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18, 2011

예수의 스팩에는 '인문학적 소양'이 있다 인문학적 기독교(1) - 몸과 목숨에 관한 학문



인문학적 기독교(1) - 몸과 목숨에 관한 학문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태복음 6:24~34)


▲ 김회권 교수 ⓒ꿈꾸는터 윤동혁

인문학, 그리고 거기에 포함되는 기독교학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영어나 중국어, 경영학 또는 전자 공학 등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기술과 학식적 연마에 비해서, 인문학이란 것은 너무나 공허하고 좀 애매모호하여, 이를 공부하는 것은 아무런 공부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숭고한 형상이 피어나는 곳
인문학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주신 품성을 만개시키는 학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숭고한 형상을 구현하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그런데 이 인문학은 오늘 말씀에 보니까, 뭔가 목숨에 관한 학문입니다. 목숨에 관한 학문이 의복과 음식과 거주할 것을 추구하는 학문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 하냐,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지 아니하냐.” 음식과 목숨 중에 뭐가 더 중요합니까? 목숨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음식을 좋은 걸 구하기 위해서 억만금의 돈이 필요합니까?

세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길로 갈 것인가? 돈을 섬길 것인가?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다른 어떤 거짓된 명분도 '돈을 섬길 것인가? 하나님을 섬길까?' 하는 이 양단의 갈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이 많은 염려와 걱정을 합니다. 이렇게 차일피일 아무것도, 기술도 연마하지 못하고, 그냥 인간성만 좋게 한다고 무엇이 이뤄질 것인가 하는 염려입니다. 다시 말해, 인문학적 소양만 외친다고 실용적으로 무엇이 해결 될 수 없다는 걱정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근접한 사람이 된다면, 반드시 세상에 쓰임직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구현한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근접한 사람이 훨씬 더 광범위하게 쓰임 받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가 찾는 스팩은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
마태복음 9장 35~36절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목자 없이 (유리)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먹고 마실 것이 없어 굶주린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내고, 이 군중 때문에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연민을 느낍니다. 굶주려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인간적 공감을 하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게 예수였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긴급한 사람이 뭡니까? 그는 가치중립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의 심장소리를 듣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영어공부가 중요하지만, 영어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눈물을 흘리고 쓰라린 가슴을 어루만지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웃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착한 마음씨, 그게 인문학적 소양입니다. 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 예수님이 찾는 인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을 섬기는 사람, 맘몬을 섬기는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6장 22절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이때 이 인문학적 소양의 중요성을 알게 해 주는 것이 눈입니다. 눈, 눈은 뭡니까? 관점입니다. 관점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관점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고, 네 관점, 눈이 나쁘면, 온 인생 전체가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그래서 돈을 하나님처럼 섬겨버리면, 음식과 옷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옷'인가, '몸'인가…
옷을 입을 몸이 더 중요합니까? 옷이 더 중요합니까? 연봉의 차이는 옷의 차이입니다. 연봉이 많은 사람은 좋은 옷을 사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문학적 소양의 '있고' '없음'은 이 ‘몸’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집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들은 옷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옷을 입는 그 사람의 인간성이 일그러지고 귀신처럼, 완전히 좀비처럼, 완전히 강시처럼, 완전히 미이라처럼 되어 그런 미이라의 얼굴을 한, 좀비의 얼굴을 한 그 사람에게 억만금 앙드레김의 옷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앙드레 김의 7천만원짜리 코트가 속물스럽게 일그러지고, 인간성이 야수처럼 바뀌어 버린, 그 사람, 한 마리의 야수적인 멧돼지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인간성이 멧돼지의 탐욕처럼 바뀌어 버려서 티라노사우르스처럼, 완전히 남의 피를 흘리고 사는, 그런 나쁜 인생관을 가지고 승리한 사람에게 무슨 옷이 필요하겠습니까?
몸이 제일 중요합니까? 음식이 중요합니까? 우리가 좋은 토플 점수를 받아, 취직을 해서 연봉이 높아지는 것도 모두 음식에 관한 것입니다. '옷'에 관한 것 일 뿐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인문학은 몸과 목숨에 관한 것입니다. 그 옷을 입을 몸을 만들어주고, 그 옷을 입을 목숨과 인생 전체를 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퍼온글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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