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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February 22, 2013

김회권 교수의 서재는 ‘놀이터’다.

http://media.godpia.com/mybook/mybook_view.asp?db_idx=67

내 서재는 나를 위한 놀이터

제게 서재는 새벽에 일어나 홀로 차지하는 놀이터입니다. 주로 서재에 혼자 있기 때문에 서재는 절대적으로 사적인 공간이자, 공적인 광장으로 나가는 하나의 관문이 됩니다. 파주에 있는 집 지하실 전체를 서재로 사용하는데 여기서 기도도 하고 말씀도 봅니다. 그렇게 제 놀이터에서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만나 교통합니다. 때로 큰 목소리로 찬양하기도 하는데 반지하라서 가족이나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습니다. (웃음)

서재를 가득 채운 다양한 분야의 책

저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일기와 독후감을 쓰며 자랐습니다.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세 살 터울의 형을 따라 시, 희곡, 소설, 철학서적, 역사서적 등을 읽었고요. 그렇게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다 보니, 삶의 단계마다 감동의 파문을 일으킨 책과 작가가 켜켜이 쌓여 지층을 이룹니다.




제 서재에는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습니다. 백과사전, 고문서, 고대 근동 문서로 시작해 최신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졌습니다. 그 중 신학서적이 가장 많고요. 다음이 성서학, 인문학, 역사, 철학, 문학 서적 등 입니다.

잡지도 많은데 그중에 아내가 좋아하는 <녹색평론(녹색평론사편집부)>이나 <민들레(민들레편집부)>도 있지요. 저는 신학자이자 목회자이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혼을 돌보고, 위로하고, 돕는 데 필요한 책이라면 어떤 책이든 제게 중요한 책이 되지요. 그래서 책을 고를 때도 개인적인 취향보다는 내가 할 과업의 성격에 맞는 책인가를 먼저 고려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사람의 모든 관심사를 추적하며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고상한 삶을 사는데 도움을 줄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라면 문학, 역사, 과학, 철학 어느 분야이건 추적합니다. 특히 저는 청년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한 번뿐인 인생을 보람차고 성실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에 관심이 많습니다. 유의미한 인생의 발자취를 남긴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제게는 중요합니다. 이것이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남다른 독서 공간

주로 서재나 소파, 햇빛이 잘 비치는 테라스에서 책을 읽지만, 그 외에 남다른 독서 공간이 두 군데 있습니다. 바로 버스 안 그리고 이불 속입니다. 광역버스는 3번째에서 7번째 줄까지가 진동이 덜합니다. 2,100원짜리 이동식 서재인 셈인데요. (웃음)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돌아왔을 때, 그동안 주로 영어만 사용해 모국어에 대한 굶주림과 허기가 심했습니다. 그런 저를 달래기 위해 서점으로 달려가 다시 산 책이 박경리의「토지」였습니다.

21권 중의 16권을 광역버스 안에서 읽었어요. 또 흔들림이 심한 750원짜리 마을버스를 탈 때는 만화책처럼 글자크기가 큰 책을 읽습니다. 버스 안에서도 손 안에 책만 있으면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그렇게 몰입해서 읽다가 내릴 정류장을 놓치고 지나간 적도 많습니다. 또 이불 속에서도 책을 많이 읽습니다. 그중에 특히 몰입해 읽었던 책들이 기억에 남습니다.「실록 한국기독교백년 (實錄 韓國基督敎百年)」에서 안창호, 조만식 등이 금강산에서 수양하며 남긴 수양회 강의록을 읽으며 눈물을 많이 쏟았습니다. 다양한 장소에서 독서를 하다 보면 동시에 2, 3권의 책을 같이 읽게 됩니다. 생체리듬에 따라 읽는 책의 종류를 달리하는데 정신이 맑을 때는 신학, 경제학, 철학 등의 원서나 논문을 읽습니다. 정신이 약간 느슨해져 지성적 논리를 따라가기 어려울 때는 감미로운 책,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떠올리게 하는 책을 읽습니다.

문자가 주는 유익

저는 영상보다 문자를 선호합니다. 영상으로 보면 졸리는데, 활자로 읽으면 상상력이 만개해 불꽃처럼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책은 상상력을 회화적, 공감각적으로 증폭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문자가 주는 유익’이라고 부릅니다. 의미 있게 연결된 문자는 제 뇌와 오감을 총체적으로 격동시킵니다. 상상력의 지평을 넓히거나 동정심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멀리 있는 이와 함께 있는 것 같은 가상적인 임재의식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문자는 상상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킵니다. <닥터 지바고>를 영화로 보면, 책 「닥터 지바고」의 감동이 줄어듭니다. 왜냐하면 한정된 시간 안에 책 속의 내용을 영상언어로 표현해야 해서 빨리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내가 책에서 눈으로 읽은 대사는 우리의 뇌수에 박히게 됩니다. 문자 없이 영상만 전달하면 메시지가 모호해지기 쉽지만, 문자가 있으면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책이 가장 나은 간접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6권의 책을 다 읽은 사람이 볼 때, 영화가 원작의 감동을 채 10%도 전달하지 못하더라고요.


언어적 감수성을 예민하게 한 작가와 작품들

영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하기 원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아일랜드 서정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의 시를 보면 영시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습니다.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존 키이츠(John Keats), 쉘리(Shelley), 바이런(Baron Byron) 같은 낭만주의 영시인들의 시를 읽으면 영어가 영시를 위해 태어난 언어라는 생각이 들고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오셀로>, <리어왕>, <햄릿> 같은 희곡을 읽다 보면 한 번 읽고 지나가기에 아까운 명대사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인간이 언어를 어디까지 정제하고 조탁할 수 있는지 그 극한을 맛볼 수 있습니다. 현대 영문 작가의 작품으로는 아일랜드 출신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더블린 사람들(Dubliners)」을 특히 추천합니다. 일종의 연작 단편 소설집인데 조이스의 압축적이고 시적인 문체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또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 제인 오스틴(Jane Austen) 같은 작가들도 들 수 있겠지요. 저는 19세기 사회소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소설을 많이 읽었습니다. 디킨스는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영국이 인간성을 상실해가던 때에 유머와 익살을 섞은 소설을 많이 썼습니다. 「어려운 시절(Hard Times)」,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을 예로 들 수 있고요. 주로 어린아이와 노인처럼 연약한 사람들이 주요 인물입니다. 19세기는 산업혁명 직후, 문자를 식별할 수 있는 대중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소설 장르가 꽃을 피웠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의 사회 소설에는 인간의 사회적 동정심과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1862년에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가 쓴 「레미제라블」, 1881년 발표된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The Brothers Karamazov)」,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y)의 사회 및 역사소설들 「전쟁과 평화(Voina i mir)」, 「부활(Вой наимир)」, 「안나 카레리나(Анна Каренина)」, 업턴 싱클레어(Upton Sinclair)의 「정글」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한결같이 아름답고, 위대하고, 깊이가 깊은 책들이지요. 이런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 대학을 다닌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겁니다.


기독교학과와 신학과를 놓고 고민하는 수험생에게

기독교학과 신학은 차이가 큽니다. 아주 과격하게 단순화하자면, 먼저 신학은 제도권 교회를 옹호하고 발전시키는 학문입니다. 반면 기독교학은 교회가 세상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기독교 신앙이 사람과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받았는지를 객관화하는 학문입니다. 기독교학은 인간 옹호적인 인문과학입니다. 기독교학은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파장과 기독교 신앙이 형성되는 사회적 맥락을 연구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틀 지우는 세계관, 기독교 신앙이 변화시켜야 할 세속사회의 정신성과 구조 같은 것을 연구합니다. 인간의 신앙주체성과 신앙행복을 옹호하며 교회의 잘못된 부분을 분별하고자 하는 학문입니다. 쉽게 말해 목사님이 설교를 잘해서 성도 수를 늘리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신학이라면, 목사님의 설교가 회중들에게 어떻게 호감을 사느냐를 분석하는 것이 기독교학입니다. 즉, 인문학적 관점에서 본 신학의 재인식이 기독교학입니다. 특히 숭실대는 그중에서 인문학적 전통이 매우 강한 학교입니다. 그래서 문학, 역사, 철학, 심리학, 사회학을 공부한 교수들이 기독교학을 가르칩니다. 기독교학과 교수들은 인문학과 신학을 융합시켜 가르치는 종합지성인입니다. 학생들은 신학교에 비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고, 기독교학을 공부한다면 지식의 저변을 확대하며 공부할 수 있어 신학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유익할 겁니다. 제자 중에는 목회자를 희망하는 학생도 있지만, 크리스천 작가나 언론인을 꿈꾸는 학생도 있습니다. 제약회사나 보험회사, 은행에 취직하기도 하고요. 기독교학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먼저 학과 홈페이지를 잘 살펴보고 기독교학과 교수의 책을 읽으실 것을 추천합니다. 박정신 교수의 「한국 기독교사 인식」, 「윤치호 일기2」, 이철 교수의 「사회 안에 교회 교회 안에 사회」, 오제은 교수의 「자기사랑 노트」, 권연경 교수의「로마서 산책」, 제 책「김회권 목사의 청년설교 1」등이 도움될 겁니다.

이 시대의 상처받은 청년을 위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보편적 낙관주의가 필요합니다. 둘째, 특수한 낙관주의가 필요합니다. 셋째, 최악의 상황에도 죽지 말아야 합니다.

보편적 낙관주의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확신입니다. 지금의 20대는 시급 4,500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하며, 불안한 장래와 고용기회가 촘촘하게 사람을 얽어 질식할 것 같은 상황에 부닥쳐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항시 불안한 사건과 상황에 묶어놓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앞과 뒤를 비관적인 전망이 막고 있지만, 이것이 영속적인 질서가 아니고 언젠가 바뀐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 ‘나’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전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일하면, 시간이 흘러 반드시 끝이 옵니다. 부모님의 이혼도, 실연도, 낙방도 언젠가는 끝날 찰나일 뿐입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 하나님의 일반적인 원칙의 힘이 작용해 내 불행감을 엷게 희석하고 끝내 극복하게 할겁니다.

특수한 낙관주의는, 내 안에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을 빨리 끝낼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지금의 나를 우울하게 만들고 압착된 것처럼 보이는 내 삶의 조건들이, 반전의 기회이자 반전의 재능, 반전의 원동력이 되어줄 겁니다. 고난이 있어야 그것을 빨리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수한 역경과 특수한 고난 가운데 반전의 문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독특한 비밀입니다. 시편 84편에 보면 시온으로 올라가는 순례객은 눈물을 쏟은 곳에서 샘물을 발견합니다. 이사야 12장 3절에서도 눈물의 자리가 구원의 우물물을 발견하는 기회가 됩니다. 가정이 흔들리고 나를 잃고 나라를 잃은 경험이 내 안의 윤동주적 감수성을 발견하게 하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같은 시를 쓰게 합니다. 에스겔서는 유배 중에 집필되었고, 단테도 유배 중에 그 유명한 「신곡」을 썼던 것처럼 말입니다. 역경이 굉장한 행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상황의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상상력을 키우려면, 독서를 많이 해야 합니다. 카를로 카레토(Carlo Carretto) 신부도 「주여 왜?(Perche Signore?)」라는 책에서 자신은 등산가를 돕는 구조대원이 되고 싶었지만, 다리를 저는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고백합니다. 괜찮습니다. 청년들이 좌절하는 이유는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시험 떨어지고, 실연당하고. 소위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사흘 동안 매장당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묻히면 묻히리라, 찌르면 찔리고, 죽이면 죽임을 당하겠다는 강한 정신입니다. 쓰디쓴 실패, 좌절과 공존할 줄 알고 불확실성을 견딜 수 있는 강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저자 모건 스콧 팩(Morgan Scott Peck)은 하버드 대학 입학이 보장되는 학교에 비싼 등록금을 내고 들어갑니다. 하지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3에 자퇴합니다. 그 일 때문에, 온 세상은 항상 흔들리고 불확실하므로 이 세상의 유일한 안정감은 ‘내가 언제나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세상에 안정 대신 동요와 불안이 있을 뿐이라는 데에 생각이 이른 스콧 펙은 ‘심층 심리학적 교란’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부서진 자, 흔들리는 자, 진동을 경험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갈대 같은 자에 대한 동정심은 이 자퇴생이 정신과 의사가 되도록 이끕니다.

밝은 곳에서 계속 박수받는 사람은 성공은 하나 얕은 사람에 그칩니다. 삼수 하다 떨어져 골방에 박힌 사람은 윤동주도,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도 될 수 있습니다. 낙방하고, 부르는 곳이 없는 사람도 책만 500여 권 넘게 읽고 나면 대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대결의식이 필요합니다. 시험에 안 떨어질 것처럼, 안 떨어진 자가 되기를 열망하면서 초조해하지 마세요. 정신적인 소시민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정신적 대범인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에는 무수한 반전의 찬스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실패를 절대화시키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의 비참함과 우울증을 영속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해는 다시 떠오르고, 반드시 반전의 기회는 옵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세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희년운동

저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바로 서기를 바랍니다. 성경과 제가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당’으로써의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질 성령 공동체, 고도로 민중자치적인 공동체, 대항사회, 대조사회인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전, 정통 기독교에서는 사도들과 속사도 교부(사도들의 뒤를 이어서 교회를 가르친 교사)들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애썼습니다. 우리의 과업은 정통 기독교의 원류로 돌아가서 초대 기독교의 열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예배당이 아니라 주중 6일, 사람들이 모이는 을지로, 충무로, 테헤란로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기독교는 무게 중심이 사후로 옮겨가 수세적인 기독교, 교회로 후퇴한 기독교, 교회가 신앙의 중심이 되어버린 기독교로 변질하였습니다. 희년운동은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메타포이자 패러다임입니다.




저는 ‘성경적 토지 정의 모임’, ‘희년함께’ 등에서 신학전문위원으로 활동합니다. 모두 토지가 하나님 것이라는 근본 사상을 바탕으로 합니다. 즉, 주거권, 주택권, 토지로부터 나온 소출의 향유권이 보장되는 것이 희년사회입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인 토지에서 나온 산물로부터 소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태생부터 토지에서 나온 산물을 누릴 권리를 갖고 태어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존권을 기본적으로 보장해주는 경제체제가 이 땅에 들어서야 합니다. 동시에 부동산 투기, 부당한 자산 불리기를 끊임없이 경계하는 것도 필수입니다. 대신 노동의욕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모종의 자존심과 인권을 고취할 수 있는 일거리 또는 이에 준하는 것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 희년운동입니다. 희년운동은 사유재산을 박탈하는 운동이 아닙니다. 희년선포는 하나님 은총이 인간의 탐욕을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은총의 힘으로 구원을 받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것을 나누는 겁니다. 복음의 나팔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의 것도, 무조건 빼앗아 평등하게 하겠다는 좌파와는 다릅니다. 희년운동에는 재물 나눔, 재산 나눔, 재능 나눔, 시간 나눔 등이 있고, 저 역시 제 재능이 특권의 빙거(憑據)가 되지 않도록 나눔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희년은 구원의 나팔소리를 들은 사람이 먼저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나팔소리가 크게 퍼질수록 자발적 나눔이 늘어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행복총량이 늘어납니다. 이것이 이어지면 희년사회가 실현될 것이고, 착한 정치도 가능해질 겁니다. 이 세상을 주님의 통치 안에 복속시킬 사람은 증오에 가득 찬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북받친 사람입니다.


여러분께 선물하고 싶은 책

가까운 사이에 책을 추천할 때 저는 그 사람에게 필요한 책을 골라 추천하고는 합니다. 먼저 목회자 후보생들과 하나님 나라 운동에 관심 있는 모든 교우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은 제 책「목회자 후보생들에게」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 나라 신학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 2장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이 땅에서 얼마나 위력적인 기관이 될 수 있는지, 얼마나 큰 영적 부피와 질량을 가지고 힘있게 세상을 격동시킬 수 있는지, 그 극한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일반 청년 교우들이 읽어도, 예수님이 말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갖고 계신 이유를 자세히 알 수 있어 도움이 될 겁니다. 저는 인터뷰를 거의 안 하는데 책의 부록에 제 신앙편력, 결혼생활, 독서생활 등에 대한 자전적인 내용도 담았습니다.

내면 지향성, 영성이 필요한 목회자에게는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의 책「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을 권합니다. 사회과학적 인식에 부족함을 느끼는 목회자는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같이 거시적 사회 변동이 담긴 책을 추천합니다. 이 경우에, 신앙 성공스토리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역동 관계를 규명한 사회과학서적을 많이 읽는 것이 탄탄한 설교에 도움이 될 겁니다. 남 교우들은 교회사 관련 도서를 많이 읽었으면 합니다. 2000년 교회사에서 한국 기독교의 위상을 알려면 교회사를 알아야 합니다. 특히 이만열 교수님, 박용규 교수님의 역사책을 추천합니다. 여 교우들은 경건 서적보다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의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논리적인 책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 「천국과 지옥의 이혼(The Great Divorce)」 등을 읽기 바랍니다. 또 본인들의 소비행위, 살림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어떤 맥락 속에서 만나는지 알 수 있는 책, 사회의식에 눈뜰 수 있는 책을 봤으면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나를 따르라(Following Jesus)」나 존 F. 캐버너(John F. Kavanaugh) 신부가 쓴 「소비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Following Christ in a consumer society)」, 칼 헨리(Carl Henry)의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 같은 책을 추천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왜 사회적으로 표현되며,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노동조합과 공산당보다 세상의 문제 해결에 왜 더 적극적이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겁니다. 또 개인적으로 신앙을 갖는 것을 넘어서서 사회적 지향성이 뚜렷한 메시지에 민감해야 하는 이유, 개인적인 고백과 달리 사회경제적으로 주님의 정의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에 대해 알게 될 겁니다. 특히 TV와 영상문화에 물든 사람들에게는 존 F. 캐버너(John F. Kavanaugh)의「소비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적극 추천합니다. 청년들은 칼 헨리(HENRY, Carl F. H.)의「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도 꼭 한번 읽어보았으면 합니다.


비전과 기도 제목

제 비전은 한국 대다수 교회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한국교회의 보편과 상식이 되기를 원합니다. 죽어서 천당에 가는 수세적인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속 사도교부들이 기독교 공인 이전까지 가졌던 신앙, 패기에 찬 공세적인 기독교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힘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이 북한을 무장해제시키고, 거룩한 흡수통일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


기도제목은 첫째로, 제가 신행일치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영음을 듣기 위해 안 보이는 곳에서도 부지런히 엎드리는 목회자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주셨으면 합니다.

- 인터뷰 진행&정리 : 신은정 작가

- 사진: 유재호 작가

- 기획·제작 : 사랑의교회 인터넷사역실






Friday, October 19, 2012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읽는 다니엘서 김회권


김회권 목사의 ‘하나님 나라 신학 강해 시리즈’ 제6권, 하나님 나라라는 키워드로 다니엘서 전체를 강해한 책이다. 어렵고 난해해서 부분적인 몇 가지 에피소드로만 알고 있던 다니엘서 전체를 읽고 묵상할 수 있도록, 권위 있는 주석과 해설 및 현실적인 적용점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특히, 묵시문학에 대한 해설, 신구약 중간기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예수께서 차용하신 “인자”라는 칭호 등에 대한 깊이 있고 탁월한 해설을 담고 있어,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뿐 아니라 성경을 통독하려는 평신도들에게도 유익한 강해서다.
바벨론의 세계주재권은 헛것처럼 사라지고 
인자(人子)의 나라만이 영영히 서리라!

다니엘서는 구약성경이라는 산맥 위에 솟아 있는 계시의 영봉이다. 산 아래(1-6장)는 성도들의 화려한 영적 분투와 승리를 보여주는 영적 풍광이며, 산 위(7-12장)는 악마적 세력과 혈투를 벌이는 성도들의 죽음과 부활을 보여주는 영적 고지다.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철저한 세계 통치를 믿으며, 아무리 세속적인 사회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간섭과 통치를 벗어난 세속사회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다니엘서는 온 세계, 세계 만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왕권을 찬양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바벨론 제국이나 페르시아 제국 같은 힘과 패권적·타인지배적 삶의 방식에 굴복하지 말고,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전향하도록 격려받는다.
이 강해서는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다니엘서 전체를 강해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세계 통치의 흔적이 사라진 시대에, 홀로 세상에 던져졌다는 외로움 속에서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아가기 쉽다. 이런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조와 절개를 지키기보다는 현재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짓 주(主)들의 유혹과 위협에 투항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참여할 기회를 잃게 된다.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는 바람에 날리는 겨가 되어 버린다. 기회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이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영토에 거주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칙령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 온갖 위험과 불편을 감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명령과 위로, 약속과 호소가 들린다. 악의 위협과 유혹 앞에서도 하나님의 참 자녀들은 신비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듣고, “내 백성아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호소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수 있다. 다니엘서는 그런 점에서 독자들 스스로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영토에 거주하는 하나님의 참 백성인지, 세상에 던져진 배교자인지를 검증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이 강해서와 함께 다니엘서를 읽는 동안,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이 밝아지며 하나님 나라의 영토로 돌아가려는 회개의 열정이 용솟음치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의 참 자녀이며 다니엘서의 주인공들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다 읽고 덮을 때 순교적 신앙의 위력과 그것의 종국인 부활의 소망으로 기뻐하게 될 것이다.

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지식"을 선사하시고 모든 책과 지혜에 능통하게 하시고 특별히 다니엘에게는 이상과 몽조를 깨닫는 특별 은사를 허락하셨다(1:17; 5:11-12). 이들에게서 알 수 있듯이, 경건한 기독청년은 단지 도덕적으로 선하고 윤리적으로 정결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경영하고 운영하는 일반 학문과 기술 분야에서도 탁월성을 과시할 수 있어야 한다. 탁월한 실력 자체가 도덕성을 대신할 수는 없으나 어떤 때는 굉장한 도덕적 의미를 가질 때가 있다. 억울한 해고나 죽음의 위기로부터 자신과 직장 동료를 구해 내는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니엘의 환상 및 꿈 해석 능력은 이런 의미의 전문가적 실력이 발휘된 좋은 예다.
- 2강, 101쪽
저자 서문
서론

1. 묵시문학과 다니엘서의 메시지
2. 다니엘서의 구조
3. 다니엘서와 마카베오 항쟁사와의 관계
4. 마카베오 상하서의 메시지
5. 다니엘서와 마카베오 상하서의 상응관계와 긴장점
6. 다니엘서에 대한 역사적-비평적 연구 성과와 이에 대한 보수적 연구자들의 반론
7. 우리는 다니엘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
1강_ 뜻을 정한 다니엘과 세 친구들(1장)
2강_ 이상과 몽조를 깨닫는 예언자이자 바벨론 제국의 국가경영 컨설턴트 다니엘(2장)
3강_ 왕이여, 우리는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3장)
4강_ 왕이여,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4장)
5강_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5장)
6강_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에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다니엘(6장)
7강_ 구름 타고 오는 인자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 앞에 무너지는 세계 제국들(7장)
8강_ 인자야, 깨달아 알라!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을(8장)
9강_ 우리 하나님이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9장)
10강_ 은총을 크게 받은 이여,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10장)
11강_ 오직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고 용맹을 발하리라(11장)
12강_ 많은 사람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은 궁창의 별처럼 빛나리라(12장)

다니엘서 전체 결론


책의 일부....

"신학적으로 보면,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집단이다. 현대 경제학에서 보면 이들은 경제 발전의 어둔 음영에 사는 자들로서 기껏해야 복지정책의 수혜자일 뿐 거의 "없는 자"처럼 취급당한다. 나라의 각종 경제지표를 하향 평준화하는 존재다. 한마디로 국민 대우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존재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력 있는 국경선은 미국과 러시아, 한국과 일본, 동구와 서구 사이에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가난하지 않은 자들 사이에 그어져 있다. 그 국경선 이쪽과 저쪽은 너무나도 다른 나라다. 가난한 자들이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곳은 하나님 나라밖에 없다. 그래서 경제학에서는 천대받는 가난한 자들이 신학적으로는 우대받는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상속 자산이기 때문이다(눅 6:20; 마 5:3). 이런 이유로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 계약으로 묶여 있는 특별 백성이라 불린다. 이 말은 어떤 특정 정치 이데올로기를 신격화 하는 말이 전혀 아니다. 공산당이나 노동당 등 특정 정당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정치 조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조차 하지 못할 연약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은 모세오경, 예언서, 잠언서와 시편, 공관복음서, 바울 서신 등 성경 66권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강조된다.


.....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도덕적 선량함 때문에, 또 가난한 자들이 순박하고 상대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상의 권력구조 속에서 아무에게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는 절대 고독자인 가난한 자들의 눈물과 탄식에 슬픔과 동정을 느끼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이시며, 착취와 압제, 자원 약탈과 기회 박탈 등 불의한 사회구조에 분노하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경제학과 정반대의 입장에서 가난한 자들을 바라본다. 가난한 자, 장애인, 연약한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 호의와 복을 촉발하는 신학적 자산이다. 그들은 결코 이방인도 아니요 주변인도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애로운 시선과 거룩한 보호를 누리는 선민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가난한 자들을 우대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와 동맹을 맺은 나라다."

"기독교 신앙이 지난 세월 동안 우리 겨레를 감화시켰던 불교나 유교처럼 공평무사한 지도자와 인재들을 배출해 내고 있는가? 참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같이 고민해 볼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우리 세대는 근현대사의 초입에 한국교회가 발휘했던 지도력을 충분히 계승하는 데 부족함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국교회의 영적 쇄신과 신학적 사유의 성숙, 신앙 실천의 심화를 통해 한국 사회를 공평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공동체로 변혁하라는 사명에 직면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한 나라의 중심 종교가 불교나, 유교나, 기독교냐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종교의 신앙 실천이 하나님의 통치 원리에 더욱 충실하느냐이다. 기독교회는 스스로 주창하는 그 절대적 진리(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신봉자답게 절대적 의미의 진리 실천에 투신해야 할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 옳음을 스스로에게 선포하고 그 실천의 책임을 능히 감당해야 한다. 
 타종교에 대한 피상적 우월감을 피력하거나 우리 민족사의 한 시기에 상당한 고등종교 역할을 맡았던 타종교를 폄하하는 것은 교회 본연의 복음 전파의 일부가 아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이 확실한 진리를,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각인시키고 실천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애국가는 대한민국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존속되기를(대한민국 만세!) 희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하나님 나라를 닮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다니엘서 5장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한 나라의 왕의 통치 연대를 정하시기 위해 가난한 자들에 대한 공동체의 사랑과 돌봄, 권력 엘리트들의 탈법과 불법에 대한 사법적 견제력, 그리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회 구성원들을 위한 사회적 재활 및 복구 에너지의 양 등을 측량하셔서 나라의 존속 연대를 정하신다는 사실을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진리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이런 벨사살 같은 자는 세계 도처에 있다. 그들은 자신을 존숭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이룬 성취에 도취되어 자신의 성취가 가져다 준 권력을 극단까지 사용한다. 멸망의 날 직전까지도 그들은 알지 못한다. 현대는 가히 자아숭배의 세기다. 자기를 숭배하고 자기 매력을 극대화하고 상품화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시대다. 과도한 자부심 문화와 자기선전 문화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때때로 교만은 악이 아니라 덕처럼 칭송받는다. 
 운동 경기나 전쟁,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서 이긴자들의 자기도취적 환호성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우승한 선수들의 자기영화적 도취, 이긴 자들의 함성 등, 세계는 온통 이긴 자들의 자기자랑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이들은 벨사살과 같은 인간들이다. 벨사살처럼 자기 권력과 부귀영화에 취해서 하나님의 저울을 무시하는 자가 바로 무신론자다. 그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전능하신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교만은 인간의 자아를 무한히 부풀려, 하나님은 너무 작게 보이게 하고 자신은 너무 크게 보이게 만든다. 부풀려진 자아를 가진 인간에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교만의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만든다."
--김회권,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읽는 다니엘서>> 중에서

Sunday, December 18, 2011

"결국 영어점수 높은 놈이 출세한다고요?" 인문학적 기독교(4) - 영어공부보다 중요한 필독 도서


 인문학적 기독교(4) - 누가 악인이 되느냐?
  
▲ ⓒ크로스로 윤동혁


여러분이 청년일 때 하나님의 넉넉한 돌보심을 확신한다면, 여러분은 모든 공부가 갑자기 너무 너무 중요해지고 신학으로 돌변합니다. 그때는 영문학도 신학이 되고, 경영학도 신학이 되고, 전자공학도 신학이 되고, 문학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넉넉한 돌보심을 확신하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우리 청년들이 공부하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공부인가를 실감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나 세상에 대해서 내일 일을 염려할 수 있습니다. 내일 일을 누가 의복을 위해 염려하는, 좀 좋은 옷을 입으려고 염려하는 것, 좀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염려하는 것. 그것이 취직 잘 하려고 하는 염려입니다. 외국에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라고 하는 여사가 쓴 <오래된 미래>라는 책을 읽어 보셨습니까?
 
적극적 선 / 적극적 의 / 적극적 믿음

  
 
제목 : 오래된 미래
카테고리 : 시/에세이
지은이 :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중앙북스, 2007년)


이 책 두껍지 않습니다.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데이비드 쓰로우와 마하트마 간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만일에 기꺼이 오막살이에 살 마음을 갖지 않으면 이 세계는 항상 탐욕의 전쟁에 휩쓸려 갈 수 밖에 없다.”
내가 오막살이에 살 각오를 해야 이웃과 평안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내가 고대황실에서, 내가 엄청 좋은 아파트에서 살려고 몸부림하면 나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전 노원구청장과 송파구청장간의 싸움이 벌어졌던 때가 있습니다. 노원구청장에게 노원구에 25평짜리 국민주택을 지으라고 계속 국토해양부인지 무슨 토지공사인지에서 촉구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송파구청장은 더 많이 지어야 했습니다. 토지공사에서 주택공사에서 국민주택분양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공정택이라는 교육감이 송파구청장에게 “강남에는 25평이하의 국민주택을 지으면 안된다. 강남이 강남땅값이 똥값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그랬더니 그것을 듣고 노원구청장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노원구는 지금 이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국민주택을 많이 지을수록 우리 노원은 슬럼화되고 빈민 동굴화 되는데 우리 노원구만 이렇게 못사는 사람들이 사는 집성촌이 되야되겠냐. 송파구 너희들도 좀 지어라.”
일찍이 서초구 우면동 사람들이 국민주택을 결사반대 해서 못사는 사람들을 쫓아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이 서초구 부녀회의 회원이 되어 머리띠 매고 데모하러 나온 사람들로 TV에 찍힐 수가 있습니다.
“국민주택 결사반대 ○○대 2007학번” 이렇게 막 나올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이 바로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나를 존경한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그런 사람들입니다. 제 설교를 좋아한다고 해 놓고 분명히 서초구 우면동 사람처럼 국민주택을 몰아내기 위해서 결사반대하면서 님비현상을 막 불러 일으켰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25평 국민주택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과 한동네 살기 싫다는 것 아닙니까? 아직도 이 악한 일이 지금 서울 백주대낮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송파구는 국민주택 이백만호가 들어오면 송파구 땅값이 반값으로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무섭게 발버둥쳤었습니다. 얼마나 악한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 청년들이 사는 세상은, 우리 청년들이 직면하는 세상은 어설프게 의로운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어설프게 믿는 사람은 금방 잠재적으로 악한 사람이 되거나, 악한 자의 동맹세가 될 만큼, 악인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적극적으로 선하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의롭지 않으면, 절대로 믿음의 사람으로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나이가 들어 서초구 우면동에 살고, 75평 빌라에 사는 사모님이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25평 빌라를 우리 동네에 지을 수 없다고 사인하시겠습니까? 데모하시겠습니까? "나는 옛날에 김회권 교수의 강의를 들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할 것입니까? 그렇다면 주민들이 빨간 스프레이로 “죽어라!” 이렇게 문앞에 테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내 차가 빵꾸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의로운 열매를 맺지 않으면, 잠재적인 악의 동맹세력이 되어서 악한자의 이름으로 분류됩니다.
 
누가 악인이 되느냐?
  
 
제목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카테고리 : 인문
지은이 : 한나 아렌트 (한길사, 2006년)

여러분 잘 들으세요. 성질이 더러워서, 성질이 악해서 악한 일을 하는 사람보다, 악역을 맡은 악한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악한 일을 합니다. 성질은 좋지만 악역을 맡아서 하는, 평범한 악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더 악을 많이 범하는 겁니다. 성질이 더러워서 악을 범하는 사람은 징역 2년 받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이란 말은 무엇입니까? 한나 아렌트가 아우슈비츠에서 백오십만을 죽였던 그 아돌프 아이히만 중령이 얼마나 악한 사람인가를 보러 갔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완전히 엄청난 악인처럼 생길 줄 알았습니다.
왜? 그렇게 악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열리는 전범재판에 갔던 사람들이 아돌프 아이히만의 얼굴을 보고 완전히 뒤로 넘어졌습니다. 너무나 모범적이고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뭐냐 하면, 우리가 성질이 더러워서 악한 일을 하는 것보다 성질이 더러워서 좀 절제를 못해서 악한 일을 하는 사람보다, 지식을 가지고 도구적, 조작적 지식을 가지고 월 스트리트 금융파산한 그 악한 인간들이 더 악한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도구적, 조작적 지식을 가지고 엄청난 악을 범한 인간들이 더 많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악이란 너무나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악의 평범성입니다.
그럼 누가 악인이 되느냐?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결과를 생각할 줄 모르는, 공감의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 상식적인 동정심이 없는 사람, 다른 사람이 죽겠다고 아우성쳐도 그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관료적 성실성. 이 관료적 성실성이 가장 악한 것입니다. 

이 관료적 성실성이 예수님이 죄없는 자인줄을 알았지만 “네가 가이사의 총독의 자리에 있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냐? 이 예수를 사형에 처하지 않으면 너는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 네가 총독의 자리를 보전하려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라는 말에 예수가 무죄인 것을 확신했던 로마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왜? 관료적 성실성, 자기 관료적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바로 한나 아렌트는 무사유의 죄라고 했습니다.

무사유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이 박힐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여 저들이 무슨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로마 제국의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떵떵 못박으면서 그들이 메시아 하나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들이 행정고시, 사법고시 출세하면 빌라도 같은 일을 할 수 밖에 없고, 아돌프 아히만 같은 일을 관료적 위계적 성실성으로, 그런 악한 일을 해버립니다.

프리모 레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 아우슈비츠 생존자입니다. 이 프리모 레비라는 사람은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던 비트프랭크과 맞먹는 정을 나누었습니다. 여러분 들어보았습니까?
 
  
 
제목 : 이것이 인간인가
카테고리 : 시/에세이
지은이 : 프리모 레비 (돌베개, 2007년)


여러분 프리모 래비가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을 썼는데, 그 프리모 레비가 쓴 <이것이 인간인가> 라는 책 속에 나오는 아우슈비츠의 병사들, 그 독일 병정들의 잔학무도함 앞에 자기를 저주합니다. 이 잔학무도한 아우슈비츠의 독일 병정들에게 놀이개감이 된 자기 인생을 증오합니다. 증오합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가장 슬픔을 많이 느낀 사람이 최근에 돌아가신 알렉산드라 솔제니친입니다.

여러분께서 “에이 교수님 그렇지 않죠. 내가 아무리 교수님 그래봤자 결국 영어실력 좋은 놈이 출세하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그 스피디한 출세가, 그 신속한 출세가 아무 소용이 없는 거구나 그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점점 확신이 듭니다. 나는 우리 청년 여러분들이 굳건한 하나님의 믿음으로 인문학적 소양과 문사철언, 이 세상에 가장 근본인 인간의 도리를 문학, 역사, 철학, 언어 그리고 이 모든걸 종합하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고양하면 반드시 여러분이 일자리를 구하는 것에 어떤 어려움도 나는 없으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과 도킹하기

  
 
제목 : 모세 오경
카테고리 : 종교
지은이 : 김회권 (대한기독교서회, 2005년)

난 믿습니다. 여러분 진짜 어디서 지성을 연마하며, 어디서 인문학적 소양을 개발하며, 어디서 문사철언을 통합하는 이런 기독교 신앙을 배울 것입니까? 어디서 이 불확실한 시대에 하나님 없이 돈의 힘으로 돌파할 것입니까? 하나님 없이는 돌파할 수 없는 이 피조물의 한계를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러분이 굳건한 기독교 신앙이 있는 것이 인문학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굳건한 기독교 신앙은 여러분이 교회 좀 다니고 약간 기독교 동아리에서 왔다리 갔다리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정말로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고요하고 절대적인 만남의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회의가 들거든 산에 올라가서 몇 일씩 금식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있는 신앙에 회의가 들고 믿어지지 않으면 정말로 기독교 신앙을 포기할 것인지 극적으로 도킹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저는 금식기도, 산에 올라가서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핸드폰 끊고 모든 하나님의 메시지 외에는 모든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끊고 수직적인 하나님 계시를 기대하기 위해서 몰입해보는, 말씀에 몰입해보고 기도에 몰입해보는 찬양에 몰입해보고 명상에 몰입해보는 그런 시간이 청년기에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그런 격조높은 영적 거성들이 우리 청년들에게서 우뚝우뚝 몇 사람씩 솟아나기를 바랍니다. 고만고만하고 이렇게 들어도 그만 안들어도 되는 잡담을 지껄이는 수준의 대화가 아니라 선배 한마디가 친구 한마디가 영적인 울림과 파도를 일으키는 그런 영적인 신령한 거인들의 하나님의 실제를 맛본 사람들의 신앙하나가 격조높은 믿음하나가 왜 우리 청년들 사이에 수수되기를 나는 바랍니다.


배우자, 소명, 직업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것 인문학적 기독교(3) - 반드시 성공하는 사람의 공통점


인문학적 기독교(3) -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설계해 가는 사람 
저는 나이가 여러분보다 많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성공과 실패를 봤습니다. 지금 내 나이에서만 보더라도 어떻게 살면 반드시 실패 하는가, 어떻게 살면 반드시 성공 하는가 그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내가 초롱초롱한 생기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 무위도식하면서 사람구실 못하는 사람을 한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절묘하게 쓰임 받고 심지어 생기롭고 얼굴이 생기로 가득차고 아름답고 발랄합니다.

자기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너무나 너무나 아름다운 배필을 만나는 것을 수없이 봤습니다. 한 사람도 자기 짝을 찾지 못해 슬피 우는 외기러기떼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 ⓒ크로스로 윤동혁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설계해 가는 사람
아름답고 생기로운 그 마스크를 하고 청년시절을 마치면서, 미래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하늘의 신뢰감을 가진 채 청년기를 마치는 것. 그것은 조작적으로 갑자기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닌, 누적된 신앙의 투신이 필요한 일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옷보다도, 이 들꽃 하나만, 이 들꽃의 아름다움이 솔로몬의 영화보다 낫다는, 그런 강한 확신이 있어야만 인문학도가 되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분명한 것은 여러분이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채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되지 않고, 그런 공감과 동정심도 없는 채로 살면 출세도 못할 뿐만 아니라 쓰임 받지를 못합니다. 아무데도 쓸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 사람들의 눈 속에서 한 1~20년간 출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의 마지막은 파멸이란 것입니다. 여러분은 뭘 부러워해야 될지 알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을 제일 부러워해야 합니까?

아침마다 규칙적으로 기도가 가능한 사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에 무한한 신뢰를, 남들이 조롱하고, 자기 안에서 넘치는 조롱이 자기 신앙을 조롱해도 우직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선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면서 기도하고, 청년시절 자기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설계해 가는 사람을 제일 부러워해야 됩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성공 합니다. 그 사람의 성공은 자기의 성공이 아니라 부의 근원에서 살게 됩니다. 이걸 여러분 부러워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주 낮은 대중적 신변잡기, 그런 진부한 일상의 담화에만 그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와의 만남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없이, 그냥 진부하고 세상 사람들, 개그맨이 쓰는 그런 수준의 언어와 의식의 지평에 놀다 가면, 이런 멋진 자화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인문학적 소양의 절정

우리는 무릇 예수님의 말씀에 인생을 정초하여 홀로 깊이 기도할 수 있어야 하고, 바위 위에 앉아서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소나무 뒤에 등을 기대놓은 채, 자기 인생의 미래, 하나님 나라의 미래, 대한민국의 미래, 한국 교회의 미래, 우리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서 슬픈 공감을 갖고, 이 땅에 널부러져 있는 모순에 대해서 아픈 마음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고치려고 애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고치려는 마음, 내가 우리 선배로부터 받았던 이 세상을 고쳐보겠다고,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의 뜻에 근사치로, 더 가까운 세상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에게 출세의 기회도 주어지고, 직장의 기회도 주어지고, 시험의 기회도 주어집니다. 이 원칙이 가장 큰 원칙입니다. 이 원칙 따라 일을 얻고, 이 원칙 따라 직장을 얻고, 이 원칙 따라 배우자를 얻는 겁니다. 이 원칙 따라 연애도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세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결정이 안 되었습니다. 먼저, 배우자가 아직 결정 안됐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일생동안 해야 할지 소명이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이 소명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해야 할 직업적인 그런 능력이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어디에 힘써야 할까요? 도구적, 실용적 지식에 빨리 눈떠서 그걸 빨리 앞서 가는 게 좋겠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지식에 힘써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런 견고한 신앙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이게 바로 인문학적 소양의 절정입니다. 거기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인문학적 소양의 절정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고양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인문학적 소양의 절정에 바로 기독교 신앙이 있습니다. 이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후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신앙의 비밀을 여러분이 터득한다면 여러분은 청년의 때에 성공을 거두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신비에 눈뜬 사람만이 하나님께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소명에 눈을 뜰 수 있고, 소명에 눈뜬 사람만이 나에게 필요한 배우자와 직장을 마음놓고 고를 수 있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확고부동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나를 사랑하시고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나를 이끌고 계시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기회주의자로 살 수 밖에 없고, 우선의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고, 기회주의적인 인간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나에게 충고를 주고 나에게 진한 신앙적 우정을 나눈 사람보다 우선에 나에게 이익을 줄 사람을 더 급하게 찾게 되는 기회주의자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답이다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진짜 '믿는 자'가 되기를 바라고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여러분의 뒤를 영영 따르는 그런 확고부동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인의 길만이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가는 최고의 길입니다. 이 신앙이 없으면 우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나를 지배하는 강한 대항 힘은 무엇일까요?

바로 돈입니다, 돈. 결국 돈을 주는 쪽으로, 돈이 나오는 쪽으로 나의 모든 관점이 휘어져 돌아가게 됩니다. 확고부동하게 하나님을 믿고 확고부동하게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으면, 돈을 고백할 수 밖에 없고, 돈을 ‘주’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오답만이 남습니다.

우리가 정답 하나를 포기하고 나면, 반드시 오답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솔로몬의 영광보다 이 들꽃이 낫다고 하는, 이런 간고한 믿음의 결단이 우리에게 구비되지 않으면 반드시 돈을 따라갑니다. 돈을 경배하게 되고 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망하는 길입니다. 어떤 사람의 길은 생명의 길처럼 보이나 필경 사망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너무나 분명합니다. 너무나 분명합니다. 말씀이 답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청년들에게 신앙이 있는지 나는 그것이 가끔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물에서 놀기는 노는 분 같은데, 성경을 이해하는 정도나 기도하는 정도를 볼 때 (하~~) 2%가 부족하다 이런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부족함은 일단 결혼을 할 때 가장 큰 차이로 드러납니다. 내가 만일에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믿음이 없으면, 배우자를 고를 때 반드시 조건을 보게 되고, 그 조건이 우리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이건 부지불식간에 일어납니다. 이건 멀지 않아서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돌보신다는 그런 강한 믿음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괜히 캠퍼스 커플이 없어서 피해의식이 되고, 애인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될것 같은 그런 불안이 생깁니다.

학부 2학년 때 애인이 생긴다는 것은 그건 재난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정서적 감정적 관리를 해야하고, 돈도 기어코 들고, 인간관계가 협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10년, 20년 연애해서 결혼하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볼 때는 결혼하기 이년 전에 연애를 하다가 결혼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뭘 믿고 그냥 애인부터 만들기 시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생각이 있는 젊은이 같으면 제가 볼때는 숙고에 숙고를, 다시 말해서 베아트리체를 만난 단테의 그런 운명적 만남이 아니라면, 한 번쯤 내가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서, 하나님 사랑의 돌보심을 만끽하고 난 후에 연애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약간의 돈을 위해서 알바를 너무 지나치게 많이 한다던가, 약간의 재미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하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 여러분에게 남겨진 대안이라는 것은 그때 그때 주어지는 생활에 지배를 받는 것뿐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롱텀으로 플랜하지 못한 채 금방 청년 시절이 지나갑니다.

금방 지나가는 청년기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결혼이라는 엄숙한 중대사가 디밀어 옵니다. 그렇게 준비 안 된 채 결혼을 하게 되면 확고부동한 관점이 없기 때문에 불신자랑 결혼하게 되고, 불신자와 진배없는 사람과 결혼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결혼 한 번 해 놓으면 10년이고 20년이고 기도제목이 "우리 남편 바꿔주세요, 인간되게 해주세요, 이 원수 바꿔주세요" 이렇게 계속 기도 제목이 나오게 됩니다.

불신자와 신자사이에 나온 아이는 날라리 반신자가 나옵니다. 그러면 또 자녀 기도가 더해집니다. 그럼 그 사람은 일생 내내 무슨 기도만 하게 되냐면 믿지 않는 남편 기도 20년, 그다음 날라리 비행청소년 20년, 이렇게 40년 멀쩡하게 살아 있을 때, 그런 문제 덩어리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고 인생이 끝납니다. 여러분 이것은 너무나 불길한 시나리오입니다.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불이익 받는 소돔과 같습니다.
손해를 보겠다는 마음
예를 들어, 우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의 커리큘럼은 학점을 따기에 공부하기는 너무 아까운, 학점만을 위해서 공부하기는 너무나 아까운, 너무나 중요한, 이렇게 중요한 과목들을 내 전공 분야로 선택해서 내 인생에 중요한 순간에 공부한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라는 것입니까? 얼마나 복된 것 입니까?  이렇듯 이런 중요한 신앙의 문제,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내 인생의 사명 문제, 내 인생관의 문제, 이런 것을 확정짓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공감의 능력 인문학적소양을 충분히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급한 마음으로 우선에 취직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도구적 조작적 실용적 지식을 획득하는데 모든 생애를 다 바쳐 버린다면, 그런 '도구적' '실용적' '조작적' 지식이 여러분을 먼저 출세하게 만들고 먼저 취직하게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결코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못하게 됩니다. 절대로 인생이 기회주의적인 흔들림 이상의 삶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할까요? 다시 한 번 말씀을 보겠습니다. 6장입니다. 6: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비천이 여기거나 하나님과 재물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라.” 
하나님을 확고부동하게 믿지 아니하면 결국 돈 또는 준 돈을 섬기게 되는데, 이는 파국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20대인데 혹시 여러분이 잘 듣고 판단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듭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나를 한번도 개인적으로 아는척을 해 준적이 없습니까? 청년의 때 신앙이 가장 순수할 때는, 거의 자아도취적으로 주관적 확신에 가깝다고 느낄 만큼 하나님 사랑을 탐닉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라고 느끼고 하나님 사랑을 탐닉한 그런 경험이 없다면, 그 이후의 삶에서는 그걸 느낄 기회가 영영 오지 않습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내 인생을 돌보시고 나를 솔로몬의 들풀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공중의 새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신다는 그 넉넉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감싸고 있다는 확신이 없을 땐, 우린 기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린 염려로 가득 찬 이방인처럼 살 수밖에 없고 우리는 세리와 탐욕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돌보아 주지 않으면 내가 나를 돌볼 수밖에 없고, 내가 나를 위해 신이 될 수밖에 없고, 내가 나를 위해 구세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이기적인 삶을 정당하게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을 정당화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본다는 그 마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보호해 주신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압도적인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를 뒤따라 다니면서 나를 수습해주시고, 나를 돌보아 주신다는 그런 확신이 없이, 우리가 남에게 손해를 보는 짓을 한다는 것은 번지점프인데 끈이 떨어진 자유낙하입니다. 타력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맛본 그 사람만이 너그러운 사람, 손해볼 수 있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 이웃을 위해 자기 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넉넉한 돌보심이 먼저입니다.

퍼온글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68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 한방울 흘려줄 능력 인문학적 기독교(2) - 인간의 본 모습을 회복시키는 학문

인문학적 기독교(2) - 인간의 본 모습을 회복시키는 학문
▲ ⓒ크로스로 윤동혁

인문학의 특징이 뭡니까? 인간의 불행에 대한 보편적인 공감의 능력을 확장시키는게 인문학 아닙니까? 인문학의 핵심은 뭡니까? 인문학은 문, 사, 철, 언 아닙니까? '문사철언'은 문학, 역사, 철학, 언어입니다. 

언어는 뭡니까? 의사소통의 능력입니다. 문학은 뭡니까? 보편적인 공감의 능력입니다. 역사는 뭡니까? 역사상에 일어났던 모든 부조리한 일들과 정답지 못한 일에 대한 울분입니다. 철학은 뭡니까? 지혜를 가르치는 학문입니다. 이 네 가지를 완전히 종합한 학문이 뭡니까? 인문학입니다.
 

인간의 본 모습을 회복시키는 학문이런 학문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의 본 모습을 회복시키는 학문입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면, 인간은 로봇과 같은 실용적인 지식을 가지고 도구적인 지식들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 돼버립니다. 도구적 지식과 실용적 지식은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다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네이버 검색엔진은 지금 실연당하여 죽어버리려는 눈물에 공헌은 못합니다. 그 엄청난 도구적, 실용적, 통계적, 조작적 지식들과 지금의 경영학적, 경제학적, 공학적인, 이런 모든 지식들은 도구적 공학적 실용적 지능입니다. 그거는 인간성의 함량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아무런 도움이 안된단 말이 좀 과장됐습니까? 거의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인문학을 공부한 청년들이, 지금 세상 사람들 눈에 취직을 못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취직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 같다는 그런 의심과 똑같습니다. 그럼 뭘 믿어야 되냐면은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김우중과 이건희와 삼성과 메릴린쯔와 리먼브라더스같은 그런 회사의 이념을 믿지말고 인간의 심장과 고통에 빨리 공감하는 신적인 공감의 능력을 가지고, 신적인 동정과 긍휼의 능력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이 찾으시는 인물이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인물이란 겁니다. 이것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이 확신이 만일에 없으면 여러분은 문학과 역사와 철학과 언어를 공부하는 인문대에서는 아무런 것도 배울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인문학적 소양을 거부하는 순간 여러분에게 남겨진 지식은 뭡니까? 조작적 지식입니다. 실용적 지식입니다. 도구적 지식입니다. 그건 도덕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어제 엄청난 살인을 저지르고도 영어를 잘하면, 통역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내 인간성이 아무리 망가지고 내가 불효막심한 그런 인간이라도 내가 과학실험을 할 때, 그 플라스크와 실험도구가 내 인간성을 보고 응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나쁜 인간성을 가져도 실험은 결과가 나옵니다. 이런 도구적이고 조작적이고, 이런 실용적 지식들은 이 세상에 기계들이 공급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 한방울 흘려줄 능력
그러나 한방울의 눈물을 흘려줄 능력은 이건 인문학적 소양에서만 나오는 너무나 진귀하고 천연기념물 같은 희귀한 능력입니다. 이런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인문학이고 인문대학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런 인문학의 쇠퇴라는 것이 뭡니까? 이 세계의 손실입니다. 인문학이 쇠퇴하면 이 세계가 손해를 겪는 것이고, 한국에서 인문학이 쇠퇴하게 된 것은 박정희가 카이스트를 만들면서입니다. 

당시 인문학적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사회에 공공연히 정의와 공평을 빌미로 사고를 많이 치니깐 카이스트 이공계 학생들에게 엄청난 모든 특혜를 몰아주기 위해서 카이스트를 만들었습니다. 
 
의과대학과 법과대학에 가기위해서 아무도 기초학문 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면 의과대학과 법과대학이 그렇게 인기가 있고 한의예과가 인기가 높은 이유가 뭡니까? 그건 인간성으로 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도구적이고 실용적이고 조작적인 통계적인, 그런 사실적인 지식 가지고 다 하는 것이 그 학문 아닙니까? 근데 우리가 상담을 할 때 자판기처럼 할 것입니까? 데이터를 집어넣으면 그게 탁 자판기 응답이 나옵니까? 상담, 안됩니다. 상담은 뭡니까? 인간의 심장에 신적인 동정과 긍휼의 능력이 구비되지 않으면 상담 불가능 합니다.
 
인문학적 제자란 것은, 가내 수공업적 제자란 것은 그래서 수작업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고도의 인격적 측면에서 우리가 신뢰가 동반되고 여기에는 책임이 동반됩니다. 인문학은 지금 너무 이상주의를 표방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문학도들을, 청년들을 무능력하게 만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능력이 많게 만들지만 그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압도적인 선한 인간상,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여러분에게 심어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을 취직으로 이끌고 취업으로 이끄는 지름길입니다. 한번 보세요, 어떤 결론이 나오나. 여러분이 만일에 이렇게 의로운 성품과 선한 마음을 갖지 못한채 좋은데 취직을 해본들 직장에서 승진해본들 마지막 인생의 프라임 타임때 감옥가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50대 때 감옥가는 사람들은 20대 때 무슨 결심해서 가는거 아닙니다. 50대 때에는 내가 기어코 감옥한번 가야지 50대 때에는 내가 마지막으로 탈옥 한번 크게 해야지 해서 하는게 아닙니다. 그 사람의 50대의 타락을 20대 때 한번도 이웃의 고통에 공감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들은 쓰임직스러운 사람이 되지 못하는데, 가끔 인문학적 소양은 없고 인간성은 매우 더럽지만 도구적, 실용적, 조작적 지식이 탁월하여 출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출세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초적인 정의감과 의로움과 공평과 정의에 대한 기초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너무나 멀어진 삶을 살기 때문에, 반 사회적인 범죄에 연루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숭실대 기독교학과는 성경을 전공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208개 4년제 대학 중에서 전공과목으로 인류의 고전인 성경을 가르치는 대학은 6개입니다. 국내에 6개만 있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를 가르치는 대학이 6개입니다. 중세에 모든 대학이 1,000년동안 그렇게 열심히 했던 그 일을 지금 하는 대학이 208개 4년제 중에서 6개 밖에 없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가르치는 대학은 6개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한마디로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을 멸종시키는 나랍니다. 국가적으로 너무나 큰 실책입니다.
 

영어보다 더 중요한 것여러분 역발상이란 말 들어봤죠? 지금은 너무나 도구적 지식에 굉장히 미쳐있습니다. 누가 더 영어점수를 많이 받습니까? 사실은 영어점수, 토플점수 많이 받은 사람하고, 얼굴이 해맑게 웃고 생기있는 사람하고 누가 더 세일즈를 잘할지는 모릅니다. 토플점수 그것은 별거 아닙니다.
 
성경을 배우는 청년들의 얼굴들은 다른 청년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거는 쌍커풀 수술이 해결 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무슨 턱을 사각에서 삼각으로 깎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 성경을 배우는 청년들의 얼굴이 훨씬 낫냐 하면은 인문학적 소양이 그나마 있기 때문에 훨씬 고상해보이고 뭔가 그윽하게 보이고 뭔가 신비감이 좀 들어 보입니다.
 
물론 이런 인문학적 소양감이 많아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어를 빵점맞아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도구적, 실용적 지식보다 훨씬 압도하는 인문학적 소양이 있어야지만이 그 사람의 미래가 보장될 수 있고, 그 사람의 미래가, 그 사람이 얻었던 성공과 출세가 쓰임직스러운 결과를 가지고 사회공공재로 바쳐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단순히 남과 경쟁해서 더 좋은데 취직하려고 하는 그런 발상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같이 마태복음 9장 35절에서 36절에 있는것처럼 목자없이 불쌍히 유리방황하는 민중들을 위해서,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눈물이 몸서리치게 흘러내리며, 어찌하면 내가 저들을 도울 것인가 라는 그런 고민에 휩싸이는, 그런 하나님이 찾는 천연 기념물 같은, 그 설악산에 오랫동안, 천년동안 묵었던 산삼같은 그런 향기나는 인간성의 소유자가 되는 것, 이것이 청년시절에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있고 나서야 실용적 지식도 의미가 있고, 이것이 확보된 사람이어야만 영어공부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된 사람이 도구적, 조작적, 실용적 지식을 잔뜩 쌓아서 우선 출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기억하십시오. 그 사람들은 이런 인문학적 소양을 쌓지 않고, 하나님 말씀인 성경도 모르고, 예수님의 마음도 모르고, 하나님의 형상도 모르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능력도 없는 채로 질주하여 먼저 고시를 패스하고, 먼저 공무원되고, 먼저 무역상사에 취직해본들 그것이 그들의 영구적인 성공이 될 수 없습니다.


퍼온글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47

예수의 스팩에는 '인문학적 소양'이 있다 인문학적 기독교(1) - 몸과 목숨에 관한 학문



인문학적 기독교(1) - 몸과 목숨에 관한 학문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태복음 6:24~34)


▲ 김회권 교수 ⓒ꿈꾸는터 윤동혁

인문학, 그리고 거기에 포함되는 기독교학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영어나 중국어, 경영학 또는 전자 공학 등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기술과 학식적 연마에 비해서, 인문학이란 것은 너무나 공허하고 좀 애매모호하여, 이를 공부하는 것은 아무런 공부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숭고한 형상이 피어나는 곳
인문학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주신 품성을 만개시키는 학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숭고한 형상을 구현하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그런데 이 인문학은 오늘 말씀에 보니까, 뭔가 목숨에 관한 학문입니다. 목숨에 관한 학문이 의복과 음식과 거주할 것을 추구하는 학문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 하냐,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지 아니하냐.” 음식과 목숨 중에 뭐가 더 중요합니까? 목숨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음식을 좋은 걸 구하기 위해서 억만금의 돈이 필요합니까?

세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길로 갈 것인가? 돈을 섬길 것인가?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다른 어떤 거짓된 명분도 '돈을 섬길 것인가? 하나님을 섬길까?' 하는 이 양단의 갈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이 많은 염려와 걱정을 합니다. 이렇게 차일피일 아무것도, 기술도 연마하지 못하고, 그냥 인간성만 좋게 한다고 무엇이 이뤄질 것인가 하는 염려입니다. 다시 말해, 인문학적 소양만 외친다고 실용적으로 무엇이 해결 될 수 없다는 걱정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근접한 사람이 된다면, 반드시 세상에 쓰임직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구현한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근접한 사람이 훨씬 더 광범위하게 쓰임 받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가 찾는 스팩은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
마태복음 9장 35~36절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목자 없이 (유리)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먹고 마실 것이 없어 굶주린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내고, 이 군중 때문에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연민을 느낍니다. 굶주려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인간적 공감을 하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게 예수였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긴급한 사람이 뭡니까? 그는 가치중립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의 심장소리를 듣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영어공부가 중요하지만, 영어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눈물을 흘리고 쓰라린 가슴을 어루만지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웃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착한 마음씨, 그게 인문학적 소양입니다. 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 예수님이 찾는 인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을 섬기는 사람, 맘몬을 섬기는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6장 22절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이때 이 인문학적 소양의 중요성을 알게 해 주는 것이 눈입니다. 눈, 눈은 뭡니까? 관점입니다. 관점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관점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고, 네 관점, 눈이 나쁘면, 온 인생 전체가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그래서 돈을 하나님처럼 섬겨버리면, 음식과 옷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옷'인가, '몸'인가…
옷을 입을 몸이 더 중요합니까? 옷이 더 중요합니까? 연봉의 차이는 옷의 차이입니다. 연봉이 많은 사람은 좋은 옷을 사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문학적 소양의 '있고' '없음'은 이 ‘몸’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집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들은 옷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옷을 입는 그 사람의 인간성이 일그러지고 귀신처럼, 완전히 좀비처럼, 완전히 강시처럼, 완전히 미이라처럼 되어 그런 미이라의 얼굴을 한, 좀비의 얼굴을 한 그 사람에게 억만금 앙드레김의 옷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앙드레 김의 7천만원짜리 코트가 속물스럽게 일그러지고, 인간성이 야수처럼 바뀌어 버린, 그 사람, 한 마리의 야수적인 멧돼지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인간성이 멧돼지의 탐욕처럼 바뀌어 버려서 티라노사우르스처럼, 완전히 남의 피를 흘리고 사는, 그런 나쁜 인생관을 가지고 승리한 사람에게 무슨 옷이 필요하겠습니까?
몸이 제일 중요합니까? 음식이 중요합니까? 우리가 좋은 토플 점수를 받아, 취직을 해서 연봉이 높아지는 것도 모두 음식에 관한 것입니다. '옷'에 관한 것 일 뿐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인문학은 몸과 목숨에 관한 것입니다. 그 옷을 입을 몸을 만들어주고, 그 옷을 입을 목숨과 인생 전체를 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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