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October 31, 2012

한 날 묵상 - 갈 2:11-14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날 때 분명한 목소리를 내라. 게바도 책망받았다면 나도 예외일 수 없고, 그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있는가? 그렇지만, 나에겐 말씀을 칼처럼 적용하라, 다른 사람에겐 관용함으로 보라.>

한 날 묵상 - 갈 2:11-14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날 때 분명한 목소리를 내라. 게바도 책망받았다면 나도 예외일 수 없고, 그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있는가? 그렇지만, 나에겐 말씀을 칼처럼 적용하라, 다른 사람에겐 관용함으로 보라.>

1. 갈라디아서는 은혜의 복음과 율법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된다. 우리는 나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따. 나의 구원은 어디서 왔는가?

2. 나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나를 사랑과 용서로 품으셨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기억할 때, 나를 보지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다.

4.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갖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

5. 아직도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지 못하고, 율법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6. 게바는 지금 안디옥에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아니함으로' 바울의 책망을 받고 있다.

7. 바리새인의 외식함이 게바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8.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날 때를 조심해야 한다. 사실 그외에 모든 것은 관용함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결코 복음의 진리에 따르지 않는 단 한가지 이것은 결코 관용함이 있어서는 결코 아니된다.

9. 교회안에, 공동체안에 이러한 모습이 드러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 잘 처리해야 합니다. 절대 관용함이 있어서는 안되면 신속정확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10. 바울이 게바를 책망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해 봐야 한다.

11. 첫째는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 보일 때, 책망해야 하며 바르게 세워야 한다. 그들의 말들과 논리가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12. 게바도 책망 받았다. 바나바도 책망받았다. 이들이 누구인가? 결국 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그 어는 것도 예외일 수 없다.

13. 둘째는,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행동들은 전염성이 아주 강하다는 경각심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외식은 우리의 삶에 아주 친숙하기 때문이다. 전혀 이러한 것들은 낯설지 않는다. 특별한 모티브가 없더라도 쉽게 외식에 유혹된다. 그래서 더욱 절처히 해야 한다.
 영화 "연가시"에서 처음 동네 일가족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장이 제대로 위험성과 전염성의 경각심을 가졌더라면 하는 생각이 갖는다.

14. 게방의 영성은 뛰어나다. 또한 바나바도 그에 못지 않는다. 그러나 게바의 행동은 바나바에게도 쉽게 전염되었다. 이게 바로 악함의 힘이다.

15. 셋째, 책망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복음이 바로 서게 함에 있다. 책망 받는 사람을 사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떠나게 함도 아니다. 복음이 바로 서는 일에까지만 책망해야 하며 그 후 바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16. 교회안에 이단이 침투할 수 있다. 요즘은 더욱 그렇다. 어떻게 그들과 대처해야 하는가? 우리의 질문이며 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17. 복음의 진리에 벗어남에는 단호하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18. 또한 어느 위치에 있든, 공동체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매우 크다 할지라도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일이 보이면 단호하게 신속해야 한다.

19. 오늘도 거짓 선지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들을 경계하며 찾아내는 것, 그리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 또한 우리가 깨어 해야 할이다.

20. 주님의 은혜만이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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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 할 말은 하는구나. 꼭 필요한 말은 하구나.
 왜냐하면 14절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2장 5절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 복음의 진리가 항상 우리의 삶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게바의 책망 내용
  14절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다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복음의 진리" => 율법으로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롬3:19-30).


12-13절 게바의 책망 받을 일 ...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를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 게바의 당시의 마음 이해하기. 율법이 무엇이기에... 율법은 유대인에게 무엇이기에 ..

  13절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Monday, October 29, 2012

소그룹 리더를 말하다 - 소그룹 네트워크 357호



소그룹의 성패를 좌우하는 여러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간과할 수 없는 요소가 바로 소그룹 리더입니다. 소그룹에서 좋은 리더가 있으면 그 소그룹은 효과적인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소그룹이 단순한 성경 공부 모임이나 교제의 모임이 아니라 교회의 사역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모임이 되어야 한다면 리더의 중요성은 더욱 크게 부각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고민하게 만드는 문제는 이 효과적인 열매들이 대부분 단기적 결과물에서 그치고 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리더를 양성해내지 못한 이유로 사역의 연속성이 끊어지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그룹 리더는 자신을 닮아가는 자신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소그룹을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세워가시도록 최적의 소그룹 환경을 만들고 이끄는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리더는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균형있게 성장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그룹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며 자신의 섬김을 통해 변화될 사람들의 성숙한 모습을 꿈꾸며, 그들의 변화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열정과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훈련된 소그룹 리더를 세운다는 것은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평신도 지도자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리더는 사람들을 깊이 사랑할 줄 알고 다른 사람들을 훈련하여 또 다른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하는 과정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리더로서의 자질이 구비된 사람이 소그룹의 리더로 세워졌을 때 소그룹은 교회 내에서 전도와 선교의 효과적인 도구가 되며 초신자가 적응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성장하는데 있어서 매우 유익한 기능을 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초신자들의 적응과 성장에 교회가 관심을 기울이고는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본 경험이 있다면 사람들이 성장하도록 돕는 훌륭한 방법으로써 소그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귀납적 소그룹 인도에 도전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훈련된 소그룹 리더들이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양성이 되게 된다면 리더들의 다양한 은사를 따라 한 두 가지 특별한 기술을 갖춘 평신도 지도자들을 배출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구비시켜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하는 일은 교회에 주어진 커다란 과제 중에 하나라고 봅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에서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생활에서도 그리스도인다운 모습과 태도로 생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을 재생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돕는 것이 소그룹 사역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르침 받은 것을 실천하면서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현장이 필요한데 이것을 바로 소그룹 사역이 뒷받침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그룹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도록 리더가 소그룹 상황과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이렇듯 소그룹에서 성숙한 리더의 역할은 곧 또 다른 성숙한 리더를 세워가게 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이 글은 폴 스티븐스의 「평신도가 사라진 교회」의 일부를 발췌 각색한 글입니다.

Friday, October 26, 2012

한 날 묵상 - 갈 2:1-10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나 유력한 자들의 그 어떠한 유혹과 핍박에도 복음의 진리가 항상 우리가운데 있게 하며 충만하게 하라>

한 날 묵상 - 갈 2:1-10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나 유력한 자들의 그 어떠한 유혹과 핍박에도 복음의 진리가 항상 우리가운데 있게 하며 충만하게 하라>

1. 복음이 항상 내 가운데 있게 하라.

2. 페북에 글을 보고 잠깐 생각하게 한 글... 제목부터 깊은 생각을 갖는다 "생략된 복음"

[스크랩] 생략된 복음과 현재의 우리의 나은 점? 오
늘 아침 읽은 페친의 담벼락의 글이 하
루종일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와는 페친 관계가 아닌 한 분의 글이 나의 페친 가운데 한 분의 담벼락에 공유되고, 이 글이 내게까지 보이게 되었다. 먼저, 이 글을 다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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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적 성향의 선교사들은 피선교지인 조선에서 제국권력과의 마찰을 피하기위해 "생략된 복음"을 전했다. 출애굽의 해방적지평. 계약법전의 약자보호법 정신. 희년법의 혁명사상. 예언자들의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앞세운 정의실천의 요구 등이 생략된것. 교회의 자기 생존과 확대를 지키기위해 제국권력과의 야합 속에서 복음을 비정치화한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

김용의 선교사의 복음학교는 이러한 "생략된 복음"을 
확대 재생산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유기성이나 김길 등의 책도 마찬가지고. 아니 대부분의 교회가 그렇다. 대표적 친일파이자 감리교신자인 윤치호는 사회정의를 강조한 아모스서를 "신의 증오가 담겨진것"이라며 천대시했는데 지금의 우리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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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문단 가운데 두 번째 문단은 나로서는 간단히 다룰 성격이 못되므로 생략하고, 첫 번째 문단을 중심으로 내 소회를 간략하게 소개해 보려 한다. 이 첫 문단의 주장은 두 번째로 인용된 내 페친의 첨언으로 인해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데, 요약하면 이리 될 듯 싶다.

일제 강점기를 전후로 하여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기독교의 복음은 “생략된 복음”이었다. 다시 말해, 성경이 복음을 통해서 말하려는 공의적 측면- 출애굽의 해방적 지평, 계약 법전의 약자보호법 정신, 희년법의 혁명 사상, 예언자들의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앞세운 정의 실천의 요구 등이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필자에 따르면 이것은 결국 복음의 비정치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왜일까? “교회의 자기 생존과 확대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데 필자는 이렇게 ‘생략된 복음’을 한국에 뿌린 선교사들을 근본주의자라고 표현했다.

진술된 주장 가운데 몇 가지 확인을 위한 질문들이 있다.

1. 한국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이 근본주의자들이었나?

2. 이들이 소위 ‘생략된 복음’을 전한 것이 ‘교회의 자기 생존과 확대를 지키기 위해서’였나?

3. 선교사들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에서 ‘공의적 성격’을 생략한 채 한국에 전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선교사들이 길러진 토양, 즉 (주로)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 공의적 성격이 편만하게 전해지고 있었음이 입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자기의 신학과 사회의 토양에서는 당연시 되던 복음의 공의적 측면이 한국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선교사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생략된 정황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들을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인간은 그 시대의 아들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따라서 성경은 성령의 조명 아래 신학의 도움을 받아 해석되어야 한다고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자신을 세례한 문화와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세계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 성경을 점진적으로 이해하는 폭과 깊이를 더하신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그 시대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당신의 백성이 이해하기를 바라셨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가지고 지나간 과거의 시대의 성경 지식을 평가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히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약간 난폭한 질문을 하고자 한다. 복음의 진리됨은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의 태도와 삶의 열매를 통해 입증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그리고 우리’의 한계에 갇힌 복음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하고 있는가? 또 하나의 질문. 그 시대의 많은 신자들이 ‘생략된 복음’만으로도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렸다. 그럼, 우리는? 우리는 그 시절의 그들보다 어느 점에서 나은가?

3. 바울이 복음을 선포할 당시에 가장 큰 이슈는 바로 할례의 문제였다.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냐? 아니냐?하는 문제이다. 

4.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복음을 전파함에 할례는 필수조건이 아니다. 그래서 이방인 가운데 전파하는 복음에 결코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선포는 없었다.

5. 결국 이를 확증하기 위해 바울은 헬라인 디도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3절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도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6. 바울은 할례를 요구하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4절)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그들의 말에 복종하지 아니한 이유도 분명했다.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우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었다. 

7. 이게 진정 바울이 선포한 복음이다. 

8.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복음의 진리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할례가 문제가 된다면, 결코 자유함이 없습니다. 복음의 참맛은 아무 조건 없이 주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9. 따라서 할례의 율법의 매인바 되어서는 결코 자유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10. 예수님은 행10장 9-16절에서 "보자기 사건"을 통해서 분명히 사도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11. 바울은 이러한 확증은,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나서(3절), 디도가 왜 억지로 할례받지 않는지에 대한 언급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12. 만약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면 사도들이 왜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겠는가

13. 이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으로서,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 받으라고 하지 않은 주체는 바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루살렘의 사도들일 수도 있는데(2-3절에서 의미를 찾아보면..) 중요한 것은 헬라인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14.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할례를 행치 않았으며(5절), 할례를 행하는 것곧 율법에 따르는 것은 율법의 종이 됨으로(5절), 믿음으로 행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할례는 필요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16절).
갈 2장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마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리라"


15.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의 적용을 해 봅시다. 복음의 진리가 진정 나에게 참 자유를 주십니까? 아니면 자꾸 나를 옳아매는 밧줄이 되십니까?

16. 율법의 잣대로만 상황 논리에 빠져 복음을 스스로 제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7. 좋은 것을 취하고,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8. 다른 사람을 보는 잣대는 어떻습니까?

19. 진정 복음의 진리로 모든 상황을 보며, 헤아리려 힘쓰십니까?

20. 이 시대에 필요한 복음입니다. 상황 복음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 내 삶 가운데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21.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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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십 사년만에 올라갔는가?
그렇다면 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가?
굳이 여기서 "계시를 따라 올라가"라는 말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을 확중하기 위한 것인가?

이 질문은 이어서 나오는 "이방 가운데세 전파하는 복음"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1. 모두에게로 나아가라. 할례자에게로, 이방인에로
2. 각기 다른 사역의 길을 존중하라.
3. 왜냐하면 부르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4. 할례자에게 가는 야고보와 게바, 그리고 요한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방인에게로 가는 바울도 당연히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복음을 전파함에 할례는 필수조건이 아니다. 그래서 이방인 가운데 전파하는 복음에 결코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선포는 없었다. 결국 이를 확증하기 위해 바울은 헬라인 디도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3절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도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할례를 요구하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4절)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고 그들의 말에 복종하지 아니한 이유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우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었다.
이게 진정 바울이 선포한 복음이다.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난 얘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디도가 할례받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는 의도는 무엇인가만약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면 사도들이 왜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겠는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다.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 받으라고 하지 않은 주체는 바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루살렘의 사도들일 수도 있다.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할례를 행치 않았다고 한다(5절).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이것이 그리스도 안의 자유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할례를 행하는 것, 곧 율법에 따르는 것은 율법의 종이 되는 것이요(5절),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16절).
갈 2장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마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리라"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에게 부르심과 복음은 어떤 의미인가?



1절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3절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7-8절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심.

8절 우리는 이방인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 가게 하려 함이라


참고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1년간 사역을 한 후 떠났던 1차 전도여행 기간은 약 4년이었다(AD 46-49). 이 여행 말미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으며(15:1-5), 이것은 바울이 회심한 후 세 번째 예루살렘 방문이다(첫번째는 행 9:26, 두번 째는 행 11:30). 
그렇다면, 14년 중 나머지 기간에는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참고 행 9:26-30, 11:25-26)

7 Reflections on Forty Years of Writing


Recently I was asked to look back over my writing ministry and reflect on the books I’ve published—how I assess them, and what impact they may have had. (Read the full interview by Frank Viola)
My first book was One Hundred Years at Spring Arbor: A History of Spring Arbor College, 1873-1973, which I was requested to write. But the book that has had the greatest impact by far is The Problem of Wineskins: Church Structure in a Technological Age (InterVarsity, 1975). The book went through repeated printings and was translated into a number of other languages. Still today I meet people who were impacted by the book in the 1970s or 1980s, or since.
The most common reaction is similar to this one from a man who later became a prominent evangelical leader in Great Britain. “I was about to give up on the church,” he said. “Wineskinsrestored my hope for the church.”
A major reason for strong reactions to the book (positive, and sometimes negative!) was that it touched a nerve on issues of church and mission that were much disputed at the time.
Here I will share with you my response to this interview question:
As you look back on your writing and speaking ministry, how would you summarize your contribution to the body of Christ? What are the main points you’re trying to get Christians to understand that you’re passionate about?
I respond with the following points:

1. Let’s take Scripture seriously, unfiltered, without blinders, inductively.

“The Bible is a radical book” as B. T. Roberts, founder of the Free Methodist Church, wrote some 150 years ago. (See my book, Populist Saints.)
I deal with the role of Scripture particularly in Liberating the Church, but also in Wineskins andCommunity of the King.

2. The church is a spiritual/social organism with its own ecology.

It is literally the body of Christ, the community of the King. Its revolutionary vitality does not depend upon programs but upon unleashing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in people’s lives, in community. As Jesus said of the resurrected Lazarus, “Loose him, and let him go” (John 11:44). So with the church. This is a major part of my argument in The Problem of Wineskins and is elaborated also in Community of the King, Liberating the Church, and Decoding the Church.

3. God is always in the business of radically renewing the church, if we are open to the Spirit and faithful to Scripture.

A key “mark” of this renewal is a focus on justice and holy love, with a strong emphasis on the gospel for the poor.
See especially my chapter on “The Gospel for the Poor” in The Problem of Wineskins, though nearly all my books make this point. Decoding the Church shows how ministry to and with the poor is in fact a key “mark” of the true church. Signs of the Spirit shows how this is true historically. A shining example here is John Wesley, as I document in The Radical Wesley and Patterns for Church Renewal.

4. God has “a plan for the fullness of time to bring everything in heaven and earth together under one head, even Jesus Christ” (Eph. 1:10).

We are called to actively, redemptively participate in this reconciling work. This is, in fact, the work of the kingdom of God.
This theme runs through nearly all my books. In A Kingdom Manifesto I showed how the biblical theology of God’s kingdom weaves together seven key themes: justice for the poor, the promised land, city of the King, house of God, shalom, sabbath, and Jubilee.
People differ wildly, however, in what they really mean by “kingdom of God.” So I sort out the different conceptions of God’s reign in Models of the Kingdom.

5. Christians are “stewards of God’s grace” (1 Peter 4:10) and stewards of the earth.

The two go together, giving us the potent biblical teaching on stewardship. If we take this seriously, we will be a revolutionary force in the world, a movement that both sees people transformed and that renews the earth, even as we await the final appearing of Jesus Christ to establish his kingdom on earth in its total fullness. (See especially Salvation Means Creation Healed.)

6. Since God is always at work to renew the church, church history is largely the story of a succession of renewal movements, from the early church right up to today.

My theology of renewal and renewal movements is found especially in Signs of the Spirit: How God Reshapes the Church (1986), based on my Notre Dame doctoral dissertation. It shows how God worked through Pietism, Moravianism, early Methodism, and other movements to reawaken the church. The book works out the five dimensions of church renewal.

7. We have unbounded confidence that God will fulfill all his promises.

This gives us both hope and energy to act now in the Spirit to see God’s will done on earth as in heaven through vital Christian communities, the church.
A key point here is the radical meaning and power of the gifts of the Spirit in making the churchfunctionally the body of Christ. Everyone is gifted; everyone is a minister; everyone has their place in Jesus’ body. A church of 100 people has potentially 100 ministers. If the church pays attention to passages such as Ephesians 4:1-12 and 1 Corinthians 12, it will learn how to release the power of these gifts with great effect and in an organically structured way so that the church functions as one coordinated body, not either as a hierarchy (at one extreme) nor as a chaotic free-for-all (at the other extreme). The church’s structure is that of a living body, not of an organization or business corporation.
“Body of Christ” is much more than an analogy or figure of speech. I make the point over and over in my writings that the body of Christ as portrayed to us in the New Testament is relevant and powerful in every culture and society in the world. Don’t look for some “new model of the church.” No new model is needed. What is needed is communities of disciples who are fully committed to Jesus Christ and the life of the kingdom of God now in the world, and so embody the hope and power of the Holy Spirit in a continuation of the movement that began at Pentecost.
There is nothing more radical and revolutionary than the church as Jesus’ body on earth, empowered by the Holy Spirit with all the needed gifts and graces. Everything else follows from this.

Howard A. Snyder is currently a Trinity World Fellow at Trinity College, Bristol, England. He served as Professor of Wesley Studies at Tyndale Seminary in Toronto, Ontario, Canada, 2007-2012, and previously taught in the E. Stanley Jones School of World Mission and Evangelism at Asbury Theological Seminary in Wilmore, Kentucky, 1996-2006. He has also served at United Theological Seminary, Dayton, Ohio, and pastored in Chicago, Detroit, and São Paulo, Brazil. His books includeThe Problem of WineskinsThe Radical WesleyCommunity of the KingModels of the Kingdom, and Salvation Means Creation Healed.

Jae Young Kim 페북에서..

 1. Let’s take Scripture seriously, unfiltered, without blinders, inductively.(성경을 진지하고 꼼꼼히 잘 읽으세요!)
2. The church is a spiritual/social organism with its own ecology.(교회가 신령한 영적인 생명체/유기체임을 인식하십시오)
3. God is always in the business of radically renewing the church, if we are open to the Spirit and faithful to Scripture.(하나님이 교회갱신에 신경쓰시고 돌아보시되, 우리가 성령과 말씀에 열려있고 충실해야 함을 기억하십시오!)
4. God has “a plan for the fullness of time to bring everything in heaven and earth together under one head, even Jesus Christ” (Eph. 1:10).(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시키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5. Christians are “stewards of God’s grace” (1 Peter 4:10) and stewards of the earth.(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맡은 청지기들이자 땅을 잘 관리/경영해야 하는 청지기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6. Since God is always at work to renew the church, church history is largely the story of a succession of renewal movements, from the early church right up to today.(교회의 역사는 갱신과 부흥의 연속이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7. We have unbounded confidence that God will fulfill all his promises.(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모든 약속들을 성취하신다는 확신을 풍성히 가지십시오!)

Wednesday, October 24, 2012

한 날 묵상 - 갈 1:18-24 <그 후 삼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바울에게 삼 년은 핍박하던자에서 은혜받은 자로 변한 자신을 증명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한 날 묵상 - 갈 1:18-24 <그 후 삼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바울에게 삼 년은 핍박하던자에서 은혜받은 자로 변한 자신을 증명하는 시간이었습니다>

1. 나는 무엇으로 나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가?

2.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이 그리스도인인지를 증명해 보이십시오'라고 묻는 다면 나는 어떻게 내가 그리스도인인지를 증명해 보일 수 있을까?
 1) 큰 소리를 치면서 무조건 우긴다.
 2) 그냥 못 들은척하고 무시한다.
 3)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준다.

3. 바울은 수 많은 사람들로부터 '바울이 진정 예수님을 만났는지?',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해야 한다면, 바울의 사도권은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복음 전도자가 된 후에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4. 바울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5.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다.

6.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과 친밀한 만남과 대화를 한 후에 바로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7. 바울은 삼 년이란 시간동안 자신의 사도권을 몸소 삶으로 실천하여 결과물로 만들어 내었다.

8. 삼 년 동안 바울이 행한 수 많은 사역들은 그리스도께 직접 계시를 받았음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하여 자신이 전한 복음은 다른 복음이 아니라,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증거하면서 내가 전한 복음 이외의 복음은 다른 복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9. 우리가 살아가다 이 보다 더 억울한 경우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나 외에 다른 어느 누구나 몰라주는 일을 당할 때, 그 누구에게도 진실은 아무 영향이 없을 때,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삶으로 그 일을 증명시키는 것 뿐이다.

10. 바울은 3년 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철저히 자신은 숨기고 복음만을 들어내었다.

11. 그렇게 자신의 철저한 삶으로 복음을 증명하며 변증하였기에 3년 이후에 예루살렘에 떳덧히 서서 베드로를 만날 수 있었다.

12. 바울이 전한 복음에 바울은 드러나지 않고 오직 복음만이 들어났다함은 22-23절 말씀에서 볼 수 있다.

13.  22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바울의 얼굴은 알지 못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은 들은 것이다.

14. 23절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오직 믿음을 들은 자는 누가 복음을 전했느냐보다 복음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5. 그리하여 바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는 놀라운 고백이 백성속에서 터지게 되었다.

16. 바울의 복음을 듣고 초기에 행한 이러한 사역은 진정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17. 우리 모두는 죄인이었다. 바울만큼은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편에서 바울보다 더 했을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 모두 바울처럼 과거가 있다는 것이다.

18. 과거있는 사람이 바울처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크나 큰 은혜이다.

19. 그렇다면, 은혜받은 자들의 그 이후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20. 바울처럼 자신을 처서 복종시켜야 할 것이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지난 날의 죄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했던 것들에 대해서 용서 받았다며 자유함을 온 천하에 드러낼 것이 아니다.

21. 처음 진리안에서의 자유함은 혼자 조용히 누리라. 지난 날 나의 죄로 인해 고통 받은 자들을 기억하라.

22. 그리고 그들에게 진정 '나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 새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외침은 말로가 아니라 행함으로 그들에게 보이라.

23. 그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바울은 삼 년 이라는 시간을 그 일에 집중하며 철저히 자신을 죽였다.

24. 오 죄에서 돌아온 그대들이여!
     진정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주님과 만남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 앞에 크게 들어 내는 것을 조심하라!
     지난 날의 잘못을 구하는 용서는 철저한 침묵과 삶으로 변화된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그들의 마음에 성령의 열매가 가득하리라!

25. 복음을 핍박하던 자가 회심하였다면, 핍박받은 자들이여!
     진정 용서하라! 용서가 되지 않거든 그래도 용서하라! 그리되지 않더라도 용서하라!
     용서는 쉬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철저히 보지 말고 오직 복음만을 보아라!
     복음만이 그들을 받아 들일 수 있다네!
     당신들이여 진정 복음만 받아들이게나!

26.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바울이나 핍박받은 자들이나 사도들이나 유대 그리스도인이나 모두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27. 오늘 하루도 눈이 복음으로 사로잡히는 은혜가 있기를 구하며....

28. 아멘.

====
18절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 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내용을 강조한다.

19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1-24절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
 22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절 "다만 우리르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절 "나로 말마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주석

=====1:18
  그 후 삼 년 만에 - 본 구절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1)  바울이 회심하고나서 삼 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즉 문맥상 바울이 자신의 독특한 회심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회심에  역점을  두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Boice,  Huxtable,
Lenski).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돌아온 때로부터 삼년이 경과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에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게바를 만나기 전에  상당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어떤 학자는 3년이란 기간을 문제 삼아 본문의 기록이 행9장에 나타난 바울의 행적과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누가가 행 9장에서  바울의 행적에 대하여 기록할때 '아라비아로 간것'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의 침묵이 바울의 아라비아행을 부정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는 못된다. 누가는 단지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아니한 기간에 대하여 침묵한 것뿐이며, 그 반면에  바울은 본서에서 게바를 만나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재정립(再定立)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는것이다.

   게바를 심방하려고 - '심방하려고'의 헬라어 '히스토레오'(*              )는  영어의 '히스토리'(history, '역사')의 어원이 되는 말로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의미이다. NEB는 이를 '게바와 가까워지려고'(to get know)라고 번역하였다. 본 구절은 행9:26-30에 기록된 사건으로 바울은 바나바에 의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된  이후에 베드로를 찾아갔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주장하면서 베드로와의 만남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추측이 가능하다.
(1)  2절에서 언급한 자신을 지지하는 '형제' 가운데 베드로가 포함되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2)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 방문이 사적인 방문이며 어떤 인간적인 권위의 지지를 얻으려는 방문이 아니었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주께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양자가 조심스럽게 적용되어야 하겠으나 문맥상 후자를 택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사도는 지금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을  받지아니한 자신이 사도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15일 동안 머무르며 게바를 통하여 예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며, 바울은  그때에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과 가르침을 바르게 정립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설명하였을 것이다.

=====1:19
  주의 형제 야고보 - 바울이 만난 야고보가 세베대의 아들이면서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마 10:2)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 10:3)가 아니라 예수의 친형제 야고보라는 것을 분명히한다. 예수의 선교 초기에 그의 형제들과 친족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친 자로여겼다(막 3:21;요 7:5).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그들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었으며(행 1:14)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향력있는  지도자가  되었다(2:9,  12;행12:17;21:18 등).
 어떤 학자는 바울이 야고보를 사도로 인정하느냐 또는 인정하지  않느냐에 관심을 가지지만(Cole), 당시 교회의 보편적인 사도 개념으로 이해할 때  지도자인 야고보를 사도로 인정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바울이 왜 열두 제자 중 베드로 외에 야고보만을 보았다는 것을 강조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바울은 예수에 대한 보다 넓고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하여 수제자를 택했으며 또한 예수의 친형제를 택한 것 같다. 야고보는 이방인들에게도 너그러웠으며 온유한 인격을  소유하였으므로 바울에게도 친절하게 예수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1:20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 바울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갈라디아 교회의 구성원 중에는 아직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바울이 교회의 지도자들과 충돌할때에 발생되는 문제는 그의 진정한 사도권에 관한 것이었지만, 교회의 구성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자신이 지난 날에 그들을 핍박했던 사실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쓰라린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갈라디아의 교인들에게 거짓 교사들을  멀리하고 복음에서 떠나지 말라고 엄숙하게 권고하고 있다.

=====1:21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의 연대기적인 행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를  들러 길리기아 지방으로(행 9:30) 갔다가 안디옥에서 함께 사역하기를 바라는 바나바의 요청에 의해 수리아지방으로 갔다(행11:25, 26). 길리기아는 소아시아의 동남부  연안지대로서 바울의 고향인 다소를 포함하는 지역이며 수리아는 팔레스틴 북부지역으로 수도인 안디옥을 중심으로 하는지역이다.
 바울이 이 두 지역을 언급하는 것은 (1)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먼 곳에서 사역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며,  (2) 또한  예수를 만난 이후에 복음을 위해서 열심으로 헌신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1:22
  유대에...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 '얼굴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프로소포'(*           )는 '개인적으로'라는 의미이다(Longenecker). 행  8장에  나타난 박해로 인해 유대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어떤 인물인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어떤 인격의 소유자인지 구체적으로  아는사람은 예루살렘교회에 국한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변방(邊方)에 있던 유대인의 교회는 바울에 대해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Cole).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 바울이 13절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였는데 본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라고 표현한 것은 유대교의 회당과  구분짓기 위함인 것 같다(Cole). 또한 이러한 표현은 살전 2:14의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이라는 표현과 동일한 용어로 보인다(Longenecker).
 그러므로  본문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따로 교회로 모이는 것을 시사한다거나, 유대  지역의  교회가 구체적으로 지역 교회의 형태를 가졌음을 보여준다고 하기는 어렵다.  한편 '교회'를 복수인 '엑클레시아이스'(*                   )로 사용하는 것은 단지  유대  지역에 있는 교회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의 교회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시사한다(행 9:30).

=====1:23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 '지금'(*      , 뉜)은 현재 사실을 과거  사실과 대조하여 사도 바울이 회심한 사실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낸다.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이 회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과거 바울로부터 직접핍박을 받았던 유대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되고도 남았다. 본문은 바로 그와 같이 변화된 바울을 두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말을 인용한 것이다(Ernst Bammel).

=====1:24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돌리니라 - 본절의 이면(裏面)에는, 바울의 사도직과 메시지를 부정하면서 정면으로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에 대해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한 모습과 바울의 초기 선교 사역의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암시되고 있다. 한편 본절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에  관하여  말씀하신 부분인 사  49:3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Longenecker).

참고


퍼온글 - http://user.chollian.net/~skhong92/galatians/galatians_1t.htm
갈라디아서 1장

1.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 서두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 표현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고전, 고후, 엡, 골)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롬, 빌)이다. 이런 표현에 비하면 갈라디아서의 서두는 어떤가?
    아주 강성 발언이다. 퉁명스럽고 과격하게 책망하는 느낌이다.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강조하였다. 같은 회사의 비슷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끼리 다툼이 생기면 있을 수 있는 말 ‘월급을 네가 주냐?’, ‘네가 날 임명했냐?’ 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2. 바울은 왜 하나님을, 우리가 잘 쓰는 표현처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이라고 하는가? 이 두 가지 표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아무래도 우리와 거리감이 더 있어 보인다. 달리 말하면, 천지만물의 창조보다 우리에게 더 직접적이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살리신 일이다.
3. 바울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했기에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했을까?
    “누가 바울을 사도로 임명했느냐?”: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사건은 너무나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사건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깍아내리고 자격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다. 실력이 확실한데도 굳이 자격증이나 학위가 있느냐고 시비를 거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4. 일반적인 편지 서두에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해도 묻는 것은 안부나 건강이다. 이런 말을 하건 저런 말을 하건 간에 바울이 주로 쓰는 문안 인사의 골자는 무엇인가?
    은혜와 평강: 그것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이다. 이것이 건강보다 더 중요하고 요긴한 것은 건강한 생활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5.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드리지?
    찬송: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는 말씀이 찬송이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감격에서 나온 찬송없이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6. 성도들이 은혜(하나님의 자유와 용서)와 평강(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이루어진 평화)을 누릴 수 있는 이유(근거)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기 때문이다.
7. 바울이 일차전도 여행 때에 들렀던 도시들은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이다(행 13:16-14:25). 이들을 한꺼번에 표현하는 말은?
    갈라디아 지방: 소아시아의 중앙 고원지대를 가리키는 곳이다.
8. 사도 바울의 말이 여전히 격하다(6-10). 본래 그런 성품이었을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여기서는 무슨 이유로 이렇게 격하고 험한 말을 할까?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른 복음을 좇기 때문에, 그것도 이같이 속히(6): 초대교회 시절에 이단(?)을 박멸하겠다는 일념으로 정신없이 뛰어 다니던 사울의 모습을 보라. 이 정도 말은 격한 편도 아니다.
9. 성도는 사람들에게 좋게 해야 하나, 하나님께 좋게 해야 하나?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지: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과 동일한 경우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경우라면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하지만 형제를 기쁘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당연히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이 율법의 요구를 묵살하는 것으로 오해한 사람들이 바울을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10. 어떻게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만이 복음이고 다른 사람이나 천사가 전하는 것은 다른 복음 즉 이단인가?
    우리가 전한 것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계시를 받아서 전한 것이기 때문이다(11-12, 1:11-2:14). 그리스도께서 전한 것을 변하게 하는 것은 설령 천사가 전한다 해도 다른 복음, 즉 복음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을 계시의 완성이라고 한다. 이 말은 성경에 맞지 않는 다른 계시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어떤 꿈이나 환상을 보아도 그것이 성경에 맞는 것인지 검증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맞지 않으면 다른 복음이다.
11. 바울이 유대교에 있을 때 가장 앞장서서 성도들을 핍박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조상의 유전에 대한 뜨거운 열심이었다(14):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일이었지만.
12. 과거에 자신이 행한 부끄러운 일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전한 복음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이렇게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내가 어떻게 변했겠는가? 나 스스로 변했겠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겠는가? 또, 새삼스럽게 율법을 문자대로 강조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게 자신이 대선배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13.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전혀 몰랐던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보니 이게 자신의 노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자신의 출생을 포함해서 이 모든 일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4.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시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렇게 중요한 일에 대해서 왜 아무와 의논도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15.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아라비아(지금의 아라비아가 아니다. 당시에는 다메섹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메섹 근교일 수도 있다)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에 갔다가 3년 만에 예루살렘에 갔단다.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바울이 사도된 것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이나 회의에서 된 일이 아니다. 게바와 야보고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 때 바울을 사도들에게 인도한 사람이 바나바이다.
16. 수리아는 바나바와 바울을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가 있는 곳이며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 다소가 있는 곳이다. 이 지역에 오랜 기간 머물며 사역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쳤음을 말하는 셈인데 핵심은 뭘까?
    예루살렘이나 다른 사도들과 별로 상관이 없었다는 말이다.
17. 야고보는 행함에, 갈라디아서는 믿음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무슨 차이일까?
    바울의 관심은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의 삶에 관심이 더 있었을 뿐이다.


Monday, October 22, 2012

모든 사람은 죄인 - 롬 3장 10절

영국에서 일어난 에피소드입니다. 
한 청년이 장난 삼아 보낸 한 통의 편지가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런던의 유명인사 20명이 거의 같은 시각에 
모두 런던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는군요. 

긴급전문 “모든 것이 들통났으니 속히 피신하기 바람.”      

그 청년은 단순히 재미로 
런던의 유명인사 20명을 뽑아 명단을 작성해서 
일제히 같은 전문을 발송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설교 이렇게 한다" 유기성 목사(선한목자교회)



아래의 강의안은 미래교회 연구회에서 "21세기설교어떻게 할 것인가?"의 주제로 발표했던 내용입니다. 

“설교 이렇게 한다” 유기성목사 (선한목자교회) 

군목 훈련소에서 드렸던 예배, 설교 시간에 얼마나 졸리는지, 혼이 났습니다. 그 때 “졸리게 설교하는 것은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달았습니다. 

17, 18세기 종교개혁기는 설교가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때 상황과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너무나 다릅니다. 

미국 뉴욕에서 목사님들이 모여 설교에 대한 연구를 한 결론이 두가지였답니다. 첫째, 설교를 잘하지 못할 바에야 짧게 하라 둘째, 은혜를 주지 못할 바에야 교인들을 화나게 하지는 말라 

웨슬리나 루터, 칼빈의 설교는 그것이 지금도 과연 설교될 때, 교인들이 들어줄까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의 설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은 그 당시 사람들은 말씀에 굶주려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들 시대 이후에는 처음으로 청중들은 자신들의 말로 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개혁자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청중들이 몰려들게 된 것입니다. 

선교지에 가든지 중국에 가서 겪는 놀라운 일, 설교를 자꾸 해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길게 해도 지겨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설교 하지마”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개혁시대의 상황과는 아주 정반대의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발달한 매스미디어와 서적의 범람으로 너무나 많은 설교를 접하고 있습니다. 
또 17, 18세기의 청중들에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시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는 교육이 그리 왕성하지 못했으며 신문이나 그 밖의 대중 매체들이 발전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은 설교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만 들은 것이 아니라 부수적으로 설교자가 지니고 있던 여러 가지 지식들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 당시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교인들은 각 분야에서 전문가들로부터 많은 양의 최신 정보를 전해들어 그들이 지니고 있는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이나 영화, 음악회와 각종 오락 프로그램들은 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감성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설교의 위기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위기를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서 매주 1만 4천명 이상 모이는 윌로우크릭 커뮤니티교회 (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는 빌 하이블(Bill Hybels) 목사가 부머세대, 즉 1946년에서 1964 년 사이에 출생한 세대를 겨냥하여 시작되어진 교회이다. 그는 전통적인 교회의 죽은 의식과 같다고 여겨진 예배 형식, 그리고 대부분의 주요 교단 교회들의 급속히 떨어지는 출석율에 불만을 품고, 자신과 같은 세대인 베이비 부머들을 전도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그 결과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발견했다. 
첫째, 사람들은 교회가 항상 돈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방문자들에게 헌금을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광고를 하게 되었다. 
둘째, 사람들은 설교가 지루하고 판에 박혀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일반적인 교회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의사전달과 관련된 실험을 하기로 했다. 
셋째, 사람들은 교회가 실생활과 관계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매일의 삶을 다루는 설교를 하게 되었다. 
넷째, 사람들은 목회자들이 자신들을 무지하고 죄가 많다고 느끼게 만든다고 주장 했다. 이 비난을 들은 후 그는 결코 청중들을 무시하는 말을 하거나 그들에게 변화된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죄책감을 주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그러나 진정한 설교의 위기는 설교자 자신에게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설교자 자신이 복음을 잃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지고 상황이 바뀌어도 사람들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영적인 욕구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 영적인 욕구는 오직 설교를 통하여 채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만 바로 증거되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면 교인들은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1. “나는 복음과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 얼마나 분명히 알고 있는가?” 
진흙으로 형상을 만들 때, 뼈대를 만들고 진흙을 붙이듯이 설교도 뼈대가 있어야 말씀들이 세워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설교하기 위하여 설교자인 저 자신에게 먼저 세워져 있어야 할 복음과 영적진리에 대한 뼈대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는 영적진리를 다룬 고전적인 책들을 많이 읽고 읽되 정독하고 요약 정리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984년 광주통합병원에서의 개인적인 회심을 체험했던 일 
1994년 예배에 눈이 뜨이면서 진정한 예배를 드리게 되었던 일 등 

불신자에게 전도하듯이 복음에 대하여 정리해 보았습니다. 
전도 메시지: [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는가?] 

새가족에게 가르칠 양육메세지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제 1 과 / 지금 당신은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제 2 과 / 왜 꼭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까요? 
제 3 과 / 구원 받으면 어떤 축복을 받습니까? 
제 4 과 / 예수 믿고 또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제 5 과 /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영적인 권세가 있습니다. 
제 6 과 / 새로운 갈등에 도전하십시오 
제 7 과 / 구원받은 성도는 기도하고 응답 받습니다. 
제 8 과 / 구원받은 성도는 말씀에 잘 순종하여야 합니다. 
제 9 과 /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구원받은 증거가 있습니다. 
제 10 과 /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축복의 길이 있습니다. 

교인들을 훈련할 제자훈련 교재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제 1 단원 십자가의 능력 
제 2 단원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제 3 단원 성령 충만한 제자 
제 4 단원 예배하는 사람 
제 5 단원 기도로 사는 사람 
제 6 단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제 7 단원 믿음으로 사는 사람 
제 8 단원 항상 있어야 할 소망 
제 9 단원 항상 있어야 할 사랑 
제 10 단원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라 
제 11 단원 천국 같은 가정 
제 12 단원 전도자의 사명 

특별새벽기도회 때나 제자훈련을 통하여, 십자가, 부활, 성령, 믿음, 소망, 사랑 등 복음의 핵심에 대한 주제 설교를 시리즈로 했습니다. 이 때 그 주제에 관한 관련된 영적인 서적을 많이 읽고,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 강의를 참고하여 나 자신이 그 주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말씀의 뼈대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뼈대같은 영적진리들이 것들이 매주 설교할 때마다 다양하게 반복증거되고, 또 보완되었습니다. 

2. “나는 복음을 누리고 있는가?” 
설교자가 복음을 증거할 뿐 아니라 설교자 자신이 복음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설교자인 제가 복음을 누리면 교인들이 사랑스럽고 감사하고 허물 조차 은혜로 보아졌습니다. 자연히 설교를 통하여 복음이 전해집니다. 은혜가 전해지고 사랑이 전해지고 치유가 전해집니다. 그러나 제가 복음을 누리지 못하면 설교가 율법적이게 되거나 교인들이 설교를 통하여 목사로부터 책망을 받는다고 느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 8:1-11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 한마디를 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게 된 여인의 편에 서시면서 스스로 위기를 떠 맡으시고 여인을 감싸시고 사랑을 표현하신 후에 맨 마지막에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죄를 짓지 말라”는 메시지만 선포하는 것이 설교가 아닙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느끼도록 해 주어야 교인들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 이연길목사, 둘째아들 이야기, 미국에서 자라니 미국 사람이 다 되어서 너무 개방적이고 활달하니까 자꾸 잔소리를 하게 되더랍니다. 아이가 점점 대화를 피하더랍니다. 전화를 걸면 “나 지금 도서관 가는 길이예요” “나 지금 수업들어갈 시간이예요” 대화가 끊어지더랍니다. 사모님과 의논하기를 절대 잔소리하지 않기로 했답니다. 그리고 전화가 되면 무조건 사랑한다는 말부터 하자고 했습니다. 하루는 전화가 연결되었는데, “아빠, 나 지금 도서관 가는 길이예요” 하더랍니다. 그 때 목사님이 “아들아, 난 널 사랑한다”했답니다. 그 날 도서관 간다는 아이와 30분 통화를 했답니다. 부모와 대화가 되면서 아이가 침착해지고 공부를 하게 되고 결국 미국 법대에 들어 갔답니다. 그것도 전체 10% 안에 드는 성적으로. 

그래서 저는 율법적인 설교보다 복음적인 설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한 설교를 더 많이 하려고 애를 씁니다. 항상 그 관점으로 설교를 준비합니다. 그러러면 설교자인 저 자신이 항상 복음을 누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는데 교인들이 말을 듣지 않으니까 설교할 때 항상 매를 때리는 설교를 했습니다. 교인들이 주일 성수도 제대로 안하고 십일조 생활도 헌금생활도 안하고 봉사생활도 전혀 없으니까 이것을 본 목사님이 항상 설교할 때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여러분, 그렇게 예수 믿으면 지옥 갑니다. 주일 낮 한번 삐쭉 나오고 주일 밤도 주일날도 수요일도 새벽기도도 교회의 어떤 생활도 아무 것도 없이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은 참교회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들은 교인들이 그 목사님 앞에 거부반응을 나타내고 결국 목사님을 반대해서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후임 목사님이 오셨는데 후임 목사님도 교인들의 상태를 보니까 똑같은 설교를 하셨습니다. “주일 성수도 안하고, 주일 밤도 예배드리러 나오지 않고, 수요일 날도 나오지 않고, 새벽기도도 나오지 않고, 믿음의 삶도 살지 않고, 봉사생활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교인들에게 그렇게 미지근하면 지옥 갑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똑 같은 설교를 한 전임 목사님을 쫓아내고 후임 목사님은 쫓아내지 않고 환영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그 이유가 이상해서 한 교회 교인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왜 똑같은 설교를 하는데 전임 목사님은 쫓아내고, 후임 목사님은 그렇게 환영을 하고 있습니까?” 그 교회 교인이 하는 말이 “두 목사님 모두 다 우리들이 이렇게 믿으면 지옥에 합당하다는 설교를 하시는데, 전임 목사님은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것이 마치 고소한 것처럼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의 목사님은 그 말씀하시는데 자신이 안타깝고 자신이 지옥에 갈 것처럼 자신이 정말로 괴로워서 설교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최권능목사님이 한번은 시냇물을 건너려고 하니 강둑에 양반 하나가 담뱃대를 길게 물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보고 그냥 갈 수가 없어서 그 영감님에게 귀에다 대고, ‘예수천당’하고 지나갔습니다. 이 양반이 놀라서 “저 저 저 고얀놈 고얀놈”하지만 이미 징검다리를 건너가 버렸습니다. 아 그런데 이 양반이 집에 가셔서 자꾸 귀에서 ‘예수천당, 예수천당’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잠을 자도 자꾸 귀에서 메아리처럼 ‘예수천당, 예수천당’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귀신 붙었다고,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했습니다. 그런데 굿을 했는데도 안됩니다. 계속 귀에서 ‘예수천당, 예수천당’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서양귀신은 서양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야된다고 해서 교회 나가게 되고, 예수 믿게 되었는데, 이 양반이 누구냐 하면 고당 조만식 선생님의 부친인 조을선씨였습니다. 
최권능(최봉석)목사님은 특별한 복음설교나 교리공부를 시킨 것도 아니고, 무조건 ‘예수천당 예수천당’ 하며 돌아 다녔는데도 이상하게 사람들이 예수를 잘 믿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수십 교회가 세워졌고, 수십만 명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때 세상은 어수룩하고, 사람들이 단순했기 때문에 그냥 예수천당만 해도 믿었을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분명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을 뿐 아니라, 주를 만나고, 주의 영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목사님 속에 예수의 영이 살아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찔리고, 회개를 하고, 자복을 하고, 견딜 수 없고, 눈물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천당이라는 말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최권능이라는 사람 속에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한번은 그 최권능 목사님이 신사참배 때문에 감옥에 갇혀서 매를 맞았습니다. 야구방망이 같은 배트로 두드려 팬 것입니다. 그때 이 최권능 목사님 한 대 치면 ‘예수’ 또 치면 ‘천당’ 때려도, 때려도 맞을 때마다 ‘예수천당’ ‘예수천당’ 그러니까 일본순사가 우습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해서 “야 너는 매를 맞으면 아이쿠 하거나 살려줘 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고 예수 그리고 천당하느냐”하고 물어보니까 최권능 목사님이 유명한 말을 했어요. 뭐라고 했습니까? “내 속에는 예수하고 천당으로만 가득 차서 입만 벌리면 예수 천당이 나옵니다.” 이렇게 그 분 속에는 예수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 때문에 감옥에 갔습니다. 예수 때문에 양반의 족보를 버렸습니다. 예수 때문에 울고 울었습니다. 예수 때문에 수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 속에는 예수로 가득 찼습니다. 돈으로 차고, 자식으로 차고, 자랑으로 차고, 시기로 차고, 원망으로 차지 않았습니다. 예수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의 영이 그의 인격과 모든 삶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분에게 권능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권능이 예수의 혼이 그 삶을 통해서 그 사람을 통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 강해 설교 방식으로 설교하기로 정했습니다. 
매주 임의로 주제를 택하여 설교를 하다 보니 자꾸 같은 주제에 대하여 반복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중에는 제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설교한다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솔직히 내가 정말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을 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갈등이 생겼습니다. 제가 전하고 싶은 내용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내용에 맞는 성경본문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 본문을 내가 택하지 않고 주어진 본문으로 설교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시도한 것입니다. 교회력에 따라 본문을 택하는 방법도 생각했으나 저 자신이 성경을 깊이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강해설교 방식을 택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설교한 것을 보면 로마서 연속강해 설교, 요한복음 연속강해 설교, 에베소서, 야고보서 갈라디아서 연속강해 설교, 창세기 연속강해 설교, 구약인물 중심 강해설교 (모세, 여호수아, 엘리야 엘리사, 다윗)입니다. 신구약을 번갈아 설교하였습니다. 
강해설교하면서 얻은 유익이 있었습니다. 
1. 나의 설교가 아니라 성령께서 성경을 가지고 친히 설교하시는 담대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 장기적인 설교준비가 가능했습니다. 책별 주석, 강해, 성경공부 자료 등 충분한 설교자료를 확보할 수도 있었습니다. 
3. 월요일부터 본문을 가지고 설교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목요일에는 설교문 초고를 완성하게 되었고, 토요일에는 충분한 기도로 설교준비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4. 강해 설교를 하다보니 설교 주제가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이 잡히게 되었고, 교회의 질서나 헌금 등 예민한 주제까지 부담없이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5. 저 자신에게는 성경에 대하여 많은 공부가 되었고, 무엇보다 성경적인 안목을 훈련하는 너무나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6. 성경 속에 감추어진 보화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주제 별로 설교하였다면 전혀 다루지 않았을 부분 속에 참 귀한 영적진리가 있었습니다. 

4. “예수님께서 친히 설교하신다면 어떤 설교를 하실까?” 설교의 중심메세지 
강해설교를 하지만 주석적인 설교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설교는 성경공부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예배 중에 임재하시는 예수님께서 설교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월요일 주어진 본문을 3번 이상 읽고, 기도도 하면서, 생각을 통하여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힘썼습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주님께서 주신 생각들을 기록해 봅니다. 기록하면서 주님께서 주신 생각들을 정리합니다. 주님께서 주셨다고 정리된 생각을 가지고 예배당 설교단 위에 서 봅니다. “예수님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말씀하실까?” 주님의 마음을 느껴 봅니다. 
그 하나만 전하다가 내려와도 좋을 것 같은 그것, 제 마음에 눈물이 나고, 정말 전하지 않으면 안될 안타까움을 느끼려고 애를 썼습니다. 
남이 모르는 유머 하나도 전하고 싶어지고 남이 모르는 사건 하나만 알아도 맑하고 싶어지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을 알게 되면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운지 전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제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설교준비입니다. 
그 후에 주석을 참고하고 다른 목사님들의 강해설교를 읽으면서 주어진 영감이 진정 성경적인 메시지인지를 분별합니다. 

5. 설교는 쉽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설교문을 작성할 때, 청중이 쉽게 들을 수 있는 표현으로 써 내려갑니다. 마치 어떤 한 사람이 앞에 앉아 있고 그에게 설명하듯이 설교문을 씁니다. 교인들의 이름을 몇몇 적어놓고, 그것을 간간히 보면서 "이 집사님이 이것을 이해 할 수 있을까?" , "이 성도가 직면한 문제에 이러한 설교가 맞을까?" 등을 질문해 봅니다. 이렇게 설교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위하여 설교가 준비되었다고 느끼는 것을 알았습니다. 
쉽게 설교하려면 문장은 가능한 한 짧아야 합니다. 설교문은 들려주기 위한 것이지, 읽혀지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설교문을 작성하는 중에 소리를 내어 읽으면서 씁니다. 할 수 있는대로 설교가 끝난 후, 교인들이 내가 한 설교 내용을 머리에 기억하도록 준비합니다. 
쉬운 설교를 하기 위하여 설교가 간단한 문장으로 요약이 되도록 준비했습니다. 
전해야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써 보는 것은 논리 전달의 기본입니다. 듣는 사람은 기억의 한계를 가지기에 여러 가지를 말하면 아무 것도 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흔히 사용하는 세가지 대지도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기억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설교가 끝난 후 교인들의 마음에 설교가 한 문장으로 확실하게 부각된다면 설교는 성공한 것입니다. 

"그래도 거듭나야 합니다" 

설교 사이사이에 짧은 문장을 반복해줌으로써 듣는 교인들이 설교의 핵심 메시지를 놓치지 않게 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 꿈이 있다" 라는 설교를 읽었을 때, 반복하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가능한 한 설교를 외워서 교인들을 보면서 평상시에 이야기 하듯이 설교하기를 힘씁니다. 

군목 시절 조는 병사들에게 설교해야 하는 고통 속에서 배운 교훈, 설교문을 덮고서도 그 내용을 설교할 수 있을 때까지 설교문을 외웁니다. 설교원고는 철저히 준비하되 설교 원고를 보지 않고 설교합니다. 

6. 적용에 강한 설교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가장 은혜로운 설교는 적용이 쉽게 되는 설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교인들이 설교를 들으면 적용은 알아서 할 수 잇는 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느 권사님이 제 설교에 대한 평가를 해 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설교는 알아듣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라는 것인지 생각하기에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나는 내 설교로 하여금 "그래서요?" 테스트("So what?" test for relevance)를 거치게 한다. 성경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성경은 적절하다. 그러나 나는 설교를 성경만큼 적절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내가 사람들이 떠나면서, "그래서요?"가 아니라 "알았습니다"라고 말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믿음에 대하여 설교를 했으면 대개 설교 마무리를 하면서 “이제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했는데, 그것은 적용을 다룬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적용에 강한 설교를 하기 위하여 저는 항상 설교메시지가 나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확인했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가? 내가 진정 하나님을 믿음으로 행하였던 일은 무엇인가? 믿음으로 행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나의 삶을 점검해 보면 단순히 믿음으로 살라고 설교를 끝낼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제 설교준비의 큰 고비입니다. 본문에서 찾은 메시지를 설교자인 나 자신에게 적용되면 이미 반은 성공한 설교입니다. 그 적용과정을 설명하면 언제나 교인들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설교가 힘을 얻게 됩니다. 

가정의 달 설교 중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아내에게 사랑을 표현하라” 

나에게 적용된 부분을 드러내는 것은 나 자신의 실패 허물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나의 실패가 의외로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될 때가 많음을 보게 됩니다. 

John Maxwell 목사 [성공적으로 실패하라] 
저는 담대하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겪은 고통이나 느꼈던 기쁨에 대하여 말합니다. 물론 이것도 너무 많이 하면 지나친 것이 됨을 압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 전에 설교자인 나의 삶에 메시지가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궁금해 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교회 교역자들과 매일의 QT 나눔의 시간을 갖습니다. 설교훈련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7. 적용을 강조하다 보니 예화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예화를 많이 사용하셨고, 예수님의 설교는 대부분 이야기 형태였음이 적용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설교 메시지를 교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설교를 이야기처럼, 예화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부한 예화나 영감없는 예화는 오히려 역효과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해야 할 메시지와 관련되는 새로운 이야기를 일상생활 가운데서 찾습니다. 
여러 종류의 일간 신문을 읽습니다. 시사 주간지를 샅샅이 살핍니다. 여러 종류의 잡지를 규칙적으로 탐독합니다. 그리고 각 이슈에 대하여 성경적인 관점에서 평을 해 봅니다. 
자서전과 전기를 읽음으로써 삶을 통한 교훈들과 재미있는 일화들을 얻습니다. 현대 단편소설을 통해 시대의 흐름과 새로운 단어 사용을 경험합니다. 
늘 메모지를 가지고 다니면 어떤 순간에도 그 사건과 사람이 주는 교훈을 생각해 봅니다. 언제나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영감있는 예화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예화는 일상생활 중에 경험한 예수님의 역사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설교 중에 증거될 때, 교인들에게 가장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금요 목회나눔의 시간: 매주 전 교역자들이 금요 철야기도 시간 전에 한 주간 사역 중에 경험한 예수님의 역사를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 때 교역자들이 은혜받을 뿐 아니라 많은 예화거리를 얻습니다.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혼자있을 때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타락하고 오락이나 잡기에 빠집니다. 이유는 영적으로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심에 서 있습니다. 강단 위, 담임목사실, 기획위원회 그러나 거기서 정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때 오는 영적인 공허감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돈에 집착하고 명예, 세상에 빠지는 것입니다. 무서운 내적인 타락, 불신, 율법주의, 거짓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매주 자기 사역에서 주님의 임재를 확인해야 합니다. 주님의 임재는 기도제목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누려야 할 체험입니다. 우선 믿어야 합니다. 임마누엘, 성령의 임재. 그리고 체험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듣는 훈련이 매우 필요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서 많은 실제적인 예화가 나옵니다. 

8. 설교 마무리를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1. 설교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지를 확인합니다. 
단순히 십자가와 부활이 언급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설교의 밑바탕에 있도록 설교문을 작성합니다. 설교의 가장 큰 목적이 교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바로 듣게 하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 누리게 하려는 것임을 반복하여 스스로 다짐합니다. 
말씀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기에 (요 5:39) 설교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도록 준비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찰스 스펄젼(Charles Spurgeon, 1834-92) 목사님에 관한 한 가지 일화를 늘 기억하면서 목회하고 싶습니다. 일군(一群)의 미국 목사님들이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직접 들어 보기 위하여 영국을 방문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에 그들은 조셉 파커(Joseph Parker) 목사님이 시무 하시는 City Temple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약 2천 여명이 모인 가운데 과연 소문에 듣던 대로 파커 목사님의 설교는 감동적인 명설교였습니다. 예배당을 떠나면서 미국 목사님들은 이구동성으로 "조셉 파커 목사님은 정말 위대한 설교가야!"--What a wonderful preacher is Joseph Parker!--하면서 칭찬했습니다. 그날밤 그들은 찰스 스펄젼이 Metropolitan Tabernacle 교회에서 설교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물론 이 교회의 건물은 City Temple 교회보다 훨씬 더 컸으며 교인수도 두 배정도 많았습니다. 또한 소문에 듣던 대로 스펄젼의 목소리와 웅변술은 그들이 일찍 들었던 것 중에는 단연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인 목사님들은 곧 교회 건물이나 교인숫자, 목사님의 목소리, 제스추어, 웅변술 같은 것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펄젼 목사님을 파커 목사님과 비교하려는 생각조차도 다 잊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예배가 끝났을 때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딱 한마디의 말은 이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위대한 구주이셔!"--What a wonderful Saviour is Jesus Christ!" 

2. 설교 제목을 창조적으로 정합니다. 
교인들이 주목할 수 있는 제목으로 만듭니다. 설교는 제목이 소개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3. 도입부분을 어떻게 할지 정합니다. 
설교 첫 5분이 설교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말합니다. 

4. 끝내기를 잘 준비합니다. 
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이미 했던 얘기를 반복하면서 설교를 끝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함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지 않아도, 교인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서론뿐 아니라 결론도 중요하기에 잘 준비하고 자신있는 태도와 힘있는 목소리로 청중과 눈을 마주치며 말해야 합니다. 말하는 속도를 약간 줄이고 마지막 말은 힘있게 전하되, 때로는 잠시 동안 움직임 없이 선 채로 있으면서, 설교가 청중의 가슴속에 계속 파고들게 합니다. 

5. 설교시간이 길어지지는 않겠는지 점검합니다. 
준비한 설교 중 일부를 잘라내는 것은 제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들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작 하나님이 주신 영감에 유익하지 못한다면, 과감히 잘라냅니다. 

조지 버나드 쇼가 친구에게 했던 사과를 기억하라. "너무나 긴 편지를 써서 미안합니다. 편지를 짧게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6. 성령께서 친히 교인들에게 역사하실 시간을 준비합니다. 
설교 후에 교인들이 각각 성령님의 역사로 결단할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 후에 부를 결단의 찬송을 택합니다. 그리고 통성기도를 합니다. 마무리 기도 때 결단을 표하게 합니다. 

9.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설교를 준비하자!” 기도 
설교를 하면서 괴로운 것은 나의 설교가 자꾸 교훈과 설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친구 목사, 부흥회 후, "유목사, 유 목사 설교 중에는 종이에 불이라고 써서 보여 주는 것 같은 설교도 있고 실제로 불을 붙여서 보여 주는 것 같은 설교도 있었어" 

설교자로서 소원은 듣고 “참 좋다” 하는 그런 설교가 아니라 설교를 하고 나면 회개하고, 가치관이 바뀌고, 삶이 변화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하려면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여야 하는데, 반드시 기도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오몽근목사 “캐나다에 계신 베리 무어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셨을 때 잊을 수가 없습니다. 광주에 오셨을 때 그분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울고 가슴을 쳤습니다. 그분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냥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주 단순한 복음을 전하는데 이상하게 그분의 말을 들으면 가슴이 꽉꽉 메워옵니다. 그 후 6년 후에 서울에 또다시 오시게 되어서 제가 그때 총회신학교에서 신문을 만드는 편집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님들에게 부탁해서 그분을 우리 총신에 한번 모셔서 좌담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분에게 갈망해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6, 7년 전에 광주에서 목사님 오셨을 때에 설교를 듣고 아주 감동하고 이렇게 놀라왔는데, 그렇게 설교를 잘하시는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분이 웃으시면서 그러십니다. 자기는 하루에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주일에 책을 3, 4권씩 읽는다. 그리고 설교를 준비하는데, 다 준비하고 앉아서 쓰는 시간만 20시간을 쓴다. 그리고 그것을 쓰고 나서는, 설교를 가지고 밤새도록 설교하기 전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자기 기도하는 자기 교회 성도들에게 기도할 때 부탁하고, 자기 아버지가 다리가 불구자여서 걸어다니지 못하는데, 침상에서 기도를 많이 하시는 아버지 목사님이 계시는데, 자기가 아버지 목사님께 꼭 자기가 설교할 때마다 전화해서 “아버지 저 지금 설교하니까 기도해주세요.” 그렇게 하면 아버지께서 자기가 설교할 때 몇 분간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설교 내내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말을 듣고 그분이 정말 그렇게 능력 있게 설교하는 것은 준비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혼이, 성령의 역사가 그 가슴속에 철철 넘쳐흐르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영이 레이저빔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혼으로 파고드는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혼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혼을 그 설교에다 담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설교에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가슴을 치게 됩니다“ 

10. 설교 크리틱 
나의 설교테이프를 들으며, 표현의 미숙함이나, 습관적인 어투를 다듬습니다. 
설교 클리틱을 합니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는 전 교역자들이 설교자가 준비한 설교문을 읽으면서 설교를 듣고 회중의 입장에서 느낀대로 피드백을 하고 설교문을 분석하고 교정해 줍니다. 

점검해 주는 사항들: 
성경을 무미건조하게 인용하여 나열한 경우, 
교리적인 딱딱한 설명이 되었을 경우, 
잘 아는 것을 반복하는 느낌을 주는 경우, 
논리적이지 못하거나 너무 복잡한 논리적인 구성을 보일 경우,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를 하는 경우, 
구태의연한 얘기를 하는 경우, 
일상의 생각으로부터 구출해 주지 못하는 경우 

이 과정을 거치면서 증거해야 하는 복음의 핵심을 더욱 분명히 하고 메시지를 올바로 선포하기 위한 최선의 준비를 하게 됩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의 자기 스스로의 설교 크리틱입니다. 
나는 내 설교의 무미건조 “얼마 전에, 나는 거부 당하신 그리스도에 관해 설교하고 있었다. 그렇게 친숙한 주제는 설교를 듣는 사람을 졸게 만들기 쉬운 주제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흥미를 추가할 수 있었을까? 감정이다. 나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전후(戰後)에 겪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나는 처칠의 팬이다. 그래서 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그의 엄청난 영향력을 회상 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딱딱 소리를 내는 라디오에서 그의 유명한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고 말했다. "우리는 해변에서 그들과 싸울 것입니다...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폭탄이 떨어지고, 대공화포 소리가 들리고, 밤하늘을 가로 질러 비취는 서취라이트의 섬광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불독 같은 결단은 우리가 그 끔찍스러운 시기를 통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처칠은 전쟁 중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선거가 실시되었을 때, 놀랍게도 처칠은 낙선했다. 처칠이 행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영국 사람들은 그를 수상으로 선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려 주었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그는 거부당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동안, 그들은 거부가 의미하는 바를 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감정을 끌었다. 처칠이 거부된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언짢게 만들었던 것이다. 거기서부터 그들의 감정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부당하신 사실로 옮기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때때로 이렇게 생각한다. '가만 있어봐. 이건 정말 무미 건조하군. 여기서 빨리 벗어나서 피해를 최소로 줄이자!' 

[마무리] 설교자의 사명과 축복 
나는 설교자로 사역하면서 설교자가 된 것에 대하여 너무나 큰 부담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부담감과 동시에 설교자가 된 것이 엄청난 축복이라는 것도 느낍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마다 능력주시기를 구하면서 동시에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함을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