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October 31, 2011

한 날 묵상 - 창 21:8-21 <난 1%이다. 그렇다면 품어야할 99%가 있다>

한 날 묵상 - 창 21:8-21 <난 1%이다. 그렇다면 품어야할 99%가 있다>

 갑자기 요즘 유행하는 1%와 99%가 생각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힘 있는 사람의 전행인가요? 아니면, 법적인 테투리 안에서 합법적인 행위인가요?
 그리스도인인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만의 리그를 결코 아닙니다.
 우리안에는 믿음의 언약으로, 약속의 말씀으로, 그 어떠한 것도 그 울타리를 넘어 올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정보공유 라이선스 2.0:영리금지] 

 그러나 우리 밖의 사람들에게는 나의 전부를 나누는 온전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들을 믿음의 울타리로 결코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사랑뿐입니다.

 99%를 사랑으로 품는 한 날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도 아들인데, 근심할 수 밖에 없겠죠?
  근심하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노릇 잘못하고 있는 것이 맞겠죠?


8절 한 쪽은 "큰 잔치를 베풀고"

9절 한 쪽은 이삭을 놀리고
                    10절 사라가 아브라함을 압박하는 군요!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11절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13절 하나님의 명쾌한 해석 "근심하지 말라"
  12절 사라에게는 이삭을 통해 약속의 말씀으로 해석하시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절 여종에게는 이스마엘을 통해 사랑으로 말씀을 해석하시다.
          "여정의 아들도 네 씨니"
     14절 아브라함의 부정속에 묻어 나오는 사랑의 행진
          "아침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15-21절 하나님과 여종의 대화. 사람을 살리시는 사랑의 하모니.
         17절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안에 구속의 은혜를 허락해 두셨습니다. 그 안에 머물러야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게 약속있는 계명입니다.
     그렇다면, 그 공동체안에 머물러 있지 않는 사람들을 나 몰라라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에게는 우리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주셨던 그 아가페 사랑을 그들에게 우리도 나누어야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안에는 약속으로 하나가 됩니다.
      믿음의 공동체밖에는 오직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Saturday, October 29, 2011

한 날 묵상 - 창 21:1-7 <우리가 웃을 수 있게 된 이유를 아십니까?>

한 날 묵상 - 창 21:1-7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고 아브라함은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


 우리에게 웃음이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돌보시고, 행하시고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며, 나아가 아브라함이 명령하신 말씀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행하시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행할 때 웃음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웃으십시요. 웃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웃음을 묻어두지 마십시오.

1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 행하셨으므로"
2절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 되어 ... 아들을 낳으니"
 ->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돌보시고, 행하십니다. 또한 말씀하신 그 때에 정확히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4절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 우리도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홍수 후 인간을 기억하시고 길을 여셨습니다(참고-http://saltandlight21.blogspot.com/2011/08/8-1-5.html).
      우리도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기억하고 그대로 행할 때 그 인생이 복된 인생입니다.
      세상의 물질, 부요를 기억하고 좇아가는 낭비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있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6절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 하나님이 말씀대로 행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행할 때, 그곳을 꽃피우는 아름다움은 바로 웃음입니다. 기쁨입니다. 희락입니다. 하하호호! 웃는 웃음이 넘쳐 흐릅니다.
      모두가 다 웃을 수 있는 그 세상, 웃음이 가득한 세상을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함께 그리셨습니다.
      우리도 그 웃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언제나 웃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아니 날마다 순간마다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늘의 격언) 모두가 웃음이 있는 세상, 이렇게 시작되었군요!

Friday, October 28, 2011

한 날 묵상 - 창 20:1-18절 <잦은 거짓 입술이 사명을 잃게합니다>

한 날 묵상 - 창 20:1-18절 <잦은 거짓 입술이 사명을 잃게합니다>


순간의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서 거짓된 입술이 삶을 인도할 때 어려움을 자초하게 됩니다. 정직한 입술을 주시어 주님과 동행하는 한 날 되기 원합니다.

1. 작은 것부터 지키라.
2절"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작은 거짓이 시초가 되다. 일상에 사소하게 일어날 수 있는, 그러나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합니다.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때로는 겉잡을 수 없는 큰 파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쉽게 하는 죄악은 거짓말의 영입니다.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순간의 정직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큰 거짓말이 아닙니다.
큰 거짓말은 하지 않기 쉽습니다만, 작은 거짓말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거룩한 영성이 내 몸에 베여있지 않으면, 순간의 거짓말을 피하기 어렵나 봅니다.

작은 것까지 스며든 영성이야 우리를 더욱 거룩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큰 것을 잘하려고 하지 말고, 작은 것부터 잘 실천하는 거룩한 영성을 소유하였으면 합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없이 행동한 아브라함.
 2절"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어디에도 없는 하나님. 어디서 그 분을 찾아야 하는가?
  큰 일이 있을 때에만 찾아야 하나?
  큰 문제를 만났을 때에만 찾아야 하나?

3. 하나님은 자녀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거룩하게 되기를 지키십니다.
 3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하나님은 더욱 우리의 거룩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4. 축복을 빌어주는 자. 복의 근원의 삶을 살아가다. 
 7절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축복을 빌어주는 삶은 너무나 아름답다. 다른 사람을 위해 복을 빌는 것보다 더욱 아름다운 사역이 어디 있으리...
 복을 빌되, 마음껏 빌어주라. 기도하되 마음 껏 기도하라. 위로하되 충만히 위로하라.

한 날묵상이었습니다.


------------------------
1절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릴에 거류하며"

7절 아브라함은 축복을 빌어주는 사람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11절 스스로 판단하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17절 결국은 축복을 빌라. 기도는 위로의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Thursday, October 27, 2011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녀 교육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녀 교육

자녀들과 대화할 때 하나님을 대화에 포함시키라.
"하나님은 듣고 계신다."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실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교육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 날 묵상 - 창 19:23-38 <아브라함을 생각하시다 롯을 구하신 하나님>

한 날 묵상 - 창 19:23-38 <아브라함을 생각하시다 롯을 구하신 하나님>
 나에겐 소명이 있다. 세상에 구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시니 롯을 구하셨다. 오늘 한 날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시다, 함께 생각하실 한 사람을 마음에 품고 사랑의 손길을 펼치기 원한다.

23절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24-28절 소알의 심판, 롯의 아내,
 -> 새로운 한 날은 여전히 시작됩니다. 그 날이 심판의 날이라 할지라도 그 날은 옵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한 날 한 날은 주어집니다. 그 한 날이 어떤 날이 되느냐는 바로 나의 몫입니다. 심판의 날이 될지! 아님 축복의 날이 될지! 그건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 피신 간 사람들이 있으며, 멈춰선 사람이 있습니다. 난, 산 사람? 멈춰버린 사람?

29절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 보내셨더라"
  ->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실 때, 하나님은 나를 통해 누구를 기억하실까?
      아브라함은 생각할 때 롯을 기억하신 하나님이시다.        

 30-38절 - 시대에 편만한 악한 생활을 보다.
  30절 "롯이 소알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하여"
    -> 무엇 때문에 두려워했을까? 이러한 두려움은 어디서 오고,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
    -> 스스로 자신을 볼 때 오는 두려움이 아닐까?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을 볼 때에도 두려움이 올까? 그렇지 않겠지. 하나님 없이 자신을 보니 두렵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나를 볼 때 어떤 눈으로 볼까?
         타락해서 변질 된 나의 상태에서 나를 보면 변질된 나 밖에 볼 수 없다.
         회복된 영으로 나를 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를 볼 때 나를 온전히 볼 수 있다.
   31-38절-

Monday, October 24, 2011

가라지는 추수때까지 내버려 두세요!

가을 추수 때 콩찌기를 도왔다. 


아직 익지 않은 것과 가라지를 구별하여 추수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만 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콩찌기 할 때 머리를 스친 생각은 "마지막때에 추수하자. 


지금이 추수할 때이다.가라지는 추수때까지 내버려 두세요!".




http://saltandlight21.blogspot.com/2011/12/blog-post_09.html


부흥과 개혁의 때일수록 모조품을 경계하라

소위 성령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몇몇 사람들이 심각한 실수들을 범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였다고 해서, 그 사역 전체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몇몇 가짜들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참되지 않다는 논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모조품들이 생기는 것은 개혁의 시기에 항상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들여다보면, 커다란 종교의 부흥 치고 많은 모조품들이 등장하지 않은 경우는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시대를 보면 이러한 종류, 즉 지독한 이단과 비열한 행동에 빠진 사람들의 사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당시에 있었던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성도들로부터 뛰쳐 나갈 때까지, 참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형제들로, 성도들의 한 부분으로 잠시 동안 받아들여졌으며, 그들과 다르다고 의심받지 않았습니다(요일 2:19).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교사들과 직분자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주신 몇몇 사람들 가운데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6장의 시작 부분에 나옵니다. 유다가 이러한 예입니다.

유다는 열두 사도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치욕스러운 행동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발각되거나 의심받는 일이 없이 참된 경험을 한 제자들과 한 무리가 되어 오랫동안 계속 연합하였으며, 친밀하게 대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부터도 모든 외적인 일들에 있어서 참된 제자인 것처럼 대우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그에게 사도의 지위를 수여해 주셨으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하셨고,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들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알고 계셨지만, 그 당시에는 전지(全知)하신 심판자와 마음의 감찰자로서의 신분으로 옷 입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시적 교회의 수종자로서의 직임을 수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아버지의 수종자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자신의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그를 배척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가시적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과 다스리는 자들에게 하나의 모범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즉 그들이 교회를 운영할 때에는 마음의 감찰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말고, 보이는 것과 공개된 것을 통하여 하도록 말입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중에도 배교자가 생길 수 있다

한동안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되었던 몇몇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특출하게 충만하다고 여겨졌던 몇몇 사람들 중에 그러한 배교자들이 있었던 예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던 니골라가 그 한 예입니다.

그는 성령의 비상한 부으심이 있던 그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로 많은 그리스도인의 무리 중에서 집사의 직분에 선출되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 3절부터 5절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배반하여 야비한 행동을 하는 일단의 비열한 이단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부터 니골라당이라는 파당의 이름이 나왔습니다(계 2:6, 15).

종교개혁 시대에도 배반자가 있었습니다. 교황 정치 때부터 종교개혁의 때까지, 잠시 동안 종교개혁자들과 연합한 것처럼 보였다가 배반하여 가장 야비하고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르고 혐오스러운 행동을 한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부흥 시대에도 배반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위대한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종교가 부흥할 때에, 한동안 거기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떨어져 나가서, 기괴하고 엉뚱한 잘못들과 심한 열광주의에 빠져, 높은 영성과 완전함을 이루었다고 자랑하며, 다른 이들을 육적이라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사도 시대에 영지주의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여러 재세례파 분파들이 그러했습니다. 이것은 안토니 버제스(Anthony Burgess)가 <영적인 강화>(Spiritual Refining) 제1부, 설교 23쪽과 132쪽에서 진술한 것과 같습니다.

“최초의 훌륭한 종교 개혁가들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도구들은 여기서 쓰라린 갈등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형식주의자들과 전통적인 교황주의자들에게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 편으로는 종교개혁자들보다 더욱 계몽되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렸다. 그들은 성경을 고수하며 성경을 근거로 계시들을 검증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문자주의자’(Literists and Vowelists)로 불렀다. 성경의 단어들과 모음들에는 정통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을 가지지 못한 자들로 보았다.

어떤 도시에서든 복음의 참된 교리들이 교황제도를 막 본격적으로 바꾸어 놓으려고 하면, 곧장 그러한 견해들이 일어났다. 마치 좋은 곡식 가운데 가라지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커다란 분열이 일어났고, 종교개혁은 세상 사람들에게 혐오스럽고 증오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벌레들과 뱀들에게 열기와 온기를 주어서 땅 속에서 기어 나오게 한 것과 같았다. 그들은 루터를 매도하였고, 루터가 단지 육적인 복음만 보급시켰다고 말하였다.”
그러한 거친 열광주의자들의 몇몇 지도자들은 잠시 동안 최초의 종교개혁가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고, 특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청교도 시대에도 배반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찰스 1세 때와 공위(空位) 기간에 올리버 크롬웰 때 생명 있는 종교가 매우 우세하였는데, 그 때 그러한 일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뉴잉글랜드 초기 가장 순수했던 시기에, 경건이 넘쳤을 때, 그와 같은 일들이 발발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그러한 가라지를 뿌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참된 역사가 영광스럽게 수행되고 있지 않다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Sunday, October 23, 2011

한 날 묵상 - 창 19:18-22 <롯에 있었던 것은? 나에게 없는 것은?>

롯의 자세 and 은혜받을 자의 자세

18절"내 주여 그리마옵소서"
  주인 삶은 자세...

19절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 과거, 현재, 미래에 은혜 베푸실 분으로...
  낮은 자세....

디테일...
20절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구체적으로 은혜를 구하는 자세
  -> 급할 수록 담대하게 구하라! 작은 것이라도 구하라!

은혜 구한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보라!
21절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응답 "내가 이 일에 네 소원을 들었은즉"
  -> 들으시는 하나님. 말씀하시는 하나님. 약속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의 역사는 여백을 찾는 자에게 임한다.

22절 약속을 지키시는 주님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신다네.
 
그런데,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 문제인가?
주인 삼지 않았나?
낮은 겸손의 마음이 없었나?
구체적이지도 않고, 담대하지 않고, 작은 것이라고 구하지도 않았나?

무엇인가? 나에게 부족한 한 가지(?)는?
오늘 한 날 롯을 통해 내 자신을 보기 원한다.

------------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다. 또한 누구에게 강점도 있다. 롯은 약점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강점을 살려 그걸 더욱 돋보이게 했다. 주님을 주인삼기, 낮은 자세, 구체적으로 기도하기.
--------------

Thursday, October 20, 2011

한 날 묵상 - 창 19:12-17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은 사람들 심판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심판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도와주신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귀를 기울이라>

한 날 묵상 - 창 19:12-17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은 사람들 심판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심판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도와주신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귀를 기울이라>

12-14절 하나님의 말씀을 임하였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지 않은 인간들

   13절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14절 하나님의 심판에 농담으로 알아들은 사람들.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 흡사, 노아 시대랑 비슷하다.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 악한 모습의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수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또한 반복된다.

15-17절 롯이 소돔에서 천사들에의해 이끌려 나옴.
   17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크고 놀랍니다.
  노아 방주에서 사람들이 방주에 들어가자, 친히 닫으시고 비가 내리는 심판을 햄하심.
  소돔의멸망에서도 하나님은 롯이 소돔성을 빠져나갈 때에 친히 이끌고 나가심. 또한 밖으로 빠져 나가기를 기다리심. 그리고 나서 심판을 하심
   => 하나님은 내가 악에서 빠져 나갈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시고, 도와주시고, 이끌어주신다. 그리고 그 악에서 떠나고 나서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기서 핵심은 기다림, 이끌어주심 그리고 도와주심이다.

 

Monday, October 17, 2011

한 날 묵상 - 창 19:1-11 <이생의 안목은 벗어버리고, 영적인 안목을 가져라!>

한 날 묵상 - 창 19:1-11 <이생의 안목은 벗어버리고, 영적인 안목을 가져라!>

1절 "날이 저물 때에"

 1-3절 롯의 환대.
       왜 롯이 성문에 앉아있었는가? 매일 앉았있었는가? 아님 특별하게 그 때만 그랬는가?
      돌이키기를 간청하는 롯.

 4-11절 소돔 사람의 악행.
    9절 롯은 소돔성에서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외로운 인생이었다. 그 인생에 유일한 위로는 주님과 함께 함이었다. 그랬기에 1-3절 롯는 천사를 환대할 수 있었다.
    9절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 세상의 정의로 살아가라. 말의 권위가 아닌, 행함의 정의로 권위를 앞세우라. 정의의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정의의 행함을 일상화하는 삶을 살아라.
    -> 세상의 성적 타락을 그리스도인들이 닮아가서는 안된다.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옛날 이나 지금이나 성적인 문제는 항상 있어 왔다. 조심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

    10-11절 천사들이 소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함.
    -> 세상에 어두워지고, 영적으로는 밝아지기 원한다. 세상의 일에는 어두운 사람이 되고, 영적으로는 밝은 사람이 되어라!

Saturday, October 15, 2011

한 날 묵상 - 창 18:16-33

 한 날 묵상 - 창 18:16-33 <과연 ... 알려 하노라>

17절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 왜 이 말을 했을까?

  18절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 아니냐"
  19절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20절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21절 감찰하시는 여호와.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 소돔 심판을 통해서 본 세 가지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 하신다. 21절
    과연... 그런지 알려 하신다. 과연 .. 그런지 보려 하신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감찰의 목적은 분명하다. 약속의 말씀을 위해서, 우리의 거룩을 위해서이다.
둘째,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 가시려 하신다.
셋째, 악함을 그대로 두시 않으시는 하나님. 그렇지만,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자녀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한 날 주님 앞에 나의 작은 것까지 거룩함으로, 온전함으로 내어드리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피시고 계십니다. 작은 것부터 악에서 떠나기 원합니다. 작은 것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 전부가 무너지고 있음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인간의 착각과 외마디 외침
23절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4절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25절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Friday, October 14, 2011

한 날 묵상 - 창 18:9-15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한 날 묵상 - 창 18:9-15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히브리서 13:1-2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9절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10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2절 "사라가 속으로 웃고"
         ->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가 어찌 낙이 있으리요"
        => 자녀를 얻는 것은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인생의 낙이다. 사라가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14절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15절 "사라가 두려워서 .. 가로되 ..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 가라사대 ..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기는 쉽지 않다. 아니 두렵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능치 못할 일을 기대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을 때 부러움과 시기한다. 그러나 나에게 그런 은혜를 주실 때 우리는 믿음으로 받지 못하고 두려워 한다.

 축복을 비웃는 어릭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식을 넘는 축복을 받을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아무나 받지 못하지만, 또한 아무나 받을 수 있다. 비로 이게 믿음의 능력이다.

Thursday, October 13, 2011

한 날 묵상 - 창 18:1-8 <눈을 들어 섬길 사람을 찾으라>

한 날 묵상 - 창 18:1-8 <눈을 들어 섬길 사람을 찾으라>


히브리서 13:1-2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아브라함은 낯선 사람

1절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2절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2절 그가 보자 곧 ...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 즉시로 하라. 몸으로 섬기라
     눈을 들었다는 의미는 자신만을 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자신안에 갇혀, 자신의 일만에 빠져 분주함에서 일어나길 원한다.    

3절 가로되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 관계에 주목하라.

    4절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 쉬소서"
   => 쉼을 허락하라.

    5절 "내가 떡을 조금 가져 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할하게 하소서"
   => 즐겁게 해 드려라. 영적, 육적 회복을 도우라.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사람 셋을 보았다.
그리고 즉시로 섬기기 시작했다.
몸으로 섬기고
은혜입은 자로 여겼고
쉼을 허락하였다.
즐겁게 해 드리며 영적 육적 회복을 위한 섬김이었다.
나아가,
길을 갈 수 있도록 실질적 도움을 주었다.

나도 오늘 그런 섬김을 하기 원한다.

Tuesday, October 11, 2011

한 날 묵상 – 창 17:9-27 <거룩과 구별을 위한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됩니다. 마음에 할례는 내 살에 악한 것을 막는 방패입니다.>

한 날 묵상 17:9-27 <거룩과 구별을 위한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됩니다. 마음에 할례는 내 살에 악한 것을 막는 방패입니다.>
 
9하나님이 또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은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3절 할례의 이유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마음의 할례가 왜 중요한가?마음의 할례를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언약이 살이 되어 있다(13)
언약을 지키지 않을 때 끊어지게 되리라(14)
 
 
@ 할례 언약의 확장성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자손에게로
그리고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결국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신약에서는 마음의 할례를 하라.
 
15-16열국의 어미사래-> 사라
 
17-22
아브라함의 심중의 웃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고하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아브라함이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더 배우는 일이 됨.
12:2
13:14-17
15:2-8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없고 자신이 행동으로 일을 처리하려 함.
 
 
23-27절 남자의 할례
24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구십 구세이었고
-> 아브라함은 양피를 벤 후 212-3절에서 이삭을 낳게 되었다

한 날 묵상 – 창 17:1-8 <친밀함속으로...>

한 날 묵상 17:1-8 <친밀함속으로...>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1)
86세 때 이스마엘을 낳고 13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시간 또한 인내하며 소망하며 보낸 시간입니다.
 
다시 나타나셔 주신 말씀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
믿음의 완전함을 요구하시는 군요!
 
새로운 언약을 세우심(3-7)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4-5)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6)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계속되는 너와 나와의 관계.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친밀성을 보게 된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성을 보게 된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동반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그만큼 친밀하십니까?
그만큼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그만큼 그 분과 동반자이십니까?
 
 

Saturday, October 8, 2011

한 날 묵상 – 창 16:1-16 <누구의 음성이든 들으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귀가 필요하다.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더욱 그 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 과정 또한 하나님의 손에 있어야 한다.>

한 날 묵상 16:1-16 <누구의 음성이든 들으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귀가 필요하다.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더욱 그 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 과정 또한 하나님의 손에 있어야 한다.>
 
1절 한 여종 하갈
2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 수년 후이었더라
십 수년 동안 여전히 계속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때 아내가 사갈을 취하라 말하고, 그 말을 아브람은 듣게 된다.
인고의 시간이었다. 괴로움의 시간이었다. 수치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참고 기다렸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더디게 일어날 때,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의 생각을 앞세워야 하는가?
참고 기다려야 하는가?
아무리 좋은 인간적인 생각도 그 자체로 그건 인간적인 생각이다.
두 아내의 싸움(5-6)
인간들만의 생각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킨다.
사래의 질투심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만남(7)
여호와의 사자가(8)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질서를 말씀하시는 하나님. 순종을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스마엘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11) - 들으시는 하나님. 차별 없으시다(??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13)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옵고”(13)
 
아브람이 팔십 육세이었더라”(16)

한 날 묵상 – 창 15:12-20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께 있다. 그길을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한 날 묵상 15:12-20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께 있다. 그길을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약속의 말씀만이 아니라, 우리의 길도 그 분께 맡기라.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약속의 말씀이후 바로 종살이에 대해서 말씀하심(12-14)
12해질 때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해질 녘, 캄캄함이 임하니 두렵다. 인간의 인생을 묘사하고 있다.
노년을 이길 힘은 무엇인가? 인생의 황혼이 깃들 때 우리를 일으키는 힘은 무엇일까?
두려움이 물러날 힘은 무엇인가? 그 힘은 어디서 와야 진정한 힘이 있는가?
1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 그들을 섬기겠고
사 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평안히 조상에에게로 돌아가 장사가 될 것이요
15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 하나님의 애굽 포로 사백년을 향한 두 가지 계획
1) 환난 가운데 주를 바라보는 훈련을 하라. 주님께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게 됨. 스스로 하나님임을 가르치는 전 과정을 이해하게 되다.
2) 아직 아모리 족속의 죄악의 관영(가득차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함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시는 하나님.
17해가 져서 어둘 때에
18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땅이니라 하셨더라
 
보다 구체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구체적으로 시각적 설명을 하시고(, 모래)
구체적으로 시간적 설명을 주시고(400년 종살이)
구체적으로 약속의 말씀을 설명해주시고(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구체적으로 장소적 설명을 주시고(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 땅이니라 하셨더라.21)
 
 

한 날 묵상 – 창 15:1-11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다르다.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라! 그 때 나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한 날 묵상 15:1-11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다르다.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라! 그 때 나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 내가 누구를 좋게 하랴?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 임하여(1)
아브람아 두려워 마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2-3)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리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전적인 신뢰를 배워가는 과정이다. - 개인의 생각을 내려놓은 훈련의 시간이다.
 
하나님의 다시 한 번 말씀하심과 아브람의 믿음(4-6)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아브람의 믿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언약의 징표(7-11)
 
*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의롭게 여김은 여호와를 믿는 믿음 때문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해가는 훈련을 통해서 온전한 믿음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우리에게도 전적인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법을 배워갈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는 훈련에 길에 들어서기를 원한다.


* 누구를 좋게 하랴(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