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체험이나 신체의 힘이 빠지는 현상, 타당한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
우리는 인간의 신체에 나타나는 어떤 영향들, 즉 눈물, 전율, 신음, 큰 소리를 지름, 육체적 고뇌, 혹은 신체적 힘이 빠지는 것 등에 의해서 그 역사가 참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영향력이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닌지를 신체에 나타난 그러한 영향들을 보고서 이렇다 혹은 저렇다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그런 규칙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의 신체에 그러한 영향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참된 성령의 영향력 속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참된 성령의 표지의 하나로 주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그와 같은 어떤 외적인 모습들을 보고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영향력 아래 있지 않다고 결론지을 아무런 근거 또한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명시적으로든 혹은 간접적으로든 신체에 나타나는 그런 영향들을 배척하는 영 분별 규칙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성(reason)도 그런 것들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신적이고 영원한 것들의 본성을 고려해 볼 때, 그리고 사람의 본성을 고려해 볼 때, 그리고 영과 몸 사이의 연합의 법칙들을 고려해 볼 때, 올바른 영향력, 즉 사실에 대한 참되고 타당한 깨달음이 신체에 그러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쉽게 설명됩니다.
진리에 대한 체험이 특이한 신체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탁월하심과 죽으심으로 보여 주신 그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참된 깨달음, 그리고 참된 영적인 사랑과 기쁨의 역사가 육체적 힘을 그렇게 많이 빼앗는다는 것도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우리 모두는 기꺼이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그리고 그를 향한 사랑과 그 안에서의 기쁨을 누리는 데 있어서, 우리들의 현재의 체질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아주 작은 부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런 영광과 사랑과 기쁨이 그들이 누릴 주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때때로 성도들의 신체적인 힘을 약화시키면서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하신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성경과 이성은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 생기는 신체의 특이한 현상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약 성경에 성령께서 비범하게 부어질 때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는 이유로 그러한 특이한 현상들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만일 다음과 같은 것이 인정된다면, 즉 만일 이성이나 성경의 어떤 규칙이 그러한 종류의 특이한 현상들, 특히 앞선 예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들을 배척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나는 그 반대의 주장이 아무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의 공포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깨달음으로 울거나, 신음하거나, 탄식한 것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신약 성경 안에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언급이 없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면 그 각성이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만큼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인간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통해서, 그리고 영원한 것들의 본질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는 역사의 본질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이런 신체적 효과들이 쉽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외적이고 부수적인 효과들에 대한 어떤 개별적인 언급이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내적인 움직임에 의해 나타나는 모든 외적이고, 부수적인 나타남을 성경이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러한 상황들이 구체적으로 거룩한 역사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기록들을 보면 그러한 일들이 그 시대에 반드시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즉, 초대교회 때에 성령의 커다란 부으심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의 신체에 비상한 영향들이 나타나는 일이 전적으로 없지는 않았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도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간수는 그러한 양상을 나타내 보인 한 사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극도의 고민과 경악으로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나아와 엎드렸습니다. 그 때 그가 엎드린 것은 바울과 실라에게 간청하거나 겸손하게 말을 걸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취한 자세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 당시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대신 그는 먼저 그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 16:29~30). 그의 엎드러짐은 그의 전율과 동일한 원인으로부터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시편 32편 3절에서 4절을 보면, 시편 기자가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 아래서 크게 부르짖고 그의 몸이 크게 쇠약해진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최소한 우리는 이것을 근거로, 어떤 경우에 죄의 각성이 그러한 외적인 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위의 표현 속에서 그 어떤 과장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시편 기자는 과장법으로 불합리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과장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말한 마음의 활동은 어떠한 정서적인 성향도 가지지 못한 것이 될 것입니다.
사랑에 압도되어 신체의 힘이 다 빠져버리는 경우
아가서를 보면, 신부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압도되어 그녀의 몸이 약해졌으며, 힘이 다 빠지게 되었다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되풀이하며 말합니다. "너희는 건포도로 나를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아 2: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아 5:8).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압도되어 힘이 다 빠지는 현상은 어떤 경우에도 성도들 가운데서도 동일한 이유로 당연히 일어날 수 있으며, 때때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열광주의자들이 가지는 인상들(impressions)은 보통 신체에 커다란 영향을 가져오는 경향이 있다는 이유로 신체에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들을 반대합니다. 이것은 설득력이 약한 반박입니다. 퀘이커 교도들이 언제나 떨기를 잘한다고 해서, 후에 바울이 사울이나 간수가 떤 것이 참된 양심의 각성으로 인해 떤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실로 크든 작든 신체에 미치는 효과들을 반대하는 그러한 모든 반박들은 너무나 경박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반박하는 사람들은 어두움 속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반박하는 사람들은 어떤 토대 위에서 자신들이 가고 있는지, 어떤 규칙에 의해서 자신들이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사물의 뿌리와 원인,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작용들과 정서들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의 규칙에 의해서 조사되고 시험되어야지 혈육의 움직임에 의해 판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생각과 감정이 클수록 상상력도 커진다
성령의 영향력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상상(imaginations)에 커다란 인상들을 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는 작용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상상에 많은 인상들을 가진다고 해서 그들이 그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온갖 종류의 체질을 가진 아주 많은 대중들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열렬한 생각과 강렬한 정서로 몰두할 때는, 사람들 사이에 상상력에 인상을 가지는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만일 그런 것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어느 정도의 상상력이 없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 정신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가 묵상하는 가운데 수반되는 상상적인 생각 없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혹은 다른 세계의 것들에 그의 사고를 고정시킬 수 있는지 나는 감히 묻고 싶습니다.
마음이 몰두하면 할수록 묵상과 정서는 더욱 강렬해지고, 상상의 관념은 일반적으로 더욱 생생하고 강력해집니다. 특별히 마음의 묵상과 정서가 놀라운 어떤 것에 집중할 때에 그렇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보는 것이 아주 새로운 어떤 것이거나, 그 보는 것이 두려움이나 기쁨 같은 격정을 줄 때 그렇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상태와 견해의 변화가 반대 극단으로 갑자기 일어났을 때, 예를 들어 극도로 두려워하던 것에서 극도로 황홀하고 기쁨에 넘치는 상태로 변하는 경우에 그렇습니다.
상상적인 것과 지적이고 영적인 것 사이를 잘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상상적인 부분에 너무 큰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설명함에 있어서 상상적인 부분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앞섭니다. 특별히 이해력이 모자라고 식별의 능력이 적은 사람들 중에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천국을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가?
상상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기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상력이라는 능력을 주셨고, 또한 이러한 기능을 어느 정도 사용하지 않고는 영적이거나 비가시적인 것을 생각할 수 없도록 우리들을 만드셨기 때문에 이러한 능력을 적당하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참으로 마음의 다른 기능들을 보조하게 됩니다. 그러나 종종 상상력이 너무 강하고 다른 기능들은 약해져서, 상상력이 다른 기능들을 제압하고 다른 기능들이 활동하는 것을 크게 방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상력의 기능을 참으로 신적인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셨다는 분명한 예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비교적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경우를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처지에까지 자신을 낮추셔서 그들을 어린 아이들같이 다루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거에 그의 교회가 무지와 미성년의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형들(types)과 외적인 나타남으로 그들을 지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그러한 추정이 불합리하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영혼들을 많이 다룬 사람들에게, 그들의 경험에 비추어 이것이 사실인지 판단하도록 해 보십시오.
성령의 역사의 영향력 속에 있는 몇몇 사람들이 그들의 특이한 체질로 인해 일종의 황홀경에 빠진다고 해서, 그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이 행한 역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황홀경 중에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그들의 마음이 일련의 강렬하고 유쾌한 상상으로 들어가고, 심지어 친국에까지 말려 올라가서 거기서 영광스러운 광경들을 보는 것처럼 되어도 말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러한 몇몇 경우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일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악마의 도움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경험들이 선지자들의 환상이나 성 바울이 천국으로 이끌려 간 경험(고후 12:1~4)과 같은 성질을 지녔다고 추정할 필요도 느끼지 않습니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어떤 사람이 경험하게 되는 마음의 이러한 열렬하고 강렬한 작용 아래에서의 인간의 본성뿐입니다. 신적인 것들의 영광스럽고 놀라운 위대함과 탁월함에 대한 참된 깨달음 및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혼을 황홀케 하는 안목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그들의 본성의 힘이 압도되는 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그와 같이 감동을 받고 압도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한 체질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의 상상력이 그처럼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 효과 즉, 황홀경에 빠지는 일은 그들의 마음이 강하게 작용할 때 나타나는 다른 효과들에 비례하는 것이며, 그것들과 유사한 사건일 뿐입니다. 사람의 사고가 집중되고, 정서가 강해지며, 전 영혼이 몰두하고 황홀케 되며 삼켜질 때는, 신체의 다른 모든 부분들이 영향을 받아서 그 힘을 다 빼앗겨 버리고, 모든 체질이 녹아 내리기 쉽게 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경우에 특별히 어떤 체질에 있어서 마음의 격렬한 묵상이나 활동과 가장 밀접하게 결부되어서 가장 특별한 영향을 받는 신체의 한 부분인 뇌가 특별히 압도되고 감동을 받아, 그 힘과 정신이 잠시 동안 다른 곳으로 떠나면서 외부 감각 기관들의 인상에 분리되고, 일련의 즐겁고 기쁨을 주는 상상 속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그 순간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일들을 잘못 해석하여 그것들이 마치 선지자들의 환상인 것처럼 지나치게 그것들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보거나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신적인 계시로 간주하며 때로는 앞으로 일어날 것에 대한, 하늘로부터 온 통지라고 간주합니다. 실제로 내가 알고 있는 몇몇 경우에, 그 결과는 다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비록 간접적으로 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그들이 처해 있는 특이한 마음의 상태, 그리고 그들이 경험하게 되는 신적인 것들에 대한 강렬하고 생생한 감각이 분명히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마음이 거룩한 상태로 계속되고, 영적인 것들의 탁월함에 대한 신적인 감각을 계속 유지하게 되고, 심지어 거기에 도취되는 경험도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그 경험에 수반되는 상상력이 단지 우발적이고, 그 상상 속에 혼돈되고, 부적당하고, 거짓된 어떤 것들이 일반적으로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거룩한 상태와 감각은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것 같습니다. 상상력을 통한 생생한 감각을 무조건 신적 계시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성령은 상상력을 통해 진리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주기도 하십니다.
부흥과 개혁의 때일수록 모조품을 경계하라
소위 성령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몇몇 사람들이 심각한 실수들을 범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였다고 해서, 그 사역 전체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몇몇 가짜들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참되지 않다는 논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모조품들이 생기는 것은 개혁의 시기에 항상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들여다보면, 커다란 종교의 부흥 치고 많은 모조품들이 등장하지 않은 경우는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시대를 보면 이러한 종류, 즉 지독한 이단과 비열한 행동에 빠진 사람들의 사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당시에 있었던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성도들로부터 뛰쳐 나갈 때까지, 참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형제들로, 성도들의 한 부분으로 잠시 동안 받아들여졌으며, 그들과 다르다고 의심받지 않았습니다(요일 2:19).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교사들과 직분자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주신 몇몇 사람들 가운데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6장의 시작 부분에 나옵니다. 유다가 이러한 예입니다.
유다는 열두 사도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치욕스러운 행동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발각되거나 의심받는 일이 없이 참된 경험을 한 제자들과 한 무리가 되어 오랫동안 계속 연합하였으며, 친밀하게 대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부터도 모든 외적인 일들에 있어서 참된 제자인 것처럼 대우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그에게 사도의 지위를 수여해 주셨으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하셨고,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들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알고 계셨지만, 그 당시에는 전지(全知)하신 심판자와 마음의 감찰자로서의 신분으로 옷 입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시적 교회의 수종자로서의 직임을 수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아버지의 수종자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자신의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그를 배척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가시적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과 다스리는 자들에게 하나의 모범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즉 그들이 교회를 운영할 때에는 마음의 감찰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말고, 보이는 것과 공개된 것을 통하여 하도록 말입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중에도 배교자가 생길 수 있다
한동안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되었던 몇몇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특출하게 충만하다고 여겨졌던 몇몇 사람들 중에 그러한 배교자들이 있었던 예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던 니골라가 그 한 예입니다.
그는 성령의 비상한 부으심이 있던 그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로 많은 그리스도인의 무리 중에서 집사의 직분에 선출되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 3절부터 5절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배반하여 야비한 행동을 하는 일단의 비열한 이단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부터 니골라당이라는 파당의 이름이 나왔습니다(계 2:6, 15).
종교개혁 시대에도 배반자가 있었습니다. 교황 정치 때부터 종교개혁의 때까지, 잠시 동안 종교개혁자들과 연합한 것처럼 보였다가 배반하여 가장 야비하고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르고 혐오스러운 행동을 한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부흥 시대에도 배반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위대한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종교가 부흥할 때에, 한동안 거기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떨어져 나가서, 기괴하고 엉뚱한 잘못들과 심한 열광주의에 빠져, 높은 영성과 완전함을 이루었다고 자랑하며, 다른 이들을 육적이라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사도 시대에 영지주의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여러 재세례파 분파들이 그러했습니다. 이것은 안토니 버제스(Anthony Burgess)가 <영적인 강화>(Spiritual Refining) 제1부, 설교 23쪽과 132쪽에서 진술한 것과 같습니다.
“최초의 훌륭한 종교 개혁가들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도구들은 여기서 쓰라린 갈등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형식주의자들과 전통적인 교황주의자들에게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 편으로는 종교개혁자들보다 더욱 계몽되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렸다. 그들은 성경을 고수하며 성경을 근거로 계시들을 검증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문자주의자’(Literists and Vowelists)로 불렀다. 성경의 단어들과 모음들에는 정통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을 가지지 못한 자들로 보았다.
어떤 도시에서든 복음의 참된 교리들이 교황제도를 막 본격적으로 바꾸어 놓으려고 하면, 곧장 그러한 견해들이 일어났다. 마치 좋은 곡식 가운데 가라지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커다란 분열이 일어났고, 종교개혁은 세상 사람들에게 혐오스럽고 증오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벌레들과 뱀들에게 열기와 온기를 주어서 땅 속에서 기어 나오게 한 것과 같았다. 그들은 루터를 매도하였고, 루터가 단지 육적인 복음만 보급시켰다고 말하였다.”
그러한 거친 열광주의자들의 몇몇 지도자들은 잠시 동안 최초의 종교개혁가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고, 특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청교도 시대에도 배반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찰스 1세 때와 공위(空位) 기간에 올리버 크롬웰 때 생명 있는 종교가 매우 우세하였는데, 그 때 그러한 일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뉴잉글랜드 초기 가장 순수했던 시기에, 경건이 넘쳤을 때, 그와 같은 일들이 발발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그러한 가라지를 뿌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참된 역사가 영광스럽게 수행되고 있지 않다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마귀가 하려고도, 할 수도 없는 성령 역사의 안전한 표지들
마귀가 설사 할 수 있다 할지라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어떤 일들이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양심을 깨우고, 죄로 말미암은 그들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게 하고, 그들에게 구주가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구주 되심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갖거나, 예수님을 더욱 높이 평가하고 더욱 존경하게 만들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성경의 필요성과 유용성, 그리고 진실성에 대한 생각을 가지거나, 성경에 귀를 기울이거나, 성경을 많이 사용하게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영혼의 문제에 관련된 일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진상(眞相)을 보여 주는 일을 착수하고자 하지 않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미혹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들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며, 그들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도록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하려고 해도 할 수 없고, 하려고도 하지 않는 다른 일들이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신적인 사랑의 영이나 그리스도인의 겸손의 영, 그리고 가난한 마음을 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그가 주려고 한다 하더라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마귀는 그 스스로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의 본성과 가장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에 비상한 영향력과 역사가 일어날 때, 그 곳에서 이러한 것들이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안전하게 결정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부수된 어떠한 다른 사정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을 촉진시키기 위해 다른 어떤 방편이나 수단들이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의 '판단이 큰 바다와 같으신'(시 36:6)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어떤 수단을 사용하여 그것을 수행하셨든지, 그리고 동물적인 마음 속에 어떠한 동요가 일어났든지, 사람들의 신체에 어떠한 효과가 나타났든지 간에 말입니다. 사도가 우리들에게 준 표지들은 홀로 서며, 스스로를 지지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한 표지들이 어디서 나타나든지 그것들은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셨음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이 표지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이상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리고 변칙적인 일이 보인다고 해서, 그리고 몇몇 고백자들의 행동에 실수가 있고 미혹된 일들과 불명예스러운 일들이 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제기하는 수천의 사소한 반대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지난 몇 달 동안에 나는 최근 이 지방에서 일어난 그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많은 사람들의 큰 시험거리가 된 특이한 현상들을 충분히 보고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크게 부르짖는다든지, 비명을 지르고, 커다란 신체적 고통을 느낀다든지, 몸의 힘이 빠진다든지 등과 같은 것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 다른 마을들에서 매우 많은 수의 그러한 사람들과 아주 개별적으로 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특이한 영향을 받고 있을 때나, 아니면 후에 때때로 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달 동안 그러한 역사의 방식과 결과를 보았고, 그 열매들을 보았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내가 오랫동안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전과 그 후에 영적인 관심을 가지고 내가 친밀하게 교제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경우에 있어서 내가 다음과 같이 증거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이 기꺼이 마음을 열고 대해 준 목격자의 관찰을 통해 그 역사의 본질과 성향을 판단해 본다면, 또한 부지런히 특별한 조사를 한 것으로 판단하면, 이 역사는 앞에서 말한 모든 표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많은 사례들에 있어서 그렇고, 모든 항목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특별히 그러한 비범한 역사의 직접적 영향 속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모든 표지들이 매우 크게 나타났습니다.
현재 신중해야 한다고만 주장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걸림돌만 보게 될 것
그리스도께서 현재 이 땅에 이토록 놀랍고도 은혜롭게 나타나고 계신데도, 신중함이라는 원리 위에서 행한다는 구실로, 그리고 이 역사의 결과가 어떠한지, 그리고 이 역사의 영향 속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열매들을 맺는지를 보기 위해 기다린다는 구실로 스스로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그리스도를 인정하기를 오랫동안 망설이는 정당한 구실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와 같이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이 무엇을 기다리는지를 잘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보기에 장애요소가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자 기다린다면, 그것은 마치 바보들이 강가에서 물이 모두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장애물이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면 안 됩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나……"(마 18:7).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실 때는 항상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the Word)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works) 도 그러합니다. 육적이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상하게 보이고, 모순으로 보이고, 어렵게 보이는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은 항상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었으며, 앞으로도 항상 그러할 것입니다. 많은 이에게 덫과 올가미일 것입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의 교회의 신앙의 영광스러운 부흥에 대해 말하는 그의 예언의 마지막 장에서,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을 것이며, 그는 백합화같이 자랄 것이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고, 그의 가지는 퍼질 것이며……” 등을 말하다가 마지막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습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서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서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호 14:9).
아마도 이 역사에 수반되는 장애물들은 어떤 점에 있어서는 증가할 것이며 감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신앙 고백자들 가운데서 배교의 사례들과 큰 불법의 사례들을 아마도 더욱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한 종류의 장애물들이 제거되면, 다른 장애물들과 부딪치게 될 것이 예상됩니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마치 그리스도의 비유와 같습니다(즉 그 역사의 진정성을 받아들이는 데 어느 정도의 어려움을 하나님이 일부러 만드셨다는 뜻이다. 역자 주).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에 어떤 어려움을 주는 것은 사람들의 성향과 영적인 감각을 시험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마련하신 것입니다. 부패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믿지 아니하고, 성미가 비꼬이고, 트집잡기를 좋아하는 영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보기는 보나 깨닫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마련된 것입니다(참조 마 13:13).
이 역사의 결과를 보고자 기다리는 사람들은 조금만 더 지나면 더욱 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기적을 보았으나, 그가 메시아이신 더 나은 증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다림은 허사였습니다. 그들의 장애물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그들은 그 끝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불신앙은 더욱 굳어져 갔습니다. 성경에서 말씀된 영광스러운 개혁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을 위해 기도하는 그들은 사실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도래를 위해 기도한 것과 같습니다. 만일 실제로 개혁이 온다면,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도 영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함부로 비난하기 전에 먼저 신중하게 조사해보라
지금의 부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역사를 인정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면서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가졌던 위장된 신중함은, 결국에는 이 점에 있어서 아마도 가장 신중치 못했던 것으로 판명이 날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서 그들은 그토록 위대한 축복에 조금이라도 참여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뉴잉글랜드에 그토록 풍성히 주셨던 신적인 빛과 은혜와 위로, 그리고 하늘에 속한 영원한 은택들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한 기회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샘이 그토록 놀라운 방식으로 열려서, 많은 이들이 그 곳으로 몰려가서 영혼의 필요를 충분히 공급받는 동안에, 그들은 멀리 서서 의심하고 의아해하며, 아무것도 받지 아니하고, 귀한 때가 다 지나갈 때까지 그와 같이 계속 있을 것 같습니다.
그토록 비범한 외적인 나타남이 수반된 그 역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일들이 나타난 곳으로 가서 자세하게 관찰하고 부지런하게 조사해 보는 등의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의심만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단지 두세 사례를 관찰한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관찰하여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는 안심하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정말 이상합니다. 만일 그러한 과정을 거친다면 분명히 큰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의 불확실한 보고들을 듣고, 이러한 일들에 대해 무시하는 말을 무모하게 한 사람들은 얼마나 큰 실수를 했겠습니까? 한 믿지 않는 유대인 가말리엘의 경고가 그들에게 보다 나은 신중함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 38절, 39절을 봅시다.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지금까지 내가 이 설교를 통해 말한 것이 현재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라는 확신을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히 주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이 후로는 그들이 적어도 방금 언급한 가말리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일 것을 나는 희망합니다. 이후로는 그 역사에 반대하지 않기를, 그 역사를 대적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기를, 간접적으로라도 그 역사를 불신하게 만드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기를 나는 희망합니다. 그들이 성령을 방해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영혼에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한 죄는 성령에 대해 짓는 죄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은혜롭게 역사하고 있는 성령을 대적해서 말하는 것보다,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를 대적해서 말하는 편이 차라리 낫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우리의 영혼이 성령의 은택을 받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령 훼방죄에 해당하는 경우
만일 아직도 이러한 일들에 대해 경멸적으로 계속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을 훼방 놓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는 것이니 주의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령께서 평소와 같지 않게 많이 부어지고, 사람들의 세속적 욕망과 미적지근함과 위선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책망되었을 때가 성령훼방죄가 나타나기 가장 쉬운 때입니다.
만일 지금과 같은 성령의 역사가 계속 진행된다면, 이 역사에 적의를 가지고 비난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마 몇몇 사람이 이러한 죄를 범하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아직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악의를 가지고 이러한 역사를 대적하고 책망하며, 그 역사를 마귀의 역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기 위해서는 다음 한 가지 요소만 더 갖추면 될 것입니다. 즉 그것은 내적인 양심의 찔림과 상반되게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비록 몇몇 사람들은 매우 신중해서 공개적으로 지금의 성령의 역사를 대적하거나 책망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아가셔서 그의 원수들을 대적하여 이토록 영광스럽게 역사하시는 오늘날 침묵하거나 활동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 특히 목사들은 사사기 52장 23절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그들에게 내린 저주를 받을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크신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고, 이 땅에서 이토록 놀라운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으므로, 우리 모두가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와 사정에 따라 그 역사를 통하여 크게 감화를 받고,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호의를 귀하게 여기는 것 외에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 역사를 통하여 보다 더 행복해지지 않는 사람은 훨씬 더 죄가 많아질 것이며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사람들에게는 받으실 만한 해(year)요 대단한 은혜와 은총의 때로 판명된 시기가 다른 이들에게는 복수의 날로 판명됩니다(사 61:2).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보내시면, 그 말씀은 하나님께로 헛되이 되돌아오지 않습니다(사 55:11). 그의 성령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에 계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경시하고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일이 그들과 관계없는 일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 중에 계셨음을 느끼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을 위로로 느끼지 않은 사람들은 대단한 슬픔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로지 선지자 에스겔만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셨을 때,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겔 2:5). 에스겔이 이 정도인데,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토록 놀랍게 나타나신 지금, 위대하신 여호와께서 뉴잉글랜드에 계셨음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실 것이라고 어느 누구보다 우리가 추측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흥을 반대할 빌미를 제공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들
이제 나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그 역사를 촉진시키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그들에게 나는 모든 실수와 비행을 피하기 위해 부지런히 주의하라고 간절히 권면하고자 합니다. 그 역사를 어둡게 하거나 빛을 잃게 만들 수 있는 일이나, 그 역사를 비난하려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에게 원인을 제공할 만한 일은 무엇이든지 피하기 위해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기' 위해 조심하였습니다(고후 11:12). 바로 그 사도는 디도를 권면합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엄격하게 살피고 주의하여 설교에 있어서나 행동에 있어서 '책망할 것이 없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우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마 10:16).
오늘날 우리들이 흠 없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성령의 역사의 대원수인 마귀가 자기 힘을 다해 특별히 우리를 시험하고자 할 것을 우리는 예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마귀가 특별히 우리들 중 누구를 어떤 일에 있어서든 맹목적이 되게 한다거나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면, 승리의 개가를 울릴 것입니다.
마귀는 부흥과 관계없는 사람 백 명을 넘어뜨리는 것보다 부흥에 관계된 사람 한 명을 넘어뜨리는 것이 그의 목적과 이익에 더 기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작은 어린이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포효하는 사자는 우리들에 비해 너무도 강합니다(벧전 5:8). 그리고 이 옛 뱀은 우리들에 비해 너무나 교활합니다(창 3:1).
영적으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겸손과 자기 부인,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우리들의 최선의 방어책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영적인 자만을 가장 엄히 경계해야 하며, 특이한 체험과 안위의 경험, 그리고 우리들 중 누군가가 받았을 수 있는 하늘의 높은 은혜들로 인해 자고해지는 것을 가장 엄격히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것 때문에 스스로를 높이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가 가장 탁월한 성도들 중에 포함되며 하늘의 특별한 총애를 받은 자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주님의 비밀이 특별히 우리와 함께 한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우리가 이 악한 세대에서 모든 사람들 위에 위대한 교사요 감찰자로 쓰임 받기에 합당하다는 생각 등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 교만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우리가 받은 그러한 은혜들을 대할 때에 특별한 태도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엄격하고 방심하지 않는 눈으로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혜와 분별력에 대해 크게 자만하여 우리 자신들이 선지자이거나 하늘의 특별한 대사들이나 된 것처럼 행동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위대하게 드러내 주실 때, 자기 눈 안에서만 눈부시면 안 됩니다. 모세는 산에서 하나님과 대화하였을 때, 그의 얼굴이 빛나서 아론과 백성들의 눈을 부시게 하였지만, 그 스스로는 눈부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출 34:29).
아무도 스스로 이러한 영적인 자만의 위험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최고의 마음 상태에 있을 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아마도 지금까지 살았던 성도들 중 가장 탁월한 성도라고 할 수 있지만)도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고 보셨습니다. 셋째 하늘에서 그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바로 그 때에도 그랬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을 보십시오.
자만은 마음 속에 있는 가장 악한 독사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들어온 첫 번째 죄입니다. 죄악이라는 전체 건물의 기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맨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일하는 방식이 가장 비밀스럽고, 속이기 쉬우며, 탐지하기 힘든 것입니다. 어떠한 욕망보다도 그러합니다. 그것은 쉽게 모든 것과 뒤섞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하나님께 더 미움을 받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복음의 정신에 반대되는 것도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없습니다. 그것만큼 마귀가 성도의 마음에 들어가도록 허용하고, 그래서 마귀의 미혹에 노출되도록 만드는 죄는 없습니다.
나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심지어 탁월한 성도들 가운데서도 그러한 일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탁월한 체험이나 하나님과의 특이한 교통을 한 이후에 즉시 마귀는 이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들을 미혹하였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의 눈을 여시고 그들을 구출해 내시기까지 그들은 그 길에서 헤매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야 자만심이 그들을 잘못되게 하였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적 충동과 직통 계시에 집착하지 말 것
많은 친부흥주의자들이 내적 충동을 직통 계시로 오해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지지하는 참된 동조자들 중 몇몇은 그들 마음의 충동과 강한 인상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그것들이 장차 일어날 어떤 일에 대한 하늘로부터 온 직접적인 통지인 것처럼, 혹은 그들이 해야 할 어떤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이나 뜻을 알리는 직접적인 통지인 것처럼 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 안에 어디에도 지시되어 있지 않고, 계시되지 않은 내용이었습니다. 오직 그들의 충동적인 생각 외에는 근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인상들은, 만일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라 하더라도, 성도들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구원하시는 은혜로운 영향력과는 상당히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그러한 충동들과 인상들은 본질상 성령의 특이한 은사에 속합니다. 옛날에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가졌던 바로 그런 영감입니다.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성령의 은혜와 그것들을 구별합니다.
성령의 은혜와 은사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몇몇 사람들이 그러한 충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가지 이유는 다가올 교회의 복된 시대의 영광은 부분적으로는 성령의 특이한 은사들이 회복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견해는 성령의 두 종류의 영향력, 즉 평상적이고 은혜로운 영향력과, 영감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주시는 특이한 영향력의 본질과 가치를 제대로 고려하거나 비교하지 못해서 생긴다고 나는 믿습니다.
전자는 단연 가장 탁월하고 은혜로운 것입니다. 사도는 고린도전서 12장 31절부터 그 사실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특이한 은사들에 대해 말하다가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성령의 영향력보다 더 탁월한 길을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후에 그는 다음 장에서 계속하여 보다 탁월한 길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혜 속에 있습니다. 요약하면, 박애(charity) 혹은 신적인 사랑(love)에 있습니다. 그 장 전체에 걸쳐서 그는 사랑이 영감(inspiration)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기적적인 은사로써 자신의 본성을 전달하시는 것보다 마음 속에서 구원하는 은혜로 그 자신의 본성을 영혼에게 더욱 많이 전달하십니다. 하나님의 복된 형상은 구원하는 은혜 속에 있지, 기적적인 은사에 있지 아니합니다. 영혼의 탁월함, 행복, 그리고 영광은 전자에 있지, 후자에 있지 아니합니다. 전자는 무한히 탁월한 열매를 맺게 하는 뿌리입니다.
구원과 하나님을 영원히 향유하는 것은 신적인 은혜에 약속되어 있는 것이지 영감에 약속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특이한 은사들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가증스러울 수 있으며, 지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영적이고 영원한 영혼의 생명은 성령의 특이한 은사들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은혜 안에만 존재합니다.
은혜는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것이지만 은사는 불신자에게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총애하시는 자들, 그리고 친애하는 자녀들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영향력은 성령의 은혜이지, 특이한 은사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특이한 은사들을 개들이나 돼지들에게 던져 주셨습니다. 발람, 사울, 유다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6장에 나오듯이 초기 교회의 사함 받지 못할 죄를 범한 어떤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심판 날에 많은 악한 사람들이 항변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가장 위대한 특권은 그들이 영감을 받았다거나 기적을 행한다거나 하는 것에 있지 아니하고, 그들의 탁월한 거룩함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은혜는 그들이 가진 특이한 은사들보다 수천 배나 더 고귀하고 영예로운 것이었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이 스스로 위안을 삼은 것은 자기가 왕이라든가 혹은 선지자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신적인 빛과 사랑, 기쁨을 전달하시는, 그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의 거룩한 영향력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환상이나 계시나 기적적인 은사에 있어서 모든 사도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겼습니다(참고 빌 3:8).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귀신들이 그들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보다도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고 가르쳐 주셨는데(눅 10:20), 실제로 사도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확실한 증거는 그들이 받은 은사들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은혜였습니다.
마음 속에 은혜를 가지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능력이 덮어짐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의 제2위의 몸을 자기 태에 임신한 복된 동정녀 마리아 자신이 가졌던 특권보다 더 높은 특권입니다. 누가복음 11장 27절부터 2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 12장 47절 등에도 나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조나단 에드워즈 클래식 2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부흥과개혁사)에서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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