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날 묵상 - 창 39:1-6 <이끌려 애굽으로 내려간 요셉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함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 좇음이 아니라 요셉도 하나님의 동반의 요청에 함께 순응한 모습입니다.>
요셉이 끌려 원치 않는 길로 갔지만 그가 누린 형통함의 비결이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좇아감"이 아니라 요셉과 "함께"하였습니다. 오늘 한 날도하나님과 함께 갑시다
요셉이 끌려 원치 않는 길로 갔지만, 그곳에서 그가 누린 형통함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좇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짝사랑에 반응하여 함께 하기를 선택함이 바로 형통한 자의 모습입니다.
1절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 자신의 꿈과는 반대의 길로 강제로 내려가는 요셉.
자신의 계획과 의지와는 반대로 이끌려 내려가는 요셉.
그러나, 계속되는 요셉의 이야기에서는 요셉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2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의 ... 집에 있으니"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의 의미는, 하나님의 요셉과 함께 한 의미이면서, 동시에 요셉도 여호와를 떠나지 아니하였다는 의미입니다.
"함께"라는 의미는 쌍방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결코 함께 하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방적인 것은 "좇아감"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요셉을 따라다녔다면,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의 가는 길을 좇아 다니시므로".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쌍방이 함께 걷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 형통함의 기준은? 하나님과 함께 함이다. 형통함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이 꾼 꿈에 따라 일일 척척 진행됨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함에 형통함의 비밀입니다.
오늘 다른 형통함을 좇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기준의 형통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함을 좇아 형통함을 누리는 한 날이 되기를 원합니다.
요셉의 형통함은 또 무엇인가? 꿈처럼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함께 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형통함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어디에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을 주셨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주 나타나실 때임에도 불구하고 애굽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의 형통함은 이러한 것과 전혀 다른 하나님과 함께 함의 모습입니다.
3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 형통함의 기준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잘못 생각하는 것중에 하나가 나만의 하나님입니다. 아닙니다. 내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믿음의 다른 사람뿐만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했는가? 바로 4-5절에서 이어집니다.
4절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5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 나는 얼마나 내가 섬기는 곳에 하나님의 복을 흘러 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는가? 혹 불평, 불만만 쏟아 내면서 동료, 상사, 후배들의 흉만 보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흘러 보내는 통로로 하나님은 요셉을 보디발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후에 계속 이어지는 간수장과의 만남(39:19-24절)에서도, 관원장(40:1-23절)과의 만남에도 동일합니다. 요셉이 가는 길에 하나님에 그에 주신 형통함은 만나는 사람마다 형통함의 복을 흘려 보냄으로써 그들이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형통함의 은혜를 누린 줄 알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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