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기독교(4) - 누가 악인이 되느냐?
여러분이 청년일 때 하나님의 넉넉한 돌보심을 확신한다면, 여러분은 모든 공부가 갑자기 너무 너무 중요해지고 신학으로 돌변합니다. 그때는 영문학도 신학이 되고, 경영학도 신학이 되고, 전자공학도 신학이 되고, 문학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넉넉한 돌보심을 확신하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우리 청년들이 공부하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공부인가를 실감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나 세상에 대해서 내일 일을 염려할 수 있습니다. 내일 일을 누가 의복을 위해 염려하는, 좀 좋은 옷을 입으려고 염려하는 것, 좀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염려하는 것. 그것이 취직 잘 하려고 하는 염려입니다. 외국에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라고 하는 여사가 쓴 <오래된 미래>라는 책을 읽어 보셨습니까?
적극적 선 / 적극적 의 / 적극적 믿음
카테고리 : 시/에세이 지은이 :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중앙북스, 2007년) 이 책 두껍지 않습니다.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데이비드 쓰로우와 마하트마 간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만일에 기꺼이 오막살이에 살 마음을 갖지 않으면 이 세계는 항상 탐욕의 전쟁에 휩쓸려 갈 수 밖에 없다.” 내가 오막살이에 살 각오를 해야 이웃과 평안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내가 고대황실에서, 내가 엄청 좋은 아파트에서 살려고 몸부림하면 나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전 노원구청장과 송파구청장간의 싸움이 벌어졌던 때가 있습니다. 노원구청장에게 노원구에 25평짜리 국민주택을 지으라고 계속 국토해양부인지 무슨 토지공사인지에서 촉구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송파구청장은 더 많이 지어야 했습니다. 토지공사에서 주택공사에서 국민주택분양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공정택이라는 교육감이 송파구청장에게 “강남에는 25평이하의 국민주택을 지으면 안된다. 강남이 강남땅값이 똥값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그랬더니 그것을 듣고 노원구청장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노원구는 지금 이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국민주택을 많이 지을수록 우리 노원은 슬럼화되고 빈민 동굴화 되는데 우리 노원구만 이렇게 못사는 사람들이 사는 집성촌이 되야되겠냐. 송파구 너희들도 좀 지어라.”
일찍이 서초구 우면동 사람들이 국민주택을 결사반대 해서 못사는 사람들을 쫓아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이 서초구 부녀회의 회원이 되어 머리띠 매고 데모하러 나온 사람들로 TV에 찍힐 수가 있습니다. “국민주택 결사반대 ○○대 2007학번” 이렇게 막 나올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이 바로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나를 존경한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그런 사람들입니다. 제 설교를 좋아한다고 해 놓고 분명히 서초구 우면동 사람처럼 국민주택을 몰아내기 위해서 결사반대하면서 님비현상을 막 불러 일으켰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25평 국민주택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과 한동네 살기 싫다는 것 아닙니까? 아직도 이 악한 일이 지금 서울 백주대낮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송파구는 국민주택 이백만호가 들어오면 송파구 땅값이 반값으로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무섭게 발버둥쳤었습니다. 얼마나 악한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 청년들이 사는 세상은, 우리 청년들이 직면하는 세상은 어설프게 의로운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어설프게 믿는 사람은 금방 잠재적으로 악한 사람이 되거나, 악한 자의 동맹세가 될 만큼, 악인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적극적으로 선하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의롭지 않으면, 절대로 믿음의 사람으로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나이가 들어 서초구 우면동에 살고, 75평 빌라에 사는 사모님이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25평 빌라를 우리 동네에 지을 수 없다고 사인하시겠습니까? 데모하시겠습니까? "나는 옛날에 김회권 교수의 강의를 들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할 것입니까? 그렇다면 주민들이 빨간 스프레이로 “죽어라!” 이렇게 문앞에 테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내 차가 빵꾸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의로운 열매를 맺지 않으면, 잠재적인 악의 동맹세력이 되어서 악한자의 이름으로 분류됩니다.
누가 악인이 되느냐?
카테고리 : 인문 지은이 : 한나 아렌트 (한길사, 2006년) 여러분 잘 들으세요. 성질이 더러워서, 성질이 악해서 악한 일을 하는 사람보다, 악역을 맡은 악한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악한 일을 합니다. 성질은 좋지만 악역을 맡아서 하는, 평범한 악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더 악을 많이 범하는 겁니다. 성질이 더러워서 악을 범하는 사람은 징역 2년 받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이란 말은 무엇입니까? 한나 아렌트가 아우슈비츠에서 백오십만을 죽였던 그 아돌프 아이히만 중령이 얼마나 악한 사람인가를 보러 갔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완전히 엄청난 악인처럼 생길 줄 알았습니다.
왜? 그렇게 악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열리는 전범재판에 갔던 사람들이 아돌프 아이히만의 얼굴을 보고 완전히 뒤로 넘어졌습니다. 너무나 모범적이고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뭐냐 하면, 우리가 성질이 더러워서 악한 일을 하는 것보다 성질이 더러워서 좀 절제를 못해서 악한 일을 하는 사람보다, 지식을 가지고 도구적, 조작적 지식을 가지고 월 스트리트 금융파산한 그 악한 인간들이 더 악한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도구적, 조작적 지식을 가지고 엄청난 악을 범한 인간들이 더 많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악이란 너무나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악의 평범성입니다.
그럼 누가 악인이 되느냐?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결과를 생각할 줄 모르는, 공감의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 상식적인 동정심이 없는 사람, 다른 사람이 죽겠다고 아우성쳐도 그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관료적 성실성. 이 관료적 성실성이 가장 악한 것입니다.
이 관료적 성실성이 예수님이 죄없는 자인줄을 알았지만 “네가 가이사의 총독의 자리에 있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냐? 이 예수를 사형에 처하지 않으면 너는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 네가 총독의 자리를 보전하려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라는 말에 예수가 무죄인 것을 확신했던 로마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왜? 관료적 성실성, 자기 관료적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바로 한나 아렌트는 무사유의 죄라고 했습니다. 무사유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이 박힐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여 저들이 무슨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로마 제국의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떵떵 못박으면서 그들이 메시아 하나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들이 행정고시, 사법고시 출세하면 빌라도 같은 일을 할 수 밖에 없고, 아돌프 아히만 같은 일을 관료적 위계적 성실성으로, 그런 악한 일을 해버립니다. 프리모 레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 아우슈비츠 생존자입니다. 이 프리모 레비라는 사람은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던 비트프랭크과 맞먹는 정을 나누었습니다. 여러분 들어보았습니까? 카테고리 : 시/에세이 지은이 : 프리모 레비 (돌베개, 2007년) 여러분 프리모 래비가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을 썼는데, 그 프리모 레비가 쓴 <이것이 인간인가> 라는 책 속에 나오는 아우슈비츠의 병사들, 그 독일 병정들의 잔학무도함 앞에 자기를 저주합니다. 이 잔학무도한 아우슈비츠의 독일 병정들에게 놀이개감이 된 자기 인생을 증오합니다. 증오합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가장 슬픔을 많이 느낀 사람이 최근에 돌아가신 알렉산드라 솔제니친입니다. 여러분께서 “에이 교수님 그렇지 않죠. 내가 아무리 교수님 그래봤자 결국 영어실력 좋은 놈이 출세하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그 스피디한 출세가, 그 신속한 출세가 아무 소용이 없는 거구나 그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점점 확신이 듭니다. 나는 우리 청년 여러분들이 굳건한 하나님의 믿음으로 인문학적 소양과 문사철언, 이 세상에 가장 근본인 인간의 도리를 문학, 역사, 철학, 언어 그리고 이 모든걸 종합하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고양하면 반드시 여러분이 일자리를 구하는 것에 어떤 어려움도 나는 없으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과 도킹하기 카테고리 : 종교 지은이 : 김회권 (대한기독교서회, 2005년) 난 믿습니다. 여러분 진짜 어디서 지성을 연마하며, 어디서 인문학적 소양을 개발하며, 어디서 문사철언을 통합하는 이런 기독교 신앙을 배울 것입니까? 어디서 이 불확실한 시대에 하나님 없이 돈의 힘으로 돌파할 것입니까? 하나님 없이는 돌파할 수 없는 이 피조물의 한계를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러분이 굳건한 기독교 신앙이 있는 것이 인문학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굳건한 기독교 신앙은 여러분이 교회 좀 다니고 약간 기독교 동아리에서 왔다리 갔다리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정말로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고요하고 절대적인 만남의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회의가 들거든 산에 올라가서 몇 일씩 금식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있는 신앙에 회의가 들고 믿어지지 않으면 정말로 기독교 신앙을 포기할 것인지 극적으로 도킹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저는 금식기도, 산에 올라가서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핸드폰 끊고 모든 하나님의 메시지 외에는 모든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끊고 수직적인 하나님 계시를 기대하기 위해서 몰입해보는, 말씀에 몰입해보고 기도에 몰입해보는 찬양에 몰입해보고 명상에 몰입해보는 그런 시간이 청년기에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그런 격조높은 영적 거성들이 우리 청년들에게서 우뚝우뚝 몇 사람씩 솟아나기를 바랍니다. 고만고만하고 이렇게 들어도 그만 안들어도 되는 잡담을 지껄이는 수준의 대화가 아니라 선배 한마디가 친구 한마디가 영적인 울림과 파도를 일으키는 그런 영적인 신령한 거인들의 하나님의 실제를 맛본 사람들의 신앙하나가 격조높은 믿음하나가 왜 우리 청년들 사이에 수수되기를 나는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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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December 18, 2011
"결국 영어점수 높은 놈이 출세한다고요?" 인문학적 기독교(4) - 영어공부보다 중요한 필독 도서
배우자, 소명, 직업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것 인문학적 기독교(3) - 반드시 성공하는 사람의 공통점
인문학적 기독교(3) -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설계해 가는 사람
저는 나이가 여러분보다 많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성공과 실패를 봤습니다. 지금 내 나이에서만 보더라도 어떻게 살면 반드시 실패 하는가, 어떻게 살면 반드시 성공 하는가 그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내가 초롱초롱한 생기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 무위도식하면서 사람구실 못하는 사람을 한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절묘하게 쓰임 받고 심지어 생기롭고 얼굴이 생기로 가득차고 아름답고 발랄합니다.
자기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너무나 너무나 아름다운 배필을 만나는 것을 수없이 봤습니다. 한 사람도 자기 짝을 찾지 못해 슬피 우는 외기러기떼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너무나 너무나 아름다운 배필을 만나는 것을 수없이 봤습니다. 한 사람도 자기 짝을 찾지 못해 슬피 우는 외기러기떼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 ▲ ⓒ크로스로 윤동혁 | ||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설계해 가는 사람
아름답고 생기로운 그 마스크를 하고 청년시절을 마치면서, 미래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하늘의 신뢰감을 가진 채 청년기를 마치는 것. 그것은 조작적으로 갑자기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닌, 누적된 신앙의 투신이 필요한 일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옷보다도, 이 들꽃 하나만, 이 들꽃의 아름다움이 솔로몬의 영화보다 낫다는, 그런 강한 확신이 있어야만 인문학도가 되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분명한 것은 여러분이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채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되지 않고, 그런 공감과 동정심도 없는 채로 살면 출세도 못할 뿐만 아니라 쓰임 받지를 못합니다. 아무데도 쓸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 사람들의 눈 속에서 한 1~20년간 출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의 마지막은 파멸이란 것입니다. 여러분은 뭘 부러워해야 될지 알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을 제일 부러워해야 합니까?
아침마다 규칙적으로 기도가 가능한 사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에 무한한 신뢰를, 남들이 조롱하고, 자기 안에서 넘치는 조롱이 자기 신앙을 조롱해도 우직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선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면서 기도하고, 청년시절 자기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설계해 가는 사람을 제일 부러워해야 됩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성공 합니다. 그 사람의 성공은 자기의 성공이 아니라 부의 근원에서 살게 됩니다. 이걸 여러분 부러워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주 낮은 대중적 신변잡기, 그런 진부한 일상의 담화에만 그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와의 만남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없이, 그냥 진부하고 세상 사람들, 개그맨이 쓰는 그런 수준의 언어와 의식의 지평에 놀다 가면, 이런 멋진 자화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아름답고 생기로운 그 마스크를 하고 청년시절을 마치면서, 미래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하늘의 신뢰감을 가진 채 청년기를 마치는 것. 그것은 조작적으로 갑자기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닌, 누적된 신앙의 투신이 필요한 일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옷보다도, 이 들꽃 하나만, 이 들꽃의 아름다움이 솔로몬의 영화보다 낫다는, 그런 강한 확신이 있어야만 인문학도가 되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분명한 것은 여러분이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채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되지 않고, 그런 공감과 동정심도 없는 채로 살면 출세도 못할 뿐만 아니라 쓰임 받지를 못합니다. 아무데도 쓸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 사람들의 눈 속에서 한 1~20년간 출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의 마지막은 파멸이란 것입니다. 여러분은 뭘 부러워해야 될지 알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을 제일 부러워해야 합니까?
아침마다 규칙적으로 기도가 가능한 사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에 무한한 신뢰를, 남들이 조롱하고, 자기 안에서 넘치는 조롱이 자기 신앙을 조롱해도 우직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선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면서 기도하고, 청년시절 자기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설계해 가는 사람을 제일 부러워해야 됩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성공 합니다. 그 사람의 성공은 자기의 성공이 아니라 부의 근원에서 살게 됩니다. 이걸 여러분 부러워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주 낮은 대중적 신변잡기, 그런 진부한 일상의 담화에만 그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와의 만남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없이, 그냥 진부하고 세상 사람들, 개그맨이 쓰는 그런 수준의 언어와 의식의 지평에 놀다 가면, 이런 멋진 자화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인문학적 소양의 절정
우리는 무릇 예수님의 말씀에 인생을 정초하여 홀로 깊이 기도할 수 있어야 하고, 바위 위에 앉아서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소나무 뒤에 등을 기대놓은 채, 자기 인생의 미래, 하나님 나라의 미래, 대한민국의 미래, 한국 교회의 미래, 우리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서 슬픈 공감을 갖고, 이 땅에 널부러져 있는 모순에 대해서 아픈 마음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고치려고 애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고치려는 마음, 내가 우리 선배로부터 받았던 이 세상을 고쳐보겠다고,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의 뜻에 근사치로, 더 가까운 세상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에게 출세의 기회도 주어지고, 직장의 기회도 주어지고, 시험의 기회도 주어집니다. 이 원칙이 가장 큰 원칙입니다. 이 원칙 따라 일을 얻고, 이 원칙 따라 직장을 얻고, 이 원칙 따라 배우자를 얻는 겁니다. 이 원칙 따라 연애도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세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결정이 안 되었습니다. 먼저, 배우자가 아직 결정 안됐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일생동안 해야 할지 소명이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이 소명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해야 할 직업적인 그런 능력이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어디에 힘써야 할까요? 도구적, 실용적 지식에 빨리 눈떠서 그걸 빨리 앞서 가는 게 좋겠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지식에 힘써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런 견고한 신앙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이게 바로 인문학적 소양의 절정입니다. 거기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인문학적 소양의 절정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고양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인문학적 소양의 절정에 바로 기독교 신앙이 있습니다. 이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후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신앙의 비밀을 여러분이 터득한다면 여러분은 청년의 때에 성공을 거두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신비에 눈뜬 사람만이 하나님께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소명에 눈을 뜰 수 있고, 소명에 눈뜬 사람만이 나에게 필요한 배우자와 직장을 마음놓고 고를 수 있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확고부동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나를 사랑하시고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나를 이끌고 계시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기회주의자로 살 수 밖에 없고, 우선의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고, 기회주의적인 인간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나에게 충고를 주고 나에게 진한 신앙적 우정을 나눈 사람보다 우선에 나에게 이익을 줄 사람을 더 급하게 찾게 되는 기회주의자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릇 예수님의 말씀에 인생을 정초하여 홀로 깊이 기도할 수 있어야 하고, 바위 위에 앉아서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소나무 뒤에 등을 기대놓은 채, 자기 인생의 미래, 하나님 나라의 미래, 대한민국의 미래, 한국 교회의 미래, 우리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서 슬픈 공감을 갖고, 이 땅에 널부러져 있는 모순에 대해서 아픈 마음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고치려고 애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고치려는 마음, 내가 우리 선배로부터 받았던 이 세상을 고쳐보겠다고,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의 뜻에 근사치로, 더 가까운 세상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에게 출세의 기회도 주어지고, 직장의 기회도 주어지고, 시험의 기회도 주어집니다. 이 원칙이 가장 큰 원칙입니다. 이 원칙 따라 일을 얻고, 이 원칙 따라 직장을 얻고, 이 원칙 따라 배우자를 얻는 겁니다. 이 원칙 따라 연애도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세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결정이 안 되었습니다. 먼저, 배우자가 아직 결정 안됐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일생동안 해야 할지 소명이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이 소명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해야 할 직업적인 그런 능력이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어디에 힘써야 할까요? 도구적, 실용적 지식에 빨리 눈떠서 그걸 빨리 앞서 가는 게 좋겠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지식에 힘써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런 견고한 신앙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이게 바로 인문학적 소양의 절정입니다. 거기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인문학적 소양의 절정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고양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인문학적 소양의 절정에 바로 기독교 신앙이 있습니다. 이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후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신앙의 비밀을 여러분이 터득한다면 여러분은 청년의 때에 성공을 거두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신비에 눈뜬 사람만이 하나님께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소명에 눈을 뜰 수 있고, 소명에 눈뜬 사람만이 나에게 필요한 배우자와 직장을 마음놓고 고를 수 있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확고부동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나를 사랑하시고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나를 이끌고 계시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기회주의자로 살 수 밖에 없고, 우선의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고, 기회주의적인 인간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나에게 충고를 주고 나에게 진한 신앙적 우정을 나눈 사람보다 우선에 나에게 이익을 줄 사람을 더 급하게 찾게 되는 기회주의자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답이다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진짜 '믿는 자'가 되기를 바라고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여러분의 뒤를 영영 따르는 그런 확고부동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인의 길만이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가는 최고의 길입니다. 이 신앙이 없으면 우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나를 지배하는 강한 대항 힘은 무엇일까요?
바로 돈입니다, 돈. 결국 돈을 주는 쪽으로, 돈이 나오는 쪽으로 나의 모든 관점이 휘어져 돌아가게 됩니다. 확고부동하게 하나님을 믿고 확고부동하게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으면, 돈을 고백할 수 밖에 없고, 돈을 ‘주’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오답만이 남습니다.
우리가 정답 하나를 포기하고 나면, 반드시 오답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솔로몬의 영광보다 이 들꽃이 낫다고 하는, 이런 간고한 믿음의 결단이 우리에게 구비되지 않으면 반드시 돈을 따라갑니다. 돈을 경배하게 되고 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망하는 길입니다. 어떤 사람의 길은 생명의 길처럼 보이나 필경 사망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너무나 분명합니다. 너무나 분명합니다. 말씀이 답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청년들에게 신앙이 있는지 나는 그것이 가끔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물에서 놀기는 노는 분 같은데, 성경을 이해하는 정도나 기도하는 정도를 볼 때 (하~~) 2%가 부족하다 이런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부족함은 일단 결혼을 할 때 가장 큰 차이로 드러납니다. 내가 만일에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믿음이 없으면, 배우자를 고를 때 반드시 조건을 보게 되고, 그 조건이 우리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이건 부지불식간에 일어납니다. 이건 멀지 않아서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돌보신다는 그런 강한 믿음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괜히 캠퍼스 커플이 없어서 피해의식이 되고, 애인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될것 같은 그런 불안이 생깁니다.
학부 2학년 때 애인이 생긴다는 것은 그건 재난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정서적 감정적 관리를 해야하고, 돈도 기어코 들고, 인간관계가 협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10년, 20년 연애해서 결혼하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볼 때는 결혼하기 이년 전에 연애를 하다가 결혼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뭘 믿고 그냥 애인부터 만들기 시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생각이 있는 젊은이 같으면 제가 볼때는 숙고에 숙고를, 다시 말해서 베아트리체를 만난 단테의 그런 운명적 만남이 아니라면, 한 번쯤 내가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서, 하나님 사랑의 돌보심을 만끽하고 난 후에 연애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약간의 돈을 위해서 알바를 너무 지나치게 많이 한다던가, 약간의 재미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하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 여러분에게 남겨진 대안이라는 것은 그때 그때 주어지는 생활에 지배를 받는 것뿐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롱텀으로 플랜하지 못한 채 금방 청년 시절이 지나갑니다.
금방 지나가는 청년기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결혼이라는 엄숙한 중대사가 디밀어 옵니다. 그렇게 준비 안 된 채 결혼을 하게 되면 확고부동한 관점이 없기 때문에 불신자랑 결혼하게 되고, 불신자와 진배없는 사람과 결혼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결혼 한 번 해 놓으면 10년이고 20년이고 기도제목이 "우리 남편 바꿔주세요, 인간되게 해주세요, 이 원수 바꿔주세요" 이렇게 계속 기도 제목이 나오게 됩니다.
불신자와 신자사이에 나온 아이는 날라리 반신자가 나옵니다. 그러면 또 자녀 기도가 더해집니다. 그럼 그 사람은 일생 내내 무슨 기도만 하게 되냐면 믿지 않는 남편 기도 20년, 그다음 날라리 비행청소년 20년, 이렇게 40년 멀쩡하게 살아 있을 때, 그런 문제 덩어리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고 인생이 끝납니다. 여러분 이것은 너무나 불길한 시나리오입니다.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불이익 받는 소돔과 같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진짜 '믿는 자'가 되기를 바라고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여러분의 뒤를 영영 따르는 그런 확고부동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인의 길만이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가는 최고의 길입니다. 이 신앙이 없으면 우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나를 지배하는 강한 대항 힘은 무엇일까요?
바로 돈입니다, 돈. 결국 돈을 주는 쪽으로, 돈이 나오는 쪽으로 나의 모든 관점이 휘어져 돌아가게 됩니다. 확고부동하게 하나님을 믿고 확고부동하게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으면, 돈을 고백할 수 밖에 없고, 돈을 ‘주’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오답만이 남습니다.
우리가 정답 하나를 포기하고 나면, 반드시 오답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솔로몬의 영광보다 이 들꽃이 낫다고 하는, 이런 간고한 믿음의 결단이 우리에게 구비되지 않으면 반드시 돈을 따라갑니다. 돈을 경배하게 되고 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망하는 길입니다. 어떤 사람의 길은 생명의 길처럼 보이나 필경 사망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너무나 분명합니다. 너무나 분명합니다. 말씀이 답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청년들에게 신앙이 있는지 나는 그것이 가끔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물에서 놀기는 노는 분 같은데, 성경을 이해하는 정도나 기도하는 정도를 볼 때 (하~~) 2%가 부족하다 이런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부족함은 일단 결혼을 할 때 가장 큰 차이로 드러납니다. 내가 만일에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믿음이 없으면, 배우자를 고를 때 반드시 조건을 보게 되고, 그 조건이 우리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이건 부지불식간에 일어납니다. 이건 멀지 않아서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돌보신다는 그런 강한 믿음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괜히 캠퍼스 커플이 없어서 피해의식이 되고, 애인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될것 같은 그런 불안이 생깁니다.
학부 2학년 때 애인이 생긴다는 것은 그건 재난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정서적 감정적 관리를 해야하고, 돈도 기어코 들고, 인간관계가 협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10년, 20년 연애해서 결혼하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볼 때는 결혼하기 이년 전에 연애를 하다가 결혼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뭘 믿고 그냥 애인부터 만들기 시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생각이 있는 젊은이 같으면 제가 볼때는 숙고에 숙고를, 다시 말해서 베아트리체를 만난 단테의 그런 운명적 만남이 아니라면, 한 번쯤 내가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서, 하나님 사랑의 돌보심을 만끽하고 난 후에 연애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약간의 돈을 위해서 알바를 너무 지나치게 많이 한다던가, 약간의 재미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하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 여러분에게 남겨진 대안이라는 것은 그때 그때 주어지는 생활에 지배를 받는 것뿐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롱텀으로 플랜하지 못한 채 금방 청년 시절이 지나갑니다.
금방 지나가는 청년기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결혼이라는 엄숙한 중대사가 디밀어 옵니다. 그렇게 준비 안 된 채 결혼을 하게 되면 확고부동한 관점이 없기 때문에 불신자랑 결혼하게 되고, 불신자와 진배없는 사람과 결혼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결혼 한 번 해 놓으면 10년이고 20년이고 기도제목이 "우리 남편 바꿔주세요, 인간되게 해주세요, 이 원수 바꿔주세요" 이렇게 계속 기도 제목이 나오게 됩니다.
불신자와 신자사이에 나온 아이는 날라리 반신자가 나옵니다. 그러면 또 자녀 기도가 더해집니다. 그럼 그 사람은 일생 내내 무슨 기도만 하게 되냐면 믿지 않는 남편 기도 20년, 그다음 날라리 비행청소년 20년, 이렇게 40년 멀쩡하게 살아 있을 때, 그런 문제 덩어리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고 인생이 끝납니다. 여러분 이것은 너무나 불길한 시나리오입니다.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불이익 받는 소돔과 같습니다.
손해를 보겠다는 마음
예를 들어, 우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의 커리큘럼은 학점을 따기에 공부하기는 너무 아까운, 학점만을 위해서 공부하기는 너무나 아까운, 너무나 중요한, 이렇게 중요한 과목들을 내 전공 분야로 선택해서 내 인생에 중요한 순간에 공부한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라는 것입니까? 얼마나 복된 것 입니까? 이렇듯 이런 중요한 신앙의 문제,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내 인생의 사명 문제, 내 인생관의 문제, 이런 것을 확정짓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공감의 능력 인문학적소양을 충분히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급한 마음으로 우선에 취직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도구적 조작적 실용적 지식을 획득하는데 모든 생애를 다 바쳐 버린다면, 그런 '도구적' '실용적' '조작적' 지식이 여러분을 먼저 출세하게 만들고 먼저 취직하게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결코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못하게 됩니다. 절대로 인생이 기회주의적인 흔들림 이상의 삶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할까요? 다시 한 번 말씀을 보겠습니다. 6장입니다. 6: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비천이 여기거나 하나님과 재물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라.”
하나님을 확고부동하게 믿지 아니하면 결국 돈 또는 준 돈을 섬기게 되는데, 이는 파국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20대인데 혹시 여러분이 잘 듣고 판단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듭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나를 한번도 개인적으로 아는척을 해 준적이 없습니까? 청년의 때 신앙이 가장 순수할 때는, 거의 자아도취적으로 주관적 확신에 가깝다고 느낄 만큼 하나님 사랑을 탐닉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라고 느끼고 하나님 사랑을 탐닉한 그런 경험이 없다면, 그 이후의 삶에서는 그걸 느낄 기회가 영영 오지 않습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내 인생을 돌보시고 나를 솔로몬의 들풀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공중의 새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신다는 그 넉넉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감싸고 있다는 확신이 없을 땐, 우린 기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린 염려로 가득 찬 이방인처럼 살 수밖에 없고 우리는 세리와 탐욕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돌보아 주지 않으면 내가 나를 돌볼 수밖에 없고, 내가 나를 위해 신이 될 수밖에 없고, 내가 나를 위해 구세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이기적인 삶을 정당하게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을 정당화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의 커리큘럼은 학점을 따기에 공부하기는 너무 아까운, 학점만을 위해서 공부하기는 너무나 아까운, 너무나 중요한, 이렇게 중요한 과목들을 내 전공 분야로 선택해서 내 인생에 중요한 순간에 공부한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라는 것입니까? 얼마나 복된 것 입니까? 이렇듯 이런 중요한 신앙의 문제,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내 인생의 사명 문제, 내 인생관의 문제, 이런 것을 확정짓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공감의 능력 인문학적소양을 충분히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급한 마음으로 우선에 취직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도구적 조작적 실용적 지식을 획득하는데 모든 생애를 다 바쳐 버린다면, 그런 '도구적' '실용적' '조작적' 지식이 여러분을 먼저 출세하게 만들고 먼저 취직하게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결코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못하게 됩니다. 절대로 인생이 기회주의적인 흔들림 이상의 삶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할까요? 다시 한 번 말씀을 보겠습니다. 6장입니다. 6: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비천이 여기거나 하나님과 재물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라.”
하나님을 확고부동하게 믿지 아니하면 결국 돈 또는 준 돈을 섬기게 되는데, 이는 파국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20대인데 혹시 여러분이 잘 듣고 판단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듭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나를 한번도 개인적으로 아는척을 해 준적이 없습니까? 청년의 때 신앙이 가장 순수할 때는, 거의 자아도취적으로 주관적 확신에 가깝다고 느낄 만큼 하나님 사랑을 탐닉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라고 느끼고 하나님 사랑을 탐닉한 그런 경험이 없다면, 그 이후의 삶에서는 그걸 느낄 기회가 영영 오지 않습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내 인생을 돌보시고 나를 솔로몬의 들풀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공중의 새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신다는 그 넉넉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감싸고 있다는 확신이 없을 땐, 우린 기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린 염려로 가득 찬 이방인처럼 살 수밖에 없고 우리는 세리와 탐욕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돌보아 주지 않으면 내가 나를 돌볼 수밖에 없고, 내가 나를 위해 신이 될 수밖에 없고, 내가 나를 위해 구세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이기적인 삶을 정당하게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을 정당화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본다는 그 마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보호해 주신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압도적인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를 뒤따라 다니면서 나를 수습해주시고, 나를 돌보아 주신다는 그런 확신이 없이, 우리가 남에게 손해를 보는 짓을 한다는 것은 번지점프인데 끈이 떨어진 자유낙하입니다. 타력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맛본 그 사람만이 너그러운 사람, 손해볼 수 있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 이웃을 위해 자기 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넉넉한 돌보심이 먼저입니다.
퍼온글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68
퍼온글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68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 한방울 흘려줄 능력 인문학적 기독교(2) - 인간의 본 모습을 회복시키는 학문
인문학적 기독교(2) - 인간의 본 모습을 회복시키는 학문
인문학의 특징이 뭡니까? 인간의 불행에 대한 보편적인 공감의 능력을 확장시키는게 인문학 아닙니까? 인문학의 핵심은 뭡니까? 인문학은 문, 사, 철, 언 아닙니까? '문사철언'은 문학, 역사, 철학, 언어입니다.
언어는 뭡니까? 의사소통의 능력입니다. 문학은 뭡니까? 보편적인 공감의 능력입니다. 역사는 뭡니까? 역사상에 일어났던 모든 부조리한 일들과 정답지 못한 일에 대한 울분입니다. 철학은 뭡니까? 지혜를 가르치는 학문입니다. 이 네 가지를 완전히 종합한 학문이 뭡니까? 인문학입니다.
인간의 본 모습을 회복시키는 학문이런 학문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의 본 모습을 회복시키는 학문입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면, 인간은 로봇과 같은 실용적인 지식을 가지고 도구적인 지식들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 돼버립니다. 도구적 지식과 실용적 지식은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다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네이버 검색엔진은 지금 실연당하여 죽어버리려는 눈물에 공헌은 못합니다. 그 엄청난 도구적, 실용적, 통계적, 조작적 지식들과 지금의 경영학적, 경제학적, 공학적인, 이런 모든 지식들은 도구적 공학적 실용적 지능입니다. 그거는 인간성의 함량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아무런 도움이 안된단 말이 좀 과장됐습니까? 거의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인문학을 공부한 청년들이, 지금 세상 사람들 눈에 취직을 못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취직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 같다는 그런 의심과 똑같습니다. 그럼 뭘 믿어야 되냐면은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김우중과 이건희와 삼성과 메릴린쯔와 리먼브라더스같은 그런 회사의 이념을 믿지말고 인간의 심장과 고통에 빨리 공감하는 신적인 공감의 능력을 가지고, 신적인 동정과 긍휼의 능력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이 찾으시는 인물이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인물이란 겁니다. 이것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이 확신이 만일에 없으면 여러분은 문학과 역사와 철학과 언어를 공부하는 인문대에서는 아무런 것도 배울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인문학적 소양을 거부하는 순간 여러분에게 남겨진 지식은 뭡니까? 조작적 지식입니다. 실용적 지식입니다. 도구적 지식입니다. 그건 도덕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어제 엄청난 살인을 저지르고도 영어를 잘하면, 통역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내 인간성이 아무리 망가지고 내가 불효막심한 그런 인간이라도 내가 과학실험을 할 때, 그 플라스크와 실험도구가 내 인간성을 보고 응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나쁜 인간성을 가져도 실험은 결과가 나옵니다. 이런 도구적이고 조작적이고, 이런 실용적 지식들은 이 세상에 기계들이 공급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 한방울 흘려줄 능력
그러나 한방울의 눈물을 흘려줄 능력은 이건 인문학적 소양에서만 나오는 너무나 진귀하고 천연기념물 같은 희귀한 능력입니다. 이런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인문학이고 인문대학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런 인문학의 쇠퇴라는 것이 뭡니까? 이 세계의 손실입니다. 인문학이 쇠퇴하면 이 세계가 손해를 겪는 것이고, 한국에서 인문학이 쇠퇴하게 된 것은 박정희가 카이스트를 만들면서입니다.
당시 인문학적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사회에 공공연히 정의와 공평을 빌미로 사고를 많이 치니깐 카이스트 이공계 학생들에게 엄청난 모든 특혜를 몰아주기 위해서 카이스트를 만들었습니다.
의과대학과 법과대학에 가기위해서 아무도 기초학문 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면 의과대학과 법과대학이 그렇게 인기가 있고 한의예과가 인기가 높은 이유가 뭡니까? 그건 인간성으로 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도구적이고 실용적이고 조작적인 통계적인, 그런 사실적인 지식 가지고 다 하는 것이 그 학문 아닙니까? 근데 우리가 상담을 할 때 자판기처럼 할 것입니까? 데이터를 집어넣으면 그게 탁 자판기 응답이 나옵니까? 상담, 안됩니다. 상담은 뭡니까? 인간의 심장에 신적인 동정과 긍휼의 능력이 구비되지 않으면 상담 불가능 합니다.
인문학적 제자란 것은, 가내 수공업적 제자란 것은 그래서 수작업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고도의 인격적 측면에서 우리가 신뢰가 동반되고 여기에는 책임이 동반됩니다. 인문학은 지금 너무 이상주의를 표방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문학도들을, 청년들을 무능력하게 만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능력이 많게 만들지만 그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압도적인 선한 인간상,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여러분에게 심어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을 취직으로 이끌고 취업으로 이끄는 지름길입니다. 한번 보세요, 어떤 결론이 나오나. 여러분이 만일에 이렇게 의로운 성품과 선한 마음을 갖지 못한채 좋은데 취직을 해본들 직장에서 승진해본들 마지막 인생의 프라임 타임때 감옥가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50대 때 감옥가는 사람들은 20대 때 무슨 결심해서 가는거 아닙니다. 50대 때에는 내가 기어코 감옥한번 가야지 50대 때에는 내가 마지막으로 탈옥 한번 크게 해야지 해서 하는게 아닙니다. 그 사람의 50대의 타락을 20대 때 한번도 이웃의 고통에 공감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들은 쓰임직스러운 사람이 되지 못하는데, 가끔 인문학적 소양은 없고 인간성은 매우 더럽지만 도구적, 실용적, 조작적 지식이 탁월하여 출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출세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초적인 정의감과 의로움과 공평과 정의에 대한 기초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너무나 멀어진 삶을 살기 때문에, 반 사회적인 범죄에 연루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숭실대 기독교학과는 성경을 전공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208개 4년제 대학 중에서 전공과목으로 인류의 고전인 성경을 가르치는 대학은 6개입니다. 국내에 6개만 있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를 가르치는 대학이 6개입니다. 중세에 모든 대학이 1,000년동안 그렇게 열심히 했던 그 일을 지금 하는 대학이 208개 4년제 중에서 6개 밖에 없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가르치는 대학은 6개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한마디로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을 멸종시키는 나랍니다. 국가적으로 너무나 큰 실책입니다.
영어보다 더 중요한 것여러분 역발상이란 말 들어봤죠? 지금은 너무나 도구적 지식에 굉장히 미쳐있습니다. 누가 더 영어점수를 많이 받습니까? 사실은 영어점수, 토플점수 많이 받은 사람하고, 얼굴이 해맑게 웃고 생기있는 사람하고 누가 더 세일즈를 잘할지는 모릅니다. 토플점수 그것은 별거 아닙니다.
성경을 배우는 청년들의 얼굴들은 다른 청년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거는 쌍커풀 수술이 해결 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무슨 턱을 사각에서 삼각으로 깎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 성경을 배우는 청년들의 얼굴이 훨씬 낫냐 하면은 인문학적 소양이 그나마 있기 때문에 훨씬 고상해보이고 뭔가 그윽하게 보이고 뭔가 신비감이 좀 들어 보입니다.
물론 이런 인문학적 소양감이 많아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어를 빵점맞아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도구적, 실용적 지식보다 훨씬 압도하는 인문학적 소양이 있어야지만이 그 사람의 미래가 보장될 수 있고, 그 사람의 미래가, 그 사람이 얻었던 성공과 출세가 쓰임직스러운 결과를 가지고 사회공공재로 바쳐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단순히 남과 경쟁해서 더 좋은데 취직하려고 하는 그런 발상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같이 마태복음 9장 35절에서 36절에 있는것처럼 목자없이 불쌍히 유리방황하는 민중들을 위해서,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눈물이 몸서리치게 흘러내리며, 어찌하면 내가 저들을 도울 것인가 라는 그런 고민에 휩싸이는, 그런 하나님이 찾는 천연 기념물 같은, 그 설악산에 오랫동안, 천년동안 묵었던 산삼같은 그런 향기나는 인간성의 소유자가 되는 것, 이것이 청년시절에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있고 나서야 실용적 지식도 의미가 있고, 이것이 확보된 사람이어야만 영어공부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된 사람이 도구적, 조작적, 실용적 지식을 잔뜩 쌓아서 우선 출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기억하십시오. 그 사람들은 이런 인문학적 소양을 쌓지 않고, 하나님 말씀인 성경도 모르고, 예수님의 마음도 모르고, 하나님의 형상도 모르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능력도 없는 채로 질주하여 먼저 고시를 패스하고, 먼저 공무원되고, 먼저 무역상사에 취직해본들 그것이 그들의 영구적인 성공이 될 수 없습니다.
퍼온글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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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특징이 뭡니까? 인간의 불행에 대한 보편적인 공감의 능력을 확장시키는게 인문학 아닙니까? 인문학의 핵심은 뭡니까? 인문학은 문, 사, 철, 언 아닙니까? '문사철언'은 문학, 역사, 철학, 언어입니다.
언어는 뭡니까? 의사소통의 능력입니다. 문학은 뭡니까? 보편적인 공감의 능력입니다. 역사는 뭡니까? 역사상에 일어났던 모든 부조리한 일들과 정답지 못한 일에 대한 울분입니다. 철학은 뭡니까? 지혜를 가르치는 학문입니다. 이 네 가지를 완전히 종합한 학문이 뭡니까? 인문학입니다.
인간의 본 모습을 회복시키는 학문이런 학문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의 본 모습을 회복시키는 학문입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면, 인간은 로봇과 같은 실용적인 지식을 가지고 도구적인 지식들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 돼버립니다. 도구적 지식과 실용적 지식은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다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네이버 검색엔진은 지금 실연당하여 죽어버리려는 눈물에 공헌은 못합니다. 그 엄청난 도구적, 실용적, 통계적, 조작적 지식들과 지금의 경영학적, 경제학적, 공학적인, 이런 모든 지식들은 도구적 공학적 실용적 지능입니다. 그거는 인간성의 함량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아무런 도움이 안된단 말이 좀 과장됐습니까? 거의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인문학을 공부한 청년들이, 지금 세상 사람들 눈에 취직을 못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취직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 같다는 그런 의심과 똑같습니다. 그럼 뭘 믿어야 되냐면은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김우중과 이건희와 삼성과 메릴린쯔와 리먼브라더스같은 그런 회사의 이념을 믿지말고 인간의 심장과 고통에 빨리 공감하는 신적인 공감의 능력을 가지고, 신적인 동정과 긍휼의 능력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이 찾으시는 인물이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인물이란 겁니다. 이것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이 확신이 만일에 없으면 여러분은 문학과 역사와 철학과 언어를 공부하는 인문대에서는 아무런 것도 배울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인문학적 소양을 거부하는 순간 여러분에게 남겨진 지식은 뭡니까? 조작적 지식입니다. 실용적 지식입니다. 도구적 지식입니다. 그건 도덕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어제 엄청난 살인을 저지르고도 영어를 잘하면, 통역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내 인간성이 아무리 망가지고 내가 불효막심한 그런 인간이라도 내가 과학실험을 할 때, 그 플라스크와 실험도구가 내 인간성을 보고 응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나쁜 인간성을 가져도 실험은 결과가 나옵니다. 이런 도구적이고 조작적이고, 이런 실용적 지식들은 이 세상에 기계들이 공급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 한방울 흘려줄 능력
그러나 한방울의 눈물을 흘려줄 능력은 이건 인문학적 소양에서만 나오는 너무나 진귀하고 천연기념물 같은 희귀한 능력입니다. 이런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인문학이고 인문대학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런 인문학의 쇠퇴라는 것이 뭡니까? 이 세계의 손실입니다. 인문학이 쇠퇴하면 이 세계가 손해를 겪는 것이고, 한국에서 인문학이 쇠퇴하게 된 것은 박정희가 카이스트를 만들면서입니다.
당시 인문학적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사회에 공공연히 정의와 공평을 빌미로 사고를 많이 치니깐 카이스트 이공계 학생들에게 엄청난 모든 특혜를 몰아주기 위해서 카이스트를 만들었습니다.
의과대학과 법과대학에 가기위해서 아무도 기초학문 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면 의과대학과 법과대학이 그렇게 인기가 있고 한의예과가 인기가 높은 이유가 뭡니까? 그건 인간성으로 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도구적이고 실용적이고 조작적인 통계적인, 그런 사실적인 지식 가지고 다 하는 것이 그 학문 아닙니까? 근데 우리가 상담을 할 때 자판기처럼 할 것입니까? 데이터를 집어넣으면 그게 탁 자판기 응답이 나옵니까? 상담, 안됩니다. 상담은 뭡니까? 인간의 심장에 신적인 동정과 긍휼의 능력이 구비되지 않으면 상담 불가능 합니다.
인문학적 제자란 것은, 가내 수공업적 제자란 것은 그래서 수작업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고도의 인격적 측면에서 우리가 신뢰가 동반되고 여기에는 책임이 동반됩니다. 인문학은 지금 너무 이상주의를 표방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문학도들을, 청년들을 무능력하게 만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능력이 많게 만들지만 그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압도적인 선한 인간상,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여러분에게 심어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을 취직으로 이끌고 취업으로 이끄는 지름길입니다. 한번 보세요, 어떤 결론이 나오나. 여러분이 만일에 이렇게 의로운 성품과 선한 마음을 갖지 못한채 좋은데 취직을 해본들 직장에서 승진해본들 마지막 인생의 프라임 타임때 감옥가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50대 때 감옥가는 사람들은 20대 때 무슨 결심해서 가는거 아닙니다. 50대 때에는 내가 기어코 감옥한번 가야지 50대 때에는 내가 마지막으로 탈옥 한번 크게 해야지 해서 하는게 아닙니다. 그 사람의 50대의 타락을 20대 때 한번도 이웃의 고통에 공감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들은 쓰임직스러운 사람이 되지 못하는데, 가끔 인문학적 소양은 없고 인간성은 매우 더럽지만 도구적, 실용적, 조작적 지식이 탁월하여 출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출세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초적인 정의감과 의로움과 공평과 정의에 대한 기초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너무나 멀어진 삶을 살기 때문에, 반 사회적인 범죄에 연루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숭실대 기독교학과는 성경을 전공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208개 4년제 대학 중에서 전공과목으로 인류의 고전인 성경을 가르치는 대학은 6개입니다. 국내에 6개만 있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를 가르치는 대학이 6개입니다. 중세에 모든 대학이 1,000년동안 그렇게 열심히 했던 그 일을 지금 하는 대학이 208개 4년제 중에서 6개 밖에 없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가르치는 대학은 6개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한마디로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을 멸종시키는 나랍니다. 국가적으로 너무나 큰 실책입니다.
영어보다 더 중요한 것여러분 역발상이란 말 들어봤죠? 지금은 너무나 도구적 지식에 굉장히 미쳐있습니다. 누가 더 영어점수를 많이 받습니까? 사실은 영어점수, 토플점수 많이 받은 사람하고, 얼굴이 해맑게 웃고 생기있는 사람하고 누가 더 세일즈를 잘할지는 모릅니다. 토플점수 그것은 별거 아닙니다.
성경을 배우는 청년들의 얼굴들은 다른 청년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거는 쌍커풀 수술이 해결 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무슨 턱을 사각에서 삼각으로 깎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 성경을 배우는 청년들의 얼굴이 훨씬 낫냐 하면은 인문학적 소양이 그나마 있기 때문에 훨씬 고상해보이고 뭔가 그윽하게 보이고 뭔가 신비감이 좀 들어 보입니다.
물론 이런 인문학적 소양감이 많아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어를 빵점맞아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도구적, 실용적 지식보다 훨씬 압도하는 인문학적 소양이 있어야지만이 그 사람의 미래가 보장될 수 있고, 그 사람의 미래가, 그 사람이 얻었던 성공과 출세가 쓰임직스러운 결과를 가지고 사회공공재로 바쳐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단순히 남과 경쟁해서 더 좋은데 취직하려고 하는 그런 발상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같이 마태복음 9장 35절에서 36절에 있는것처럼 목자없이 불쌍히 유리방황하는 민중들을 위해서,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눈물이 몸서리치게 흘러내리며, 어찌하면 내가 저들을 도울 것인가 라는 그런 고민에 휩싸이는, 그런 하나님이 찾는 천연 기념물 같은, 그 설악산에 오랫동안, 천년동안 묵었던 산삼같은 그런 향기나는 인간성의 소유자가 되는 것, 이것이 청년시절에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있고 나서야 실용적 지식도 의미가 있고, 이것이 확보된 사람이어야만 영어공부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된 사람이 도구적, 조작적, 실용적 지식을 잔뜩 쌓아서 우선 출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기억하십시오. 그 사람들은 이런 인문학적 소양을 쌓지 않고, 하나님 말씀인 성경도 모르고, 예수님의 마음도 모르고, 하나님의 형상도 모르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능력도 없는 채로 질주하여 먼저 고시를 패스하고, 먼저 공무원되고, 먼저 무역상사에 취직해본들 그것이 그들의 영구적인 성공이 될 수 없습니다.
퍼온글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47
예수의 스팩에는 '인문학적 소양'이 있다 인문학적 기독교(1) - 몸과 목숨에 관한 학문
인문학적 기독교(1) - 몸과 목숨에 관한 학문
인문학, 그리고 거기에 포함되는 기독교학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영어나 중국어, 경영학 또는 전자 공학 등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기술과 학식적 연마에 비해서, 인문학이란 것은 너무나 공허하고 좀 애매모호하여, 이를 공부하는 것은 아무런 공부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숭고한 형상이 피어나는 곳 인문학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주신 품성을 만개시키는 학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숭고한 형상을 구현하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그런데 이 인문학은 오늘 말씀에 보니까, 뭔가 목숨에 관한 학문입니다. 목숨에 관한 학문이 의복과 음식과 거주할 것을 추구하는 학문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 하냐,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지 아니하냐.” 음식과 목숨 중에 뭐가 더 중요합니까? 목숨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음식을 좋은 걸 구하기 위해서 억만금의 돈이 필요합니까? 세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길로 갈 것인가? 돈을 섬길 것인가?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다른 어떤 거짓된 명분도 '돈을 섬길 것인가? 하나님을 섬길까?' 하는 이 양단의 갈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이 많은 염려와 걱정을 합니다. 이렇게 차일피일 아무것도, 기술도 연마하지 못하고, 그냥 인간성만 좋게 한다고 무엇이 이뤄질 것인가 하는 염려입니다. 다시 말해, 인문학적 소양만 외친다고 실용적으로 무엇이 해결 될 수 없다는 걱정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근접한 사람이 된다면, 반드시 세상에 쓰임직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구현한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근접한 사람이 훨씬 더 광범위하게 쓰임 받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가 찾는 스팩은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 마태복음 9장 35~36절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목자 없이 (유리)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먹고 마실 것이 없어 굶주린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내고, 이 군중 때문에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연민을 느낍니다. 굶주려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인간적 공감을 하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게 예수였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긴급한 사람이 뭡니까? 그는 가치중립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의 심장소리를 듣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영어공부가 중요하지만, 영어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눈물을 흘리고 쓰라린 가슴을 어루만지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웃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착한 마음씨, 그게 인문학적 소양입니다. 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 예수님이 찾는 인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을 섬기는 사람, 맘몬을 섬기는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6장 22절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이때 이 인문학적 소양의 중요성을 알게 해 주는 것이 눈입니다. 눈, 눈은 뭡니까? 관점입니다. 관점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관점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고, 네 관점, 눈이 나쁘면, 온 인생 전체가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그래서 돈을 하나님처럼 섬겨버리면, 음식과 옷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옷'인가, '몸'인가… 옷을 입을 몸이 더 중요합니까? 옷이 더 중요합니까? 연봉의 차이는 옷의 차이입니다. 연봉이 많은 사람은 좋은 옷을 사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문학적 소양의 '있고' '없음'은 이 ‘몸’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집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들은 옷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옷을 입는 그 사람의 인간성이 일그러지고 귀신처럼, 완전히 좀비처럼, 완전히 강시처럼, 완전히 미이라처럼 되어 그런 미이라의 얼굴을 한, 좀비의 얼굴을 한 그 사람에게 억만금 앙드레김의 옷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앙드레 김의 7천만원짜리 코트가 속물스럽게 일그러지고, 인간성이 야수처럼 바뀌어 버린, 그 사람, 한 마리의 야수적인 멧돼지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인간성이 멧돼지의 탐욕처럼 바뀌어 버려서 티라노사우르스처럼, 완전히 남의 피를 흘리고 사는, 그런 나쁜 인생관을 가지고 승리한 사람에게 무슨 옷이 필요하겠습니까? 몸이 제일 중요합니까? 음식이 중요합니까? 우리가 좋은 토플 점수를 받아, 취직을 해서 연봉이 높아지는 것도 모두 음식에 관한 것입니다. '옷'에 관한 것 일 뿐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인문학은 몸과 목숨에 관한 것입니다. 그 옷을 입을 몸을 만들어주고, 그 옷을 입을 목숨과 인생 전체를 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퍼온글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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