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날 묵상 - 막 1:8, 12-13 <거듭남의 비밀, 물세례만 받았는가? 성령세례도 받았는가? 성령시험과 사탄의 시험을 통해 알 수 있다>
1. 개인적으로 스포츠를 좋아합니다. 공으로 하는 종목들은 거의 좋아한다고 보면 됩니다. 스포츠 경기를 하거나 보거나 직접 하는 것 다 좋아합니니다.
2. 물론 잘 하지 못하지만, 스포츠 경기에 재미있게 참여하려고 합니다. 때론 함께 하는 팀원들이 저를 어려워 할 때도 있습니다. 나이도 많고 목사라고 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3.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지난 주에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농구스타 선수 출신이며서 감독이었던 강동희 감독이 농구 경기에서 승부조작으로 구속된 사건입니다.
4. 스포츠 경기는 항상 공정해야 합니다. 필드에서 뿐아니라 어떠한 외풍에서도 공정하게 진행되어 경기 결과를 가져야 합니다.
5. 그런데 가장 공정해야 하는 스포츠 경기에서 외적인 영향에 의해 승부가 조작되었다는 것을 실로 충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스타 선수 출신이며 감독인 사람이 그 사건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 더욱 큰 충격이었습니다.
6. 참으로 좋아한 선수이며 감독이었는데 말입니다.
7. 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을까?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도 그러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8.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참으로 정직하고 진실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적어진 것(기독교인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의미입니다)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리고 다른 사람이 생각하기에도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빚어져 가야 합니다.
9. 그런데, 그렇지 못할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까요?
10. 마가복음 1장에서 보면, 오늘 본문에 앞서 예수님께서 세레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중생했다는 의미입니다. 거듭났다는 말입니다.
11. 그런데, 거듭난 사람들이 여전히 죄 아래 살아간다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모두가 그렇습니다.
12.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13절에서 보듯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음으로서 그 유혹에 노출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13. 거듭난 사람이라도 이처럼 죄의 유혹에 노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생애를 끝내는 그 순간까지 이와 같은 유혹은 계속될 것입니다.
14. 그래서 결코 우리는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말씀안에, 진리안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15.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유혹은 두 가지입니다.
16. 첫째는 성령의 시험입니다. 오늘 12절에 보면,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고 말씀합니다.
17. 이는 성령께서 광야로 예수님을 이끌었다는 의미입니다. 광야는 어디입니까? 세상입니다. 세상은 어떠한 곳입니까? 사탄의 유혹이 득실 거리는 곳입니다. 13절에서 보면,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8. 우리가 다른 복음서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사십 일 금식후에만 사탄이 유혹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마가복음 그렇게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19. 사십 일 동안 광야에 있을 때에도 사탄의 유혹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결정적 세 가지것을 준비했는데, 그 내용이 바로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광야 40일 이후의 시험입니다.
20. 이처럼 성령도 우리를 시험합니다. 야고보서에서도 그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3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브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참고로 약 1장 12-18절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
21. 저는 성령의 시험을 가리켜 은혜 뒤에 찾아오는 고약한 시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2. 은혜 뒤에 우리가 더욱 멋진 모습으로 믿음의 전성기를 누리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은혜뒤에 찾아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23. 그렇다면, 왜 은혜 뒤에 고약한 시험이 찾아올까? 그것도 성령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일까요?
24. 저는 여기에서 몇 가지 성령의 시험이 주는 유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24. 첫째는 성령이 충만할 때 어떠한 시험을 만나도 이길 수 있는 내성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이김을 주고자"함입니다. 승리를 하는 사람이 계속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이김을 하는 사람이 어떤 유혹에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할 때 이김의 은혜를 체험하도로 하기 위함입니다.
25. 둘째는 "훈련을 하고자"함입니다. 믿음의 훈련, 신앙 성숙의 훈련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의 순간, 은혜의 순간에도 훈련은 계속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성령을 사모하고,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정점은 우리가 살아 있는 이 순간 찾아오지 않습니다. 계속 해서 훈련을 통해 믿음은 성숙해져가야 합니다. 교만하지 않기 위한 훈련의 시간이 되는 거죠.
26. 셋째는 성령의 시험 또한 이김으로 통해 "궁극적으로 은혜의 자리로 이끌고자"함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27. 그런데 이러한 성령의 시험 말고도 자신 스스로의 죄의 유혹을 받는 경우도 참으로 많습니다.
28. 내 자신을 경험을 나열하지 않아도, 물론 그렇게 할 때 참으로 많은 먹과 종이가 필요하겠지만요. 우리는 스스로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29. 왜 그럴까요?
30. 스스로 넘어지는 경우는 가짜 세례를 받은 사람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이 부분은 조심스러운 말씀이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31. 오늘 본문 8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나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32. 우리는 물세례만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33. 어떤 사람들은 물 세례만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마가복음은 8절의 말씀을 구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8절 말씀을 이유없이 기록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34. 우리가 물세례를 받고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를 주시기 위한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35. 우리가 물세례를 받고 성령세례를 받으면 궁극적으로 예수님처럼 사탄의 시험, 성령의 시험을 잘 통과할 수 있습니다.
36. 혹 우리가 자꾸 이러한 시험에 넘어지고 있다면, 자기 자신 스스로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떻게요? 나는 물세례만을 받은 사람인가? 성령 세례까지 받은 사람인가?
37. 자꾸 나에게 시험이 찾아오십니까?
38. 이는 두 가지 이유입니다. 성령 시험이든지, 사탄의 시험입니다.
39. 그런데 이 시험에 자꾸 넘어지십니까?
40. 그럼 문제가 있습니다. 물세례만 받은 것이 아닌지? 진정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인지? 자문해 봐야 합니다.
41. 오늘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함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승리하였으면 합니다.
42. 신앙은 이처럼 살아있는 숨쉬는 것입니다.
43. 오늘 신앙이 춤추는 은혜를 기대합니다.
44.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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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rch 12, 2013
Saturday, December 29, 2012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에 대하여- 임범진 집사 (장년부, 충남대 의대 조교수)
퍼온글 http://elimbp.onmam.com/1158760
참고도서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들" 박영돈 저, IVP.
임범진 집사 (장년부, 충남대 의대 조교수)
첫째, 신유라는 용어는 대단히 부적절한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이 용어는 하나님의 이적적 병고침이 마치 우리의 믿음 여부, 혹은 믿음의 강도에 달려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자칭 신유 은사자들은 병고침이라는 결과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고 얼마나 능력 있는 사역자를 만나느냐에 달려있는 듯이 가르칩니다. 성도가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약 5:14), 그가 병에서 회복될 것인지, 그 병을 가지고 살아가며 연단을 받을 것인지(고후 12:8-9), 아니면 죽음을 통해 주님과 함께 거하는 복을 누릴 것인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신유라는 말 대신 로이드 존스가 사용한 이적치유 (miraculous healing)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이적치유 사건은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적은 빈도로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이 글에서 힘주어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2. 이적치유의 진실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나에게 이적적인 치유가 일어났어요”라는 간증을 들었을 때 그 말의 진실성을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 간증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말에는 진정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을 담아 말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실제로 그 질병이 있었는? 그리고 지금은 정말로 치료가 되었는지 판단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프랭클린 페인 주니어라는 의사이자 기독교 의료윤리 연구가가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의료의 성경적 접근>, 한국누가회출판부). 로이드 존스 목사도 그의 책 <의학과 치유> (생명의 말씀사)에서 이 문제를 언급합니다. 이 내용들을 제가 조금 변형해 인용하며 설명해 보겠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이적치유 사건을 간증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에게 정말로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게 만드는 몇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첫째, 세상에는 심인성질병 (psychosomatic illness)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심인성질병이란 환자는 증상을 호소하지만 신체에 실재적인 이상은 발견되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만성적인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서 아무리 CT나 MRI 등을 찍어보아도 디스크나 골절은 발견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꾀병과 다릅니다. 꾀병은 실제로는 증상이 없으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심인성질병은 환자 자신은 실제로 증상을 느낍니다. 심인성질병의 증상은 매우 다양해서 가벼운 통증 호소로부터 신체 일부의 마비증세까지 폭넓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카리스마 넘치는 의사가 당신은 나았다는 암시를 강하게 줄 때 극적인 반응을 보이며 씻은 듯이 낫는 것도 특징입니다. 같은 일이 이적치유집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많은 사람이 신뢰하는 이적치유자의 한 마디에 몇 년을 알아오던 증상이 씻은듯이 사라지는 경험.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신체적 질병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환자와 의사 사이에는 심각한 의사소통 장애가 흔히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환자와 의사 사이의 의사소통은 많은 의사들의 고민거리입니다. 의료현장에서 의사가 설명하는 내용이 환자에게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의사측의 원인도 있지만 자기 몸의 질병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환자가 선택적으로 듣는다는 사실도 매우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에 나온 신유은사 간증집에 기도로 녹내장을 치유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과에 가서 안압을 측정해 보고 녹내장을 진단 받았으나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다음날 가서 다시 검사했더니 녹내장이 씻은듯이 나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의사의 상식으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처음 보는 환자를 당장 녹내장으로 진단했다는 것도 이상하고 또 다음날 당장 완치를 선언했다는 것은 더 이상합니다. 아마도 첫날에 의사는 “안압이 높으시네요. 녹내장일 가능성이 있으니 검사를 해 보아야겠습니다.”라고 했을 것이고, 둘째 날에는 “오늘은 안압이 정상으로 나오셨네요”라고만 했을 것입니다. 이 의사는 녹내장이라고 진단한 적도 없고, 녹내장의 치유를 선언한 적은 더더욱 없는데 환자는 두 가지를 다 경험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경우는 암입니다. 의사 입에서 ‘암’이라는 단어가 나오기만 한 것으로도 환자는 자기가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이적치유 집회에 다녀오면 엄청난 간증거리가 생기게 됩니다.
셋째는 그 유명한 위약효과(placebo effect)입니다.
가짜 약을 먹은 사람도 그것이 약이라고 믿으면 실제로 질병이 낫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잇습니다.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잠을 못자던 환자에게 매우 값비싸고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 진통제를 처방해주겠다고 말하고 진지한 자세로 생리식염수(소금간한 맹물입니다) 10cc를 링거액에 섞어주면 거짓말같이 통증이 사라지고 잠도 잘 자는 현상은 거의 모든 의사가 경험하는 일입니다. 위약효과는 너무나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약이 개발되어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가루로 만든 가짜 약을 먹은 사람들과 대조해 보아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적치유 은사자의 강력한 암시는 가장 좋은 위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넷째, 질병의 자연사를 모르면 오해가 발생합니다.
어떤 병을 치료하지 않고 그냥 방치했을 때 어떤 경과를 밟는지 관찰한 것이 질병의 자연사(natural course)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낫는 것이 감기의 자연사라면 평생을 두고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는 것은 아토피, 류머티스 관절염 등의 만성질환의 자연사입니다. 질병의 자연사를 아는 것은 치료 효과를 판정하는데 필수적인 전제조건입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예를 두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심한 감기로 개인병원을 찾아 일주일 치 약을 먹었으나 차도가 없는 사람이 참다 못해 대학병원을 방문합니다. 대학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먹자 거짓말같이 독한 감기가 떨어지고 이 사람은 대학병원의 교수가 역시 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번에도 비슷한 증상의 심한 감기가 발생하자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용한 교수를 찾아가기로 마음 먹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번에 받아온 약은 효과가 없습니다. 일 주일 내내 고생하고서야 감기가 떨어져 나갑니다. 첫 번째 경우에 대학교수가 용한 의사로 인정받은 이유는 단지 환자가 감기에 걸린 지 일 주일이 지난 후에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흔한 예는 아이들의 아토피입니다. 몇 년 동안 고생하던 아토피가 이름 모를 풀을 다려먹고 씻은듯이 낫습니다. 하도 신기해 주변의 다른 집에도 추천해 주었는데 이번에는 효과가 그다지 신통치 않습니다. 왜일까요? 아토피는 수 개월~수 년을 주기로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는 자연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호전되려는 찰나 우연히 먹게 된 풀뿌리가 치료의 주인공으로 오인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아토피가 발생할 것입니다. 의학에는 우연을 감별하기 위한 연구방법론이 많이 개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적치유에서는 이런 효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검사의 특성 및 한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오해가 발생합니다.
질병을 진단하기 위해 행하는 검사에는 선별검사(screening test)와 확진을 위한 검사가 있습니다. 선별검사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정 질병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가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검사입니다. 선별검사에서 양성이 나왔다는 것은 그 질병에 걸렸을 확률이 다른 사람보다 높으므로 확진을 위한 검사를 시행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 그 자체가 질병을 확진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CT나 MRI 촬영은 대표적인 선별검사입니다. CT/MRI에서 폐에 종양으로 의심되는 덩어리(종괴)가 발견되었을 때 조직검사로 확진되기 전까지는 말 그대로 ‘의심’ 단계이지 폐암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 종괴가 없어졌다면 애초에 폐암이 아닌 폐렴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유 간증들이 선별검사만 받은 상태에서 확진을 받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섯째, 불가항력적 오진이 존재합니다.
현재로서 암을 진단하는 가장 확실하고 믿을만한 방법은 조직검사입니다. 극소수의 경우이긴 하지만 조직검사까지 시행하고도 심한 염증과 암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 흔한 것이 위궤양과 위암의 구분입니다. 둘 다 위벽에 움푹 파인 구덩이가 만들어집니다. 내시경을 통해 모양을 보는 것만으로는 둘의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조직검사를 하여 확실히 구분하는데 아주 드물게 조직검사를 하여도 진단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대학병원급에서는 일 년에 몇 차례 나타납니다. 이런 경우는 검사를 반복하며 환자를 계속 관찰하며 조심스럽게 판정합니다. 하지만 경험 없는 병리학자가 이런 예를 접했을 때는 성급하게 위암으로 진단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평신도 성경공부 교사로 유명한 어떤 분의 간증을 읽어보니 중국에서 위암으로 진단 받고 이적치유를 경험한 내용이 나옵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분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일곱째, 통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해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렸을 때 병기(1기, 2기, 3기, 4기)가 결정되면 의사는 지금까지 알려진 5년 생존율을 말해 줄 수 있습니다. 4기(말기)의 5년 생존율이 20%인 암에 걸린 환자를 가정해 봅시다. 이 사람이 5년 후에도 살아 있을 확률이 20%라는 말이며 바꾸어 말하면 이 암의 말기 상태에서 발견된 환자 5명 중 4명은 5년 안에 사망한다는 말입니다. 10명의 그리스도인이 이 암의 말기 상태에서 치유집회를 찾았습니다. 치유 은사자는 그들이 모두 나았다고 선언했고 5년 후에 보니 그 중 2명은 실제로 살아있습니다. 이 두 명이 정말로 이적치유를 경험한 것일까요? 이 치유집회가 정말로 효력을 발휘한 것일까요? 환자수가 100명으로 늘어난다면 어떻겠습니까? 예를 들어 23명이 살아있고 97명이 사망하였다면 치료효과를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검증하는 것이 통계학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들어본 기억이 나십니까? 95% 유의수준에서 치유집회를 가든 안 가든 생존율은 똑같다는 귀무가설을 기각하기 위해서는, 즉 p값이 0.05보다 작게 나오기 위해서는 몇 사람이 생존해야 하는 것일까요? (조금 사잇길로 빠진 이야기지만, 이런 통계학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모든 치료행위는 그 주체가 의사이든 한의사이든 관계없이 사이비 의료행위입니다. 태반주사니, 봉침이니 아무리 이론적으로 그럴듯하게 떠들어도 그 효과가 통계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런 얘기하면 개원가의 의사들은 의대교수가 자기들의 어려움을 모른다고 볼 맨 소리를 합니다. 마치 신학자들이 알파코스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하자 일선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을 위한 전도프로그램일 뿐인데 뭘 그리 시비냐고 투덜대는 것과 똑 같은 양상입니다.)
여덟째, 치유 간증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적지 않은 수의 경우 진단이 의사가 아닌 환자 자신이나 치유자에 의해 붙여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간증 전체의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최근에 타드 벤틀리라는 사람이 집회를 하자 주변 지역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하더군요. 인터넷에서 그 간증들을 찾아 읽어 보십시오. 제가 본 증례들은 객관적으로 사망이 증명된 경우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적치유의 진실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진단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치료 효과의 검증이 필수적입니다. 치유집회에 참석하기 전에 그가 확실히 병이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확진검사 결과(조직검사)가 있어야 하고, 집회 후에도 그에 준하는 검사를 시행해 병이 사라졌음을 환자의 증언에 의해서가 아닌 객관적인 방법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3. 손기철 장로 사례에 대한 분석
위에서 설명한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2008년 7월 11일에 www.godpeople.com 메인 화면에 올라온 치유집회 동영상을 대상으로 손기철 장로의 사례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이 날 집회 동영상에서 손장로가 치유했다고 선언한 질병 혹은 상태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축농증 2) 갈비뼈 이상 3) 눈꺼풀 내려옴
4) 어깨결림 5) 오른다리 마비 6) 영안을 열어줌
7) 회한의 날이 끝나고 독수리 날개 치듯…
8) 간경변 9) 자녀의 아토피 10) 등이 굽어진 사람
11) 각기병 12) 악몽 13) 밤눈 어두움
14) 위궤양 15) 담즙 이상 16) 왼쪽 폐 이상
17) 고환이 부은 사람 18) 생리통 19) 오른쪽 골반 휜 사람
20) 흑암의 세력에 묶인 자 21) 오른 엄지 발가락 발톱의 문제
22) 왼쪽 대장 폴립 23) 4살 남자 아이 팔과 목의 아토피
24) 심근경색 25) 악성 림프종 26) 골절
참석자들은 다음의 질병이 나았다고 간증하였습니다.
27) 혹(?,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음) 28) 갑상샘의 1.8cm의 혹이 사라짐
29) 성대결절 (성악가) 30) 기립성 저혈압
손기철 장로는 매 집회 때마다 성령님이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집회에서 OOO 명이 치유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기 오른쪽에 OO 환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적어도 손장로의 진단에는 오류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위의 목록을 보고 있노라면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가장 좋은 확인 방법은 위의 환자들 중 몇 사람을 추적해 확진 검사를 해 보는 것이겠지만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항목들은 진실일 가능성이 극히 낮아 보이는 것들도 있음이 사실입니다. 하나씩 설명해 보겠습니다.
1) 축농증
축농증은 손장로 집회의 단골 메뉴입니다. 제가 본 것만 벌써 세 번째 사례입니다. 왜 축농증이 자주 언급될까요? 환자가 현재 느끼는 뚜렷한 증상이 존재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치료 여부를 판단할 만한 뚜렷한 변화도 없는 만성질환이기 때문입니다. 주관적으로 나는 이제 나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그렇지 않음을 증명할 증상이 없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짐작하건대 손장로 집회 도중 축농증이 치유되었다고 손 들고 나온 사람들은 코가 뻥 뚫리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간단히 실험해 봅시다. 콧구멍을 한 쪽씩 번갈아 막고 숨을 쉬어 보십시오. 평소엔 느끼지 못했지만 한 쪽 코는 막혀있지 않습니까? 30분쯤 시간이 흐른 후 다시 한 번 해보면 이번에는 아까와 반대편 코가 막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코 속 혈관의 팽창과 수축에 의해 일어나는 정상적인 생리현상입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양 콧구멍을 번갈아 사용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이 변화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열정적인 집회로 인해 눈물 콧물 범벅이 되고 양쪽 코가 모두 막혀버린 상황에서는 한 쪽 콧구멍이 열리는 순간이 평소보다 더 과장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을 축농증 환자라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은 이 순간을 축농증이 치유되는 순간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2) 갈비뼈 이상
진단이 환자 자신과 치유자에 의해 붙여진 경우입니다.
3) 눈꺼풀 내려옴
안검하수(ptosis)라 부르는 현상입니다. 제가 병이라 하지 않고 현상이라고 한 이유는 눈꺼풀이 내려오는 것 자체는 나이 들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간혹 암 등의 심각한 질병이 신경을 침범하여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손장로가 치유했다는 것은 이 중 어느 경우일까요? 단순히 노화 현상을 역전시킨 것이라면 치유집회가 아니라 성형집회일 것이고, 암이 있는 사람이라면 눈꺼풀이 문제가 아니라 암 치료를 선언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4) 어깨 결림
어깨가 불편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도 여러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 관절에 이상이 생겨 움직임이 제한된 사람도 있고, 관절에는 무리가 없는데 주변 근육이나 인대의 통증 때문에 실제 움직일 수 있는 범위보다 작은 범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는 사실 ‘무서워서’ 못 움직이는 경우입니다. 이 사람들은 치유자가 확신을 주며 움직이라고 하면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습니다.
5) 오른 다리 마비
하지가 마비된 경우 실제로 심한 디스크나 종양 때문에 척추 신경에 이상이 있을 수도 있지만 팔 다리의 마비가 심인성 질환의 대표적인 증상인 것도 사실입니다. 이럴 경우 치유집회에서 증상이 사라질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특히 양쪽 다리가 아니라 한 쪽 다리가 마비된 경우 심인성 질환일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6)~7)은 질병이 아니니 지나가겠습니다.
8) 간경변
간경변을 진단하거나 치료 효과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초음파와 조직검사를 시행해야 합니다. 이 집회에서 나았다고 선언한 사람들은 반드시 병원에 가서 확인해야 합니다. 간경변 역시 환자 자신이 느끼는 증상의 변화가 거의 없는 병이기에 치유 은사자들의 단골 메뉴로 등장합니다.
9) 자녀의 아토피
위에서 말했듯이 아토피는 언젠가는 저절로 좋아지는 병입니다. 오늘 이 집회의 참석자 중 자녀에게 아토피가 있는 사람들은 100% 효과가 나타납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나중에 다시 나빠지면 부모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날 설교의 주제가 바로 이것 아닙니까?)
10) 등이 굽어진 사람
가까이서 잡은 화면이 아니기에 이분의 정확한 상태는 모르겠습니다만 흔히 이야기하는 꼽추 수준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선 진단이 환자와 치유자에 의해 붙여졌고, 설사 척추 측만증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치유 여부는 방사선 사진을 찍어본 후에야 판정할 수 있습니다.
11) 각기병
교과서에는 비타민 B 부족에 의해 생기는 병으로 항상 등장합니다만 우리나라 현역 의사 중 이병에 걸린 환자를 경험해 본 이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에 혹시 각기병이 생긴다면 만성 알코올 중독자 정도에서 간혹 발생할 것입니다. 그런데 비타민 보충이라는 가장 확실한 치료법이 있는 각기병을 왜 치유집회에 나와서 치료 받으려 하는 것일까요? 혹시 각기병으로 인해 생겨난 마비 증상이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는 후유증을 남긴 경우라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12) 악몽 ; 지나가겠습니다..
13) 밤눈 어두움 (야맹증)
각기병과 더불어 교과서에 비타민 A 결핍에 의한 질환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11)에서와 마찬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손장로가 각기병과 야맹증을 동시에 언급한 것으로 보아 오늘 치유 받을 질환의 목록을 성령님이 불러주셨을 가능성 보다는 의학책을 뒤적이다 눈에 뜨이는 진단을 죽 적어왔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4) 위궤양
위내시경을 해보기 전에는 진단도 치유 판정도 불가능합니다. 속쓰림 증상의 존재여부로는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속이 쓰린 이유는 궤양으로 인해 상처가 난 상태에서 위산이 과다분비되는 것인데, 위산의 분비량은 심리상태에 크게 영향 받기 때문입니다.
15) 담즙 이상
진단이 환자 자신에 의해 붙여진 경우입니다. ‘담즙 이상’이란 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16) 왼쪽 폐 이상
진단이 치유자와 환자 자신에 의해 붙여진 경우입니다.
17) 고환이 부은 사람
‘부었다’라는 말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이 날 집회에 모인 남성의 대부분이 자신의 고환이 부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음낭수종’을 말한 것이라면 이것 역시 확실한 치료법이 있는데 왜 치유집회에 왔는지 궁금합니다.
18) 생리통
평소 생리통이 있으나 이 날 생리를 하지 않던 여성들은 어떻게 치유를 판단합니까? 다음 생리일에 다시 통증이 발생하면 이 또한 자기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 않습니까?
19) 오른쪽 골반 휜 사람
저는 이게 무슨 병인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이런 병도 있나 싶습니다. 평소 자세가 틀어진 것을 말한 것이라면 치유집회 와서 기도하기 전에 생활 속에서 바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 아니겠습니까?
20) 흑암의 세력… -그냥 지나갑니다.
21) 오른 엄지 발가락 발톱의 문제
‘문제’라는 것이 엄지 발톱의 무좀인지, 살을 파고드는 발톱인지, 사고로 절단된 발톱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떨어져 나간 발톱이 순식간에 다시 자라난 경우라면 이적치유로 인정할 만 합니다만 그게 그렇게 심각한 질환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2) 왼쪽 대장 폴립
이것처럼 치유 효과 판정이 명쾌한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치유를 선언 받은 환자는 당장 병원에 가 대장 내시경을 다시 한 번 해야 합니다. 최근에 보였던 폴립이 사라져 버렸다면 이적치유입니다. 하지만 오늘 손기철 장로의 설교 내용으로 볼 때 폴립이 그냥 그대로 있다면 환자의 믿음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3) 남자아이 아토피 ; 9)와 같은 내용입니다.
24) 심근경색
집회 장소까지 스스로 오신 것으로 보아 당장 생명의 위협이 있는 단계는 지나고 후유증으로 심장 기능이 저하된 환자일 것입니다. 이 또한 환자가 자각하는 증상이 없고, 치유 여부를 판정할 뚜렷한 변화도 없는 상태입니다. 치유를 확인하려면 병원에 가서 심장 초음파를 비롯해 여러 검사를 해 보아야 합니다.
25) 악성 림프종
통계의 문제를 말씀드렸습니다. 악성 림프종은 진행된 정도에 따라, 그리고 조직학적 종류에 따라 생존율이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그 생존율보다 통계학적으로 의미를 부여할 만큼 더 많은 사람이 5년 후에도 생존해 있어야 합니다.
26) 골절
오늘 나오신 환자가 석고붕대를 얼마 동안 감고 있었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하루 전에 확실한 골절이 일어났던 환자가 오늘 동영상처럼 걷는다면 이적치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한두 달 전에 일어났던 골절이라든지, 완전한 골절이 아니라 그냥 금이 간 정도였다면 아무 의미 없는 사례입니다.
27) 혹? ; 잘 듣지 못해 지나가겠습니다.
28) 갑상샘의 혹
갑상샘의 1.8cm 혹을 어떻게 진단 받았을까요? 초음파 검사를 했을 것입니다. 갑상샘이라는 장기는 두꺼운 캡슐에 싸여 있기 때문에 혹이 만들어져도 어지간한 크기가 되기 까지는 밖에서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습니다. 1.8cm 크기라면 아직 손으로 만져봐서 판단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닙니다. 진단을 초음파로 받았다면 치유 판정도 초음파로 해야 합니다.
29) 성대결절
본인은 성대결절이 사라졌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을 하는 목소리가 왜 그리도 허스키하신 것일까요?
30) 기립성 저혈압
누워 있다 일어났을 때 혈압이 떨어지는 병입니다. 체위의 변화에 혈압 조절 기능이 더디게 따라가는 상태이지요. 오늘 나오신 할아버지가 집회장소에서 누워 계셨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랜 시간 앉아 계시는 동안 몸은 이미 적응을 끝마쳤을 것입니다. 누워 있다 일어나는 것과, 의자에 앉아 있다 일어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동영상에 포함된 것은 아니지만 제 머리속에 강하게 남아있는 장면이 있는데 5월 2일자 갓피플 메인 화면에 올라온 동영상 중에 나오는 휠체어에 앉은 사람들이 걷는 장면입니다. 그 동영상에는 네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성큼성큼 걸어나온 사람. 이 사람은 애초에 못 걷는 사람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증거는 없습니다만 한 번 직접 보십시오). 두 번째 부축 받아 나온 사람. 이 사람은 아마도 중풍의 후유증으로 팔, 다리의 마비가 온 사람인 듯 합니다. 양편에서 부축하여 억지로 걸어가는 것처럼 하였습니다만 이 사람이 정말 치유되어 걸은 것일까요? 동영상을 다시 보십시오. 그의 오른 팔이 어떤 상태인지. 치유가 일어났다면 다리야 체중을 지탱할 만큼 완전히 힘이 돌아오지 않았을 수 있다 하더라도 팔이 그렇게 축 늘어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세 번째 사람도 비슷한 경우인 듯 하지만 자세히 보여주지 않아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뇌성마비를 앓아온 환자 같습니다. 이 사람도 억지로 일으켜 세우지만 걷게 하는 모습은 끝까지 보여주지 않고 편집하였더군요. 더 보여주었더라면 장애인 인권단체에 학대로 고발해도 될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두 번째와 네 번째 사람은 전혀 치유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박수 치며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동영상만 보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손기철 장로가 훨씬 불리한 입장에 서 있습니다. 스스로 이 일이 성령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라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단 하나의 예라도 거짓임이 입증되면 전체 사역이 무너지게 됩니다. 간증하러 나왔던 환자들이 제가 지적한 자료들이 포함된 의사의 진단서를 제출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리라 생각하지만 이런 일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가톨릭에는 프랑스의 루르드라는 지역이 소위 ‘성모발현’과 이적치유로 유명합니다. 루르드 치유기적은 워낙 역사가 장구한 예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어난 치유 사건에 대해 의학적으로 분석한 논문들도 몇 개가 존재합니다. 이곳에서 치유를 경험했다는 환자들을 추적하여 검사한 것이지요. 그 결과는 참으로 처참합니다. 손장로의 치유집회에 대해 이런 검증을 시도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4. 보다 근본적인 질문 : 왜 치유 받으려 하는가?다음 글이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쉽게 무시해 버리지만 사실상 건강과 질병의 메커니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매우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범주 속에 나는 “신앙”을 포함시키고자 합니다. 내가 말하는 신앙이란 모든 종류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만일 이 견해가 옳다면 그 어떤 종류의 신앙도 이러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 기독교적인 신앙 뿐만 아니라 카리스마적인 신앙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신앙, 심리학적인 요소, 강한 감정, 충격, 악령의 역사 등 수많은 요소들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
진실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참된 기적들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기도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적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이적이란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일반적인 영성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달려 있습니다.
환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질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 하나님 뿐만 아니라 그 어느 곳에라도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온전함”에 대해서는 좀처럼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질병의 증상이나 그에 따른 즉각적인 무기력감으로부터 벗어나서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다시금 사회에서 그들의 지위를 되찾는 데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의학과 치유)
로이드 존스 목사는 자신이 임종하기 전 이 말의 진실성을 스스로 입증하였습니다. 대장암 말기로 더 이상 희망이 없어 항암치료를 중단한 후 치유를 위한 기도를 하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 내가 영광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
손장로의 치유 집회에 매달리는 많은 환자들이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참고도서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들" 박영돈 저, IVP.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에 대하여-
임범진 집사 (장년부, 충남대 의대 조교수)
손기철 장로의 책은 읽어본 일이 없습니다만 그가 진행하는 치유집회의 동영상이 갓피플 메인화면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손장로가 행하는 설교의 내용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만 이 글에서는 치유 부분에만 집중해 보려 합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곳에서 정말로 치유가 일어나고 있는지 커다란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1. 신유는 오늘날도 일어나는가?손기철 장로의 치유 행위를 분석하기에 앞서 보다 근본적인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습니다. 바로 신유(faith healing)가 오늘날도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답하기 전에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신유의 은사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과 “오늘날에도 신유가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은 전혀 다른 내용을 묻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풀어 설명하면 “하나님이 지금도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셔서 어떤 사람의 병을 직접적으로 낫게 하시는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내용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별 어려움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며 성경에서도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약 5:16). 하지만 첫 번째 질문은 대답이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사도 시대와 마찬가지로 병자에게 병 낫기를 명할 수 있고, 그 결과 실제로 병의 치료가 일어나며,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언제 하나님이 병고침을 행하실지 정확하게 예측하여 얘기해 줄 수 있는 그런 은사를 가진 사람이 여전히 존재하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이와 같이 전혀 다른 내용을 묻는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 신유 은사의 지속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면 다음 순간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의 가능성, 더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각종 이적의 사실성까지 의심하는 사람이라는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됩니다. 저는 첫 번째 오늘날에도 신유의 은사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아니다”라고 대답하며, 두 번째 오늘날에도 신유가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입장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 입장에 대해 이미 많은 책들이 출판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 문제에 저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오늘 다룰 내용과는 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제, “오늘날에도 신유가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부연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1. 신유는 오늘날도 일어나는가?손기철 장로의 치유 행위를 분석하기에 앞서 보다 근본적인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습니다. 바로 신유(faith healing)가 오늘날도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답하기 전에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신유의 은사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과 “오늘날에도 신유가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은 전혀 다른 내용을 묻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풀어 설명하면 “하나님이 지금도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셔서 어떤 사람의 병을 직접적으로 낫게 하시는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내용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별 어려움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며 성경에서도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약 5:16). 하지만 첫 번째 질문은 대답이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사도 시대와 마찬가지로 병자에게 병 낫기를 명할 수 있고, 그 결과 실제로 병의 치료가 일어나며,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언제 하나님이 병고침을 행하실지 정확하게 예측하여 얘기해 줄 수 있는 그런 은사를 가진 사람이 여전히 존재하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이와 같이 전혀 다른 내용을 묻는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 신유 은사의 지속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면 다음 순간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의 가능성, 더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각종 이적의 사실성까지 의심하는 사람이라는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됩니다. 저는 첫 번째 오늘날에도 신유의 은사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아니다”라고 대답하며, 두 번째 오늘날에도 신유가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입장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 입장에 대해 이미 많은 책들이 출판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 문제에 저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오늘 다룰 내용과는 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제, “오늘날에도 신유가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부연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신유라는 용어는 대단히 부적절한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이 용어는 하나님의 이적적 병고침이 마치 우리의 믿음 여부, 혹은 믿음의 강도에 달려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자칭 신유 은사자들은 병고침이라는 결과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고 얼마나 능력 있는 사역자를 만나느냐에 달려있는 듯이 가르칩니다. 성도가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약 5:14), 그가 병에서 회복될 것인지, 그 병을 가지고 살아가며 연단을 받을 것인지(고후 12:8-9), 아니면 죽음을 통해 주님과 함께 거하는 복을 누릴 것인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신유라는 말 대신 로이드 존스가 사용한 이적치유 (miraculous healing)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이적치유 사건은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적은 빈도로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이 글에서 힘주어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2. 이적치유의 진실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나에게 이적적인 치유가 일어났어요”라는 간증을 들었을 때 그 말의 진실성을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 간증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말에는 진정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을 담아 말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실제로 그 질병이 있었는? 그리고 지금은 정말로 치료가 되었는지 판단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프랭클린 페인 주니어라는 의사이자 기독교 의료윤리 연구가가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의료의 성경적 접근>, 한국누가회출판부). 로이드 존스 목사도 그의 책 <의학과 치유> (생명의 말씀사)에서 이 문제를 언급합니다. 이 내용들을 제가 조금 변형해 인용하며 설명해 보겠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이적치유 사건을 간증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에게 정말로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게 만드는 몇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첫째, 세상에는 심인성질병 (psychosomatic illness)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심인성질병이란 환자는 증상을 호소하지만 신체에 실재적인 이상은 발견되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만성적인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서 아무리 CT나 MRI 등을 찍어보아도 디스크나 골절은 발견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꾀병과 다릅니다. 꾀병은 실제로는 증상이 없으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심인성질병은 환자 자신은 실제로 증상을 느낍니다. 심인성질병의 증상은 매우 다양해서 가벼운 통증 호소로부터 신체 일부의 마비증세까지 폭넓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카리스마 넘치는 의사가 당신은 나았다는 암시를 강하게 줄 때 극적인 반응을 보이며 씻은 듯이 낫는 것도 특징입니다. 같은 일이 이적치유집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많은 사람이 신뢰하는 이적치유자의 한 마디에 몇 년을 알아오던 증상이 씻은듯이 사라지는 경험.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신체적 질병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환자와 의사 사이에는 심각한 의사소통 장애가 흔히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환자와 의사 사이의 의사소통은 많은 의사들의 고민거리입니다. 의료현장에서 의사가 설명하는 내용이 환자에게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의사측의 원인도 있지만 자기 몸의 질병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환자가 선택적으로 듣는다는 사실도 매우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에 나온 신유은사 간증집에 기도로 녹내장을 치유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과에 가서 안압을 측정해 보고 녹내장을 진단 받았으나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다음날 가서 다시 검사했더니 녹내장이 씻은듯이 나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의사의 상식으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처음 보는 환자를 당장 녹내장으로 진단했다는 것도 이상하고 또 다음날 당장 완치를 선언했다는 것은 더 이상합니다. 아마도 첫날에 의사는 “안압이 높으시네요. 녹내장일 가능성이 있으니 검사를 해 보아야겠습니다.”라고 했을 것이고, 둘째 날에는 “오늘은 안압이 정상으로 나오셨네요”라고만 했을 것입니다. 이 의사는 녹내장이라고 진단한 적도 없고, 녹내장의 치유를 선언한 적은 더더욱 없는데 환자는 두 가지를 다 경험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경우는 암입니다. 의사 입에서 ‘암’이라는 단어가 나오기만 한 것으로도 환자는 자기가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이적치유 집회에 다녀오면 엄청난 간증거리가 생기게 됩니다.
셋째는 그 유명한 위약효과(placebo effect)입니다.
가짜 약을 먹은 사람도 그것이 약이라고 믿으면 실제로 질병이 낫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잇습니다.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잠을 못자던 환자에게 매우 값비싸고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 진통제를 처방해주겠다고 말하고 진지한 자세로 생리식염수(소금간한 맹물입니다) 10cc를 링거액에 섞어주면 거짓말같이 통증이 사라지고 잠도 잘 자는 현상은 거의 모든 의사가 경험하는 일입니다. 위약효과는 너무나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약이 개발되어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가루로 만든 가짜 약을 먹은 사람들과 대조해 보아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적치유 은사자의 강력한 암시는 가장 좋은 위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넷째, 질병의 자연사를 모르면 오해가 발생합니다.
어떤 병을 치료하지 않고 그냥 방치했을 때 어떤 경과를 밟는지 관찰한 것이 질병의 자연사(natural course)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낫는 것이 감기의 자연사라면 평생을 두고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는 것은 아토피, 류머티스 관절염 등의 만성질환의 자연사입니다. 질병의 자연사를 아는 것은 치료 효과를 판정하는데 필수적인 전제조건입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예를 두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심한 감기로 개인병원을 찾아 일주일 치 약을 먹었으나 차도가 없는 사람이 참다 못해 대학병원을 방문합니다. 대학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먹자 거짓말같이 독한 감기가 떨어지고 이 사람은 대학병원의 교수가 역시 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번에도 비슷한 증상의 심한 감기가 발생하자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용한 교수를 찾아가기로 마음 먹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번에 받아온 약은 효과가 없습니다. 일 주일 내내 고생하고서야 감기가 떨어져 나갑니다. 첫 번째 경우에 대학교수가 용한 의사로 인정받은 이유는 단지 환자가 감기에 걸린 지 일 주일이 지난 후에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흔한 예는 아이들의 아토피입니다. 몇 년 동안 고생하던 아토피가 이름 모를 풀을 다려먹고 씻은듯이 낫습니다. 하도 신기해 주변의 다른 집에도 추천해 주었는데 이번에는 효과가 그다지 신통치 않습니다. 왜일까요? 아토피는 수 개월~수 년을 주기로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는 자연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호전되려는 찰나 우연히 먹게 된 풀뿌리가 치료의 주인공으로 오인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아토피가 발생할 것입니다. 의학에는 우연을 감별하기 위한 연구방법론이 많이 개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적치유에서는 이런 효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검사의 특성 및 한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오해가 발생합니다.
질병을 진단하기 위해 행하는 검사에는 선별검사(screening test)와 확진을 위한 검사가 있습니다. 선별검사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정 질병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가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검사입니다. 선별검사에서 양성이 나왔다는 것은 그 질병에 걸렸을 확률이 다른 사람보다 높으므로 확진을 위한 검사를 시행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 그 자체가 질병을 확진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CT나 MRI 촬영은 대표적인 선별검사입니다. CT/MRI에서 폐에 종양으로 의심되는 덩어리(종괴)가 발견되었을 때 조직검사로 확진되기 전까지는 말 그대로 ‘의심’ 단계이지 폐암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 종괴가 없어졌다면 애초에 폐암이 아닌 폐렴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유 간증들이 선별검사만 받은 상태에서 확진을 받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섯째, 불가항력적 오진이 존재합니다.
현재로서 암을 진단하는 가장 확실하고 믿을만한 방법은 조직검사입니다. 극소수의 경우이긴 하지만 조직검사까지 시행하고도 심한 염증과 암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 흔한 것이 위궤양과 위암의 구분입니다. 둘 다 위벽에 움푹 파인 구덩이가 만들어집니다. 내시경을 통해 모양을 보는 것만으로는 둘의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조직검사를 하여 확실히 구분하는데 아주 드물게 조직검사를 하여도 진단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대학병원급에서는 일 년에 몇 차례 나타납니다. 이런 경우는 검사를 반복하며 환자를 계속 관찰하며 조심스럽게 판정합니다. 하지만 경험 없는 병리학자가 이런 예를 접했을 때는 성급하게 위암으로 진단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평신도 성경공부 교사로 유명한 어떤 분의 간증을 읽어보니 중국에서 위암으로 진단 받고 이적치유를 경험한 내용이 나옵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분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일곱째, 통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해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렸을 때 병기(1기, 2기, 3기, 4기)가 결정되면 의사는 지금까지 알려진 5년 생존율을 말해 줄 수 있습니다. 4기(말기)의 5년 생존율이 20%인 암에 걸린 환자를 가정해 봅시다. 이 사람이 5년 후에도 살아 있을 확률이 20%라는 말이며 바꾸어 말하면 이 암의 말기 상태에서 발견된 환자 5명 중 4명은 5년 안에 사망한다는 말입니다. 10명의 그리스도인이 이 암의 말기 상태에서 치유집회를 찾았습니다. 치유 은사자는 그들이 모두 나았다고 선언했고 5년 후에 보니 그 중 2명은 실제로 살아있습니다. 이 두 명이 정말로 이적치유를 경험한 것일까요? 이 치유집회가 정말로 효력을 발휘한 것일까요? 환자수가 100명으로 늘어난다면 어떻겠습니까? 예를 들어 23명이 살아있고 97명이 사망하였다면 치료효과를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검증하는 것이 통계학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들어본 기억이 나십니까? 95% 유의수준에서 치유집회를 가든 안 가든 생존율은 똑같다는 귀무가설을 기각하기 위해서는, 즉 p값이 0.05보다 작게 나오기 위해서는 몇 사람이 생존해야 하는 것일까요? (조금 사잇길로 빠진 이야기지만, 이런 통계학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모든 치료행위는 그 주체가 의사이든 한의사이든 관계없이 사이비 의료행위입니다. 태반주사니, 봉침이니 아무리 이론적으로 그럴듯하게 떠들어도 그 효과가 통계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런 얘기하면 개원가의 의사들은 의대교수가 자기들의 어려움을 모른다고 볼 맨 소리를 합니다. 마치 신학자들이 알파코스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하자 일선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을 위한 전도프로그램일 뿐인데 뭘 그리 시비냐고 투덜대는 것과 똑 같은 양상입니다.)
여덟째, 치유 간증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적지 않은 수의 경우 진단이 의사가 아닌 환자 자신이나 치유자에 의해 붙여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간증 전체의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최근에 타드 벤틀리라는 사람이 집회를 하자 주변 지역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하더군요. 인터넷에서 그 간증들을 찾아 읽어 보십시오. 제가 본 증례들은 객관적으로 사망이 증명된 경우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적치유의 진실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진단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치료 효과의 검증이 필수적입니다. 치유집회에 참석하기 전에 그가 확실히 병이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확진검사 결과(조직검사)가 있어야 하고, 집회 후에도 그에 준하는 검사를 시행해 병이 사라졌음을 환자의 증언에 의해서가 아닌 객관적인 방법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3. 손기철 장로 사례에 대한 분석
위에서 설명한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2008년 7월 11일에 www.godpeople.com 메인 화면에 올라온 치유집회 동영상을 대상으로 손기철 장로의 사례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이 날 집회 동영상에서 손장로가 치유했다고 선언한 질병 혹은 상태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축농증 2) 갈비뼈 이상 3) 눈꺼풀 내려옴
4) 어깨결림 5) 오른다리 마비 6) 영안을 열어줌
7) 회한의 날이 끝나고 독수리 날개 치듯…
8) 간경변 9) 자녀의 아토피 10) 등이 굽어진 사람
11) 각기병 12) 악몽 13) 밤눈 어두움
14) 위궤양 15) 담즙 이상 16) 왼쪽 폐 이상
17) 고환이 부은 사람 18) 생리통 19) 오른쪽 골반 휜 사람
20) 흑암의 세력에 묶인 자 21) 오른 엄지 발가락 발톱의 문제
22) 왼쪽 대장 폴립 23) 4살 남자 아이 팔과 목의 아토피
24) 심근경색 25) 악성 림프종 26) 골절
참석자들은 다음의 질병이 나았다고 간증하였습니다.
27) 혹(?,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음) 28) 갑상샘의 1.8cm의 혹이 사라짐
29) 성대결절 (성악가) 30) 기립성 저혈압
손기철 장로는 매 집회 때마다 성령님이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집회에서 OOO 명이 치유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기 오른쪽에 OO 환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적어도 손장로의 진단에는 오류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위의 목록을 보고 있노라면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가장 좋은 확인 방법은 위의 환자들 중 몇 사람을 추적해 확진 검사를 해 보는 것이겠지만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항목들은 진실일 가능성이 극히 낮아 보이는 것들도 있음이 사실입니다. 하나씩 설명해 보겠습니다.
1) 축농증
축농증은 손장로 집회의 단골 메뉴입니다. 제가 본 것만 벌써 세 번째 사례입니다. 왜 축농증이 자주 언급될까요? 환자가 현재 느끼는 뚜렷한 증상이 존재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치료 여부를 판단할 만한 뚜렷한 변화도 없는 만성질환이기 때문입니다. 주관적으로 나는 이제 나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그렇지 않음을 증명할 증상이 없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짐작하건대 손장로 집회 도중 축농증이 치유되었다고 손 들고 나온 사람들은 코가 뻥 뚫리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간단히 실험해 봅시다. 콧구멍을 한 쪽씩 번갈아 막고 숨을 쉬어 보십시오. 평소엔 느끼지 못했지만 한 쪽 코는 막혀있지 않습니까? 30분쯤 시간이 흐른 후 다시 한 번 해보면 이번에는 아까와 반대편 코가 막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코 속 혈관의 팽창과 수축에 의해 일어나는 정상적인 생리현상입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양 콧구멍을 번갈아 사용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이 변화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열정적인 집회로 인해 눈물 콧물 범벅이 되고 양쪽 코가 모두 막혀버린 상황에서는 한 쪽 콧구멍이 열리는 순간이 평소보다 더 과장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을 축농증 환자라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은 이 순간을 축농증이 치유되는 순간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2) 갈비뼈 이상
진단이 환자 자신과 치유자에 의해 붙여진 경우입니다.
3) 눈꺼풀 내려옴
안검하수(ptosis)라 부르는 현상입니다. 제가 병이라 하지 않고 현상이라고 한 이유는 눈꺼풀이 내려오는 것 자체는 나이 들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간혹 암 등의 심각한 질병이 신경을 침범하여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손장로가 치유했다는 것은 이 중 어느 경우일까요? 단순히 노화 현상을 역전시킨 것이라면 치유집회가 아니라 성형집회일 것이고, 암이 있는 사람이라면 눈꺼풀이 문제가 아니라 암 치료를 선언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4) 어깨 결림
어깨가 불편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도 여러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 관절에 이상이 생겨 움직임이 제한된 사람도 있고, 관절에는 무리가 없는데 주변 근육이나 인대의 통증 때문에 실제 움직일 수 있는 범위보다 작은 범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는 사실 ‘무서워서’ 못 움직이는 경우입니다. 이 사람들은 치유자가 확신을 주며 움직이라고 하면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습니다.
5) 오른 다리 마비
하지가 마비된 경우 실제로 심한 디스크나 종양 때문에 척추 신경에 이상이 있을 수도 있지만 팔 다리의 마비가 심인성 질환의 대표적인 증상인 것도 사실입니다. 이럴 경우 치유집회에서 증상이 사라질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특히 양쪽 다리가 아니라 한 쪽 다리가 마비된 경우 심인성 질환일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6)~7)은 질병이 아니니 지나가겠습니다.
8) 간경변
간경변을 진단하거나 치료 효과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초음파와 조직검사를 시행해야 합니다. 이 집회에서 나았다고 선언한 사람들은 반드시 병원에 가서 확인해야 합니다. 간경변 역시 환자 자신이 느끼는 증상의 변화가 거의 없는 병이기에 치유 은사자들의 단골 메뉴로 등장합니다.
9) 자녀의 아토피
위에서 말했듯이 아토피는 언젠가는 저절로 좋아지는 병입니다. 오늘 이 집회의 참석자 중 자녀에게 아토피가 있는 사람들은 100% 효과가 나타납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나중에 다시 나빠지면 부모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날 설교의 주제가 바로 이것 아닙니까?)
10) 등이 굽어진 사람
가까이서 잡은 화면이 아니기에 이분의 정확한 상태는 모르겠습니다만 흔히 이야기하는 꼽추 수준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선 진단이 환자와 치유자에 의해 붙여졌고, 설사 척추 측만증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치유 여부는 방사선 사진을 찍어본 후에야 판정할 수 있습니다.
11) 각기병
교과서에는 비타민 B 부족에 의해 생기는 병으로 항상 등장합니다만 우리나라 현역 의사 중 이병에 걸린 환자를 경험해 본 이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에 혹시 각기병이 생긴다면 만성 알코올 중독자 정도에서 간혹 발생할 것입니다. 그런데 비타민 보충이라는 가장 확실한 치료법이 있는 각기병을 왜 치유집회에 나와서 치료 받으려 하는 것일까요? 혹시 각기병으로 인해 생겨난 마비 증상이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는 후유증을 남긴 경우라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12) 악몽 ; 지나가겠습니다..
13) 밤눈 어두움 (야맹증)
각기병과 더불어 교과서에 비타민 A 결핍에 의한 질환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11)에서와 마찬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손장로가 각기병과 야맹증을 동시에 언급한 것으로 보아 오늘 치유 받을 질환의 목록을 성령님이 불러주셨을 가능성 보다는 의학책을 뒤적이다 눈에 뜨이는 진단을 죽 적어왔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4) 위궤양
위내시경을 해보기 전에는 진단도 치유 판정도 불가능합니다. 속쓰림 증상의 존재여부로는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속이 쓰린 이유는 궤양으로 인해 상처가 난 상태에서 위산이 과다분비되는 것인데, 위산의 분비량은 심리상태에 크게 영향 받기 때문입니다.
15) 담즙 이상
진단이 환자 자신에 의해 붙여진 경우입니다. ‘담즙 이상’이란 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16) 왼쪽 폐 이상
진단이 치유자와 환자 자신에 의해 붙여진 경우입니다.
17) 고환이 부은 사람
‘부었다’라는 말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이 날 집회에 모인 남성의 대부분이 자신의 고환이 부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음낭수종’을 말한 것이라면 이것 역시 확실한 치료법이 있는데 왜 치유집회에 왔는지 궁금합니다.
18) 생리통
평소 생리통이 있으나 이 날 생리를 하지 않던 여성들은 어떻게 치유를 판단합니까? 다음 생리일에 다시 통증이 발생하면 이 또한 자기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 않습니까?
19) 오른쪽 골반 휜 사람
저는 이게 무슨 병인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이런 병도 있나 싶습니다. 평소 자세가 틀어진 것을 말한 것이라면 치유집회 와서 기도하기 전에 생활 속에서 바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 아니겠습니까?
20) 흑암의 세력… -그냥 지나갑니다.
21) 오른 엄지 발가락 발톱의 문제
‘문제’라는 것이 엄지 발톱의 무좀인지, 살을 파고드는 발톱인지, 사고로 절단된 발톱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떨어져 나간 발톱이 순식간에 다시 자라난 경우라면 이적치유로 인정할 만 합니다만 그게 그렇게 심각한 질환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2) 왼쪽 대장 폴립
이것처럼 치유 효과 판정이 명쾌한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치유를 선언 받은 환자는 당장 병원에 가 대장 내시경을 다시 한 번 해야 합니다. 최근에 보였던 폴립이 사라져 버렸다면 이적치유입니다. 하지만 오늘 손기철 장로의 설교 내용으로 볼 때 폴립이 그냥 그대로 있다면 환자의 믿음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3) 남자아이 아토피 ; 9)와 같은 내용입니다.
24) 심근경색
집회 장소까지 스스로 오신 것으로 보아 당장 생명의 위협이 있는 단계는 지나고 후유증으로 심장 기능이 저하된 환자일 것입니다. 이 또한 환자가 자각하는 증상이 없고, 치유 여부를 판정할 뚜렷한 변화도 없는 상태입니다. 치유를 확인하려면 병원에 가서 심장 초음파를 비롯해 여러 검사를 해 보아야 합니다.
25) 악성 림프종
통계의 문제를 말씀드렸습니다. 악성 림프종은 진행된 정도에 따라, 그리고 조직학적 종류에 따라 생존율이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그 생존율보다 통계학적으로 의미를 부여할 만큼 더 많은 사람이 5년 후에도 생존해 있어야 합니다.
26) 골절
오늘 나오신 환자가 석고붕대를 얼마 동안 감고 있었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하루 전에 확실한 골절이 일어났던 환자가 오늘 동영상처럼 걷는다면 이적치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한두 달 전에 일어났던 골절이라든지, 완전한 골절이 아니라 그냥 금이 간 정도였다면 아무 의미 없는 사례입니다.
27) 혹? ; 잘 듣지 못해 지나가겠습니다.
28) 갑상샘의 혹
갑상샘의 1.8cm 혹을 어떻게 진단 받았을까요? 초음파 검사를 했을 것입니다. 갑상샘이라는 장기는 두꺼운 캡슐에 싸여 있기 때문에 혹이 만들어져도 어지간한 크기가 되기 까지는 밖에서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습니다. 1.8cm 크기라면 아직 손으로 만져봐서 판단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닙니다. 진단을 초음파로 받았다면 치유 판정도 초음파로 해야 합니다.
29) 성대결절
본인은 성대결절이 사라졌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을 하는 목소리가 왜 그리도 허스키하신 것일까요?
30) 기립성 저혈압
누워 있다 일어났을 때 혈압이 떨어지는 병입니다. 체위의 변화에 혈압 조절 기능이 더디게 따라가는 상태이지요. 오늘 나오신 할아버지가 집회장소에서 누워 계셨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랜 시간 앉아 계시는 동안 몸은 이미 적응을 끝마쳤을 것입니다. 누워 있다 일어나는 것과, 의자에 앉아 있다 일어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동영상에 포함된 것은 아니지만 제 머리속에 강하게 남아있는 장면이 있는데 5월 2일자 갓피플 메인 화면에 올라온 동영상 중에 나오는 휠체어에 앉은 사람들이 걷는 장면입니다. 그 동영상에는 네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성큼성큼 걸어나온 사람. 이 사람은 애초에 못 걷는 사람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증거는 없습니다만 한 번 직접 보십시오). 두 번째 부축 받아 나온 사람. 이 사람은 아마도 중풍의 후유증으로 팔, 다리의 마비가 온 사람인 듯 합니다. 양편에서 부축하여 억지로 걸어가는 것처럼 하였습니다만 이 사람이 정말 치유되어 걸은 것일까요? 동영상을 다시 보십시오. 그의 오른 팔이 어떤 상태인지. 치유가 일어났다면 다리야 체중을 지탱할 만큼 완전히 힘이 돌아오지 않았을 수 있다 하더라도 팔이 그렇게 축 늘어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세 번째 사람도 비슷한 경우인 듯 하지만 자세히 보여주지 않아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뇌성마비를 앓아온 환자 같습니다. 이 사람도 억지로 일으켜 세우지만 걷게 하는 모습은 끝까지 보여주지 않고 편집하였더군요. 더 보여주었더라면 장애인 인권단체에 학대로 고발해도 될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두 번째와 네 번째 사람은 전혀 치유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박수 치며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동영상만 보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손기철 장로가 훨씬 불리한 입장에 서 있습니다. 스스로 이 일이 성령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라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단 하나의 예라도 거짓임이 입증되면 전체 사역이 무너지게 됩니다. 간증하러 나왔던 환자들이 제가 지적한 자료들이 포함된 의사의 진단서를 제출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리라 생각하지만 이런 일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가톨릭에는 프랑스의 루르드라는 지역이 소위 ‘성모발현’과 이적치유로 유명합니다. 루르드 치유기적은 워낙 역사가 장구한 예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어난 치유 사건에 대해 의학적으로 분석한 논문들도 몇 개가 존재합니다. 이곳에서 치유를 경험했다는 환자들을 추적하여 검사한 것이지요. 그 결과는 참으로 처참합니다. 손장로의 치유집회에 대해 이런 검증을 시도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4. 보다 근본적인 질문 : 왜 치유 받으려 하는가?다음 글이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쉽게 무시해 버리지만 사실상 건강과 질병의 메커니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매우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범주 속에 나는 “신앙”을 포함시키고자 합니다. 내가 말하는 신앙이란 모든 종류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만일 이 견해가 옳다면 그 어떤 종류의 신앙도 이러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 기독교적인 신앙 뿐만 아니라 카리스마적인 신앙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신앙, 심리학적인 요소, 강한 감정, 충격, 악령의 역사 등 수많은 요소들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
진실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참된 기적들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기도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적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이적이란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일반적인 영성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달려 있습니다.
환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질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 하나님 뿐만 아니라 그 어느 곳에라도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온전함”에 대해서는 좀처럼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질병의 증상이나 그에 따른 즉각적인 무기력감으로부터 벗어나서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다시금 사회에서 그들의 지위를 되찾는 데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의학과 치유)
로이드 존스 목사는 자신이 임종하기 전 이 말의 진실성을 스스로 입증하였습니다. 대장암 말기로 더 이상 희망이 없어 항암치료를 중단한 후 치유를 위한 기도를 하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 내가 영광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
손장로의 치유 집회에 매달리는 많은 환자들이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Monday, November 5, 2012
한 날 묵상 - 갈 3:5-14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율 법 의 행위로는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에 이 르 고 성령의 행하시는 일을 받게 됩니다.>
한 날 묵상 - 갈 3:5-14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에 이르고 성령의 행하시는 일을 받게 됩니다.>
1.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힘은 어디서 오나요?
2. 밥심! 지심(지식)! 권심(권력)! ㅋㅋㅋㅋ 뭐 대충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갈 힘은 어디서 오는가?
3. 성령의 역사하심은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을 넘어 삶의 전영역에서 역사하십니다.
4. 우리가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생각할 때 믿음으로만 제한시키면 우리의 삶이 율법에 매일 수 있습니다.
5. 5절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6. 신앙이 오래되다면 보면 잊어버리거나 익숙해지면서 초심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게 되는데, 초기의 은혜는 바로 믿음으로 성령의 은혜이다. 신앙이 오래되다면, 그리고 교회의 일들이 익숙해지다면 자신의 경험이나 능력을 의지하게 되는데, 이 때 늘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은혜이다.
7. 성령의 역사하심은 삶의 전영역에 미칩니다.
8. 우리가운데 성령을 주시고, 믿음으로 능력을 행하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입니다.
9. 우리의 그 어떠한 행위에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10. 믿음에 관한 성령이 주시는 선물은 아브라함의 의가 어디서 온 것인가에 대한 예를 통해 확증하고 있습니다.
11. 아브라함의 의는 믿음에서 왔습니다.
12. 결코 아브라함의 행위로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의 근원이 된다는, 즉 8절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14. 9절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5. 오직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습니다.
16. 그렇다면, 죄와 은혜를 논 할 때, 성령은 어떻게 죄 속에서 역사하는가?
17. 박총님 facebook에서...
"너는 네 과거의 죄와 부도덕한 습관에서 온 모든 결함이 너를 위한 나의 사랑스런 섭리의 한부분이라는 것과, 그 결함을 지닌 너의 지금 모습 그대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단다.
그러므로 너는 내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18. 율법은 여전히 그 나름대로 필요성이 있습니다.
19. 율법의 행위가 그리스도의 의에 이르는 단초는 되지 못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율법의 행위속에서 우리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선물을 구하게 하는 상한 심령으로, 심령의 가난함으로 인도합니다.
21. 그래서 율법은 율법 나름의 역할을 잘 하고 있습니다.
22. 우리안에 있는 성령의 은혜와 율법의 행위의 전쟁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23. 물론 성령의 은혜가 승리하겠지만 말이지요.
24.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에 이르렀다는 말씀을 통해서, 모든 민족으로 구원의 선물을 받는 것이 결코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뿐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5.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은혜와 감사를 줍니다.
26. 성령이 여전히 내 안에 나의 잘남이나 못남이나 능력이나 무능력이나 나의 상태를 떠나서 여전히 계시다는 것입니다.
27. 왜냐하면 믿음이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28. 오로지 나는 하나님을 찾아 나서기 때문입니다.
29. 오늘도 그 은혜, 성령의 내주하심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0.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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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 신앙이 오래되다면 보면 잊어버리거나 익숙해지면서 초심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게 되는데, 초기의 은혜는 바로 믿음으로 성령의 은혜이다. 신앙이 오래되다면, 그리고 교회의 일들이 익숙해지다면 자신의 경험이나 능력을 의지하게 되는데, 이 때 늘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은혜이다.
6-12절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
6절 아브라함의 의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으매"
7절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8절 이방인 -=>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미리 성경이 미리 알고
아브라함에 전함 복음이란?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 복이란 복음을 통해서 온다. 따라서 복은 구원이다.
9절 "믿음으로 말마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절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 -=> 저주 아래 있다.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절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롬3:9-18)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우리는 항상 죄가운에 있다.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율법아래 있으면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러나 죄아래 있기 때문에 은혜안에 있다.
박총님 facebook에서...
"너는 네 과거의 죄와 부도덕한 습관에서 온 모든 결함이 너를 위한 나의 사랑스런 섭리의 한부분이라는 것과, 그 결함을 지닌 너의 지금 모습 그대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단다.
그러므로 너는 내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12절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다.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음으로 오는 우리의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셨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 아래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 이 말씀의 저주가 신명기 28:15-69에 나오는 저주(질병, 가난, 줏음을 포함하는)와 동일하다고 확신하는 번영복음주의 자들이 있다.
여기서 바울의 관점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이다.
1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참고
갈 3: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 열방에 빛을, 마이클 고힌 pp79-84.
1.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힘은 어디서 오나요?
2. 밥심! 지심(지식)! 권심(권력)! ㅋㅋㅋㅋ 뭐 대충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갈 힘은 어디서 오는가?
3. 성령의 역사하심은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을 넘어 삶의 전영역에서 역사하십니다.
4. 우리가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생각할 때 믿음으로만 제한시키면 우리의 삶이 율법에 매일 수 있습니다.
5. 5절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6. 신앙이 오래되다면 보면 잊어버리거나 익숙해지면서 초심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게 되는데, 초기의 은혜는 바로 믿음으로 성령의 은혜이다. 신앙이 오래되다면, 그리고 교회의 일들이 익숙해지다면 자신의 경험이나 능력을 의지하게 되는데, 이 때 늘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은혜이다.
7. 성령의 역사하심은 삶의 전영역에 미칩니다.
8. 우리가운데 성령을 주시고, 믿음으로 능력을 행하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입니다.
9. 우리의 그 어떠한 행위에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10. 믿음에 관한 성령이 주시는 선물은 아브라함의 의가 어디서 온 것인가에 대한 예를 통해 확증하고 있습니다.
11. 아브라함의 의는 믿음에서 왔습니다.
12. 결코 아브라함의 행위로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의 근원이 된다는, 즉 8절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14. 9절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5. 오직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습니다.
16. 그렇다면, 죄와 은혜를 논 할 때, 성령은 어떻게 죄 속에서 역사하는가?
17. 박총님 facebook에서...
"너는 네 과거의 죄와 부도덕한 습관에서 온 모든 결함이 너를 위한 나의 사랑스런 섭리의 한부분이라는 것과, 그 결함을 지닌 너의 지금 모습 그대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단다.
그러므로 너는 내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판단하는 습관을 극복해야 한단다.…
네가 나의 마음에 드는 길, 즉 내가 너를 사랑하기 원하는 길은, 너의 모든 결점과 결함을 지닌 채 지금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란다.
만약 내가 원한다면 순식간에 그 단점과 결점을 없애버릴 수 있단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내가 너를 사랑하기 원하는 방식으로 즉, 너의 지금 그대로의 모습대로 사랑할 수 없게 된단다."
_Julian of Norwich, Revelations of Divine Love.
네가 나의 마음에 드는 길, 즉 내가 너를 사랑하기 원하는 길은, 너의 모든 결점과 결함을 지닌 채 지금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란다.
만약 내가 원한다면 순식간에 그 단점과 결점을 없애버릴 수 있단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내가 너를 사랑하기 원하는 방식으로 즉, 너의 지금 그대로의 모습대로 사랑할 수 없게 된단다."
_Julian of Norwich, Revelations of Divine Love.
18. 율법은 여전히 그 나름대로 필요성이 있습니다.
19. 율법의 행위가 그리스도의 의에 이르는 단초는 되지 못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율법의 행위속에서 우리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선물을 구하게 하는 상한 심령으로, 심령의 가난함으로 인도합니다.
21. 그래서 율법은 율법 나름의 역할을 잘 하고 있습니다.
22. 우리안에 있는 성령의 은혜와 율법의 행위의 전쟁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23. 물론 성령의 은혜가 승리하겠지만 말이지요.
24.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에 이르렀다는 말씀을 통해서, 모든 민족으로 구원의 선물을 받는 것이 결코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뿐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5.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은혜와 감사를 줍니다.
26. 성령이 여전히 내 안에 나의 잘남이나 못남이나 능력이나 무능력이나 나의 상태를 떠나서 여전히 계시다는 것입니다.
27. 왜냐하면 믿음이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28. 오로지 나는 하나님을 찾아 나서기 때문입니다.
29. 오늘도 그 은혜, 성령의 내주하심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0. 할렐루야. 아멘.
==
5절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 신앙이 오래되다면 보면 잊어버리거나 익숙해지면서 초심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게 되는데, 초기의 은혜는 바로 믿음으로 성령의 은혜이다. 신앙이 오래되다면, 그리고 교회의 일들이 익숙해지다면 자신의 경험이나 능력을 의지하게 되는데, 이 때 늘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은혜이다.
6-12절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
6절 아브라함의 의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으매"
7절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8절 이방인 -=>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미리 성경이 미리 알고
아브라함에 전함 복음이란?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 복이란 복음을 통해서 온다. 따라서 복은 구원이다.
9절 "믿음으로 말마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절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 -=> 저주 아래 있다.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절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롬3:9-18)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우리는 항상 죄가운에 있다.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율법아래 있으면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러나 죄아래 있기 때문에 은혜안에 있다.
박총님 facebook에서...
"너는 네 과거의 죄와 부도덕한 습관에서 온 모든 결함이 너를 위한 나의 사랑스런 섭리의 한부분이라는 것과, 그 결함을 지닌 너의 지금 모습 그대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단다.
그러므로 너는 내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판단하는 습관을 극복해야 한단다.…
네가 나의 마음에 드는 길, 즉 내가 너를 사랑하기 원하는 길은, 너의 모든 결점과 결함을 지닌 채 지금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란다.
만약 내가 원한다면 순식간에 그 단점과 결점을 없애버릴 수 있단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내가 너를 사랑하기 원하는 방식으로 즉, 너의 지금 그대로의 모습대로 사랑할 수 없게 된단다."
_Julian of Norwich, Revelations of Divine Love.
네가 나의 마음에 드는 길, 즉 내가 너를 사랑하기 원하는 길은, 너의 모든 결점과 결함을 지닌 채 지금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란다.
만약 내가 원한다면 순식간에 그 단점과 결점을 없애버릴 수 있단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내가 너를 사랑하기 원하는 방식으로 즉, 너의 지금 그대로의 모습대로 사랑할 수 없게 된단다."
_Julian of Norwich, Revelations of Divine Love.
12절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다.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음으로 오는 우리의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셨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 아래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 이 말씀의 저주가 신명기 28:15-69에 나오는 저주(질병, 가난, 줏음을 포함하는)와 동일하다고 확신하는 번영복음주의 자들이 있다.
여기서 바울의 관점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이다.
1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참고
갈 3: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 열방에 빛을, 마이클 고힌 pp79-84.
Wednesday, September 19, 2012
한 날 묵상 - 겔 37:1-10 <마른뼈가 살아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아시나이다". 생기를 주시고, 대언하게 하시옵소서>
지금도 수면을 위를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영(창1;2)을 보기 원합니다.
지금도 혼탁하고 무질서한 세상속에서 질서를 잡아가시고자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영의 동반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도 말씀은 살아있고, 성령님은 역사하십니다.
1. 믿음으로만 안됩니다.
2. 하나님의 영이 필요합니다.
3. 하나님의 영으로만 안됩니다.
4. 순전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5. 정말 기적을 원하신다면, 생기와 대언이 필요합니다.
6.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십시오. 지금도 성령님을 역사하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나를 통해 역사하시며, 너를 통해 역사하시며, 우리 공동체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7. 마음을 여십시오. 성령님을 인정하십시오.
8.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있습니다.
9. 또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10. 뼈들이 살아나 군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11. 가능하다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에스겔 37장은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 큰 군대가 되는 모습은 눈으로 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12. 지금도 놀라운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13. 나를 통해서, 너를 통해서, 우리 공동체를 통해서 계속됩니다.
14.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우리에겐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15. 내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말씀과 성령님을 채우기 원합니다.
16.
===
1절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라고 가서"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절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절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절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절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절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7절 "내가 명령에 따라 대언하니"
8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절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10절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지금도 혼탁하고 무질서한 세상속에서 질서를 잡아가시고자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영의 동반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도 말씀은 살아있고, 성령님은 역사하십니다.
1. 믿음으로만 안됩니다.
2. 하나님의 영이 필요합니다.
3. 하나님의 영으로만 안됩니다.
4. 순전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5. 정말 기적을 원하신다면, 생기와 대언이 필요합니다.
6.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십시오. 지금도 성령님을 역사하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나를 통해 역사하시며, 너를 통해 역사하시며, 우리 공동체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7. 마음을 여십시오. 성령님을 인정하십시오.
8.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있습니다.
9. 또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10. 뼈들이 살아나 군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11. 가능하다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에스겔 37장은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 큰 군대가 되는 모습은 눈으로 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12. 지금도 놀라운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13. 나를 통해서, 너를 통해서, 우리 공동체를 통해서 계속됩니다.
14.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우리에겐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15. 내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말씀과 성령님을 채우기 원합니다.
16.
===
1절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라고 가서"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절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절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절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절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절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7절 "내가 명령에 따라 대언하니"
8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절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10절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Friday, December 9, 2011
성령의 역사 분별방법(조나단 에드워즈)
천국 체험이나 신체의 힘이 빠지는 현상, 타당한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
우리는 인간의 신체에 나타나는 어떤 영향들, 즉 눈물, 전율, 신음, 큰 소리를 지름, 육체적 고뇌, 혹은 신체적 힘이 빠지는 것 등에 의해서 그 역사가 참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영향력이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닌지를 신체에 나타난 그러한 영향들을 보고서 이렇다 혹은 저렇다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그런 규칙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의 신체에 그러한 영향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참된 성령의 영향력 속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참된 성령의 표지의 하나로 주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그와 같은 어떤 외적인 모습들을 보고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영향력 아래 있지 않다고 결론지을 아무런 근거 또한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명시적으로든 혹은 간접적으로든 신체에 나타나는 그런 영향들을 배척하는 영 분별 규칙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성(reason)도 그런 것들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신적이고 영원한 것들의 본성을 고려해 볼 때, 그리고 사람의 본성을 고려해 볼 때, 그리고 영과 몸 사이의 연합의 법칙들을 고려해 볼 때, 올바른 영향력, 즉 사실에 대한 참되고 타당한 깨달음이 신체에 그러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쉽게 설명됩니다.
진리에 대한 체험이 특이한 신체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탁월하심과 죽으심으로 보여 주신 그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참된 깨달음, 그리고 참된 영적인 사랑과 기쁨의 역사가 육체적 힘을 그렇게 많이 빼앗는다는 것도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우리 모두는 기꺼이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그리고 그를 향한 사랑과 그 안에서의 기쁨을 누리는 데 있어서, 우리들의 현재의 체질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아주 작은 부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런 영광과 사랑과 기쁨이 그들이 누릴 주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때때로 성도들의 신체적인 힘을 약화시키면서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하신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성경과 이성은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 생기는 신체의 특이한 현상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약 성경에 성령께서 비범하게 부어질 때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는 이유로 그러한 특이한 현상들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만일 다음과 같은 것이 인정된다면, 즉 만일 이성이나 성경의 어떤 규칙이 그러한 종류의 특이한 현상들, 특히 앞선 예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들을 배척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나는 그 반대의 주장이 아무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의 공포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깨달음으로 울거나, 신음하거나, 탄식한 것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신약 성경 안에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언급이 없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면 그 각성이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만큼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인간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통해서, 그리고 영원한 것들의 본질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는 역사의 본질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이런 신체적 효과들이 쉽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외적이고 부수적인 효과들에 대한 어떤 개별적인 언급이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내적인 움직임에 의해 나타나는 모든 외적이고, 부수적인 나타남을 성경이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러한 상황들이 구체적으로 거룩한 역사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기록들을 보면 그러한 일들이 그 시대에 반드시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즉, 초대교회 때에 성령의 커다란 부으심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의 신체에 비상한 영향들이 나타나는 일이 전적으로 없지는 않았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도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간수는 그러한 양상을 나타내 보인 한 사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극도의 고민과 경악으로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나아와 엎드렸습니다. 그 때 그가 엎드린 것은 바울과 실라에게 간청하거나 겸손하게 말을 걸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취한 자세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 당시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대신 그는 먼저 그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 16:29~30). 그의 엎드러짐은 그의 전율과 동일한 원인으로부터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시편 32편 3절에서 4절을 보면, 시편 기자가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 아래서 크게 부르짖고 그의 몸이 크게 쇠약해진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최소한 우리는 이것을 근거로, 어떤 경우에 죄의 각성이 그러한 외적인 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위의 표현 속에서 그 어떤 과장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시편 기자는 과장법으로 불합리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과장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말한 마음의 활동은 어떠한 정서적인 성향도 가지지 못한 것이 될 것입니다.
사랑에 압도되어 신체의 힘이 다 빠져버리는 경우
아가서를 보면, 신부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압도되어 그녀의 몸이 약해졌으며, 힘이 다 빠지게 되었다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되풀이하며 말합니다. "너희는 건포도로 나를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아 2: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아 5:8).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압도되어 힘이 다 빠지는 현상은 어떤 경우에도 성도들 가운데서도 동일한 이유로 당연히 일어날 수 있으며, 때때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열광주의자들이 가지는 인상들(impressions)은 보통 신체에 커다란 영향을 가져오는 경향이 있다는 이유로 신체에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들을 반대합니다. 이것은 설득력이 약한 반박입니다. 퀘이커 교도들이 언제나 떨기를 잘한다고 해서, 후에 바울이 사울이나 간수가 떤 것이 참된 양심의 각성으로 인해 떤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실로 크든 작든 신체에 미치는 효과들을 반대하는 그러한 모든 반박들은 너무나 경박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반박하는 사람들은 어두움 속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반박하는 사람들은 어떤 토대 위에서 자신들이 가고 있는지, 어떤 규칙에 의해서 자신들이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사물의 뿌리와 원인,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작용들과 정서들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의 규칙에 의해서 조사되고 시험되어야지 혈육의 움직임에 의해 판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생각과 감정이 클수록 상상력도 커진다
성령의 영향력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상상(imaginations)에 커다란 인상들을 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는 작용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상상에 많은 인상들을 가진다고 해서 그들이 그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온갖 종류의 체질을 가진 아주 많은 대중들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열렬한 생각과 강렬한 정서로 몰두할 때는, 사람들 사이에 상상력에 인상을 가지는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만일 그런 것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어느 정도의 상상력이 없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 정신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가 묵상하는 가운데 수반되는 상상적인 생각 없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혹은 다른 세계의 것들에 그의 사고를 고정시킬 수 있는지 나는 감히 묻고 싶습니다.
마음이 몰두하면 할수록 묵상과 정서는 더욱 강렬해지고, 상상의 관념은 일반적으로 더욱 생생하고 강력해집니다. 특별히 마음의 묵상과 정서가 놀라운 어떤 것에 집중할 때에 그렇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보는 것이 아주 새로운 어떤 것이거나, 그 보는 것이 두려움이나 기쁨 같은 격정을 줄 때 그렇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상태와 견해의 변화가 반대 극단으로 갑자기 일어났을 때, 예를 들어 극도로 두려워하던 것에서 극도로 황홀하고 기쁨에 넘치는 상태로 변하는 경우에 그렇습니다.
상상적인 것과 지적이고 영적인 것 사이를 잘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상상적인 부분에 너무 큰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설명함에 있어서 상상적인 부분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앞섭니다. 특별히 이해력이 모자라고 식별의 능력이 적은 사람들 중에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천국을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가?
상상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기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상력이라는 능력을 주셨고, 또한 이러한 기능을 어느 정도 사용하지 않고는 영적이거나 비가시적인 것을 생각할 수 없도록 우리들을 만드셨기 때문에 이러한 능력을 적당하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참으로 마음의 다른 기능들을 보조하게 됩니다. 그러나 종종 상상력이 너무 강하고 다른 기능들은 약해져서, 상상력이 다른 기능들을 제압하고 다른 기능들이 활동하는 것을 크게 방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상력의 기능을 참으로 신적인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셨다는 분명한 예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비교적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경우를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처지에까지 자신을 낮추셔서 그들을 어린 아이들같이 다루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거에 그의 교회가 무지와 미성년의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형들(types)과 외적인 나타남으로 그들을 지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그러한 추정이 불합리하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영혼들을 많이 다룬 사람들에게, 그들의 경험에 비추어 이것이 사실인지 판단하도록 해 보십시오.
성령의 역사의 영향력 속에 있는 몇몇 사람들이 그들의 특이한 체질로 인해 일종의 황홀경에 빠진다고 해서, 그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이 행한 역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황홀경 중에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그들의 마음이 일련의 강렬하고 유쾌한 상상으로 들어가고, 심지어 친국에까지 말려 올라가서 거기서 영광스러운 광경들을 보는 것처럼 되어도 말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러한 몇몇 경우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일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악마의 도움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경험들이 선지자들의 환상이나 성 바울이 천국으로 이끌려 간 경험(고후 12:1~4)과 같은 성질을 지녔다고 추정할 필요도 느끼지 않습니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어떤 사람이 경험하게 되는 마음의 이러한 열렬하고 강렬한 작용 아래에서의 인간의 본성뿐입니다. 신적인 것들의 영광스럽고 놀라운 위대함과 탁월함에 대한 참된 깨달음 및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혼을 황홀케 하는 안목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그들의 본성의 힘이 압도되는 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그와 같이 감동을 받고 압도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한 체질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의 상상력이 그처럼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 효과 즉, 황홀경에 빠지는 일은 그들의 마음이 강하게 작용할 때 나타나는 다른 효과들에 비례하는 것이며, 그것들과 유사한 사건일 뿐입니다. 사람의 사고가 집중되고, 정서가 강해지며, 전 영혼이 몰두하고 황홀케 되며 삼켜질 때는, 신체의 다른 모든 부분들이 영향을 받아서 그 힘을 다 빼앗겨 버리고, 모든 체질이 녹아 내리기 쉽게 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경우에 특별히 어떤 체질에 있어서 마음의 격렬한 묵상이나 활동과 가장 밀접하게 결부되어서 가장 특별한 영향을 받는 신체의 한 부분인 뇌가 특별히 압도되고 감동을 받아, 그 힘과 정신이 잠시 동안 다른 곳으로 떠나면서 외부 감각 기관들의 인상에 분리되고, 일련의 즐겁고 기쁨을 주는 상상 속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그 순간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일들을 잘못 해석하여 그것들이 마치 선지자들의 환상인 것처럼 지나치게 그것들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보거나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신적인 계시로 간주하며 때로는 앞으로 일어날 것에 대한, 하늘로부터 온 통지라고 간주합니다. 실제로 내가 알고 있는 몇몇 경우에, 그 결과는 다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비록 간접적으로 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그들이 처해 있는 특이한 마음의 상태, 그리고 그들이 경험하게 되는 신적인 것들에 대한 강렬하고 생생한 감각이 분명히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마음이 거룩한 상태로 계속되고, 영적인 것들의 탁월함에 대한 신적인 감각을 계속 유지하게 되고, 심지어 거기에 도취되는 경험도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그 경험에 수반되는 상상력이 단지 우발적이고, 그 상상 속에 혼돈되고, 부적당하고, 거짓된 어떤 것들이 일반적으로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거룩한 상태와 감각은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것 같습니다. 상상력을 통한 생생한 감각을 무조건 신적 계시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성령은 상상력을 통해 진리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주기도 하십니다.
부흥과 개혁의 때일수록 모조품을 경계하라
소위 성령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몇몇 사람들이 심각한 실수들을 범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였다고 해서, 그 사역 전체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몇몇 가짜들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참되지 않다는 논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모조품들이 생기는 것은 개혁의 시기에 항상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들여다보면, 커다란 종교의 부흥 치고 많은 모조품들이 등장하지 않은 경우는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시대를 보면 이러한 종류, 즉 지독한 이단과 비열한 행동에 빠진 사람들의 사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당시에 있었던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성도들로부터 뛰쳐 나갈 때까지, 참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형제들로, 성도들의 한 부분으로 잠시 동안 받아들여졌으며, 그들과 다르다고 의심받지 않았습니다(요일 2:19).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교사들과 직분자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주신 몇몇 사람들 가운데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6장의 시작 부분에 나옵니다. 유다가 이러한 예입니다.
유다는 열두 사도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치욕스러운 행동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발각되거나 의심받는 일이 없이 참된 경험을 한 제자들과 한 무리가 되어 오랫동안 계속 연합하였으며, 친밀하게 대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부터도 모든 외적인 일들에 있어서 참된 제자인 것처럼 대우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그에게 사도의 지위를 수여해 주셨으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하셨고,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들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알고 계셨지만, 그 당시에는 전지(全知)하신 심판자와 마음의 감찰자로서의 신분으로 옷 입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시적 교회의 수종자로서의 직임을 수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아버지의 수종자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자신의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그를 배척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가시적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과 다스리는 자들에게 하나의 모범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즉 그들이 교회를 운영할 때에는 마음의 감찰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말고, 보이는 것과 공개된 것을 통하여 하도록 말입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중에도 배교자가 생길 수 있다
한동안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되었던 몇몇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특출하게 충만하다고 여겨졌던 몇몇 사람들 중에 그러한 배교자들이 있었던 예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던 니골라가 그 한 예입니다.
그는 성령의 비상한 부으심이 있던 그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로 많은 그리스도인의 무리 중에서 집사의 직분에 선출되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 3절부터 5절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배반하여 야비한 행동을 하는 일단의 비열한 이단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부터 니골라당이라는 파당의 이름이 나왔습니다(계 2:6, 15).
종교개혁 시대에도 배반자가 있었습니다. 교황 정치 때부터 종교개혁의 때까지, 잠시 동안 종교개혁자들과 연합한 것처럼 보였다가 배반하여 가장 야비하고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르고 혐오스러운 행동을 한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부흥 시대에도 배반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위대한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종교가 부흥할 때에, 한동안 거기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떨어져 나가서, 기괴하고 엉뚱한 잘못들과 심한 열광주의에 빠져, 높은 영성과 완전함을 이루었다고 자랑하며, 다른 이들을 육적이라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사도 시대에 영지주의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여러 재세례파 분파들이 그러했습니다. 이것은 안토니 버제스(Anthony Burgess)가 <영적인 강화>(Spiritual Refining) 제1부, 설교 23쪽과 132쪽에서 진술한 것과 같습니다.
“최초의 훌륭한 종교 개혁가들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도구들은 여기서 쓰라린 갈등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형식주의자들과 전통적인 교황주의자들에게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 편으로는 종교개혁자들보다 더욱 계몽되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렸다. 그들은 성경을 고수하며 성경을 근거로 계시들을 검증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문자주의자’(Literists and Vowelists)로 불렀다. 성경의 단어들과 모음들에는 정통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을 가지지 못한 자들로 보았다.
어떤 도시에서든 복음의 참된 교리들이 교황제도를 막 본격적으로 바꾸어 놓으려고 하면, 곧장 그러한 견해들이 일어났다. 마치 좋은 곡식 가운데 가라지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커다란 분열이 일어났고, 종교개혁은 세상 사람들에게 혐오스럽고 증오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벌레들과 뱀들에게 열기와 온기를 주어서 땅 속에서 기어 나오게 한 것과 같았다. 그들은 루터를 매도하였고, 루터가 단지 육적인 복음만 보급시켰다고 말하였다.”
그러한 거친 열광주의자들의 몇몇 지도자들은 잠시 동안 최초의 종교개혁가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고, 특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청교도 시대에도 배반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찰스 1세 때와 공위(空位) 기간에 올리버 크롬웰 때 생명 있는 종교가 매우 우세하였는데, 그 때 그러한 일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뉴잉글랜드 초기 가장 순수했던 시기에, 경건이 넘쳤을 때, 그와 같은 일들이 발발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그러한 가라지를 뿌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참된 역사가 영광스럽게 수행되고 있지 않다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마귀가 하려고도, 할 수도 없는 성령 역사의 안전한 표지들
마귀가 설사 할 수 있다 할지라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어떤 일들이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양심을 깨우고, 죄로 말미암은 그들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게 하고, 그들에게 구주가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구주 되심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갖거나, 예수님을 더욱 높이 평가하고 더욱 존경하게 만들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성경의 필요성과 유용성, 그리고 진실성에 대한 생각을 가지거나, 성경에 귀를 기울이거나, 성경을 많이 사용하게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영혼의 문제에 관련된 일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진상(眞相)을 보여 주는 일을 착수하고자 하지 않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미혹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들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며, 그들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도록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하려고 해도 할 수 없고, 하려고도 하지 않는 다른 일들이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신적인 사랑의 영이나 그리스도인의 겸손의 영, 그리고 가난한 마음을 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그가 주려고 한다 하더라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마귀는 그 스스로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의 본성과 가장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에 비상한 영향력과 역사가 일어날 때, 그 곳에서 이러한 것들이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안전하게 결정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부수된 어떠한 다른 사정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을 촉진시키기 위해 다른 어떤 방편이나 수단들이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의 '판단이 큰 바다와 같으신'(시 36:6)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어떤 수단을 사용하여 그것을 수행하셨든지, 그리고 동물적인 마음 속에 어떠한 동요가 일어났든지, 사람들의 신체에 어떠한 효과가 나타났든지 간에 말입니다. 사도가 우리들에게 준 표지들은 홀로 서며, 스스로를 지지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한 표지들이 어디서 나타나든지 그것들은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셨음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이 표지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이상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리고 변칙적인 일이 보인다고 해서, 그리고 몇몇 고백자들의 행동에 실수가 있고 미혹된 일들과 불명예스러운 일들이 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제기하는 수천의 사소한 반대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지난 몇 달 동안에 나는 최근 이 지방에서 일어난 그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많은 사람들의 큰 시험거리가 된 특이한 현상들을 충분히 보고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크게 부르짖는다든지, 비명을 지르고, 커다란 신체적 고통을 느낀다든지, 몸의 힘이 빠진다든지 등과 같은 것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 다른 마을들에서 매우 많은 수의 그러한 사람들과 아주 개별적으로 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특이한 영향을 받고 있을 때나, 아니면 후에 때때로 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달 동안 그러한 역사의 방식과 결과를 보았고, 그 열매들을 보았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내가 오랫동안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전과 그 후에 영적인 관심을 가지고 내가 친밀하게 교제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경우에 있어서 내가 다음과 같이 증거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이 기꺼이 마음을 열고 대해 준 목격자의 관찰을 통해 그 역사의 본질과 성향을 판단해 본다면, 또한 부지런히 특별한 조사를 한 것으로 판단하면, 이 역사는 앞에서 말한 모든 표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많은 사례들에 있어서 그렇고, 모든 항목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특별히 그러한 비범한 역사의 직접적 영향 속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모든 표지들이 매우 크게 나타났습니다.
현재 신중해야 한다고만 주장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걸림돌만 보게 될 것
그리스도께서 현재 이 땅에 이토록 놀랍고도 은혜롭게 나타나고 계신데도, 신중함이라는 원리 위에서 행한다는 구실로, 그리고 이 역사의 결과가 어떠한지, 그리고 이 역사의 영향 속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열매들을 맺는지를 보기 위해 기다린다는 구실로 스스로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그리스도를 인정하기를 오랫동안 망설이는 정당한 구실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와 같이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이 무엇을 기다리는지를 잘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보기에 장애요소가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자 기다린다면, 그것은 마치 바보들이 강가에서 물이 모두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장애물이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면 안 됩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나……"(마 18:7).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실 때는 항상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the Word)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works) 도 그러합니다. 육적이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상하게 보이고, 모순으로 보이고, 어렵게 보이는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은 항상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었으며, 앞으로도 항상 그러할 것입니다. 많은 이에게 덫과 올가미일 것입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의 교회의 신앙의 영광스러운 부흥에 대해 말하는 그의 예언의 마지막 장에서,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을 것이며, 그는 백합화같이 자랄 것이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고, 그의 가지는 퍼질 것이며……” 등을 말하다가 마지막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습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서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서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호 14:9).
아마도 이 역사에 수반되는 장애물들은 어떤 점에 있어서는 증가할 것이며 감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신앙 고백자들 가운데서 배교의 사례들과 큰 불법의 사례들을 아마도 더욱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한 종류의 장애물들이 제거되면, 다른 장애물들과 부딪치게 될 것이 예상됩니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마치 그리스도의 비유와 같습니다(즉 그 역사의 진정성을 받아들이는 데 어느 정도의 어려움을 하나님이 일부러 만드셨다는 뜻이다. 역자 주).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에 어떤 어려움을 주는 것은 사람들의 성향과 영적인 감각을 시험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마련하신 것입니다. 부패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믿지 아니하고, 성미가 비꼬이고, 트집잡기를 좋아하는 영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보기는 보나 깨닫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마련된 것입니다(참조 마 13:13).
이 역사의 결과를 보고자 기다리는 사람들은 조금만 더 지나면 더욱 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기적을 보았으나, 그가 메시아이신 더 나은 증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다림은 허사였습니다. 그들의 장애물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그들은 그 끝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불신앙은 더욱 굳어져 갔습니다. 성경에서 말씀된 영광스러운 개혁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을 위해 기도하는 그들은 사실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도래를 위해 기도한 것과 같습니다. 만일 실제로 개혁이 온다면,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도 영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함부로 비난하기 전에 먼저 신중하게 조사해보라
지금의 부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역사를 인정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면서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가졌던 위장된 신중함은, 결국에는 이 점에 있어서 아마도 가장 신중치 못했던 것으로 판명이 날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서 그들은 그토록 위대한 축복에 조금이라도 참여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뉴잉글랜드에 그토록 풍성히 주셨던 신적인 빛과 은혜와 위로, 그리고 하늘에 속한 영원한 은택들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한 기회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샘이 그토록 놀라운 방식으로 열려서, 많은 이들이 그 곳으로 몰려가서 영혼의 필요를 충분히 공급받는 동안에, 그들은 멀리 서서 의심하고 의아해하며, 아무것도 받지 아니하고, 귀한 때가 다 지나갈 때까지 그와 같이 계속 있을 것 같습니다.
그토록 비범한 외적인 나타남이 수반된 그 역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일들이 나타난 곳으로 가서 자세하게 관찰하고 부지런하게 조사해 보는 등의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의심만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단지 두세 사례를 관찰한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관찰하여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는 안심하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정말 이상합니다. 만일 그러한 과정을 거친다면 분명히 큰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의 불확실한 보고들을 듣고, 이러한 일들에 대해 무시하는 말을 무모하게 한 사람들은 얼마나 큰 실수를 했겠습니까? 한 믿지 않는 유대인 가말리엘의 경고가 그들에게 보다 나은 신중함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 38절, 39절을 봅시다.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지금까지 내가 이 설교를 통해 말한 것이 현재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라는 확신을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히 주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이 후로는 그들이 적어도 방금 언급한 가말리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일 것을 나는 희망합니다. 이후로는 그 역사에 반대하지 않기를, 그 역사를 대적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기를, 간접적으로라도 그 역사를 불신하게 만드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기를 나는 희망합니다. 그들이 성령을 방해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영혼에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한 죄는 성령에 대해 짓는 죄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은혜롭게 역사하고 있는 성령을 대적해서 말하는 것보다,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를 대적해서 말하는 편이 차라리 낫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우리의 영혼이 성령의 은택을 받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령 훼방죄에 해당하는 경우
만일 아직도 이러한 일들에 대해 경멸적으로 계속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을 훼방 놓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는 것이니 주의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령께서 평소와 같지 않게 많이 부어지고, 사람들의 세속적 욕망과 미적지근함과 위선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책망되었을 때가 성령훼방죄가 나타나기 가장 쉬운 때입니다.
만일 지금과 같은 성령의 역사가 계속 진행된다면, 이 역사에 적의를 가지고 비난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마 몇몇 사람이 이러한 죄를 범하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아직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악의를 가지고 이러한 역사를 대적하고 책망하며, 그 역사를 마귀의 역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기 위해서는 다음 한 가지 요소만 더 갖추면 될 것입니다. 즉 그것은 내적인 양심의 찔림과 상반되게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비록 몇몇 사람들은 매우 신중해서 공개적으로 지금의 성령의 역사를 대적하거나 책망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아가셔서 그의 원수들을 대적하여 이토록 영광스럽게 역사하시는 오늘날 침묵하거나 활동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 특히 목사들은 사사기 52장 23절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그들에게 내린 저주를 받을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크신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고, 이 땅에서 이토록 놀라운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으므로, 우리 모두가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와 사정에 따라 그 역사를 통하여 크게 감화를 받고,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호의를 귀하게 여기는 것 외에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 역사를 통하여 보다 더 행복해지지 않는 사람은 훨씬 더 죄가 많아질 것이며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사람들에게는 받으실 만한 해(year)요 대단한 은혜와 은총의 때로 판명된 시기가 다른 이들에게는 복수의 날로 판명됩니다(사 61:2).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보내시면, 그 말씀은 하나님께로 헛되이 되돌아오지 않습니다(사 55:11). 그의 성령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에 계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경시하고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일이 그들과 관계없는 일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 중에 계셨음을 느끼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을 위로로 느끼지 않은 사람들은 대단한 슬픔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로지 선지자 에스겔만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셨을 때,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겔 2:5). 에스겔이 이 정도인데,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토록 놀랍게 나타나신 지금, 위대하신 여호와께서 뉴잉글랜드에 계셨음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실 것이라고 어느 누구보다 우리가 추측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흥을 반대할 빌미를 제공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들
이제 나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그 역사를 촉진시키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그들에게 나는 모든 실수와 비행을 피하기 위해 부지런히 주의하라고 간절히 권면하고자 합니다. 그 역사를 어둡게 하거나 빛을 잃게 만들 수 있는 일이나, 그 역사를 비난하려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에게 원인을 제공할 만한 일은 무엇이든지 피하기 위해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기' 위해 조심하였습니다(고후 11:12). 바로 그 사도는 디도를 권면합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엄격하게 살피고 주의하여 설교에 있어서나 행동에 있어서 '책망할 것이 없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우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마 10:16).
오늘날 우리들이 흠 없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성령의 역사의 대원수인 마귀가 자기 힘을 다해 특별히 우리를 시험하고자 할 것을 우리는 예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마귀가 특별히 우리들 중 누구를 어떤 일에 있어서든 맹목적이 되게 한다거나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면, 승리의 개가를 울릴 것입니다.
마귀는 부흥과 관계없는 사람 백 명을 넘어뜨리는 것보다 부흥에 관계된 사람 한 명을 넘어뜨리는 것이 그의 목적과 이익에 더 기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작은 어린이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포효하는 사자는 우리들에 비해 너무도 강합니다(벧전 5:8). 그리고 이 옛 뱀은 우리들에 비해 너무나 교활합니다(창 3:1).
영적으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겸손과 자기 부인,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우리들의 최선의 방어책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영적인 자만을 가장 엄히 경계해야 하며, 특이한 체험과 안위의 경험, 그리고 우리들 중 누군가가 받았을 수 있는 하늘의 높은 은혜들로 인해 자고해지는 것을 가장 엄격히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것 때문에 스스로를 높이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가 가장 탁월한 성도들 중에 포함되며 하늘의 특별한 총애를 받은 자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주님의 비밀이 특별히 우리와 함께 한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우리가 이 악한 세대에서 모든 사람들 위에 위대한 교사요 감찰자로 쓰임 받기에 합당하다는 생각 등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 교만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우리가 받은 그러한 은혜들을 대할 때에 특별한 태도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엄격하고 방심하지 않는 눈으로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혜와 분별력에 대해 크게 자만하여 우리 자신들이 선지자이거나 하늘의 특별한 대사들이나 된 것처럼 행동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위대하게 드러내 주실 때, 자기 눈 안에서만 눈부시면 안 됩니다. 모세는 산에서 하나님과 대화하였을 때, 그의 얼굴이 빛나서 아론과 백성들의 눈을 부시게 하였지만, 그 스스로는 눈부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출 34:29).
아무도 스스로 이러한 영적인 자만의 위험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최고의 마음 상태에 있을 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아마도 지금까지 살았던 성도들 중 가장 탁월한 성도라고 할 수 있지만)도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고 보셨습니다. 셋째 하늘에서 그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바로 그 때에도 그랬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을 보십시오.
자만은 마음 속에 있는 가장 악한 독사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들어온 첫 번째 죄입니다. 죄악이라는 전체 건물의 기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맨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일하는 방식이 가장 비밀스럽고, 속이기 쉬우며, 탐지하기 힘든 것입니다. 어떠한 욕망보다도 그러합니다. 그것은 쉽게 모든 것과 뒤섞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하나님께 더 미움을 받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복음의 정신에 반대되는 것도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없습니다. 그것만큼 마귀가 성도의 마음에 들어가도록 허용하고, 그래서 마귀의 미혹에 노출되도록 만드는 죄는 없습니다.
나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심지어 탁월한 성도들 가운데서도 그러한 일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탁월한 체험이나 하나님과의 특이한 교통을 한 이후에 즉시 마귀는 이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들을 미혹하였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의 눈을 여시고 그들을 구출해 내시기까지 그들은 그 길에서 헤매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야 자만심이 그들을 잘못되게 하였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적 충동과 직통 계시에 집착하지 말 것
많은 친부흥주의자들이 내적 충동을 직통 계시로 오해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지지하는 참된 동조자들 중 몇몇은 그들 마음의 충동과 강한 인상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그것들이 장차 일어날 어떤 일에 대한 하늘로부터 온 직접적인 통지인 것처럼, 혹은 그들이 해야 할 어떤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이나 뜻을 알리는 직접적인 통지인 것처럼 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 안에 어디에도 지시되어 있지 않고, 계시되지 않은 내용이었습니다. 오직 그들의 충동적인 생각 외에는 근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인상들은, 만일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라 하더라도, 성도들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구원하시는 은혜로운 영향력과는 상당히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그러한 충동들과 인상들은 본질상 성령의 특이한 은사에 속합니다. 옛날에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가졌던 바로 그런 영감입니다.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성령의 은혜와 그것들을 구별합니다.
성령의 은혜와 은사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몇몇 사람들이 그러한 충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가지 이유는 다가올 교회의 복된 시대의 영광은 부분적으로는 성령의 특이한 은사들이 회복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견해는 성령의 두 종류의 영향력, 즉 평상적이고 은혜로운 영향력과, 영감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주시는 특이한 영향력의 본질과 가치를 제대로 고려하거나 비교하지 못해서 생긴다고 나는 믿습니다.
전자는 단연 가장 탁월하고 은혜로운 것입니다. 사도는 고린도전서 12장 31절부터 그 사실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특이한 은사들에 대해 말하다가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성령의 영향력보다 더 탁월한 길을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후에 그는 다음 장에서 계속하여 보다 탁월한 길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혜 속에 있습니다. 요약하면, 박애(charity) 혹은 신적인 사랑(love)에 있습니다. 그 장 전체에 걸쳐서 그는 사랑이 영감(inspiration)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기적적인 은사로써 자신의 본성을 전달하시는 것보다 마음 속에서 구원하는 은혜로 그 자신의 본성을 영혼에게 더욱 많이 전달하십니다. 하나님의 복된 형상은 구원하는 은혜 속에 있지, 기적적인 은사에 있지 아니합니다. 영혼의 탁월함, 행복, 그리고 영광은 전자에 있지, 후자에 있지 아니합니다. 전자는 무한히 탁월한 열매를 맺게 하는 뿌리입니다.
구원과 하나님을 영원히 향유하는 것은 신적인 은혜에 약속되어 있는 것이지 영감에 약속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특이한 은사들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가증스러울 수 있으며, 지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영적이고 영원한 영혼의 생명은 성령의 특이한 은사들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은혜 안에만 존재합니다.
은혜는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것이지만 은사는 불신자에게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총애하시는 자들, 그리고 친애하는 자녀들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영향력은 성령의 은혜이지, 특이한 은사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특이한 은사들을 개들이나 돼지들에게 던져 주셨습니다. 발람, 사울, 유다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6장에 나오듯이 초기 교회의 사함 받지 못할 죄를 범한 어떤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심판 날에 많은 악한 사람들이 항변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가장 위대한 특권은 그들이 영감을 받았다거나 기적을 행한다거나 하는 것에 있지 아니하고, 그들의 탁월한 거룩함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은혜는 그들이 가진 특이한 은사들보다 수천 배나 더 고귀하고 영예로운 것이었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이 스스로 위안을 삼은 것은 자기가 왕이라든가 혹은 선지자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신적인 빛과 사랑, 기쁨을 전달하시는, 그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의 거룩한 영향력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환상이나 계시나 기적적인 은사에 있어서 모든 사도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겼습니다(참고 빌 3:8).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귀신들이 그들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보다도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고 가르쳐 주셨는데(눅 10:20), 실제로 사도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확실한 증거는 그들이 받은 은사들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은혜였습니다.
마음 속에 은혜를 가지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능력이 덮어짐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의 제2위의 몸을 자기 태에 임신한 복된 동정녀 마리아 자신이 가졌던 특권보다 더 높은 특권입니다. 누가복음 11장 27절부터 2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 12장 47절 등에도 나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조나단 에드워즈 클래식 2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부흥과개혁사)에서
퍼온글
Tuesday, November 15, 2011
청.매.묵 -에스겔 11:14-25 <하나님을 향한 마음>
청.매.묵 -에스겔 11:14-25 <하나님을 향한 마음>
하나님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죄악은 심판하지만 구별된 자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통해 다시금 더럽고 추악한 제악들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법과 규례대로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그 뿐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새 영을 주시고, 새 힘을 주십니다.
우리 청소년부 친구들은 이 땅 가운데 거룩하게 구별된 남은 자입니다. 포로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간, 자유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죄악이 편만한 이 땅에서 죄악으로 살지 않고 거룩과 정결로 살아가야 할 사명입니다. 자기 이기적인 법과 자기 중심적인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에 순종하며 섬기며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도록 새영을 부어 받았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외면하지 맙시다. 내가 해야 할 분명한 몫이라고 인정합시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해 나아갑시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가득한 날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품고 내가 걷는 모든 걸음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실천하며 나아가는 한 날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4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15절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아"
16절 "내가 비록 너희를 여러 민족들 가운데로 쫓고 사방에 흩어 높았지만, 너희가 쫓겨 간 나라에서 내가 잠시 동안,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겠다"
17절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겠다"
"여러 나라에 흩어진 너희를 데려와 이스라엘 땅을 다시 너희에게 주겠다"
18절 "그들이 그 땅으로 가서 그 곳의 온갖 더럽고 추악한 우상들을 제거할 것이다"
19절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20절 "그러면 그들이 내 규례대로 살고 내 법을 지킬 것이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24절 "그런 뒤에는 나는 환상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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