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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October 2, 2013

한 날 묵상 - 막6:14-29 <헤롯과 세례요한의 죽음으로부터 보는 최악의 죄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여러번의 기회>

한 날 묵상 - 막6:14-29 <헤롯과 세례요한의 죽음으로부터 보는 최악의 죄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여러번의 기회>

 최악의 죄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몇 번의 기회, 분명히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최악의 수를 둠으로서 세례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헤롯의 어리석음을 통해 예수님과 나와의 믿음의 건강함을 점검해보자.

1. 내가 지금 죄가운데 있는지에 대한 체크는 내 안에 얼마나 예수님은 드러나고 나는 죽는지를 점검해보면 알 수 있다.

2. 죄많은 사람들의 특징은 예수님이 드러나면 날수록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3. 예수님은 빛이시다. 당연지사 어둠은 빛이 몰려오면 물러나게 되어 있다. 빛과 어둠의 법칙은 이렇게 자연스러운데, 어두운 인간들은 빛되신 예수님이 드러나면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고 자연의 순리를 거스리는게 문제가 된다.

4. 이러한 순간에 자연의 법칙처럼 빛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며, 먹이시고 입히시는 그 분의 은혜를 누릴 수 있으련만 말이다.

5.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점점 더 드러나시니 죄악된 본성을 서스럼없이 드러내는 한 삶을 만나게 된다.

6. 그의 문제는 권력과 재물등 너무 많은 것들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 자신은 왕이었다. 그래서 말만 하면 모든 것을 전부 다 가질 수 있고, 할 수 있어, 심지어 남은 것도 빼앗을 수 있었다.

7. 그런데 자신의 이러한 절대권력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권력앞에 무력함속에서 궁핍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예수님의 영향력이 점점 더 자신의 권력보다 커져가는 것을 느끼게 될 때 그는 더 이상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바로 헤롯이다.
 14절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8. 예수님이 드러날 때 사람들의 죄악은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9.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죄악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지 않고는 결코 자유함을 누릴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면, 그게 은혜이다.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다. 이 때를 거부하지 말자. 감사함으로 자신의 전부를 도려내는 아픔이 있다할지라도 빛을 받아들이자.

10. 그런데 헤롯은 그렇지 하지 않았다. 첫번째 기회를 차버린 것이다.
 14절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11. 헤롯은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했다. 자신의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는지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

12. 전에 그는 예수님을 선포하는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복음을 전하는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복음이신 예수님이 드러나자 중대한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13. 지금 헤롯에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자신의 죄악을 보고 예수님께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그는 결코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14. 예수님은 첫번째 기회를 놓친 사람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신다. 그들 곁에 항상 계신다. 그래서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이 때를 놓치지 말자. 나를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을 외면하지 말자. 내 영적인 상태, 나의 내면의 상태를 정확히 보기만 해도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다. 이러한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교만함을 버리는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15. 그런데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자신의 치부가 들어나는 것에 분노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숨겨진 죄가 드러날 때 용서함을 구해야 하는데, 반대로 사람들은 분노하게 된다.

16. 헤롯은 지금 분노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지 못해 분노하면서 자신의 분노를 잘못된 행동으로 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치부를 더욱 집중하는 것이다. 헤롯은 자신의 지나친 권력을 지적 당한 것에 분노하여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과신하게 된다.

17. 22절이다. "레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하고"
  23절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가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하 하거늘"

18. 자신의 권력의 지적당함에 분노하여 시작된 자기 과시는 절정이다.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도저히 다시는 주어 담을 수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19. 자신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는 허영심에 불타서 그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놓일 때 우리는 말조심해야 한다. 말을 조심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올무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말로서 세상의 다 가지려 한다. 말로 세상의 모든 권력을 취하려 한다. 허풍이다(말 조심과 관련된 성경의 말씀을 찾아보라).


20.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소녀가 원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25절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레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21. 세례요한의 목숨이었다. 그리고 왕은 이제 확실히 반응한다. 자신이 아주 큰 잘못을 했음을 깨닫게 된것이다. 26절 "왕이 심히 근심하나"

22. 왕의 근심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래서 심히 근심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 때가 바로 헤롯에게 찾아온 세 번째 기회였다.

23. 이 때를 놓치지 말자. 헤롯을 보면 정말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무슨 죄가운데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헤롯처럼 한 번은 마음의 근심을 하게 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마음속에 찾아온 죄책감을 느끼게 될 때, 돌아가야 한다.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 이 기회를 놓쳐는 절대 안되는 것이다.

24. 자기 과시로부터 나온,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맹세를 한 경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깨달았다면 바로 돌아서야한다.

25. 그러나 헤롯은 이 기회를 놓치고 만다. 26절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거절 했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돌아서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헛던 것에 자존심을 지키려 하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반드시 받게 된다.

28. 사실 헤롯의 문제는 자존감을 스스로 찾아려 하는 것에 있었다. 자신의 권력을 통해 자존심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진정한 자존심은 자존감을 회복할 때 축복이 된다.

29. 인간의 자존감은 어떻게 세워지는가? 예수님의 주신 죄의 용서와 죄의 치유를 통해 인간의 자존감은 회복되는 것이다.

30. 헤롯은 이것을 몰랐다. 자신 스스로 자존심을 세우면 자신의 자존감이 세워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자꾸 죄가 드러날 때 더욱 스스로 자존심을 더욱 강하게 했다.

31. 그러나 아무것도 헤롯은 얻지 못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헤롯 왕의 죽음이 기록되면서 23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행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32. 인간은 벌레에게도 먹혀 죽을 존재이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들지 않으면 가장 비참한 죽음을 당할 수 있는게 인간이다.

33. 헤롯의 권력이 어디서 왔는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의 건강은 누가 주셨는가? 그에게 주어진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전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34. 빛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 감사함으로 그 분을 맞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치부가 들어나고, 자신의 권력이 진정 없어지고, 재산이 없어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좋은 것들이 없어진다 할지라도 빛되신 예수님께 자신의 어두움을 내어드려여 한다.

35. 이럴 때 자신의 자존심은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면 자신이 죽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신의 자존감은 회복되며, 예수님이 드러남으로 시작된 분노로부터 완전한 자유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죄에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36. 이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헤이다. 헤롯이 지금 이러한 은혜를 누릴 수 있었는데, 그에게 몇 번의 기회가 있어는데, 그는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계속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37. 우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찾아오신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본문이 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신 사랑의 말씀이다.
 요한계시록 2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38. 우리 인생가운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최악의 죄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는 이전에 내가 기회를 차버렸다고 해서 다시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다시 옵니다. 오늘 그 기회입니다. 그러나 오늘이 지나면 내일은 우리의 인생에서 어는 보장된 날이 아닙니다.

39. 오늘 지금 이 순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두드림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드려 최악의 죄악으로부터는 벗어나는 은혜가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40.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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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가 드러날 수록 분노하는 사람들
- 중대한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들(눅3:18-20, 20절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결코 자신이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지 못한다.
-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면 자신의 내면을 다시리지 못한다.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지 못하면 지나친 자기 과시를 하게 된다.
- 지나친 자기 과시는 헛된 맹세로 이어지고, 잘못된 맹세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족쇄가 된다.
- 자기 과시로부터 나온,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맹세를 한 경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깨달았다면 바로 돌아서야한다.
- 바로 돌아서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헛던 것에 자존심을 지키려 하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반드시 받게 된다.
- 자존심을 버리면 자신이 죽는 것이 아니라 자존감을 회복하고 예수님이 드러남으로 시작된 분노로부터 완전한 자유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세례요한의 죽음과 헤롯>
===
14절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의 현실
14-16절

세례요한의 죽음과 헤롯 왕
17-29절

감당 못할 맹세를 조심하라.

26절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 맹세가 믿음이나 상식에서 벗어남을 알았을 때 그 때라도 당장 돌아서라.
 -> 자존감을 버리기
 -> 자존감 회복하기

27절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Thursday, July 26, 2012

우리는 하나 '인종 화합"


사도행전 17장 26절 - 성경은 인류 전체가 '한 혈통'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종간의 화해를 이루도록 에너지를 공급하는 원천이다. 특히 창조에 관한 설명은 일종 편견의 중추신경을 밑동에서부터 싹뜩 잘라 버린다.  창조주가 아담을 지으시는 장면은 인종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유대인 학자들이 편집한 성경의 주요 주석서로 첫손에 꼽히는 미슈나는 이렇게 가르친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로 만드신 까닭은 무엇인가? 그래야 아무도 '내 아버지가 그대의 아버지보다 낫다'는 소릴 할 수 없을 것 아니겠는가!"

인종차별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바벨탑 이야기는 교만과 권력욕에 사로집힌 인류의 모습이 등장한다. 하나님은 그 오만함을 벌하시기 위해 "언어를 혼잡하게"하셨다. 인간의 교만과 권력욕으로 인해 인종과 국가가 여럿으로 분리되었고, 서로 갈등하고 미워하게 되었다는 창세기의 설명에는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어느 학자는 이 대목을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수많은 인간 집단으로 쪼개지게 된 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라는 말로 정리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곧바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구원을 약속하시면서 :땅에 사는 모든 민족(mispahah)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에 쓰인'민족'이라는 말은 인간들의 집단이나 민족, 또는 인종을 의미한다. 주님은 인류라는 가족의 연대가 깨어진 걸 안타까워하시고, 인간의 죄와 교만이 빚어 낸 인종차별과 국수주의의 장벽을 허무시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선포하신 것이다.

복음 안에서 인종의 벽이 허물어진다.
 신약성경은 이 주제에 대한 논의를 완결 짓는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을 맞아 한지리에 모여 있던 교회 위에 성령님이 강림하시사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바벨탑에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던 이들이 서로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는데, 오순절에서는 제각기 다른 말을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선포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빠짐없이 이해했다. 예수님의 은혜가 인종차별의 상처를 치유하고도 남는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오순절에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가 모든 언어로 전달됐다는 사실은, 어떤 문화도 '정통'을 주장할 수 없으며, 성령님 안에서 민족과 언어, 문화적인 장벽을 넘어 일치를 이룰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에베소서 2장 11-22절에 따르면, 그 결과 인종과 민족이 '동일한 시민'으로 참여하는 공동체가 탄생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그런 점에서 크리스천은 '새로운 종족'이라고 말한다.

 교회를 통해 인종의 벽을 뛰어넘는 파트너십과 우정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복음 임재와 권능의 증표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은 크리스천들을 익숙한 고향 문화를 등지고 한 번도 밝아 본 적이 없고, 그럴 일도 없는 땅으로 떠났던 아브라함처럼 만든다.

 성경의 마지막 장은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계 5:9; 7:9; 11:9; 14:6)에서 나온 백성이 하나가 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창세기 12장의 약속부터 요한계시록의 성취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인종차별을 맹렬하게 공격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팀 켈러, 두란노, pp.178-183.

Monday, October 24, 2011

가라지는 추수때까지 내버려 두세요!

가을 추수 때 콩찌기를 도왔다. 


아직 익지 않은 것과 가라지를 구별하여 추수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만 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콩찌기 할 때 머리를 스친 생각은 "마지막때에 추수하자. 


지금이 추수할 때이다.가라지는 추수때까지 내버려 두세요!".




http://saltandlight21.blogspot.com/2011/12/blog-post_09.html


부흥과 개혁의 때일수록 모조품을 경계하라

소위 성령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몇몇 사람들이 심각한 실수들을 범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였다고 해서, 그 사역 전체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몇몇 가짜들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참되지 않다는 논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모조품들이 생기는 것은 개혁의 시기에 항상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들여다보면, 커다란 종교의 부흥 치고 많은 모조품들이 등장하지 않은 경우는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시대를 보면 이러한 종류, 즉 지독한 이단과 비열한 행동에 빠진 사람들의 사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당시에 있었던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성도들로부터 뛰쳐 나갈 때까지, 참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형제들로, 성도들의 한 부분으로 잠시 동안 받아들여졌으며, 그들과 다르다고 의심받지 않았습니다(요일 2:19).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교사들과 직분자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주신 몇몇 사람들 가운데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6장의 시작 부분에 나옵니다. 유다가 이러한 예입니다.

유다는 열두 사도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치욕스러운 행동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발각되거나 의심받는 일이 없이 참된 경험을 한 제자들과 한 무리가 되어 오랫동안 계속 연합하였으며, 친밀하게 대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부터도 모든 외적인 일들에 있어서 참된 제자인 것처럼 대우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그에게 사도의 지위를 수여해 주셨으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하셨고,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들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알고 계셨지만, 그 당시에는 전지(全知)하신 심판자와 마음의 감찰자로서의 신분으로 옷 입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시적 교회의 수종자로서의 직임을 수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아버지의 수종자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자신의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그를 배척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가시적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과 다스리는 자들에게 하나의 모범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즉 그들이 교회를 운영할 때에는 마음의 감찰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말고, 보이는 것과 공개된 것을 통하여 하도록 말입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중에도 배교자가 생길 수 있다

한동안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되었던 몇몇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특출하게 충만하다고 여겨졌던 몇몇 사람들 중에 그러한 배교자들이 있었던 예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던 니골라가 그 한 예입니다.

그는 성령의 비상한 부으심이 있던 그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로 많은 그리스도인의 무리 중에서 집사의 직분에 선출되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 3절부터 5절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배반하여 야비한 행동을 하는 일단의 비열한 이단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부터 니골라당이라는 파당의 이름이 나왔습니다(계 2:6, 15).

종교개혁 시대에도 배반자가 있었습니다. 교황 정치 때부터 종교개혁의 때까지, 잠시 동안 종교개혁자들과 연합한 것처럼 보였다가 배반하여 가장 야비하고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르고 혐오스러운 행동을 한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부흥 시대에도 배반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위대한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종교가 부흥할 때에, 한동안 거기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떨어져 나가서, 기괴하고 엉뚱한 잘못들과 심한 열광주의에 빠져, 높은 영성과 완전함을 이루었다고 자랑하며, 다른 이들을 육적이라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사도 시대에 영지주의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여러 재세례파 분파들이 그러했습니다. 이것은 안토니 버제스(Anthony Burgess)가 <영적인 강화>(Spiritual Refining) 제1부, 설교 23쪽과 132쪽에서 진술한 것과 같습니다.

“최초의 훌륭한 종교 개혁가들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도구들은 여기서 쓰라린 갈등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형식주의자들과 전통적인 교황주의자들에게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 편으로는 종교개혁자들보다 더욱 계몽되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렸다. 그들은 성경을 고수하며 성경을 근거로 계시들을 검증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문자주의자’(Literists and Vowelists)로 불렀다. 성경의 단어들과 모음들에는 정통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을 가지지 못한 자들로 보았다.

어떤 도시에서든 복음의 참된 교리들이 교황제도를 막 본격적으로 바꾸어 놓으려고 하면, 곧장 그러한 견해들이 일어났다. 마치 좋은 곡식 가운데 가라지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커다란 분열이 일어났고, 종교개혁은 세상 사람들에게 혐오스럽고 증오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벌레들과 뱀들에게 열기와 온기를 주어서 땅 속에서 기어 나오게 한 것과 같았다. 그들은 루터를 매도하였고, 루터가 단지 육적인 복음만 보급시켰다고 말하였다.”
그러한 거친 열광주의자들의 몇몇 지도자들은 잠시 동안 최초의 종교개혁가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고, 특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청교도 시대에도 배반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찰스 1세 때와 공위(空位) 기간에 올리버 크롬웰 때 생명 있는 종교가 매우 우세하였는데, 그 때 그러한 일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뉴잉글랜드 초기 가장 순수했던 시기에, 경건이 넘쳤을 때, 그와 같은 일들이 발발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그러한 가라지를 뿌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참된 역사가 영광스럽게 수행되고 있지 않다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