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16, 2013

한 날 묵상 - 막 1:35-39 <새벽 한 적한 곳에서 기도 후 전도여행,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한 날 묵상 - 막 1:35-39 <새벽 한 적한 곳에서 기도 후 전도여행,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1. 하루를 시작하기 앞서, '너 거기서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2.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35절)

3. 삶으로 가르시시는 예수님의 교육이시다.

4. 우리가 할 수만 있으면, 아니 항상 최우선에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기억해야 하며, 또한 실천해야 할 것이다.

5. 오늘도 기도하러 가시는 잔잔한 예수님의 모습으로 내 자신을, 그리고 이른 아침 시간을 비추어 본다.

6. 예수님께서 능력을 덧입을 수 있었던 힘은 기도로부터 시작되었다. 늘 기도하였기에 사역에 능력과 힘이 있었다.

7. 오늘도 바쁘 움직이셔야 했던 예수님께 수 많은 무리들이 찾아온다.(36절)

8. 그러나 왠지 예수님은 이들을 만나주시지 않고, 가셔야 했던 길을 찾아 나선다.(38절)

9. 시몬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를 따라 나서며 말한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36-37절).

10. 예수님께서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 않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38절)

11.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왜 찾아온 이들을 만나주시지 않았을까?

12. 여기에는 두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13. 첫번째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있었으며, 그 오신 이유에 합당한 일들을 바삐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14. "거기서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38절)

15.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 오셨다. 복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셔야 했고, 깨어 있어야 하셨다.

16. 그렇기에 찾아온 이들을 만나 줄 수 없었다. 그들과 이야기하며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그 만큼 긴박하고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17. 그렇지만 여기서 하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18. 왜 찾아온 이들에게는 전도하지 않으셨을까?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을까? 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을까?

19. 여기서 우리는 앞서 찾아 온 이들을 만나지 않으신 두 번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20. 찾아온 이들의 관심은 무엇이었나?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얻고한 것이 있는것 아니었을까? 복음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마음에 곽찬 욕심이나 생각들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21. 찾아온 이들을 향한 이런 저런 생각이 내 머리를 두드린다. 나도 그들중에 있는 것은 아닌가?

22. 찾아온 이들은 항상 많았다(막1장 33절을 보라). 그러나 그들은 고침을 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고침을 받고 난 이후에는 그 어떠한 것도 없었다.

23. 예수님을 그렇게 찾아 온 이들을 떠나셔야 했다. 누가복음 4장 42절에 보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라고 말씀하고 있다.

24. 찾는 이들은 왜 예수님을 붙잡으려 했을까? 동네 이장을 시키려고 했을까? 자기들과 함께 한 평생 살기를 바라고 붙잡지 않았을까?

25.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에게는 가득한 것은 자기 욕심이었다. 예수님의 능력이었다. 그들이 복음만이면 족했다면 예수님을 떠나 보내야 한다.

26. 예수님은 떠나셨어도 복음은 여전히 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육신과 함께 함에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신 복음이 함께 함에 기쁨과 평안이 있는 것이다.

27. 이게 바로 예수님이 주신복음이 주는 유익이다.

28. 나는 지금 예수님의 현존만을 붙잡기 원하는가? 예수님은 눈에 보이시지 않지만, 예수님이 주신 복음만으로 만족하고 있는가?

29. 눈으로 보는 예수님만을 원한다면, 우리 또한 지금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들과 다르지 않다.

30. 우리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예수님 계속 붙잡아 두기 원하는 그들과 차이가 없다.

31. 예수님은 이 땅에 영원토록 죽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주기 위해 오셨다.

32. 그렇기에 지금도 우리는 복음만이면 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때론 예수님께서 다른 마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신다면 기꺼이 보내드려야 한다.

33.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눅5:43)기 때문이시다.

34. 예수님이 나만을 위해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만을 남겨두시고 떠나셔야만 합니다. 그래야 또 다른 동네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5. 그리고 예수님 떠나셨다고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마십시오. 지금 나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꿔 주신 복음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36. 복음만이면 족하십시니까? 아니면 복음만으로는 부족하여 예수님을 늘  내눈앞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37.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분명히 기억하기 원합니다.

38. 예수님의 능력만을 원하는 자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마음에 위로가 되니가 예수님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내어줄 수 없다고 말하는 자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39. 예수님을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40. 이 일을 위해 이른 새벽에 동이 트기도 전에 한 적한 곳에서 가셔서 기도하셔야 하셨고,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시고 다른 동네로 떠나셔야만 하셨습니다.

41. 우리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따라 그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행하셨던 일들을 따라 순종하기 원합니다.

42. 새벽 한 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후 다른 가까운 마을로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복음을 전하러 가는 오늘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43. 이 일을 위해 우리 또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4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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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절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 => 예수님의 한 날 사역의 시작은 기도이시다.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시사, 거기서 하신 것은 기도셨다.
= => 이렇게 하는 것이 기도다. 말씀만 들어도 참으로 기도에 여유가 묻어나 있다. 기도하러 가시는 예수님의 잔잔한 모습이 그려진다.

36-37절 "시몬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 => 주를 찾아 온 자들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왜 예수님은 찾아오는 이들에게 가시지 않았을까? 그들을 왜 만나주지 않았을까?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의 관심은 무엇이었을까?

 복음이었을까?
 자기에게 좋은 것들이었을까? 예를 들어보면, 놀라운 기적? 병고침? 자기 배만 채우려는 욕심?

38절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 => 왜, 예수님을 찾는 자들에게 가지 않고,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셨을까?

36-38절을 고래해보면,
 예수님은 그 어떠한 것보다 "전도", 즉 복음을 전파하며 진짜 Good News를 전하는 일에 우선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해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복음이 되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이유는 복음을 위해서이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왜 찾는가? 무엇이 나를 예수님께서 나아가게 하는가?
 복음인가? 자기 채움인가?

참고) 요한복음 18장 37절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 =>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이 땅에 오시고,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는 삶아 사신 예수님. 내가 진리에 속해 있다면, 이 진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진리에 대해여 증언하는 음성이 들리는가?

39절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 => 온 갈릴리로 다니시면서 하신 일은 전도하시며 귀신들을 내 쫓는 일이셨다. 왜 찾아오는 이들에게 가서 전도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지 않으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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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워십 뮤직 호주 힐송 처치의Brian Houston(브라이언 휴스톤)

For This I was Born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삶, 교회, 목적과 이유, 헌신에 관한브라이언 휴스톤 목사의 탁월한 도전”

- 목 차 -
제 1부 :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 1. 그리스도의 이유를 위해서 태어나다
- 2. 그리스도의 이유와 지역교회

제 2부 : 이유와 비전
- 3. 당신의 비전과 그리스도의 이유
- 4. 이유가 중심이 된 연합
- 5. 영원한 비전

제 3부 : 이유와 소명
- 6. 구원과 부르심
- 7. 당신의 손에 있는 것을 사용하라
- 8. 힘든 수고가 주는 축복

제 4부 : 이유와 목적
- 9. 목적이 있는 삶
- 10.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 11. 번영과 목적

제 5부 : 이유와 대가
- 12. 내려놓는 삶
- 13. 확신안에 거하라
- 14. 헌신된 삶을 살아가기
- 15. 축복의 근원
저자소개
그의 아내 바비(Bobbie)와 함께 호주에서 가장 큰 교회 힐송 처치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21,000명이 넘는 성도들이 매주 출석하고 있으며 두 곳의 캠퍼스로 나누어 예배를 드린다. 힐송뮤직, 힐송 컨퍼런스, 힐송 인터내셔널 리더십 컬리지와 함께, 글로벌 사역을 펼쳐나가고 있 으며, 힐송 TV는 한국을 포함, 현재 180여 개국에서 방영되고 있다.

휫셔(Fisher)뮤직은 호주 힐송(Hillsong)뮤직의 공식 디스트리뷰터로서 1998년부터 힐송처치의 워십을 10년 넘게 국내에 소개해왔다. 처음 힐송의 음반들을 가져와 알릴 때의 감사와 흥분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래서 이번 휫셔북스를 통해 힐송 브라이언 휴스톤 목사의 저서 “내가 이를 위하여…”를 소개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아닐 수 없다.
많은 이들이 힐송하면 우선 워십을 떠올리지만 브라이언 목사의 말처럼 오늘날 힐송뮤직이 오랫동안 사랑 받는 그 은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다. 이 책은 세계 최고의 워십뮤직 이면의 믿음, 말씀과 영성의 깊이를 보여준다. 또 그의 목회 철학, 성장의 힘, 그리스도의 이유와 목적에 사로잡힌 헌신에 도전 받게 될 것이다. 목회자, 음악사역자, 워십리더는 물론 그리스도의 이유를 위해서 사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 유지연_ 휫셔뮤직그룹 대표
인생을 값있고 기쁘게 살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에게 ‘Why?’와 ‘For what?’을 질문하고 응답을 받는 것이라 배웠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이 두 가지 질문을 통하여 그분의 뜻을 발견하라고 훈련 받았다. 성경을 볼 때도 설교를 준비할 때도 나는 끊임 없이 이 두 질문을 한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 당혹스럽고 괴로우셨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고 기도하시며 거기서 위의 두가지 질문을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아셨다. 그래서 그 모진 고문과 협박의 불의한 재판가운데서도 “내가 이를 위하여(For this cause) 세상에 왔나니”라고 말씀 하실 수 있었다. 브라이언 휴스톤 목사는 그 이야기를 탁월하게 서술해 놓았다. 이책 과 함께 당신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질문하여 예수님처럼 담대하게 “내가 이를 위하여…”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문희곤_ 높은뜻 푸른교회 담임목사
이 혼돈의 세상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번영과 성취가 필요하다면, 브라이언 휴스톤 목사와 함께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박기범_ 어노인팅 대표
목적이 함께하는 삶은 늘 내 마음에 붙어 다니는 주제다. 브라이언 휴스톤 목사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이유가 당신의 세계에 스며들 때 삶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자세히,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 조이스 마이어_ 베스트셀러 저자, 성경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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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참고할 것.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진중권의 아이콘] 개시(開示)로서의 진리


아방가르드의 성공 혹은 실패에 대하여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요한복음 18:33-38)


신약성서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빌라도가 예수와 대면하는 장면이리라. 심문의 마지막에 빌라도가 던진 질문은 사뭇 냉소적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Quid est veritas?) 예수는 이 물음에 답하지 않았지만, 어느 호사가가 철자의 순서를 바꾸는 파자(anagram)를 이용해 물음 속에서 답변을 끌어냈다. “앞에 서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Est vir qui adest). 예수, 그 사람이 바로 진리다.


‘진리’에 대한 두 관념의 충돌



예수와 빌라도의 만남에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충돌을 볼 수 있다. 가령 빌라도는 로마법의 절차에 따라 먼저 피고의 혐의를 나열한 뒤 예수의 변론을 기다린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예수가 로마인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조목조목 따져가며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빌라도의 게임에 들어가지 않는다.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 하시는지라.” 예수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신이 정하신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이에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빌라도는 적당히 매질이나 해서 풀어주려 한 모양이다. 예수를 채찍질한 뒤 그를 대중 앞으로 이끌어 매질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을 보여주며 외친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Ecce homo) 하지만 성난 군중은 매질로 만족할 수 없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치며 심지어 빌라도를 협박하기까지 한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두려움을 느낀 빌라도는 예수의 운명을 대중의 뜻에 맡기며 자신은 대야의 물에 손을 씻는다.


여기에서 보는 것은 ‘진리’에 관한 상이한 두 관념의 충돌이다. 헬레니즘의 진리와 헤브라이즘의 진리. 흔히 ‘진리’라고 하면, 우리는 명제 혹은 진술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빌라도가 자신의 법정에서 밝히려 했던 것도 그런 종류의 진리였으리라.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내건 혐의들이 과연 사태에 부합하는가?’ 하지만 예수 앞에서 빌라도가 구하는 진리는 사소한 것이었다. 예수의 진리는 오늘날 전세계에 퍼져 있는 기독교회의 존재를 통해서 입증된다.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해 내려오는 새로운 삶의 원리. 그것이 빌라도의 것을 압도한 예수의 진리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진리는 ‘명제진리’와 ‘사태진리’로 구별된다. ‘명제진리’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인식론적 진리, 즉 참인 명제가 갖는 속성으로서 진리다. ‘사태진리’는 그와는 차원이 달라서 가령 예수의 진리처럼 논증이나 증명 없이 선포된다. 선포(kerigma)로서 진리는 존재론적 진리다. 근원적인 것은 이 사태진리이고, 명제진리는 거기에서 파생된 것에 불과하다. 수학을 예로 들어보자. 어떤 수학적 명제의 올바름은 정리를 이용해 증명된다. 정리의 올바름은 공리를 이용해 증명된다. 그렇다면 공리의 올바름은 어떤가? 그것은 증명없이 옳은 것으로 선포되지 않는가.


사태로서 진리가 일어나는 데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예술, 사유, 그리고 국가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세 가지가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보다 근원적인 것이다. 시인과 철학자가 세계를 열어서 보여주면, 과학자들은 그렇게 열린 세계 속으로 들어와 개념적 정리를 할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국가를 세우는 것이 곧 진리라는 생각이다. 하이데거가 강의실에서 이런 얘기를 하던 30년대 초반, 강의실 밖에서는 나치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한때 나치운동이 바로 그런 진리를, 새로운 민족적 삶의 세계를 세우는 일이라 믿었다.


급진주의자라면 국가 대신에 혁명을 들 것이다. 조례의 올바름은 법률로 판단하고, 법률의 올바름은 헌법으로 판단한다. 그럼 헌법의 올바름은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기존 헌법의 올바름을 판단하는 것은 법률적 과제가 아니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혁명’이다. 혁명으로 새 세상이 열리면, 사후에 법률가들이 들어와 새 헌법의 정신에 맞추어 법률과 조례를 만들 것이다. 진리론의 좌익적 버전에서는 혁명의 전위(‘당’)가 곧 진리가 된다. ‘당의 무오류’라는 스탈린주의 원칙은 어떤 면에서는 필연적인 것이다. 공리를 향해서 자신의 올바름을 증명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잖은가.


견자(見者)의 편지



사건으로서 진리는 ‘종교’나 ‘정치’만이 아니라 예술에도 존재한다. 랭보는 견자(‘voyant’)에 관해 이야기한다. “내가 말하노니, (…) 시인은 모든 감각의 기나긴 거대한 이성적 일탈을 통해 자신을 견자(見者)로 만들어야 한다. 모든 형태의 사랑, 고통, 광기. 그는 자신을 탐색한다. 그는 자기 안의 모든 독약을 소진하여 그 속에서 오직 핵심만을 건져낸다. 모든 신념과 모든 초인적 힘을 요하는 말할 수 없는 고문. 그것을 통해 그는 인간들 중에 인내심이 있는 자, 위대한 범죄자, 저주받은 자-그리고 위대한 학자가 된다. 그는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랭보의 ‘견자’는 유대인들이 ‘선지자’라 부른 것의 예술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견자, 즉 보는 자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미래를 보며, 나아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그 미래를 비로소 존재하게 만든다. 시인은 “진보의 배가자”로서,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용감하게 몸을 던진다. 당연히 거기에는 커다란 위험이 따른다. “그가 방황하다가 결국 제 비전의 지성을 잃고 말지라도, 그는 이미 그 비전들을 보았다. 그로 하여금 들어보지도 이름할 수도 없는 것들 속으로 뛰어들다가 죽게 놔두라. 다른 무서운 일꾼들이 나타나, 다른 이가 쓰러진 그 지평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다.”


랭보의 ‘견자의 편지’(1871)는 훗날 ‘아방가르드’라 불릴 운동의 전주곡이 된다. “새로운 세대는 제 조상을 저주할 자유가 있다.” 여기에서 숨막힐 듯이 답답한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며 강림할 새로운 예술,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를 읽을 수 있다. “시는 더이상 행동에 리듬을 맞추지 않을 것이다. 시는 앞서 나갈 것이다.” 이 말은 시야말로 그 어떤 행동에도 앞서 세계를 열어주는 진리라는 시인의 자의식을 보여준다. 20세기의 아방가르드 예술을 추동한 것은 바로 이 자의식이었다. 그것은 죽어가는 사회 속에 새로운 진리를 일으키려는 운동이었다.


아방가르드는 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와 손을 잡았으나,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진리의 원천이 둘일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아방가르드 운동은 앞서 나가지 못하고, (나치당이나 전위당의) 행동에 리듬을 맞춰주는 신세로 전락한다.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정치적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미학적으로는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20세기 초에 그들이 가졌던 예술적 비전은 오늘날 생활세계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해주고, 없었던 것을 있게 해주는 개시(開示)로서의 진리는 여전히 필요하다. ‘견자의 편지’는 아직도 수신자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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