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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une 19, 2013

분노 - 국제제자훈련원 목적이 이끄는 매일의 묵상


분노를 다스리기로 결단하라

“[사랑은] … 성내지 아니하며” (고전 13:5)
성경은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는 “사랑은 결코 화를 내지 않는다.”라는 말이 아니다. 사실 때때로 사랑의 행위에는 화가 나는 것도 포함된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집인 성전이 시장처럼 된 것을 보시고 화를 내셨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 사람에게 화가 날 수 있다. 그 분노는 의롭게 보일 때도 있고 이기적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보통은 우리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가장 화 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물학적 구성에 화를 내는 능력을 넣으셨다. 화가 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것이 파괴적인 행위로 자신을 몰고 가도록 허락하는 것이 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도 분노하신다고 말한다.
화가 나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을 조절하는 법은 배울 수 있다. 분노를 다스리기로 결단하면 그것은 ‘의무’라기보다는 ‘자산’이 될 것이다. 즉 “그게 바로 나야. 화가 나는데 어떡해? 난 화를 참을 수 없어.”라고 하는 것처럼 분노에 대해 변명하고 정당화하는 것을 그치게 된다.
분노는 통제될 수 있다. 당신은 누군가와 말다툼이 시작되어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 바로 그 때 전화벨이 울렸던 경험이 있는가? 자신이 화를 얼마나 빨리 다스릴 수 있는지 보라! 당신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분노를 훨씬 잘 통제할 수 있다. 화를 다스리기로 결단하라.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라. “저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화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인 성전이 시장처럼 된 것을 보시고 화를 내셨지만, 예수님을 ‘화 내는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는 “그게 바로 나야. 화가 나는데 어떡해? 난 화를 참을 수 없어.”라는 주장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 당신이 마지막으로 버럭 화를 낸 때는 언제인가? 오늘의 교훈을 참고로 앞으로는 그 화를 다르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분노의 댓가를 기억하라

“어리석은 자는 성급하게 굴고 신중한 사람은 오래 참는다.” (잠 14:17, 공동번역)
성경은 통제되지 않은 분노에는 늘 가격표가 붙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다음 구절과 연관 지어 확인해보라.
  •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잠 15:18)
  •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잠 29:22)
  • “어리석은 자는 성급하게 굴고 신중한 사람은 오래 참는다.” (잠 14:17, 공동번역)
성경은 말한다. “자기 가족을 괴롭히는 사람은 얻는 것이 없으며 미련한 자는 지혜로운 사람의 종이 될 것이다.” (잠 11:29, 현대인의 성경)
화를 참지 못할 때마다 우리는 지는 것이다. 번번히 분통을 터뜨리면 될 일도 안 된다. 영어에서 위험(danger)은 분노(anger) 앞에 d만 더 붙인 것이다. 분노는 위험하다. 분노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명성, 배우자, 직장, 건강까지.
몇 년 전에 읽은 인간 심장에 대한 의학 연구에 따르면, 삶 속에서 적의나 반감을 줄이면 수명이 연장된다고 한다. 부모들이여, 기억하라. 우리는 분노를 통해 아이들에게 자극을 줌으로써 단기적인 이득(자녀가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지게 될 것이다. 분노는 늘 스스로 소외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분노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보다는 쫓아내기 마련이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대신, 분노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의 필요에 대해 냉담하고 당신에 대해 화가 나게 만든다.
분노를 다스리는 법 중 하나는 그것 때문에 당신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과거에 분노는 당신의 의사 결정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 과거에 당신은 분노 때문에 인간 관계에서 어떤 대가를 치렀는가? 현재의 인간 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잠 29:11)
화가 났을 때, 충동적으로 반응하지 마라. ‘참음’은 화를 통제하는 데 훌륭한 도구이다. 이는 무한정 참으라거나 심지어 하루를 넘기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도 화가 난 상태로 잠자리에 들지 말라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참음’은 5분이다.
화가 나기 시작하면, 몇 분 동안 ‘타임 아웃’ 시간을 가지라. 잠시 상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이다. 잠시 멈춰 생각하지 않으면 잘못된 행동을 하기 쉽다. 반응하기 전에 심사 숙고해야 한다.
화가 나면 뒤로 물러서서 잠시 시간을 가지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성경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분노를 억제한다고 한 말에 주목하라. (잠 29:11) 이것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지혜로운 사람은 잠시 멈춰서 열을 식힌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선언문을 쓴 토머스 제퍼슨은 이렇게 말했다. “화가 났다면, 입을 열기 전에 열을 세라. 화가 많이 났다면 일부터 백까지 세라.”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화가 나는 이유를 이해하면 더 잘 인내할 수 있고, 심지어는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게 된다. (잠 19:11) 다음과 같이 자신이 화가 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질문 세 가지를 던져보라.
  • 나는 왜 화가 나는가?
  •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 그것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엡 4:26a)
화를 푸는 데는 유익한 방법도 있고 해로운 방법도 있다. 예를 들어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분노를 인정하기보다 화가 난 상태에 머물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화가 났는데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죄이다.
분노가 꼭 잘못된 것은 아님을 명심하라. 분노는 그것을 부적절하거나 파괴적인 방식으로 표출했을 때만 잘못된 것이다. 목사로서 내 경험에 의하면, 우리 중 대부분은 두세 살 때 분노를 표현하는 법을 배웠으며,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분노를 표현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지금은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얻고자 했던 목표가 화를 내기 전보다 더 멀어지게 되는 방식으로 분노를 표현한다. 부적절하게 표현된 분노는 의도한 것과 정반대인 결과를 낳는다. 사람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면 변화를 지속시킬 수 없다. 더 많은 분노와 소외만 초래할 뿐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한다.
분노는 결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분노는 다음 세 가지 중 하나의 증상이다. 상처, 두려움, 또는 좌절. 이 세 가지 때문에 우리는 화가 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잠시 멈춰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분노의 근원을 이해하면 적절한 방식으로 반응하고, 결과적으로 분노로 인해 “죄를 짓지” 않게 된다. (엡 4:26) 잠시 멈춰 마음을 가라앉힐 때, 스스로에게 다음의 질문을 던져보라.
  • 내가 상처를 받았는가?
  •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가?
  • 내가 위협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뭔가 귀중한 것을 잃고 있는 것 같은가?
  • 내가 좌절했는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 (롬 12:2a)
행동하는 방식은 느끼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느끼는 방식은 생각하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행동 방식을 바꾸고 싶으면 사고 방식을 먼저 바꿔야 한다. 분노의 부적절한 관리가 습관화되어(툴툴대기, 울분 터뜨리기, 비난하기 등) 이를 바꾸고 싶다면, 먼저 정신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
가족상담가인 개리 스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라고 제안한다. “나는 화를 내는 것을 즐기는가?” “화를 내면 내가 의도했던 결과가 나타나는가?” “동일한 결과를 좀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얻을 순 없을까?” “나는 어떻게 달라질까?”
스몰리는 자신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 답을 적고 6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총 26번이 될 것이다) 큰 소리로 자신에게 읽어주라고 말한다. 또한 다른 사람 앞에서도 읽어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는 게 일이 많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이 습관을 바꾸는 것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분노를 통제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는가?
나는 자신에게 쓰는 편지에 성경 말씀을 인용하기를 제안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생각을 채우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게 될 것이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사실 분노하는 이들은 불안정한 사람들이다. 불안정할수록 더 많은 것들에 화가 나기 마련이다. 불안정할수록 더 예민해지고 더 짜증이 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얼마나 안전하고, 당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할 때, 당신은 화가 덜 나게 될 것이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에베소서 1장과 로마서 8장을 읽어보라.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분 안에서 얼마나 안전한지 가르쳐줌으로써 분노를 방지하는 성경 말씀들이다.

Saturday, June 1, 2013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 하지 마라 - 목적이 이끄는 삶을 위한 매일의 묵상 1180호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 하지 마라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잠 29:25)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염려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휘둘리는 셈이다. 우리는 남들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길 바라는지 알고자 하고 그와 같이 되려고 하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 염려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럴수록 비판에 더 굴복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늘 옳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님을 뜻한다. 오히려 다른 모든 이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을 하는 것이다.
또한 이 경우 하나님의 최선을 놓칠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것에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 진실 1 -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실 순 없다. 비가 오길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해가 나길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응답하시겠는가? 하나님도 모두를 만족시키실 순 없다. 오직 어리석은 자만이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것을 하려고 애쓴다.
  • 진실 2 - 반드시 모두를 만족시킬 필요는 없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사랑 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말은 신화이다. 이는 전혀 진실이 아니다. 인생에서 행복하기 위해 모두를 만족시킬 필요는 없다.
  • 진실 3 - 거절은 삶을 파괴하지 않는다. 물론 거절은 아프다. 즐거울 순 없다. 거절은 불편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삶을 파괴하지 않는다.

모두를 만족시키려고 애쓰길 그치라! 당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당신이 자신을 열등하게 느끼도록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사도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라고 말한다. 이는 다음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시고 나도 나를 좋아한다. 누군가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신다면, 내가 하는 것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기억하라. 당신이 하는 그 어떤 것도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줄어들게 할 수 없다. 당신이 무엇을 해도 그분의 사랑을 더 늘릴 순 없다. 하나님은 바로 지금 당신을 완전하게 사랑하신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당신은 누구에게 잘 보이거나, 인정을 받거나, 만족시키려고 가장 신경을 쓰는가?
  • “당신이 하는 그 어떤 것도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줄어들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당신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 당신의 삶은 그러한 평안을 어떻게 반영하는가?

Tuesday, January 1, 2013

한 날 묵상 - 갈 6: 6-10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아니라, 성령을위하여 심는 자가 되라, 이를 위해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포기 하지 말자 때가 이르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된다>

한 날 묵상 - 갈 6: 6-10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아니라,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되라, 이를 위해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자 때가 이르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된다>

1. 지금 힘들다. 금식 2일차. 유혹은 더 심해진다. 진짜로 초콜릿 하나 먹고 싶다. 바로 앞에 초콜릿이 산더미다. 그런데 어떠하리? 좀 더 참아보자.  힘들어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귀찮다. 뭐 금식 2일차 가지고 말할 수 있다. 그래도 난 처음이다. 첫경험이다. 그러니 힘든 것 이해해 주세요. 글이 이쯤해서 여긴 그냥 순서대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2. 6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표준새번역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같이 나우어야 합니다"

3.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의 좋은 것을 잘 받도록 하라. 엘리사와 엘리야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갑절의 은혜를 구하는 엘리사처럼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영적인 것 또한 훈련이 필요하다.

4. 7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정말 나에게 묻고 싶은 말이다. 목사로 진정 목사의 역할을 잘 하고 있는가?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속고 있지는 않는가? 열정과 열심으로 최선을 다한다고 스스로 속고 있는지 않는가? 할 말이 참으로 많다.

5.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에 관해서는 스스로 정직하게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속고 있는 그리스도인척하며 살아가고 있을 수 있다.

6. 스스로 속이는 것은 이어서 나오는 7절 "하나님은 업신 여김을 받지아니하시나니"과 관련이 있다.

7. 하나님은 이 둘을 철저히 구별하여 보고 계신다. 자기를 위하여 심으면서도 하나님을 위하여 심는다 말하는 자는 아닌가?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인가? 심령을 위하여 심는자인가?

8. 우리의 열매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7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란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이시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훈련을 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9. 결국 우리는 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10. 또한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는 말씀에 따라 열매를 맺고 있다.

11.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들은 열맬로 알리는 말씀을 주셨다. 마 7장 20절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12. 8절 말씀이 2012년을 보내고, 2013년을 시작하는 나에게 귀한 깨달음을 주었다.

13. 2012년 보내며, 2013년을 시작하면서 3일 금식기도를 하고 있다. 내 평생에 3일 금식은 처음이다. 하루 금식이나, 하루에 한끼, 두끼 금식은 해 보았어도, 3일 금식은 처음이다. 앞으로 7일 금식까지 하고 싶다. 아마 2011년 때의 생각이었다. 나도 하루를 넘어, 3일 금식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아가 일주일 금식을 할 수 있을까?

14. 그런데 오늘 2013년 1월 1일 오후 1시이다. 오늘 오전부터 지금까지 드는 생각은 점차 유혹이 온다는 것이다. 먹을 것이 천지다. 연말을 보내면서 맛있는 초콜릿부터 새해 첫날이니 떡국 먹는 아이들까지, 눈을 들어 주변을 보니 먹을 것이 널려 있다.

15. 지금 드는 생각은 이틀만 할까? 커피는 괜찮겠지? 하나 쯤은 괜찮지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드면서 찾아오는 생각은 "누구를 위한 금식인가?"하는 것이다.
 혹 금식을 한다 하면서 하나님을 업신 여기지 않는지 생각해 본다.

16. 이번 금식의 목적은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특별한 목적을 두고 하는 것도 아니다. 2013년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뜻을 잘 분별하여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 뿐이다. 

17. 하루 금식하며 드는 생각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자.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도움이시다.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생각들이 많다.

18. 물론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이런 저런 인간적인 일들을 하는 것도 있지만, 그 와중에 문득 찾아오는 주님을 향한 마음들이 참으로 고맙다. 참으로 감사하다.

19. 간절히 바라가니 나의 3일 금식, 그리고 앞으로 금식이 내 자신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금식이 훈장이 되지 않고, 금식이 철저히 하나님께 순복하는 순간이며 여정이며 과정이기를 갈급할 뿐이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되어 성령의 열매를 더욱 풍성히 맺고자 한다.

20. 금식의 기간동안 순간 순간 하나님을 만나는 그 때에 하나님이 주신 생각들로 나의 삶을 채우고 나의 비전을 세우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에 주신 고귀한 생각들을 꼭 행할 수 있기를 원한다.

21. 이게 바로 9절에서 이어지는 말씀이 아닐까 한다.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22. 자기 육신을 위하여 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들의 선한 행위는 반드시 때가 되면 거두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23.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때가 되면이다. 그래서 때가 찰 때까지 결코 그 일을 함에 있어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24. 하나님의 주시는 선한 마음이 우리 안에 차고 넘치게 되어 있다. 애써 들으려 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는다면, 내 영안이 깨어 있다면, 즉 믿음이 있고, 성령이 내 안에 있어서 매일의 삶이 성령충만의 삶이면, 내 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한 행동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를 행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25. 우리는 선한 행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나오는 말씀과 6장 초반부에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서로 짐을 나누어 질 수 있는 선한 행위"를 기억하고자 한다. 고아와 과부를 섬기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26. 2013년 새해맞이 예배를 드리고 오면서, 아내가 자신이 뽑은 올해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구제와 관련 말씀이었다.
 잠언 11장 25절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27. 그 말씀을 들으면서 갈라디아서 6장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 요즘 다시 한 번 이 일 위해 힘쓰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 선한 일임을 직감하게 되었다.

28. 이러한 선한 행위를 하기를 원한다. 앞으로 사역의 방향으로 잡고 나아가길 원한다.
 기독교세계관 공부를 하면서 쓰게 된 페이퍼에서 "교통"이라는 부분이 있었다. 그 때 진정한 교통이 서로 삶을 나누며 섬기는 삶임을 깨닫게 되었다. 구약에서 주시는 메시지, 신약의 초대교회, 그리고 바울의 서신서에서, 성경은 줄기차게 그들을 섬기며 사랑하라 말씀하고 있다.

29. 10절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30. 바울도 권면을 하고 있다. 이런 일을 함에 있어서 "기회 있는 대로"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할 수 있는대로 많이 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최선과 최대로 또한 해야 합니다. 늘 마음에 우리는 이러한 일을 향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거룩한 부담감이야말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들의 마음입니다.

31.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32.  모든 이에게 하라고 한다. 우리의 선한 행위의 손이 미치지 못할 곳이 없습니다. 우리의 손이 안갈 곳 또한 없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33. "더욱 믿음의 가정에게 할지니라" 표준새번역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34. 특별히 믿음의 가정을 먼저 살피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이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다. 지난 주간 한 밤중에 깨닫는 것이 있어서 글을 적어 본 것이 있다. 기회가 되면 전체적으로 글을 올릴 날이 있을 것이다.

35. 가제는 이렇다. "나는 지난 10여년 비정규직이었다"
 내가 지난 교회의 사역자로 10여년을 돌아보니 절처히 나는 약자였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그대로 지금까지 살아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철저히 교회와 성도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앞으로 그러한 생활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도적으로,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다. 앞서 갈 6장 2-5절에서 나눈 것처럼 구조적으로, 제도적으로 나와 같은 사람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36. 교회안에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37. 그들은 사회생활에서 철저히 비정규직이다. 파트파임이다. 언제 나락을로 떨어질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도우며 섬길 수 있는 곳이 교회이다. 특히 믿음의 가정에게 그렇게 하라는 말씀은 그들을 섬기며 도우는 선한 행위 뿐 아니라, 구조적으로, 제도적으로 그들이 일어설 수 있는 도움을 교회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38. 이러한 모습들은 여러 교회에서 실제적으로 하고 있다.

39. 말씀을 마치면서 새해를 시작하면서 이만열 교수님 쓰신 페이스북의 내용을 첨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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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에 문정식 목가님이 시무하시는 교회의 영신(迎新)예배에 참석, 사도행전 20장 35절의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에 의거하여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다. 다음은 그 나눈 말씀의 부분 부분이다.

세상 사람들은 의를 행하면 귀하게 되고 명예를 얻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실제로 의를 위해 고난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지상에서 그 보상을 받은 것을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의를 행하다가 핍박을 당하는 것, 바로 그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큰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복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 자체가 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늘나라의 상급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 남겨진 선한 역사와 전통은 보상받지 않고 죽어간 많은 의로운 자들의 희생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름없이 죽음을 당했습니까. 우리가 오늘날 이만큼 사는 것은 그들 이름없이 죽어간, 의를 위해 핍박을 당하며 사라진 거룩한 이들의 희생의 은덕 결과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보상없이,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 복되다고 언명합니다. 그렇게 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복을 언급하다보면 복음서에서 언급하지 않은 복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 20장 35절의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그 복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언급한 8복 외에 새로 추가된 복입니다. 이것은 나눔의 복이요, 주는 복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이 복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가장 먼저 제시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이 복을 실천하는 대안적 방법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유하고 더 얻는 것을 복되다고 합니다. 거기에 대해 이 말씀은 소유와 탐욕 중심의 복의 정의를 달리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받는 것과 주는 것, 그 사이에서 더 복된 것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얻는 것보다 주는 것, 베풂을 당하는 것보다 베푸는 것이 더 복되다고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께서 친히 하신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소유 중심의 일상적인 복 관념을 뒤집어(顚倒)버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에 대해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남에게 주고 가난을 실천하는 자가, 많이 가진 자보다 복되며, 많이 가지려고 탐욕을 부리는 자보다 훨씬 복된 삶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난한 자가 오히려 부자보다 더 부자가 될 수 있는 기막힌 반전(反轉)이 여기서 가능하게 됩니다. 우리의 소유는 내 맘대로 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소유란 땅 위에서 그것을 관리하도록 맡긴 위탁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위탁받은 사람입니다. 청지기가 가진 소유는 제 때에 나누고 관리하기 위해 주인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물건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움켜쥐고 자기 것인양 유세를 부리고 있는 것은 청지기의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세상은 많이 가진 자가 있음으로 풍요롭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베푸는 자가 있음으로 넉넉하게 됩니다. 경제성장을 약속하면서 출발한 이 정권이지만 삶은 더 팍팍해졌고, 새해는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들을 내 놓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멍들어가는 공동체를 생명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초대교회가 실천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은 나눔의 생활화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나누면 작아집니다. 특히 저급한 가치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고급가치는 나눌 수록 불어납니다. 예술과 문화와 학문과 사상은 나눌 수록 커져 가고 불어납니다. 사랑과 희망, 위로와 평화도 나누면 나눌수록 더 커지는 것입니다. 물적 가치도 사랑으로 나누면 5병2어의 기적을 불러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나눌수록, 줄수록 더 커지는 기적을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속성(屬性)은 사랑과 정의라고 합니다. 이것은 저울의 양 추와 같이 평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랑과 정의의 균형을 이루기가 힘듭니다. 인간에게서 거의 불가능한 이 두 개를 동시에 이루는 것이, 주는 것과 나누는 것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나누고 주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요, 정의가 요구하는 균형을 이루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정의는 균형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나누는 것, 주는 것은 사랑과 정의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주는 것, 나누는 것의 극치라고 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과 정의는 동시에 만족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자의 정의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이 가진 사람을 부자라 이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많이 베풀 수 있는 자, 많이 줄 수 있는 자가 부자입니다. 세상에는 많이 가졌지만 남에게 베풀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이 많습니다. 가진 것은 많을지 몰라도 나누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가난한 자입니다. 그와 반대로 많이 가지지는 못했지만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가난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부자입니다. 우리가 많이 갖지는 못했을지라도, 베풀 수 있는 신앙인이 될 때, 또 베풀려고 노력하는 신앙인이 될 때, 부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많이 베풀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공급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끊임없이 실천하려고 할 때, 온 우주를 소유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딸들이 더 잘 줄 수 있도록, 더 잘 베풀 수 있도록 늘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습니다. 이 약속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요, 그리스도인입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요”라고 할 때 정녕 받아야 할 복은 바로 이 복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이 복입니다. 많이 가지지는 못했을지라도 많이 베풀 수 있는 자가 되는 이 복입니다. 이 복을 실천할 때 그리스도인은 복을 공급하고 복을 나누는 복의 중보자가 될 수 있습니다.



40. 2013년 나의 표어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41. 아멘. 기쁨으로 참으로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42. 우리 모두 그러한 은혜가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43. 오늘은 한 날 묵상이 아니라 한 해 묵상이었습니다.

44. 날마다 매일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은혜를 묵상하기 원합니다.

45. 할렐루야. 아멘.
       
                                         2013. 1. 1. 오후 4시 10분 금식2일차


Monday, July 4, 2011

지혜서로 하나님 뜻 분별하기 - 잠언 16:3

하나님의 뜻우리가 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16:3).

이것은 가장 흔하게 오해하는 잠언의 일종이다잠언이 진리를 비유적으로엄밀하지 않게 진술한 책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잠언 16:3은 누구든지 자신의 계획(경영한 것)을 하나님께 철저히 맡기면 그 계획(경영한 것)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약속하는 구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실망할 때도 있을 것이다그들은 아주 이기적이거나 어리석은 계획 – 성급한 결혼조급한 사업 결정바른 사고에 기초하지 않은 소명 결정 등 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길 수 있다그리고는 만일 그것이 이루어지면 – 심지어 약간만이라도 – 하나님께서 복 주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맡길 수는 있겠지만 결국 비참하게 끝날 수도 있다혹은 어떤 계획을 하나님께 맡겼는데 결국은 실패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하여자신이 영감하신 말씀을 스스로 무효화시킨 것을 의아해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둘 중 어느 경우든그들은 이 말씀이 항상 적용 가능한 절대적이고 엄격한 약속이 아니라 좀더 일반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이 말씀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하나님께서 정의하신 성공을 따라 성공한다고 가르친다그러나 성공에 대한 세상적 정의 따르면 그 결과는 정반대일 수도 있다욥의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상기시켜준다.

잠언을 잠언의 방식대로 다루고그것이 진리를 암시적인 방법으로 제시하는 특별한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잠언은 삶의 중요하고 유익한 보조수단이 된다이제 잠언의 지혜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지침을 간략한 형태로 제시하겠다.


첫째잠언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적 보증서가 아니다

잠언은 어떤 선별된 실천적 목표에 접근하기 위한 지혜로운 방법을 서술한다하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성공 보장과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잠언에 언급된 특정한 복상급기회들은 사람이 잠언의 시적비유적인 언어로 약술된 지혜로운 행동 여정을 선택할 경우에 따로 올 수도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잠언 어느 곳에서도 자동적인 성공을 가르치지 않는다하나님은 우리 삶의 선한 일이나 악한 일들 가운데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전도서와 욥기를 성경에 포함시키신 것이다.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네게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22:26-27)

관원이 거짓말을 들으면
그의 하인들은 다 악하게 되느니라( 29:12)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15:25)

이 예들 가운데 첫 번째 것( 22:26-27)을 하나님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명령으로 간주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다면당신은 융자(일종의 빚임)를 얻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결코 집을 살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또는 이 구절을 이 신용카드 대금 갚는 것을 태만히 하다가는 결국 침대를 포함한 당신의 모든 소유를 잃고 말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으름장을 놓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처럼 문자적이고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잠언의 요지를 놓치고 만다이 말씀(22:26-27) (기한이 지나저당 잡힌 것을 되찾을 권한이 상실되면 대단히 고통스러울 것이기에빚을 얻어 쓸 때는 신중하라는 말을 시적으로비유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말씀은 이러한 진리를 특정한 그리고 협의의 용어(계약 체결의 의미로 ‘손을 잡다’, ‘침상도 빼앗긴다’ )로 표현함으로써어떤 것을 전문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광범위한 원리를 지적하려고 하고 있다잠언이 기록될 당시에 의로운 사람들은 이 말씀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하였기 때문에이 잠언에 저촉되지 않고도 빚을 지며 살았다.

위의 두 번째 예(29:12) 역시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말씀이다예컨대 본문은 관청의 직원일 경우상관(시장이든사장이든혹은 다른 누구든 간에)이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면여러분은 악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 아니다.

본문은 이와는 상이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즉 진리 대신에 거짓말 듣기를 좋아하는 관원의 주위에는 그 관원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 결과 그 관청은 부패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그러므로 설사 고통스럽더라도 진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상관은 관청을 정직하게 유지하도록 도움을 준다이 잠언 말씀은 문자적이고 전문적인 용어가 아닌 비유적인 방법으로 이 원리를 지적하고 있다.

세 번째 예(15:25)는 문자적인 의미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것의 가장 명백한 예일 것이다우리는 경험과 성경의 증거를 통해서참으로 교만한 사람의 집이라도 든든히 서 있고 과부들은 탐욕스러운 채권자들이나 사기꾼들에게 기만당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참조 12:40;  12:40:  24:2-3).

그러면 이제 이 잠언이 여호와께서 실제로 교만한 자의 집을 헐거나 과부의 지계를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면도대체 무슨 뜻인가이 말씀은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곤고한 자들- ‘과부’, ‘고아’, ‘나그네’ 등은 전반적으로 남의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지칭하는 용어들이다-의 편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참조 14:29; 16:11; 26:12, 13 ).

잠언 23:10-11과 누가복음 1:52-53과 비교해 보면이 말씀의 의미가 훨씬 더 분명해질 것이다이것은 ‘ ‘과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교만한 자들을 멸시하시고 의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보상하심으로써(참조5:3, 4), 이 세상의 악한 것들을 바로 잡으실 것이라는 일반적인 원리를 지적하려고 성령에 의하여 기획된 간략한 비유다.

  


둘째잠언은 모음집으로 읽어야 한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잠언 하나 하나는 다른 것들과 균형을 유지해야 하며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비교하며 이해해야 한다위의 세 번째 예(15:25)에서 예시된 바와 같이하나의 잠언을 다른 것과 떼어 읽으면 읽을수록 해석이 더욱 모호해진다개별 잠언을 오해할 경우 독자는 잠언을 전체로 읽을 때 오해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온당치 않은 태도와 행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더욱이 잠언의 물질적인 것들이나 이 세상에 너무 과도하게 실제적인 관심을 둠으로써 세속주의와 물질주의를 경고하는 성경에 있는 다른 균형 잡힌 가치들을 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욥의 친구들처럼 세상적 성공과 하나님께서 의라고 생각하시는 것을 동일시하는 지혜를 좇지 않도록 하라이것은 선별된 잠언들을 균형 있게 읽지 않는 태도다.

잠언에서이기적인 삶을 살거나 성경의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과 모순이 되는 생활을 정당화시키는 구실을 찾으려고 하지 마라그리고 잠언은 종종 다양한 방법으로 단락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우리는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건너 뛰면서 잠언을 읽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이 모든 숙고들은 우리가 잘못된 해석을 피하기 위해서는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다음의 두 잠언을 상고해 보자: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서
그 성이 의지하는 방벽을 허느니라( 21:22)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 22:14)

당신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면잘 방비된 성을 공격해서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일을 하겠는가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였다면 (대단히 큰음녀의 입 속에서 질식해서 죽을 위험이 있다는 말인가?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질문에 ‘아니’ (No)라고 대답을 할 것이고거기에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이든 이런 의미는 결코 아니다!”라고 덧붙일 것이다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잠언 22:26이 글자 그대로 그리스도인들끼리는 돈을 꾸거나 빌려 주는 일을 금지하는 말씀이며잠언 6:20은 자식이 부모가 아무리 연로하고 그분들의 충고가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항상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잠언들 상호 간에 또한 성경의 다른 부분들(우선 상식적으로만 보더라도)과 균형을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단히 공평치 못한 일을 행할 수도 있다.

앞의 첫 번째 잠언(21:22)의 요지는 지혜는 군사적인 힘보다도 강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과장법을 사용한 진술이다문체상 이 구절은 “문은 무보다 강하다는 현대의 격언과 다를 게 없다이것은 명령이 아니다지혜의 힘에 대한 상징적비유적인 묘사다.이 잠언의 말씀을 지혜의 유용성과 효과를 찬양하는 다른 많은 잠언들과 연관시킬 때에만(예컨대 1:1~6; 2-3; 8; 22:17-29 메시지의 본뜻을 파악할 수 있다해석에 있어서 전체 문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앞에 인용된 두 번째 잠언(22:14) 역시 전체 문맥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대단히 많은 잠언의 말씀이 사려 깊은 생각과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예컨대 15:1, 16:10, 21, 23-24, 27-28; 18:4 ). 다시 말해 대개 들을 때보다 말할 때 훨씬 더 많이 죄를 짓는다(참조 15:11, 15-20). 듣는 것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말하는 것은 거의 늘 통제할 수가 있다.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풀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음녀가 행하고 말하는 것들은 깊은 웅덩이에 빠진 것만큼이나 위험하다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싶거든 이 같은 일들을 피하라.” 개별 잠언들의 문맥을 충분히 파악한다면 그것들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잠언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말이 아니라 기억하기 쉬운 말이다

진리를 완벽하게 서술한 잠언은 없다또한 어느 시대 어떤 상화에서든지 적용해야 한다는 비합리적인 명령도 버텨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기술된 잠언도 없다어떤 원리를 간략하게 비유적으로 서술할수록그것을 해석하는 데는 상식과 바른 판단이 더욱 필요하다하지만 간략하고 비유적인 서술이 효과가 크고 기억하기도 쉽다(예컨대 앞에서 인용한 “Look before you leap").

잠언의 목적은 비평가를 감동시키는 철학이 아니라 우리가 간직할 만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다그러한 까닭에 잠언은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를 자극하는 말이나(마음은 추상적인 자료보다 이미지들을 더 잘 기억한다), 또는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들[예컨대 반복법,유운(唯韻), 이합체(離合體]을 담고 있다이미지를 사용한 예로 잠언 15;19을 살펴보자.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우리는 여기서 어떤 게으른 사람이 즐겨 다니는 길에서 발견되는 식물의 종류를 지적하는 글이 아니라부지런함이 게으름보다 더 낫다는 원리를 지적하고 있는 글을 읽고 있는 것이다.

잠언 31:10-31에 묘사된 현숙한 아내의 지극한 헌신에 대한 묘사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나열되고 있다매 구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시작하여 기억하기 쉽고 귀를 즐겁게 하고 있지만무감각한 비평가나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읽는 독자들에게는 이것이 지상의 어떤 여성도 본받을 수 없는 생활양식을 묘사한 것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가 만일 잠언 31:22와 같은 묘사는 현숙한 아내가 자기 가정에 가져다주는 기쁨을 과장법을 써서 강조하려는데 목적이 있다는 요지를 파악하게 된다면잠언의 지혜는 그 목적을 아주 잘 수행한 것이다본문의 단어들(그리고 여러 이미지들)은 독자들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아필요할 때마다 그들에게 유용한 지침들을 제공해 준다하나님께서 잠언을 통하여 하시려고 의도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넷째올바른 이해를 위해 ‘풀어 쓸’ 필요가 있는 잠언들이 있다

대단히 많은 잠언들이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것들이었으나지금은 더 이상 존속하지 않는 관습들과 제도들에 맞춰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그래서 만일 독자가 이 잠언들과 상응하는 현대적인 관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즉 이들은 오늘날 존재하는 관습과 제도들로 조심스럽게 ‘풀어 쓰기’ 하지 않는다면그 의미가 우리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거나 그 뜻을 놓칠 수 있을 것이다(참조4장을 참조하라). 다음의 두 잠언들을 살펴보자.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22:11)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25:24)

우리는 임금님이 다스리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다게다가 우리는 성경 시대처럼 지붕이 평평한 집에 살지도 않는다그 시대에는 지붕 위에서 잠자는 일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흔한 일이었다(참조 2:6). 그렇다면 이러한 잠언의 말씀들을 읽는 것이 시간 낭비인가만일 독자가 당대의 특수한 문화적 용어로 표현된 초문화적 문제들을 파악할 수 있다면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첫 번째 인용한 잠언의 본질적인 메시지는(22:11)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는 표현이 우리 시대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는 말과 상응한다는 것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어쨌든 이 잠언은 늘 그런 의미였다. ‘은 모든 지도자들을 지칭하는 제유(提諭)적 표현이다이 잠언이 사용한 특정한 비유적인 언어는 그 언어 자체의 의미 이상을 나타낸다즉 지도자들과 책임 맡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정직하고 사려 깊은 말에 감명을 받는다는 진리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앞에 언급한 두 번째 잠언의 의미 역시 우리가 그 당대의 문화를 오늘날의 것으로 적절히풀어 쓰기  한다면 파악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이것을 다음과 같이 풀어 쓸 수 있을 것이다. “결혼하지 않았어야 했던 여인과 넓은 집에서 사는 것보다는 차고에서 사는 것이 더 낫다.”

대개 잠언들의 충고는 인생을 막 시작하고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 주는 것임을 기억하라.이 잠언은남편이 그의 아내가 말다툼을 잘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문자적으로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이것은 사람들이 배우자를 선택할 때 신중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말이다.

배우자 선택은 초문화적 선택 사항이기 때문에 이 잠언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만 하면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건전하고 경건한 충고가 된다(참조 19:3-11; 고전 7:1-14, 25-40). 주로 육체적인 매력에 이끌려 성급히 결혼하면 불행한 결혼으로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아래에 독자들의 적절한 잠언 사용과 잠언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법칙들을 몇 가지 요약하여 열거하였다.

1. 잠언은 종종 비유적이다즉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용어의 본래 뜻을 넘어서는 어떤 진리를 가리킨다.

2. 잠언은 실천적이지논리적이거나 신학적이지 않다.

3. 잠언은 기억하기 쉬운 말로 되어 있으며기술적으로 정확성을 기한 말은 아니다.

4. 잠언은 이기적인 행동을 지지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오히려 정반대다.

5. 잠언은 고대 문화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쓰기를 할 필요가 있다.

6. 잠언은 하나님께서 주신 보장이 아니라 선한 행동에 대한 시적 지침들이다.

7. 잠언은 요지를 표현하기 위해 매우 특수한 언어과장법 또는 그 밖의 다양한 문화적 기교를 사용할 수도 있다.

8. 잠언은 생의 몇몇 측면들에 지혜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훌륭하게 충고해 주지만생의 전반에 걸친 몬든 사례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9. 잠언을 잘못 사용할 경우엔 미련하고 물질적인 삶의 양식을 정당화시킬 위험이 있다.그러나 올바르게 사용할 경우에는 매일의 생활에 대해 실천적으로 충고해 준다.

  



욥기의 지혜, “하나님의 뜻과 선택은 늘 우리의 뜻보다 뛰어나다
욥기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적 보화 가운데 하나다욥기는 욥과 그의 의도는 좋지만 전혀 도움이 안 된 “안위자들”-빌닷소말엘리바스엘리후-간의 잘 짜여진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다만약 누가 어떤 시점에서 발언하는지에 주의하지 않으면 독자는 온갖 그릇된 충고와 적절하지 못한 결론을 만날 것이다.

특별히 욥의 ‘안위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일 경우 더욱 그렇다이 담화에는 매우 중요한 목적이 있다그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항상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이나 그 일이 공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님을 독자들에게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욥기의 목적은 전도서와 거의 정반대다전도서의 교사는 일상사에 관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려고 하지만반대로 욥의 안위자들은하나님을 단순히 개입은 안 하시지만 금생의 사건들을 통하여 계속 심판을 하고 계신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전도서는결국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은 죽음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든지 문제되지 않는다고 제안한다욥의 친구들은 욥에게지금 욥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은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라고 말한다.

욥이 자기에게 닥친 여러 비참한 일들-질병자녀들의 죽음곤궁무기력-을 당할 정도로 악한 일들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항변하자그들은 욥에게 반감을 느낀다그들의 충고의 요지는어떤 사람의 삶이 형통한 것은 그가 선한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이고일이 잘못 되었다면 이것은 분명히 그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환난을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이러한 논리를 폈고( 9:1-3),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제하신다면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의 뜻과 역사를 따라서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오히려 성경은 세상은 타락했고 죄로 인해 더럽혀졌으며 사탄의 통치하에 있기 때문에( 12:31), 인생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바대로 일어나는 일들이 많다고 가르친다특별히 고난은 반드시 죄의 결과만은 아니다(참조 8:18-23).

경간한 사람 욥은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일을 전혀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자주 등장하는 담화에서(3, 6-7, 9-10, 12-14, 16-17; 19, 21, 23-24, 26-31욥은 자신의 결백을 웅변적으로 주장하고또한 자신이 겪어야 했던 두려움과 절망을 표현하였다욥은 이러한 일들이 어째서 자기에게 닥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이 말에 욥의 친구들은 치를 떨었다그들에게는 욥의 말이 신성모독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욥의 항변은 하나님께 대한 의심임을 욥에게 알리기 위해 애를 썼다친구들은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욥에게 그 죄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자백할 것과하나님께서는 공평하고 정의롭게 이 세상을 경영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합당한 결과를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거듭 강요하고 있다욥은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았으며심지어 더욱 웅변적으로 인생은 불공평하며 현 세상은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으로 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 ‘안위자인 엘리후가 등장하여 하나님의 탁월하신 지식과 하나님의 방법들을 변호한다이것이 욥에 대한 대답으로는 가장 근사한 것이다그 누구도 이 정도로 근사한 답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욥은반은 만족스럽고 반은 화가 나는 엘리후의 대답을 받아들여야 할 것처럼 보인다이때 갑자기 하나님께서 친히 욥과 그의 친구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38-41).

하나님께서는 욥의 생각을 수정하시고상황을 올바르게 보게 해주셨다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욥의 친구들의 ‘지혜를 반박하며 욥을 변호하셨다(42:7-9). 인생의 모든 일이 공명정대한 것인지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욥이 친구들을 이겼다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욥이 “왜 내가?”라고 의아해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이기셨다즉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들의 방법을 훨씬 초월해 있으며그가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시는지 알지 못하시는 것이라든지그가 그렇게 하실 권리가 있는지 의심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하나님의 선택은 늘 우리의 선택보다 뛰어나다.

이것이 지혜에 대해 가장 잘 다듬어진 묘사다욥기를 읽는 사람은 세상의 지혜-논리적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릇된-가 무엇이고하나님의 지혜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며,또한 하나님의 주권과 의를 확신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욥기는 대화와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져 구약 성경의 사변적인 지혜에 대한 탁월한 모본을 형성하고 있다.


전도서의 지혜, “삶이 허무할지라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

전도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때때로 당혹케 하는 지혜 독백이다특히 주의 깊게 읽을 때 그렇다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전도서는 전도서 안의 다른 구절들과 모순되는 구절들과 또 성경 전체의 계시와도 모순되는 구절들이 들어 있어서 이해하기 아주 어려운 책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혀 상반되는 두 극단적인 해석들이 나왔으며부록에 추천한 두 권의 전도서 주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우연찮게 두 주석의 저자들은 서로 아주 친한 친구 사이다). 롱맨(Longman) 교수는 전도서를 냉소적인 지혜의 표현으로 본다그에게 전도서는 피해야 할 삶의 전망을 역설적인 방법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책이다.

반면에 프로반(Provan)교수는 전도서를 좀 더 긍정적으로 해석하여이 전도서를 어차피 모두 죽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아래서 인생을 만끽할 수 있는지에 대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앞선 견해를 『책별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92-200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따라서 전도서를 해석할 때 전체적인 전략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그 전략이 무엇이든문맥과 상관없이 표현이나 구절들을 취하여 저자의 목적과 거리가 먼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이런 문제는 결국 전도서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또 가장 중요한 단어인 habel("vanity", NRSV; "meaningless", NIV; "futility", NJB)에서 드러난다이 단어는 전도서에서 37번이나 나온다(구약성경엔 모두 73번 나온다). 그 단어 자체의 뜻은 ‘수증기’ 혹은 ‘/약간의 공기’(참조 39:5;  31:30;  57:13).

하지만 ‘전도자’(히브리어 Qohelet='assembler')에게 그것은 무슨 뜻인가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덧없음/무상함을 보여 주려는 의도인가아니면 모든 것의 무의미/쓸모없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가아니면 둘 다인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는 저자가 산만한 문체로 말하고 있는 다른 것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네 가지 실제들이 그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유일하게 한 분논쟁할 수 없는 실제이시자 창조주이시며모든 생명은 그분에게서 선물로 주어졌다.

(2) 하나님의 길을 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 인간 편에서는마땅한 되어야 할 방식대로 실제로 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해 아래서 된 일은 전혀 이해되지(add up)않는다.

(4) 가장 위대한 평등주의자는 사망이다모든 사람이 똑같이 죽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전도서 기자의 희망 결여가 이 모든 생각들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한 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이것이 삶 그 자체를 habel(적어도 ‘무상환이란 뜻일 수 있으며, ‘헛된을 뜻할 수도 있다)로 만든다.

무덤의 확실성이 현재의 삶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라 하더라도우리는 삶이 비록 허무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전도서 기자의 관심이다(. 3:12-14).

인생을 만끽하는 기쁨은 궁극적으로 ‘얻는 것’(행한 일로 얻은 재화를 안전하게 간수하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으며삶은 그 여정 자체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그런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은 있다가 사라지는 것에 불과한 것을 ‘획득하려고’ 하거나 통제하려고 하지 않고생의 리듬을 따라 살 때 얻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전도서를 성경의 나머지 부분이 가르치는 것과 대조적인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본다면(foil 이론), 전도서 12:13-14은 이를 바로 잡는 정통적인 경고를 통해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foil’ 이론에 따르면이 책의 중심 부분-책 전체하지만 특별히 위의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삶에 직접 개입하시지 않는다면 그리고 죽음 후 삶이 없다면사람들이 삶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 탁월하게 그리고 솜씨 있게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죽음 후의 삶을 부정하는 이신론적 세상-하나님은 계시지만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며 자기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죽는 세상-이 제시하는 삶의 지침을 찾고 있다면전도서가 그 지침을 줄 것이다이렇게 이해할 때 전도서의 목적은 솔로몬이 정통에서 벗어나 타락을 경험한 후에야 내놓을 수 있는 ‘지혜’(왕상 11:1-13)를 보여 주는 데 있다.

여기서 보여 주는 인생관은 운명론적이고 비관적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다따라서 도리어 이 지혜로 인해 독자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참다운 언약 관계를 그 대안으로 갈망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물론 두 해석에 비추어 볼 때이 책에는 자신을 신뢰하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신실함에 대한 확신이라는 내용을 담은 성경의 위대한 주제들이 빠져 있다하지만 이것은 이론적인(speculative) 지혜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태도다지혜는 독자들에게 힘겨운 질문을 상기시킬 뿐 많은 대답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그 힘겨운 질문들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향하게 한다.

고든 D. 피, 더글라스 스튜어트,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성서유니온선교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