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18, 2011

배우자, 소명, 직업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것 인문학적 기독교(3) - 반드시 성공하는 사람의 공통점


인문학적 기독교(3) -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설계해 가는 사람 
저는 나이가 여러분보다 많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성공과 실패를 봤습니다. 지금 내 나이에서만 보더라도 어떻게 살면 반드시 실패 하는가, 어떻게 살면 반드시 성공 하는가 그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내가 초롱초롱한 생기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 무위도식하면서 사람구실 못하는 사람을 한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절묘하게 쓰임 받고 심지어 생기롭고 얼굴이 생기로 가득차고 아름답고 발랄합니다.

자기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너무나 너무나 아름다운 배필을 만나는 것을 수없이 봤습니다. 한 사람도 자기 짝을 찾지 못해 슬피 우는 외기러기떼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 ⓒ크로스로 윤동혁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설계해 가는 사람
아름답고 생기로운 그 마스크를 하고 청년시절을 마치면서, 미래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하늘의 신뢰감을 가진 채 청년기를 마치는 것. 그것은 조작적으로 갑자기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닌, 누적된 신앙의 투신이 필요한 일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옷보다도, 이 들꽃 하나만, 이 들꽃의 아름다움이 솔로몬의 영화보다 낫다는, 그런 강한 확신이 있어야만 인문학도가 되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분명한 것은 여러분이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채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되지 않고, 그런 공감과 동정심도 없는 채로 살면 출세도 못할 뿐만 아니라 쓰임 받지를 못합니다. 아무데도 쓸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 사람들의 눈 속에서 한 1~20년간 출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의 마지막은 파멸이란 것입니다. 여러분은 뭘 부러워해야 될지 알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을 제일 부러워해야 합니까?

아침마다 규칙적으로 기도가 가능한 사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에 무한한 신뢰를, 남들이 조롱하고, 자기 안에서 넘치는 조롱이 자기 신앙을 조롱해도 우직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선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면서 기도하고, 청년시절 자기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설계해 가는 사람을 제일 부러워해야 됩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성공 합니다. 그 사람의 성공은 자기의 성공이 아니라 부의 근원에서 살게 됩니다. 이걸 여러분 부러워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주 낮은 대중적 신변잡기, 그런 진부한 일상의 담화에만 그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와의 만남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없이, 그냥 진부하고 세상 사람들, 개그맨이 쓰는 그런 수준의 언어와 의식의 지평에 놀다 가면, 이런 멋진 자화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인문학적 소양의 절정

우리는 무릇 예수님의 말씀에 인생을 정초하여 홀로 깊이 기도할 수 있어야 하고, 바위 위에 앉아서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소나무 뒤에 등을 기대놓은 채, 자기 인생의 미래, 하나님 나라의 미래, 대한민국의 미래, 한국 교회의 미래, 우리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서 슬픈 공감을 갖고, 이 땅에 널부러져 있는 모순에 대해서 아픈 마음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고치려고 애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고치려는 마음, 내가 우리 선배로부터 받았던 이 세상을 고쳐보겠다고,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의 뜻에 근사치로, 더 가까운 세상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에게 출세의 기회도 주어지고, 직장의 기회도 주어지고, 시험의 기회도 주어집니다. 이 원칙이 가장 큰 원칙입니다. 이 원칙 따라 일을 얻고, 이 원칙 따라 직장을 얻고, 이 원칙 따라 배우자를 얻는 겁니다. 이 원칙 따라 연애도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세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결정이 안 되었습니다. 먼저, 배우자가 아직 결정 안됐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일생동안 해야 할지 소명이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이 소명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해야 할 직업적인 그런 능력이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어디에 힘써야 할까요? 도구적, 실용적 지식에 빨리 눈떠서 그걸 빨리 앞서 가는 게 좋겠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지식에 힘써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런 견고한 신앙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이게 바로 인문학적 소양의 절정입니다. 거기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인문학적 소양의 절정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고양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인문학적 소양의 절정에 바로 기독교 신앙이 있습니다. 이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후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신앙의 비밀을 여러분이 터득한다면 여러분은 청년의 때에 성공을 거두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신비에 눈뜬 사람만이 하나님께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소명에 눈을 뜰 수 있고, 소명에 눈뜬 사람만이 나에게 필요한 배우자와 직장을 마음놓고 고를 수 있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확고부동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나를 사랑하시고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나를 이끌고 계시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기회주의자로 살 수 밖에 없고, 우선의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고, 기회주의적인 인간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나에게 충고를 주고 나에게 진한 신앙적 우정을 나눈 사람보다 우선에 나에게 이익을 줄 사람을 더 급하게 찾게 되는 기회주의자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답이다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진짜 '믿는 자'가 되기를 바라고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여러분의 뒤를 영영 따르는 그런 확고부동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인의 길만이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가는 최고의 길입니다. 이 신앙이 없으면 우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나를 지배하는 강한 대항 힘은 무엇일까요?

바로 돈입니다, 돈. 결국 돈을 주는 쪽으로, 돈이 나오는 쪽으로 나의 모든 관점이 휘어져 돌아가게 됩니다. 확고부동하게 하나님을 믿고 확고부동하게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으면, 돈을 고백할 수 밖에 없고, 돈을 ‘주’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오답만이 남습니다.

우리가 정답 하나를 포기하고 나면, 반드시 오답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솔로몬의 영광보다 이 들꽃이 낫다고 하는, 이런 간고한 믿음의 결단이 우리에게 구비되지 않으면 반드시 돈을 따라갑니다. 돈을 경배하게 되고 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망하는 길입니다. 어떤 사람의 길은 생명의 길처럼 보이나 필경 사망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너무나 분명합니다. 너무나 분명합니다. 말씀이 답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청년들에게 신앙이 있는지 나는 그것이 가끔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물에서 놀기는 노는 분 같은데, 성경을 이해하는 정도나 기도하는 정도를 볼 때 (하~~) 2%가 부족하다 이런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부족함은 일단 결혼을 할 때 가장 큰 차이로 드러납니다. 내가 만일에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믿음이 없으면, 배우자를 고를 때 반드시 조건을 보게 되고, 그 조건이 우리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이건 부지불식간에 일어납니다. 이건 멀지 않아서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돌보신다는 그런 강한 믿음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괜히 캠퍼스 커플이 없어서 피해의식이 되고, 애인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될것 같은 그런 불안이 생깁니다.

학부 2학년 때 애인이 생긴다는 것은 그건 재난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정서적 감정적 관리를 해야하고, 돈도 기어코 들고, 인간관계가 협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10년, 20년 연애해서 결혼하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볼 때는 결혼하기 이년 전에 연애를 하다가 결혼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뭘 믿고 그냥 애인부터 만들기 시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생각이 있는 젊은이 같으면 제가 볼때는 숙고에 숙고를, 다시 말해서 베아트리체를 만난 단테의 그런 운명적 만남이 아니라면, 한 번쯤 내가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서, 하나님 사랑의 돌보심을 만끽하고 난 후에 연애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약간의 돈을 위해서 알바를 너무 지나치게 많이 한다던가, 약간의 재미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하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 여러분에게 남겨진 대안이라는 것은 그때 그때 주어지는 생활에 지배를 받는 것뿐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롱텀으로 플랜하지 못한 채 금방 청년 시절이 지나갑니다.

금방 지나가는 청년기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결혼이라는 엄숙한 중대사가 디밀어 옵니다. 그렇게 준비 안 된 채 결혼을 하게 되면 확고부동한 관점이 없기 때문에 불신자랑 결혼하게 되고, 불신자와 진배없는 사람과 결혼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결혼 한 번 해 놓으면 10년이고 20년이고 기도제목이 "우리 남편 바꿔주세요, 인간되게 해주세요, 이 원수 바꿔주세요" 이렇게 계속 기도 제목이 나오게 됩니다.

불신자와 신자사이에 나온 아이는 날라리 반신자가 나옵니다. 그러면 또 자녀 기도가 더해집니다. 그럼 그 사람은 일생 내내 무슨 기도만 하게 되냐면 믿지 않는 남편 기도 20년, 그다음 날라리 비행청소년 20년, 이렇게 40년 멀쩡하게 살아 있을 때, 그런 문제 덩어리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고 인생이 끝납니다. 여러분 이것은 너무나 불길한 시나리오입니다.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불이익 받는 소돔과 같습니다.
손해를 보겠다는 마음
예를 들어, 우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의 커리큘럼은 학점을 따기에 공부하기는 너무 아까운, 학점만을 위해서 공부하기는 너무나 아까운, 너무나 중요한, 이렇게 중요한 과목들을 내 전공 분야로 선택해서 내 인생에 중요한 순간에 공부한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라는 것입니까? 얼마나 복된 것 입니까?  이렇듯 이런 중요한 신앙의 문제,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내 인생의 사명 문제, 내 인생관의 문제, 이런 것을 확정짓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공감의 능력 인문학적소양을 충분히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급한 마음으로 우선에 취직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도구적 조작적 실용적 지식을 획득하는데 모든 생애를 다 바쳐 버린다면, 그런 '도구적' '실용적' '조작적' 지식이 여러분을 먼저 출세하게 만들고 먼저 취직하게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결코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못하게 됩니다. 절대로 인생이 기회주의적인 흔들림 이상의 삶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할까요? 다시 한 번 말씀을 보겠습니다. 6장입니다. 6: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비천이 여기거나 하나님과 재물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라.” 
하나님을 확고부동하게 믿지 아니하면 결국 돈 또는 준 돈을 섬기게 되는데, 이는 파국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20대인데 혹시 여러분이 잘 듣고 판단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듭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나를 한번도 개인적으로 아는척을 해 준적이 없습니까? 청년의 때 신앙이 가장 순수할 때는, 거의 자아도취적으로 주관적 확신에 가깝다고 느낄 만큼 하나님 사랑을 탐닉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라고 느끼고 하나님 사랑을 탐닉한 그런 경험이 없다면, 그 이후의 삶에서는 그걸 느낄 기회가 영영 오지 않습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내 인생을 돌보시고 나를 솔로몬의 들풀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공중의 새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신다는 그 넉넉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감싸고 있다는 확신이 없을 땐, 우린 기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린 염려로 가득 찬 이방인처럼 살 수밖에 없고 우리는 세리와 탐욕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돌보아 주지 않으면 내가 나를 돌볼 수밖에 없고, 내가 나를 위해 신이 될 수밖에 없고, 내가 나를 위해 구세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이기적인 삶을 정당하게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을 정당화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본다는 그 마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보호해 주신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압도적인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를 뒤따라 다니면서 나를 수습해주시고, 나를 돌보아 주신다는 그런 확신이 없이, 우리가 남에게 손해를 보는 짓을 한다는 것은 번지점프인데 끈이 떨어진 자유낙하입니다. 타력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맛본 그 사람만이 너그러운 사람, 손해볼 수 있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 이웃을 위해 자기 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넉넉한 돌보심이 먼저입니다.

퍼온글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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