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날 묵상 - 창39:19-23 <억울한 누명, 현명한 방법은?>
억울한 누명을 받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오직 양심으로만 답하십시요.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마십시오. 때가 되며, 무대가 될 때 말해도 늦지 않습니다. 먼저 양심을 하나님께 내어 보이는게 훨씬 중요합니다.
=> 억울한 누명을 받을 때 변명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19절 "그의 주인이 ... 심히 하지라"
=>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주님이 때가 되면 하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어느 것도 믿음을 이길 수 없다. 믿음이 있으니 무엇이든 승리한다.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한다는 의미는 매순간의 때에 늘 함께 해야 함이다.
20절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 흔히들 우리는 이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물론 힘의 논리로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지만, 힘의 논리로 나오는 사람에게 힘의 논리로 정면승부하는 것 또한 현명하지 못하다. 이 찰라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21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베푸시매"
23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 39장의 처음과 시작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이다. 그리고 그 사이의 내용이 요셉의 시험이다. 즉 억눌한 누명을 쓴 요셉이 어떻게 그 일을 처리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요셉은 하나님께 칭찬 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았다. 나아가 억울한 누명의 시험을 받더라도 자신의 힘이나 권력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함에 그에게 늘 형통함이 있었다는 말씀은 이처럼 요셉이 형통함을 누리는 삶을 누릴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음을 보게 된다.
*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
2장 세상과의 대화
언어는 그 사람을 말해주는 지표다.
말의 신중함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당나라 대 주요 관직에 있다가 당이 망한 후에도 진과 한 등에서 벼슬을 지낸 처세의 달인 풍도가 쓴 <설시>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입은 곧 화에 이르는 무이요
혀는 곧 몸을 베는 칼이니
입을 닫고 혀를 깊숙히 감추면
가는 곳마다 몸이 편할 것이라
말에서 충요한 첫번재 덕목은 호흡인데, 호흡을 고르기 위해서는 대화 도중 말을 하고 싶을 때 딱 2초만 쉬면 된다.
두번째는 설득력이다. 우리는 보통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때 신중해 보이는 사람의 의견에 더 귀를 기울인다.
세번째는 분노를 다루는 것이다.
네번째는 진실성인데, 말의 앞뒤가 일관하고 논지가 바로 서 있으며 실수는 바로 인정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평가를 자제하는 것인데, 그것이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특히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극히 주의해야 한다.
여섯번째는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말은 그 사람의 삶을 보여준다.
말은 한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기 때문에 거친 언행을 일삼아온 사람은 아무리 감추어도 그것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낭중지추라고, 송곳은 언제가 주머니를 뚫고 나오게 되어 있다. 또 말과 행동에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참고 http://www.hislove.or.kr/new/sub08/sub_01.htm?tname=sub04&mode=view&idx=35&page=1&key=&keystring=&flag=%C8%F7%BA%EA%B8%AE%BC%BC%B0%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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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anuary 27, 2012
Wednesday, January 25, 2012
한 날 묵상 - 창 39:7-18 <누구에게나, 어느 때에나 유혹은 있게 마련이다. 성[ 性 ], 게으름, 속임수, 거짓.. 수없이 나를 유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결국 유혹을 이기는 힘은 스스로를 이기는 힘에서 나온다. 결국, 마음의 문제다. 심령에 날마다 새롭게 함을 입힐 때 유혹의 욕심에서 벗어 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어느 때에나 유혹은 찾아온다. 성[ 性 ] 게으름 속임수 거짓 마약 중독. 유혹을 이기는 힘은 스스로를 이길 수 있는 힘이다 그 힘은 심령에 날마다 새롭게 함을 입힐 때 온다
유혹을 이기는 힘(엡4:13-24)
-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온전한 데까지 이르느 자람이 있어야 한다.
엡 4:13-14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엡 4:21-22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결국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라.
엡 4:23-24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결국, 마음의 문제다. 심령에 날마다 새롭게 함을 입힐 때 유혹의 욕심에서 벗어 날 수 있다.
유혹에 넘어지는 자는 말씀을 이루지 못함(마13:22)
요셉이 유혹에 넘어져버렸다면, 그의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주신 약속의 말씀(꿈, 비전)들이 온전히 이루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가시떨기 나무가 있는 곳은 좋은 땅(?)일 수 있다. 땅은 좋았지만, 가시떨기 나무가 있어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이다. 염려와 유혹이라는 것이 그렇다. 좋은 땅에 많은 열매를 기다려야 하지만, 마지막까지 인내하지 못해, 결국 염려와 유혹에 넘어져 다른 사람이 열매를 거두게 될 때가 있다.
마 13:22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
7절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절 "요셉이 거절하며"
=> 요셉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유혹이 다가왔다. 성적 유혹과 넓은 길 유혹이다. 요셉의 때에 가장 위험한 유혹이었다. 청년의 때이며, 주변에 아무 연고도 없이, 도움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찾아온 유혹이기에 더욱 달콤한 유혹이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길을 갔다. 믿음의 길을 갔으면, 믿음에서 벗어난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 선택이 바로 험난한 고난의 길일지라도 그렇다.
요셉은 또한 하나님의 훈련의 시간을 잘 통과하였다. 훈련을 통해 더욱 강한 믿음의 군사로 세워져 가는 사람들을 보라.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 신실한 일꾼을 세우신다.
참고 - http://saltandlight21.blogspot.com/2011/09/126-8.html (훈련받으실 준비 되셨나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가는 훈련은 무엇인가?
첫째 인간의 생각을 버리는 훈련이다. (창12:11-13절)
둘째,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훈련이다. (창12:17-20절)
점점 더 거룩해지는 훈련은 하나님의 이끌림에 민감하게 더욱 더 반응할 때 성공적이 된다.
이끌림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 나의 생각이 틀릴 때 인정하고 돌아오자.
나의 실패로 주어진 환경을 하나님께서 바르게 세우실 때 그 상황을 감사로 인정하자.
10절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11-18절 유혹의 자리을 벗어나려면,
- 그 자리를 빨리 떠나라(12절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 뒤돌아 보지말고, 다른 생각도 하지 말라(12절 "자기의 옷"이 생각나, 뒤를 돌아보거나, 다른 생각을 할 때, 또 다른 생각이 파고 들어 나의 결단을 흐리게 한다).
-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까 예측하지 말라(거룩을 위한 결단은 하나님의 기쁨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
유혹을 이기는 힘(엡4:13-24)
-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온전한 데까지 이르느 자람이 있어야 한다.
엡 4:13-14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엡 4:21-22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결국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라.
엡 4:23-24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결국, 마음의 문제다. 심령에 날마다 새롭게 함을 입힐 때 유혹의 욕심에서 벗어 날 수 있다.
유혹에 넘어지는 자는 말씀을 이루지 못함(마13:22)
요셉이 유혹에 넘어져버렸다면, 그의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주신 약속의 말씀(꿈, 비전)들이 온전히 이루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가시떨기 나무가 있는 곳은 좋은 땅(?)일 수 있다. 땅은 좋았지만, 가시떨기 나무가 있어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이다. 염려와 유혹이라는 것이 그렇다. 좋은 땅에 많은 열매를 기다려야 하지만, 마지막까지 인내하지 못해, 결국 염려와 유혹에 넘어져 다른 사람이 열매를 거두게 될 때가 있다.
마 13:22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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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절 "요셉이 거절하며"
=> 요셉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유혹이 다가왔다. 성적 유혹과 넓은 길 유혹이다. 요셉의 때에 가장 위험한 유혹이었다. 청년의 때이며, 주변에 아무 연고도 없이, 도움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찾아온 유혹이기에 더욱 달콤한 유혹이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길을 갔다. 믿음의 길을 갔으면, 믿음에서 벗어난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 선택이 바로 험난한 고난의 길일지라도 그렇다.
요셉은 또한 하나님의 훈련의 시간을 잘 통과하였다. 훈련을 통해 더욱 강한 믿음의 군사로 세워져 가는 사람들을 보라.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 신실한 일꾼을 세우신다.
참고 - http://saltandlight21.blogspot.com/2011/09/126-8.html (훈련받으실 준비 되셨나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가는 훈련은 무엇인가?
첫째 인간의 생각을 버리는 훈련이다. (창12:11-13절)
둘째,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훈련이다. (창12:17-20절)
점점 더 거룩해지는 훈련은 하나님의 이끌림에 민감하게 더욱 더 반응할 때 성공적이 된다.
이끌림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 나의 생각이 틀릴 때 인정하고 돌아오자.
나의 실패로 주어진 환경을 하나님께서 바르게 세우실 때 그 상황을 감사로 인정하자.
10절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11-18절 유혹의 자리을 벗어나려면,
- 그 자리를 빨리 떠나라(12절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 뒤돌아 보지말고, 다른 생각도 하지 말라(12절 "자기의 옷"이 생각나, 뒤를 돌아보거나, 다른 생각을 할 때, 또 다른 생각이 파고 들어 나의 결단을 흐리게 한다).
-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까 예측하지 말라(거룩을 위한 결단은 하나님의 기쁨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
Monday, January 23, 2012
한 날 묵상 - 창 39:1-6 <이끌려 애굽으로 내려간 요셉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함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 좇음이 아니라 요셉도 하나님의 동반의 요청에 함께 순응한 모습입니다.>
한 날 묵상 - 창 39:1-6 <이끌려 애굽으로 내려간 요셉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함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 좇음이 아니라 요셉도 하나님의 동반의 요청에 함께 순응한 모습입니다.>
요셉이 끌려 원치 않는 길로 갔지만 그가 누린 형통함의 비결이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좇아감"이 아니라 요셉과 "함께"하였습니다. 오늘 한 날도하나님과 함께 갑시다
요셉이 끌려 원치 않는 길로 갔지만, 그곳에서 그가 누린 형통함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좇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짝사랑에 반응하여 함께 하기를 선택함이 바로 형통한 자의 모습입니다.
1절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 자신의 꿈과는 반대의 길로 강제로 내려가는 요셉.
자신의 계획과 의지와는 반대로 이끌려 내려가는 요셉.
그러나, 계속되는 요셉의 이야기에서는 요셉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2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의 ... 집에 있으니"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의 의미는, 하나님의 요셉과 함께 한 의미이면서, 동시에 요셉도 여호와를 떠나지 아니하였다는 의미입니다.
"함께"라는 의미는 쌍방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결코 함께 하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방적인 것은 "좇아감"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요셉을 따라다녔다면,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의 가는 길을 좇아 다니시므로".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쌍방이 함께 걷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 형통함의 기준은? 하나님과 함께 함이다. 형통함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이 꾼 꿈에 따라 일일 척척 진행됨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함에 형통함의 비밀입니다.
오늘 다른 형통함을 좇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기준의 형통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함을 좇아 형통함을 누리는 한 날이 되기를 원합니다.
요셉의 형통함은 또 무엇인가? 꿈처럼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함께 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형통함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어디에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을 주셨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주 나타나실 때임에도 불구하고 애굽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의 형통함은 이러한 것과 전혀 다른 하나님과 함께 함의 모습입니다.
3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 형통함의 기준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잘못 생각하는 것중에 하나가 나만의 하나님입니다. 아닙니다. 내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믿음의 다른 사람뿐만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했는가? 바로 4-5절에서 이어집니다.
4절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5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 나는 얼마나 내가 섬기는 곳에 하나님의 복을 흘러 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는가? 혹 불평, 불만만 쏟아 내면서 동료, 상사, 후배들의 흉만 보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흘러 보내는 통로로 하나님은 요셉을 보디발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후에 계속 이어지는 간수장과의 만남(39:19-24절)에서도, 관원장(40:1-23절)과의 만남에도 동일합니다. 요셉이 가는 길에 하나님에 그에 주신 형통함은 만나는 사람마다 형통함의 복을 흘려 보냄으로써 그들이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형통함의 은혜를 누린 줄 알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끌려 원치 않는 길로 갔지만 그가 누린 형통함의 비결이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좇아감"이 아니라 요셉과 "함께"하였습니다. 오늘 한 날도하나님과 함께 갑시다
요셉이 끌려 원치 않는 길로 갔지만, 그곳에서 그가 누린 형통함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좇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짝사랑에 반응하여 함께 하기를 선택함이 바로 형통한 자의 모습입니다.
1절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 자신의 꿈과는 반대의 길로 강제로 내려가는 요셉.
자신의 계획과 의지와는 반대로 이끌려 내려가는 요셉.
그러나, 계속되는 요셉의 이야기에서는 요셉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2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의 ... 집에 있으니"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의 의미는, 하나님의 요셉과 함께 한 의미이면서, 동시에 요셉도 여호와를 떠나지 아니하였다는 의미입니다.
"함께"라는 의미는 쌍방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결코 함께 하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방적인 것은 "좇아감"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요셉을 따라다녔다면,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의 가는 길을 좇아 다니시므로".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쌍방이 함께 걷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 형통함의 기준은? 하나님과 함께 함이다. 형통함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이 꾼 꿈에 따라 일일 척척 진행됨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함에 형통함의 비밀입니다.
오늘 다른 형통함을 좇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기준의 형통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함을 좇아 형통함을 누리는 한 날이 되기를 원합니다.
요셉의 형통함은 또 무엇인가? 꿈처럼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함께 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형통함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어디에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을 주셨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주 나타나실 때임에도 불구하고 애굽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의 형통함은 이러한 것과 전혀 다른 하나님과 함께 함의 모습입니다.
3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 형통함의 기준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잘못 생각하는 것중에 하나가 나만의 하나님입니다. 아닙니다. 내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믿음의 다른 사람뿐만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했는가? 바로 4-5절에서 이어집니다.
4절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5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 나는 얼마나 내가 섬기는 곳에 하나님의 복을 흘러 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는가? 혹 불평, 불만만 쏟아 내면서 동료, 상사, 후배들의 흉만 보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흘러 보내는 통로로 하나님은 요셉을 보디발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후에 계속 이어지는 간수장과의 만남(39:19-24절)에서도, 관원장(40:1-23절)과의 만남에도 동일합니다. 요셉이 가는 길에 하나님에 그에 주신 형통함은 만나는 사람마다 형통함의 복을 흘려 보냄으로써 그들이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형통함의 은혜를 누린 줄 알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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