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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October 10, 2013

[매거진S] 다저스를 바꾼 9가지 사건들 - 김형준 칼럼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mlb&ctg=news&mod=read&office_id=224&article_id=000000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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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 블루(Dodger Blue). 오직 다저스 만의 이 색(상표권 등록도 되어 있다)은, 토미 라소다의 혈관 속을 흐르고 있는 색이며, 다저스 팬들이 반 세기 동안 'I~~t's time for Dodger baseball'로 시작해 'Good night, everybody'를 듣고 잠자리에 들도록 한 색이다. 그리고 한국 팬들을 또 다시 뜨겁게 만든 색이 됐다.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팀은 뉴욕 양키스다. 내셔널리그 최고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다. 하지만 단지 트로피 숫자 만으로는 매겨질 수 없는 찬란한 전통이, 다저스의 역사 속을 흐르고 있다. 다저스가 최고의 인기 구단이자 명문 구단이 된 비결은 무엇일까.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김형준]
1. 두 친구
1935년 5월25일 신시내티 레즈의 홈구장 크로슬리필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버튼을 누르자 632개의 전구에 일제히 불이 들어왔다. 야간 경기가 메이저리그 최초로 열린 것. 신시내티 단장 래리 맥페일의 아이디어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야구는 당연히 낮에 하는 것이었는데, 일요일마다 조명 시설을 가지고 빈 메이저리그 구장을 찾아 다녔던 니그로리그 팀들이 하루 두 경기를 하기 위해(니그로리그는 일요일에만 유료 입장 경기를 열었다), 그리고 맥페일이 운영했던 마이너리그 팀 만이, 이 '모양 빠지는' 야간 경기를 하고 있었다(어니 뱅크스의 명언 "Let's play two"도 니그로리그 시절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야간 경기의 효과는 놀라웠다. 퇴근 후 야구장을 찾은 팬들로 인해 입장 수입이 크게 늘어난 것. 팬들이 저녁 식사를 야구장에서 해결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였다. 1938년 6월16일. 브루클린 다저스도 에베츠필드에서 첫 번째 야간 경기를 가졌다. 다저스로 자리를 옮긴 맥페일에 의해서였다. 난생 첫 야간 경기에서, 다저스 타자들은 어둠을 뚫고 날아온 신시내티 자니 반더 미어의 강속구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두 경기 연속 노히터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1939년 맥페일은 두 번째 '혁신'을 시도했다. 최초로 정규시즌 홈경기를 라디오로 중계한 것. 당시 구단들은 라디오 방송을 하면 방문객이 줄까봐 주저하고 있었는데, 라디오 방송은 오히려 팬을 폭발적으로 늘리는 촉매제가 됐다. 라디오 중계를 통해, 다저스는 양키스와 자이언츠를 제치고 뉴욕 최고의 인기 팀이 됐다. 입장 수입과 중계권 수입이라는 현대 프로 구단의 두 기초는, 바로 맥페일이 스타트를 끊은 것들이었다. 한편 레드 바버라는 최고의 인기 캐스터를 배출한 다저스의 전속 캐스터 자리는, 1950년 브롱스 출신의 한 22살짜리 자이언츠 팬에게 넘어갔다. 그 청년은, 내년으로 65년째 시즌을 맞이한다.
1942년 9월24일. 52살의 맥페일은 다저스 단장직을 사임했다. 2차 세계 대전에 장교(대령)로 참전하기 위함이었다. 맥페일은 자신의 자리를 가장 친한 친구에게 넘겼다. 당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구단주와 갈등을 빚고 있었던 그 친구는, 다저스에 온 후 두 가지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처음 시도해 큰 성공을 거둔 팜 시스템, 그리고 흑인 선수를 반드시 등용하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1940년까지 자이언츠와 양키스의 우승 퍼레이드를 부러운 눈으로 지켜봐야 했던 다저스는, 바로 맥페일과 브랜치 리키의 혁신을 통해 일어섰다. 그리고 '프런티어 정신'은 팀의 전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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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스 입단 계약서에 서명하는 로빈슨과 리키 단장(가운데) ⓒ gettyimages/멀티비츠
2. 서부 이전
25%의 지분을 매입하고 구단 전속 변호사가 된 월터 오말리는, 1950년 길었던 파워 게임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역시 25%의 지분을 가지고 있던 다른 세 명을 몰아내고 다저스 왕국의 일인자가 됐다(밀려난 세 명 중 한 명이었던 리키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로 갔고, 다저스의 팜에서 로베르토 클레멘테를 빼왔다). 브롱스의 양키스, 맨하탄의 자이언츠와 함께 뉴욕을 삼분하고 있었던 다저스는 당시 큰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말리는 한 도시를 셋이서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1957년 오말리는 자이언츠의 구단주인 호레이스 스톤햄에게 같이 뉴욕을 떠나자고 설득했다. 당시 자이언츠는 '낮에 야구를 보고 밤에 술을 마시는' 구단주의 하루 일과 때문에 대부분 낮에 경기를 했고 인기도 가장 떨어져 있었다. 스톤햄은 서부로 가서 둘이 오붓하게 지내자는 오말리의 계획이 솔깃하게 들렸다. 결국 1958년. 뉴욕의 야구 팬 세 명 중 둘은 큰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철저한 계획 속에 움직인 오말리는 로스앤젤리스시로부터 샤베스라빈이라는 지역의 땅을 거의 공짜로 얻었다. 반면 샌프란시스코로 간 스톤햄은 캔들스틱 지역의 땅을 샀는데, 그러나 스톤햄이 낮에 방문한 그 장소는 밤만 되면 강풍이 몰아치는 곳이었다(부동산 사기였다). 다저스가 LA에서 5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동안 '서부의 2인자'가 되야 했던 자이언츠는, 2000년 따뜻한 매코비만에 아름다운 구장을 지었다. 그리고 2010년, 마침내 서부 이동 후 첫 우승을 차지했다. 두 팀은 미 프로 스포츠를 대표하는 라이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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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스가 처음 LA로 와 사용한 메모리얼스타디움 ⓒ gettyimages/멀티비츠
3. 서부 여행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농구 장학금을 받고 신시내티 대학에 입학한 꺾다리 유태계 청년이 있었다. 청년의 소원은 서부를 여행해 보는 것이었다. 어느날 청년은 야구 팀이 서부 원정을 떠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동행을 부탁했다. 청년은 선수가 아니면 같이 갈 수 없다는 코치를 겨우 설득하고 버스에 올랐다. 야구 팀이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청년은 샌디 코팩스라는 좌완 투수가 되어 있었다. 1955년 코팩스는 고향 팀 다저스에 입단했다. 그리고 1958년에는 팀과 함께 서부로 아주 긴 여행을 떠났다. 1965년은 다저스와 코팩스에게 잊지 못할 해였다. 당시 16경기를 남겨 놓고 1위 샌프란시스코에 4경기반이 뒤진 리그 3위였던 다저스는, 마지막 16경기에서 기적 같은 15승1패를 기록함으로써 샌프란시스코를 2위로 끌어내리고 극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기간 6경기에 나서 4승 1세이브 1.38을 기록했던 코팩스는, 월드시리즈 1차전 등판을 거부했다. 유대교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다저스는 돈 드라이스데일이 나선 1차전을 패했고, 코팩스도 2차전에서 패전투수가 됐다. 하지만 코팩스는 5차전과 이틀 휴식 후 나선 7차전에서 두 번의 10K 완봉승을 따냄으로써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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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왼팔 ⓒ gettyimages/멀티비츠
4. 어깨동무

1947년 5월14일. 신시내티 크로슬리필드를 가득 메운 백인 관중들은 1회말이 시작되자 '검둥이!' '검둥이!'를 연호했다(얼마전 '쿠에토!' '쿠에토!'가 울려퍼졌던 PNC파크를 떠올려 보라). 대열에 동참한 것은 덕아웃의 신시내티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경기장은 당장이라도 폭동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바로 그 때. 다저스의 남부 출신 스타 유격수인 '땅꼬마'(Pee Wee) 리즈는 자리를 이탈해 1루로 갔다. 그 곳에는 얼어붙은 표정의 재키 로빈슨이 있었다. 리즈는 로빈슨의 어깨에 팔을 둘렀고, 별 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대화를 나눈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리즈의 돌발적인 행동에 깜짝 놀란 관중들은 야유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리즈는, 늘 로빈슨 대신 나서 로빈슨을 지켰다. 시즌 후 돌아간 고향에서 사람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던 리즈는, "여러가지 이유로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피부색일 수는 없다"며 인종 차별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재키 로빈슨 레전드 스토리 中] 열매는 달콤했다. 인종의 벽을 가장 먼저 허문 덕분에, 다저스는 당시 니그로리그의 어린 선수들을 독점할 수 있었다(돈 뉴컴, 로이 캄파넬라, 짐 길리엄, 조 블랙, 존 로센보로 등). 1921년부터 1946년부터 26년 간 리그 우승이 한 번 뿐이었던 다저스가, 로빈슨이 데뷔한 1947년부터 1966년까지 19년 동안 10번의 우승을 차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1955년. 마침내 다저스는 양키스와의 6번째 월드시리즈 대결 끝에 처음으로 승리했다. 최고의 재능들을 찾아 나선 다저스의 항해는 이후 전세계를 누비기 시작했다. 이에 가장 먼저 도미니카공화국 시장을 개척했고, 1979년에는 멕시코 선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를, 1994년에는 한국 선수 박찬호를, 1995년에는 일본 선수 노모 히데오를 입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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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과 피 위 리즈. 영화 '42'의 한 장면
5. 놓쳐버린 보물
1988년 우승으로 스티브 색스가 떠난 후, 늘 2루수 자리가 고민이었던 다저스는 1994년 몬트리올에서 전도유망한 2루수를 데려왔다. 1990년 21살의 나이로 데뷔, 4년 평균 47도루를 기록했으며 1993년에는 출루율을 .389까지 끌어올린 델라이노 드실즈(.295 .389 .372)는, 훌륭한 1번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저스가 내준 투수는 21살짜리 불펜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스였다. 1993년에 데뷔한 마르티네스는 불펜투수로 나서 10승5패 2.61을 기록했는데, 당시 프레드 클레어 단장, 토미 라소다 감독, 프랭크 조브 주치의는 가녀린 몸에서 강속구를 쥐어 짜내는 마르티네스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마르티네스의 형 라몬이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었던 다저스는, 마르티네스 정도의 투수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다저스의 예상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마르티네스가 트레이드 4년 만에 우완투수로는 1912년 월터 존슨 이후 첫 '1점대+300K'를 기록하며 리그 최고의 에이스가 된 반면, 드실즈는 실망스런 3년(.241 .326 .327) 후 FA가 되어 떠났다. 다저스는 1991년에도 형을 따라 다저스 유니폼을 꿈꿨던 한 도미니카 소년에게 퇴짜를 놨다. 윌슨 게레로의 동생, 블라디미르 게레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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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보다 13cm가 작았던 페드로 마르티네스 ⓒ gettyimages/멀티비츠
6. 친구 아들

마이크 피아자의 아버지인 빈스 피아자는 중고차 사업과 부동산 사업을 통해 1억 달러 이상을 모은 거부였다. 빈스는 메이저리거를 꿈꾸는 아들을 위해 과외 선생으로 조 디마지오와 테드 윌리엄스를 모실 정도로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 피아자는 윌리엄스가 직접 사인을 해 준 <타격의 과학>을 파고 또 팠지만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고교 팀에서의 형편없는 성적에 프로 팀의 지명은 물론 대학 팀의 장학금 제안도 받지 못했다. 피아자는 마이애미에 있는 한 커뮤니티칼리지에 겨우 진학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빈스는 아들을 지명해 줄 메이저리그 팀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메이저리그 구단을 직접 사려고 했다. 피아자는 그런 아버지를 말렸다. 결국 빈스는 같은 이탈리아계이자 절친한 친구인 토미 라소다에게 아들의 미래를 부탁했고, 라소다는 1루수로서 포수 경험이 전혀 없었던 피아자를 포수로 둔갑시켜 구단에 추천했다. 1988년 피아자는 1395명 중 1390번째로 지명을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도미니카 윈터리그로 날아가 포수로서 담금질을 했다. 당시 윈터리그 팀의 유일한 백인이자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모르는 선수였던 피아자는, 곧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장타력을 가진 포수가 됐다. 1998년 피아자는 최초의 1억 달러 계약을 요구하며 구단과 얼굴을 붉혔고, 결국 개리 셰필드 등과 바뀌어 플로리다로 보내졌다(플로리다에서 5경기를 뛴 피아자는 일주일 후 메츠로 재트레이드됐다). 당시 피아자의 요구를 절대로 들어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은 라소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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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자의 앞에는 1389명이 있었다 ⓒ gettyimages/멀티비츠
 7. 두 번째 DD
1993년 드래프트에서 단연 화제를 모은 선수는, 드래프트 역사상 최고의 재능으로 평가받은 플로리다 출신의 고교 유격수 알렉스 로드리게스였다. 당시 나머지 27팀들은(당시는 애리조나와 플로리다가 생기기 전이었다)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진 시애틀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애틀의 감독인 루 피넬라의 생각은 달랐다. 피넬라는 타선에는 켄 그리피 주니어, 유격수에는 수비의 달인인 오마 비스켈이 있는 만큼, 랜디 존슨과 짝을 이룰 수 있는 즉시 전력감의 대학 투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투수 최대어로 꼽히는 위치타 대학의 우완 투수를 뽑아달라고 구단에 요청했다. 바로 대런 드라이포트였다. 하지만 우디 우다드 단장은 피넬라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결국 드라이포트는 2순위 다저스가 데려갔다. 드라이포트는 입단 동기인 박찬호와 함께 메이저리그에 직행했고, 그 해 박찬호보다 더 오래 메이저리그에 머물렀다. 다저스 팬들도 드라이포트에게 돈 드라이스데일의 애칭인 'DD'를 붙여주며 애정을 쏟았다. 그러나 에이로드가 최고의 스타가 되는 동안, 드라이포트의 선수 인생은 부상으로 점철됐다. 2004년 32살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한 드라이포트는, 은퇴 선언 일주일 후 통산 22번째 수술을 받아야 했다. 만약 우다드가 피넬라의 설득에 넘어갔다면 다저스의 미래는 어떻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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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튀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 gettyimages/멀티비츠
8. 코팩스의 환생
2005년 드래프트에서 다저스는 낭패를 봤다. 가장 빠른 전체 40순위 지명권으로 선택한 테네시 대학의 우완 루크 호체이버가 에이전트를 여러 번 바꾸더니, 결국 스캇 보라스와 손을 잡고 입단을 거부해 버린 것. 하지만 이것은 다저스가 '신의 두 번째 왼팔'을 얻게 된 시작점이었다. 이듬해 드래프트의 최대어는 '제2의 랜디 존슨'으로 불린 201cm의 좌완 앤드류 밀러였다. 그러나 1순위 캔자스시티가 밀러 대신 호체이버를 선택하면서 1라운드는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6순위 디트로이트는 졸업반 시즌에 구속이 크게 증가한 클레이튼 커쇼를 뽑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1~5순위 팀들이 밀러를 그냥 지나치자 계획을 바꿔 밀러를 뽑았다. 7순위 다저스는 에반 롱고리아, 브래드 링컨, 커쇼 중 한 명을 뽑고 싶었지만 비관적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한 명이 살아남았다. 바로 커쇼였다(롱고리아는 3순위 탬파베이, 링컨은 4순위 피츠버그 지명). 팀 린스컴이 2008-2009년 사이영상 2연패에 성공하자, 다저스의 드래프트 책임자인 로건 화이트는 일부 지역 언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뽑을 수 있었던 팀 린스컴(샌프란시스코 10순위)을 왜 뽑지 않았냐는 것.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디비전시리즈 4차전에서, 매캔은 땅바닥으로 떨어진 커쇼의 커브가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자 강하게 항의했다. 모두가 '에이 심했다'라고 생각한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방송사가 제공한 피치 트렉스의 스트라이크 존 맨 밑줄에 공 하나가 떡하니 찍혀 있던 것. 그렇게 코팩스는 다시 다저스 유니폼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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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호체이버. 고마운 캔자스시티 ⓒ gettyimages/멀티비츠
9. 주차장 임대업자
보스턴에서 주차장 임대업을 해 큰 돈을 번 프랭크 매코트는 2001년 보스턴 레드삭스 매입에 나섰다. 하지만 7억 달러를 지불한 존 헨리에게 패했다. 2003년 매코트는 이번에는 애너하임 에인절스 인수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승자는 1억8400만달러를 제시한 아르투로 모레노였다. 할아버지가 보스턴 브레이브스의 공동 구단주 중 한 명이었던 매코트는, 2004년 다저스를 손에 넣으면서 메이저리그 구단주라는 평생의 소원을 마침내 이뤘다. 처음 매코트는 나쁘지 않은 구단주였다. 루퍼트 머독 시대(1998-2003)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나가지 못했던 다저스는, 매코트가 온 후 첫 6년 간 네 차례 진출했다. 하지만 좋은 날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매코트는 구단 매입에 쓴 4억 달러의 대금 대부분을 대출금으로 충당했는데, 여기에 이혼 소송까지 겹치자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렸다(그 사이 네드 콜레티는 클리프 리를 영입할 수 있었던 기회를 두 번이나 놓쳤다). 한계에 몰린 2012년 5월, 결국 매코트는 다저스를 포기했다. 매코트가 몰락해 준 덕분에, 다저스에는 엄청난 자금력을 가진 새로운 주인들(스탠 카스텐 & 마크 월터)이 들어왔다. 이들은 천문학적인 21억 달러를 들여 다저스를 산 다음 다시 1년 반 만에 6억5000만달러를 투자했다. 그리고 이러한 '선행 투자'는 중계권 대박으로 이어졌다. 타임워너와 연간 3억2000만 달러에 이르는 25년짜리 계약을 맺은 것. 사무국에 수익 배분금으로 내는 1억 달러를 제하고도 2억 달러가 남는 이 계약은, 중계권료에 대한 인기가 절정에 올랐을 때 맺어진 것으로, 앞으로도 경신이 어려울 전망이다. 다저스는 이 계약을 통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돈을 쓸 수 있는 구단이 됐다. 그리고 보스 시절의 양키스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영원한 우승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됐다.

※ 참고 문헌
Baseball (조시 벡시)
History of Major League Baseball (레너드 코페트)
야구란 무엇인가 (레너드 코페트)
Baseball America Draft Almanac
Big Book of Baseball Lineups (롭 네이어)
LA 타임스 기사
고 이종남 기자 칼럼

Sunday, August 11, 2013

트라웃의 놀라운 2년차 시즌

Monday, May 27, 2013

다저스 커쇼, ‘마운드’ 뿐 아니라 ‘마인드’도 에이스! [인사이드MLB] '최강 좌완' 클레이튼 커쇼의 경쟁력

다저스 커쇼, ‘마운드’ 뿐 아니라 ‘마인드’도 에이스!


올스타전 출전을 위해 뉴욕 시티필드를 방문한 클레이튼 커쇼. 다저스 선수로는 커쇼가 유일한 올스타전 출전 선수이다.(사진=순스포츠 홍순국 기자)

온 국민을 LA다저스 팬으로 만든 류현진(26)의 대활약. 그 덕에 MLB 최고의 투수로 평가받는 클레이튼 커쇼(25)도 이제 한국 야구팬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듯싶다. 특히 최근 ‘진격의 다저스(일본만화 진격의 거인에서 패러디) 열풍’이 불면서 커쇼의 활약은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커쇼에 대해서는 잘못 알려지거나, 아직 그 소소한 스토리가 잘 알려지지 않은 면이 있다. 알면 알수록 ‘불과 25세의 야구선수에게 이렇게 많은 얘깃거리가 있나’ 생각이 들 정도다. 미국에서는 ‘공공의 적 1호(Public Enemy NO.1)’로 불리는 커쇼의 이면을 살펴봤다.

퍼펙트 오브 퍼펙트’의 진실

<위키피디아(영문)>를 보면 ‘(커쇼는 고교시절인) 2006년 13승 무패, 평균자책점 0.77, 139탈삼진(64이닝)을 기록했다. 저스틴 노스웨스트 고교와의 플레이오프게임에서는 전원 탈삼진 퍼펙트게임을 달성했다(in 2006 when he posted a 13–0 record with an ERA of 0.77, and recorded 139 strikeouts in 64 innings. In a playoff game against Justin Northwest High School, Kershaw pitched an all-strikeout perfect game)’라는 구절이 나온다. 아무리 고등학교 야구라고 해도 퍼펙트게임은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전원 삼진이라니 기네스북도 놀랄 기록이다. 이것이 국내 한 신문을 통해 와전되면서 ‘커쇼 27삼진 신화’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절반만 맞는 정보다. 커쇼는 해당 경기에서 15명의 타자만 상대했다. 경기가 10-0 5회 콜드게임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당시 투구수는 73개였고, 커쇼는 타석에서 홈런을 치기도 했다. 기록의 의미가 조금 축소됐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단하기는 대단하다. 커쇼는 그해 로부터 ‘올해의 고교 야구선수’로 선정됐고, 게토레이 내셔널 플레이어의 야구부분 수상자가 됐다. 그리고 그해 MLB 신인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7번째로 LA다저스의 지명을 받았다. 

다저스의 에이스인 만큼 어딜 가나 팬들로부터 사인 요청을 받게 된다. 힘들어도 찡그리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사인을 해주는 커쇼의 모습이 인상적이다.(사진=순스포츠 홍순국 기자)

'커모삼천지교'와 가난 극복 

192cm, 99.7kg의 건장한 체격을 가진 커쇼는 1988년 3월 19일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음악가인 아버지 크리스와 어머니 매리언(그래픽디자이너) 사이에서 태어났다(참고로 커쇼의 아버지는 지난 4월 28일 작고했고, 커쇼는 장례식 참석 후 예정된 등판일정을 소화했다).

부모는 커쇼가 10살 때 이혼했고, 매리언 혼자 커쇼를 키웠다. 싱글맘이다 보니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지만 매리언은 커쇼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부촌으로 유명한 하이랜드 파크에서 살았다. 이 동네는 베버리힐즈를 설계한 사람이 도시계획을 맡았고, 가구의 평균 연수입은 20만 달러가 넘었다. 유명한 운동선수가 많이 배출된 것으로 유명하고, 당연히 ‘커쇼네’처럼 싱글맘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어린 시절 서머캠프에서 커쇼를 가르친 켄 거스리 코치는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커쇼는 그 지역사회에서 검은 양(black sheep)이었다”고 비유했다. 고교 졸업반이 돼서야 뒤늦게 1997년형 포드 중고차를 얻은 커쇼도 “내 차는 렉서스SUV로 가득 찬 학교 주차장에서 정말 볼품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지금도 나이에 비해서는 무척 성숙했다는 평가를 받는 커쇼는 어린 시절 이런 환경을 잘 이해했다.

“커쇼가 12살 때 차 안에서 갑자기 빤히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어요. ‘엄마, 우리 부자지? 그런데 여기 하이랜드 파크만큼은 부자가 아니지, 그렇지?’라고요. 어린 나이지만 커쇼는 일찌감치 녹록치 않은 가정환경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죠.” 어머니 매리언의 회고다.

매리언은 커쇼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심지어 비싼 사립학교를 다니게 했다. 물론 도중에 도저히 감당이 안 돼 공립학교로 옮겼지만 말이다. 어쨌든 매리언의 고민은 노상 커쇼의 교육을 위한 돈 걱정이었다. 이는 2006년 드래프트 후 사이닝 보너스로 230만 달러를 받으면서 비로소 해결됐다.
가식이 없고, 겸손한 커쇼의 성격도 이러한 성장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커쇼는 “어떤 것을 과장하거나, 축소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겸허하게 대한다. 이런 내 성격은 내가 자란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머니에게 정말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다저스의 댈러스 지역 스카우트 캘빈 존스이 밝힌 일화도 하나 있다. “드래프트 후 내가 정말 놀란 것이 하나 있다. 사이닝 보너스를 받은 후 어떤 차를 사고 싶냐고 물었는데 커쇼는 F-150픽업(값비싼 스포츠카나 명차가 아니라 실용적인 차)을 사겠다고 했다. 나는 이 정도면 멘탈은 됐다고 생각했다.”

커쇼와 절친 매튜 스태포드. 스태포드는 NFL 디트로이트 라이온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다.(사진=커쇼 재단)

별명, 절친, 등번호

커쇼는 2007년 마이너리그를 거쳐 2008년 만 20세가 되기도 전에 메이저리그로 올라왔다. 2008년 5승(5패), 2009년 8승(8패), 2010년 13승(10패)에 이어 빅리그 4년째인 2011년 21승 5패, 평균자책점 2.28, 탈삼진 248개로 투수 부문 트리플크라운을 기록하며 사이영상을 받았다. 2012년 14승에 이어 올해도 팀내 최다승을 올리며 순항 중이다. 올시즌 후 FA계약이 가능한 커쇼는 벌써부터 사상 최초의 2억 달러 계약이 예견되고 있다.

이런 커쇼는 미국에서는 ‘공공의 적 1호’로 불린다. 빅리그 승격 첫 해 시범경기에서 엄청난 커브를 선보이자 다저스의 레전드인 1인해설자 빈 스컬 리가 “Public Enemy NO.1”이라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 이제 상대팀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됐으니 별명 예언이 적중한 것이다.

어머니 덕에 스타플레이어를 많이 배출하기로 소문난 하이랜드 파크에서 자란 커쇼는 스타플레이어 친구들이 다수 있다. 특히 NFL 디트로이트 라이온스의 프랜차이즈 쿼터백 매튜 스태포드는 둘도 없는 절친이다. 초중고 동창으로 어린 시절 풋볼, 야구, 농구, 축구 등 다양한 종목을 함께 했는데 야구에서는 커쇼가 투수, 스태포드가 포수를 맡았다. 둘은 다저스의 캠프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커쇼는 이후에 다저스의 에이스가 된 것이다(커쇼는 큰 키 덕에 축구에서는 골키퍼를 맡았다).

참고로 커쇼는 고교졸업 후 당초 지금의 아내인 엘렌이 진학하는 텍사스 A&M 대학으로부터 장학생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드래프트에서 뽑히는 바람에 바로 프로에 뛰어들었다(사이닝 보너스 230만 달러). 반면 절친 스태포드는 조지아 대학에 진학한 후 2009 NFL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디트로이트로 갔다. 초중고 단짝친구가 미국 메이저 스포츠리그에서 대스타가 되는 것은 드문 일이다.

등번호 22번에도 뼛속까지 ‘텍사스 사나이’인 사연이 깃들여 있다. 커쇼는 학창시절 텍사스 레인저스의 1루수 윌 클락을 가장 좋아했다. 그에 대한 오마주로 그의 번호를 지금 달고 있는 것이다. 커쇼는 지금도 매년 모교를 방문할 정도로 댈러스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2010년 12월 4일 결혼한 아내 엘렌(멜슨)과 커쇼의 결혼식 피로연 장면. 엘렌과는 2005년부터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했다고 한다.(사진=커쇼 재단)

몸보다 더 강한 멘탈

커쇼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2010년 12월 4일 결혼한 아내 엘렌(멜슨)과 그 집안의 영향이 컸다. 커쇼는 엘렌을 중학교 때부터 알았지만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졸업반이 되면서부터다. 그때까지 둘은 이성친구가 없을 정도로 순진했다. 둘의 연애는 엘렌의 할아버지 에드 멜슨이 가족여행에 커쇼를 초청하면서 장래를 약속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에드 멜슨은 지금도 커쇼에게는 친할아버지 같은 존재다.

어쨌든 원래 독실했는데 아내 덕에 더 독실해진 커쇼의 신앙심은 대단하다.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한 후 ‘아이 엠 세컨드(I am Second)’라는 기독교 간증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커쇼는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켜본다. 그들에게 신앙을 대놓고 전할 수는 없다. 그저 기독교인이 어떻게 사는가를 그들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종교 덕인지 커쇼는 멘탈이 훌륭하다. 아내 엘렌은 “커쇼는 아마도 여러분들이 만난 사람 중 가장 겸손한 사람일 것이다. 예컨대 레스토랑에서 그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메이저리그 스타라는 지위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가능한 피하려고 노력한다. 옆에서 지켜보면 재미있을 정도”라고 소개했다. 커쇼도 “신앙은 나를 성장시켰다. 그리고 라이프스타일이 돼 버렸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신을 위한 것이다. 운동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커쇼는 프로정신이 대단하고, 동료의식도 뛰어나다. 그리고 성실하다. 젊은 나이에 대성한 많은 선수들이 성공에 취하는 것과는 달리 커쇼는 시즌 중 매일 체력단련을 하는 등 엄청난 훈련량을 유지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매 게임 최고의 상태로 마운드에 오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봉사 활동 중인 커쇼와 아내 엘렌, 그리고 잠비아 아이들.(사진=커쇼 재단)

MLB판 ‘아프리카의 성자’

그런데 커쇼에게는 ‘모범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자선을 실천하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 일찍이 아프리카 잠비아의 고아 문제에 깊은 관심이 있었던 엘렌은 2010년 신혼여행지로 호화 휴양지 대신 잠비아를 택했다. 그리고 커쇼는 이때 세상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다. 커쇼는 “아프리카는 우리가 얼마나 축복받았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아주 기본적인 생활요건만 갖춰져도 그렇게 행복해 할 수가 없다. 이것은 그들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다”라고 말했다.

첫 방문 후 커쇼는 엘렌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호프’라는 잠비아 고아소녀를 위해 고아원을 지어주겠다고 결심했다. 호프는 부모가 에이즈로 사망했고, 자신도 감염자였다. 커쇼는 행동에 나섰다. 2011시즌 스트라이크 아웃 1개 당 100달러를 적립했다. 그리고 각종 상을 받을 때마다 상금의 대부분도 내놓았다. 2011시즌 후 고아원(호프의 집)은 세워졌고, 아내와 함께 이 문제를 다룬 ‘ARISE’라는 책도 펴냈다(2012년 1월).

커쇼는 지금도 겨울이면 약 한 달 동안 잠비아에 머물며 자선활동을 펼친다. “이들은 야구도, 메이저리그도 모른다. 여기(잠비아) 오면 내가 축구선수였으면 더 좋았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아프리카는 축구인기가 높다).” 커쇼의 아프리카 사랑은 현재진행형이다. 

커쇼는 2012년부터는 아예 ‘커쇼의 도전(kershawschallenge.com)’이라는 자선단체를 만들어 잠비아는 물론 LA와 댈러스 등에 자선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그 해 선행을 베푼 메이저리거에게 주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역대 최연소로 수장했다. 커쇼는 1년 전 수상한 사이영상보다 이 상이 더 뜻깊다고 밝히기도 했다. 

최고의 기량과 함께 모범적인 사생활로 미국인의 존경을 받던 마이클 조던(농구)과 타이거 우즈(골프)는 이혼, 도박 등으로 이미지의 빛이 많이 바랬다. 그 자리를 불과 25살의 젊은 야구스타가 대체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류현진도 커쇼에 대해서는 그의 일기를 통해 ‘정말 인성이 훌륭한 선수’라고 말한 바 있다. 류현진은 “커쇼는 최고의 에이스 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손하고 착하고 성실하다. 이런 선수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고마울 따름이다”라고 얘기했다. 

서로 좋은 영감을 주고 받는 류현진과 커쇼. 커쇼는 메이저리그 데뷔해를 보내는 류현진을 따뜻하게 챙겨줬다.(사진=순스포츠 홍순국 기자)

*이 글은 유병철 스포츠 전문위원이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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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튼 커쇼 ⓒ gettyimages/멀티비츠

1988년생 스티븐 스트라스버그(통산 23승 315이닝). 1989년생 맷 무어(20승 241이닝)와 맷 하비(8승 123이닝). 그리고 1990년생 셸비 밀러(6승 70이닝).

그러나 벌써 66승을 따내고 1017이닝을 소화했으며, 사이영상과 트리플 크라운까지 달성한 1988년생 투수가 있다. 1920년 이후 1000이닝 이상 던진 선발투수 중 평균자책점 1위(2.69)에 올라 있는 클레이튼 커쇼(25·LA 다저스)다(2위 화이티 포드 2.75, 3위 샌디 코팩스 2.76).

15일(이하 한국시간) 워싱턴전에서 완봉승에 아웃카운트 1개를 남겨 두고 '10구 안타'를 맞아 8.2이닝 무실점 승리에 만족해야 했던 커쇼는, 21일 밀워키전에서는 1실점 완투승을 따냄으로써 22경기 연속 3자책 이하를 이어갔다. 이는 1994년 이후 메이저리그 최고 기록인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23경기(1999-2000)에 1경기가 모자란 것이다(다저스 최고 기록 클로드 오스틴 36경기 연속).

그렇다면 커쇼는 어떻게 이렇게 이른 나이에 메이저리그를 지배하는 투수가 될 수 있었을까.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은 피칭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패스트볼이다. 댈러스 출신으로 로저 클레멘스를 우상으로 삼고 자란 커쇼는, 텍사스산 파워피처답게 건장한 체격(191cm 100kg)을 자랑한다. 커쇼는 이 탄탄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최고 수준의 패스트볼을 던지는데, 지난해 커쇼가 기록한 평균 93.2마일(150km)은 전체 10위이자 데이빗 프라이스(95.5마일)와 맷 무어(94.4마일)에 이은 좌완 3위였다. 돋보이는 것은 구속 만이 아니다. 커쇼의 패스트볼은 상승 무브먼트에서 지난해 메이저리그 1위(12.4)에 올랐을 만큼 뛰어난 움직임을 자랑하며(무어 10.4, 프라이스 5.9) 수준급 제구력까지 동반되고 있다. 구위의 3박자인 구속-무브먼트-제구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

데뷔 초기 '코팩스의 재림'이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커브가 돋보였던 커쇼는, 그러나 커브가 기대만큼 스트라이크아웃 피치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이에 현역 시절 슬라이더의 달인이었던 릭 허니컷 투수코치, 그리고 불펜포수 마이크 보젤로와 함께 슬라이더의 집중 연마에 나섰다. 장착 2년 만인 2011년, 커쇼의 슬라이더는 구종가치에서 메이저리그 1위에 올랐다. 이에 대해 허니컷 코치는 "(코팩스에 이어) 스티브 칼튼이라는 또 한 명의 대투수가 커쇼의 안에 등장했다. (강심장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또한 여전히 숨 쉬고 있다"라고 밝힌 바 있다.

2011년 슬라이더로 리그를 제패(트리플 크라운)한 커쇼는, 지난해 다시 방향을 바꿔 커브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커쇼의 커브는 구종가치에서 ML 4위를 차지했다. 패스트볼(2012년 1위) 슬라이더(2011년 1위) 커브(2012년 4위) 세 가지가 모두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인 것. 보통의 좌완이 좌타자를 상대로 슬라이더, 우타자를 상대로는 커브를 결정구로 삼는 것과 달리, 커쇼는 투 스트라이크 이후 우타자를 상대로 26%의 슬라이더와 27%의 커브, 좌타자를 상대로 18%의 슬라이더와 18%의 커브를 던짐으로써, 타자들을 대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여기에 학창 시절 가장 좋아한 좌완이 요한 산타나였던 커쇼는 (비록 빠른 발전은 보이지 않고 있지만) 체인지업 역시 꾸준히 연마하고 있는 중이다.

1999년에 데뷔했으며 2008-2009년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뛰었던 로드 바라하스는 자신이 직접 본 최고의 '훈련광'으로 로이 할러데이를 꼽았다. 할러데이를 보면서 '저래도 되나'라는 생각을 가졌다는 바라하스는, 2010년 다저스에 와서 깜짝 놀랐다. 할러데이처럼 훈련하는 선수가 또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팬들은 그야말로 투수로서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며, 심지어 인성까지 뛰어난 커쇼의 유일한 단점으로, 뭔가 어설퍼 보이는 투구폼을 꼽는다. 하지만 그 '멋대가리' 없는 투구폼에 커쇼의 결정적인 비밀 또 하나가 숨겨져 있다.

타자들은 CC 사바시아의 공을 보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공을 쥔 왼손이 육중한 체구를 천천히 가로지르다 갑자기 빠르게 튀어나오기 때문이다(류현진도 그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사바시아의 왼손은 왼 허벅지 뒤에서 순간적으로 멈췄다 나오는데, 이 때문에 타자들은 타이밍을 잡는데 더 큰 애를 먹는다.

공중에서 잠깐 멈췄다 떨어지는 커쇼의 오른발 ⓒ gettyimages/멀티비츠

사바시아의 이런 '머물기 동작'(stay back)은 커쇼에게서도 보여진다. 커쇼는 와인드업시 키킹을 한 오른 발이 지면에 착지하기 전에 공중에서 잠깐 멈추는데(leg hesitation), 이 순간적인 멈춤은 타자들의 타이밍 잡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는 주로 다리를 올린 리프트업 상태에서 멈추는 일본 투수들보다 더욱 효과적이며, 이중 킥 모션으로 지적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동작으로, 다저스는 커쇼의 이 동작을 분석한 후 몸에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매년 다저스의 스프링캠프에 참가해 다저스 투수들을 지도하는 코팩스 역시 커쇼의 멈춤 동작을 신기해 하면서 그대로 놔둘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mlb.com 영상] 커쇼의 독특한 투구 동작

흔히 '공은 하체로 던진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투구시 하체가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바이오메카닉 피칭 이야기>(조용빈 저)에 따르면, 투수가 공을 던질 때 하체가 담당하는 임무는 두 가지, 스트라이드를 통한 '전진력 생성'과 스트라이드 이후 이루어지는 '지지대 역할'이다. 그리고 기존의 투구 이론은 전진력의 생성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반면, 지지대의 역할은 과소평가하고 있다. 팀 린스컴이나 아시아 투수들처럼 체격 조건이 좋지 않은 투수들의 상당수는 최대한의 전진력을 얻기 위해 강한 스트라이드를 한다. 하지만 커쇼를 비롯해 저스틴 벌랜더, 클리프 리 등 메이저리그의 장신 투수들에게 있어 하체의 핵심 임무는 지지대의 역할이다. 많은 국내 지도자들이 이들의 투구폼을 '상체로만 던지는' 위험한 투구폼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밸런스를 유지하기에 더 쉬운 쪽은 전진력을 얻기 위해 무리하지 않는(무리할 필요가 없는) 투수들이다.

투구시 순간적으로 멈추는 동작 역시 전진력을 핵심 목표로 삼는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체가 지지대 역할을 하는 투수들에게 멈춤 동작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멈춤 동작의 문제점은 투구 리듬이 깨질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커쇼는 발을 내딛은 후의 연속 동작이 놀라울 정도로 매끄럽게 연결되고 있다.

디셉션(숨김 동작)에만 의존하는 투수는 롱런하기 쉽지 않다. 돈트렐 윌리스는 그 독특한 투구폼 덕분에 신인왕을 따내고 사이영 투표 2위에도 올랐지만, 복잡한 딜리버리에서 오는 제구 불안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자니 쿠에토는 잦은 부상 때문에 특유의 '트위스트 딜리버리'를 수정할 것을 고민하고 있으며, 제러드 위버는 패스트볼 구위가 떨어지자 디셉션이 소용없어 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구위와 제구가 모두 뛰어난 커쇼에게 디셉션은 보너스 요소일 뿐이다.

21살의 나이로 풀타임 첫 시즌을 치른 2009년 이후, 커쇼는 평균자책점(2.50. 2위 펠릭스 에르난데스 2.76)과 조정 평균자책점(152. 2위 벌랜더 144)에서 모두 1위에 올라 있다. 지난해 커쇼는 페드로 마르티네스(2002-2003) 이후 처음으로 2년 연속 메이저리그 평균자책점 1위에 오른 투수가 됐다. 그리고 올해는 1993-1995년의 그렉 매덕스 이후 첫 3연패에 도전하고 있다. 커쇼의 흔들림 없는 전력 질주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인사이드MLB] 오심, 그리고 스트라이크 존

1루에서 대형 사고를 일으켰던 짐 조이스 심판 ⓒ gettyimages/멀티비츠

[사례1] 4월9일(이하 한국시간) 탬파베이와 텍사스의 경기. 3-5로 뒤진 탬파베이는 9회초 텍사스 마무리 조 네이선의 난조를 틈타 숀 로드리게스가 한 점을 만회하는 적시타를 터뜨렸다. 계속된 2사 1루. 풀카운트에서 조 네이선이 던진 커브가 바깥쪽으로 크게 벗어나자, 타석의 벤 조브리스트는 걸어나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마티 포스터 주심은 이 공을 스트라이크로 선언했다. 5-4 텍사스의 승리. 조브리스트는 머리를 깜쌌고, 그 순간 네이선의 입에서는 '와우'라는 말이 나왔다(네이선에게는 통산 300번째 세이브였다). 조 매든 감독이 득달같이 달려나왔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영상]
 

놀랍게도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은 네이선의 6구

[사례2] 5월21일 시애틀과 클리블랜드의 경기. '에이스 킬러' 클리블랜드 타선을 상대한 이와쿠마는 2회 2사 1,2루에서 라이언 레이번과 대결했다. 초구와 2구를 모두 스트라이크로 던진 이와쿠마는, 3구째 공도 존 안으로 집어넣었다. 루킹 삼진이 선언되어야 하는 상황. 하지만 놀랍게도 래즈 디아스 주심의 손은 올라가지 않았다. 4구째 파울 후 이와쿠마가 던진 스플리터는 가운데 몰렸고, 담장을 넘어가는 스리런홈런이 됐다. 충격에 빠진 이와쿠마는 다음 타자에게도 홈런을 맞았고, 그 다음 타자의 기습번트 타구를 잡아서는 1루로 악송구를 던졌다.

이와쿠마를 무너뜨린 3구 볼 판정

[사례3] 5월23일 밀워키 원정경기에 나선 류현진은, 1회말 1사 1루에서 라이언 브론을 상대했다. 류현진은 초구 패스트볼을 몸쪽으로 낮게 집어넣었다. 하지만 볼 선언. 2구 파울과 3구 볼 후 4구째 커브는 바깥쪽으로 절묘하게 걸친 공이었다. 하지만 역시 볼. 5구째 커브 역시 볼로 선언 받은 류현진은, 결국 세 개의 스트라이트를 잃고, 브론을 볼넷으로 내보내야 했다. 다행히 후속타자인 루크로이를 병살타로 잡아냈지만, 그 날 류현진은 매니 곤살레스 주심으로부터 9개의 스트라이크를 볼로 선언받았다(볼이 스트라이크로 선언된 것은 2개).

모두 볼로 선언된 류현진의 1,4,5구

2011년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 우승까지 스트라이크 1개를 남긴 상황에서 동점타를 두 번씩이나 맞고 뼈아픈 역전패를 당한 텍사스는, 다음날 선발투수 대결에서 맥없이 패하며(맷 해리슨 4이닝 3실점, 크리스 카펜터 6이닝 2실점) 세인트루이스에게 우승을 내줬다(스코어 2-6). 하지만 그 경기에는 또 하나 비밀이 숨어 있었다. 제리 레인 주심이 세인트루이스의 편을 들어준 것이었다.

그 날 경기에서 레인 주심은 pitch F/X로 확인한 스트라이크/볼 판정에서 무려 17개의 공을 놓치며 90%의 적중률에 그쳤다(반면 1-6차전 주심들의 평균은 94.0%였으며, 레인 본인도 1차전에서 94.9%를 기록했다). 문제는 그 17개의 공 중 14개가 세인트루이스에게 유리한 쪽으로 선언됐다는 것. 텍사스로서는 최악의 분위기 속에서 불리한 존과도 싸워야 했던 것이다.

투수가 던진 공의 궤적을 추적하는 pitch F/X는 그동안 불가능했던 여러 일들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 그 중 하나는 pitch F/X 상의 탄착점과 실제 판정을 비교함으로써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을 평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포수 평균자책점'처럼 '심판 평균자책점'이 있긴 했지만, 이를 평가 근거로 삼기는 어려웠다(메이저리그 심판들은 대체로 주심으로서 1년에 35경기 정도를 주관하는데, 유독 좋은 투수를 많이 상대하는 심판이 있을 수도 있다).

2012년 주심 평균자책점 상위(전체 평균 4.01)
1. 헌터 웬델스테드 : 3.08
2. 제프 켈로그 : 3.11
3. 앙헬 에르난데스 : 3.30
4. 필딘 큘브리스 : 3.31
5. 빅 카라파자 : 3.35

2012년 주심 평균자책점 하위
1. 폴 에멀 : 5.11
2. 짐 조이스 : 5.03
3. 롭 드레이크 : 4.90
4. 토드 티치너 : 4.84
5. 그렉 깁슨 : 4.82

류현진 경기의 주심들(지난해 평균자책점)
6.1이닝 1자책(폴 에멀) - 5.11
6.1이닝 2실점(댄 아이아소냐) - 3.95
6.0이닝 3실점(짐 레이놀즈) - 3.75
6.0이닝 5실점(마빈 허드슨) - 4.06
7.0이닝 1실점(토니 란다조) - 4.40
6.0이닝 2실점(월리 벨) - 3.77
6.0이닝 4실점(필딘 큘브리스) - 3.31
6.2이닝 1실점(론 쿨파) - 3.74
5.0이닝 2실점(헌터 웬델스테드) - 3.08
7.1이닝 2실점(매니 곤살레스) - 4.50

물론 규정집에는 '홈 플레이트 안으로 들어오거나 바깥쪽 라인에 걸치는 공'이라는 좌우 규정과 '무릎(슬개골 아랫부분) 위부터 어깨와 허리 사이 중간지점 사이'라는 높이 규정이 확실하게 명기되어 있다(테드 윌리엄스는 자신의 스트라이크 존 안에 좌우로 7개, 상하로 11개씩 총 77개의 공이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심판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스트라이크 존을 운용하는데, 68명의 심판(메이저리그 심판은 4명씩 17개조로 운영된다)들이 만들어내는 68개의 스트라이크 존은 또 하나의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하이히트베이스볼>이라는 컴퓨터 게임은 처음으로 주심마다 스트라이크 존을 달리 함으로써 야구 게임 마니아들의 찬사를 불러오기도 했다).

테드 윌리엄스의 코스별 타율 [타격의 과학]

한 때 메이저리그는 양 리그의 스트라이크 존이 다르기도 했다. <야구룰교과서>에 따르면, 내장형 프로텍터를 먼저 도입한 내셔널리그 심판들은 덕분에 몸을 더 낮게 웅크림으로써 낮은공에 눈을 더 가까이 가져갈 수 있었다. 반면 두터운 외장형 프로텍터를 더 오랜 기간 동안 고집했던 아메리칸리그 심판들은 상대적으로 낮은공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아메리칸리그의 스트라이크 존이 좀더 높았다. 하지만 1970년대 아메리칸리그 심판들도 내장형 프로텍터를 도입함으로써 양 리그의 존은 점점 같아지기 시작했고, 1999년 심판노조의 파업 후 통합 운영됨으로써 그 차이는 완전히 사라졌다.

시대별 변화도 있었다. 1961년 로저 매리스가 61개의 홈런을 날려 베이브 루스의 60개 기록을 깨자, 이에 분노한 포드 프릭 커미셔너는 "루스의 기록이 156경기에서 작성된 것인 반면 매리스의 기록은 162경기를 통해 나온 것"이라며 매리스의 기록에 '별표'(asterisk)를 붙임은 물론, 스트라이크 존을 넓히라고 지시했다. 루스의 기록이 더 이상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프릭은 루스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루스의 자서전을 대필한 사람이기도 했다). 프릭의 지시는 즉각적인 효과를 냈다. 1960년대 극악의 투고타저 시대를 불러온 것. 1962년부터 1989년까지, 60개는커녕 50개의 홈런을 친 선수도 두 명(1965년 윌리 메이스 52개, 1977년 조지 포스터 52개)뿐이었으니, 프릭은 자신의 목적을 이룬 셈이었다.

1968년 내셔널리그에서 밥 깁슨이 평균자책점 1.12를 기록하고 아메리칸리그에서 단 한 명이 3할을 치자(칼 야스트렘스키),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던 사무국은 마운드의 높이를 15인치에서 지금의 10인치로 낮추는 것과 함께 스트라이크 존의 원상 복구를 지시했다.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타자들이 다시 득세하게 되자, 사무국은 1988년 또 한 번 존 확대를 지시했다. 그 해 메이저리그에서는 오렐 허샤이저가 59이닝 연속 무실점으로 돈 드라이스데일의 1968년 기록(58이닝)을 경신했다. 그리고 1990년과 1991년에는 역대 최다인 7번씩의 노히터가 탄생했다.

스트라이크 존은 자연스럽게 확대되기도 했다. 장신 타자들이 늘어나면서 타자들이 감당해야 할 스트라이크 존 또한 늘어난 것. 특히 198cm의 장신이면서 다리를 많이 굽히지 않는 업라이트 자세였던 리치 섹슨은 크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애덤 던(198cm)이 그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프로필상 키가 175cm이며 실제로는 그보다 더 작을 것 같은 더스틴 페드로이아는, 한 때 데이빗 오티스(193cm) 다음 타석에 들어서 쏠쏠한 재미를 보기도 했다.

역사상 가장 좁았던 에디 개델(키 109cm)의 스트라이크 존

2002년 스트라이크 존은 또 한 번 요동쳤다. 메이저리그의 일부 구장들에 '퀘스텍 시스템'으로 불린 스트라이크 판정 장치가 설치되기 시작된 것. 마이크 무시나에 따르면 원래 그 전까지의 스트라이크 존은 담뱃갑을 눕힌 형태였으며, 특히 바깥쪽 낮은공에 후했다. 하지만 심판들이 측정에 부담감을 느끼면서 존은 교본대로 담뱃갑을 세운 형태로 바뀌었다. 이에 톰 글래빈처럼 특히 바깥쪽 낮은공에 강점을 가지고 있었던 투수들이 큰 낭패를 봤다(커트 실링은 2003년 샌디에이고 퀄컴스타디움에 설치되어 있던 카메라를 방망이로 부셔 1만5000달러의 벌금을 내기도 했다). 사무국은 판정 장치가 설치된 구장의 평균자책점이 더 낮다며 항변했지만, 투수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심했다. 사무국은 2006년을 마지막으로 퀘스텍 시스템을 철거했다. 하지만 퀘스텍사가 개발한 다른 시스템을 2009년 이후 전 구장에 설치, 이를 통해 심판들의 고과 점수를 매기고 있다.

<브룩스베이스볼>에 따르면, 메이저리그 심판들이 pitch F/X와 동일한 판정을 내리는 비율은 80.6%다(앙헬 에르난데스 같은 심판은 73.7%까지 떨어진다고). 또한 너클볼에 대한 판정이 가장 부정확했으며(디키 지못미) 그 다음으로는 체인지업과 스플리터가 잘못된 판정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이 비율이 전부는 아니다. F/X 존과 다르더라도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으면 된다(물론 차이가 많이 나는 심판은 일관성도 없을 확률이 높다).

흥미로운 것은 주심들의 스트라이크 판정에 심리적인 영향이 적지 않게 미친다는 것. <하드볼 타임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볼카운트 3-0에서 심판들의 스트라이크 존은 볼카운트 0-2에서보다 50% 늘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3-0 다음으로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기 쉬운 카운트는 2-0이었으며, 0-2 다음으로 받기 어려운 카운트는 1-2였다. 투수가 유리한 지점에서는 타자에게 유리하게, 타자가 유리한 지점에서는 투수에게 좀더 유리하게 판정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지면 스트라이크 존이 늘어나는 모습 또한 확인됐다. 이른바 '퇴근 본능'이 발휘되는 것. 큰 점수차에서 펑펑 잘 던지다가도 근접전 상황에 올려 놓으면 얼어붙는 투수들에게는 심판의 영향도 있는 것이다.

스트라이크 판정이 후한 카운트 순위
3볼 0스트라이크
2볼 0스트라이트
1볼 0스트라이트
0볼 0스트라이크 (초구)
3볼 1스트라이크
2볼 1스트라이크
1볼 1스트라이크
2볼 2스트라이크
3볼 2스트라이크
0볼 1스트라이크
1볼 2스트라이크
0볼 2스트라이크

그렇다면 투수들이 좋아하는 심판은 누구일까. <하드볼 타임스>의 다른 연구에 따르면, 2011시즌 한 해 동안 스트라이크 존이 가장 넓었던 심판 5명은 필 쿠지, 론 쿨파, 빌 밀러, 테드 바렛, 덕 에딩스였다. <클로스콜스포츠닷컴>의 분석으로도 쿨파는 좌우로 가장 넓은 존을, 밀러는 상하로 가장 넓은 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측정됐다. 반면 가장 좁은 5명은 팀 치다, 팀 매클랜드, 폴 슈라이버, 에드 히콕스, 채드 페어차일드였는데, 잭 그레인키는 오래 전부터 좁기로 유명한 매클랜드에 대해 '투수들의 악몽'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한편 1954년부터 1970년까지 활동했던 에드 런지는 화이티 허조그로부터 "역사상 가장 넓은 스트라이크 존을 가진 심판임에 틀림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런지 가문은 아들 폴에 이어 현재 손자 브라이언까지 3대째 메이저리그 심판으로 활약하고 있다.

억울한 판정을 받는 것은 타자도 마찬가지다 ⓒ gettyimages/멀티비츠

야구가 재밌는 것은 '인간'과 '심리'라는 요소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인간이라는 요소는 때로는 명승부를 만들어내지만 때로는 명승부가 될 수 있었던 경기를 망치며, 한 팀(1987년 세인트루이스) 또는 한 선수(아만도 갈라라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기기도 한다. 2010년 ESPN은 갈라라가의 퍼펙트게임이 오심에 의해 날아간 후 보름 동안 벌어진 184경기에서 심판들의 판정을 하나 하나 다시 확인했는데, 근접전 상황의 무려 20.4%에서 오심이 일어났음을 확인한 바 있다(정확한 판정 65.7%, 옳다 그르다 평가할 수 없는 판정 13.9%).
 

민감하디 민감한 존재인 투수는 볼에 대한 단 하나의 판정에 의해서도 심리적으로 크게 무너질 수 있다. 방법은 하나 '피칭은 타자가 아닌 스트라이크 존과의 싸움'이라는 말처럼, 일관적이지 못하고 변덕 심한 스트라이크 존을 만나서도 이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바로 매덕스가 투수로서 평생을 해왔던 것이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예전에는 선수들과 같이 억울해 할 수밖에 없었던 팬들이 심판의 존을 분석할 수 있는 근사한 무기를 얻게 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