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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y 28, 2013

한 날 묵상 - 막2:23-28 <안식일에 주인은 누구신가에 대한 의미는 진정한 안식일의 의미를 찾는 것에 있다. 자비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예수님을 말씀하셨다>

한 날 묵상 - 막2:23-28 <안식일에 주인은 누구신가에 대한 의미는 진정한 안식일의 의미를 찾는 것에 있다. 자비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예수님을 말씀하셨다>

(코페르니쿠스(다윗의 경건한 생각 참고하기))

1. 개개인의 생각과 확신을 버리거나 바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2. 물론 쉽게 버리는 것 또한 옳지 않다.

3.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확신이 진짜로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맞게 될 때이다.

4. 이럴 때 무엇보다 철저히 검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검증에는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며 그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5. 그런데 이런 검증을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확신이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

6. 사울이 바울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사도행전 9장 1-19절).

7. 바리새인들의 고정관념은 그들에게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8. 예수님을 향해 바리새인들의 고정관념은 언제나 예수님보다 율법이 우선이었다.

9.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충분히 그들의 생각을 바꿔야만 하는 사건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0.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말한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24절)
 참고 : 히브리 구전 율법서인 미쉬나에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일이 열거됨.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은 추수 금지 규정, 탈곡 금지 규정, 키질 금지 규정을 범한 것임 

11. 이 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한 사람 다윗이 했던 일을 예로 들어 바리새인들에게 말하는 것이다(25-26절).

12. 예수님은 율법보다 먼저 계신 분으로 율법의 완성이며 마침이 되신다.

13.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에 해야 하는 행동이나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이 율법 그 자체였다. 그런데 안식일에 지켜야 하는 율법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14. 27-28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15. 예수님의 안식일이라는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시다.

16. 안식일은 예수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주인이시다.

17. 안식일이 예수님을 위하여 있다는 것과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다는 말씀안에 있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18. 마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 12장 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19. 우리는 안식일의 정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누가 진정한 이웃입니까? 누가복음 10:25-37절입니다.  이런 저런 핑계로 이웃을 돌보지 않는 자들에게 진정한 예배가 무엇이며,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20. 안식일에도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을 잘 지키는 삶이야 진정한 예배입니다.

21. 예수님은 안식일에 제사보다 안식일지라도 진정한 예배를 원하셨습니다.

22. 예수님이 진정 원하시는 주일의 예배는 모두가 함께 기쁨과 감사의 예배를 드림에 있습니다.

23. 사랑과 정의과 돌봄이 없는 예배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어울리며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24.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새롭게 해석하신 안식일을 삶에서 온전히 드리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25.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주인이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엿세 동안도 주인이십니다. 매일 매일 자비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26. 할렐루야. 아멘!


=== 이런 저런 생각들 ==
세상의 주인은 누구인가?

바리새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부분.

바리새인들에게 쇼킹한 소식은 다윗보다 예수님이 주인이시다. 율법보다 예수님의 말씀이 먼저다는 내용이다.

자신들의 지난 생각과 관념을 뒤엎는 일이다.

오늘 우리가 받아 들이기 힘든 부분은 무엇인가?
전통, 관심, 자기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 힘든 영역이 있다면...

예수님께 전부를 내어드리지 못하고 마음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가장 우선시 되는 일은 생명이며,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내가 삶에서 가장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일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에 따라 절대 순종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세상의 주인이시다.
===



===
23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자니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절 "바리새인들이 ..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

26절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절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Tuesday, May 7, 2013

한 날 묵상 - 막 2:18-22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그리고 금식 문제로 생각하는 율법에 관한 새로운 이해>

한 날 묵상 - 막 2:18-22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그리고 금식 문제로 생각하는 율법에 관한 새로운 이해>


1. 금식에 대한 성도들의 반응은 여러가지이다.

2. 금식 기도를 꼭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절대로 금식을 자기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3. 당신이 지금 금식 기도를 가끔하는 사람이든지, 절대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든지 금식에 관한 주제는 성경에 이슈중에 하나이다.

4. 구약시대에도 금식에 관한 여러 말씀이 있으며, 신약 성경에도 그 말씀 자주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5.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 신 후 광야에서 사십 동안 성령에 이끌어 계셨다.

6. 그리고 신약 성경에 곳곳에 금식에 관한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7. 오늘 본문은 예수님은 금식에 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답을 주시는 장면이다.

8. 그렇다면, 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었는가?

9. 율법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율법에 순종하기 위해 그들은 금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때 예수님께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0. 결국 오늘 본문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율법에 기록한 금식에 관해서 오해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을 주시는 장면이다.

11. 예수님은 금식에 관한 질문에 답을 주시면서 옛 율법과 새 율법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원하셨다.

12. 앞서 율법에 관해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은 옛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13. 예수님의 율법은 사랑이며, 정죄가 아니다. 이는 무조건적 사랑이면서, 사랑으로 죄인들을 품기 위해 오신 것이다.

14. 구약의 금식에 관한 율법을 신약의 금식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계신다.

15. 예수님의 새 율법을 삶의 전 영역에 폭넓게 적용해야 한다. 구약의 율법으로 머물러 있으면 우리 또한 질문하는 이들과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게 된다.

16. 요즘 무엇보다 이슈가 되었던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본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이슈는 동성애문제이다. 양쪽의 주장이 모두 전부 다 틀린 것도 아니고, 전부 다 옳는 것도 아니다.

17.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율법에 관한 분명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사랑이다.

18. 율법으로 우리는 사람들을 정죄할 수 없다. 왜 율법에 따라 금식하는 자들이 있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고? 물을 수 없는 것이다.

19. 우리가 왜 그들을 율법의 기준으로 정죄할 수 없는가? 율법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다.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20.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1-11절에서 음행중에 잡혀온 여자에 관한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이슈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7절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11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21. 예수님은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용서해주신다.

22. 우리도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예수님이 새 율법에 기록된 말씀으로 살아가야 한다.

23. 그렇기 때문에 옛 율법이 새율법과 함게 있을 수 없다. 금식에 관한 질문에 답하시는 예수님은 전혀 낯선 비유를 통해서 결론의 말씀을 주시는 것을 보게 된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은 자가 없나니"

24. 나는 여기서 낡은 가죽 부대와 낡은 옷을 옛 율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이 새롭게 주신 율법의 완성에 관한 것이라 생각한다.

25.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순종할 필요가 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26. 그리고 우리는 지금 진짜 금식을 해야 한다.우리는 해야 할 진짜 금식은 무엇인가?




27. 이사야 58장 3-9절 말씀이다.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28. 바로 공의와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사랑하는 것이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 결박을 풀어 주며 멩에의 줄을 그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 "

29. 지금 우리가 감당해야 할 진짜 금식이다.

30.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진짜 금식할 떄가 있다는 말씀을 하신다.

31. 막2장 19-20절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는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나라"

32. 예수님은 금식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율법의 외식함을 경계함으로 금식을 통해 경건한 척하지 말것을 경계하신다.

33. 그리고 신랑이 빼앗기는 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명 이유에 합당한 사명을 감당한 날, 그 후로부터 진정한 금식에 순종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다.

34. 우리애게 금식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에게는 그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진정한 금식을 행할 때이다.

35. 제자들에게 지금은 분주하게 보낼 때이지 금식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분명히 울며 씨를 뿌를 때가 있다.


36. 제자들에게 지금이 금식할 때가 아니라면 무엇을 해야 할 때였는가? 열심히 씨를 뿌려야 할 때이다. 율법을 지켰느냐? 그렇지 못했느냐? 따지는 시간이 아니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긴급하고도 중요한 때이다.  지금은 그 일을 해야 할 때이다.

37.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금식 논쟁이 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38. 보이려는 금식이 아니라, 진정한 금식- 서로 사랑하며 섬기며 나누는- 금식을 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다.

39. 율법을 보이려는 외식함을 조심하며 진정한 금식을 할 때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이다.

40. 우리 모두가 이러한 진정한 금식을 오늘 하루도 행하며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41. 할렐루야!


===
18절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절 "그러나 신랑을 빼았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내에 넣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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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및 서평
http://www.blogger.com/blogger.g?blogID=3681000074470592328#overviewstats/src=dashboard

<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

Friday, May 3, 2013

한 날 묵상 - 막2:13-17 <예수님은 누구를 제자로 부르시는가? 은혜입은 자로 알고 부르심을 받은 자임을 아는자들이다>

한 날 묵상 - 막2:13-17 <예수님은 누구를 제자로 부르시는가? 은혜입은 자로 알고 부르심을 받은 자임을 아는자들이다>

1.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나는 어느 부류의 사람인가?

2. 첫번째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제자들이다. 
예수님은 가르치시는 사역을 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사역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3. 13절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 두번째는 많은 세리들과 같은 죄인들은 예수님께 나아갔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다라 다녔다. 

5. 15절 "그의 집에(알패오의 아들 레위) 앉아 ...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6. 세번째 부류의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따지면서 방해하는 사람들이다. 

7. 16절 "바리새인들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8. 그렇다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분류되는 기준은 무엇인가?

9. 이는 구세주가 이 땅에 오시는 이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0.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정했더라도, 그들의 생각하는 구세주의 삶에는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의 행동들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1. 예수님은 이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말씀을하신다.
   17절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12.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이 땅에 오신것인가?

13. 나를 위해 오신 것이다. 이를 인정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죄인이다. 그리고 내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14. 내가 죄인임을 아느냐? 모르느냐?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섞이지 않게 된다. 

15. 그리고 죄인임을 인정할 때 그 삶이란 죄인이 아니라고 할 때와 삶과는 천양지 차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6. 어떻게 죄인임을 알면서 죄인이 아닌것처럼 행동할 수 있겠는가. 그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할 수 있겠는가...

17. 그렇다. 나는 죄인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나를 위해 오신 것이다. 나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그래서 감사한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18. 그렇다면, 세 부류의 사람들중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제외하고 제자들과 세리와 같은 죄인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남게 된다. 

19.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누구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세리같은 죄인들은 누구인가? 어떻게 그들은 구별되어 있는가?

20. 이는 죄인이 전부 다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21.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오셨고, 죄인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을 아는 죄인들은 제자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죄인임을 알았다면 제자가 되어야 한다. 

22. 우리가 죄인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왜냐하면 영원한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23. 그리고 죄인임을 아는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된다(이는 감사하게 될 것이다. 죽을 수 밖에 없었는데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4. 그렇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25. 이러한 은혜와 감사가 있다면, 자연스럽게 죄인의 삶은 제자의 삶으로 변해가야 한다. 예수님은 죄인인 나를 위해 오셨지만, 죄인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변해 제자가 되기를 예수님은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26. 예수님은 나를 부르러 오셨다. 그렇기에 부르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 나는 죄인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너무 큰 은혜를 받은 나는 이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27. 나는 지금 바리새인의 서기관인가?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죄인가? 은혜를 입고 부름받은 제자인가?

28. 나는 은혜를 입고 부름받은 제자이다.

29. 오늘도 그 은혜를 주시고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할 수 밖에 없다. 

30. 할렐루야!


=== 참고 자료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마9:9)

'세리와 죄인,' '세리와 이방인,' '세리들과 창기들' 같은 표현들은 당시 '세리'라는 말의 문맥적 의미를 제공한다. 교회의 권면에도 회개치 않는 자들은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도무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될 수 없는 부류의 전형으로 간주되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 사랑하는 것은 '세리도 이같이 하지 않느냐'는 산상의 교훈처럼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는 자기애의 대명사가 세리였다. 이처럼 예수님의 어법 속에서도 세리는 상종하지 말아야 하는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라고 하는 세리에게 다가가 '나를 좇으라'는 소명의 팔을 내미셨다. 게다가 하나님 나라의 초석을 다지고 기둥을 세우는 막중한 사도직을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 중의 죄인에게 맡기셨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마태의 지파적 출신을 규정하는 것은 자료가 빈약해서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다. 유다지파 소속의 예수님 혈통에도 최소한 두 사람의 '레위'가 있었듯이 '레위'라는 이름은 레위지파 밖에서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마태를 유다지파 소속으로 규정하고 코드인사 아니냐는 혐의를 제기하는 것도 불가능한 '유치함'은 아니겠다.

아마도 '레위'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부르심을 받은 레위지파 소속처럼 하나님께 쓰여지면 좋겠다는 부모의 기대감 속에서 작명된 이름일 것이다. '레위'라는 이름 대신에 '마태'라는 생소한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도 당시 세리직의 야비하고 부끄러운 생리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칼빈은 추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을 세리가 부자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보다 현란한 유흥의 접대(a divitibus lautius accipi) 를 기대하며 부자들만 건드리는 분으로 간주했던 참으로 기발한 발상의 소유자도 칼빈의 시대에는 있었던 것 같다.

이에 칼빈은 마태의 부르심을 계파나 부와 무관한 예수님의 값없는 선하심의 범례(specimen gratuitas suae bonitatis)이며 모든 부르심이 우리 자신의 의로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선전한 은혜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의 증거이며 전형(testimonium et typus)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어떠한 신분을 불문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은혜 앞에서의 평등에 대해서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다. 옳고 정당하다. 그러나 누가는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며 마태가 주님의 부르심과 더불어 '모든 것을 버렸다(καταλιπὼν πάντα)'는 사실을 굳이 언급한다. 그것은 부르심에 대한 마태의 반응이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마태가 자신을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totum dedisse) 복음의 모든 장애물을 버렸다고 설명한다. 죄인에게 구원과 최상의 부르심이 열려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죄인의 자리에서 그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죄의 자리에 머물러도 된다는 승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에서의 떠남을 의미한다. 세상이 괜찮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정하신 죄의 자리에 제도의 합법적인 돗자리를 깔고 머물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와 평등을 운운하는 것은 주님을 욕보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능멸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공의에 상응하는 우리의 변화도 수반한다. 사랑을 명분으로 공의를 짓밟거나 공의를 명분으로 사랑을 져버리는 것은 동일하게 위험한 편협이다. 타인에 대해서는 공의를 휘두르고 자신에 대해서는 사랑을 적용하는 것은 비겁하고 야비하다. 십자가의 제자도를 말씀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타인과 자신 모두에게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공의가 입맞추는 제자됨을 요구한다. 모든 사람들을 한없이 사랑하되 죄와의 단절은 철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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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5: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Tuesday, April 30, 2013

한 날 묵상 - 막2:1-12 <중풍병자를 향한 친구들의 믿음과 예수님의 병고침 넘어 죄사함의 권세>

한 날 묵상 - 막2:1-12 <중풍병자를 향한 친구들의 믿음과 예수님의 병고침 넘어 죄사함의 권세>


1. 누구에게나 예수님은 필요하다.

2. 어떤 사람은 그 필요성을 인정하며 살아 갈 것이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필요성을 무시하며 살 뿐이다.

3. 당신은 예수님이 인생에 꼭 필요한 한 분이십니까? 예수님이 필요치 않으십니까?

4. 그렇지만 예수님이 인생에서 꼭 필요한 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함께 섞이지 못하며, 필요성의 이유가 예수님께서 품으시고 계시는 우리에게 오신 이유와 일치하는 필요성과 그렇지 못하는 필요성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5. 그렇다면, 나와 당신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오신 이유에 합당한 필요성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가 그와 전혀 다른가?

6. 우리가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우리를 위해 오셨어야 했는가?에 대한 답과 일치한다.

7.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는가? 병고치기 위해 오셨는가? 아니면, 죄사함을 위해 오셨는가?

8. 당신은 지금 예수님이 왜 필요한가? 병고침을 받기 위함인가? 죄 사함을 받기 위함인가?

9. 마가복음 2장 1-12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위에서 언급한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 필요성에 대해 자신의 입장이 드러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10. 먼저는 중풍병자가 있다. 그리고 그 중풍병자를 위한 친구들이 있었다.

11.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병고침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한 번 만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혼자서는 결코 예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없었다.

12. 그렇지만 중풍병자에게는 예수님을 뵈옵기 바라는 자신의 열망만큼이나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13.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데려가기 위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그 어떠한 방법이든 다 하고 있었다. 쉽게 갈 수 없었지만, 그들은 어려운 일들을 만날 때 꼭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야 한다는 바램앞에 어려움은 결코 그들에게만은 넘지 못할 어려움이 아니었다.

14. 4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15. 이들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어떠한 믿음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유추해보건데, 예수님은 분명히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었을 것이다.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16. 예수님께서 중풍병자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말씀에 중풍병자들이 기대하는 바가 아니었다.
 5절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17. 병이 나았다는 예수님의 음성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았'다는 음성이었다.

18. 이 때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침묵하였다. 그런데, 6절에서 "어떤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민감한 반응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8-10절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ㅇ르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는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는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잇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19. 예수님은 이 땅이 인간들을 위해 오신 이유가 있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환자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

20. 참고하면, 막 1장 17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랴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21.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병고침을 받는 것이 일차적인 이유가 아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받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이유이다.

22. 설령, 죄사함을 받은 후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23. 우리는 서기관들처럼 반응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진짜 이유는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것이다. 서기관들은 병고침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이어다.

24. 우리도 병고침에만 관심이 있고, 죄사함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에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면, 서기관들의 반응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자기 임의적으로 생각하는 잘못은 똑같이 저지르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25. 예수님은 분명히 아셨다. 병에 원인에는 질병적인 원인도 있지만, 죄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 해 주셨고, 그 이후에 병고침의 문제도 해결해 주셨다.
 11절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26. 예수님은 때론 병고침을 통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복음은 죄의 해결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엇다.

27. 예수님은 병고침을 통한 복음의 전파는 병고침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하셨을 뿐이지 이 또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다.

28.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직접 이 문제를 언급하신다. 예수님께서 병고치는 것과 죄사하는 권세를 사용하신 것은 모두 예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

29.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

30. 하나님이 영광 받으심은 세상에서 죄사함을 받는 권능이 일어날 때이다. 하나님의 영고아은 병고침에 대한 권능이 아니다.

31. 12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누가복음 5장 26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32.이 부분을 마태복음 9장 6-8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여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고아을 돌리니라"

33. 부디 우리가 무리들속에 함께 있다면, 병고치는 권능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사하는 권능으로 인해 예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4. 당신과 나에게 예수님이 왜 필요하십니까?

35.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10절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하시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 오셨다.

36. 그리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음심으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증명해주셨습니다.

37. 예수님이 친히 몸으로 사신 삶을 바르게 이해하고 믿을 뿐 아니라, 그 삶이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전부임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한 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8.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