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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y 14, 2013
죄의 고백은 ...
목적을 이끄는 삶을 위한 매일의 묵상
Wednesday, May 1, 2013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창세기에서 배웠다
http://www.youtube.com/watch?v=5wVHwxGJzYc
책소개
창세기, 예배로 영혼을 어루만지다
『창세기에서 배웠다』는 창세기를 통해 인간의 실존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제공한 책이다. 창세기 1장부터 3장은 하나님께 집중시키고 예배와 찬미를 보여준다. 저자 자신의 관점으로 풀어낸 글들은 특히 ‘예배’를 쟁점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만든 형성대로의 모습과 영혼을 회복할 수 있다고 안내한다. 하나님의 성품을 충분히 이해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인간의 예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이다’, ‘더없이 좋은 창조’, ‘관계를 위한 창조’, ‘진정한 예배, 신실한 삶’으로 나눠 구성했다. 창세기를 개개인의 입장이 아닌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설명하고, 중대한 물음들을 답할 수 있는 단서를 보여준다. 인간의 정체성, 인간의 목적, 혼란의 이유, 악의 제거,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 등을 주목하며 실제적인 신앙 훈련을 위한 소재들을 제공한다.
[네이버 제공]
저자소개
마르바 던
|||탁월한 영성 신학자이자 저술가 및 교회음악가로 국내에 널리 알려져 있는 마르바 던은 캐나다 리젠트 대학과 Chrstian Equipped for Ministry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1948년 미국 오하이오 주 나폴레온에서 태어났다. 십대 시절, 홍역 바이러스로 췌장이 망가진 이후 그녀는 늘 '건강'과 싸워야 했으며, 지금도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여러 질병과 장애를 가지고 있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왕성하게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하고 있지만, 한쪽 눈은 보이지 않으며(한때 다른 한쪽 눈마저 실명 위기를 겪었으나 간신히 회복되었다), 두 다리는 각기 다른 이유로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하다. 45년 동안 당뇨를 앓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저혈압에 시달리고 있으며, 신장을 이식받은 후로는 정해진 시간에 하루 11번 약을 먹어야 한다. 평생 이렇게 심각한 병고를 지고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바 던은 '병중에도 건강하게' 살아야 할 이유와 방법을 성경에서 찾고, 거기서 찾은 온전함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 독실한 루터교 가정에서 자라며 성경 연구 훈련을 받았던 그녀는, 영문학으로 석사 학위까지 받은 후 진로를 바꿔 노트르담 대학에서 기독교 윤리와 성서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이다호 대학교 영문학과에서 성경 문학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성가대 지휘와 중창단 지도, 캠퍼스 사역을 전개해 왔다. 또한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홍콩, 일본, 한국, 싱가포르 등 전 세계의 신학교와 수련회에서 젊은 세대들을 가르치고 지도해왔다. 현재 그녀는 캐나다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Regent College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음악에 특별히 조예가 깊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삶,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 공동체, 제3세계의 가난, 복음주의 예배와 영성 같은 주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녀에게는 학문의 상아탑에 갇혀 있는 신학자가 아니라 "참호에서 30년 이상 성도들/불신자들과 함께 몸을 굴린 교사와 음악가"라는 칭호가 제격이다. 복음 증거, 예배 음악, 믿음, 성장, 신앙 성숙, 문화 등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마르바 던이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신학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체득한 진리이다. 신체적으로 여러 장애를 안고 있지만, 그런 현실을 비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도록 온전히 자신을 드리며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하략)
[YES24 제공]
저자소개 펼쳐보기
목차
1부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이다
1장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이다
2장 창세기의 목적은 예배다
3장 창세기는 예전을 위한 것이다
4장 행동과 공동체와 이야기가 성품을 형성한다
2부 더없이 좋은 창조
5장 태초 여섯 날의 경이를 찬미하라
6장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7장 피조물과 ‘함께’ 다스리라
8장 정의를 위해 행동하라
9장 하나님의 방식으로 생명체를 관리하라
10장 안식일을 기려야 다른 날을 온전히 살 수 있다
3부 관계를 위한 창조
11장 관계에 집중하는 두 번째 창조 기사
12장 여자는 남자의 동등한 짝
13장 인간의 성적 결합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4부 진정한 예배, 신실한 삶
14장 다른 예배를 선택할 가능성
15장 뿌리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죄의 유혹
16장 타락이 관계와 문화에 미친 영향
17장 우리의 배반에도 하나님은 계획이 있으시다
18장 진정한 예배, 신실한 삶
맺음말_ 죄의 고백과 신앙 고백
[알라딘 제공]
출판사 서평
창세기 1-3장에서 길어낸 성경적 세계관과 진정한 예배의 촉구
그리스도인의 성경적 세계관과 성품 형성에 관한 많은 책들이 있지만 저자 마르바 던은 이에 대한 단서를 창세기 1-3장에서 끄집어내며, 무엇보다도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누차 강조한다. 즉 우리가 평소 성경을 향해 던지는 근원적인 물음이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창세기 1-3장이 철저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인지 알려 줌으로써 오히려 그 안에 실존적으로 중대한 물음들에 답할 수 있는 단서들과, 신앙을 위한 훈련 소재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음을 말해 준다.
저자는 첫 번째 창조 기사로부터 인간의 성품 형성, 다른 피조물에 대한 태도, 공평한 분배를 위한 정의로운 행동, 다른 날을 온전히 살기 위한 안식 등을 이끌어낸다. 또한 두 번째 창조 기사는 관계라는 개념, 곧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이와의 관계, 온 땅과의 관계를 기본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첫 번째 창조 기사는 하나님의 온전한 안식에서 드러나듯이 세계가 인류의 보살핌을 받아 질서정연하게 정돈되는 데에서 절정을 이루고, 두 번째 창조 기사에서는 인간들과 그들이 받은 명령들,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 그들 사이의 관계에 집중한다. 마지막으로, 창세기 3장은 인간에 얽힌 중대하고도 파괴적인 진실을 밝힘으로써 인류의 타락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 우리와 문화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알려 준다.
즉, 이 책은 창세기 1-3장이 인간의 정체성, 인생의 목적, 이 세상이 혼란스러운 이유, 죄와 악을 제거할 방법, 인간의 목적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한 방법, 희망의 근거 등 성경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하는 것에 주목한다. 그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성품 형성, 공평한 부의 분배, 환경에 대한 태도, 안식 등 실제적인 신앙 훈련의 지침도 제공해 준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충분히 음미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인간의 예배를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YES24 제공]
책속으로
성경이 주제로 삼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성품 형성과 관련된 책을 시작하면서 너무 빤한 논점을 제시한다고 생각할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한번 진지하게 숙고해 보시면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종종 이런 상상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주제로 삼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요.
...
우리가 처음부터 다른 질문들을 던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 본문에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게 뭘까?”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삼위 가운데 한 위격에 대해 혹은 세 위격 모두에 대해 무엇을 알리시려는 걸까?”
사소한 문제 같지만, 이것은 실로 엄청난 관점의 전환입니다. 초점이 자기개선에서 경배로 옮겨간 것이니까요. --- p. 11-12 1.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속속들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바라는 우리의 마음은 더욱더 커져 갑니다. 그리고 이 장의 서두에서 머튼에게 배웠듯이,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대상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은총이 다른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올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남들이 우리에게 없는 어떤 고매한 덕목을 드러내 보이면, 우리는 그들이 그러한 덕목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고 그것들을 점점 더 소유하려 들게 마련입니다.…하나님이 모든 것의 근원이심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칭찬하는 온갖 덕목이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덕목들을 사모하는 마음을 우리 안에 두신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될 것인가에 마음을 쓰도록 지어졌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규칙과 목표 들은 우리를 도와 성품에 관한 물음들을 던지게 하는 이야기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읽어 보면, 성경이 나쁜 성품과 좋은 성품의 수많은 보기를 보여 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후자를 더욱더 갈망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p. 53-54 4. 행동과 공동체와 이야기가 성품을 형성한다
멍에의 줄을 끌러 주고 멍에를 벗겨 주는 것은, 사태의 진상을 파헤치고, 피상적인 문제 설명의 이면을 파고들고, 근본 원인들을 찾아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우리의 빵을 굶주린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평등한 나눔을 의미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식료품 경비를 반으로 갈라, 절반은 우리를 위해 쓰고, 나머지 절반은 이 세계의 궁핍한 이들을 위해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먹는 방식을 바꾸고,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금식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를테면 궁핍한 이들을 늘 염두에 두고, 그들을 우리 생활비의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옥죄는 굴레와 억압이 어떤 것이든, 우리는 그러한 멍에들로부터 다른 이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습니다! --- p. 108 8. 정의를 위해 행동하라
우리가 에덴의 희열을 가급적 많이 맛보며 살려면 우리의 성적 결합을 위한 삼위일체의 의도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에덴의 희열을 맛볼 최선의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결합하기’는 절대적인 충성과 온전한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사회는 낭만적인 연애와 연정을 바람직한 결혼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지만, 열정은 쉬이 식게 마련입니다. 본문에서 ‘결합하다’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의지가 감정보다 중요함을 암시합니다. 누군가와 결합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 생겨도 그 사람을 떠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 p. 160-161 13. 인간의 성적 결합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선 안에서 안식하는 것, 우리의 조바심과 염려를 멈추는 것,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것, 그분의 진리를 껴안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고찰한 대로, 하나님은 여섯 날 동안 지으신 모든 것을 조화롭게 뒤섞으시는 가운데 자신의 계획, 질서, 전능한 능력을 여실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지니신 성품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그 은총이 지금도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 p. 236 18. 진정한 예배, 신실한 삶
[YES24 제공]
Thursday, April 11, 2013
Thursday, July 26, 2012
우리는 하나 '인종 화합"
사도행전 17장 26절 - 성경은 인류 전체가 '한 혈통'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종간의 화해를 이루도록 에너지를 공급하는 원천이다. 특히 창조에 관한 설명은 일종 편견의 중추신경을 밑동에서부터 싹뜩 잘라 버린다. 창조주가 아담을 지으시는 장면은 인종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유대인 학자들이 편집한 성경의 주요 주석서로 첫손에 꼽히는 미슈나는 이렇게 가르친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로 만드신 까닭은 무엇인가? 그래야 아무도 '내 아버지가 그대의 아버지보다 낫다'는 소릴 할 수 없을 것 아니겠는가!"
인종차별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바벨탑 이야기는 교만과 권력욕에 사로집힌 인류의 모습이 등장한다. 하나님은 그 오만함을 벌하시기 위해 "언어를 혼잡하게"하셨다. 인간의 교만과 권력욕으로 인해 인종과 국가가 여럿으로 분리되었고, 서로 갈등하고 미워하게 되었다는 창세기의 설명에는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어느 학자는 이 대목을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수많은 인간 집단으로 쪼개지게 된 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라는 말로 정리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곧바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구원을 약속하시면서 :땅에 사는 모든 민족(mispahah)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에 쓰인'민족'이라는 말은 인간들의 집단이나 민족, 또는 인종을 의미한다. 주님은 인류라는 가족의 연대가 깨어진 걸 안타까워하시고, 인간의 죄와 교만이 빚어 낸 인종차별과 국수주의의 장벽을 허무시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선포하신 것이다.
복음 안에서 인종의 벽이 허물어진다.
신약성경은 이 주제에 대한 논의를 완결 짓는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을 맞아 한지리에 모여 있던 교회 위에 성령님이 강림하시사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바벨탑에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던 이들이 서로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는데, 오순절에서는 제각기 다른 말을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선포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빠짐없이 이해했다. 예수님의 은혜가 인종차별의 상처를 치유하고도 남는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오순절에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가 모든 언어로 전달됐다는 사실은, 어떤 문화도 '정통'을 주장할 수 없으며, 성령님 안에서 민족과 언어, 문화적인 장벽을 넘어 일치를 이룰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에베소서 2장 11-22절에 따르면, 그 결과 인종과 민족이 '동일한 시민'으로 참여하는 공동체가 탄생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그런 점에서 크리스천은 '새로운 종족'이라고 말한다.
교회를 통해 인종의 벽을 뛰어넘는 파트너십과 우정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복음 임재와 권능의 증표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은 크리스천들을 익숙한 고향 문화를 등지고 한 번도 밝아 본 적이 없고, 그럴 일도 없는 땅으로 떠났던 아브라함처럼 만든다.
성경의 마지막 장은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계 5:9; 7:9; 11:9; 14:6)에서 나온 백성이 하나가 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창세기 12장의 약속부터 요한계시록의 성취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인종차별을 맹렬하게 공격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팀 켈러, 두란노, pp.178-183.
Thursday, May 17, 2012
섬기고 보존하라. 토지
"그리스도인들이 창세기 2장 15절의 말씀처럼 "섬기고 돌보라"는 명령, 즉 지구를 섬기고 보존하며 하나님이 주신 자원에 대한 선한 청지기가 되라는 명령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가나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또 다른 명령까지도 지킬 수 없었다."
p170.
'피조물을 돌보아야' 하며 지구에 대한 돌봄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돌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밀, 콩, 옥수수가 자라는 밭을 지난다. 모두 땅에서 많은 양분을 흡수하는 작물이다. 같은 땅에서 몇 년 동안 계속 작물을 길러내면 이런 양분은 고갈되고 만다. 그러므로 장차 몇 년 동안 땅이 작물을 계속해서 길러낼 수 있게 하기 위해 농부들은 땅에 심을 작물들을 바꾼다.
한 해는 땅에서 많은 질소를 끌어오릴 옥수수를 심었다가, 이듬해에는 반대로 질소를 돌려주는 '풋거름'인 자주개자리를 심기도 한다. 몇 년 동안은 땅에서 기운을 되찾을 시간을 주기 위해 그냥 잡초가 자라도록 내버려두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별로 자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들판을 지나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생각에는 그저 진보적인 농업 이론이 아니라 올바른 토지의 사용과 돌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반영된다는 사실이다."
"농부들은 농사에 매우 복잡한 화학과 기술을 활용한다. 그러나 땅으로 하여금 회복할 시간을 갖도록 한다는 생각, 언제나 받을 수만은 없으며 땅이 항상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은 농업의 시작만큼이나 오래되었다."
레위기 25장 3-4절 "여섯 해 동안은 너희가 너희 밭에 씨를 뿌려라. 여섯 해 동안 너희가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두어라. 일곱째 해에는 나 주가 쉬므로, 땅도 반드시 쉬게 하여야 한다. 그 해에는, 밭에 씨를 뿌려도 안 되며, 포도원을 가꾸어도 안된다"
p172-173.
p170.
'피조물을 돌보아야' 하며 지구에 대한 돌봄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돌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밀, 콩, 옥수수가 자라는 밭을 지난다. 모두 땅에서 많은 양분을 흡수하는 작물이다. 같은 땅에서 몇 년 동안 계속 작물을 길러내면 이런 양분은 고갈되고 만다. 그러므로 장차 몇 년 동안 땅이 작물을 계속해서 길러낼 수 있게 하기 위해 농부들은 땅에 심을 작물들을 바꾼다.
한 해는 땅에서 많은 질소를 끌어오릴 옥수수를 심었다가, 이듬해에는 반대로 질소를 돌려주는 '풋거름'인 자주개자리를 심기도 한다. 몇 년 동안은 땅에서 기운을 되찾을 시간을 주기 위해 그냥 잡초가 자라도록 내버려두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별로 자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들판을 지나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생각에는 그저 진보적인 농업 이론이 아니라 올바른 토지의 사용과 돌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반영된다는 사실이다."
"농부들은 농사에 매우 복잡한 화학과 기술을 활용한다. 그러나 땅으로 하여금 회복할 시간을 갖도록 한다는 생각, 언제나 받을 수만은 없으며 땅이 항상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은 농업의 시작만큼이나 오래되었다."
레위기 25장 3-4절 "여섯 해 동안은 너희가 너희 밭에 씨를 뿌려라. 여섯 해 동안 너희가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두어라. 일곱째 해에는 나 주가 쉬므로, 땅도 반드시 쉬게 하여야 한다. 그 해에는, 밭에 씨를 뿌려도 안 되며, 포도원을 가꾸어도 안된다"
p172-173.
Tuesday, April 10, 2012
묵상 - 창 3::14-21 <죄와 댓가, 그리고 심판>
14절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15절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17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Sunday, April 8, 2012
한 날 묵상 - 창50:1-26 <창세기 이야기는 가정이야기이다. 본토 친척집을 떠난 아브라함의 시대가 저물로, 이스라엘 민족의 12지파 시대가 시작되기까지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가정이다>
한 날 묵상 - 창50:1-26 <창세기 이야기는 가정이야기이다. 본토 친척집을 떠난 아브라함의 시대가 저물로, 이스라엘 민족의 12지파 시대가 시작되기까지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가정이다>
1.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이 저물고 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이스라엘 민족의 토대가 되었던 야곱이 이제 본향으로 가고 있다.
2. 친척 본토 집을 떠난 아브라함이후로,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과 12지파에 이르기까지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된 아브라함 가족의 이야기를 뒤로 하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3. 새로운 시대의 주된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이야기이다.
4. 요셉을 중심으로 아버지와 형제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여전히 불안한 부분이 있다.
5. 요셉은 아버지를 향해 마지막까지 섬김과 사랑으로 나아간다.
6. 야곱은 참으로 축복받은 인생이다.
7.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주셨던 말씀으로 돌아가보자.
8. 창세기 25장 23절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나님은 야곱을 자손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시고,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9. 창28장 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28장 14절에서 야곱에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애굽의 430년의 생활과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땅 입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울러, 야곱이 어디로 가든지, 심지어 애굽으로 내려가기까지 하나님은 지키시고 돌보아 주셨으면, 다시금 애굽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는 가나안 땅에 장사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하나님이 벧엘에서 주신 약속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짐을 보게 된다.
10. 창32장 28절 "그가 이르데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과 손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12지파의 시작이 되었다. 야곱의 자신의 이름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민족의 처음이 되었다.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어 싸웠다. 세상과 세상의 이치와 세상의 방법과 싸우지 않았다. 그의 믿음이 날로 견고하여 짐을 볼 수 있다.
11. 야곱의 축복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졌다.
12. 야곱은 이젠 남은 자들이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가야 하는지에 대한 몫은 그들 스스로에게 남겨두었다.
13. 창세기는 요셉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요셉의 죽음이 아마도 형제들의 죽음과 시차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출애굽의 이야기를 통해서 볼 때, 12지파의 민족성은 하나였고, 또한 가나안 땅에 되돌아가는 정체성에 대한 신앙교육도 잘 유지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참고, 24절, 25절.
14. 새로운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될까?에 대한 시작은 좋았지만, 어떻게 진행되어질지에 대한 불안은 여전하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다.
15-21절 - 요셉의 형제들은 불안해 하고 있다. 요셉은 그 형들을 위로하고 있다.
15. 그러나 형제들의 불안으로 창세기가 마무리 되지 않고, 요셉의 위로와 요셉이 자손들에게 전한 말씀을 보면, 야곱의 아들로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이야기의 시작은 하나됨이었다고 할 수 있다.
16. 창세기의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이다. 또한 공동체의 이야기이며, 가족의 이야기이다. 결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17.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에 한 사람에 대해 강조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연합이어야 한다. 결코 혼자일 수 없다.
18. 결국 혼자가 아니라면, 가정이 이야기가 곧 교회의 이야기이며, 가정같은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로 이어지게 된다.
19. 다시금 가정으로 돌아간다. 가정이 올바르게 세워지면, 교회가 올바르게 세워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올바르게 세워진다.
20. 교회의 기초가 가정임을 기억하고, 교회는 가정이 바로 서는 사역에 집중해야 한다. 가정이 바로 서야 교회가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21. 창세기를 마무리하면서 지난 8개월의 말씀 묵상을 다시 정리하려고 한다. 가정을 중심으로 재구성하여 "창세기의 이야기는 가정의 이야기이다"라는 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22. "창세기의 이야기는 가정의 이야기이다"라는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1) 혼자가 아니다. 연합니다.
2) 가정이 믿음안에 서야 교회가 바로 선다.
3) 가정으로 시작되어 교회가 되고, 교회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간다.
23.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지난 시간 창세기 묵상이었다.
24.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며, 주신 말씀에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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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곡하는 시한이 지내매"
5절 "가나안 땅에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내가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10절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11절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14절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 ...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요셉이 형들을 위로하다. 15-21절.
요셉의 죽음. 22-26절.
1.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이 저물고 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이스라엘 민족의 토대가 되었던 야곱이 이제 본향으로 가고 있다.
2. 친척 본토 집을 떠난 아브라함이후로,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과 12지파에 이르기까지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된 아브라함 가족의 이야기를 뒤로 하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3. 새로운 시대의 주된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이야기이다.
4. 요셉을 중심으로 아버지와 형제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여전히 불안한 부분이 있다.
5. 요셉은 아버지를 향해 마지막까지 섬김과 사랑으로 나아간다.
6. 야곱은 참으로 축복받은 인생이다.
7.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주셨던 말씀으로 돌아가보자.
8. 창세기 25장 23절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나님은 야곱을 자손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시고,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9. 창28장 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28장 14절에서 야곱에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애굽의 430년의 생활과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땅 입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울러, 야곱이 어디로 가든지, 심지어 애굽으로 내려가기까지 하나님은 지키시고 돌보아 주셨으면, 다시금 애굽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는 가나안 땅에 장사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하나님이 벧엘에서 주신 약속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짐을 보게 된다.
10. 창32장 28절 "그가 이르데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과 손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12지파의 시작이 되었다. 야곱의 자신의 이름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민족의 처음이 되었다.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어 싸웠다. 세상과 세상의 이치와 세상의 방법과 싸우지 않았다. 그의 믿음이 날로 견고하여 짐을 볼 수 있다.
11. 야곱의 축복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졌다.
12. 야곱은 이젠 남은 자들이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가야 하는지에 대한 몫은 그들 스스로에게 남겨두었다.
13. 창세기는 요셉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요셉의 죽음이 아마도 형제들의 죽음과 시차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출애굽의 이야기를 통해서 볼 때, 12지파의 민족성은 하나였고, 또한 가나안 땅에 되돌아가는 정체성에 대한 신앙교육도 잘 유지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참고, 24절, 25절.
14. 새로운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될까?에 대한 시작은 좋았지만, 어떻게 진행되어질지에 대한 불안은 여전하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다.
15-21절 - 요셉의 형제들은 불안해 하고 있다. 요셉은 그 형들을 위로하고 있다.
15. 그러나 형제들의 불안으로 창세기가 마무리 되지 않고, 요셉의 위로와 요셉이 자손들에게 전한 말씀을 보면, 야곱의 아들로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이야기의 시작은 하나됨이었다고 할 수 있다.
16. 창세기의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이다. 또한 공동체의 이야기이며, 가족의 이야기이다. 결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17.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에 한 사람에 대해 강조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연합이어야 한다. 결코 혼자일 수 없다.
18. 결국 혼자가 아니라면, 가정이 이야기가 곧 교회의 이야기이며, 가정같은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로 이어지게 된다.
19. 다시금 가정으로 돌아간다. 가정이 올바르게 세워지면, 교회가 올바르게 세워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올바르게 세워진다.
20. 교회의 기초가 가정임을 기억하고, 교회는 가정이 바로 서는 사역에 집중해야 한다. 가정이 바로 서야 교회가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21. 창세기를 마무리하면서 지난 8개월의 말씀 묵상을 다시 정리하려고 한다. 가정을 중심으로 재구성하여 "창세기의 이야기는 가정의 이야기이다"라는 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22. "창세기의 이야기는 가정의 이야기이다"라는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1) 혼자가 아니다. 연합니다.
2) 가정이 믿음안에 서야 교회가 바로 선다.
3) 가정으로 시작되어 교회가 되고, 교회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간다.
23.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지난 시간 창세기 묵상이었다.
24.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며, 주신 말씀에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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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곡하는 시한이 지내매"
5절 "가나안 땅에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내가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10절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11절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14절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 ...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요셉이 형들을 위로하다. 15-21절.
요셉의 죽음. 22-26절.
Saturday, April 7, 2012
한 날 묵상 - 창49:1-33 <이스라엘의 유언과 축복송>
1절 "야곱이 그 아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2절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생명의말씀사 "New 굿데이 성경" p78. 영성칼럼을 보면, 야곱의 축복기도를 통해 두 가지 영적 원리를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그 기도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될 후손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부여햇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각기 다른 기질과 은사와 환경을 지녔지만 서로 나뉘지 않고 아브라함의 언약 아래서 하나되어 하나님을 섬기기로 운명지어졌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여러면에서 다르지만 일체의식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둘째, 죄는 축복을 가로 막는다. 루우벤은 장자로서 가장 큰 축복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부친의 첩을 범했기 때문에 그 특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시므온과 레위도 난폭하고 잔인한 성격 때문에 축복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말을 들었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3절 르우벤 - "너는 내 장자라 .. 테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5절 시므온과 레위 -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라 ...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8절 유다 -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13절 스블론 - "해변에 거주하리니"
14절 잇사갈 -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
16절 단 -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19절 갓 -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20절 아셀 -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21절 납달리 -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22절 요셉 -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27절 베냐민 - "물어뜯는 이리라"
28절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출복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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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목사님 "열두 지파, 열두 제자" 정리하여 올리자.
Thursday, April 5, 2012
한 날 묵상 - 창48:1-22 <요셉은 또 다시 한 가지 더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두 개를 얻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 아래에 우리는 살아간다. 그 때 좀 무엇이 부족하더라가도, 내 뜻대로 안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면 은총을 누리게 된다>
한 날 묵상 - 창48:1-22 <요셉은 또 다시 한 가지 더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두 개를 얻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 아래에 우리는 살아간다. 그 때 좀 무엇이 부족하더라가도, 내 뜻대로 안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면 은총을 누리게 된다>
1. 요셉은 이스라엘의 자녀이면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아버지이다. 총리가 되기 전까지 애굽생활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러고 이제 아버지와 형제를 만나 번성하고 땅에 충만한 삶을 살고 있었다.
2. 세월은 거스릴수 없는 법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온지 17년이 지나 이제 이 땅에 그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인생은 어느 순간에 끝이 있다. 영원할 수 없다. 요셉은 아버지 이스라엘이 생이 다 되어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아들들을 아버지에게로 데려왔다.
3. 요셉은 아버지 이스라엘을 사랑하였다. 또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가진 권위를 늘 인정하였다. 아버지로부터 흘러 나오는 축복권을 사모하였다. 그래서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스라엘에게로 나아갔다. 1-4절.
4. 당시의 축복은 아버지로부터 흘러 나왔다. 49장에서 이스라엘은 아들들에게 축복의 말씀으로 유언한다.
5. 축복기도는 복을 빌어 줄 뿐만 아니라 훈손들에게 종교적 전통을 전하는 방법이기도 했다.(굿데이 성경 p78. 영성컬럼)
6. 이스라엘은 두 형제를 축복하였다. 그리고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이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되어,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당당한 한 지파로서 한 민족을 이루게 되었다.
7. 요셉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쉬운 대목이다. 자신이 이름의 민족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은 축복받은 자이다. 요셉 족속은 없지만, 자신의 두 아들이 각각 한 족속씩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의 몫이 두 배가 되었다.
8. 요셉의 입장에서 또 다른 아쉬움이 있었다. 축복은 장자권을 인정하여 위로부터 아래로부터의 순서의 권위가 있었다. 큰 자가 작은 자보다 더 축복을 받아야 했다. 5-6절
9. 그러나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았다. 그리고 지금 두 번째 순리에 벗어난 축복을 하고 있다.
10.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축복 순서가 엇갈리게 되었다.
11. 에브라임이 더 큰 자의 의미로 오른손의 축복을 받았고, 므낫세는 그 반대가 되었다.
12. 이스라엘은 요셉이 이 일을 기뻐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9절 "나는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13. 이스라엘의 축복권을 보며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은 요셉의 생각과 순리, 그리고 마음을 뛰어넘는 그 무엇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14. 이스라엘의 축복은 단순히 일상적인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안에서의 축복이었다.
15.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안에서 요셉이나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부다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지금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스라엘을 사용하고 계실 뿐이다.
16.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구로서 쓰임받을 뿐이다.
17.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우리를 보시고, 우리의 자녀들을 보고 계신다. 단지, 나의 눈과 나의 비전, 내가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나의 생각과 의지 않아서 나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18. 그렇기에 믿음으로 오늘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믿음으로 반응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은혜를 보며 누릴 수 있게 된다.
19. 요셉의 이와같은 반응에, 이스라엘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라고 요셉에게 말한다.
20. 이 말씀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21. '나도 안다. 나도 알아. 누가 첫째이고, 둘째인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용하시는구나! 나와 형 에서의 관계에서 나를 택하셨던 것처럼. 너를 애굽으로 팔려가게 하셨던 것처럼. 그리하여 너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나를 이 모양, 이 모습으로 사용하시는구나!'
22. 오늘도 우리는 주어진 자신의 삶에서 인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아버지를 공경하며 존중하기 원한다.
23. 또한 한 편으로 무엇인가 내 뜻대로, 때로로 순리되는 무엇인가 되지 않을 때에도, 그 순간 하나님을 기억하자.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하나님의 뜻안에 있음을 신뢰하자.
24. 하나님을 포기하거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가장 큰 실패이며, 나아가 최악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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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2절 "네 아들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3절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절 "내게 이르시되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이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되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당당한 한 지파로서 한 민족을 이루게 된다.
5절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6절 "이들 후에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야곱의 것이라는 뜻이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속하게 된다. 요셉의 그 이후의 자녀들만이 요셉의 것이다.
8-22절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을 축복하였다.
10절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13절 "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14절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15-16절 요셉을 축복하여.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17절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19절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는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21절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 참고자료
http://semihan.com/site/bbs/board.php?bo_table=i_03&wr_id=25&page=2
1. 요셉은 이스라엘의 자녀이면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아버지이다. 총리가 되기 전까지 애굽생활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러고 이제 아버지와 형제를 만나 번성하고 땅에 충만한 삶을 살고 있었다.
2. 세월은 거스릴수 없는 법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온지 17년이 지나 이제 이 땅에 그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인생은 어느 순간에 끝이 있다. 영원할 수 없다. 요셉은 아버지 이스라엘이 생이 다 되어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아들들을 아버지에게로 데려왔다.
3. 요셉은 아버지 이스라엘을 사랑하였다. 또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가진 권위를 늘 인정하였다. 아버지로부터 흘러 나오는 축복권을 사모하였다. 그래서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스라엘에게로 나아갔다. 1-4절.
4. 당시의 축복은 아버지로부터 흘러 나왔다. 49장에서 이스라엘은 아들들에게 축복의 말씀으로 유언한다.
5. 축복기도는 복을 빌어 줄 뿐만 아니라 훈손들에게 종교적 전통을 전하는 방법이기도 했다.(굿데이 성경 p78. 영성컬럼)
6. 이스라엘은 두 형제를 축복하였다. 그리고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이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되어,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당당한 한 지파로서 한 민족을 이루게 되었다.
7. 요셉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쉬운 대목이다. 자신이 이름의 민족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은 축복받은 자이다. 요셉 족속은 없지만, 자신의 두 아들이 각각 한 족속씩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의 몫이 두 배가 되었다.
8. 요셉의 입장에서 또 다른 아쉬움이 있었다. 축복은 장자권을 인정하여 위로부터 아래로부터의 순서의 권위가 있었다. 큰 자가 작은 자보다 더 축복을 받아야 했다. 5-6절
9. 그러나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았다. 그리고 지금 두 번째 순리에 벗어난 축복을 하고 있다.
10.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축복 순서가 엇갈리게 되었다.
11. 에브라임이 더 큰 자의 의미로 오른손의 축복을 받았고, 므낫세는 그 반대가 되었다.
12. 이스라엘은 요셉이 이 일을 기뻐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9절 "나는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13. 이스라엘의 축복권을 보며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은 요셉의 생각과 순리, 그리고 마음을 뛰어넘는 그 무엇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14. 이스라엘의 축복은 단순히 일상적인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안에서의 축복이었다.
15.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안에서 요셉이나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부다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지금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스라엘을 사용하고 계실 뿐이다.
16.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구로서 쓰임받을 뿐이다.
17.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우리를 보시고, 우리의 자녀들을 보고 계신다. 단지, 나의 눈과 나의 비전, 내가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나의 생각과 의지 않아서 나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18. 그렇기에 믿음으로 오늘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믿음으로 반응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은혜를 보며 누릴 수 있게 된다.
19. 요셉의 이와같은 반응에, 이스라엘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라고 요셉에게 말한다.
20. 이 말씀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21. '나도 안다. 나도 알아. 누가 첫째이고, 둘째인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용하시는구나! 나와 형 에서의 관계에서 나를 택하셨던 것처럼. 너를 애굽으로 팔려가게 하셨던 것처럼. 그리하여 너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나를 이 모양, 이 모습으로 사용하시는구나!'
22. 오늘도 우리는 주어진 자신의 삶에서 인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아버지를 공경하며 존중하기 원한다.
23. 또한 한 편으로 무엇인가 내 뜻대로, 때로로 순리되는 무엇인가 되지 않을 때에도, 그 순간 하나님을 기억하자.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하나님의 뜻안에 있음을 신뢰하자.
24. 하나님을 포기하거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가장 큰 실패이며, 나아가 최악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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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2절 "네 아들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3절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절 "내게 이르시되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이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되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당당한 한 지파로서 한 민족을 이루게 된다.
5절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6절 "이들 후에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야곱의 것이라는 뜻이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속하게 된다. 요셉의 그 이후의 자녀들만이 요셉의 것이다.
8-22절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을 축복하였다.
10절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13절 "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14절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15-16절 요셉을 축복하여.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17절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19절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는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21절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 참고자료
http://semihan.com/site/bbs/board.php?bo_table=i_03&wr_id=25&page=2
| 12지파를 언급할 때 요셉 대신에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포함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 Answer 1. 이스라엘에서 장자는 다른 아들에 비해 두 배의 유산을 분배받았습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였고, 따라서 그는 마땅히 명예와 유산의 두 몫을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모(빌하)와 동침함으로 그 축복을 잃고 말았습니다(창 35:22, 대상 5:1-2). 그 다음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는 폭력적이고 부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속임수로 세겜 사람들을 속여서 그들을 살해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시므온과 레위 역시 장자의 유산을 받지 못하고 각 지파에 흩어져 살아야만 했습니다. 후에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에게 흡수되었고(수 19장), 레위 지파는 모세와 아론으로 인해 제사직을 맡고 각 지파에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유다 역시 각 지파의 리더십을 행사하기는 했지만 장자의 명분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2. 장자의 명분은 라헬의 아들인 요셉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됨으로 야곱의 가족을 기근에서 먹여 살렸으며, 야곱의 가족을 반석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이 일로 인해 후에 야곱은 요셉에게 장자에게 주는 축복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두 배의 유산을 주었습니다. 이 두 배의 유산은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돌아갔습니다. 후에 레위 지파는 제사와 성막의 일을 돕는 사람들이 되어 각 지파로 흩어지게 되어서 따로 기업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2지파의 기업을 차지함으로 12지파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Tuesday, April 3, 2012
한 날 묵상 - 창47:27-31절 <험악한 인생, 굴곡 가득한 인생을 마감하는 야곱, 그리고 그가 청한 마지막 한 소절의 말>
한 날 묵상 - 창47:27-31절 <험악한 인생, 굴곡 가득한 인생을 마감하는 야곱, 그리고 그가 청한 마지막 한 소절의 말.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하나님의 주신 약속의 말씀안에 거하라 하라.>
1. 야곱의 인생이 마감되고 있다. 형의 발뒤꿈을 잡고 이 땅에 온지 어언 147년이 지나 이제, 그의 생도 막바지에 다달았다.
29절 "죽을 날이 가까우매"
2. 야곱의 마지막 인생은 축복의 인생이었습니다. 역시 마지막 아름다운 인생이 멋진 인생입니다. 27절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3. 그의 마지막 축복의 인생은 생육과 번성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생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4. 생이 마치는 그 날까지 수고하고 땀흘려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5. 요즘은 일찍 은퇴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은퇴후에 아무 할 일없이 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낭비입니다. 자신의 후반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6. 마지막 생을 마치는 그 날까지 무엇인가 의미있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입니다. 그러한 인생을 꿈꾸며 준비합시다.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들을 찾아 수고의 땀을 마지막까지 흘리는 꿈을 꿉시다.
7. 사실, 야곱은 이러한 축복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애굽까지 내려온 그의 인생을 보면, 야곱의 인생은 떠돌이에 인생입니다.
8. 야곱은 형 에서의 축복을 빼앗고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인 것입니다.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허겁지겁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쳐 갔습니다.
9. 라반의 집을 다시 떠날 때는 어떻했습니까? 그 때 또한 축복받으면 떠나지 못했습니다. 좇기듯 떠났습니다. 물론 그 때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10. 다시 돌아와 잘 지내듯 하던 야곱에게 찾아오는 시련이 있었습니다. 요셉을 잃은 아픔입니다.
11. 그의 인생이 어느 하나 보기에 좋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에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12.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믿음이 점진적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어제보나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욱 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쪽으로 가지 않아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야곱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 헤아리는 쪽으로 그의 마음을 모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은 뒤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3. 야곱은 그의 마지막 인생에 다시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기근을 피해 요셉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던 것입니다.
14. 이러한 떠돌이 인생에서도 그의 마지막을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7절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15. 우리도 이러한 인생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이러한 인생을 준비하기를 원합니다.나아가 우리도 야곱처럼 마지막을 더욱 은혜롭게 살아갈 수 있음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16. 험악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더욱 더 하나님의 마음을 더 가까이 나갑시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손의 맡기며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를 합시다.
17. 우리도 야곱처럼 끝이 더욱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며,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18. 생을 마감하는 야곱에게 꿈이 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바라보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19. 야곱은 요셉의 자신의 꿈과 바라보는 비전을 위해 요셉에게 인애와 성실함으로 맹세하기를 요청했습니다.
20. 그가 요셉에게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나를 애굽에서 매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는 것이었다.
21. 앞서 어떻게 야곱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 헤아리는 쪽으로 그의 마음을 모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 질문에 답이 바로 이것입니다.
22. 그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었고, 비전을 품고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대한 꿈과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약속의 말씀을 품고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 마지막까지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23. 야곱의 몸은 쇠약해지고, 약해져갔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은 아직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24. 하나님이 여러분에 주신 꿈과 비전은 어떻습니까? 몸이 약해지고, 육신이 약해지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의 꿈과 비전또한 약해진다면, 야곱이 누린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는 축복의 말씀이 내 것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25. 야곱은 요셉의 맹세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렸습니다.
31절"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다.
26. 그가 하나님의 바라보고 있었다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야곱의 꿈과 비전이 요셉을 통해 맹세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기 합당하였기 때문입니다.
27. 육신이 약해지고 허약해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꿈과 비전은 흐려지지 않고 약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의 꿈을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28. 나아가 아직 육신의 힘이 있는 우리는 아름다운 야곱의 마지막 인생을 사모합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오늘 이 순간에 더욱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에 열심을 다합시다.
29. 오늘 한 날입니다. 지금 이 순간입니다. 험악한 세월을 살고 있든, 생의 마지막 순간을 살아고 있든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에 품고,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향해 날마다, 이 순간을 살아가기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1. 야곱의 인생이 마감되고 있다. 형의 발뒤꿈을 잡고 이 땅에 온지 어언 147년이 지나 이제, 그의 생도 막바지에 다달았다.
29절 "죽을 날이 가까우매"
2. 야곱의 마지막 인생은 축복의 인생이었습니다. 역시 마지막 아름다운 인생이 멋진 인생입니다. 27절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3. 그의 마지막 축복의 인생은 생육과 번성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생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4. 생이 마치는 그 날까지 수고하고 땀흘려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5. 요즘은 일찍 은퇴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은퇴후에 아무 할 일없이 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낭비입니다. 자신의 후반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6. 마지막 생을 마치는 그 날까지 무엇인가 의미있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입니다. 그러한 인생을 꿈꾸며 준비합시다.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들을 찾아 수고의 땀을 마지막까지 흘리는 꿈을 꿉시다.
7. 사실, 야곱은 이러한 축복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애굽까지 내려온 그의 인생을 보면, 야곱의 인생은 떠돌이에 인생입니다.
8. 야곱은 형 에서의 축복을 빼앗고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인 것입니다.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허겁지겁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쳐 갔습니다.
9. 라반의 집을 다시 떠날 때는 어떻했습니까? 그 때 또한 축복받으면 떠나지 못했습니다. 좇기듯 떠났습니다. 물론 그 때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10. 다시 돌아와 잘 지내듯 하던 야곱에게 찾아오는 시련이 있었습니다. 요셉을 잃은 아픔입니다.
11. 그의 인생이 어느 하나 보기에 좋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에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12.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믿음이 점진적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어제보나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욱 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쪽으로 가지 않아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야곱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 헤아리는 쪽으로 그의 마음을 모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은 뒤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3. 야곱은 그의 마지막 인생에 다시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기근을 피해 요셉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던 것입니다.
14. 이러한 떠돌이 인생에서도 그의 마지막을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7절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15. 우리도 이러한 인생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이러한 인생을 준비하기를 원합니다.나아가 우리도 야곱처럼 마지막을 더욱 은혜롭게 살아갈 수 있음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16. 험악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더욱 더 하나님의 마음을 더 가까이 나갑시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손의 맡기며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를 합시다.
17. 우리도 야곱처럼 끝이 더욱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며,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18. 생을 마감하는 야곱에게 꿈이 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바라보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19. 야곱은 요셉의 자신의 꿈과 바라보는 비전을 위해 요셉에게 인애와 성실함으로 맹세하기를 요청했습니다.
20. 그가 요셉에게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나를 애굽에서 매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는 것이었다.
21. 앞서 어떻게 야곱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 헤아리는 쪽으로 그의 마음을 모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 질문에 답이 바로 이것입니다.
22. 그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었고, 비전을 품고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대한 꿈과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약속의 말씀을 품고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 마지막까지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23. 야곱의 몸은 쇠약해지고, 약해져갔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은 아직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24. 하나님이 여러분에 주신 꿈과 비전은 어떻습니까? 몸이 약해지고, 육신이 약해지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의 꿈과 비전또한 약해진다면, 야곱이 누린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는 축복의 말씀이 내 것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25. 야곱은 요셉의 맹세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렸습니다.
31절"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다.
26. 그가 하나님의 바라보고 있었다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야곱의 꿈과 비전이 요셉을 통해 맹세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기 합당하였기 때문입니다.
27. 육신이 약해지고 허약해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꿈과 비전은 흐려지지 않고 약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의 꿈을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28. 나아가 아직 육신의 힘이 있는 우리는 아름다운 야곱의 마지막 인생을 사모합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오늘 이 순간에 더욱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에 열심을 다합시다.
29. 오늘 한 날입니다. 지금 이 순간입니다. 험악한 세월을 살고 있든, 생의 마지막 순간을 살아고 있든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에 품고,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향해 날마다, 이 순간을 살아가기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Saturday, March 31, 2012
한 날 묵상 - 창47:13-26절 <애굽과 가나안에 큰 흉년이 들었다. 누가 이 때에 이기는 자가 되는가? 요셉이 총리로 애굽를 치리할 때 어떻게 가진 자본을 사용하고 있는지 배워 오늘 우리 시대에 적용하라>
한 날 묵상 - 창47:13-26절 <애굽과 가나안에 큰 흉년이 들었다. 누가 이 때에 이기는 자가 되는가? 요셉이 총리로 애굽를 치리할 때 어떻게 가진 자본을 사용하고 있는지 배워 오늘 우리 시대에 적용하라>
오늘 묵상의 포인트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애굽과 가나안 땅의 비교에서 얻는 교훈이다. 땅이 아니라 임재이다.
둘재는 요셉의 치리에서 배우는 교훈이다. 땅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오늘날은 땅보다 자본이 옛날의 땅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요셉의 치리에서 배울 수 있게 된다.
13절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
14절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거두어 들이고"
15절 "애굽 당과 가나안 땅에 돈이 떨어진지라"
17절 "그들이 그들의 가축을 끌어온지라"
"그 모든 가축과 바꾸어서 그 해 동안에 먹을 것을 그들에게 주니라"
19절 "우리가 어찌 ...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 애굽과 가나안 땅의 비교(17절 "그들이", 19절 "우리가"도 애굽과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임)
둘 중에 어떤 땅이 약속의 땅인가? 야곱 가족이 머물러야 할 땅인가?
1) 공통점
- 기근으로 황폐하여 짐.
- 돈으로 곡식을 사게 됨.
- 돈도 떨어져, 더 이상 곡식을 살 수 없음.
- 가축과 바꾸어 먹을 것을 받음.
- 몸과 토지를 주고 사소서.
2) 다른점
- 애굽에 요셉이 총리로 있었다.
- 돈이 애굽으로 몰림.
3) 애굽과 가나안 땅의 비교에서 무엇을 교훈받게 되는가?
-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다.
-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들의 사람이 거하는 처소다.
-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품고 있는 자는 결코 내일에 대한 염려가 없다.
- 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사람은 여유가 있으며 자신감이 있다.
- 언약궤만을 바라보지 말고, 왜 우리가 언약궤를 바라봐야 하는지를 알라.
(사무엘상 4장 1-18절, 블레셋과의 싸움. 17절 "하나님의 궤는 빼았겼나이다")
-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는 곳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 하나님의 말씀이 머물른 곳이 우리의 거처이며,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이다.
20절 "요셉이 개웁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Q. 그럼, 가축은 어떻게 하였는가?
가축은 애굽 사람들이 싫어하였고, 바로의 가축도 야곱의 형제들이 치게 되었음으로, 당연히 야곱의 형제들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 궁핍과 흉년의 시기에, 먹을 것이 없는 시기에 요셉은 어떻게 하였는가?
현대에 먹을 것이 남아도는 곳과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수 많이 공존하는 시대에 우리는 총리 요셉을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23절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24절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가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45장 6절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 야곱 가족은 충분히 양식을 보관하지 않았다. 기근 두번째 해에 벌써 두번씩이나 먹을 사러 애굽 땅으로 왔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직 몇년이 남은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다음과 같이 유추해 볼 수 있다.
기근 이년 째 - 돈으로 먹을 것을 사다. 14-15절
기근 삼년 째 - 가축으로 먹을 것을 사다. 17절
기근 사년 째 - 토지와 몸으로 먹을 것을 사다. 19절
기근 오년 째 - 종자를 뿌려 먹을 것을 억게 됨. 오분이 일을 바로에게 상납. 24절.
기근 육년 째 - ?
기근 칠년 째 - ?
18절 "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
=> 여기서 "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에서 "그 해"를 기근의 칠년으로 해석하면, "새 해"는 기근이 끝나고 난 후 첫 해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19절에서 받은 종자를 가지고 24절에서 처럼 열매를 맺게 되고, 소득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할 수 있게 된다.
원어는 어떻게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다.
25절 "그들이 이르되...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26절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 요셉의 치리 방법을 배워, 오늘 우리의 시대에 적용하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들..
Q. 토지를 가진 자 어떻게 해야 하나?
Q. 요즘 토지는 자본이다. 자본을 가진 자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오늘 묵상의 포인트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애굽과 가나안 땅의 비교에서 얻는 교훈이다. 땅이 아니라 임재이다.
둘재는 요셉의 치리에서 배우는 교훈이다. 땅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오늘날은 땅보다 자본이 옛날의 땅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요셉의 치리에서 배울 수 있게 된다.
13절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
14절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거두어 들이고"
15절 "애굽 당과 가나안 땅에 돈이 떨어진지라"
17절 "그들이 그들의 가축을 끌어온지라"
"그 모든 가축과 바꾸어서 그 해 동안에 먹을 것을 그들에게 주니라"
19절 "우리가 어찌 ...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 애굽과 가나안 땅의 비교(17절 "그들이", 19절 "우리가"도 애굽과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임)
둘 중에 어떤 땅이 약속의 땅인가? 야곱 가족이 머물러야 할 땅인가?
1) 공통점
- 기근으로 황폐하여 짐.
- 돈으로 곡식을 사게 됨.
- 돈도 떨어져, 더 이상 곡식을 살 수 없음.
- 가축과 바꾸어 먹을 것을 받음.
- 몸과 토지를 주고 사소서.
2) 다른점
- 애굽에 요셉이 총리로 있었다.
- 돈이 애굽으로 몰림.
3) 애굽과 가나안 땅의 비교에서 무엇을 교훈받게 되는가?
-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다.
-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들의 사람이 거하는 처소다.
-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품고 있는 자는 결코 내일에 대한 염려가 없다.
- 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사람은 여유가 있으며 자신감이 있다.
- 언약궤만을 바라보지 말고, 왜 우리가 언약궤를 바라봐야 하는지를 알라.
(사무엘상 4장 1-18절, 블레셋과의 싸움. 17절 "하나님의 궤는 빼았겼나이다")
-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는 곳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 하나님의 말씀이 머물른 곳이 우리의 거처이며,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이다.
20절 "요셉이 개웁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Q. 그럼, 가축은 어떻게 하였는가?
가축은 애굽 사람들이 싫어하였고, 바로의 가축도 야곱의 형제들이 치게 되었음으로, 당연히 야곱의 형제들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 궁핍과 흉년의 시기에, 먹을 것이 없는 시기에 요셉은 어떻게 하였는가?
현대에 먹을 것이 남아도는 곳과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수 많이 공존하는 시대에 우리는 총리 요셉을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23절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24절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가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45장 6절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 야곱 가족은 충분히 양식을 보관하지 않았다. 기근 두번째 해에 벌써 두번씩이나 먹을 사러 애굽 땅으로 왔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직 몇년이 남은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다음과 같이 유추해 볼 수 있다.
기근 이년 째 - 돈으로 먹을 것을 사다. 14-15절
기근 삼년 째 - 가축으로 먹을 것을 사다. 17절
기근 사년 째 - 토지와 몸으로 먹을 것을 사다. 19절
기근 오년 째 - 종자를 뿌려 먹을 것을 억게 됨. 오분이 일을 바로에게 상납. 24절.
기근 육년 째 - ?
기근 칠년 째 - ?
18절 "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
=> 여기서 "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에서 "그 해"를 기근의 칠년으로 해석하면, "새 해"는 기근이 끝나고 난 후 첫 해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19절에서 받은 종자를 가지고 24절에서 처럼 열매를 맺게 되고, 소득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할 수 있게 된다.
원어는 어떻게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다.
25절 "그들이 이르되...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26절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 요셉의 치리 방법을 배워, 오늘 우리의 시대에 적용하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들..
Q. 토지를 가진 자 어떻게 해야 하나?
Q. 요즘 토지는 자본이다. 자본을 가진 자 어떻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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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rch 27, 2012
한 날 묵상 - 창46:28 - 47:12 <왜 그들은 고센 땅으로 갔는가?>
1. 오늘도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한 선택의 순간에 있다. 아내와 오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2. 아내가 참 고마운 것은, 그 마음이다. 세상에서 욕심을 채우려는 길을 가려는 선택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선택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고민하는 마음 때문이다.
3. 그렇게 영적으로 고민하는 부분들이 결혼 초기에는 상당한 부담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고 있다. 그만큼 아내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한다.
4. 오늘 우리의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분명히 보이는 길은 아닐지라도, 희미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과 질문이 계속되는 삶이 내가, 우리가 걸어가야 할 뚜렷한 길이라 확신한다.
5. 오늘 본문, 요셉과 야곱의 고센 땅으로 간 이야기는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6. 본문의 명제는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신다는 분명한 믿음이 고백이 있기를 원한다.
7. 야곱과 요셉이 서로 주고 받아 얻은 결론으로 그들이 거할 땅, 고센은 어떤 곳인가? 왜 그들은 고센 땅을 택했으면, 왜 그들은 고센 땅으로 내려 갔는가?
8. 야곱과 요셉의 선택기준은 이렇다.
9. 첫째 적지이지만, 자유로운 상황이 아니지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곳이 우선이었다.
10. 둘째 자신의 정체성을 후대에 전할 수 있는 곳이다. 애굽의 문화와 섞이지 않는 곳이라면 조금 불편해서 문제가 없다.
11. 셋째, 늘 마음에 가나안을 품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고센은 가나안 땅에 가까운 곳이다. 그곳에서 늘 가나안을 생각하며 돌아가야 할 본향을 기억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12. 요셉과 야곱의 기준이다.
13. 믿음의 삶의 여정에서 순간 순간 선택해야 할 때, 야곱과 요셉의 기준이 우리의 기준이 되기를 원한다.
14.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곳,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곳, 나아가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음을 기억하며 이를 잊어버리지 않을만큼 그곳에서 멀어져 있지 않는 곳에 살악나는 한 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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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6:28 - 47:12 <왜 그들은 고센 땅으로 갔는가?>
참고 - 45장 10절
46장
28절 "야곱이 ..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29절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34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47장
1절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4절 요셉의 형들 중 다섯 명이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6절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여 "애굽 땅에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
9절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나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1절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 '라암셋'은 고센의 다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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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용조 목사 <창세기강해 5> p285-286.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코치를 받아 왕에게 말을 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 대신이기에 애굽에서 제일 좋은 땅이 어딘지 잘 압니다. 그래서 형들을 코치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제일 좋은 땅을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왕이 형들에게 생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요셉이 코치한대로 교센 땅에 거하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고센 땅을 달라고 했을까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창세기 46장에 나오는 대로 그곳이 목축업을 하기에 가장 좋은 비옥한 땅이었기 땜누입니다. 요셉의 가족은 선조 때부터 목축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목축업을 하기에 좋은 땅을 골라 준 것입니다.
둘째, 고센 땅은 애굽 사람들이 사는 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아버지와 가족들이 애굽 사람들과 섞이지 않고 독립해서 살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야곱 가족은 애굽 사람들이 믿는 신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예배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풍습과 언어가 있었습니다.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잘 지킬 수 있는 땅이 고센 땅입니다. 애굽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고, 모국ㄱ어와 전통과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는 땅이 고센 땅이었습니다. 우리는 국내에서 살 수 도 있고, 국외에서도 살 수도 있습니다. 어디에서 살든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하나님을 믿는 모습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것을 지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고센 땅은 애굽의 동북쪽에 있는데 가나안과 아주 가까웠기 때문입니다.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이것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자신의 가족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오긴 했지만 가나안을 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당에서 삽니다. 그러나 이곳은 영원한 땅이 아닙니다. 애굽과 같은 곳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당, 영원한 땅,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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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센 땅은 목초지입니다. 야곱은 요셉으로 하여금 그의 가족들을 '고센' 땅으로 인도하게 합니다.
당시 요셉의 권세나 지위로 보면, 가장 살기 좋은 곳, 즉 도시로서 발달 된 곳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센'은 오지나 다름없는 달동네로 봐야 합니다. 왜 요셉은 그러한 선택을 하였는가?
소를 신성시하는 애굽 사람들에게 목축업은 가증이 여기는 대상입니다. 야곱은 애굽 사람들이 천히 여길 것을 알면서도 목축이 없이라고 하면서 고센 땅을 택하게 됩니다.
달리생각하면, '고센'은 애굽의 세상 문화를 피하고 구별되어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지지켜 살아갈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 되는 땅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증이 여기는 곳, 남들이 보기에 초라하고 모두가 싫어하는 곳이 야곱, 후에 이스라엘 대민족이 되는 첫 정착지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요셉, 그리고 야곱의 가족은 믿음의 눈으로 보며 세상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살아가려 할 대 고센 땅보다 더 좋은 땅은 없습니다.
나아가 이들은 왕궁의 가축을 돌보는 일도 하게 됩니다. 일의 몫을 취하면서 말입니다.
창 46:7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비와 형들로 거하게 하되 고센 당에 그들로 거하게 하고 그들 중에 능한 자가 있는 줄을 알거든 그들로 나의 짐승을 주관하게 하라"
고센 땅은 좋은 땅입니다. 창47:17 "요셉이 바로의 명대로 그 아비와 형들에게 거할 곳을 좋은 땅 라암세스를 그들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고"
고센의 다른 이름은 라암세스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탈출을 하려 할 때 이곳을 출발 지점으로 하여 이루어집니다(출12:37, 민33:4, 5).
믿음의 사람에게 좋은 땅은 외적 환경이 좋은 땅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의 방법으로 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업신여긴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곳이 좋은 땅입니다.
Saturday, March 24, 2012
주일설교 - 창세기 3장 6-13, 22-24 <돌아올 수 없는 길, 그러나 십자가로 환하게 열려있는 길>
설교본문 : 창세기 3장 6-13, 22-24
설교제목 : 돌아올 수 없는 길, 그러나 십자가로 환하게 열려있는 길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참고말씀 - 로마서 6:15-23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요한1서 2:16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한1서 3:4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설교문
오늘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마음을 빼앗는 것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정하기 힘들 정도로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면서 새로운 것들이 우리의 눈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죄라는 것은 눈을 빼앗길 때 찾아옵니다. 아무리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잘 하고 있어도 눈을 빼앗기면 바로 죄가 동물적 감각으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본능적으로 찾아옵니다.
2.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것을 다 괜찮은데, “그것만은 안 된다. 바로 동산 중앙에 있는 그 나무만은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났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고 하와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동산 중앙의 나무를 따먹을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습니다.
4. 이 시간적 차이를 생각하면 우리에게 신앙적 유익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감동은, 말씀의 감동은 한 번이면 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에 얼마큼의 시간적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사실 하나는 “한 번의 은혜로 우리는 평생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기 한 번 맛보았기 때문에, “이젠 앞으로 나는 결코 죄에 넘어지지 않을거야”, “나는 하나님을 결코 배반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5. 우리가 지난 주 2012 유스밴쿠버 코스타를 통해서 받은 은혜가 많습니다. 저도 새로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받은 감동은 잔잔하게 아주 오랜 시간동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은혜가 나의 믿음을 영원히 지켜주지는 않습니다.
6. 아담과 하와도 감동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창조물을 보고, 그리고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큰 기쁨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7.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넘어졌습니다. 그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은혜의 자리로 늘 나아가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예배의 자리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자리입니다. 기도의 자리입니다. 영적인 교제가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자리에 담대히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가 받은 은혜의 감동은 사그라져 버리고, 죄에 무너져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8. 우리가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지 않을 때, 죄가 그 은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9. 죄는 어떻게 은혜의 자리를 차지할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세상의 첫 범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가 은혜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을 잘 막고 관리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10.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11. 아담이 창조된 후, 그리고 하와와 함께 에덴동산에 생활은 행복했습니다. 너무나 기쁨과 감사가 넘쳐 흐렀습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열매를 볼 때 그 열매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보이게 되었습니다.
12. 우리의 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갑자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보이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질 때 죄는 시작됩니다. 내가 지금 은혜의 자리에 있지 않으면 바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는 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부모님께 반항하는 것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때 죄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 욕을 섞어서 하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게 될 때 그 때에 죄가 시작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흉을 보는 것인 전혀 낯설지 않게 될 때..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게 될 때,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하게 될 때, 바로 그 때 죄악이 은혜의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13. 또 하나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는” 죄가 언제 시작됩니까?
바로 죄에 대해 무감각하게 되어 질 때 죄가 시작됩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1절 말씀을 보면,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안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축복의 땅, 가나안을 앞에 놓고서 모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그 땅을 얻게 될 때, 모든 것이 풍족하게 될 때, 더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도 살 것 같은 세상이 될 때, 교만하여서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4절은 “여호와를 잊어버릴까”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교만하게 되며, 죄의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무지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죄가 대신 자라잡게 됩니다.
14. 오늘날 여러분은 죄의 기준을 어디에 둡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여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죄의 기준을 둡니까?
15.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을 따 먹는 것은 죄가 아닐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 너무 굶어 배고 고픕니다. 도저히 다른 나무에 가서 열매를 따먹을 수 없습니다. 힘도 없고, 너무 멀어서 갈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바로 눈 앞에 “그 나무”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인데, 이걸 좀 먹은 듯 뭐가 문제입니까?
사람이 죽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그래서 따 먹었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이게 바로 세상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 아니라, 상황이 먼저입니다. 인간 중심입니다.
(공리주의, 자유시장주의)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죄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본 것들이 기준이 될 것이며, 경험한 것들이 기준이 될 것이며, 다수가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충청도 이발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외국인이 충청도에 가서 이발소에 들렸습니다. 이발소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는데, 충성도 이발사가 “왔씨요?”하고 인사를 합니다. 외국 사람은 이 말을 “What see you?"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 보이는 것이 거울이기에 이발사가 영어를 잘 하는 줄 알고 ”mirror"라고 영어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발사는 이 말을 듣고는 외국사람 머리를 그대로 빡빡 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이를 어쩐대유”
이 무지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무지하면 당합니다. 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면 죄의 공격을 폭풍으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지는 교만의 다른 이름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 먹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상태일 수 있는데, 그까지 그것 좀 먹었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면 “그게 무슨 죄가 되겠어요?” “그건 죄가 아니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죄인데”
죄의 자리에서 벗어나기 원한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벗어나기 바랍니다. 그럴 때 은혜의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16. 무감각한 죄에서 벗어납시다. 죄의 기준을 성경에 맞추어 살아갑시다.
갑자기 죄악들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지금 그렇다면, 죄에 대한 무감각한 상태라는 것은 기억하십시오.
17. 그렇다면, 우리가 범죄 한 후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죄를 줄여 나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완전히 짓지 않을 수 없지만, 범죄 한 후에 우리는 그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7절 말씀에 더욱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죄의 상태는?)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져 어떻게 되었습니까? “벗은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벗어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벗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였는데, 지금 죄가 들어온 후에 눈이 밝아져 창조 질서에서 벗어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졌지만, 그래서 새로운 세계를 보았지만. 그로 인해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죄의 상태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가지 말아야 할 죄의 자리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있는 상태를 가리켜 신학자들은 죄에 눈 뜬 상태라고 말합니다.
18.이렇게 이미 죄를 범한 상태에 이르렀다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쭉우욱 죄의 상태로 계속 나아가야 할까요? 우리의 질문은 여기서 다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죄에 눈을 떠버린 후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범죄한 것을 인정하십시오. 죄인임을 인정하십시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누구 앞에서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았을까요? 서로에게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 “자기들이 벗을 줄” 알게 되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벗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자신이 서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에서 회복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의 자리에서 회복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코스타 말씀 중에 둘째날 성현경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기억하시겠지요.
회개가 무엇이라고요? 나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범죄한 순간에 “내가 범죄한 줄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을 인정할 때 회복 하게 됩니다.
범죄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회개이며 회복입니다.
19. 죄악의 순간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9절 말씀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코스타에서 성현경 목사님은 이 부분을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기억하는 친구? 있어요?부모님과 비유해서 말씀하셨지요?
집에서 가장 좋은 도자기, 수억 가는 도자기를 깨뜨렸을 때 부모님을 어떻게 말합니까?
“이 놈의 자식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느냐?”라고 말씀하신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신다고요.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Where are you”
무슨 행동을 했는지 질타하지 않으시고, 지금 너는 어디에 있느냐?하고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0.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의 속성을 한 가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범죄 하기 전에도, 우리가 범죄 한 후에도 우리를 향한 여전한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관계를 계속 맺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한결 같습니다.
혹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범죄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하며 찾고 계십니다.
21. 우리는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24절에서 보듯이, 돌아갈 수 없도록 에덴동산을 지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범죄 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번 엎어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습니다. 다시 담아서도 안됩니다. 결코 먹을 수 없는 물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다시 돌아가서도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22. 전혀 새로운 길을 갈아야 합니다. 익숙한 길은 아닙니다. 낯선 길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죄에 따른 벌은 주시되 삶은 그냥 에덴동산에서 살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럼 얼마나 좋겠습니까?
익숙하고, 잘 알고, 어디에 무엇이 있고, 선악을 알게 하는 중앙에 있는 그 나무를 결코 먹어서는 안되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에덴동산으로 다시 아담과 하와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23.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좇아내신 사건이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믿음의 길은 익숙하며 아무런 고통과 고난이 없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전혀 새로운 길입니다. 그렇게 가야 하는 합니다. 이를 가리켜 십자가의 길입니다.
24. 그러나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여전히 관계를 맺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나라”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길을 주셨고, 성령님을 통해서 함께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동반자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5. 죄의 자리에서 벗어나 은혜의 자리로 회복하기를 원하신다면?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신 예수님이 개척하신 십자가의 길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나와 동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를 향해 손을 내밀어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럴 때 회복하게 되며, 은혜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26. 오늘 말씀, 6-7절, 21절, 24절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보임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다는 것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죄가 시작되었다고 사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죄를 끊어버리면 괜찮습니다. 왜 이러한 죄가 시작되었다는 사인이 나의 영적인 상태에서 느끼게 되는가하면 그것은 내가 지금 은혜의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내가 은혜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이러한 상태에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시라도 방심하고 은혜의 자리에 있지 않으면 죄의 시작되는 상태가 시작될 수 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는 죄에 대해 무감각할 때에도 죄가 시작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알기에 힘쓸 때 죄를 멀리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두려워한 것은 여호와를 잊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범할까? 범죄 할까?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호와를 잊어버릴까를 두려워하며 염려했습니다.
무지에서 벗어납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야 죄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 다시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죄의 고백보다 더 우선시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을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죄를 범한 후에도 여전히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찾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시다. 그 길은 결코 익숙한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낯설고 수많은 고통과 고난의 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맙시다. 그 길은 예수님이 주신 길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함께 하는 길입니다.
죄의 자리에 넘어질지라도 은혜의 자리로 다시금 걸어 나아가기를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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