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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March 5, 2020

마가복음 2장 13-28절 세리와 죄인들과의 식사


 마가복음 2장 13-28절의 예수님은 모습은 
 그 당시에 통념을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어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세리를 부르셨습니다. 
 이들은 당시 천시 받던 어부요, 경멸 받던 세리로서 사회에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더 나아가, "죄인들"과 함께 앉았습니다(2:15).
 예수님은 이방인들, 그들과 함께 먹고 대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죄인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때 17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신 후 병든 자에게 다가가 그들을 만졌고 죄인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넘지 못할 경계, 결코 다가 설수 없다고 말하는 이방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일은 정죄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니다. “너희도 나처럼, 경계를 넘어 그들에게 나아가라”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주님이 나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죄인을 부르시는데, 어찌 은혜 입은 우리가 …


 오늘 한 날도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대화하며 주님의 이름을 나누는 한 날 되기를 소망합니다.

Friday, May 3, 2013

한 날 묵상 - 막2:13-17 <예수님은 누구를 제자로 부르시는가? 은혜입은 자로 알고 부르심을 받은 자임을 아는자들이다>

한 날 묵상 - 막2:13-17 <예수님은 누구를 제자로 부르시는가? 은혜입은 자로 알고 부르심을 받은 자임을 아는자들이다>

1.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나는 어느 부류의 사람인가?

2. 첫번째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제자들이다. 
예수님은 가르치시는 사역을 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사역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3. 13절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 두번째는 많은 세리들과 같은 죄인들은 예수님께 나아갔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다라 다녔다. 

5. 15절 "그의 집에(알패오의 아들 레위) 앉아 ...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6. 세번째 부류의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따지면서 방해하는 사람들이다. 

7. 16절 "바리새인들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8. 그렇다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분류되는 기준은 무엇인가?

9. 이는 구세주가 이 땅에 오시는 이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0.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정했더라도, 그들의 생각하는 구세주의 삶에는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의 행동들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1. 예수님은 이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말씀을하신다.
   17절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12.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이 땅에 오신것인가?

13. 나를 위해 오신 것이다. 이를 인정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죄인이다. 그리고 내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14. 내가 죄인임을 아느냐? 모르느냐?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섞이지 않게 된다. 

15. 그리고 죄인임을 인정할 때 그 삶이란 죄인이 아니라고 할 때와 삶과는 천양지 차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6. 어떻게 죄인임을 알면서 죄인이 아닌것처럼 행동할 수 있겠는가. 그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할 수 있겠는가...

17. 그렇다. 나는 죄인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나를 위해 오신 것이다. 나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그래서 감사한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18. 그렇다면, 세 부류의 사람들중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제외하고 제자들과 세리와 같은 죄인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남게 된다. 

19.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누구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세리같은 죄인들은 누구인가? 어떻게 그들은 구별되어 있는가?

20. 이는 죄인이 전부 다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21.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오셨고, 죄인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을 아는 죄인들은 제자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죄인임을 알았다면 제자가 되어야 한다. 

22. 우리가 죄인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왜냐하면 영원한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23. 그리고 죄인임을 아는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된다(이는 감사하게 될 것이다. 죽을 수 밖에 없었는데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4. 그렇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25. 이러한 은혜와 감사가 있다면, 자연스럽게 죄인의 삶은 제자의 삶으로 변해가야 한다. 예수님은 죄인인 나를 위해 오셨지만, 죄인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변해 제자가 되기를 예수님은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26. 예수님은 나를 부르러 오셨다. 그렇기에 부르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 나는 죄인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너무 큰 은혜를 받은 나는 이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27. 나는 지금 바리새인의 서기관인가?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죄인가? 은혜를 입고 부름받은 제자인가?

28. 나는 은혜를 입고 부름받은 제자이다.

29. 오늘도 그 은혜를 주시고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할 수 밖에 없다. 

30. 할렐루야!


=== 참고 자료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마9:9)

'세리와 죄인,' '세리와 이방인,' '세리들과 창기들' 같은 표현들은 당시 '세리'라는 말의 문맥적 의미를 제공한다. 교회의 권면에도 회개치 않는 자들은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도무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될 수 없는 부류의 전형으로 간주되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 사랑하는 것은 '세리도 이같이 하지 않느냐'는 산상의 교훈처럼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는 자기애의 대명사가 세리였다. 이처럼 예수님의 어법 속에서도 세리는 상종하지 말아야 하는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라고 하는 세리에게 다가가 '나를 좇으라'는 소명의 팔을 내미셨다. 게다가 하나님 나라의 초석을 다지고 기둥을 세우는 막중한 사도직을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 중의 죄인에게 맡기셨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마태의 지파적 출신을 규정하는 것은 자료가 빈약해서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다. 유다지파 소속의 예수님 혈통에도 최소한 두 사람의 '레위'가 있었듯이 '레위'라는 이름은 레위지파 밖에서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마태를 유다지파 소속으로 규정하고 코드인사 아니냐는 혐의를 제기하는 것도 불가능한 '유치함'은 아니겠다.

아마도 '레위'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부르심을 받은 레위지파 소속처럼 하나님께 쓰여지면 좋겠다는 부모의 기대감 속에서 작명된 이름일 것이다. '레위'라는 이름 대신에 '마태'라는 생소한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도 당시 세리직의 야비하고 부끄러운 생리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칼빈은 추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을 세리가 부자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보다 현란한 유흥의 접대(a divitibus lautius accipi) 를 기대하며 부자들만 건드리는 분으로 간주했던 참으로 기발한 발상의 소유자도 칼빈의 시대에는 있었던 것 같다.

이에 칼빈은 마태의 부르심을 계파나 부와 무관한 예수님의 값없는 선하심의 범례(specimen gratuitas suae bonitatis)이며 모든 부르심이 우리 자신의 의로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선전한 은혜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의 증거이며 전형(testimonium et typus)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어떠한 신분을 불문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은혜 앞에서의 평등에 대해서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다. 옳고 정당하다. 그러나 누가는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며 마태가 주님의 부르심과 더불어 '모든 것을 버렸다(καταλιπὼν πάντα)'는 사실을 굳이 언급한다. 그것은 부르심에 대한 마태의 반응이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마태가 자신을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totum dedisse) 복음의 모든 장애물을 버렸다고 설명한다. 죄인에게 구원과 최상의 부르심이 열려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죄인의 자리에서 그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죄의 자리에 머물러도 된다는 승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에서의 떠남을 의미한다. 세상이 괜찮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정하신 죄의 자리에 제도의 합법적인 돗자리를 깔고 머물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와 평등을 운운하는 것은 주님을 욕보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능멸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공의에 상응하는 우리의 변화도 수반한다. 사랑을 명분으로 공의를 짓밟거나 공의를 명분으로 사랑을 져버리는 것은 동일하게 위험한 편협이다. 타인에 대해서는 공의를 휘두르고 자신에 대해서는 사랑을 적용하는 것은 비겁하고 야비하다. 십자가의 제자도를 말씀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타인과 자신 모두에게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공의가 입맞추는 제자됨을 요구한다. 모든 사람들을 한없이 사랑하되 죄와의 단절은 철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
시편 85: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Tuesday, March 26, 2013

한 날 묵상 - 막 1:16-20 <사람을 낚는 어부가 필요하시다>

한 날 묵상 - 막 1:16-20 <사람을 낚는 어부가 필요하시다>

1.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2.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일에 관하여 앞서 막 1:14-15절 말씀을 통해서 회개한다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회개는 주님께 돌아가는 것일 뿐 아니라, 나아가 주님이 주신 사명이 있음을 기억하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진정 회개한 사람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3.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하여, 회개의 선포를 위하여 사람을 부르시고 찾으시는 본문이 오늘 본문 1:16-20절의 말씀입니다. 

4. 16절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5. 예수님은 사람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길을 지나가시다 시몬과 안드레를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보시고 반응을 하셨다는 의미는 예수님은 사람을 찾으시는 일을 마음에 늘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예수님이 시몬과 안드레의 그 어떤 것을 보시고 그들을 주목한 것이 아니다. 이는 예수님이 늘 마음에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마음에 품고 계셨는데, 그 때에 그들이 예수님의 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7. 예수님은 지금도 사람을 찾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들과 함께 교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8. 하나님의 기다림과 예수님의 찾으심에 우리는 이제 순종의 반응을 하면 됩니다. 말씀에 자신의 것을 버리고 예수님이 허락하신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기로 결단의 길을 걸으면 됩니다. 

9. 2013년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이 감당하셨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해 봅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으실 수 있었을까? 과연 무엇이 예수님을 그 고통의 길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순종하게 하셨을까? 하나님 아버지의 부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제된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10. 하나님의 말씀과 부르심에 대한 예수님의 순종은 우리의 순종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과 고통의 길일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이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기쁨과 감사는 대부분이 영적인 부분일 경우가 많습니다. 육체적인 부분은 견디기 힘든 고통과 고난의 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함과 교제함으로부터 오는 평안과 기쁨으로 인해 육체적인 고통 또한 능히 이길 수 있게 됩니다. 

11. 예수님께서 어부들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17절 "나를 다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2. 예수님의 부르심에 어부들을 반응을 하게 됩니다. 18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3. 어부들의 반응은 "곧", "즉시로" 순종입니다. 주신 말씀에 영적으로 즉시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계산하지 않는것입니다. 우리가 즉시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14. 즉시로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환경과 상황을 계산하기 시작하면 순종하기란 더욱 어려워집니다.

15. 본문에서 두 번의 부르심이 나옵니다. 16절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와 19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입니다.

16.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어부들의 반응은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의도는 즉시 순종입니다.  18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20절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애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17. "곧" "즉시" 순종입니다. 즉시로 순종해야 오직 주님이 주신 사명에 집중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20절에서 보는 세배대의 아들과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의 부르심은 아버지 세베대를 버려 두고 가야 하는 순종입니다. 그 뿐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의 생계수단이었던 배도 버리고 가야 할 순종입니다.

18. 이러한 순종을 할 수 있는 영적인 인도하심은 "곧", "즉시로"하는 순종입니다. 자신의 생계로 계산하지 않고, 부모도 계산하지 않는 순종입니다. 

19. 그렇다면, 즉시로 순종하지 못하여 이것 저것 계산하기 이미 시작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20. 이때는 예수님의 부르심의 말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즉 기도함으로 부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부르심에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더욱 마음에 붙잡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21. 다시 15절말씀으로 돌아가,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셔서 이 땅에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22. 이 말씀의 선포를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고, 지금 우리도 부르고 계십니다.

23. 사람을 낚는 어부가 필요한 이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24. 우리에게 있어서 이 세상 그 어떤 것이 이보다 더 거룩한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25. 이 일에 순종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6. 할레루야!

Saturday, January 14, 2012

한 날 묵상 - 창 37:5-11 <요셉의 꿈과 형들의 미움. 가족의 비극의 시작인가? 가족의 은혜인가?>

한 날 묵상 - 창 37:5-11 <요셉의 꿈과 형들의 미움. 가족의 비극의 시작인가? 가족의 은혜인가?>

오늘 말씀의 흐름..

요셉의 꿈(두번)
요셉은 자신의 꿈을 말했다. 
아버지는 꾸짖었고, 형들은 더욱 미워했다. 
 반전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말씀의 흐름속에 특별한 관계를 찾을 있는가?
요셉의 꿈은 가족의 비극인가? 가족의 은혜인가?
 오늘 말씀의 흐름에서 보면 가족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형제들안에 갈등이 시작되며, 서로 미워하며 시기하게 된다. 결국 요셉을 애굽에 팔게된다(37:12-36).
 그러나 요셉 꿈 이야기의 끝은 여기가 아니다. 그는 후에 애굽에서 힘든 일들을 만나지만 애굽의 총리가 되고(41:37-57), 결국 가족을 구원하며,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된다(46장).

 하나님은 꿈을 통해 요셉을 부르셨다. 요셉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요셉에게 찾아오는 것은 형들이 미움, 시기였다. 형제들끼리의 갈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요셉의 이러한 갈등은 결국 아름다운 이야기로 끝을 맺게 된다. 요셉의 꿈으로부터 시작된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주도권이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모든 사건과 상황들을 이끌어가신다. 이 때 요셉은 항상 하나님편에서 서 있었다. 그 편이 가장 지혜롭고, 모든 문제를 가장 잘 풀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도  때로는 심한 관계의 갈등을 가져올 수 있다. 가족간, 형제들, 친구들, 이웃과의 갈등이다. 
 예수님의 부르심도 그렇다. - 가족의 미움을 받았다(마13:46-50. 막3:31-35).
 예수님의 가르침도 그렇다. - 가족의 미움을 받았을 것이다(눅9:59-60).
 제자의 삶도 그렇다.

5절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절 "요셉이... 이르되 청하건데... 들으시오"
7절 "밭에서 곡식 단...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절 "그의 형들이 ... 우리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 왜 꿈이야기에서, 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이야기에서 왕의 이야기가 나올까? 누가 누구를 다스린다는 이야기가 나올까?
      왜 이러한 말이 나오는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

9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절 "그가 ..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 "
11절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 형들의 미움은 3중 반복후 "그의 형들의 시기"에서 꽃을 피움.
      아버지는 첫 행동이 꾸짖음이었지만, 결국 그 말을 마음에 간직하게 됨.


Friday, December 23, 2011

청.매.묵. 에스겔 2:1-10 <반항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탄식과 애가와 재앙의 글을 받아 먹고 독벌레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가라는 부름받은 에스겔>

청.매.묵. 에스겔 2:1-10 <반항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탄식과 애가와 재앙의 글을 받아 먹고 독벌레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가라는 부름받은 에스겔>
 우리도 세상에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때에 이스라엘 백성처럼 반항하지 맙시다. 에스겔처럼 순종합시다. 찔레와 가시가 둘러싸이고 두려움과 겁이 날지라도 하나님께 반항하는 백성들이 있는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1절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2절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주님의 영이 내게로 들어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3절 "내가 너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낸다"
4절 "내가 너를 고집스럽고 말을 듣지 않는 백성에게 보낸다"
       "'주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전하여라"
=> 반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탄식의 마음... 그래서 에스겔을 보낸다. 말씀을 전한다.

5절 "그들이 네 말을 듣든지 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6절 "이는 그들은 내게 반항하는 백성이기 때문이다"
7절 "그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너는 반드시 내 말을 전해야 한다"
      "그들은 내게 반항하는 백성이다"

8절 "너는 이 백성이 반항하는 백성처럼 내게 반항하지 마라. 네 입을 벌려 내가 주는 것을 받아먹어라"
  => 하나님의 원하시는 백성은 주신 말씀을 반항하지 않고 잘 받아 먹는 자들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반항하는 백성이요, 에스겔은 반항하지 않고 말을 받아먹는 자이다.

10절 "주님께서 그 두루마리를 내 앞에 펼치셨는데 앞뒤로 탄식과 애가와 재앙의 글이 적혀 있었다"
 => 반항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여호와의 마음은 탄식과 애가와 재앙이다.

Friday, June 3, 2011

소명, 비전 그리고 부르심

소명은 하늘에서 온다. 비전은 하나님이 이뤄 주신다. 우리는 크고 작은 도구일 뿐이다. 비교가 불가능한, 모두 소중한 그릇들이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다면 우리의 하루는 하나님의 날이 된다 - 조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