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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May 30, 2013

한 날 묵상 - 막 3:1-6 <마음이 완악함하여 봐야 할 것은 주시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한 날 묵상 - 막 3:1-6 <마음이 완악함하여 봐야 할 것은 주시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1. 외쳐도 반응도 없고 듣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 않는 세대를 가리켜, 아님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들으려 하는 세대를 가리켜, 무슨 세대라 말하는 것이 좋을까?

2. 음 성경적 표현을 빌리면, 완악한 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완악"하는다는 말은 '성질이 억세게 고집스럽다'는 의미가 있네요.

3. 그래서, 신구약 성경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완악함의 전형적인 모습들을 찾아 보았다.

4. 구약에서는 출 4-14장의 애굽의 바로왕의 완악함을 예를 살필 수 있다. 바로는 도무지 모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5.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11장 15-17절 "장터에서 피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6.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완악함은 바로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7. 이런 의미로 볼 때,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완악한 백성이었다. 사 6:9-10.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데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8. 이렇듯 "완악함"을 이기는 출발은 들음이다. 그래서 난 '들음은 섬김이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들음에서 출발하는 믿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들음은 이웃을 품는 출발이다.

9. 요즘 시대는 참으로 귀가 닫혀 있는 시대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불신의 시대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친밀한 교제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할 수 있다.

10. 완악함의 시대를 살아가는 복음의 빚진 자들의 삶을 어떤 삶이 되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님의 모습속에서 발견해 보도록 하자.

11. 복음에, 예수님께 마음이 완악함을 가진 자들을 향햐여 예수님의 반응은 이러하셨다.

12. 1) 탄식하셨다. 그리고 2)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셨다.

13. WHY? 탄식과 노하심을 예수님은 가지셨을까?

14. 예수님을 고발하려 예수님을 주시하는 완악한 마음을 가진 그들에게는 모든 사람에게 복된 소식인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삶 속에 누리지도 못하였다.

15.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그들을 향해 탄식하셨고,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세력에 대하여 노하셨다.
 탄식함과 노하심은 구별을 잘해야 한다. 절대로 반대로 해서는 안된다.

16. 그들이 복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누리지도 못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4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17. 세번째로 완악함 세대를 향한 예수님의 반응은 3) 복음의 길을 가라. 사랑의 길을 가라. 섬김의 길을 가라(5절)였다.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완악한 반응을 보이는 그들을 향해 복음을 가진 자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은 복음을 살아내는 인생이다.

18. 복음에 완악한 자들과 논쟁하지 않았으며,  긍휼과 사랑으로 복음의 삶을 살아가며, 복음이 말씀하신 사랑의 완성의 삶을 살아야 한다.

19. 당신은 지금 무엇을 주시하고 있는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런데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내 마음에 무엇을 담아 주시하며 바라보고 있는가? 이다.

20. 완악함인가? 열린 마음인가? 무엇보다 복음에 열린 마음인가?

21. 또한 완악함으로 당신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향한 당신의 반응은 또한 어떠한가?

22. 똑같은 완악함인가? 아니면 예수님 완약한 그들을 향해 보여주신 모습인가?

23. 완악한 세대, 백성을 향한 탄식함을 가지라. 그들을 행해 또한 분노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한 복음의 삶을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 완악한 세대와 백성들을 향한 복음의 삶임을 기억하자.

24. 오늘도 완악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남아있다. 비록 그 수가 적을지라도 말이다.

25.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는 나는 오늘도 예수님의 본받아 복음의 삶을 통해 완악한 세대와 백성들과는 대조적 삶을 살아가는 인생의 오늘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6. 그들의 완악함이 조금이라도 무너질수만 있다면....

27. 할렐루야! 아멘!

===
‘완악하다’ (hardening)는 것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과 사역에 대해 냉담하다는 뜻이다. 
 영적 완악함은 구약에서 30회, 신약에서 20회 언급된다. 대하 36:13절은 남 유다의 패망의 원인을 시드기야의 완악함-강퍅함이라고 본다: 
 “느부갓네살 왕이 저 (시드기야왕)로 그(의)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게 하였으나, 저 (시드기야)가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stiff-necked) 마음을 강퍅케 하여 (hardened his heart)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먼저 출 4-14장의 애굽의 바로왕의 완악함을 예로 들 수 있다. 사 6:9-10절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 완악함은 마음의 둔함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시 95:7-11절은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반역 사건에 대한 회고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의 완악함을 경고하기 위해서 시 95편을 인용한다 (히 3:7-4:11). 

 예수님께서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사 6:9-10절을 인용하신다 (마 13:13-15; 막 4:11-12; 눅 8:10).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이적을 유대인들이 보고도 돌아오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요 12:40). 그런데 예를 들어, 바로의 경우 그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분은 여호와라고 10번이나 말씀하신다 (출 4:21; 7:3; 9:12 등). 
 그렇다면 신적 목적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 졌다라고 수동형으로 말하는 구절도 있고 (출 7:14, 22; 8:19; 9:7, 35), 바로 스스로 완악한 마음을 먹었다고 능동형으로 말하는 구절도 있다 (출 8:32; 9:34). 

 롬 9:6-13절에서 바울은 혈통적인 이스라엘 가운데서 일부의 남은 자가 있는 반면에 다수는 남은 자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한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롬 9:18).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와 저주 받을 자를 예정하실 수 있다고 믿는 전통적인 ‘이중예정설’의 근거 구절이 바로 롬 9:18절이다. 주목해 볼 것은 완악하게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비롯되지만, 한편으로는 완악함이 영구불변의 상태는 아니라는 점이다 (롬 11:11-24). 완악해진 상태는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될 수 있다. 복음을 믿음으로 완악함은 변화 가능하다. 혈통적 유대인들 전부가 완악해진 (우둔해진) 사람들이 되어 넘어지기까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to fall beyond recovery) 실족하지는 않았다 (롬 11:7, 11). 그들은 믿음을 통해서 다시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다 (롬 11:23). 적용해 보면 마음의 완악함은 우리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실천이 중요하다. 우리의 사명은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가지고 100배의 결실을 하는 것이다. 

참고 

Moo, D.J. 2004. 완악. IVP 성경신학사전. IVP. p. 951-954. 

참고
“완전한 미움(perfecto odio)으로 악인들을 미워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악인들 안에 있는 죄악을 미워하되, 악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미움으로 미워하는 것이니, 곧 악 때문에 악인을 미워하게 되지도 않고, 악인 때문에 악을 사랑하게 되지도 않는 것이다.”
— 아우구스티누스, 『시편주석』 시편 139편 22절 주석 중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마가복음 <톰 라이트>
p55. " 왜 예수님은 그날(안식일)을 무시하는 듯이 행동하시는가? 안식일이 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배타적 민족주의의 표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Tuesday, May 7, 2013

한 날 묵상 - 막 2:18-22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그리고 금식 문제로 생각하는 율법에 관한 새로운 이해>

한 날 묵상 - 막 2:18-22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그리고 금식 문제로 생각하는 율법에 관한 새로운 이해>


1. 금식에 대한 성도들의 반응은 여러가지이다.

2. 금식 기도를 꼭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절대로 금식을 자기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3. 당신이 지금 금식 기도를 가끔하는 사람이든지, 절대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든지 금식에 관한 주제는 성경에 이슈중에 하나이다.

4. 구약시대에도 금식에 관한 여러 말씀이 있으며, 신약 성경에도 그 말씀 자주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5.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 신 후 광야에서 사십 동안 성령에 이끌어 계셨다.

6. 그리고 신약 성경에 곳곳에 금식에 관한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7. 오늘 본문은 예수님은 금식에 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답을 주시는 장면이다.

8. 그렇다면, 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었는가?

9. 율법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율법에 순종하기 위해 그들은 금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때 예수님께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0. 결국 오늘 본문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율법에 기록한 금식에 관해서 오해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을 주시는 장면이다.

11. 예수님은 금식에 관한 질문에 답을 주시면서 옛 율법과 새 율법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원하셨다.

12. 앞서 율법에 관해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은 옛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13. 예수님의 율법은 사랑이며, 정죄가 아니다. 이는 무조건적 사랑이면서, 사랑으로 죄인들을 품기 위해 오신 것이다.

14. 구약의 금식에 관한 율법을 신약의 금식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계신다.

15. 예수님의 새 율법을 삶의 전 영역에 폭넓게 적용해야 한다. 구약의 율법으로 머물러 있으면 우리 또한 질문하는 이들과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게 된다.

16. 요즘 무엇보다 이슈가 되었던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본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이슈는 동성애문제이다. 양쪽의 주장이 모두 전부 다 틀린 것도 아니고, 전부 다 옳는 것도 아니다.

17.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율법에 관한 분명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사랑이다.

18. 율법으로 우리는 사람들을 정죄할 수 없다. 왜 율법에 따라 금식하는 자들이 있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고? 물을 수 없는 것이다.

19. 우리가 왜 그들을 율법의 기준으로 정죄할 수 없는가? 율법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다.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20.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1-11절에서 음행중에 잡혀온 여자에 관한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이슈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7절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11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21. 예수님은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용서해주신다.

22. 우리도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예수님이 새 율법에 기록된 말씀으로 살아가야 한다.

23. 그렇기 때문에 옛 율법이 새율법과 함게 있을 수 없다. 금식에 관한 질문에 답하시는 예수님은 전혀 낯선 비유를 통해서 결론의 말씀을 주시는 것을 보게 된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은 자가 없나니"

24. 나는 여기서 낡은 가죽 부대와 낡은 옷을 옛 율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이 새롭게 주신 율법의 완성에 관한 것이라 생각한다.

25.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순종할 필요가 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26. 그리고 우리는 지금 진짜 금식을 해야 한다.우리는 해야 할 진짜 금식은 무엇인가?




27. 이사야 58장 3-9절 말씀이다.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28. 바로 공의와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사랑하는 것이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 결박을 풀어 주며 멩에의 줄을 그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 "

29. 지금 우리가 감당해야 할 진짜 금식이다.

30.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진짜 금식할 떄가 있다는 말씀을 하신다.

31. 막2장 19-20절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는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나라"

32. 예수님은 금식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율법의 외식함을 경계함으로 금식을 통해 경건한 척하지 말것을 경계하신다.

33. 그리고 신랑이 빼앗기는 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명 이유에 합당한 사명을 감당한 날, 그 후로부터 진정한 금식에 순종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다.

34. 우리애게 금식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에게는 그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진정한 금식을 행할 때이다.

35. 제자들에게 지금은 분주하게 보낼 때이지 금식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분명히 울며 씨를 뿌를 때가 있다.


36. 제자들에게 지금이 금식할 때가 아니라면 무엇을 해야 할 때였는가? 열심히 씨를 뿌려야 할 때이다. 율법을 지켰느냐? 그렇지 못했느냐? 따지는 시간이 아니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긴급하고도 중요한 때이다.  지금은 그 일을 해야 할 때이다.

37.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금식 논쟁이 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38. 보이려는 금식이 아니라, 진정한 금식- 서로 사랑하며 섬기며 나누는- 금식을 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다.

39. 율법을 보이려는 외식함을 조심하며 진정한 금식을 할 때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이다.

40. 우리 모두가 이러한 진정한 금식을 오늘 하루도 행하며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41.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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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절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절 "그러나 신랑을 빼았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내에 넣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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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및 서평
http://www.blogger.com/blogger.g?blogID=3681000074470592328#overviewstats/src=dashboard

<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

Thursday, March 14, 2013

한 날 묵상 - 막 1:14-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한 날 묵상 - 막 1:14-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1. 예수님의 가르침? 선포? 이는 상당히 단순합니다. 특별히 어려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2.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 선포를 받아들이고 따라가는 삶은 단순하지 않다는 걸을 삶에서 알아가게 됩니다.

3.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4.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선포,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였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5.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 신 후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6.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 메시지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7. 14절에서 세례 요한이 잡힌 후 갈릴리에 오셔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가 15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8.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때가 찼다"고 말씀하십니다. 

9. 시간적으로 다 되었는데, 무엇을 위한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일까요? 

10. 이는 이사야 61장 1-2절 말씀의 성취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11.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는 앞서 살핀 막 1장 9-11절 말씀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 예수님의 감당하셔야 할 사역은 이제 분명해 졌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13. 하나님 나라은 바로 이런 나라입니다. 가난한 자가 아름다운 소식을 듣게 되며, 마음이 상한 자가 고침을 받게 되며 포로된 자가 자유를 얻게 됩니다. 갇힌 자들은 놓임을 받게 됩니다. 모든 슬픈자가 위로를 받게 됩니다. 

14. 하나님 나라는 이런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제 시작되었습니다.

15.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에 말씀을 듣는 자들은 반응을 해야 한다. 

16.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참 평안와 위로를 누리기 위해서 위해서 회개하며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17. 그렇다면, 회개하며 복음을 믿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8.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회개는 주님께 되돌아가는 인생(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처럼,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19. 되돌아가야 회개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회개는 여기까지 있지만, 예수님의 회개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20. 되돌아와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이를 잘 감당함으로서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진 것이 됩니다.

21. 예수님의 가르침에 우리의 이해가 이 부분까지 가지 못해서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에 믿음의 삶이 복잡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22. 결국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면서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온전히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몫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 일을 잘 순종하려고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단순한 삶을 이해하게 됩니다.

23.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을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24.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릴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꿈꾸는 나라를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내가 누리는 은혜를 모든 이들이 함께 누리는 일에 대한 부르심)이 있음을 기억하고 매일의 삶에서 잘 감당하는 것이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삶이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이 목표와 방향앞에 아주 단순한 삶이 되게 됩니다. 

25.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사람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을 통해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26. 오늘 한 날도 예수님이 선포하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이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가장 단순한 삶임을 기억하고 삶으로 순종해가는 한 날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7. 한 날의 삶이 올바른 회개의 삶이 되기를 소망하며....

===
14절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절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5절 "때까 찼고"
=> 이사야 61장 1-2절의 성취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
* 이방에 빛을 4장 예수님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종말론적 백성을 모으시다
p178-181.
 예수님은 그분의 청중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촉구한다. 이에 응답한 이들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백성이라는 신분에 들어간다. 현대 사회에서 믿음의 개념은 계몽주의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믿음을 단지 지적인 동의라고 생각하고, 회개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죄에 대한 유감을 뜻하는 것으로 개인화시켜 왔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본래 명령을 참으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분의 상황 속에서 그 명령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회개하라는 요청은 구약의 배경, 특히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라는 언어를 배경으로 삼는다. 신명기 저자는 마지막 날에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며"(신30:2) 이스라엘이 번영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심판 뒤에 오는 것이다(신29:29).
 회복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분의 선교를 위해 섬기고 그분을 온 마음으로 사랑할 때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우상숭배적인 길을 떠나서 
 온 마음을 다해 여호와께 돌아오고
 그분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헌신함으로써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해야 한다.

예수님의 회개하라는 요청에서 발견되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그분은 사람들에게 예수님 자신에게 완전한 충성을 바침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요구하신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예수님께 헌신하는 것은 회개와 함께 "이스라엘의 신이 예수님 자신의 사역에서 결정적으로 행동하고 계신다는 믿음을 요구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급진적이고 철저한 결심"을 요구한다. 회개하고 믿으라는 요청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 전체를 예수님께 드리고, 자신의 집과 가족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다른 모든 의무를 제쳐 놓을 것을 요구한다(눅 9:57-62).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심지어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마 10:34-39). 다른 모든 충성, 헌신, 관계, 의무는 매우 귀 중한 보화와 진주, 곧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포기해야만 한다(마13:44-46). 

 복음서와 1세기 유대교 안에 나타난 제자도 개념의 차이는 이러한 부르심이 얼마나 근원적으로 제자들을 예수님의 인격과 결함시키는지 보여준다.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는 제자도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을 잘 비교하여 보여준다.

 유대교에서 율법 혹은 토라는 랍비와 제자 관계의 중심에 서 있다. 랍비의 권위는 토라에 관한 그의 지식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 그는 율법의 자리를 차지하고 최고의 충성을 그의 인격과 사명에 바치도록 요구한다. 게다가 유대교에서 제자도는 단지 랍비와 같이 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랍비의 제자가 토라를 배우고 익힐 때, 그는 그 자신이 선생이 될 순간을 바라보며 노력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결코 랍비가 되는 일을 "마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예수님의 추정자이지 자제자로 남아 있다. 게다가 유대교에서 랍비의 제자들이 단지 학생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종으로서 그분의 위대한 가르침과 통찰로부터 지적인 혜택을 입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권위에 복종하고 그분을 그들의 여호와로 섬긴다. 

 주목할 점은 유대인을 위해 쓰여진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적들이 그분을 향해 "랍비"와 "선생"으로 불렀지만,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을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다만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 할 때 "랍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마 26:25, 28을 보라). 

 마지막으로 유대교의 가르침은 제자도의 목적이 예수님의 것과 다르다. 유대교에서 제자는 충실하게 랍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있어야 하고 그분의 하나님 나라 선교에 참여해야 하며, 그분을 증거해야 한다. -그분이 누구이고 그분이 성취하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막3:14-15)

 마가복음 3:14-15절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서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그들은 단순히 배우는 공동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마지막 때에 예수님의 회집하시는 선교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메시아적 백성의 선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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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February 21, 2013

한 날 묵상 - 막 1:2-3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한 날 묵상 - 막 1:2-3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1. 지난 주 누가복음 묵상중에, 이런 글을 페이스북에 적어 보았다. 

2. 눅 7장 24-29절을 보면서, 나의 위치를 다시 확인해본다(나의 정체성, 나의 삶의 이유와 목적).
 난 광야에 나간 사람인가? 그렇다.
 그럼 그곳에서 무엇을 걸치고 있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시는가? 부드럽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기 원한다면, 왕궁으로 가라.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제자됨은, 화려한이 아니라, 세련됨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길을 준비함에 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를 남겨두셨다. 화려한 왕궁에서의 삶으로가 아니라, 다시 오실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 두셨다. 그곳이 내가 오늘 서 있어야하는 나의 자리이다.


3. 이러한 묵상은 마가복음 1장 1절 묵상과도 연결되어 있다. 
  한 날 묵상 - 막 1:1 <복음의시작과 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의 시작과 끝 또한 복음이어야 합니다>
   http://saltandlight21.blogspot.ca/2013/02/11.html

4. 여기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세례요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를 생각해 볼 때 여러 공통점이 발견될 수 있지만, 이 땅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답을 찾으려 할 때, 분명 하나님은 이 땅에 각 사람을 보내면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5. 예수님은 이 땅에 복음을 위해 오셨다. 그리고 그 복음은 완벽히 완성하셨다. 

6. 세례 요한은 이 땅에 두 가지 사명을 위해 왔다. 3절 말씀이다. 첫 번째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둘째는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7. 마가복음 1장 1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시작이라"는 절대적 진리로 시작되면서, 바로 이어지는 2절에서는 그 귀한 사역을 위해 한 사람을 보냈으니, 바로 세례 요한이요, 세례 요한이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약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8. 복음와 인간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건데, 복음은 인간을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 주어졌을 뿐 아니라, 이 복음이 인간들에게 확장되는 일에 또한 부름을 받은 자들임을 마가복음 1장 1절과 2-3절은 분명히 하고 있다. 

9.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확장은 세례 요한을 통해서 사통팔달로 전파 되었다.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야 할 길을 철저히 준비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들에게 잘 스며들도록 인간들의 마음을 곧게 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며 사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갔다. 

10. 특별히 두 번째가 복음을 위해서 남겨진 우리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복음이 각 사람들에게 잘 스며들도록 우리는 삶으로 복음을 증명하는 부르심을 입은자들이기 때문이다. 

11. 나는 지금 어떠한 사명으로 부르심을 입었는가? 또한 나는 지금 그 사명의 길 위에 바로 서 있는가? 

12.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아멘.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13. 마가복음 16장 20절을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14. 복음을 위해 오신 예수님, 그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위해 남겨진 사람들. 이게 바로 마가복음의 핵심 메시지이다. 

15. 우리는 지금 이 시대 복음을 위해 남겨진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복음만이 우리 삶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전부여야 합니다. 

16. 다른 그 무엇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도 결코 안됩니다.

17. 오직 복음입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지금 우리는 이 땅에 가운데 존재하며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18.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19. 오늘도 주의 길을 예배하며 주의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일에 순종하는 한 날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 아멘.

Thursday, December 22, 2011

한 날 묵상 - 창 31:17-35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자. 라반의 가는 길은 우리의 길이 아니다>

한 날 묵상 - 창 31:17-35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자. 라반의 가는 길은 우리의 길이 아니다>

18절 "그 모은 바 모든... 모든 .. 모은.. "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갈려 할새"
19절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 아직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지 못하는 라헬. 신앙의 유산의 중요성.
       왜 라헬은 일찍 죽었는가?(창35:16-22절) 라헬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자신의 신앙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나님을 알되, 나의 하나님으로 알자. 하나님을 믿되, 나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자!

20절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21절 "그가 그의 모든 소유를"
    => 계속해서 "모든"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심히 많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야곱은 빈손으로 라반의 집에 왔다. 이제 귀향의 길에 하나님의 복을 주셔서, 물론 여기서 라반에게도 복을 주셨음을 기억하길 원한다, 심히 많은 풍요를 안고 고향으로 가고 있다.

22-35절 라반이 야곱을 뒤좇아 가고, 자기 드라빔을 야곱의 소유에서 찾게 됨.
  24절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귀향의 시간이다.
      또한 라반은 아람사람이다. 분명히 그는 야곱과 혈통적으로 다른다. "아람 사람"이라 분명히 말하는 의도를 기억하자.
      라반이 가는 길은 야곱이 가야 할 길과 다르다. 야곱의 길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길이다. 그렇기에 라반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 말씀하신다. 
      우리도 알기 원한다. 우리의 길과 세상의 길은 다르다. 우리의 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에 세상의 누구도 방해하며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이 나타나 상황을 이끄신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자. 세상은 세상의 길을 갈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자. 세상이 우리를 막아설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자. 하나님이 동행하는 길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인지를 살피자.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자.
     하나님이 우리의 울퉁불퉁한 길을 곧게 하시니,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자.

     이사야 40: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가진 것이 많다면, 많은 것을 가지고 가야할 우리의 길이 있다.
 가진 것이 없다면, 없는대로 가야 할 우리의 길이 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이 우리가 가야할 길은 방해가 아니다.
 야곱이 고향을 떠나 피해 올 때에 가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길을 갔다.
 야곱이 이제 라반을 떠나 고향을 돌아갈 때가 되어 소유가 아주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길을 간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자.

Wednesday, September 7, 2011

한 날 묵상 - 사 5:1-2 <극상품(極上品) 포도나무>


이사야 5장에 나오는 극상품 포도나무에 대해서 묵상을 했습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極上品)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나무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이사야 5장 1-2절

먼저는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하나님이 찾으신 산은 심히 기름진 산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고 심히 기뻐하는 택함 받은 백성입니다.
 곧 믿음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심히 좋은 땅에 심히 좋은 씨앗을 뿌리는 것은 이치에 당연한 것입니다.
어느 누가 기름지지 못한 땅에 좋은 씨앗을 뿌리고, 기름진 땅에 좋지 않는 씨앗을 뿌리겠습니까?
 항상 자신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으로 바라보기 원합니다.

두 번째는 기름진 산이지만, “땅을 파고 돌을 제하고”
 아무리 좋은 자동차도 정기적으로 잘 관리를 해주지 않으면 곧 쓸모없게 되겠지요.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잘 관리하지 않으면
역시나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겠지요.
 이런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은 참으로 멋지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온전한 열매를 맺도록 최대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죄악에 물든 사람들에게 독생자를 보내주셔서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아울러,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결코 자신의 자녀들을 홀로 두지
않으시는 정말 멋진 분이십니다.
 하나님도 좋은 땅, 좋은 열매를 뿌렸음에도 불구하고 또 관리를 하시는데. 우리는 얼마나 더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여정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삶을 허락해주셨고, 풍성함의 은혜가 보장된 삶이지만, 그래도 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더 예리한 칼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니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극상품 열매를 맺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다.

사과나무에서 사과열매가 맺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삶을 질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렇다면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방법은 무엇을 찾고 구하고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구하는 것이 아니라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채우니 너희는 버려라"

내가 채우려고 하는 것으로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의 상태가 교만하며, 무지하며, 게으르며, 나의 의가 완전히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기에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버리라고 그토록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이제는 버리십시오. 
 요한복음 15장에서 함께 나눈 포도나무의 가지치기처럼, 가지를 쳐야 할 부분을 찾아보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