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날 묵상 - 창 27:46-28:9 - <리브가의 꼼수와 에서의 마이웨이>
야곱을 살리기 위해서 리브가가 쓴 수는 에서의 잘못을 빗대어 만들어 낸 꼼수였다. 단지 꼼수로만 보지 말고 그녀의 지혜로움과 약속의 말씀을 향한 결단을 보라. 에서에게 소망이 없다면, 다른 수를 빨리 찾으면 찾을 수록 좋다. 에서에게는 소망이 없다. 계속되는 에서의 마이웨이에도 왜 에서가 소망이 없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리브가의 꼼수(리브가의 꼼수안에 담긴 의미를 기억하라)
=> 에서의 행실을 빗대어서 야곱이 가야 할 길을 이삭에게 제시하다.
27:46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 "
-> 에서가 헷 족속 브에리의 딸을 아내로 맞이함.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됨(창26:34-35)
-> 에서의 삶은 그 자체로 부모의 기쁨이 되지 못하였다. 근심꺼리였으며 걱정꺼리였다.
28: 1-2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 라바의 딸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3-5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 이삭의 축복안에 담겨 있는 의미를 살펴보라.
1)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의 길을 축복하신다. 불안과 초조와 염려속에 떠나는 야곱을 축복하다.
2) 아브라함에게 주신 여호와의 복을 잇는 야곱이 되다(여러 족속을 이루고 ..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3) 야곱 이후의 자손에게까지 복을 주시다.
* 야곱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는 에서의 마이웨이
28:6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고 ... 가나안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28:8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시 못하는지라"
28:9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 "에서의 마이웨이" 무엇을 그 혼자만의 길을 가게하는가?
그건 에서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에서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 에서를 보고 있다. 인간을 보고 있다. 아버지를 보고 있다. 우리가 진정 봐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에서를 통해 역사하시는 여호와이시다.
- 에서의 동기는 좋게 보인다. 그러나 진정 봐야 할 것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에"하는 행동 또한 옳지 못하다. 이스마엘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 창세기 28장 1절 -야곱의 마지막 당부.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2절 "일너나 밧단아름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 아내를 맞이하라"
=> 이는 그 어떤 말보다 더 중요한 말이다. 이 말속에는 절대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는 당부가 들어가 있다. 이방 여인과 결혼은 곧 이방 신을 섬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야곱은 아버지의 말을 꼭 지켰다. 이게 바로 에서와 야곱의 차이이다.
창세기 26장 34-35절로 보면,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에서의 아주 못된 반항적이며 비신앙적인 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바로 창 28장 6-9절의 말씀이다. 어떠한 분이 있더라도 결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는 안된다. 이처럼 분은 사람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된다.
창세기 29장 18-20절 아리따움이 야곱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결코 말씀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 이삭과 리브가에게 근심이 되는 사람 에서와 이삭과 리브가의 말에 순종하는 사람 야곱. 곧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과 불순종한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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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을 살리기 위해서 리브가가 쓴 수는 에서의 잘못을 빗대어 만들어 낸 꼼수였다.
그러나 리브가의 수를 단지 꼼수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
그녀의 지혜로움과 약속의 말씀을 향한 결단으로 봐야 한다.
에서에게 소망이 없다면, 다른 수를 빨리 찾으면 찾을 수록 좋다. 그를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느냐? 아니면 그 약속의 말씀을 거스리느냐?의 문제이다.
에서에게는 소망이 없었다.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28:6 "에서가 본즉"
28:8 "에서가 또 본즉"
28:9 "이에"
보고 이에 결단했다. 그러나 여전히 외골수로 걸어가는 "May way"이다. 하나님을 중심에 품지 않은 들음이나, 보려함이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자기 길을 고집하기 위해 보는 것과 이에 결단하는 위장술은 다른 사람에게 꼼수의 빌미가 될 뿐이다.
오늘 나는 꼼수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기 원한다. 본 것으로 결단했다고 방법으로 마이웨이를 위장하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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