 산맥 위에 솟아 있는 계시의 영봉이다. 산 아래(1-6장)는 성도들의 화려한 영적 분투와 승리를 보여주는 영적 풍광이며, 산 위(7-12장)는 악마적 세력과 혈투를 벌이는 성도들의 죽음과 부활을 보여주는 영적 고지다.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철저한 세계 통치를 믿으며, 아무리 세속적인 사회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간섭과 통치를 벗어난 세속사회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다니엘서는 온 세계, 세계 만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왕권을 찬양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바벨론 제국이나 페르시아 제국 같은 힘과 패권적·타인지배적 삶의 방식에 굴복하지 말고,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전향하도록 격려받는다.
이 강해서는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다니엘서 전체를 강해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세계 통치의 흔적이 사라진 시대에, 홀로 세상에 던져졌다는 외로움 속에서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아가기 쉽다. 이런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조와 절개를 지키기보다는 현재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짓 주(主)들의 유혹과 위협에 투항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참여할 기회를 잃게 된다.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는 바람에 날리는 겨가 되어 버린다. 기회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이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영토에 거주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칙령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 온갖 위험과 불편을 감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명령과 위로, 약속과 호소가 들린다. 악의 위협과 유혹 앞에서도 하나님의 참 자녀들은 신비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듣고, “내 백성아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호소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수 있다. 다니엘서는 그런 점에서 독자들 스스로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영토에 거주하는 하나님의 참 백성인지, 세상에 던져진 배교자인지를 검증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이 강해서와 함께 다니엘서를 읽는 동안,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이 밝아지며 하나님 나라의 영토로 돌아가려는 회개의 열정이 용솟음치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의 참 자녀이며 다니엘서의 주인공들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다 읽고 덮을 때 순교적 신앙의 위력과 그것의 종국인 부활의 소망으로 기뻐하게 될 것이다.

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지식"을 선사하시고 모든 책과 지혜에 능통하게 하시고 특별히 다니엘에게는 이상과 몽조를 깨닫는 특별 은사를 허락하셨다(1:17; 5:11-12). 이들에게서 알 수 있듯이, 경건한 기독청년은 단지 도덕적으로 선하고 윤리적으로 정결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경영하고 운영하는 일반 학문과 기술 분야에서도 탁월성을 과시할 수 있어야 한다. 탁월한 실력 자체가 도덕성을 대신할 수는 없으나 어떤 때는 굉장한 도덕적 의미를 가질 때가 있다. 억울한 해고나 죽음의 위기로부터 자신과 직장 동료를 구해 내는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니엘의 환상 및 꿈 해석 능력은 이런 의미의 전문가적 실력이 발휘된 좋은 예다.
- 2강, 101쪽
저자 서문
서론

1. 묵시문학과 다니엘서의 메시지
2. 다니엘서의 구조
3. 다니엘서와 마카베오 항쟁사와의 관계
4. 마카베오 상하서의 메시지
5. 다니엘서와 마카베오 상하서의 상응관계와 긴장점
6. 다니엘서에 대한 역사적-비평적 연구 성과와 이에 대한 보수적 연구자들의 반론
7. 우리는 다니엘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
1강_ 뜻을 정한 다니엘과 세 친구들(1장)
2강_ 이상과 몽조를 깨닫는 예언자이자 바벨론 제국의 국가경영 컨설턴트 다니엘(2장)
3강_ 왕이여, 우리는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3장)
4강_ 왕이여,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4장)
5강_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5장)
6강_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에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다니엘(6장)
7강_ 구름 타고 오는 인자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 앞에 무너지는 세계 제국들(7장)
8강_ 인자야, 깨달아 알라!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을(8장)
9강_ 우리 하나님이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9장)
10강_ 은총을 크게 받은 이여,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10장)
11강_ 오직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고 용맹을 발하리라(11장)
12강_ 많은 사람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은 궁창의 별처럼 빛나리라(12장)

다니엘서 전체 결론


책의 일부....

"신학적으로 보면,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집단이다. 현대 경제학에서 보면 이들은 경제 발전의 어둔 음영에 사는 자들로서 기껏해야 복지정책의 수혜자일 뿐 거의 "없는 자"처럼 취급당한다. 나라의 각종 경제지표를 하향 평준화하는 존재다. 한마디로 국민 대우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존재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력 있는 국경선은 미국과 러시아, 한국과 일본, 동구와 서구 사이에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가난하지 않은 자들 사이에 그어져 있다. 그 국경선 이쪽과 저쪽은 너무나도 다른 나라다. 가난한 자들이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곳은 하나님 나라밖에 없다. 그래서 경제학에서는 천대받는 가난한 자들이 신학적으로는 우대받는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상속 자산이기 때문이다(눅 6:20; 마 5:3). 이런 이유로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 계약으로 묶여 있는 특별 백성이라 불린다. 이 말은 어떤 특정 정치 이데올로기를 신격화 하는 말이 전혀 아니다. 공산당이나 노동당 등 특정 정당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정치 조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조차 하지 못할 연약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은 모세오경, 예언서, 잠언서와 시편, 공관복음서, 바울 서신 등 성경 66권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강조된다.


.....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도덕적 선량함 때문에, 또 가난한 자들이 순박하고 상대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상의 권력구조 속에서 아무에게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는 절대 고독자인 가난한 자들의 눈물과 탄식에 슬픔과 동정을 느끼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이시며, 착취와 압제, 자원 약탈과 기회 박탈 등 불의한 사회구조에 분노하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경제학과 정반대의 입장에서 가난한 자들을 바라본다. 가난한 자, 장애인, 연약한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 호의와 복을 촉발하는 신학적 자산이다. 그들은 결코 이방인도 아니요 주변인도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애로운 시선과 거룩한 보호를 누리는 선민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가난한 자들을 우대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와 동맹을 맺은 나라다."

"기독교 신앙이 지난 세월 동안 우리 겨레를 감화시켰던 불교나 유교처럼 공평무사한 지도자와 인재들을 배출해 내고 있는가? 참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같이 고민해 볼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우리 세대는 근현대사의 초입에 한국교회가 발휘했던 지도력을 충분히 계승하는 데 부족함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국교회의 영적 쇄신과 신학적 사유의 성숙, 신앙 실천의 심화를 통해 한국 사회를 공평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공동체로 변혁하라는 사명에 직면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한 나라의 중심 종교가 불교나, 유교나, 기독교냐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종교의 신앙 실천이 하나님의 통치 원리에 더욱 충실하느냐이다. 기독교회는 스스로 주창하는 그 절대적 진리(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신봉자답게 절대적 의미의 진리 실천에 투신해야 할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 옳음을 스스로에게 선포하고 그 실천의 책임을 능히 감당해야 한다. 
 타종교에 대한 피상적 우월감을 피력하거나 우리 민족사의 한 시기에 상당한 고등종교 역할을 맡았던 타종교를 폄하하는 것은 교회 본연의 복음 전파의 일부가 아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이 확실한 진리를,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각인시키고 실천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애국가는 대한민국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존속되기를(대한민국 만세!) 희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하나님 나라를 닮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다니엘서 5장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한 나라의 왕의 통치 연대를 정하시기 위해 가난한 자들에 대한 공동체의 사랑과 돌봄, 권력 엘리트들의 탈법과 불법에 대한 사법적 견제력, 그리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회 구성원들을 위한 사회적 재활 및 복구 에너지의 양 등을 측량하셔서 나라의 존속 연대를 정하신다는 사실을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진리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이런 벨사살 같은 자는 세계 도처에 있다. 그들은 자신을 존숭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이룬 성취에 도취되어 자신의 성취가 가져다 준 권력을 극단까지 사용한다. 멸망의 날 직전까지도 그들은 알지 못한다. 현대는 가히 자아숭배의 세기다. 자기를 숭배하고 자기 매력을 극대화하고 상품화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시대다. 과도한 자부심 문화와 자기선전 문화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때때로 교만은 악이 아니라 덕처럼 칭송받는다. 
 운동 경기나 전쟁,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서 이긴자들의 자기도취적 환호성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우승한 선수들의 자기영화적 도취, 이긴 자들의 함성 등, 세계는 온통 이긴 자들의 자기자랑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이들은 벨사살과 같은 인간들이다. 벨사살처럼 자기 권력과 부귀영화에 취해서 하나님의 저울을 무시하는 자가 바로 무신론자다. 그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전능하신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교만은 인간의 자아를 무한히 부풀려, 하나님은 너무 작게 보이게 하고 자신은 너무 크게 보이게 만든다. 부풀려진 자아를 가진 인간에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교만의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만든다."
--김회권,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읽는 다니엘서>> 중에서

Saturday, May 5, 2012

완성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성취 - 신명기의 구조와 신학 - 송제근교수


 
- 그 말씀 2004년 1월호를 위하여 -
땅의 완성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성취
-신명기의 구조와 신학 -
宋 濟 根 교수   -  2004/6/19(토)


도 입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구조적으로 복잡하고 신학적으로 깊은 책이 신명기다.   신명기의 이러한 특성은 신명기 연구의 복잡성 혹은 난맥성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런 난관을 뚫을 수 있는 연구의 기초는 아무래도 신명기 자체 속에 있다기보다 신명기와 가장 유사한 출애굽기, 특히 출 19-24장과의 관련성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두 책의 상관성은 오래 전부터 세 가지 관점에서 인식되었다 : 법, 신학, 구조.
 첫째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법의 상관성이다.  전체적으로 이 두 법체계는 (출 21-23장, 신 12-26장) 내용적인 유사성이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다.  물론 일반적이고 거친 면이 있는 출애굽기의 법에 비해서 신명기의 법은 예민하고 구체적이며 대단히 설득적이다.
 둘째로, 법적 차원의 근본적인 내용으로서, 두 책이 신학적으로 상관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일 특이한 점은 양자가 모두 신학적으로 언약(조약, berith)을 기초로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본인의 학위논문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 (이레서원, 2004, 제2판 예정)에서 잘 드러내었다.  본인의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두란노, 2003)도 참조하라.
 물론 첫째 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본격적인 언약으로서 첫째 언약인 시내산 언약을 다루고, 둘째 책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맺은 언약으로서 갱신된 언약인 모압(세겜)언약을 다룬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셋째로,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구조에서 나타난다.  출애굽기는 사건의 진행순서를 따라서 역사서술적으로 묘사되어서 구조를 파악해  내기가 쉽다.  그러나 신명기는 설교적 혹은 제의적 맥락 S.R. Driv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Deuteronomy, 1895, lxxvii-lxxxviii; M. Weinfeld, Deuteronomy and the Deuteronomic School, 1972, 320-365; G. von Rad, Deuteronomium, passim; J.G. McConville, Deuteronomy (Apollos Old Testament Commentary), 2022, 19,  반복적 단어와 용례사용, 특징적인 용어나 구절 사용 등이 그 특징으로 보인다.  6시간 정도면 낭독이 되는 히브리어 신명기 본문의 설교적 맥락은 아마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성전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상황과 관계되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속에 - 심지어는 사건의 역사적 진행순서를 마음대로 변용하면서 - 그 신학적 내용이 완벽히 재편되었기 때문에 복잡한 구조를 띌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차이를 명확하게 의식하여서 신명기의 신학과 구조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1. 신명기구조의 특이성

1.1. 구조란 무엇인가 ? - 구조의 다중성 (多重性 Multiplicity)

 일반화된 용어인 구조라는 단어는 어떤 책이나 장이 어떻게 전체를 형성하고 있는 지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런데 구조는 주로 그 책이나 장이 전달하려는 핵심적인 내용인 신학의 구조로만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 기록된 원래 사건의 핵심적인 내용뿐 아니라 그것을 기록하는 현 상황에서의 목표와 관련된 구조가 있을 수 있다.  전자를 '신학적 구조'(theological structure)라고 할 수 있고 후자를 '상황적 구조'(situational structure)라고 표현할 수 있다. 두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첫째로 출애굽기(특히 19-24장)와 신명기는 신학적으로 유사한 구조를 가지는데 그것은 언약체결 혹은 언약갱신체결이다.  그러나 출애굽기를 기록하는 현상황에서는 그것을 역사적, 연대기적인 순서로 기록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역사기록을 하는 Sitz im Leben이 어떤 것인지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반면에 신명기를 기록하는 현상황에서는 그것을 철저히 재구성하여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을 본다.
    둘째로 소위 신명기적 역사서로 불리우는 삼상하-왕상하와 역대상하는 모두 신학적으로는 언약적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상황적 구조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인다.  전자에서는 무너진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비판하고 역사의 책임과 회복의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는 상황적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후자는 동일한 신학적 구조를 이스라엘을 재건해야 할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에게 다시 주어진 재건의 기회를 어떻게 제사장적, 제의적 기초에서 이룰 것인가를 다룬다. 

 '신학적 구조'(theological structure)는 그 장만 혹은 그 책만이 가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성경전체 계시의 구조 속에 부분 혹은 전부를 형성하는 것으로 하나의 나무의 일부분을 형성하는 것과 같다.  이 신학적 구조들의 연관 안에 성경 계시의 통일성을 발견한다.
 '상황적 구조'(situational structure)는 그 신학적 뼈대 혹은 틀을 지금 기록되는 글의 현실적 상황을 위해서 재구성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사건과 글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고 후대의 기록은 반드시 전자의 단순한 반복은 아닐 수 있고 또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1.2. 신명기의 신학적 구조 (theological structure)

 신명기의 핵심적인 내용이자 근본뼈대라고 할 수 있는 신학적 구조는 신명기만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신명기가 성경의 다른 책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을 통해서 성경 전체 계시역사의 대하(大河) 속에 신명기가 같이 흘러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명기가 출애굽기 특히 19-24장과 공유하는 신학적 근본은 언약체결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언약체결이지만 여기서는 언약갱신이다.  즉 거기서는 최초의 언약으로서 시내산언약을 체결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언약갱신으로서 모압(세겜)언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언약체결로서는 다섯 가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1) 언약당사자의공적 정의, (2) 언약당사자의 직접 대면, (3) 언약관계유지법, (4) 언약체결예식, (5) 언약체결 축하 피로연.
 이 근본구조는 성경, 특히 구약의 각 권의 신학적 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각권은 이 근본구조를 자신들의 특수한 목적에 맞게 조정하여서 사용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필자의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두란노, 2003), 제 2장을 참조하라.
 신명기도 마찬가지로 이런 구조를 자신의 제의적, 예식적 상황에 맞게 재조정하고 있으나 본질적인 구조의 요소를 다음과 같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 
 (1) 언약관계의 공적인 정의 : 신 26:17-19
 (2) 언약당사자의 공적인 대면 : 신 5:1-5,22
 (3) 언약관계유지법 : 신 5:6-21, 신 12-26장
 (4) 언약관계체결예식 : 신 27:1-8
 (5) 언약체결축하 피로연 : 신 27:7   
                                              
그러나 출애굽기의 비교에서 알 수 있듯이 출애굽기 속에서는 언약체결의 내용적 구조 자체가 출애굽기 서술 자체가 되었지만 신명기의 경우는 이런 근본적인 신학적 구조 위에 다른 구조가 씌워있다는 것이 중요한 차이이다.  예를 들어서 신 1-3장, 4장, 29-30장, 31-34장은 언약체결 그 자체의 구조를 넘어서는 것 혹은 구조 밖에 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적 구조를, 물론 내적인 언약체결구조를 포함하는, 우리는 신명기의 상황적 구조라고 표현할 수 있다.


1.3. 신명기 상황적 구조 (situational structure)

 신명기의 이러한 상황적 구조는 출애굽기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판명될 수 있는 점은 신명기가 제의적/예식적이라는 특징과 설교적이라는 특징을 지닌다는 부인할 수 없는 점이다.
 우선 현재의 신명기는 제의적/예식적 상황을 반영한다.  전체가 거의 모세의 말을 인용하고 그 속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인용되는 등, 수많은 인용으로 이루어진 것은 신명기가 읽는 책이 아니라 들려지는 말씀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반영한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예가 소위 신언공식(神言公式 divine speech formular)가 그 어떤 책보다 많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명확하게 창세기-민수기와는 다른 점이다.  사실을 알리는 기록식이 아니라 어떤 내용을 선포하거나 낭독하는 식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두 번째로 이와 유사하지만 이 점과 관련된 것이 신명기가 설교적이라는 점이다.  전체를 다 읽어도 6시간 정도 걸리는 것이라면 어떤 예식에서 공식적인 낭독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예식은 짧게 하는 현대적 예배가 아니라 일주일씩 걸리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축제와 상관이 있을 수 있다.
 이런 특징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상황적 구조의 중요한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 신학적 핵심의 중요성 : 1-4:43 [A] // 4:44-29:1 [X] // 29:2-34:12 [A']
 (2) 핵심의 반복 : 4:45-11:32 // 12:1-28:68
 (3) 현재와 미래의 반복적 변화 : 4:45-11:32 (현재(모압)-미래(세겜))
                                12:1-28:68 (현재(모압)-미래(세겜))
 (4) 시간의 흐름 : 1-4:43(과거) - 4:44-29:1(현재) - 29:2-34:12(미래)
 (5) 봉투구조 1 (envelope figure) : 4:44 / 29:1 (MT 28:69)
 (6) 봉투구조 2 (envelope figure) : 1:1-4 // 34:1-12

1.3.1. 신학적 핵심의 중요성 : 1-4:43 [A] // 4:44-29:1 [X] // 29:2-34:12 [A']

 먼저 현재의 신명기의 신학적 핵심이 중심에 놓여지는 모습을 보인다.  신명기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모압(세겜)에서 맺는 모압(세겜)언약이다.  이 내용이 근본적인 핵심을 이루도록 4:44-29:1까지를 중심에 배열하고 있다.  그 앞에는 (1:1-4:43) 이 핵심이 이루어지는 사실적 기초로서의 역사, 즉 시내산에서 모압에까지의 여정을 낭독체로 서술한다.  그 뒤에는 29:2-34:12)은 모압(세겜)언약을 맺고 난 뒤의 언약적 충성을 할 것을 2인칭으로 권고하고 권면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렇게 핵심을 주위로 좌청룡 우백호로 펼쳐진 변두리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정교하게 배열하고 있다.    

1.3.2. 핵심의 반복 : 4:45-11:32 // 12:1-28:68

 이렇게 중심에 배열된 신학적 핵심이 처리되는 방법이 특이하다.  그것은 중복적으로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즉 4:45-11:32까지와 12:1-28:68이 근본적으로 동일한 내용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그 내용이란 모압(세겜)언약의 체결이다.  언약을 체결할 때에는 법적요소와 제의적요소가 다 동원된다. 필자의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1998, 193f.)를 참조하라.
 법적요소의 두가지는 언약당사자의 공적인 관계정의와 언약법의 선포이다.  그리고 제의적 요소는 언약체결예식과 언약체결축하피로연이다.  이미 설명한대로 법적 요소는 모압에서 완성하고 제의적 요소는 세겜에서 완성하게 되어 있는 특이한 언약이 모압(세겜)언약이다.  현재(모압)에서 이루어졌으나 미래(세겜)에서 완성되어져야 할 언약이 바로 모압(세겜)언약인 것이다. 물론 이 반복은 무분별한 복사가 아니라 히브리시의 평행법의 원리를 따라서 만들어졌다.  즉 앞에서는 일반적인 내용을, 뒤에서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 두 요소가 두 본문 4:45-11:32, 12:1-28:68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4:45-11:32>       <12:1-28:68>
  법적 요소 :
        (1) 언약관계정의 :       6:4                  26:17-19
        (2) 언약법의 선포 :      5:6-21              12:1-26:15
  제의적 요소 :
        (3) 언약체결예식 :       11:26-32            27:1-8, 28:3-6,16-19  
        (4) 언약체결축하피로연 : 11:26-32(암시)       27:7

 이렇게 반복되는 것은 다음의 두가지를 고려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 (1) 핵심의 중요성, (2) 반복이 흔한 히브리 문학적 관습.

1.3.3. 현재와 미래의 반복적 변화 :
     4:45-11:32 (현재(모압)-미래(세겜))
     12:1-28:68 (현재(모압)-미래(세겜))

 이 구조와 필연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점이 장소와 시간의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명기의 핵심적 내용이 모압에서 시작되나 세겜에서 완성되어야 하는 특별한 언약인 점과 관계한다.  그래서 모압에서 세겜으로 다시 모압으로 또 다시 세겜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장소의 변화뿐 아니라 시간의 변화에서도 동일하다.  현재에서 미래로 다시 현재로 다시 미래로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다시 이것은 모세에 의하여 현재에 시작되었으나 여호수아에 의해서 미래에 완성되어야 할 언약의 모습을 보인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렇게 독특하게 배열된 이유는 무엇일까 ?  그것은 이미 필자가 밝힌 바와 같이 필자의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두란노, 2003, 314f.)과 더 자세하게는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1998, 242ff.)을 보라
두 장소, 두 시간대를 걸쳐서 행해져야 하는 예식이기 때문이 이 예식이 둘이 아니라 하나의 언약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문학적 구조와 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이 학자들이 신명기의 통일성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혼돈하는 원인이다.  이것은 현대적 관점으로 고대의 책들과 제도들을 이해하려고 하였을 때에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3.4. 시간의 흐름 : 1-4:43(과거) - 4:44-29:1(현재) - 29:2-34:12(미래)

 다시 신명기 전체를 보면 시간상의 명확한 흐름을 볼 수 있다.  우선 핵심에 해당하는 4:44-29:1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 이제 들어가서 살아야 할 역사적 삶의 현재를 다룬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이 들어가서 살아야 할 삶을 나타내기 때문에 엄밀하게 아주 가까운 미래이지만 이 핵심 속에서 사실상 이스라엘이 그 땅에 정착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어떻게 살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상 이스라엘의 삶의 현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앞의 내용(1:1-4:43)은 이스라엘의 과거의 삶을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장르를 사용하여 총정리한다.  우선 1:1-3:29까지는 호렙(시내산)에서 모압까지의 여정을 역사서술적으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까운 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4:1-43까지는 설교적 맥락에서 현재에서 시간을 거꾸로 아주 먼 과거로 여행하는 모습을 본다.  즉 현재, 모압(4:3)에서 호렙(4:10)을 거쳐 애굽으로 간다 (4:20).  거기서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열조의 시간으로 가서 (4:32), 다시 거기서 최초의 역사의 시작인 태초(4:32)에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그 뒤의 내용(29;2-34:12)도 여러 가지로 이스라엘의 미래의 삶을 역시 다양한 장르를 사용하여 정리한다.  우선 31-34장은 이스라엘의 가까운 미래를 예언적으로 묘사한다.  이 속에 유명한 두 장, 31장과 32장이 시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29-30장은 아주 먼 미래로 여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먼 미래를 나타내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당할 가장 먼 미래의 불길한 예언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이 언약에 충성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언약적 저주를 받아서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까지를 상정하는 것이다 (30:1).  그리고 이 장들은 대단히 설교적이고 교훈적이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1)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는 순서는 명확하다 :
   과거 (1:1-4:43[A]) --> 현재 (4:44-29:1[X]) -->미래(29:2-34:12[A'])
 (2) 그 변두리의 시간적 변화는 독특하다 :
   1:1-3:29       4:1-43             29-30장    31-34장
   가까운 과거    먼 과거             먼 미래     가까운 미래
    [a1]          [a2]                [b2]        [b1]

 이렇게 해서 신학적 핵심(4:44-29:1)을 중심으로 동심원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a1] - [a2] - [X] - [b2] - [b1]

1.3.5. 봉투구조 1 (envelope figure) : 4:44 / 29:1 (MT 28:69)

 이런 구조를 형성하는 작지만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중요한 지시어 두개가 신학적 핵심을 주위로 봉투구조(envelope figure, inclusio)를 형성하는 것이다.  즉 4:44에 표현된 torah라는 단어와 29:1(MT 28:69)이 표현한 Moab berith란 단어이다.  이것은 신학적 핵심의 시작과 끝에 있어서 하나의 지시어로 역할(signal fuction)하는데 하나는 시작을 나타내며 다른 하나는 끝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를 표현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토라(torah)가 모압언약(Moab berith)라는 점이다.  이 점은 4:44의 표현이 겉보기에는 4:45과 중복된 것같이 보이는 데서도 나타난다.  신명기같이 정교한 책이 불필요한 반복을 이은 절에서 할 수가 없으므로 이것은 저자의 의도적인 반복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이것이 바로 신명기가 신명기의 핵심을 지칭하는 진정한 내용은 토라(torah)이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모압(세겜)언약이라는 것이다. 

13.6. 봉투구조 2 (envelope figure) : 1:1-4 // 34:1-12

 여기에 또 다른 봉투구조가 보이는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 봉투구조보다 더 외곽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신명기의 시작과 끝에서 보이는 모세를 3인칭으로 서술하는 부분이다 : 1:1-4 // 34:1-12.  전자는 모세가 모압에서의 특별한 활동의 시작을 알리고 후자는 모세의 죽음을 다룬다.  이 두 부분은 그 안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여 운송하는 보자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안에서는 실제로 모세가 거의 모든 부분에서의 서술자로 등장한다.  이것은 신명기의 시작과 끝이 모세의 모압에서의 활동과 그 끝으로 이루어짐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신명기의 이러한 독창적이고 전무후무한 상황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전통 위에 서 있음 : 우선 신명기는 출애굽기에서 민수기까지에 포괄적으로 표현된 시내산언약의 기초 위에 확실하게 서 있다.  그 본래의 내용을 결코 벋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쉽게 언약법의 핵심인 십계명의 거의 그대로의 반복에서 볼 수 있다 : 출 20:1-17, 신 5:6-21.  그리고 언약관계 당사자의 공적인 정의에 대한 표현에 있어서 알 수 있다 :   

   출 19:5-6 :   보배  -----  제사장 나라            --- 구별된 백성
                 (segullah)                                 (goi qadosh)
   신 26:18-19 : 보배  ----- 칭찬,명예,영광 / 지존자  --- 구별된 백성
                 (segullah)                   (elyon)       (am qadosh)

 (2) 반복이 아닌 진정한 발전 : 그렇다고 해서 신명기는 단순한 반복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 진정한 역사적 발전을 담고 있다.  십계명을 표현해도 그 속에 진정한 발전을 볼 t수 있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제 4계명이다.  더 구체적으로 법을 다룸에 있어서도 훨씬 더 구체적이고 발전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출 21-23장까지가 시내산언약의 세부법이라면 신 12-26장 전체가 모압언약의 세부법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두 법체계의 근본적인 내용은 동일하게 십계명의 구조를 따르고 있으나 신명기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모습을 보인다.  또 같은 언약적 축복과 저주이나 시내산언약의 축복과 저주(레 26장)에 비하여 풍성하고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신명기의 축복과 저주이다 (신 28장).

 (3) 독창적인 내용과 표현방식들 : 신명기의 내용과 표현은 독창적이다.  예를 들어서 시내산언약에서 제사장 나라(출 19:6)라는 용어를 칭찬-명예-영광 그리고 지존자로 풀어서 표현함(신 26:19)으로 그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내었다.  출애굽기에서 십계명(출 20:1-17) 어서 바로 세부법(출 21-23장)이 주어졌으나, 신명기에서는 십계명(신 5:6-21)과 세부법(신 12-26장) 사이에 긴 강화 내지 설교가 포함되어 있다 (신 6:4-11:32).  이것은 신명기에 아주 흔하게 나타나는 설교적 표현들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현실(재)적 목적에 충실함 : 신명기는 이 책이 만들어지던 상황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고 그 현실적인 목회적 목적에 부응하는 내용과 구조를 가진다.  신명기는 전체적으로 설득적이다.  심지어 법 항목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고대법에 비하여 엄청나게 높은 동기절(動機節 motive clause)의 사용비율이 높음을 통하여 이 선포와 낭독을 듣는 이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유도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설교적인 신명기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이다.

 (5) 신명기는 읽혀지는 책이 아니라 낭독되고 들려지는 책 D.L. Christensen, Deuteronomy 1:1-21:9 (WBC), ci.
: 이런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신명기는 읽혀지는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은 의도적으로 공적인 예배적 상황 속에서 낭독되고 들려지도록 만들어졌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점이 신명기가 신학적 내용에 있어서도 독특할 뿐 아니라 상황적 구조나 형식에 있어서도 완연히 구분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2. 신명기의 신학

2.1. 신명기신학의 기초로서의 사경(四經 tetrateuch)

 신명기의 내용은 사경(tetrateuch)과 상관이 있는 점은 명확하다.  그 중에서 핵심으로서의 언약적 상관성은 필자가 명백하게 지적하였다.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2003, 13-55)을 참조하라.
 즉 창세기는 족장언약을,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는 시내산언약을 나타내고 신명기는 모압언약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언약들이 모두 하나의 목표인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려고 한다.  창세기의 족장언약은 하나님 나라의 씨와 땅이 준비완료되는 것을 드러내고,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시내산언약은 하나님의 나라의 씨가 완성되는 것을 나타낸다.  이에 비해서 신명기의 모압언약은 땅의 완성을 나타낸다.  이렇게 해서 다섯 책이 하나를 이루어서 하나의 총체적인 목표를 이룬다.  이 점에서 신명기는 독창적이기는 하나 선배의 기초  위에 명확하게 서고 있다.
 특히 신명기는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기초 위에 선다는 것은 이미 많이 지적되었다.  시내산언약은 최초의 언약으로서 가치를 가지지만 신명기의 모압언약은 갱신되는 언약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특히 신명기에서 언약형성에서 시내산언약을 전제로 하고 있는 부분은 언약당사자의 직접대면이라는 부분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의 당사자로서의 이스라엘과의 만남은 시내산에서 최초로 이루어졌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언약갱신은 모두 이 언약의 만남을 전제로 한다.  신 5:2-5에 나타난 소위 열조의 역사의 ‘현재화’(Vergegenwaertigung, actualization)는 바로 이런 점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그 때 그 시내산의 언약체결의 현장에 이미 후대에 있는 이스라엘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이 법적인 관련성인데 그 중에 차이가 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출애굽기에서는 공적 예배장소의 복수성(출 20:24)을 나타낸 반면에 신명기에서는 예배의 중앙집중화를 표방한다 (신 12장).  이러한 차이를 여러 가지 신학적 배경을 따라서 해석하는 전통이 주어졌으나 두 본문의 실제적인 차이를 그대로 일단은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출애굽기의 본문은 이스라엘에게 아직 그 땅이 주어지는 상황이 아닌 가운데 주어진 것이나, 신명기의 경우는 이스라엘이 이제까지 살던 성막을 중심으로 하던 삶을 중지하고 다양하게 흩어진 삶을 살아야 하는 경우를 반영하고 있다.  그럴 경우에 언약공동체가 하나로 될 수 있는 상황을 아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배처소의 단일화로서 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2.2. 신명기의 언약적 기초로서의 모압(세겜)언약

 이제 신명기의 핵심부분(신 4:44-29:1)에 담긴 신학에 대해서 살필 때가 되었다.
 신명기의 모압(세겜)언약은 실체성은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도깨비같은 언약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신명기의 ‘모압언약’(신 29:1)이라는 표현은 실체적이고 그 실체의 구체적인 내용은 신 4:44-29:1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 (1998).
 거기서 명확하게 호렙(시내산)언약의 실체성 외에 모압언약의 실체성을 인정하고 있는데, 주로 학자들에게 어려움은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의 상관관계였다.  신 5:2-5에 나타난 시내산의 언약맺는 현장에 왜 현세대, 즉 출애굽 제 2세대가 거기 그 시간에 원리적으로 있었다고 표현하는 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에 의하면 출애굽 당시의 시내산언약의 원리를 그대로 응용하는 모압언약의 성격 때문에 그러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의 것을 거의 그대로 응용하는 것이 시내산언약 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속에는 그 후대에 이루어질 언약의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되었으므로 그것에 근거하여서 언약갱신을 이루는 것을 표현할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압언약을 표현하는 중심부분인 신 4:44-29:1에서 수많은 '신언공식'(神言公式 divine speech formular)를 볼 수 있다.  모압언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2.2.1.  언약당사자의 공적 관계정의 (신 26:17-19)

 이 점은 시내산언약의 그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시내산언약의 경우는 거의 하나님 편에서의 언약관계적 표현을 한다 : 출 19:(1-4)5-6(7-8).  그러나 신명기의 경우는 언약의 양당사자의 입장이 골고루 고려되어 있다 : 신 26:17-19.

 신 26:17 : 이스라엘의 편에서의 여호와의 언약적 위치로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된다는 선포를 한다.
 신 26:18-19 : 여호와 편에서의 이스라엘의 언약적 위치로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보배(am segullah), 칭찬,명예,영광/지존자(elyon), 탁월한(거룩한) 백성
            (am qadosh)이 됨을 선포한다.

 이 선포는 모압언약을 세울 때에 새롭게 한 것이라기 보다 시내산언약에서 이미 형성된 관계를 원리적으로 부연하면서 재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약관계는 영원히 고정되기 때문이고 필요한 것은 상황마다 그 원리적 선언을 재사용, 재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2.2. 언약당사자의 공적인 대면

 이 부분 역시 모압언약에서 새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이미 시내산언약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근거로 해서 부연 설명하는 것만이 주어졌다 : 신 5:3-5.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였고 직접 음성을 들은 사실의 심각한 경험성은 강하게 표현되었다 : 신 5:23-27.  그 경험이 바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 아니라 현재 이 모압 땅에 서 있는 출애굽 제 2세대에 하신 것이라는 소위 ‘역사의 현재화’(actualization)의 과정을 통하고 있다.

2.2.3. 언약법의 선포

 언약법은 두가지 형태로 표현되었다.  하나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선포요 둘은 그것에 대한 세부법을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가지고 오는 것이다.  이 두가지가 표현되는 양식에 있어서는 시내산언약의 상황과 같으나 (출 20:18-22), 모압언약에서 새로운 차원이 소개되었다.  그 새로운 차원은 모세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대리적 선포의 권위를 사용하여서 자신의 말로 백성에게 세부법을 선포하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이 직접 선포하신 언약법으로서의 십계명의 절대적인 권위는 부인할 수 없다 (신 5:6-21).  그것은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시내산언약의 그것과 거의 그대로 표현되었다 (출 20:1-17).  그러나 그 약간의 차이는 제 4계명에서 발견하는데 그것은 신명기의 모압언약법의 법정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이다.  즉 안식일 계명의 기초가 창조가 아니라 재창조, 출애굽이 됨으로 훨씬 더 우리의 행동의 기초가 역사적이 된다.  그래서 모압언약세부법이 담긴 신 12-26장에서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해야 할 많은 종교적 윤리적 행동의 기초 원리가 됨을 알 수 있다.    
 또 둘째로 모세를 통해서 간접으로 선포하신 세부법(신 12-26장)도 원리적으로 직접 선포하신 법, 십계명(신 5:6-21)에 근거하는 것은 시내산언약법과 동일하다.  그러나 그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훨씬 더 확대되었고 자세하며 설득력있게 표현되었다.  무엇보다도 신 12-26장에 표현된 세부법은 하나님에게서 모세가 받아오는 면(신 5:31)보다 그것을 전제로 하는 면이 두드러졌다.  오히려 모세 자신의 말로 그 법들은 백성들에게 절대적 권위로 선포되었다.
 무엇보다도 독특한 면은 모세를 통한 세부법이 주어지기 전에 (신 12장), 모세의 긴 설교와 같은 것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 신 6-11장.  이것을 소위 주요법(主要法 Hauptgebot)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했고 앞 뒤 문맥과의 상관관계는 설명되지 못했다. N. Lohfink, Das Hauptgebot. Eine Untersuchung literarischer Einleitungsfragen zu Dt 5-11, Rome, 1963.
 이제 우리는 전체 구조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배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 4:45-11:32까지의 모압언약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와 12:1-28:68까지의 세부적인 묘사 속에 평행법적 반복을 이루며 대칭을 이룬다.  즉 신 5:6-21과 신 6:4-11:25까지에서 모압언약의 법적요소가 일반적으로 표현되었는데 비해서 신 12:1-26:15에서 모압언약의 법적인 요소가 세부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신 6:4-11:25까지에서 시내산언약에서는 없는 모세의 긴 설교 혹은 강화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신명기가 모세 자신의 권위적인 말로 표현된 것과 관계한다. 

2.2.4. 언약갱신예식체결

 이 요소와 아래의 요소(2.2.5.)는 신명기에서 크게 부각되지 못한 것은 신명기의 주요관심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가서 해야 할 법적인 행동에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후자의 요소가 극단적으로 축소된 것을 알 수 있다 (신 27:7뿐 “여호와 앞에 즐거워하라”).  언약갱신예식이 체결될 장소는 여기, 모압이 아니라 세겜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강조되어야 할 요소는 여전히 법이었다.
 먼저 신 27:1-8에서 언약갱신예식을 체결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법의 수행과 기록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27:1,3,8) 그리고 강조해서 (27:8 “명백히 기록할지리니라”) 표현한다.  이어서 언약적 축복과 저주의 선포(신 28:3-6,16-19)와 그것에 대한 모압에서의 모세의 부연설명(신 28:7-14,20-68)에 있어서도 얼마나 언약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가를 설명한다.  또 백성이 해야 할 서약(dodeca-logue 신 27:15-26)에 있어서도 그 시대에 당장에 필요한 법적인 요소가 구체적으로 강조되었다. 이런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필자의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1998), 3.9., 3.10.을 참조하라.

2.2.5. 언약체결축하피로연

 이것도 장차 세겜에 가서 여호수아의 지휘하에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가장 들 강조된 부분이다 (신 27:7, 수 8:30-35, 비교 출 24:9-11).  그러나 명백히 이 요소가 언약체결시에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위의 요소와 함께(2.2.4.) 이 요소가 명백히 여호수아의 영도하에 행해졌을 것이나, 정작 여호수아서에서 이 요소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요소가 행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인 것은 축제와 즐김이 중요한 고대의 예식이기 때문이다.


2.3. ‘땅의 신학’으로서의 신명기 신학

 이런 기본적인 언약신학의 요소 외에 신명기 만이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신학적 요소가 있는 데 바로 땅의 신학이라는 점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신학자들이 많이 언급하였으나 그 이유에 대해서 소개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앞의 시내산언약과의 상관관계나 창세기의 족장언약과의 상관관계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더 나가서 언약과 하나님 나라의 상관관계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 나라가 역사 속에 구현되려면 반드시 세 요소가 있어야 한다 : 국민(씨), 주권(뜻), 영토(땅).  이 요소를 구현시키는 역사적인 방법과 수단이 바로 인격당사자인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맺는 언약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일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행동하신다.  즉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시내산언약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씨의 완성을, 신명기의 모압언약에서는 땅의 완성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시내산언약이 독자적이지 않고 모압언약을 필요로 하듯이 모압언약도 시내산언약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두 언약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는 데, 이 둘이 합쳐서 하나님 나라의 씨와 땅의 완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 두 요소가 완성되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현재적으로 이루어야 한다.  이 현재적 요소에 있어서 칼과 같이 명백함을 시내산언약에서나, 모압언약에서 볼 수 있다. 
 즉 신명기는 그 땅을 소유할 것을 전제로 하고 그 땅에서의 구체적인 삶의 다양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씨의 완성의 요소가 강한 시내산언약 세부법의 간략한 모습보다 모압언약 세부법이 자세할 수 밖에 없다.  신명기에서야 말로 이제는 이스라엘이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구현할 수 있게 된 상황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러 가지 구체적인 상황 중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모압언약 세부법 중에서 가장 먼저 표현된 예배처소의 중앙집중화이다 (central sanctuary law 신 12장).  즉 땅을 정복하고 난 뒤에 흩어져서 살게 되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12지파가 하나가 된 언약공동체를 이룰 것인가의 문제는 아주 중요한 관건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신명기에서 중요한 땅의 요소라는 거점 때문에 특별히 주어진 법이라고 볼 수 있다. 


2.4. 신명기의 역사철학 (4:29-30, 30:1-10)

 이제 신명기의 중심부(신 4:44-29:1)를 벋어나면서 외곽에 위치한 내용들의 의미를 볼 때가 되었다.  이 내용들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신명기의 독특한 상황적 구조(situational structure) 속에서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 4:29-30, 30:1-10에 나타난 신명기의 특별한 역사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양 본문이 놓인 장들은 역사를 앞뒤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앞으로 멀리 진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즉 신 4장은 현재 모압 땅에서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창조까지 이르며, 29-30장은 역사를 미래로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먼 미래인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됨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런 양자의 시간의 확장 속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교훈이 바로 4:29-30과 30:1-10에 나타난 신명기의 역사철학이 보이는 부분이다.
  이 둘은 동일하게 인간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의지의 현실화와 관계되는 데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의지이다.  하나님의 뜻만이 나타나면 역사는 인간에게 무의미하고 인간은 로봇과 같은 존재가 된다.  반면에 인간의 의지만 발현되면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허무와 무의미 밖에 없게 된다.
 이제 언약으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이것이 적용되는데 특별히 이스라엘이 한계상황 속에 처했을 때에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생활이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역시 바랄 수 있는 것은 두가지인데 이스라엘의 행동과 하나님의 행동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파멸이라는 이 역사적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있는데 그것은 이 두 행동주체가 서로 가진 특별한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언약관계와 그 속에서 표현되는 원리인 인자와 성실(chesed we-emet)이다.  언약의 양주체는 이 원리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이스라엘의 파멸이라는 절대적 위기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아야 할 것은 언약적 성실함(emet)으로 언약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약의 다른 당사자인 여호와 편에서 언약적 자비(chesed)를 베푸실 날은 이스라엘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있다.  이러한 변증법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상황타개의 긴장된 모습이 양 본문 속에 드러난다.  즉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도(신 4장), 역사를 미래까지 전개해도(신 29-30장) 이 긴장을 인간은 벋어날 수 없고 오히려 그 속에 충실할 때에 역사가 해방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그런데 신 4:29-30은 어느 정도는 이 열쇠를 표현하고 있으나 30:1-10만큼은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지 못하다.  신 30:1-10은 이 두가지를 특별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스라엘 편의 언약적 의무인 언약적 자비(chesed)를 두 번 표현한다 (신 30:2,9-10) :

    이스라엘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순종하면”
                  ---> 여호와가 회복케 하시리라 

이것은 조건과 결과라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즉 이스라엘이 언약적으로 다시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자비가 맛보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있는 신 30:6에는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이 이런 조건을 채우지 않는 데도 부어지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이것은 거의 하나님 편에서의 무조건적 자비베푸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역사의 현실 속에서 이런 것이 가능한가 ?  하나님은 인간을 조롱하시는 듯이 역사를 조정하시는가, 아니면 역사는 인간편의 활동으로만 충만한가 하는 선택적 질문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둘 중의 하나로 빠지는 것은 아닌가 ?  특히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 속에서 역사는 어떻게 이렇게 진행될 수 있는가 ?  하나의 대답은 여호와는 자신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의 개별적 모습에 대해서는 철저한 언약적 심판을 행할 수 있지만, 총체적 이스라엘은 전멸시키실 수 없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다” (애 3:22).  이것이 언약적 자비의 실체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이스라엘마다 이런 하나님의 마지막 자비를 경험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것은 총체적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역사요 궁극적인 하나님과 언약의 승리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개별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가 있다.  그것은 총체적, 거시적, 초역사적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자비가 주어지고야 만다는 것을 믿고 혹시 자신의 시대에 경험될 수도 있다고 기대하며 그 기대를 후손들에게 전하는 일이다.  그 기대가 성취될 때에는 우리가 가장 어려워하던 일이 일어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렇게 예언자들이 앞으로 호통치면서 이스라엘의 책임으로 선포하던 것이 될 것이다.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로 이루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복음은 장차 후대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진행하는 동안 이 복음을 기대하면서도 개별 이스라엘의 역사적 책임의식은 조금도 죽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앞으로 수천년의 역사를 이어가면서 지고가야 하고 궁극적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역사의식인 것이다.  이 역사의식은 특히 앞으로 예언자들의 고통스러운 개인적 삶과 심판받으나 궁극적인 미래의 승리를 확신하는 공동체를 향한 선포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3.5. 신명기의 상황적 구조에 나타난 삶의 정황 : 정기적 언약갱신축제 (31:9-13)

 신명기의 상황적 구조(situational structure)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고대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은 정확하게 재구성하기는 극히 힘들다.  우선 성경이 이런 것에 대한 적극적인 증거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고, 고대 근동의 제의들로 성경을 재구성하는 데 동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이 여호와와 맺은 언약관계는 아주 독특하기 때문이다.

3.5.1. 독특한 문서조항 (document clause) : 정기적 언약법의 공적인 낭독 (신 31:9-10)

 그러나 이런 삶의 정황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요청이 본문 자체에서 일어난다.  즉 신 31:9-13의 내용은 조약문에서의 소위 ‘문서조항’(document clause)과 관계한다.  조약, 특히 종주권조약(suzerainty treaty)을 맺은 약한 당사자 국가(왕)는 그 조약문을 정기적으로 꺼내서 공적 예식에서 낭독(봉독)하게 되어 있는 의무조항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과 유사한 것이 신 31:9-13에서 발견된다.  이스라엘은 토라를 제 7년 즉 정기면제년 초막절마다 정기적으로 꺼내어 봉독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하여 H. Gunkel - S. Mowinckel - G. v. Rad를 이으면서 하나같이 학자들은 7년을 1년으로 본문을 수정하고 그 이유로 고대근동의 매년제(Thronbesteigungsfest)에서 이것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근동의 매년제와 이스라엘의 7년마다 하는 이 제의는 성격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고대 근동의 매년제는 신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자연현상에 절기를 맞춘 자연종교의 모습을 가진다면, 고대 이스라엘은 언약과 언약법의 수행이라는 역사적 행위에 특정절기를 지정하는 역사적 모습을 지닌다.  새해가 출발되는 일반적인 초막절이 아니라 매 7년마다 하는 정기면제년 초막절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초막절을 보통의 초막절과는 다른 독특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절기를 우리는 언약갱신축제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축제의 편린을 우리는 시 24, 50편에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필자의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II (두란노, 2004 예정)을 보라.


3.5.2. 재구성해 본 삶의 정황(Sitz im Leben) : 길갈전승 가설
  
 그러면 이러한 해석이 역사적인 사실로 있을 수 있는 삶의 정황은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구체적인 증거 부족으로 재구성은 거의 불가능하나 가설로 재구성해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소위 ‘길갈전승’이다.  이 가설은 이스라엘의 7년 정기면제년 초막절마다 진행되는 언약갱신의 축제기간에 이스라엘이 출(出)애굽-입(入)가나안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을 기초로 한다.  즉 가나안 정복의 초기에 중요거점이었던 길갈에서 나중에 이스라엘의 중심이 될 증거막이 유하던 곳, 그 중에서도 예루살렘까지의 순례행진과 같은 것을 행했을 것이다.  그 때에 가나안 입성 때와 같이 증거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행진을 했을 것이다.  증거궤를 메고 중심도시인 실로나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에 시편 24편과 같은 것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시 24:7,9).  그리고 그 성에 도착하고 나서 증거궤 속의 언약의 책(seper haberith)이 봉독되는 가운데 예식이 7일 정도 진행될 것이다.  실제로 6-7시간이면 낭독이 끝날 수 있는 신명기의 양이 7일동안 전개되는 초막절의 행사에 적당할 것이다.  소위 ‘레위인 설교자’(levitical preacher)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하여서 봉독된 언약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설명하였을 것이다.  이런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느 9장과 같은 언약갱신과 같은 후대의 역사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이 속에도 생길 수 있는 위선과 타락에 대한 경고가 시편 50편 같은 곳에서 주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신명기의 상황적 구조에 나타난 신학적 내용인 언약갱신축제는 여전히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적 원리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것이 행해지는 의 정황으로서의 길갈전승가설을 통해서 우리는 설명 가능한 다음 단계의 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의무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