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날 묵상 - 창50:1-26 <창세기 이야기는 가정이야기이다. 본토 친척집을 떠난 아브라함의 시대가 저물로, 이스라엘 민족의 12지파 시대가 시작되기까지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가정이다>
1.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이 저물고 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이스라엘 민족의 토대가 되었던 야곱이 이제 본향으로 가고 있다.
2. 친척 본토 집을 떠난 아브라함이후로,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과 12지파에 이르기까지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된 아브라함 가족의 이야기를 뒤로 하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3. 새로운 시대의 주된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이야기이다.
4. 요셉을 중심으로 아버지와 형제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여전히 불안한 부분이 있다.
5. 요셉은 아버지를 향해 마지막까지 섬김과 사랑으로 나아간다.
6. 야곱은 참으로 축복받은 인생이다.
7.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주셨던 말씀으로 돌아가보자.
8. 창세기 25장 23절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나님은 야곱을 자손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시고,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9. 창28장 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28장 14절에서 야곱에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애굽의 430년의 생활과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땅 입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울러, 야곱이 어디로 가든지, 심지어 애굽으로 내려가기까지 하나님은 지키시고 돌보아 주셨으면, 다시금 애굽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는 가나안 땅에 장사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하나님이 벧엘에서 주신 약속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짐을 보게 된다.
10. 창32장 28절 "그가 이르데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과 손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12지파의 시작이 되었다. 야곱의 자신의 이름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민족의 처음이 되었다.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어 싸웠다. 세상과 세상의 이치와 세상의 방법과 싸우지 않았다. 그의 믿음이 날로 견고하여 짐을 볼 수 있다.
11. 야곱의 축복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졌다.
12. 야곱은 이젠 남은 자들이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가야 하는지에 대한 몫은 그들 스스로에게 남겨두었다.
13. 창세기는 요셉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요셉의 죽음이 아마도 형제들의 죽음과 시차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출애굽의 이야기를 통해서 볼 때, 12지파의 민족성은 하나였고, 또한 가나안 땅에 되돌아가는 정체성에 대한 신앙교육도 잘 유지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참고, 24절, 25절.
14. 새로운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될까?에 대한 시작은 좋았지만, 어떻게 진행되어질지에 대한 불안은 여전하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다.
15-21절 - 요셉의 형제들은 불안해 하고 있다. 요셉은 그 형들을 위로하고 있다.
15. 그러나 형제들의 불안으로 창세기가 마무리 되지 않고, 요셉의 위로와 요셉이 자손들에게 전한 말씀을 보면, 야곱의 아들로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이야기의 시작은 하나됨이었다고 할 수 있다.
16. 창세기의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이다. 또한 공동체의 이야기이며, 가족의 이야기이다. 결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17.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에 한 사람에 대해 강조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연합이어야 한다. 결코 혼자일 수 없다.
18. 결국 혼자가 아니라면, 가정이 이야기가 곧 교회의 이야기이며, 가정같은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로 이어지게 된다.
19. 다시금 가정으로 돌아간다. 가정이 올바르게 세워지면, 교회가 올바르게 세워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올바르게 세워진다.
20. 교회의 기초가 가정임을 기억하고, 교회는 가정이 바로 서는 사역에 집중해야 한다. 가정이 바로 서야 교회가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21. 창세기를 마무리하면서 지난 8개월의 말씀 묵상을 다시 정리하려고 한다. 가정을 중심으로 재구성하여 "창세기의 이야기는 가정의 이야기이다"라는 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22. "창세기의 이야기는 가정의 이야기이다"라는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1) 혼자가 아니다. 연합니다.
2) 가정이 믿음안에 서야 교회가 바로 선다.
3) 가정으로 시작되어 교회가 되고, 교회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간다.
23.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지난 시간 창세기 묵상이었다.
24.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며, 주신 말씀에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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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곡하는 시한이 지내매"
5절 "가나안 땅에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내가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10절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11절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14절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 ...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요셉이 형들을 위로하다. 15-21절.
요셉의 죽음. 22-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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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pril 8, 2012
Friday, March 16, 2012
한 날 묵상 - 창44:1-34절 <선을 악으로 갚지 않는 길을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 바로 유다와 형제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을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한 삶을 결단하는 내가 되는 한 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1. 어찌 우리가 선을 악으로 갚을 수 있을까요?
2. 세상은 선을 악으로 값는 일이 태반사입니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됩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됩니다.
자신에게 이익된다면 어떠한 선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양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3. 양심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선한 양심이 정도를 걸어가게 합니다. 양심은 가치관이라 할 수 있으며, 정체성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자기 가치관과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은 성경 말씀 곳곳에 공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힘있는 사람뿐 아니라, 약한 사람들도 공의로 다스리를 것을 말씀하십니다.
물론 둘 다 사랑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의를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5. 선을 악으로 갚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세상에서 살아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그렇지 안다. 선을 악으로 갚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다. 이게 상식이 되어 있다. 참으로 희한한 세상이다.
6.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똑같아야 할까? 아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까?
7. 요셉의 형제들이 처한 작금의 상황은 너무나 억울한 상태이다. 그들은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 양식을 구하러 갔을 때 일어났던 일들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모든 것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8. 요셉도 이러한 경험이 있었다. 보디발의 집에서 당한 억울함이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며 그 시기를 믿음으로 이겼다.
9. 우리에게 이러한 일들이 닥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혼자 살아보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을 덮으려 하지 않았을까?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혼자라도 살아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10. 어찌 보면, 요셉의 형제들을 요셉을 시험한 상황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이 나를 팔았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할까?' '똑같이 할까? 아니면 달리 할까?'
11.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때와는 달랐다. 무너져 버릴 수 있는 아주 어려운 시기였지만, 형제애로 이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해 가고 있다.
12. 유다는 스스로 베나민을 위하여 인질이 되기는 길을 차청했다.
여기에서 요셉과 베냐민을 유다가 어떻게 대하는지 비교해보자.
창 37장 26-27절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쳥종하였더라"
창44장 16절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모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가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창44장 33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13. 유다는 요셉의 때에는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선택을 하였다면, 지금은 모두가 함께 짐을 짊어지고 있다.
14. 또한, 유다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긴다. 아버지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보다 훨씬 큼을 알다(34절).
15. 나아가, 유다는 절규하고 있다. 가족을 살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가기 위한 요셉앞에서 절규의 모습을 보라(18-32절).
16.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이만큼 자라났다. 아직도 부족함이 있지만, 요셉을 팔때보다 성숙함이 틀림없다. 그들은 선을 악으로 갚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17. 아직이었을 때, 그들은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들이었다면, 이미인 이 때 그들은 선을 더욱 아름답게 할 수 있었다.
18. 요셉과 야곱의 만남을 향해 정점으로 가는 요셉의 가족이야기는 아름다움이 한층 깊어지고 있다. 아끼며 사랑하며 생명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19. 선으로 악을 갚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할 사명을 받았다.
2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행하셨다. 우리의 죄악을 짊어질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을 통해 믿음으로 의로움을 입게 되었다.
21. 이제 우리가 반응할 차례이다. 선으로 악을 갚는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선을 더욱 아름답게 하느냐? 내가 선택해야 할 시점이다.
22. 오늘도 선을 악을 갚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
23. 하나님이 주신 선을 악으로 갚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24. 그렇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가운데 스스로 실천해가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위해 아낌없이 세상에 하나님의 선을 드러내는 삶이다.
25. 오늘 내가 가야 할 선을 악으로 갚지 않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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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 억울함.
12절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13절 "그들이 옷을 찢고"
=>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다. 어떻게 하나? 모든 것이 최악으로 가고 있다.
* 형제 우애
16절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 꿈이 이루어지다.
24절 "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유다가 지금 아버지 야곱을 요셉의 총리의 종이라고 낮추어 말하고 있다. 창37장10,11절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
18-34절 유다의 아버지 사랑, 형제 사랑, 가족 사랑의 마음.
33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34절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럽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 요셉을 팔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요셉을 팔 때와 비교해 보자.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Tuesday, January 31, 2012
한 날 묵상 - 창40:1-23 <하나님과 함께 함이 느껴질 때 간절한 소망과 바램은 생기게 마련입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고, 꿈대로 이루어짐을 통해 간절한 소망과 바램을 가졌을습니다. 그렇지만 그 간절한 바램과 소망은 결코 하나님의 때를 앞서지 않았습니다.>
한 날 묵상 - 창40:1-23 <하나님과 함께 함이 느껴질 때 간절한 소망과 바램은 생기게 마련입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고, 꿈대로 이루어짐을 통해 간절한 소망과 바램을 가졌을습니다. 그렇지만 그 간절한 바램과 소망은 결코 하나님의 때를 앞서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있는 곳에 형통함이 있는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요셉의 장기(?)인 꿈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꿈 해석과 해석되로 이루어짐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고난을 벗어날 한 줄기 희망처럼 다가왔지만, 이 또한 속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간절한 소망과 바램이 하나님의 때를 결코 앞서지 않았다.
1절 "그 후에"
2절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절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 "그 후에"와 "곧"을 연결하여 읽다보면, 어떠한 손길을 느낄 수 있음을 성경은 의도적으로 말하고 있다. 요셉이 옥에 잡혀 들어가고,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신 "그 후에",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굽는 관원장이 옥에 갇히게 되었다.
=> 그들의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그곳에 누구의 손길이 있었어!
그들의 만남은 시종드는 요셉과 갇힌 자들이었지만, 단지 거기까지가 아니다. 그 이면에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보게 된다.
=> 하나님의 손길이 요셉이 가는 곳마다 형통하게 하였고, 또 한번 하나님과 함께 함에 누릴 수 있는 형통함이 요셉과 함께 할 두 관원장들 앞에 드러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또 다시 들어날 요셉의 형통함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어지는지 말씀을 통해 계속 살펴보자.
요셉의 또 다른 형통함의 이야기는 요셉의 장기인 것으로부터 꿈, 그리고 꿈해석으로 부터 시작된다.
꿈으로 시작됨.
5절 "옥에 갇힌 ...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6절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7-8절 "요셉이 .. 어찌하여 ...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 내게 이르소서"
=> 자신감. 확신. 거칠 것 없는 질주. 옥에 갇혀 그 신분이 시종드는 자가 어찌 이러한 기질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의 힘인가? 하나님과 함께 함이다.
꿈을 해석함.
9-19절 요셉의 꿈을 해석함.
12절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 술 맡은 관원장
14절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주소서"
=> 그에게 소망이 있었다. 나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18절 "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 떡 맡은 관원장
꿈이 실제로 이루어짐.
20-21절
21절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22절 "떡 맡은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23절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 결코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14절에서 보듯이 소망이 있었고, 나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결코 그는 하나님의 때를 앞서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꿈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남.
창 41장에서 이어짐.
요셉은 관원자의 꿈이야기를 보면서 자신의 때를 보았을 것이다.
나의 꿈은 지금 어디가지 와 있는가?
꿈 -> 해석 -> 이루어짐 -> 하나님의 통치.
요셉이 있는 곳에 형통함이 있는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요셉의 장기(?)인 꿈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꿈 해석과 해석되로 이루어짐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고난을 벗어날 한 줄기 희망처럼 다가왔지만, 이 또한 속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간절한 소망과 바램이 하나님의 때를 결코 앞서지 않았다.
1절 "그 후에"
2절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절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 "그 후에"와 "곧"을 연결하여 읽다보면, 어떠한 손길을 느낄 수 있음을 성경은 의도적으로 말하고 있다. 요셉이 옥에 잡혀 들어가고,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신 "그 후에",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굽는 관원장이 옥에 갇히게 되었다.
=> 그들의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그곳에 누구의 손길이 있었어!
그들의 만남은 시종드는 요셉과 갇힌 자들이었지만, 단지 거기까지가 아니다. 그 이면에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보게 된다.
=> 하나님의 손길이 요셉이 가는 곳마다 형통하게 하였고, 또 한번 하나님과 함께 함에 누릴 수 있는 형통함이 요셉과 함께 할 두 관원장들 앞에 드러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또 다시 들어날 요셉의 형통함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어지는지 말씀을 통해 계속 살펴보자.
요셉의 또 다른 형통함의 이야기는 요셉의 장기인 것으로부터 꿈, 그리고 꿈해석으로 부터 시작된다.
꿈으로 시작됨.
5절 "옥에 갇힌 ...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6절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7-8절 "요셉이 .. 어찌하여 ...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 내게 이르소서"
=> 자신감. 확신. 거칠 것 없는 질주. 옥에 갇혀 그 신분이 시종드는 자가 어찌 이러한 기질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의 힘인가? 하나님과 함께 함이다.
꿈을 해석함.
9-19절 요셉의 꿈을 해석함.
12절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 술 맡은 관원장
14절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주소서"
=> 그에게 소망이 있었다. 나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18절 "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 떡 맡은 관원장
꿈이 실제로 이루어짐.
20-21절
21절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22절 "떡 맡은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23절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 결코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14절에서 보듯이 소망이 있었고, 나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결코 그는 하나님의 때를 앞서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꿈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남.
창 41장에서 이어짐.
요셉은 관원자의 꿈이야기를 보면서 자신의 때를 보았을 것이다.
나의 꿈은 지금 어디가지 와 있는가?
꿈 -> 해석 -> 이루어짐 -> 하나님의 통치.
Monday, January 23, 2012
한 날 묵상 - 창 39:1-6 <이끌려 애굽으로 내려간 요셉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함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 좇음이 아니라 요셉도 하나님의 동반의 요청에 함께 순응한 모습입니다.>
한 날 묵상 - 창 39:1-6 <이끌려 애굽으로 내려간 요셉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함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 좇음이 아니라 요셉도 하나님의 동반의 요청에 함께 순응한 모습입니다.>
요셉이 끌려 원치 않는 길로 갔지만 그가 누린 형통함의 비결이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좇아감"이 아니라 요셉과 "함께"하였습니다. 오늘 한 날도하나님과 함께 갑시다
요셉이 끌려 원치 않는 길로 갔지만, 그곳에서 그가 누린 형통함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좇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짝사랑에 반응하여 함께 하기를 선택함이 바로 형통한 자의 모습입니다.
1절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 자신의 꿈과는 반대의 길로 강제로 내려가는 요셉.
자신의 계획과 의지와는 반대로 이끌려 내려가는 요셉.
그러나, 계속되는 요셉의 이야기에서는 요셉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2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의 ... 집에 있으니"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의 의미는, 하나님의 요셉과 함께 한 의미이면서, 동시에 요셉도 여호와를 떠나지 아니하였다는 의미입니다.
"함께"라는 의미는 쌍방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결코 함께 하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방적인 것은 "좇아감"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요셉을 따라다녔다면,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의 가는 길을 좇아 다니시므로".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쌍방이 함께 걷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 형통함의 기준은? 하나님과 함께 함이다. 형통함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이 꾼 꿈에 따라 일일 척척 진행됨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함에 형통함의 비밀입니다.
오늘 다른 형통함을 좇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기준의 형통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함을 좇아 형통함을 누리는 한 날이 되기를 원합니다.
요셉의 형통함은 또 무엇인가? 꿈처럼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함께 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형통함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어디에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을 주셨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주 나타나실 때임에도 불구하고 애굽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의 형통함은 이러한 것과 전혀 다른 하나님과 함께 함의 모습입니다.
3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 형통함의 기준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잘못 생각하는 것중에 하나가 나만의 하나님입니다. 아닙니다. 내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믿음의 다른 사람뿐만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했는가? 바로 4-5절에서 이어집니다.
4절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5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 나는 얼마나 내가 섬기는 곳에 하나님의 복을 흘러 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는가? 혹 불평, 불만만 쏟아 내면서 동료, 상사, 후배들의 흉만 보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흘러 보내는 통로로 하나님은 요셉을 보디발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후에 계속 이어지는 간수장과의 만남(39:19-24절)에서도, 관원장(40:1-23절)과의 만남에도 동일합니다. 요셉이 가는 길에 하나님에 그에 주신 형통함은 만나는 사람마다 형통함의 복을 흘려 보냄으로써 그들이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형통함의 은혜를 누린 줄 알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끌려 원치 않는 길로 갔지만 그가 누린 형통함의 비결이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좇아감"이 아니라 요셉과 "함께"하였습니다. 오늘 한 날도하나님과 함께 갑시다
요셉이 끌려 원치 않는 길로 갔지만, 그곳에서 그가 누린 형통함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좇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짝사랑에 반응하여 함께 하기를 선택함이 바로 형통한 자의 모습입니다.
1절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 자신의 꿈과는 반대의 길로 강제로 내려가는 요셉.
자신의 계획과 의지와는 반대로 이끌려 내려가는 요셉.
그러나, 계속되는 요셉의 이야기에서는 요셉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2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의 ... 집에 있으니"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의 의미는, 하나님의 요셉과 함께 한 의미이면서, 동시에 요셉도 여호와를 떠나지 아니하였다는 의미입니다.
"함께"라는 의미는 쌍방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결코 함께 하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방적인 것은 "좇아감"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요셉을 따라다녔다면,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의 가는 길을 좇아 다니시므로".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쌍방이 함께 걷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 형통함의 기준은? 하나님과 함께 함이다. 형통함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이 꾼 꿈에 따라 일일 척척 진행됨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함에 형통함의 비밀입니다.
오늘 다른 형통함을 좇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기준의 형통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함을 좇아 형통함을 누리는 한 날이 되기를 원합니다.
요셉의 형통함은 또 무엇인가? 꿈처럼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함께 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형통함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어디에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을 주셨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주 나타나실 때임에도 불구하고 애굽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의 형통함은 이러한 것과 전혀 다른 하나님과 함께 함의 모습입니다.
3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 형통함의 기준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잘못 생각하는 것중에 하나가 나만의 하나님입니다. 아닙니다. 내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믿음의 다른 사람뿐만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했는가? 바로 4-5절에서 이어집니다.
4절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5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 나는 얼마나 내가 섬기는 곳에 하나님의 복을 흘러 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는가? 혹 불평, 불만만 쏟아 내면서 동료, 상사, 후배들의 흉만 보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흘러 보내는 통로로 하나님은 요셉을 보디발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후에 계속 이어지는 간수장과의 만남(39:19-24절)에서도, 관원장(40:1-23절)과의 만남에도 동일합니다. 요셉이 가는 길에 하나님에 그에 주신 형통함은 만나는 사람마다 형통함의 복을 흘려 보냄으로써 그들이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형통함의 은혜를 누린 줄 알수 있게 되었습니다.
Thursday, January 12, 2012
한 날 묵상 - 창 37:1-4 <성실을 식물로 삼을 때 더 큰 사랑을 받는다. 더 큰 사랑이 시기와 미움이 대상이 된다할지라도 무엇보다 더욱 성실하라>
한 날 묵상 - 창 37:1-4 <성실을 식물로 삼을 때 더 큰 사랑을 받는다. 더 큰 사랑이 시기와 미움이 대상이 된다할지라도 무엇보다 더욱 성실하라>
1절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더니"
=> 야곱은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가 거한 곳에, 아버지가 주신 말씀안에, 하나님과 함께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다. 형 에서와는 다른 모습이다.
2절 "야곱의 족보 ... 요셉의 실칠 세의 소년으로서"
=> 야곱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가장 먼저 요셉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상징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는 형들과 달랐다.
요셉은 야곱의 마음에 들었다. 그에게 형제들과 다른 어떠한 것이 그 당시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형제들과 달랐다. 가장 먼저 족보에 언급되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이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 그가 그들의(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 형들과 함께 양을 치고 있었다. 그 때에 그는 정직한 소년이었다. 어떠한 잘못을 형들이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정직하면서도 성실했고, 이러한 것들이 형들과 달랐다. 그리고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바르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랬기 때문에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3절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 채색옷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다른 사람보다 더 귀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4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 형들의 미움을 받을 정도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성실로 식물을 삼았더니(시37:3), 더 큰 사랑을 받은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즉 내가 형들이라면, 내가 요셉이라면, 내가 아버지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질문도 가히 나쁘지는 않다.
요셉의 입장에서 풀어보면, 그는 차라리 아버지의 미움을 받는 것보다 형들의 미움을 받는 편을 택했을 뿐 아니라, 그가 택한 것들이 무엇보다 정직함과 성실함에서 드러나는 것이었기에 더욱 빛을 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을 정도로 아버지를 더 사랑하고 있는가?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함으로 다른 사람의 시기와 질투, 편안하게 대할 수 없는 정도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특별히 정도의 길을 걸을 때 오는 고난,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 때 오는 장애물은 기쁨으로 감당함 마음이 있는가?
우리가 이처럼 좁은 길을 가면,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이다. 무엇보다 개인에게 어떠한 큰 이익이 아니라,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관계가 회복되는 은혜를 주신 다는 것임을 기억하자.
---
시 37:3 "Trust in the LORD and do good; dwell in the land and enjoy safe pasture."
성실로 식물을 삼을 때,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된 요셉.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여호와를 의로하고 선을 행할 때에 다른 사람의 미움과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포기하겠는가?
나는 과연 미움을 받을 정도로 아버지를 더 사랑하고 있는가?
무엇보다 아버지를 더 사랑하고 있는가?
혹, 관계가 틀어질 것이 겁이 나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타협하고 있지는 않는가?
요셉은 형들과 타협하지 않았다.
2절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그는 정직과 성실을 땅에 머무르는 동안 그의 먹을 거리로 삼았다.
오늘 우리의 먹거리는 타협인가? 성실인가?
| 시 37:3 "Trust in the LORD and do good; dwell in the land and enjoy safe pasture." |
1절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더니"
=> 야곱은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가 거한 곳에, 아버지가 주신 말씀안에, 하나님과 함께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다. 형 에서와는 다른 모습이다.
2절 "야곱의 족보 ... 요셉의 실칠 세의 소년으로서"
=> 야곱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가장 먼저 요셉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상징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는 형들과 달랐다.
요셉은 야곱의 마음에 들었다. 그에게 형제들과 다른 어떠한 것이 그 당시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형제들과 달랐다. 가장 먼저 족보에 언급되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이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 그가 그들의(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 형들과 함께 양을 치고 있었다. 그 때에 그는 정직한 소년이었다. 어떠한 잘못을 형들이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정직하면서도 성실했고, 이러한 것들이 형들과 달랐다. 그리고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바르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랬기 때문에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3절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 채색옷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다른 사람보다 더 귀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4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 형들의 미움을 받을 정도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성실로 식물을 삼았더니(시37:3), 더 큰 사랑을 받은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즉 내가 형들이라면, 내가 요셉이라면, 내가 아버지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질문도 가히 나쁘지는 않다.
요셉의 입장에서 풀어보면, 그는 차라리 아버지의 미움을 받는 것보다 형들의 미움을 받는 편을 택했을 뿐 아니라, 그가 택한 것들이 무엇보다 정직함과 성실함에서 드러나는 것이었기에 더욱 빛을 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을 정도로 아버지를 더 사랑하고 있는가?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함으로 다른 사람의 시기와 질투, 편안하게 대할 수 없는 정도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특별히 정도의 길을 걸을 때 오는 고난,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 때 오는 장애물은 기쁨으로 감당함 마음이 있는가?
우리가 이처럼 좁은 길을 가면,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이다. 무엇보다 개인에게 어떠한 큰 이익이 아니라,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관계가 회복되는 은혜를 주신 다는 것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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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37:3 "Trust in the LORD and do good; dwell in the land and enjoy safe pasture."
성실로 식물을 삼을 때,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된 요셉.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여호와를 의로하고 선을 행할 때에 다른 사람의 미움과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포기하겠는가?
나는 과연 미움을 받을 정도로 아버지를 더 사랑하고 있는가?
무엇보다 아버지를 더 사랑하고 있는가?
혹, 관계가 틀어질 것이 겁이 나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타협하고 있지는 않는가?
요셉은 형들과 타협하지 않았다.
2절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그는 정직과 성실을 땅에 머무르는 동안 그의 먹을 거리로 삼았다.
오늘 우리의 먹거리는 타협인가? 성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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