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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April 23, 2013

한 날 묵상 - 막 1:40-45 <예수님의 병고침, 율법과 예수, 그리고 병고침 이후의 삶>

한 날 묵상 - 막 1:40-45 <예수님의 병고침, 율법과 예수, 그리고 병고침 이후의 삶>

1.  신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2.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잘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3.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하면서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4. 하나님을 알되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한다.

5. 야고보의 형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6.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지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7. 예수님은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롬1:3) 나신 분이시다.

8. 예수님은 이처럼 율법의 약속의 말씀따라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9. 이렇게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계시는 예수님을 율법에 정한데로 하지 않는다고 예수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0. 예수님은 결코 예수님은 율법 파괴자가 아니시다

11.예수님을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12. 예수님은 율법의 말씀을 지킬 뿐 아니라 율법의 완전한 완성, 즉 의미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 오셨다.  마태복음 5장 17-20절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3.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병든 나병환자를 고치시고(40절), 말씀하십니다.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44절)

14. 예수님은 율법에 순종하였다. 나아가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에 대해 온전한 해석자로 오셨습니다.

15. 율법을 주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삶을 옭아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는 도구로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16. 율법을 통해 죄를 발견한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사랑을 받게 됩ㄴ디ㅏ.

17. 그래서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로마서 13장

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8. 예수님은 율법에 억매여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대한 예수님은 질타합니다. 마가복음 7장 6-13절

6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9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1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13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19. 율법은 외식함이 아니라 사랑함입니다.

20. 예수님을 율법의 말씀을 지키시면서 사랑을 위해 율법이 주어졌음을 말씀하십니다.

21. 예수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율법아래 자유함으로 통해 사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율법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십시오.

22. 나아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자로서 그 사랑의 노래를 선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23.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45절)

24. 오늘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는 내가 받은 사랑의 노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게 오신 사랑을 노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5. 할렐루야!

===
40절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절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고 깨끗하여 진지라

44절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절

Tuesday, April 16, 2013

한 날 묵상 - 막 1:35-39 <새벽 한 적한 곳에서 기도 후 전도여행,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한 날 묵상 - 막 1:35-39 <새벽 한 적한 곳에서 기도 후 전도여행,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1. 하루를 시작하기 앞서, '너 거기서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2.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35절)

3. 삶으로 가르시시는 예수님의 교육이시다.

4. 우리가 할 수만 있으면, 아니 항상 최우선에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기억해야 하며, 또한 실천해야 할 것이다.

5. 오늘도 기도하러 가시는 잔잔한 예수님의 모습으로 내 자신을, 그리고 이른 아침 시간을 비추어 본다.

6. 예수님께서 능력을 덧입을 수 있었던 힘은 기도로부터 시작되었다. 늘 기도하였기에 사역에 능력과 힘이 있었다.

7. 오늘도 바쁘 움직이셔야 했던 예수님께 수 많은 무리들이 찾아온다.(36절)

8. 그러나 왠지 예수님은 이들을 만나주시지 않고, 가셔야 했던 길을 찾아 나선다.(38절)

9. 시몬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를 따라 나서며 말한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36-37절).

10. 예수님께서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 않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38절)

11.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왜 찾아온 이들을 만나주시지 않았을까?

12. 여기에는 두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13. 첫번째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있었으며, 그 오신 이유에 합당한 일들을 바삐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14. "거기서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38절)

15.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 오셨다. 복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셔야 했고, 깨어 있어야 하셨다.

16. 그렇기에 찾아온 이들을 만나 줄 수 없었다. 그들과 이야기하며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그 만큼 긴박하고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17. 그렇지만 여기서 하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18. 왜 찾아온 이들에게는 전도하지 않으셨을까?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을까? 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을까?

19. 여기서 우리는 앞서 찾아 온 이들을 만나지 않으신 두 번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20. 찾아온 이들의 관심은 무엇이었나?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얻고한 것이 있는것 아니었을까? 복음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마음에 곽찬 욕심이나 생각들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21. 찾아온 이들을 향한 이런 저런 생각이 내 머리를 두드린다. 나도 그들중에 있는 것은 아닌가?

22. 찾아온 이들은 항상 많았다(막1장 33절을 보라). 그러나 그들은 고침을 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고침을 받고 난 이후에는 그 어떠한 것도 없었다.

23. 예수님을 그렇게 찾아 온 이들을 떠나셔야 했다. 누가복음 4장 42절에 보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라고 말씀하고 있다.

24. 찾는 이들은 왜 예수님을 붙잡으려 했을까? 동네 이장을 시키려고 했을까? 자기들과 함께 한 평생 살기를 바라고 붙잡지 않았을까?

25.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에게는 가득한 것은 자기 욕심이었다. 예수님의 능력이었다. 그들이 복음만이면 족했다면 예수님을 떠나 보내야 한다.

26. 예수님은 떠나셨어도 복음은 여전히 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육신과 함께 함에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신 복음이 함께 함에 기쁨과 평안이 있는 것이다.

27. 이게 바로 예수님이 주신복음이 주는 유익이다.

28. 나는 지금 예수님의 현존만을 붙잡기 원하는가? 예수님은 눈에 보이시지 않지만, 예수님이 주신 복음만으로 만족하고 있는가?

29. 눈으로 보는 예수님만을 원한다면, 우리 또한 지금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들과 다르지 않다.

30. 우리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예수님 계속 붙잡아 두기 원하는 그들과 차이가 없다.

31. 예수님은 이 땅에 영원토록 죽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주기 위해 오셨다.

32. 그렇기에 지금도 우리는 복음만이면 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때론 예수님께서 다른 마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신다면 기꺼이 보내드려야 한다.

33.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눅5:43)기 때문이시다.

34. 예수님이 나만을 위해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만을 남겨두시고 떠나셔야만 합니다. 그래야 또 다른 동네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5. 그리고 예수님 떠나셨다고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마십시오. 지금 나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꿔 주신 복음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36. 복음만이면 족하십시니까? 아니면 복음만으로는 부족하여 예수님을 늘  내눈앞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37.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분명히 기억하기 원합니다.

38. 예수님의 능력만을 원하는 자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마음에 위로가 되니가 예수님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내어줄 수 없다고 말하는 자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39. 예수님을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40. 이 일을 위해 이른 새벽에 동이 트기도 전에 한 적한 곳에서 가셔서 기도하셔야 하셨고,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시고 다른 동네로 떠나셔야만 하셨습니다.

41. 우리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따라 그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행하셨던 일들을 따라 순종하기 원합니다.

42. 새벽 한 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후 다른 가까운 마을로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복음을 전하러 가는 오늘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43. 이 일을 위해 우리 또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44. 아멘!

===
35절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 => 예수님의 한 날 사역의 시작은 기도이시다.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시사, 거기서 하신 것은 기도셨다.
= => 이렇게 하는 것이 기도다. 말씀만 들어도 참으로 기도에 여유가 묻어나 있다. 기도하러 가시는 예수님의 잔잔한 모습이 그려진다.

36-37절 "시몬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 => 주를 찾아 온 자들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왜 예수님은 찾아오는 이들에게 가시지 않았을까? 그들을 왜 만나주지 않았을까?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의 관심은 무엇이었을까?

 복음이었을까?
 자기에게 좋은 것들이었을까? 예를 들어보면, 놀라운 기적? 병고침? 자기 배만 채우려는 욕심?

38절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 => 왜, 예수님을 찾는 자들에게 가지 않고,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셨을까?

36-38절을 고래해보면,
 예수님은 그 어떠한 것보다 "전도", 즉 복음을 전파하며 진짜 Good News를 전하는 일에 우선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해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복음이 되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이유는 복음을 위해서이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왜 찾는가? 무엇이 나를 예수님께서 나아가게 하는가?
 복음인가? 자기 채움인가?

참고) 요한복음 18장 37절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 =>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이 땅에 오시고,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는 삶아 사신 예수님. 내가 진리에 속해 있다면, 이 진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진리에 대해여 증언하는 음성이 들리는가?

39절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 => 온 갈릴리로 다니시면서 하신 일은 전도하시며 귀신들을 내 쫓는 일이셨다. 왜 찾아오는 이들에게 가서 전도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지 않으셨을까?



===


세계 최고의 워십 뮤직 호주 힐송 처치의Brian Houston(브라이언 휴스톤)

For This I was Born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삶, 교회, 목적과 이유, 헌신에 관한브라이언 휴스톤 목사의 탁월한 도전”

- 목 차 -
제 1부 :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 1. 그리스도의 이유를 위해서 태어나다
- 2. 그리스도의 이유와 지역교회

제 2부 : 이유와 비전
- 3. 당신의 비전과 그리스도의 이유
- 4. 이유가 중심이 된 연합
- 5. 영원한 비전

제 3부 : 이유와 소명
- 6. 구원과 부르심
- 7. 당신의 손에 있는 것을 사용하라
- 8. 힘든 수고가 주는 축복

제 4부 : 이유와 목적
- 9. 목적이 있는 삶
- 10.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 11. 번영과 목적

제 5부 : 이유와 대가
- 12. 내려놓는 삶
- 13. 확신안에 거하라
- 14. 헌신된 삶을 살아가기
- 15. 축복의 근원
저자소개
그의 아내 바비(Bobbie)와 함께 호주에서 가장 큰 교회 힐송 처치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21,000명이 넘는 성도들이 매주 출석하고 있으며 두 곳의 캠퍼스로 나누어 예배를 드린다. 힐송뮤직, 힐송 컨퍼런스, 힐송 인터내셔널 리더십 컬리지와 함께, 글로벌 사역을 펼쳐나가고 있 으며, 힐송 TV는 한국을 포함, 현재 180여 개국에서 방영되고 있다.

휫셔(Fisher)뮤직은 호주 힐송(Hillsong)뮤직의 공식 디스트리뷰터로서 1998년부터 힐송처치의 워십을 10년 넘게 국내에 소개해왔다. 처음 힐송의 음반들을 가져와 알릴 때의 감사와 흥분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래서 이번 휫셔북스를 통해 힐송 브라이언 휴스톤 목사의 저서 “내가 이를 위하여…”를 소개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아닐 수 없다.
많은 이들이 힐송하면 우선 워십을 떠올리지만 브라이언 목사의 말처럼 오늘날 힐송뮤직이 오랫동안 사랑 받는 그 은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다. 이 책은 세계 최고의 워십뮤직 이면의 믿음, 말씀과 영성의 깊이를 보여준다. 또 그의 목회 철학, 성장의 힘, 그리스도의 이유와 목적에 사로잡힌 헌신에 도전 받게 될 것이다. 목회자, 음악사역자, 워십리더는 물론 그리스도의 이유를 위해서 사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 유지연_ 휫셔뮤직그룹 대표
인생을 값있고 기쁘게 살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에게 ‘Why?’와 ‘For what?’을 질문하고 응답을 받는 것이라 배웠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이 두 가지 질문을 통하여 그분의 뜻을 발견하라고 훈련 받았다. 성경을 볼 때도 설교를 준비할 때도 나는 끊임 없이 이 두 질문을 한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 당혹스럽고 괴로우셨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고 기도하시며 거기서 위의 두가지 질문을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아셨다. 그래서 그 모진 고문과 협박의 불의한 재판가운데서도 “내가 이를 위하여(For this cause) 세상에 왔나니”라고 말씀 하실 수 있었다. 브라이언 휴스톤 목사는 그 이야기를 탁월하게 서술해 놓았다. 이책 과 함께 당신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질문하여 예수님처럼 담대하게 “내가 이를 위하여…”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문희곤_ 높은뜻 푸른교회 담임목사
이 혼돈의 세상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번영과 성취가 필요하다면, 브라이언 휴스톤 목사와 함께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박기범_ 어노인팅 대표
목적이 함께하는 삶은 늘 내 마음에 붙어 다니는 주제다. 브라이언 휴스톤 목사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이유가 당신의 세계에 스며들 때 삶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자세히,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 조이스 마이어_ 베스트셀러 저자, 성경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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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참고할 것.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진중권의 아이콘] 개시(開示)로서의 진리


아방가르드의 성공 혹은 실패에 대하여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요한복음 18:33-38)


신약성서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빌라도가 예수와 대면하는 장면이리라. 심문의 마지막에 빌라도가 던진 질문은 사뭇 냉소적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Quid est veritas?) 예수는 이 물음에 답하지 않았지만, 어느 호사가가 철자의 순서를 바꾸는 파자(anagram)를 이용해 물음 속에서 답변을 끌어냈다. “앞에 서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Est vir qui adest). 예수, 그 사람이 바로 진리다.


‘진리’에 대한 두 관념의 충돌



예수와 빌라도의 만남에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충돌을 볼 수 있다. 가령 빌라도는 로마법의 절차에 따라 먼저 피고의 혐의를 나열한 뒤 예수의 변론을 기다린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예수가 로마인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조목조목 따져가며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빌라도의 게임에 들어가지 않는다.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 하시는지라.” 예수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신이 정하신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이에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빌라도는 적당히 매질이나 해서 풀어주려 한 모양이다. 예수를 채찍질한 뒤 그를 대중 앞으로 이끌어 매질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을 보여주며 외친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Ecce homo) 하지만 성난 군중은 매질로 만족할 수 없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치며 심지어 빌라도를 협박하기까지 한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두려움을 느낀 빌라도는 예수의 운명을 대중의 뜻에 맡기며 자신은 대야의 물에 손을 씻는다.


여기에서 보는 것은 ‘진리’에 관한 상이한 두 관념의 충돌이다. 헬레니즘의 진리와 헤브라이즘의 진리. 흔히 ‘진리’라고 하면, 우리는 명제 혹은 진술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빌라도가 자신의 법정에서 밝히려 했던 것도 그런 종류의 진리였으리라.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내건 혐의들이 과연 사태에 부합하는가?’ 하지만 예수 앞에서 빌라도가 구하는 진리는 사소한 것이었다. 예수의 진리는 오늘날 전세계에 퍼져 있는 기독교회의 존재를 통해서 입증된다.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해 내려오는 새로운 삶의 원리. 그것이 빌라도의 것을 압도한 예수의 진리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진리는 ‘명제진리’와 ‘사태진리’로 구별된다. ‘명제진리’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인식론적 진리, 즉 참인 명제가 갖는 속성으로서 진리다. ‘사태진리’는 그와는 차원이 달라서 가령 예수의 진리처럼 논증이나 증명 없이 선포된다. 선포(kerigma)로서 진리는 존재론적 진리다. 근원적인 것은 이 사태진리이고, 명제진리는 거기에서 파생된 것에 불과하다. 수학을 예로 들어보자. 어떤 수학적 명제의 올바름은 정리를 이용해 증명된다. 정리의 올바름은 공리를 이용해 증명된다. 그렇다면 공리의 올바름은 어떤가? 그것은 증명없이 옳은 것으로 선포되지 않는가.


사태로서 진리가 일어나는 데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예술, 사유, 그리고 국가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세 가지가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보다 근원적인 것이다. 시인과 철학자가 세계를 열어서 보여주면, 과학자들은 그렇게 열린 세계 속으로 들어와 개념적 정리를 할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국가를 세우는 것이 곧 진리라는 생각이다. 하이데거가 강의실에서 이런 얘기를 하던 30년대 초반, 강의실 밖에서는 나치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한때 나치운동이 바로 그런 진리를, 새로운 민족적 삶의 세계를 세우는 일이라 믿었다.


급진주의자라면 국가 대신에 혁명을 들 것이다. 조례의 올바름은 법률로 판단하고, 법률의 올바름은 헌법으로 판단한다. 그럼 헌법의 올바름은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기존 헌법의 올바름을 판단하는 것은 법률적 과제가 아니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혁명’이다. 혁명으로 새 세상이 열리면, 사후에 법률가들이 들어와 새 헌법의 정신에 맞추어 법률과 조례를 만들 것이다. 진리론의 좌익적 버전에서는 혁명의 전위(‘당’)가 곧 진리가 된다. ‘당의 무오류’라는 스탈린주의 원칙은 어떤 면에서는 필연적인 것이다. 공리를 향해서 자신의 올바름을 증명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잖은가.


견자(見者)의 편지



사건으로서 진리는 ‘종교’나 ‘정치’만이 아니라 예술에도 존재한다. 랭보는 견자(‘voyant’)에 관해 이야기한다. “내가 말하노니, (…) 시인은 모든 감각의 기나긴 거대한 이성적 일탈을 통해 자신을 견자(見者)로 만들어야 한다. 모든 형태의 사랑, 고통, 광기. 그는 자신을 탐색한다. 그는 자기 안의 모든 독약을 소진하여 그 속에서 오직 핵심만을 건져낸다. 모든 신념과 모든 초인적 힘을 요하는 말할 수 없는 고문. 그것을 통해 그는 인간들 중에 인내심이 있는 자, 위대한 범죄자, 저주받은 자-그리고 위대한 학자가 된다. 그는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랭보의 ‘견자’는 유대인들이 ‘선지자’라 부른 것의 예술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견자, 즉 보는 자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미래를 보며, 나아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그 미래를 비로소 존재하게 만든다. 시인은 “진보의 배가자”로서,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용감하게 몸을 던진다. 당연히 거기에는 커다란 위험이 따른다. “그가 방황하다가 결국 제 비전의 지성을 잃고 말지라도, 그는 이미 그 비전들을 보았다. 그로 하여금 들어보지도 이름할 수도 없는 것들 속으로 뛰어들다가 죽게 놔두라. 다른 무서운 일꾼들이 나타나, 다른 이가 쓰러진 그 지평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다.”


랭보의 ‘견자의 편지’(1871)는 훗날 ‘아방가르드’라 불릴 운동의 전주곡이 된다. “새로운 세대는 제 조상을 저주할 자유가 있다.” 여기에서 숨막힐 듯이 답답한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며 강림할 새로운 예술,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를 읽을 수 있다. “시는 더이상 행동에 리듬을 맞추지 않을 것이다. 시는 앞서 나갈 것이다.” 이 말은 시야말로 그 어떤 행동에도 앞서 세계를 열어주는 진리라는 시인의 자의식을 보여준다. 20세기의 아방가르드 예술을 추동한 것은 바로 이 자의식이었다. 그것은 죽어가는 사회 속에 새로운 진리를 일으키려는 운동이었다.


아방가르드는 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와 손을 잡았으나,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진리의 원천이 둘일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아방가르드 운동은 앞서 나가지 못하고, (나치당이나 전위당의) 행동에 리듬을 맞춰주는 신세로 전락한다.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정치적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미학적으로는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20세기 초에 그들이 가졌던 예술적 비전은 오늘날 생활세계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해주고, 없었던 것을 있게 해주는 개시(開示)로서의 진리는 여전히 필요하다. ‘견자의 편지’는 아직도 수신자를 찾는다.


Tuesday, April 9, 2013

한 날 묵상 - 막 1:21-34 <예수님의 권위 - 가르치심과 고치시는 사역을 통해서 드러나다>

한 날 묵상 - 막 1:21-34 <예수님의 권위 - 가르치심과 고치시는 사역을 통해서 드러나다>

1. 예수님이 이 땅에 분명한 사명을 가지고 오셨다. 그 사명은 "복음"이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며 선포하는 사명을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다.

2. 예수님은 복음 사역을 위한 사역을 위해 제자들을 부르신 것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친히 이 땅에서 복음을 위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3. 예수님의 복음의 사역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가르치심, 둘째는 치유하심, 셋째는 전파하시는 사역이다.

4. 예수님의 복음을 위한 전파하심의 사역은 두 가지로 형태로 나타난다.

5. 첫째는 가르치시는 사역을 통해서, 둘째는 고치시는 사역이 복음을 전파하는 통로가 되었다.

6. 오늘 본문도 가르치심과 고치심의 사역을 계속하셨다.

7. 예수님의 일차적으로 하신 일 "가르치시매"(21절)이다.

8.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위해 나아가실 때 "고치심"의 사역도 병행하신 것이다. 

9. 결국 예수님의 주변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23절) 있는 것을 보게 된다.

10. 예수님 주변에 이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참으로 많았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사역의 핑계로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11. 그런데 이러한 사역을 행할 때 사람들에게 나타난 어떠한 특징 있는 반응을 보게 되는데, 바로 "예수님의 권위'이다.

12. 12절에서 가르침을 받은 그들이 예수님의 교훈을 듣고 난 후 반응을 보니, 예수님의 가리침은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12절)

13.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위는 세상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 세상 세기관들은 지식이나 율법에 지식이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의 가르침을 뛰어 넘었다.

14. 바로 이게 복음의 능력이다. 복음에는 성령의 역사하는 힘이 있다. 세상의 지식과 학문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다. 복음에 그런 힘이 있는 것이다.

15. 이는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가르칠 때 드러나게 되어 있다. 복음을 전도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결국은 복음의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전도 대상자들에게 권위있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16. 반대로 우리에게 어떠한 특별한 전도 방법이 없다하더라고 복음만을 제대로 전하면 우리의 방법이나, 노력이 아닌 복음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 대상자들이 권위있는 교훈을 들을 수 있다.

17. 물론 권위있는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그들이 전부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서기관들도 "권위 있는 자"로 예수님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8. 그렇지만, 우리는 복음에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을  정확히 제대로 전파할 때 놀라운 능력이 그 안에 역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19. 나아가 예수님의 권위는 고치는 사역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20.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27절)

21. 이는 예수님이 품으신 사랑의 마음과 그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병고침 받은 사역이 일어날 때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2. 27절 말씀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물어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3.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교훈"은, 앞서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훈"과는 다른 뜻이다. 그러나 의미는 같다.

24. 21절에서 "교훈"은 가르침의 내용속에서 드러나는 교훈이며, 27절에서 "교훈"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교훈"이다.

25. 이 둘은 차이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같다. 가르침과 사랑 모두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26.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며, 예수님의 권위를 드러난 삶을 살아가야 한다.

27. 그리고 예수님의 보여주신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28. 진정한 복음을 전하든지, 또한 진정한 사랑과 섬김을 행하던지

29. 우리가 이 둘을 예수님의 보여주신 본을 따라 행할 때, 예수님의 권위가 이 땅 가운데 세워질 뿐 아니라, 가르침을 듣는 자들이나 사랑과 섬김을 받는 자들이 복음을 깨닫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30. 예수님을 계속해서 가르침의 사역과 더불어 병고치는 사역을 하셨다.
  29-31절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
  32-34절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옴. 온 동네가 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31. 우리 주변에도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던지, 아니면 도움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으로 그들을 도와주던지, 어느 것이든지 좋다.

31. 그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도록,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우리의 삶을 단순화 시킬 필요가 있다.

32. 우리는 여기서 아주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전도한다는 핑계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하는 것이다.

33. 우리는 복음을 가르치는 것 뿐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사랑의 손길을 통해 진정 예수님의 권위, 복음을 그들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일에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34. 오늘도 나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석구석이 굳모닝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35. 좋은 아침입니다. 즐거운 한날입니다. 오늘 이러한 복음이 이 땅 가득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한 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36. 할렐루야!

===
* 예수님은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1) 가르치는 사역 - 귀신들은 순종. 성령 충만한 자들을 알라.
 참고 행 19:8-20 ; 행 19:5


Tuesday, March 26, 2013

한 날 묵상 - 막 1:16-20 <사람을 낚는 어부가 필요하시다>

한 날 묵상 - 막 1:16-20 <사람을 낚는 어부가 필요하시다>

1.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2.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일에 관하여 앞서 막 1:14-15절 말씀을 통해서 회개한다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회개는 주님께 돌아가는 것일 뿐 아니라, 나아가 주님이 주신 사명이 있음을 기억하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진정 회개한 사람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3.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하여, 회개의 선포를 위하여 사람을 부르시고 찾으시는 본문이 오늘 본문 1:16-20절의 말씀입니다. 

4. 16절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5. 예수님은 사람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길을 지나가시다 시몬과 안드레를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보시고 반응을 하셨다는 의미는 예수님은 사람을 찾으시는 일을 마음에 늘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예수님이 시몬과 안드레의 그 어떤 것을 보시고 그들을 주목한 것이 아니다. 이는 예수님이 늘 마음에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마음에 품고 계셨는데, 그 때에 그들이 예수님의 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7. 예수님은 지금도 사람을 찾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들과 함께 교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8. 하나님의 기다림과 예수님의 찾으심에 우리는 이제 순종의 반응을 하면 됩니다. 말씀에 자신의 것을 버리고 예수님이 허락하신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기로 결단의 길을 걸으면 됩니다. 

9. 2013년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이 감당하셨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해 봅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으실 수 있었을까? 과연 무엇이 예수님을 그 고통의 길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순종하게 하셨을까? 하나님 아버지의 부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제된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10. 하나님의 말씀과 부르심에 대한 예수님의 순종은 우리의 순종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과 고통의 길일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이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기쁨과 감사는 대부분이 영적인 부분일 경우가 많습니다. 육체적인 부분은 견디기 힘든 고통과 고난의 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함과 교제함으로부터 오는 평안과 기쁨으로 인해 육체적인 고통 또한 능히 이길 수 있게 됩니다. 

11. 예수님께서 어부들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17절 "나를 다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2. 예수님의 부르심에 어부들을 반응을 하게 됩니다. 18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3. 어부들의 반응은 "곧", "즉시로" 순종입니다. 주신 말씀에 영적으로 즉시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계산하지 않는것입니다. 우리가 즉시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14. 즉시로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환경과 상황을 계산하기 시작하면 순종하기란 더욱 어려워집니다.

15. 본문에서 두 번의 부르심이 나옵니다. 16절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와 19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입니다.

16.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어부들의 반응은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의도는 즉시 순종입니다.  18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20절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애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17. "곧" "즉시" 순종입니다. 즉시로 순종해야 오직 주님이 주신 사명에 집중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20절에서 보는 세배대의 아들과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의 부르심은 아버지 세베대를 버려 두고 가야 하는 순종입니다. 그 뿐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의 생계수단이었던 배도 버리고 가야 할 순종입니다.

18. 이러한 순종을 할 수 있는 영적인 인도하심은 "곧", "즉시로"하는 순종입니다. 자신의 생계로 계산하지 않고, 부모도 계산하지 않는 순종입니다. 

19. 그렇다면, 즉시로 순종하지 못하여 이것 저것 계산하기 이미 시작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20. 이때는 예수님의 부르심의 말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즉 기도함으로 부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부르심에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더욱 마음에 붙잡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21. 다시 15절말씀으로 돌아가,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셔서 이 땅에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22. 이 말씀의 선포를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고, 지금 우리도 부르고 계십니다.

23. 사람을 낚는 어부가 필요한 이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24. 우리에게 있어서 이 세상 그 어떤 것이 이보다 더 거룩한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25. 이 일에 순종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6. 할레루야!

Thursday, March 14, 2013

한 날 묵상 - 막 1:14-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한 날 묵상 - 막 1:14-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1. 예수님의 가르침? 선포? 이는 상당히 단순합니다. 특별히 어려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2.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 선포를 받아들이고 따라가는 삶은 단순하지 않다는 걸을 삶에서 알아가게 됩니다.

3.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4.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선포,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였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5.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 신 후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6.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 메시지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7. 14절에서 세례 요한이 잡힌 후 갈릴리에 오셔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가 15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8.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때가 찼다"고 말씀하십니다. 

9. 시간적으로 다 되었는데, 무엇을 위한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일까요? 

10. 이는 이사야 61장 1-2절 말씀의 성취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11.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는 앞서 살핀 막 1장 9-11절 말씀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 예수님의 감당하셔야 할 사역은 이제 분명해 졌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13. 하나님 나라은 바로 이런 나라입니다. 가난한 자가 아름다운 소식을 듣게 되며, 마음이 상한 자가 고침을 받게 되며 포로된 자가 자유를 얻게 됩니다. 갇힌 자들은 놓임을 받게 됩니다. 모든 슬픈자가 위로를 받게 됩니다. 

14. 하나님 나라는 이런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제 시작되었습니다.

15.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에 말씀을 듣는 자들은 반응을 해야 한다. 

16.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참 평안와 위로를 누리기 위해서 위해서 회개하며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17. 그렇다면, 회개하며 복음을 믿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8.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회개는 주님께 되돌아가는 인생(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처럼,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19. 되돌아가야 회개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회개는 여기까지 있지만, 예수님의 회개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20. 되돌아와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이를 잘 감당함으로서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진 것이 됩니다.

21. 예수님의 가르침에 우리의 이해가 이 부분까지 가지 못해서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에 믿음의 삶이 복잡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22. 결국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면서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온전히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몫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 일을 잘 순종하려고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단순한 삶을 이해하게 됩니다.

23.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을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24.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릴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꿈꾸는 나라를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내가 누리는 은혜를 모든 이들이 함께 누리는 일에 대한 부르심)이 있음을 기억하고 매일의 삶에서 잘 감당하는 것이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삶이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이 목표와 방향앞에 아주 단순한 삶이 되게 됩니다. 

25.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사람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을 통해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26. 오늘 한 날도 예수님이 선포하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이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가장 단순한 삶임을 기억하고 삶으로 순종해가는 한 날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7. 한 날의 삶이 올바른 회개의 삶이 되기를 소망하며....

===
14절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절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5절 "때까 찼고"
=> 이사야 61장 1-2절의 성취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
* 이방에 빛을 4장 예수님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종말론적 백성을 모으시다
p178-181.
 예수님은 그분의 청중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촉구한다. 이에 응답한 이들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백성이라는 신분에 들어간다. 현대 사회에서 믿음의 개념은 계몽주의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믿음을 단지 지적인 동의라고 생각하고, 회개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죄에 대한 유감을 뜻하는 것으로 개인화시켜 왔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본래 명령을 참으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분의 상황 속에서 그 명령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회개하라는 요청은 구약의 배경, 특히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라는 언어를 배경으로 삼는다. 신명기 저자는 마지막 날에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며"(신30:2) 이스라엘이 번영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심판 뒤에 오는 것이다(신29:29).
 회복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분의 선교를 위해 섬기고 그분을 온 마음으로 사랑할 때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우상숭배적인 길을 떠나서 
 온 마음을 다해 여호와께 돌아오고
 그분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헌신함으로써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해야 한다.

예수님의 회개하라는 요청에서 발견되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그분은 사람들에게 예수님 자신에게 완전한 충성을 바침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요구하신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예수님께 헌신하는 것은 회개와 함께 "이스라엘의 신이 예수님 자신의 사역에서 결정적으로 행동하고 계신다는 믿음을 요구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급진적이고 철저한 결심"을 요구한다. 회개하고 믿으라는 요청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 전체를 예수님께 드리고, 자신의 집과 가족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다른 모든 의무를 제쳐 놓을 것을 요구한다(눅 9:57-62).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심지어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마 10:34-39). 다른 모든 충성, 헌신, 관계, 의무는 매우 귀 중한 보화와 진주, 곧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포기해야만 한다(마13:44-46). 

 복음서와 1세기 유대교 안에 나타난 제자도 개념의 차이는 이러한 부르심이 얼마나 근원적으로 제자들을 예수님의 인격과 결함시키는지 보여준다.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는 제자도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을 잘 비교하여 보여준다.

 유대교에서 율법 혹은 토라는 랍비와 제자 관계의 중심에 서 있다. 랍비의 권위는 토라에 관한 그의 지식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 그는 율법의 자리를 차지하고 최고의 충성을 그의 인격과 사명에 바치도록 요구한다. 게다가 유대교에서 제자도는 단지 랍비와 같이 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랍비의 제자가 토라를 배우고 익힐 때, 그는 그 자신이 선생이 될 순간을 바라보며 노력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결코 랍비가 되는 일을 "마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예수님의 추정자이지 자제자로 남아 있다. 게다가 유대교에서 랍비의 제자들이 단지 학생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종으로서 그분의 위대한 가르침과 통찰로부터 지적인 혜택을 입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권위에 복종하고 그분을 그들의 여호와로 섬긴다. 

 주목할 점은 유대인을 위해 쓰여진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적들이 그분을 향해 "랍비"와 "선생"으로 불렀지만,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을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다만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 할 때 "랍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마 26:25, 28을 보라). 

 마지막으로 유대교의 가르침은 제자도의 목적이 예수님의 것과 다르다. 유대교에서 제자는 충실하게 랍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있어야 하고 그분의 하나님 나라 선교에 참여해야 하며, 그분을 증거해야 한다. -그분이 누구이고 그분이 성취하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막3:14-15)

 마가복음 3:14-15절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서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그들은 단순히 배우는 공동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마지막 때에 예수님의 회집하시는 선교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메시아적 백성의 선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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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rch 12, 2013

한 날 묵상 - 막 1:8, 12-13 <거듭남의 비밀, 물세례만 받았는가? 성령세례도 받았는가? 성령시험과 사탄의 시험을 통해 알 수 있다>

한 날 묵상 - 막 1:8, 12-13 <거듭남의 비밀, 물세례만 받았는가? 성령세례도 받았는가? 성령시험과 사탄의 시험을 통해 알 수 있다>

1. 개인적으로 스포츠를 좋아합니다. 공으로 하는 종목들은 거의 좋아한다고 보면 됩니다. 스포츠 경기를 하거나 보거나 직접 하는 것 다 좋아합니니다.

2. 물론 잘 하지 못하지만, 스포츠 경기에 재미있게 참여하려고 합니다. 때론 함께 하는 팀원들이 저를 어려워 할 때도 있습니다. 나이도 많고 목사라고 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3.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지난 주에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농구스타 선수 출신이며서 감독이었던 강동희 감독이 농구 경기에서 승부조작으로 구속된 사건입니다.

4. 스포츠 경기는 항상 공정해야 합니다. 필드에서 뿐아니라 어떠한 외풍에서도 공정하게 진행되어 경기 결과를 가져야 합니다.

5. 그런데 가장 공정해야 하는 스포츠 경기에서 외적인 영향에 의해 승부가 조작되었다는 것을 실로 충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스타 선수 출신이며 감독인 사람이 그 사건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 더욱 큰 충격이었습니다.

6. 참으로 좋아한 선수이며 감독이었는데 말입니다.

7. 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을까?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도 그러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8.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참으로 정직하고 진실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적어진 것(기독교인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의미입니다)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리고 다른 사람이 생각하기에도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빚어져 가야 합니다.

9. 그런데, 그렇지 못할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까요?

10. 마가복음 1장에서 보면, 오늘 본문에 앞서 예수님께서 세레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중생했다는 의미입니다. 거듭났다는 말입니다.

11. 그런데, 거듭난 사람들이 여전히 죄 아래 살아간다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모두가 그렇습니다.

12.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13절에서 보듯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음으로서 그 유혹에 노출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13. 거듭난 사람이라도 이처럼 죄의 유혹에 노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생애를 끝내는 그 순간까지 이와 같은 유혹은 계속될 것입니다.

14. 그래서 결코 우리는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말씀안에, 진리안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15.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유혹은 두 가지입니다.

16. 첫째는 성령의 시험입니다. 오늘 12절에 보면,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고 말씀합니다.

17. 이는 성령께서 광야로 예수님을 이끌었다는 의미입니다. 광야는 어디입니까? 세상입니다. 세상은 어떠한 곳입니까? 사탄의 유혹이 득실 거리는 곳입니다. 13절에서 보면,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8. 우리가 다른 복음서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사십 일 금식후에만 사탄이 유혹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마가복음 그렇게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19. 사십 일 동안 광야에 있을 때에도 사탄의 유혹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결정적 세 가지것을 준비했는데, 그 내용이 바로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광야 40일 이후의 시험입니다.

20. 이처럼 성령도 우리를 시험합니다. 야고보서에서도 그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3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브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참고로 약 1장 12-18절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

21. 저는 성령의 시험을 가리켜 은혜 뒤에 찾아오는 고약한 시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2. 은혜 뒤에 우리가 더욱 멋진 모습으로 믿음의 전성기를 누리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은혜뒤에 찾아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23. 그렇다면, 왜 은혜 뒤에 고약한 시험이 찾아올까? 그것도 성령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일까요?

24. 저는 여기에서 몇 가지 성령의 시험이 주는 유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24. 첫째는 성령이 충만할 때 어떠한 시험을 만나도 이길 수 있는 내성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이김을 주고자"함입니다. 승리를 하는 사람이 계속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이김을 하는 사람이 어떤 유혹에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할 때 이김의 은혜를 체험하도로 하기 위함입니다.

25. 둘째는 "훈련을 하고자"함입니다. 믿음의 훈련, 신앙 성숙의 훈련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의 순간, 은혜의 순간에도 훈련은 계속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성령을 사모하고,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정점은 우리가 살아 있는 이 순간 찾아오지 않습니다. 계속 해서 훈련을 통해 믿음은 성숙해져가야 합니다. 교만하지 않기 위한 훈련의 시간이 되는 거죠.

26. 셋째는 성령의 시험 또한 이김으로 통해 "궁극적으로 은혜의 자리로 이끌고자"함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27. 그런데 이러한 성령의 시험 말고도 자신 스스로의 죄의 유혹을 받는 경우도 참으로 많습니다.

28. 내 자신을 경험을 나열하지 않아도, 물론 그렇게 할 때 참으로 많은 먹과 종이가 필요하겠지만요. 우리는 스스로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29. 왜 그럴까요?

30. 스스로 넘어지는 경우는 가짜 세례를 받은 사람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이 부분은 조심스러운 말씀이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31. 오늘 본문 8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나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32. 우리는 물세례만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33. 어떤 사람들은 물 세례만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마가복음은 8절의 말씀을 구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8절 말씀을 이유없이 기록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34. 우리가 물세례를 받고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를 주시기 위한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35. 우리가 물세례를 받고 성령세례를 받으면 궁극적으로 예수님처럼 사탄의 시험, 성령의 시험을 잘 통과할 수 있습니다.

36. 혹 우리가 자꾸 이러한 시험에 넘어지고 있다면, 자기 자신 스스로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떻게요? 나는 물세례만을 받은 사람인가? 성령 세례까지 받은 사람인가?

37. 자꾸 나에게 시험이 찾아오십니까?

38. 이는 두 가지 이유입니다. 성령 시험이든지, 사탄의 시험입니다.

39. 그런데 이 시험에 자꾸 넘어지십니까?

40. 그럼 문제가 있습니다. 물세례만 받은 것이 아닌지? 진정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인지? 자문해 봐야 합니다.

41. 오늘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함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승리하였으면 합니다.

42. 신앙은 이처럼 살아있는 숨쉬는 것입니다.

43. 오늘 신앙이 춤추는 은혜를 기대합니다.

44. 할렐루야. 아멘.

Saturday, March 9, 2013

한 날 묵상 - 막 1:9-11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러 오시다>

한 날 묵상 - 막 1:9-11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러 오시다>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 예수님의 행적은 때론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있다.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는 일들을 하셨다는 의미이다.

2. 세례는 상징적으로 죄를 씻는다는 의미가 있다. 자신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 세례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죄인이기에 세례를 받아야 한다.

3. 그렇다면, 예수님은 세례를 받지 않으셔도 된다. 당연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으셨다.

4. 이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왜?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는가? 예수님의 세례를 달리 생각해 보면, 세례에 대해 상징적이면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5.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6. 예수님의 세례받으심이 말씀하는 첫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이다. 마태복음 3장 15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하럭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7.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의"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성과 신성을 모두 지니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게하심을 통해서 인성을 확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9.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것임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라기 4:5)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태복음 11:13~14)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마태복음 17:10~13)

10.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서는 예수님은 반드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셔만 했습니다.

11. 그랬기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11절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보시고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12. 이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의 출발점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13. 우리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부르심의 출발점에 서기 위해서는 당연히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14. 세례를 받아야 하는 참으로 놀라운 일은 사도행전 8장 26-40절에서 나오는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대화의 마지막 부분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15. 행 8:36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16. 예수님의 제자로서 기쁘게 부르심의 길을 가기 원한다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내시처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우리도 참으로 기쁘게 주의 길을 예비하러 떠날 수 있습니다.

17. 세례에는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며 우리 또한 기쁨으로 우리의 길, 주님이 주신 부르심의 길을 갈 수 있게 됩니다.

18. 참으로 세례를 많이 받는 교회는 복된 교회입니다. 세례식은 기쁨이 차고 넘치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세례를 받는 사람도 기뻐하고, 세례에 참여하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는 시간입니다. 그렇기에 세례를 많은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기쁨이 넘칩니다.

19.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교회마다 이처럼 세례의 기쁨의 은혜가 자주 있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20. 예수님의 세례가 말해주는 세 번째 의미는 삼위 일체 하나님이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21.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10-11절을 보면, "성령이 비둘기 깥이 자기에게 내려오심",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라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 성령님,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22. 이처럼 우리의 세례를 받는 시간은 삼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시간이면서 기뻐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세계가 얼마나 고귀한 시간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23. 예수님의 세례에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세례가 의미하는 것 또한 이와 같습니다.

24. 우리의 세례식이 예수님의 세례처럼 되기 위해 닮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25. 눅3장 21절에 보면,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6. 세례 받으시고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27. 세례를 위한 기도뿐 아니라, 세례 이후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더욱이 세례를 통한 고백이 삶에서 지속적 행동으로 고백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28. 오늘도 다음주에 있을 세례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또한 나의 지난 날의 세례를 돌아봅니다. 아울러 세례 받은 이후의 나의 오늘의 시간 또한 점검해 봅니다.

29. 기도함으로 세례의 참된 의미가 날마다 삶속에서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30. 할렐루야. 아멘.

==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세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절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
열방의 빛 p342.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편입이며 기독교 공동체로 들어가는 길이다. 세례는 우리로부터 거리 두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간격이 교회적인 형태라고 말해 줄 것이다. 세례는 버다 큰 사회적 환경 가운데 '거류민'으로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에 나타난 사회적 환경으로부터의 간격은 단순히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교회론적이다."

Thursday, March 7, 2013

한 날 묵상 - 막 1:6-7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의 일상>

한 날 묵상 - 막 1:6-7 <주의 길을 예배하는 자들의 일상>

point -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의 일상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1. 우리가 매일 하는 것들 중에서 먹는 것, 입는 것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다.

2. 나는 오늘도 아내가 무엇을 먹을까에 대한 고민에 빠진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가족을 위한 아침 준비, 아이들의 점심 그리고 저녁에 무엇을 먹어야 할 것까지 계속되는 먹는 고민을 더 이상 하지 않을 수 없을까?

3. 나는 오늘 집을 나오면서 무엇을 입어야 할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특별히 옷을 잘입는 편은 아니니 그다지 많은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져 옷에 손이 가는 것으로 입고 나온다. 그런데 오늘은 내 옷을 본 아내가 말을 한다. "옷이 좀 커 보이네요. 오늘 입고 있을 때 마다 이렇게 잘 관리하면 되겠네요"

4. 의, 식, 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이다. 일상이며, 아주 중요한 삶의 요소들이다. 옛날보다 지금이 더욱 그렇다.

5. 그래서 가끔 우리의 생각이 이러한 문제들에 너무 집중할 때가 있다. 가장 필요하며 일상적이기에 그 어느것보다 우선시 되는 경우가 있다.

6. 그렇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이 보다 더 먼저인 것이 분명히 있다. 바로 부르심이다. 일상의 이러한 것 또한 부르심을 위한 것들이다. 부르심이 존재하기 위해 일상의 것들이 필요한 것이다.

7. 나의 지난 날을 돌아보니, 깨닫는 아쉬움들이 있다. 나는 얼마나 일상의 것보다 부르심에 더욱 집중했는가? 아내과 함께 한 지난 일들을 돌아보니 아내는 참으로 이러한 일상들을 놓치지 않으면서 부르심에 집중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 왔음을 기억하게 된다.

8. 난 그렇지 못함이 솔직한 고백이다.

9. 우리가 부르심에 집중하기 우해서는 우리의 삶을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다. 목표가 많으면 하나의 어떤 목표도 이룰 수 없다. 목표를 단순화 할 필요가 있다.

10. 세례 요한은 그의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해 그의 삶을 아주 단순화 시켰다.

11. 삶을 복잡하게 할 여러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서 그는 부르심에 집중하였다.

12. 먼저 아주 삶이 간단했다. 입는 것, 먹는 것 모두가 간단한 삶이었다. 잘 먹으려 하지 않았고, 많이 먹으려 하지 않았다. 단 건강을 위해 먹었을 뿐이다. 잘 입으려 하지 않았고, 멋지게 보이려 하지 않았다. 단, 건강을 위해 입었을 뿐이다.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 건강이란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였던 것이다.

13. 나의 삶도 이처럼 단순한 명제 앞에 서 있었으면 한다. 부르심에 한 번 더 순종할 수 있는 삶의 단순함이 나에게 필요하다.

14. 또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세례 요한의 자세는 겸손한 왕을 섬기는 종이 되었다. 겸손한 왕을 섬기는 종들은 겸손한 왕처럼 역시 겸손해야 한다.

15.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7절)

16. 일상에서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한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겸손의 상징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진정한 겸손은 삶에서의 성육신이었다.

17. 예수님은 일상의 삶에서도 한 인간으로서 사람들을 섬기셨다. 하늘을 버리고 땅으로 오신 성육신의 삶을 넘어, 이 땅의 바닦으로 내려 가셔서 진정한 섬김의 삶을 몸으로 실천하셨다.

18.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그의 제자들 또한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닮아야 한다. 우리가 찾아가야 할 섬김의 자리는 많다. 세상 사람들은 가지 않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19.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섬김의 삶은 죄인과 세리의 친구이셨다. 그 당시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가기를 원치 않았던 사람들에게 찾아가셔서 친구가 되셨고 함께 식사를 하셨고, 함께 대화하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필요를 따라 병고침등 필요를 채워주셨다.

20. 오늘 세상의 이목을 전혀 받지 않는 곳은 너무나 많다. 세상은 그러한 곳에 더 이상 관심이 없다. 오직 그들을 이용하려 할 뿐이다. 그들의 친구는 누구인가? 누가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는가? 바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그들의 제자들인 우리가 아니겠는가!

21. 우리의 일상의 삶의 원리 세 번째는 예수님의 목표와 나의 목표는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이 아니다. 교만하지 말자. 단지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

22. 세례요한은 자신의 부르심을 알았다. 물 세례와 성령 세례가 결코 같을 수 없나는 것임을...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사역과 자신의 사역이 구분되어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23. 자신의 사역을 잘 아는 것이 공동체에서 꼭 필요한 구성원들의 자세이다. 자신의 역할을 넘어서지도 않아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잘 감당해야 한다.

24.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인간이시다.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이제 성령님이 이 땅에서 역사하신다. 나를 도우시기 위해서이다.

25. 나라는 존재는 예수님의 은혜안이 있는 것이며, 성령의 함께 예수님이 남겨주신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26. 나는 결코 예수님이 아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일 뿐이다. 그것만으로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27.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오늘 나의 일상의 삶이 오직 예수님의 부르심을 위한 가장 합당한 자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28. 오늘도 나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기 원한다.


Thursday, February 28, 2013

한 날 묵상 - 막1:4-5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삶이란 그가 오실 길은 곧게 하는 삶이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이라>

한 날 묵상 - 막1:4-5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삶이란 그가 오실 길은 곧게 하는 삶이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이라>

1. 3절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 하고 있는 것처럼, "기록된 것과 같이"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따라 순종하며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3.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삶이란? 주님이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삶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따라 순종하는 삶입니다.

4. 쉽고 정직하게 말하면, 세례 요한은 "기록된 것과 같이"의 삶을 살아갔을 뿐 입니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더하거나 빼거나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5. 세례 요한이 하고 있는 일을 본문에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도 그처럼 똑같이 하면 됩니다. 더하거나 빼거나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6. 그런데 세례 요한이 간 곳이 참으로 재미있는 곳입니다.

7. 4절에 보니 그는 "광야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면 사람 많은 곳으로 가야 할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8.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사람 많은 곳으로 가야 뭐라도 하나 더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곳에서도 무엇이라 하나 더 얻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9. 그런데, 진정 무엇을 얻고자 한다면 얻을 수 있을만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10.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진정 세례 요한이 있어야 할 곳이었으며, 또한 우리가 지금 있어야 할 곳이기도 합니다.

11. 광야는 참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상한 심령에 말씀이 들어가면 바로 역사가 일어납니다.

12. 그렇지 않고, 자기 의로 가득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나누어 보십시오. 튕겨 나올 뿐입니다. 나올 뿐 아니라 튕겨 나온 것 때문에 말씀을 나누어 준 사람이 상처 받기 쉽습니다. 물론 이 또한 능히 우리가 감당해야할 몫입니다.

13. 그렇지만 먼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광야"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14. 사람이 많고, 적음을 떠나 각 사람의 심령에 "광야"와 같은 상한 심령,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져 열매 맺을 수 있는 심령의 사람에게 회개의 열매가 맺게 됩니다.

15. 결코 자기 의로 가득한 사람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심령입니다.

16. 우리 각자의 마음이 "광야"와 같은 마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 때 비로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를 만나기 위해 찾아오신 그 분의 임재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17. 우리가 이처럼 "광야"와 같은 마음을 품기 원한다면, 적극적 행동이 필요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겠다는 의지적 결단과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18. 이는 결코 마음의 다짐으로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광야"의 마음이 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광야"의 마음을 가리켜 옥토밭이라 말합니다.

19. 우리의 마음의 밭이 "옥토밭"이 되어야 말씀이 쑥쑥 자랄 수 있습니다.

20. 5절 말씀을 보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1.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 두 가지의 의지적 행동을 하게 됩니다.

22. 5절 말씀을 이어서 보면, 이렇습니다.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23. 여기서 우리는 "광야"와 같은 마음, "옥토밭"과 같은 마음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두 가지 의지적 행동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게 됩니다.

24. 첫번째는, "다 나아가"입니다. 이는 아주 정확하면서 꼭 필요한 행동입니다. 주님께 나아가야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25.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께 한 걸음 더 의지적 행동으로 나아가 보십시오.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법칙입니다.

26. 두번째는, 주님께 나아가서 "자기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27. 우리와 세상 사람들은 똑같은 점이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깨끗하지 못하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는 점입니다.

28. 그렇지만 다른 점 또한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죄의 용서를 구하는 회개가 있다는 점입니다.

29. 이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전적으로 다른 부분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까지는 똑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는 겁니다.

30. "자기 죄를 자복하는"는 의지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31. 우리가 참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기 원한다면 우리 마음에 가득하기를 원한 것들이 있습니다.

31. 광야 같은 마음이 되시고, 광야로 나아가고자 하는 적극적 행동을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의지적 행동을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32. 이번주부터 청소년부 친구들과 함께 세례입교식을 준비하면서 세례입교 공부를 2주간에 걸쳐서 하려고 합니다.

33.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기 위해 광야로 나아왔던 사람들처럼 우리 귀한 청소년부 친구들 또한 그러한 강력한 믿음의 고백과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34. "주님!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각자 그들의 마음에 찾아가 이 놀라운 세례식의 의미와 은혜를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은혜를 강하게 사모합니다. 아멘"

35. "하나님의 부족한 종의 사역가운데, 각 사람의 세례식 가운데 이러한 놀라운 은혜가 가득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종을 사용하시고, 세례식에 참여하는 모든 자들 또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기 위한 나아오던 자들과 같은 심령의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을 기도드립니다. 아멘"

36. 날마다 우리의 삶이 죄 사함의 세례를 받게 하는 회개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귀한 사역에 부르심을 받았음을 기억하고, 날마다 주의 길을 예비하며, 주님의 외실 길을 곧게 하는 사역에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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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세례식에 임하는 자들
1. 세례 요한
2. 세례 요한의 사역들의 과정 - 많은 사람들이 죄사함의 회개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초청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암을 기억하자.
3. 세례 받는 자들의 자세 - 광야 같은 마음, 광야 같은 마음으로 나아가자, 죄를 자복하는 회개의 기도를 드리자.


Thursday, February 21, 2013

한 날 묵상 - 막 1:2-3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한 날 묵상 - 막 1:2-3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1. 지난 주 누가복음 묵상중에, 이런 글을 페이스북에 적어 보았다. 

2. 눅 7장 24-29절을 보면서, 나의 위치를 다시 확인해본다(나의 정체성, 나의 삶의 이유와 목적).
 난 광야에 나간 사람인가? 그렇다.
 그럼 그곳에서 무엇을 걸치고 있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시는가? 부드럽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기 원한다면, 왕궁으로 가라.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제자됨은, 화려한이 아니라, 세련됨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길을 준비함에 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를 남겨두셨다. 화려한 왕궁에서의 삶으로가 아니라, 다시 오실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 두셨다. 그곳이 내가 오늘 서 있어야하는 나의 자리이다.


3. 이러한 묵상은 마가복음 1장 1절 묵상과도 연결되어 있다. 
  한 날 묵상 - 막 1:1 <복음의시작과 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의 시작과 끝 또한 복음이어야 합니다>
   http://saltandlight21.blogspot.ca/2013/02/11.html

4. 여기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세례요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를 생각해 볼 때 여러 공통점이 발견될 수 있지만, 이 땅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답을 찾으려 할 때, 분명 하나님은 이 땅에 각 사람을 보내면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5. 예수님은 이 땅에 복음을 위해 오셨다. 그리고 그 복음은 완벽히 완성하셨다. 

6. 세례 요한은 이 땅에 두 가지 사명을 위해 왔다. 3절 말씀이다. 첫 번째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둘째는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7. 마가복음 1장 1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시작이라"는 절대적 진리로 시작되면서, 바로 이어지는 2절에서는 그 귀한 사역을 위해 한 사람을 보냈으니, 바로 세례 요한이요, 세례 요한이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약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8. 복음와 인간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건데, 복음은 인간을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 주어졌을 뿐 아니라, 이 복음이 인간들에게 확장되는 일에 또한 부름을 받은 자들임을 마가복음 1장 1절과 2-3절은 분명히 하고 있다. 

9.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확장은 세례 요한을 통해서 사통팔달로 전파 되었다.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야 할 길을 철저히 준비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들에게 잘 스며들도록 인간들의 마음을 곧게 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며 사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갔다. 

10. 특별히 두 번째가 복음을 위해서 남겨진 우리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복음이 각 사람들에게 잘 스며들도록 우리는 삶으로 복음을 증명하는 부르심을 입은자들이기 때문이다. 

11. 나는 지금 어떠한 사명으로 부르심을 입었는가? 또한 나는 지금 그 사명의 길 위에 바로 서 있는가? 

12.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아멘.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13. 마가복음 16장 20절을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14. 복음을 위해 오신 예수님, 그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위해 남겨진 사람들. 이게 바로 마가복음의 핵심 메시지이다. 

15. 우리는 지금 이 시대 복음을 위해 남겨진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복음만이 우리 삶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전부여야 합니다. 

16. 다른 그 무엇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도 결코 안됩니다.

17. 오직 복음입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지금 우리는 이 땅에 가운데 존재하며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18.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19. 오늘도 주의 길을 예배하며 주의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일에 순종하는 한 날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 아멘.

Saturday, February 16, 2013

한 날 묵상 - 막 1:1 <복음의시작과 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의 시작과 끝 또한 복음이어야 합니다>

한 날 묵상 - 막 1:1 <복음의시작과 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의 시작과 끝 또한 복음이어야 합니다>

          1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 나의 존재, 정체성이란? 나를 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은 나를 어떻게 볼까?

2. 복음의 정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은 인간의 삶의 윤택이나 편안함을 위해서 있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3. 그래서 마가복음 1장 1절은 단호하게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4. 복음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삶의 시작 또한 복음입니다.

5. 우리는 지금 복음앞에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6. 오직 복음뿐입니다. 마가복음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그 자체로 복음입니다.

7. 말씀을 읽고 깨달는 것이 있다면 오직 복음 뿐입니다. 말씀을 읽고 깨닫고 듣는 일에 있어서 복음을 제대로 깨닫는 것외는 다른 것은 없습니다.

8. 나의 삶과 정체성, 가치관에 복음만이 있기를 원한다.

9. 복음의 향기의 나의 삶과 흔적 곳곳에 무더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10. 왜 이리 어렵고 힘들까? 나를 아직 버리지 못해서 그렇다.

11.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고 계시다. 예수님의 복음이 시작되기 위해서 이 둘을 다 필요하다. 그러나 필요함으로 그치지 않는다. 신성을 버리시고, 포기하시고 인성으로 오셔야 피로서 복음이 시작된다.

12. 복음이 나의 향기가 되기 위해서 나의 옛 자아가 죽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3. 옛자아를 죽이기 위한 우리의 관심과 헌신은 지속되어야 한다. 다음의 글에서 "죄 죽이기 실행"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http://cafe.naver.com/mokyang1016/54

14.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15. 복음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포함합니다.

16. 진정 복음이 나의 삶에 충만하기 원합니다. 진정 복음이 우리 사회에 충만하기 원합니다. 진정 복음이 우리 모두의 정체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진정 복음이 우리 모두의 시작과 끝이길 원합니다.

17. 마가복음은 시작을 복음을 아주 간단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18. 내가 인생에서 써내려가는 인생의 이야기가 이 복음의 이야기로 가득차기를 원합니다.

19. 오직 복음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오직 그 은혜만을 간구합니다.

20.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아멘.

참고
열방에 빛을, 마이클 고힌
pp67-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