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November 16, 2011

존 뉴턴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존 뉴턴(John Newton, 1725년 7월 24일 - 1807년 12월 21일)

영국의 성공회 신부이자, 찬송가 작가이다. 노예선 선장이었던 그는 1748년 복음주의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였으며, 1755년 성공회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가 지은 대표적인 찬송가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1779년작)이 있다.

기자: 안녕하세요 존 뉴턴 선생님, 갓피아 지식의 거장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존 뉴턴: 네, 반갑습니다. 이것 참, 살다 보니 제가 지식의 거장에서 인터뷰하는 날이 오기도 하네요(웃음). 부족해도 잘 부탁 드립니다.

Q1. 목사님은 굉장히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A1. 허허. 아마 제가 뱃사람이었던 시절을 말씀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38살의 나이에 영국 국교회에서 인정하는 성직자, 그러니까 목사가 되기 전까지 저는 배를 타는 선원과 배를 운영하는 선장을 지냈지요.
존경 받는 선장이셨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말단 선원부터 선장이 되기까지, 저는 20년 가까이 배를 타던, 천상 뱃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배를 타는 것 외에는 다른 일을 생각해 본 것이 없어요.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고, 가족에게 무뚝뚝한 아버지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존경했거든요. 그것이 아마도 ‘나중에 크면 아버지처럼 훌륭한 선장이 되어야지’ 라는 결심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비록 배를 타는 일은, 그리고 배를 운영하는 일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저는 제가 뱃사람이라는 사실에 항상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Q2. 배를 타면서 신앙을 갖기는 쉽지 않은데요, 그럼 목사님은 모태신앙?
A2. 모태신앙이라기보단 제가 일곱 살 무렵에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가 저를 교회에 데리고 나가셨죠.
어머니는 매우 아름다운 분이셨어요. 또한 교회를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주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제가 이담에 크면 훌륭한 목사가 되어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어린 저의 손을 잡고 기도하곤 하셨어요.
그러나 그런 어머니가 너무나 급작스럽게 돌아가시자 저는 교회에서 점점 멀어지고, 본격적으로 배를 타던 청년기부터는 방탕하고 거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죠, 어쩌면 사랑하는 어머니를 그렇게 빨리 데려가신 하나님께 화가 났던 것 같기도 하군요.

Q3.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신앙을 갖게 되신 계기는 어떤 것인가요?
A3. 저의 신앙과 바다는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부터 말씀 드리고 싶군요. 저는 반평생을 배를 타고 바다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어렸을 적에는 어머니의 보호 아래에서 화목한 분위기의 교회를 다녔지만 세상에 나오고, 특히 거친 바다에 나오니 신앙에서 멀어지는 것이 매우 쉽더군요. 그러나 부끄럽게도 저는 멀어지는 신앙을 붙잡으려 애쓰긴커녕, 그 와중에 하나님을 믿고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동료 선원들을 조롱하고 괴롭히는데 앞장섰습니다. 이것은 제 가슴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남았지요. 그러나 저는 유년기에 만난 하나님이 끊임없이 붙잡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에서 저를 기적적으로 살려주시고, 선장의 오해로 일등 항해사에서 최초의 백인 노예로 흑인 주인의 아래에서 학대 받을 때도 하나님은 저를 구하셨죠. 간혹 환상을 통해 나타나기도 하셨는데 그 당시만해도 건방졌던 저는 그 환상을 몇 번이나 무시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조금씩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바다 생활을 뒤로 하고 배의 세관원으로 일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말을 타고 가다가 얕은 웅덩이에 빠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와 옷을 말렸는데 알고 보니 제가 빠진 곳이 웅덩이가 아니라, 한 번 빠지면 나올 수 없는 늪지대였다는 것을 안 이후입니다.
저는 그 동안 배를 타며 수 없이 많은,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목숨을 구했고, 제가 타야 했던 보트에 다른 사람이 타고 가다가 그 보트가 갑자기 침몰되어 전원이 익사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기적을 눈앞에 두고도 깨닫지 못하다가 그 날, 그 늪에 빠졌다가 나온 이후로 제 삶의 하나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확신했죠. ‘하나님은 아직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라는 것을요.

Q4. 배를 오랫동안 타시면서 여러 가지 일이 많았을 텐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어떤 것이 있나요?
A4. 배를 탄다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 대한 인내와, 그리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자연재해를 각오해야 하는 긴장과, 해도해도 끝없는 뱃일에 따르는 고난의 연속입니다. 육지에서는 쉽게 고칠 수 있는 열병도 배에서 걸리면 낫지 못하고 죽음으로 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제대로 된 의약품은 물론이고 흔들리고 악취 나는 배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든요.
저는 배를 타며 세 번이나 열병에 걸렸고, 기적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제가 건강해서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였죠.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제가 최초의 백인 노예가 되었던 일입니다.
당시 제가 타던 배의 선장이 갑자기 죽고 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친구가 선장 대행직을 맡게 되었을 때, 젊고 치기 어렸던 저는 함께 화합하여 배에 남아있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저와 친분이 있었던 배의 공동 소유주인 클로우 씨와 함께 배를 떠나는 쪽을 택했죠.
클로우 씨의 집은 편안했지만 그의 아프리카 계 흑인 아내가 저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아마도 아이를 낳지 못한 그녀 입장에서는 나이로 보면 아들뻘인 제가 클로우 씨의 재산을 상속 받기라도 할까 봐 그랬던 것 같습니다만....아무튼 여러 가지 이유로 클로우 씨가 나가자마자 저는 그 집에서 모함을 받고 노예와 함께 살다가, 나중에는 노예들도 쓰지 않는 창고에서 나무토막을 베고 자게 되었죠. 저는 그런 생활이 그닥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런던으로 편지를 보내어 도움을 청했지만 저의 노예 생활은 생각보다 길어졌습니다. 게다가 평생 해본 적 없는 강도 높은 노역 때문에 병까지 걸렸죠. 저는 노년이 된 지금도 여기저기가 아픈데, 아마 그 때 얻은 병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1년 반 만에 저는 백인 노예를 수상히 여긴 바깥 상인들 덕분에 노예 신세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겪은 노예들의 삶과 강도 높은 노역은 평생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Q5. 언제 목사(성직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셨나요?
A5. 제가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리버풀에서 세관원 일을 하고 있을 때, 조지 휘트필드 목사의 설교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이제까지 제가 교회에서 듣던 판에 박힌 설교와는 다른 설교로, 제 마음을 단박에 울렸습니다.
그 동안 제가 갖고 있던 신앙에 대한 의문들을 완전히 해소시켜주는, 참으로 가슴 시원하고도 먹먹한 설교였죠. 4주 동안 그의 설교 천막을 따라다니면서 감명을 받은 저는 온 리버풀 사람들에게 휘트필드 목사의 설교를 알리고, 영혼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종교 단체 소고’라는 작은 책을 냈어요.
그 외에도 몇 권의 책을 더 냈는데 이로 인해 영국 비국교회에서 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후, 몇몇 사람으로부터 목사가 되어 보라는 권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만해도 ‘나 같은 죄인이?’ 라는 생각 때문에 깊이 생각해보진 않았지만, 이듬해 생일에 저는 하나님이 저를 향해 계획하신 길이 성직자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성직자는 귀족 계급이었고,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황의 승인이 번번히 무시되었지만, 각고의 노력과 하나님의 적절하신 개입 끝에 4년 만에 저는 영국 국교회에서 인정하는 사제의 서품을 받는데 성공했고, 교회에서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죠.

Q6. 선생님의 삶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친 사람을 꼽자면 누구를 꼽으실 건가요?
A6. 첫째로, 저의 첫사랑이자 가장 든든한 지원군인 저의 아내, 폴리입니다. 열 일곱 살에 첫눈에 반한 이후로 스물 다섯 살에 결혼해 38년의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폴리는 길면 몇 년씩이나 떨어져 있어야 하는 뱃사람의 아내로써, 그리고 제가 성직자가 된 이후부터는 저의 사역을 뒤에서 묵묵히 돕는 동역자로써의 역할을 그 어떤 불평도 하지 않고 맡았습니다. 1790년 12월 15일을 마지막으로 폴리가 제 곁을 떠났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도 ‘폴리 없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였어요.
두 번째로는 제가 언제나 마음의 십자가처럼 기억하고 있는 나의 친구, 조브 루이스입니다.
조브는 제가 한창 하나님을 조롱하고 다니던 청년기의 중반, 서더랜드 호에 함께 승선하고 있었던 훌륭한 뱃사람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공평하고 다정하게 대했던, 흔치 않은 청년이었지요. 노예에게도 그는 공평한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감사를 잊지 않고 언제나 평안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저는 하나님을 떠나는데 급급했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선량한 척’하는 작자들을 놀리고 조롱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조브는 처음에는 저의 상스러운 신성모독을 들은 척도 안 하거나, 조용히 웃음으로 무마시켰지만 점차 그의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0년쯤 지난 후, 영국 해군 상선에서 저희가 우연히 조우했을 때 저는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온 후였지만 조브는…그 선량하고 신실하던 조브는 그 옛날 저의 모습이 되어, 그 때 제가 한 것보다 더한 신성 모독과 죄악을 즐기는 술고래가 되어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은 물론이고 악마를 찬양하는 말도 서슴없이 내뱉었습니다.
저는 그가 잃은 신앙에 전적으로 책임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금새 하나님께로 회심할 것을 믿고 그를 전도하기 시작했지만, 그에게는 저의 말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그렇기도 하겠죠. 자신의 신앙을 조롱하고, 결국엔 저버리게 만든 사람이 회심했답시고 전하는 복음이 우습기도 했을겁니다…..가여운 조브. 그는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옆에서 그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데리러 악마가 오고 있다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다가 죽었다고 하더군요. 사람들은 그의 죽음이 저 때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기자님, 그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에 어떻게 저의 책임이 조금도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한낱 치기 어린 장난에 불과했던 악의에 찬 욕설이, 한 사람의 영혼을 그토록 타락시킬 줄은 그때는 몰랐습니다. 영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그 때는 몰랐죠.
조브의 죽음은 제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고, 그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품고, 저는 복음을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Q7. 너무나 마음 아픈 이야기에요. 그러나 목사님의 설교는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로 유명해요. 목사님이 지으신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이라는 찬송시는 근래에 없는 훌륭한 작품으로 칭송 받고 있구요.
A7. 그게 어떻게 제가 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겸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자님. 저는 오래된 뱃사람이라는 핑계로, 거친 바다에서 살고 있다는 핑계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온갖 일을 다 하고 살았습니다.
상스러운 신성 모독과 알코올 중독은 물론, 사랑하는 폴리를 두고도 아프리카 어딘가에서는 흑인 노예를 아내로 맞은 적도 있어요. 조브의 일은 드러난 일면일 뿐입니다. 제가 타락시킨 영혼이, 혹은 상처 입힌 영혼이 어쩌면 조브보다 많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평생 안고 살았습니다.
어쩌면 그랬기에 더욱 간절하게 주님께 매달렸는지도 모릅니다.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구요. 물론 영혼은 저의 소관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지만, 남의 죄로 인해 멀쩡한 영혼도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연약한 인간임을 조브를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배를 타던 선원 출신 목사라서 유명해진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일에 저의 이름이 영국에 조금이라도 알려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영혼을 구할 기회를 조금이라도 더 주신 것이라 믿고 필사적으로 매달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라는 찬송시는, 말 그대로 저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진실로, 뼛속까지 주님을 떠난 죄인이었습니다….그런 저를 용서해주시고, 숱한 어려움에서 구해내시고, 다시 받아주기까지 하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게 느껴지는지, 아마도 결코 갚을 길이 없을 겁니다. 그 빚을 마음에 안고 살아가는 참회가, 저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에게 조금이나마 전해진 것이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기자: 가슴이 먹먹해지는 존 뉴턴 목사님과의 인터뷰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고, 노년에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운동에 여생을 바치신 뉴턴 목사님의 결코 순탄치 않았던 삶을 들을 기회를 갖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참고도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시자 존 뉴턴/ 캐서린 스위프트 지음, 김은홍 옮김/ 기독 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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