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31, 2012

한 날 묵상 갈 6: 2-5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1.삶의 짐이 너무 힘겨운 사람들이 있다. 참으로 많다. 그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세상의 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무엇인가?

2.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은혜로 믿음을 가진 자들, 그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통해서 믿음 있는 자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을 권면한다....

3. 이는 또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명령이다.

4. 이 명령을 잘 수행하느냐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길이기도 하다.

5.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주고 있는 그리스도의 법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야 하는가?

6. 바울은 갈6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함으로,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7.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 하면 생각나는 말씀이 있다.

8. 그리스도의 법(가장 큰 계명, 마22장 37-3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재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9. 달란트 비유(마태복음 25장 14-30절)
   21, 23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10. 냉수 한 그릇(마10장 40-42절)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1. 3절 "만일 누구든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12. 먼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이렇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면서 스스로 속아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생각한다.

13. 제자 어떻게 알 수 있나?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육체의 일을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다. 또한 마태복음 7장 15-2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을 알 수 있다. 20절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14.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이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만일 내가 그리스도의 제가가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내가 지금 스스로 속고 있다는 것인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줄 알 수 있을까?

15. 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법의 성취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는 말씀이다.

16. 4절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1) 내가 지금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고 있는지 자신을 살피라.
  2) 내가 지금 스스로 속임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살피라.

17. 4절 표준새번역 "각 사람은 자기 행실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18. 스스로 자신을 살피면 결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자랑할 수 없다. 자기의 그릇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9. 5절 표준새번역 "사람은 각각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합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20. 서로 짐을 지기에 앞서 먼저는 각각 자기의 짐을 먼저 지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4절의 말씀과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21. 게으른자는 먹지도 말라. 자신의 일에 먼저 최선을 다하라. 자신의 할 수 있는 달란트대로 최선을 다하는 삶이 먼저이다.

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을 나누져야 할 사람이 있다. 개인적으로, 제도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국가적으로 제도를 만들고 도와주어야 한다.
 성도와 교회와 국가 모두가 함께 이 일에 열심을 다해야 한다.

23.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하자.

24. 참고로, 어제 글을 다 써두었는데, 오늘 실수로 글을 전부 달리며 기초적인 자료에 근거해서 다시 글을 이었다. 내용도 맞지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은 이대로 두고 싶다.

* 참고 - 게으른자
03:17 너는 종신토록 수고 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라
03:19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10:18 게르른즉 석가래가 퇴락하고 손이 풀어진즉 집이 새느니라
06:06 게으른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 하는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128:02 네가 네손이 수고 한대로 먹을 것이라
10: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자는 부하게 된다
11:16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는니라
12:24 부지런한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12:27 게으른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 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 한 것이니라
13:04 게으른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는다
19: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것이라
19:24
26:15 게으른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와 한다.
20:04 게으른자는 가을에 밭갈지 아니 하나니……구걸 할찌라도……
20:13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이 족하니라
21:05 부지런한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자는 궁핍
22:13
26:13 게으른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찢기겠다……
23:21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헤어진 옷을 입는다
26:14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도는 것같이 게으른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
살후03:10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 하거든 먹지도 말라



Saturday, December 29, 2012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에 대하여- 임범진 집사 (장년부, 충남대 의대 조교수)

퍼온글 http://elimbp.onmam.com/1158760

참고도서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들" 박영돈 저, IVP.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에 대하여-

임범진 집사 (장년부, 충남대 의대 조교수) 



손기철 장로의 책은 읽어본 일이 없습니다만 그가 진행하는 치유집회의 동영상이 갓피플 메인화면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손장로가 행하는 설교의 내용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만 이 글에서는 치유 부분에만 집중해 보려 합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곳에서 정말로 치유가 일어나고 있는지 커다란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1. 신유는 오늘날도 일어나는가?손기철 장로의 치유 행위를 분석하기에 앞서 보다 근본적인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습니다. 바로 신유(faith healing)가 오늘날도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답하기 전에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신유의 은사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과 “오늘날에도 신유가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은 전혀 다른 내용을 묻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풀어 설명하면 “하나님이 지금도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셔서 어떤 사람의 병을 직접적으로 낫게 하시는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내용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별 어려움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며 성경에서도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약 5:16). 하지만 첫 번째 질문은 대답이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사도 시대와 마찬가지로 병자에게 병 낫기를 명할 수 있고, 그 결과 실제로 병의 치료가 일어나며,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언제 하나님이 병고침을 행하실지 정확하게 예측하여 얘기해 줄 수 있는 그런 은사를 가진 사람이 여전히 존재하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이와 같이 전혀 다른 내용을 묻는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 신유 은사의 지속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면 다음 순간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의 가능성, 더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각종 이적의 사실성까지 의심하는 사람이라는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됩니다. 저는 첫 번째 오늘날에도 신유의 은사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아니다”라고 대답하며, 두 번째 오늘날에도 신유가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입장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 입장에 대해 이미 많은 책들이 출판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 문제에 저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오늘 다룰 내용과는 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제, “오늘날에도 신유가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부연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신유라는 용어는 대단히 부적절한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이 용어는 하나님의 이적적 병고침이 마치 우리의 믿음 여부, 혹은 믿음의 강도에 달려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자칭 신유 은사자들은 병고침이라는 결과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고 얼마나 능력 있는 사역자를 만나느냐에 달려있는 듯이 가르칩니다. 성도가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약 5:14), 그가 병에서 회복될 것인지, 그 병을 가지고 살아가며 연단을 받을 것인지(고후 12:8-9), 아니면 죽음을 통해 주님과 함께 거하는 복을 누릴 것인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신유라는 말 대신 로이드 존스가 사용한 이적치유 (miraculous healing)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이적치유 사건은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적은 빈도로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이 글에서 힘주어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2. 이적치유의 진실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나에게 이적적인 치유가 일어났어요”라는 간증을 들었을 때 그 말의 진실성을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 간증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말에는 진정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을 담아 말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실제로 그 질병이 있었는? 그리고 지금은 정말로 치료가 되었는지 판단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프랭클린 페인 주니어라는 의사이자 기독교 의료윤리 연구가가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의료의 성경적 접근>, 한국누가회출판부). 로이드 존스 목사도 그의 책 <의학과 치유> (생명의 말씀사)에서 이 문제를 언급합니다. 이 내용들을 제가 조금 변형해 인용하며 설명해 보겠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이적치유 사건을 간증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에게 정말로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게 만드는 몇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첫째, 세상에는 심인성질병 (psychosomatic illness)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심인성질병이란 환자는 증상을 호소하지만 신체에 실재적인 이상은 발견되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만성적인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서 아무리 CT나 MRI 등을 찍어보아도 디스크나 골절은 발견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꾀병과 다릅니다. 꾀병은 실제로는 증상이 없으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심인성질병은 환자 자신은 실제로 증상을 느낍니다. 심인성질병의 증상은 매우 다양해서 가벼운 통증 호소로부터 신체 일부의 마비증세까지 폭넓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카리스마 넘치는 의사가 당신은 나았다는 암시를 강하게 줄 때 극적인 반응을 보이며 씻은 듯이 낫는 것도 특징입니다. 같은 일이 이적치유집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많은 사람이 신뢰하는 이적치유자의 한 마디에 몇 년을 알아오던 증상이 씻은듯이 사라지는 경험.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신체적 질병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환자와 의사 사이에는 심각한 의사소통 장애가 흔히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환자와 의사 사이의 의사소통은 많은 의사들의 고민거리입니다. 의료현장에서 의사가 설명하는 내용이 환자에게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의사측의 원인도 있지만 자기 몸의 질병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환자가 선택적으로 듣는다는 사실도 매우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에 나온 신유은사 간증집에 기도로 녹내장을 치유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과에 가서 안압을 측정해 보고 녹내장을 진단 받았으나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다음날 가서 다시 검사했더니 녹내장이 씻은듯이 나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의사의 상식으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처음 보는 환자를 당장 녹내장으로 진단했다는 것도 이상하고 또 다음날 당장 완치를 선언했다는 것은 더 이상합니다. 아마도 첫날에 의사는 “안압이 높으시네요. 녹내장일 가능성이 있으니 검사를 해 보아야겠습니다.”라고 했을 것이고, 둘째 날에는 “오늘은 안압이 정상으로 나오셨네요”라고만 했을 것입니다. 이 의사는 녹내장이라고 진단한 적도 없고, 녹내장의 치유를 선언한 적은 더더욱 없는데 환자는 두 가지를 다 경험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경우는 암입니다. 의사 입에서 ‘암’이라는 단어가 나오기만 한 것으로도 환자는 자기가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이적치유 집회에 다녀오면 엄청난 간증거리가 생기게 됩니다.

셋째는 그 유명한 위약효과(placebo effect)입니다.
가짜 약을 먹은 사람도 그것이 약이라고 믿으면 실제로 질병이 낫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잇습니다.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잠을 못자던 환자에게 매우 값비싸고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 진통제를 처방해주겠다고 말하고 진지한 자세로 생리식염수(소금간한 맹물입니다) 10cc를 링거액에 섞어주면 거짓말같이 통증이 사라지고 잠도 잘 자는 현상은 거의 모든 의사가 경험하는 일입니다. 위약효과는 너무나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약이 개발되어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가루로 만든 가짜 약을 먹은 사람들과 대조해 보아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적치유 은사자의 강력한 암시는 가장 좋은 위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넷째, 질병의 자연사를 모르면 오해가 발생합니다.
어떤 병을 치료하지 않고 그냥 방치했을 때 어떤 경과를 밟는지 관찰한 것이 질병의 자연사(natural course)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낫는 것이 감기의 자연사라면 평생을 두고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는 것은 아토피, 류머티스 관절염 등의 만성질환의 자연사입니다. 질병의 자연사를 아는 것은 치료 효과를 판정하는데 필수적인 전제조건입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예를 두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심한 감기로 개인병원을 찾아 일주일 치 약을 먹었으나 차도가 없는 사람이 참다 못해 대학병원을 방문합니다. 대학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먹자 거짓말같이 독한 감기가 떨어지고 이 사람은 대학병원의 교수가 역시 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번에도 비슷한 증상의 심한 감기가 발생하자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용한 교수를 찾아가기로 마음 먹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번에 받아온 약은 효과가 없습니다. 일 주일 내내 고생하고서야 감기가 떨어져 나갑니다. 첫 번째 경우에 대학교수가 용한 의사로 인정받은 이유는 단지 환자가 감기에 걸린 지 일 주일이 지난 후에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흔한 예는 아이들의 아토피입니다. 몇 년 동안 고생하던 아토피가 이름 모를 풀을 다려먹고 씻은듯이 낫습니다. 하도 신기해 주변의 다른 집에도 추천해 주었는데 이번에는 효과가 그다지 신통치 않습니다. 왜일까요? 아토피는 수 개월~수 년을 주기로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는 자연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호전되려는 찰나 우연히 먹게 된 풀뿌리가 치료의 주인공으로 오인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아토피가 발생할 것입니다. 의학에는 우연을 감별하기 위한 연구방법론이 많이 개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적치유에서는 이런 효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검사의 특성 및 한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오해가 발생합니다.
질병을 진단하기 위해 행하는 검사에는 선별검사(screening test)와 확진을 위한 검사가 있습니다. 선별검사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정 질병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가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검사입니다. 선별검사에서 양성이 나왔다는 것은 그 질병에 걸렸을 확률이 다른 사람보다 높으므로 확진을 위한 검사를 시행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 그 자체가 질병을 확진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CT나 MRI 촬영은 대표적인 선별검사입니다. CT/MRI에서 폐에 종양으로 의심되는 덩어리(종괴)가 발견되었을 때 조직검사로 확진되기 전까지는 말 그대로 ‘의심’ 단계이지 폐암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 종괴가 없어졌다면 애초에 폐암이 아닌 폐렴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유 간증들이 선별검사만 받은 상태에서 확진을 받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섯째, 불가항력적 오진이 존재합니다.
현재로서 암을 진단하는 가장 확실하고 믿을만한 방법은 조직검사입니다. 극소수의 경우이긴 하지만 조직검사까지 시행하고도 심한 염증과 암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 흔한 것이 위궤양과 위암의 구분입니다. 둘 다 위벽에 움푹 파인 구덩이가 만들어집니다. 내시경을 통해 모양을 보는 것만으로는 둘의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조직검사를 하여 확실히 구분하는데 아주 드물게 조직검사를 하여도 진단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대학병원급에서는 일 년에 몇 차례 나타납니다. 이런 경우는 검사를 반복하며 환자를 계속 관찰하며 조심스럽게 판정합니다. 하지만 경험 없는 병리학자가 이런 예를 접했을 때는 성급하게 위암으로 진단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평신도 성경공부 교사로 유명한 어떤 분의 간증을 읽어보니 중국에서 위암으로 진단 받고 이적치유를 경험한 내용이 나옵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분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일곱째, 통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해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렸을 때 병기(1기, 2기, 3기, 4기)가 결정되면 의사는 지금까지 알려진 5년 생존율을 말해 줄 수 있습니다. 4기(말기)의 5년 생존율이 20%인 암에 걸린 환자를 가정해 봅시다. 이 사람이 5년 후에도 살아 있을 확률이 20%라는 말이며 바꾸어 말하면 이 암의 말기 상태에서 발견된 환자 5명 중 4명은 5년 안에 사망한다는 말입니다. 10명의 그리스도인이 이 암의 말기 상태에서 치유집회를 찾았습니다. 치유 은사자는 그들이 모두 나았다고 선언했고 5년 후에 보니 그 중 2명은 실제로 살아있습니다. 이 두 명이 정말로 이적치유를 경험한 것일까요? 이 치유집회가 정말로 효력을 발휘한 것일까요? 환자수가 100명으로 늘어난다면 어떻겠습니까? 예를 들어 23명이 살아있고 97명이 사망하였다면 치료효과를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검증하는 것이 통계학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들어본 기억이 나십니까? 95% 유의수준에서 치유집회를 가든 안 가든 생존율은 똑같다는 귀무가설을 기각하기 위해서는, 즉 p값이 0.05보다 작게 나오기 위해서는 몇 사람이 생존해야 하는 것일까요? (조금 사잇길로 빠진 이야기지만, 이런 통계학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모든 치료행위는 그 주체가 의사이든 한의사이든 관계없이 사이비 의료행위입니다. 태반주사니, 봉침이니 아무리 이론적으로 그럴듯하게 떠들어도 그 효과가 통계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런 얘기하면 개원가의 의사들은 의대교수가 자기들의 어려움을 모른다고 볼 맨 소리를 합니다. 마치 신학자들이 알파코스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하자 일선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을 위한 전도프로그램일 뿐인데 뭘 그리 시비냐고 투덜대는 것과 똑 같은 양상입니다.)

여덟째, 치유 간증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적지 않은 수의 경우 진단이 의사가 아닌 환자 자신이나 치유자에 의해 붙여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간증 전체의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최근에 타드 벤틀리라는 사람이 집회를 하자 주변 지역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하더군요. 인터넷에서 그 간증들을 찾아 읽어 보십시오. 제가 본 증례들은 객관적으로 사망이 증명된 경우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적치유의 진실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진단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치료 효과의 검증이 필수적입니다. 치유집회에 참석하기 전에 그가 확실히 병이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확진검사 결과(조직검사)가 있어야 하고, 집회 후에도 그에 준하는 검사를 시행해 병이 사라졌음을 환자의 증언에 의해서가 아닌 객관적인 방법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3. 손기철 장로 사례에 대한 분석
위에서 설명한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2008년 7월 11일에 www.godpeople.com 메인 화면에 올라온 치유집회 동영상을 대상으로 손기철 장로의 사례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이 날 집회 동영상에서 손장로가 치유했다고 선언한 질병 혹은 상태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축농증 2) 갈비뼈 이상 3) 눈꺼풀 내려옴
4) 어깨결림 5) 오른다리 마비 6) 영안을 열어줌
7) 회한의 날이 끝나고 독수리 날개 치듯…
8) 간경변 9) 자녀의 아토피 10) 등이 굽어진 사람
11) 각기병 12) 악몽 13) 밤눈 어두움
14) 위궤양 15) 담즙 이상 16) 왼쪽 폐 이상
17) 고환이 부은 사람 18) 생리통 19) 오른쪽 골반 휜 사람
20) 흑암의 세력에 묶인 자 21) 오른 엄지 발가락 발톱의 문제
22) 왼쪽 대장 폴립 23) 4살 남자 아이 팔과 목의 아토피
24) 심근경색 25) 악성 림프종 26) 골절

참석자들은 다음의 질병이 나았다고 간증하였습니다.
27) 혹(?,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음) 28) 갑상샘의 1.8cm의 혹이 사라짐
29) 성대결절 (성악가) 30) 기립성 저혈압

손기철 장로는 매 집회 때마다 성령님이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집회에서 OOO 명이 치유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기 오른쪽에 OO 환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적어도 손장로의 진단에는 오류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위의 목록을 보고 있노라면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가장 좋은 확인 방법은 위의 환자들 중 몇 사람을 추적해 확진 검사를 해 보는 것이겠지만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항목들은 진실일 가능성이 극히 낮아 보이는 것들도 있음이 사실입니다. 하나씩 설명해 보겠습니다.

1) 축농증
축농증은 손장로 집회의 단골 메뉴입니다. 제가 본 것만 벌써 세 번째 사례입니다. 왜 축농증이 자주 언급될까요? 환자가 현재 느끼는 뚜렷한 증상이 존재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치료 여부를 판단할 만한 뚜렷한 변화도 없는 만성질환이기 때문입니다. 주관적으로 나는 이제 나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그렇지 않음을 증명할 증상이 없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짐작하건대 손장로 집회 도중 축농증이 치유되었다고 손 들고 나온 사람들은 코가 뻥 뚫리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간단히 실험해 봅시다. 콧구멍을 한 쪽씩 번갈아 막고 숨을 쉬어 보십시오. 평소엔 느끼지 못했지만 한 쪽 코는 막혀있지 않습니까? 30분쯤 시간이 흐른 후 다시 한 번 해보면 이번에는 아까와 반대편 코가 막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코 속 혈관의 팽창과 수축에 의해 일어나는 정상적인 생리현상입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양 콧구멍을 번갈아 사용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이 변화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열정적인 집회로 인해 눈물 콧물 범벅이 되고 양쪽 코가 모두 막혀버린 상황에서는 한 쪽 콧구멍이 열리는 순간이 평소보다 더 과장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을 축농증 환자라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은 이 순간을 축농증이 치유되는 순간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2) 갈비뼈 이상
진단이 환자 자신과 치유자에 의해 붙여진 경우입니다.

3) 눈꺼풀 내려옴
안검하수(ptosis)라 부르는 현상입니다. 제가 병이라 하지 않고 현상이라고 한 이유는 눈꺼풀이 내려오는 것 자체는 나이 들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간혹 암 등의 심각한 질병이 신경을 침범하여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손장로가 치유했다는 것은 이 중 어느 경우일까요? 단순히 노화 현상을 역전시킨 것이라면 치유집회가 아니라 성형집회일 것이고, 암이 있는 사람이라면 눈꺼풀이 문제가 아니라 암 치료를 선언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4) 어깨 결림
어깨가 불편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도 여러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 관절에 이상이 생겨 움직임이 제한된 사람도 있고, 관절에는 무리가 없는데 주변 근육이나 인대의 통증 때문에 실제 움직일 수 있는 범위보다 작은 범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는 사실 ‘무서워서’ 못 움직이는 경우입니다. 이 사람들은 치유자가 확신을 주며 움직이라고 하면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습니다.

5) 오른 다리 마비
하지가 마비된 경우 실제로 심한 디스크나 종양 때문에 척추 신경에 이상이 있을 수도 있지만 팔 다리의 마비가 심인성 질환의 대표적인 증상인 것도 사실입니다. 이럴 경우 치유집회에서 증상이 사라질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특히 양쪽 다리가 아니라 한 쪽 다리가 마비된 경우 심인성 질환일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6)~7)은 질병이 아니니 지나가겠습니다.

8) 간경변
간경변을 진단하거나 치료 효과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초음파와 조직검사를 시행해야 합니다. 이 집회에서 나았다고 선언한 사람들은 반드시 병원에 가서 확인해야 합니다. 간경변 역시 환자 자신이 느끼는 증상의 변화가 거의 없는 병이기에 치유 은사자들의 단골 메뉴로 등장합니다.

9) 자녀의 아토피
위에서 말했듯이 아토피는 언젠가는 저절로 좋아지는 병입니다. 오늘 이 집회의 참석자 중 자녀에게 아토피가 있는 사람들은 100% 효과가 나타납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나중에 다시 나빠지면 부모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날 설교의 주제가 바로 이것 아닙니까?)

10) 등이 굽어진 사람
가까이서 잡은 화면이 아니기에 이분의 정확한 상태는 모르겠습니다만 흔히 이야기하는 꼽추 수준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선 진단이 환자와 치유자에 의해 붙여졌고, 설사 척추 측만증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치유 여부는 방사선 사진을 찍어본 후에야 판정할 수 있습니다.

11) 각기병
교과서에는 비타민 B 부족에 의해 생기는 병으로 항상 등장합니다만 우리나라 현역 의사 중 이병에 걸린 환자를 경험해 본 이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에 혹시 각기병이 생긴다면 만성 알코올 중독자 정도에서 간혹 발생할 것입니다. 그런데 비타민 보충이라는 가장 확실한 치료법이 있는 각기병을 왜 치유집회에 나와서 치료 받으려 하는 것일까요? 혹시 각기병으로 인해 생겨난 마비 증상이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는 후유증을 남긴 경우라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12) 악몽 ; 지나가겠습니다..

13) 밤눈 어두움 (야맹증)
각기병과 더불어 교과서에 비타민 A 결핍에 의한 질환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11)에서와 마찬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손장로가 각기병과 야맹증을 동시에 언급한 것으로 보아 오늘 치유 받을 질환의 목록을 성령님이 불러주셨을 가능성 보다는 의학책을 뒤적이다 눈에 뜨이는 진단을 죽 적어왔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4) 위궤양
위내시경을 해보기 전에는 진단도 치유 판정도 불가능합니다. 속쓰림 증상의 존재여부로는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속이 쓰린 이유는 궤양으로 인해 상처가 난 상태에서 위산이 과다분비되는 것인데, 위산의 분비량은 심리상태에 크게 영향 받기 때문입니다.

15) 담즙 이상
진단이 환자 자신에 의해 붙여진 경우입니다. ‘담즙 이상’이란 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16) 왼쪽 폐 이상
진단이 치유자와 환자 자신에 의해 붙여진 경우입니다.

17) 고환이 부은 사람
‘부었다’라는 말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이 날 집회에 모인 남성의 대부분이 자신의 고환이 부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음낭수종’을 말한 것이라면 이것 역시 확실한 치료법이 있는데 왜 치유집회에 왔는지 궁금합니다.

18) 생리통
평소 생리통이 있으나 이 날 생리를 하지 않던 여성들은 어떻게 치유를 판단합니까? 다음 생리일에 다시 통증이 발생하면 이 또한 자기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 않습니까?

19) 오른쪽 골반 휜 사람
저는 이게 무슨 병인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이런 병도 있나 싶습니다. 평소 자세가 틀어진 것을 말한 것이라면 치유집회 와서 기도하기 전에 생활 속에서 바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 아니겠습니까?

20) 흑암의 세력… -그냥 지나갑니다.

21) 오른 엄지 발가락 발톱의 문제
‘문제’라는 것이 엄지 발톱의 무좀인지, 살을 파고드는 발톱인지, 사고로 절단된 발톱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떨어져 나간 발톱이 순식간에 다시 자라난 경우라면 이적치유로 인정할 만 합니다만 그게 그렇게 심각한 질환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2) 왼쪽 대장 폴립
이것처럼 치유 효과 판정이 명쾌한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치유를 선언 받은 환자는 당장 병원에 가 대장 내시경을 다시 한 번 해야 합니다. 최근에 보였던 폴립이 사라져 버렸다면 이적치유입니다. 하지만 오늘 손기철 장로의 설교 내용으로 볼 때 폴립이 그냥 그대로 있다면 환자의 믿음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3) 남자아이 아토피 ; 9)와 같은 내용입니다.

24) 심근경색
집회 장소까지 스스로 오신 것으로 보아 당장 생명의 위협이 있는 단계는 지나고 후유증으로 심장 기능이 저하된 환자일 것입니다. 이 또한 환자가 자각하는 증상이 없고, 치유 여부를 판정할 뚜렷한 변화도 없는 상태입니다. 치유를 확인하려면 병원에 가서 심장 초음파를 비롯해 여러 검사를 해 보아야 합니다.

25) 악성 림프종
통계의 문제를 말씀드렸습니다. 악성 림프종은 진행된 정도에 따라, 그리고 조직학적 종류에 따라 생존율이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그 생존율보다 통계학적으로 의미를 부여할 만큼 더 많은 사람이 5년 후에도 생존해 있어야 합니다.

26) 골절
오늘 나오신 환자가 석고붕대를 얼마 동안 감고 있었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하루 전에 확실한 골절이 일어났던 환자가 오늘 동영상처럼 걷는다면 이적치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한두 달 전에 일어났던 골절이라든지, 완전한 골절이 아니라 그냥 금이 간 정도였다면 아무 의미 없는 사례입니다.

27) 혹? ; 잘 듣지 못해 지나가겠습니다.

28) 갑상샘의 혹
갑상샘의 1.8cm 혹을 어떻게 진단 받았을까요? 초음파 검사를 했을 것입니다. 갑상샘이라는 장기는 두꺼운 캡슐에 싸여 있기 때문에 혹이 만들어져도 어지간한 크기가 되기 까지는 밖에서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습니다. 1.8cm 크기라면 아직 손으로 만져봐서 판단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닙니다. 진단을 초음파로 받았다면 치유 판정도 초음파로 해야 합니다.

29) 성대결절
본인은 성대결절이 사라졌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을 하는 목소리가 왜 그리도 허스키하신 것일까요?

30) 기립성 저혈압
누워 있다 일어났을 때 혈압이 떨어지는 병입니다. 체위의 변화에 혈압 조절 기능이 더디게 따라가는 상태이지요. 오늘 나오신 할아버지가 집회장소에서 누워 계셨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랜 시간 앉아 계시는 동안 몸은 이미 적응을 끝마쳤을 것입니다. 누워 있다 일어나는 것과, 의자에 앉아 있다 일어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동영상에 포함된 것은 아니지만 제 머리속에 강하게 남아있는 장면이 있는데 5월 2일자 갓피플 메인 화면에 올라온 동영상 중에 나오는 휠체어에 앉은 사람들이 걷는 장면입니다. 그 동영상에는 네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성큼성큼 걸어나온 사람. 이 사람은 애초에 못 걷는 사람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증거는 없습니다만 한 번 직접 보십시오). 두 번째 부축 받아 나온 사람. 이 사람은 아마도 중풍의 후유증으로 팔, 다리의 마비가 온 사람인 듯 합니다. 양편에서 부축하여 억지로 걸어가는 것처럼 하였습니다만 이 사람이 정말 치유되어 걸은 것일까요? 동영상을 다시 보십시오. 그의 오른 팔이 어떤 상태인지. 치유가 일어났다면 다리야 체중을 지탱할 만큼 완전히 힘이 돌아오지 않았을 수 있다 하더라도 팔이 그렇게 축 늘어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세 번째 사람도 비슷한 경우인 듯 하지만 자세히 보여주지 않아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뇌성마비를 앓아온 환자 같습니다. 이 사람도 억지로 일으켜 세우지만 걷게 하는 모습은 끝까지 보여주지 않고 편집하였더군요. 더 보여주었더라면 장애인 인권단체에 학대로 고발해도 될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두 번째와 네 번째 사람은 전혀 치유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박수 치며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동영상만 보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손기철 장로가 훨씬 불리한 입장에 서 있습니다. 스스로 이 일이 성령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라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단 하나의 예라도 거짓임이 입증되면 전체 사역이 무너지게 됩니다. 간증하러 나왔던 환자들이 제가 지적한 자료들이 포함된 의사의 진단서를 제출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리라 생각하지만 이런 일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가톨릭에는 프랑스의 루르드라는 지역이 소위 ‘성모발현’과 이적치유로 유명합니다. 루르드 치유기적은 워낙 역사가 장구한 예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어난 치유 사건에 대해 의학적으로 분석한 논문들도 몇 개가 존재합니다. 이곳에서 치유를 경험했다는 환자들을 추적하여 검사한 것이지요. 그 결과는 참으로 처참합니다. 손장로의 치유집회에 대해 이런 검증을 시도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4. 보다 근본적인 질문 : 왜 치유 받으려 하는가?다음 글이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쉽게 무시해 버리지만 사실상 건강과 질병의 메커니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매우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범주 속에 나는 “신앙”을 포함시키고자 합니다. 내가 말하는 신앙이란 모든 종류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만일 이 견해가 옳다면 그 어떤 종류의 신앙도 이러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 기독교적인 신앙 뿐만 아니라 카리스마적인 신앙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신앙, 심리학적인 요소, 강한 감정, 충격, 악령의 역사 등 수많은 요소들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

진실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참된 기적들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기도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적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이적이란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일반적인 영성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달려 있습니다.

환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질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 하나님 뿐만 아니라 그 어느 곳에라도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온전함”에 대해서는 좀처럼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질병의 증상이나 그에 따른 즉각적인 무기력감으로부터 벗어나서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다시금 사회에서 그들의 지위를 되찾는 데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의학과 치유)

로이드 존스 목사는 자신이 임종하기 전 이 말의 진실성을 스스로 입증하였습니다. 대장암 말기로 더 이상 희망이 없어 항암치료를 중단한 후 치유를 위한 기도를 하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 내가 영광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

손장로의 치유 집회에 매달리는 많은 환자들이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Friday, December 28, 2012

한 날 묵상 - 갈6:1 <은혜와 사랑안에 거하는 성령에 속한 사람들은 죄의 꾀임에 넘어간 지체를 볼 때 사랑과 온유함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 아니라, 그들에게 드러난 범한 죄악들을 거울삼아 자신을 비춰보도록 해야 한다>

한 날 묵상 - 갈6:1 <은혜와 사랑안에 거하는 성령에 속한 사람들은 죄의 꾀임에 넘어간 지체를 볼 때 사랑과 온유함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 아니라, 그들에게 드러난 범한 죄악들을 거울삼아 자신을 비춰보도록 해야 한다>

1. 성령의 사람은 성령으로 행할것을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2. 갈라디아서 6장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형제들에게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그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3. 세상의 죄는 만연하고 있다. 때론 성령의 사람도 넘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목사라고, 교회의 직분자로, 성령의 뛰어난 은사를 선물로 받았다고 예외가 결코 될 수 없다.

4. 이 땅에 속하여 살아가는 인생 여정에는 언제나 육체의 일은 생각보다 나에게 가까이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5. 결국 우리는 갈5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성령의 사람으로 육체의 일을 버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6. 아울러 6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범죄한 일이 드러난 사람들"을 어떻게 관용해야 하는지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7. 죄는 미워하데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8. 나쁜 행실은 죄의 영향아래 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일이다. 죄의 영향아래 있지 않고 늘 성령안에 깨어 있도록 나를 살피고, 범죄한 사람을 권하여야 할 것이다.

9. 1절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이들을 교회와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10. 1절 이어서 말씀하기를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11.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각나는 말씀이 있다.

12.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참고) 마태복음 7장 1-6절 <네 눈 속에 들보를 빼어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13. 참고) 고린도전서 4장 21절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14.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살펴보자. 나는 어떻게 죄를 범한 자들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15. 첫번째는, 1) 신령한 자가 되어라.
 나는 첫번째로 말하고 싶다. 먼저 늘 신령한 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속에서 이는 그 무엇보다 우선이며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다. 신령한 자가 되지 않은 충고나 권면이나, 사람들과의 관계는 늘 약함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완벽히 신령한 자가 될 때까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 만큼 신령한 자가 되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우선이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신통한 사람이 아니라, 신령한 사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자.

16. 두번째는 2) 온유한 심령으로 하라.
 온유한 심령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는 끌리는 무엇이 있다. 잘 빗어진 심령같다. 포근하면서도 위로가 되며 안기고 싶다. 그 사람에게는 품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 그만큼 어머니처럼 포근하며 아버지의 다정함을 느낄 수 있다.
 죄로 실수하여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고 있는 사람이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은 바로 온유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음성을 혼내기 위함이 아니요, 꾸짖음이 아니라 온유한 심령에서 부르는 사랑의 음성이다.
 창3장 8절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9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님은 시몬을 부르셨다. 실망과 좌절과 실패속에 있는 베드로를 찾아가 말씀하셨다. 그 때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온유한 심령의 소리였다.
 요21장 15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하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속에서 요한의 마음을 녹았으며, 실망과 좌절, 실패는 물러나고 물밀듯 내 맘음을 적시는 사랑의 포근함을 누릴 수 있었다.

 죄와 실패한 인간을 찾아가신 하나님, 예수님의 심령으로 우리도 범죄한 일이 드러난 사람들을 찾아가야 한다.

17. 세번째는 3) 바로 잡도록 권면하라. 아주 조심스럽게 잘하라.
 아주 조심스럽게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님,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 베드로에게 찾아가 그들을 바로 서도록 도와주었다.
 결국 그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으며 새사람이 되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일으켜 세워주는 힘이 우리 안에 필요하다. 회복하여 다시 사명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격려하며 권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우리 안에 꼭 필요하다. 거기까지 셀 수 있도록 우리는 무한 책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죄에 넘어져 일어나 새롭게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결코 홀로 설 수 없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으면 권면과 사랑이 필요했다. 그들을 격려하는 누군가 있었으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들을 다시 죄에서 넘어져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일어서 새사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하였다.

 18. 네번째는 4) 자신을 잘 살펴보아라.
 내 자신을 살펴보도록 하라. 성경은 우리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렇다면 죄로 넘어진 사람들을 또한 내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성경에 이야기는 성공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패한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실패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 우리 자신을 살피는 것이다.
 시편 51편 다윗의 이야기는 인생에서 실패한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는 실상은 우리의 이야기이며, 나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 말씀은 나를 가장 잘 해부하고 있으며,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이야기지이지만, 실상은 나를 회복시키는 이야기이다. 나를 일으켜 주시는 이야기이다.
 시편 51편 10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2절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죄 또한 나를 살피는 거울이며 나를 회복시켜주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19. 다섯번째로 5) 범죄는 시험의 결과임을 기억하라. 죄에 넘어진 결과이다. 죄를 미워해야지 미혹한 영과 맞서 싸우도록 하라. 결코 사람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다. 미혹케 하는 영이다. 적을 바로 알아야 승리할 수 이다. 적을 바로 알아야 승리할 수 있다. 적을 바로 알아야 괜한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한다. 권하여 바로 서도록 하는 선한 동기로 시작했을 지라도 적을 잘 알지 못해 오히려 상처를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심하라. 조심하라. 또 조심하라.

20. 여섯번째로 6) 두려움으로 깨어 있으라. "늘 깨어 있으라"
 나도 언제나 시험에 넘어 질 수 있다. 교만하지 말자. 완벽하다 말하지 말자. 자신을 더욱 살펴 늘 깨어 조심하자. 이 일을 두려워하라. 그렇지만, 두려워하는 나를 망치는 일이 되지 않고, 더욱 하나님을 찾는 일이 되도록 하라. 두려움은 믿음의 가장 큰 적이다. 두려움이 오거든 하나님을 찾으라. 하나님을 만나라.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것이 바로 깨어 있다는 증거이다. 언제나 우리도 동일한 "범죄한 일이 드러나는 일"에 노출되어 있음을 기억하자.

21. 오늘도 아직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지 아니한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혹의 영은 최후의 결전을 하고 있다. 어떻게도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넘어지도록 쓰러지도록, 죄 아래 있도록 하고 있다.

22. 그들 가운데 맞서 싸울 강력한 무기는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띠이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으니" 그 어떠한 유혹과 시험으로 넘어지지 않고 더욱 견고한 사랑의 진을, 성령안에 하나가 되는 강력한 진을 구축하도록 하자.

23.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무기는" 찬양이 생각난다.
    우리들의 무기는 육체가 아니요
     그러나 강하오 참으로 강하오
    우리들의 무기는 육체가 아니요
     그러나 강하오 성령안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요
     강한 힘이요 참으로 강하오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요
     강한 힘이요 성령안에서

24. 아멘.


평화의 장소 - 분주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연과 소통하라.

평화의 장소  - 분주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연과 소통하라. 

19세기 중반을 살았던 소로는
분주함을 극복할 방안으로 평화의 장소를 마련했다.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도 집 안에서 구역을
나누는 방법은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어떤
집에서든 그와 같은 장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만으로
그런 공간을 창조할 수도 있다.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디지털 세상의
은신처가 될 수 있다.


- 윌리엄 파워스의 《속도에서 깊이로
》중에서 

1. 나는 오늘도 도서관에 와 있다. 

2. 창밖을 보니 평화롭기 그지 없다. 

3. 잠시 세상의 분주함과 단절하고 자연과 교통하고 쉽다.

4. 커피 한 잔의 여유까지 같이 간다면 더욱 좋겠다. 

5. 겨울에 세상은 푸르름과 앙상한 가지가 공존한다.

6. 자연은 시간에 맞추어 제 갈길을 가고 있다. 

7. 때가 되면 다시금 창밖에는 활기찬 푸르름이 피어오르겠지.

8. 나도 내 영혼 한편에는 푸르름과 한 편에는 앙상한 가지뿐일지라도 때가 되면 생명의 씨앗이 내 영혼과 함께 나의 온몸 곳곳에 찾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9. 마음의 여유를 간절히 찾고 싶다. 

10. 답답함? 불안? 초초? 쫓김? 두려움? 압박?

11. 나의 상태를 지금 돌아보니 이러한 것들로 가득하다.

12. 잠시 내려놓고 지금 여기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라.


마가복음 6장 31절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http://saltandlight21.blogspot.ca/2013/10/630-34.html


Thursday, December 27, 2012

한 날 묵상 - 갈 5:25-26 <성령과 믿음 4. 성령으로 살면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기에 노함이나 투기는 그들의 삶에 없다>

한 날 묵상 - 갈 5:25-26 <성령과 믿음 4. 성령으로 살면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기에 노함이나 투기는 그들의 삶에 없다>

1. 성령의 사람이 되어라.

2. 믿음의 삶은 성령의 삶과 일치된다. 믿음이 있는 것은 결국 성령에 이끌어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3. 믿음의 사랑은 성령의 사람이며,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런데 성령의 사람은 또한 옛것을 버리는 삶 또한 살아야 한다.

4. 옛것을 버리는 출발은 정욕과 탐심이다. 그리고 정욕과 탐심은 바로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5.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창조되었다. 그리고 죄의 영향아래 벗어난 성령의 사람은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6. 인간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이다.

소요리문답 제1과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고전10:31)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고전10:31, 계4:11)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시73:25,26).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계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시73:25-26)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7. 25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7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사는 삶이 아니라.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

8. 이어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헛된 영광을 구함으로 오는 잘못된 현상들이 있다는 것이다.

9. 첫 번째는, 1) 서로 노엽게 하게 된다. 분노, 화를 다스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러한 지혜는 성령에 붙들린봐 될 때 드러난다.

10. 그렇기에 늘 성령충만해야 한다. 단 한번의 성령충만으로는 분노와 화를 계속해서 다스릴 수 없다.

11. 늘 성령충만하기 위해 우리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해야 하며, 찬양하며 기도해야 한다. 이러한 일상의 삶은 우리를 성령과 긴밀하면서도 깨어 있는 관계를 유지시켜 준다.

12. 삶에서 분노와 화를 다스리기는 쉽지 않다. 실상은 늘상 분노와 화를 참지 못해 발설하는 것인 인간이며 나라는 존재이다.

13. 그런데 이러한 화나 분노는 바로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주의하여 보아야 한다.

14. 내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헛된 영광에 사로 잡히면 분을 참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15.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때 서로의 관계는 철저히 무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목표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16. 헛된 영광을 구함으로 드러나는 또 다른 현상은 두 번째는 2) 서로 투기하게 된다.

17. 투기와 시기는 두말하면 잔소리가 된다. 시기와 투기는 참으로 헛된 영광을 쫓아가는 인간의 전형적인 술수이다.

18. 다른 사람을 짋밟고 넘어뜨리지 않고서는 싸움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경쟁의 시대에 남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권묘술수도 다 용납이 된다.

19. 헛된 영광을 쫒아가는 사람들이 모습이다.

20. 그들에게 진정 여유가 없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자신을 말씀과 성령으로 비춰볼 시간이 없다. 그 시간 마저도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다.

21. 왜, 헛된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노함이나 투기함이 나타나는가?

22. 바로 헛된 영광을 성경에 기초하지 않을 뿐 아니라, 헛된 영광을 추구한다는 것을 바로 목표지향적이기 때문이다.

23.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화를 내거나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투기하거나 시기하게 된다.

24. 결국 헛된 영광을 구함으로 오는 노함이나 투기는 "서로 사랑하라"에 반하는 말씀이다.

25. 이는 또한 갈라디아서 6장에서 이어 말씀하는 "서로 짐을 나눠지라"는 말씀에도 반하게 된다.

26. 결국 이러한 모습들은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7.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나타나며,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열매가 가득한 삶을 살게 된다.

28. 믿음과 성령의 관계에서 대해 갈5장 16-26절까지 네 번에 걸쳐 살펴 보았다. 믿음은 성령충만과 관련이 있으며, 성령이 충만할 때 어떠한 열매가 나타나며, 어떠한 삶을 버려야 하는 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29. 성령충만의 삶을 기대하면서 마지막으로 25절의 말씀이 깊이 마음에 새겨진다.

30. 25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31. 성령으로 살아가면 성령으로 행하게 된다는 말씀이 깊이 도전이 된다.

32. 오늘도 기도한다. 나의 삶이 성령의 행하는 삶이 되기를....

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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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말씀 - 마태복음 5장 21-26절
하나님께 영광과 노함의 관계.
 24절 하나님께 예배할 때 다른 형제와 다툼이 있거나, 그들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예배하지 말라. 먼저 그들과 화해하라.
 22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
 소요리문답 제1과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  

소요리문답 제1과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고전10:31)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고전10:31, 계4:11)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시73:25,26).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계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시73:25-26)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질문) 1. 여기에서 ‘제일 된’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 유일한 

2. ‘목적’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서

3. ‘영화롭게 하다’란 무슨 뜻입니까?
 :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한다. 

4. 요리문답이 말하는 것이 왜 인간의 제일 된 목적입니까?
 :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받은 자이기 때문에, 반대하고 배반해도 여전히 하나님의 지배아래 있다.

5. 창조된 본래의 인간은 무엇 중심이 되었습니까?
 : 하나님 중심

6. 죄를 지은 후 인간은 무엇 중심이 되었습니까?
 : 인간 중심, 자기(내)중심

7. 참된 신자의 삶은 하나님 중심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 입니까?
 :삶의 욕망이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며 섬기며 그분에서 즐거워한다.

8. 삶의 중심에 ‘자기’라는 말이 왜 나쁩니까?
 : 자기를 생각한다. 무엇과 같이 될 것을 생각하며, 자신을 즐겁게 하기를 애쓴다. 

9. 하늘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사이 엔 방법적이 차이가 있는가?
 :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마치 거울과 같아서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하도록 지음받았고, 초대되었고, 자원하여 이 일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것은 곧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던 일이었다(요17:4). 

10. 행악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가?
 : 행악자는 없다. 하나님 스스로는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심으로서 영광을 받으신다.

11. 신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 이외에 다른 목적들을 갖는 것도 적절한가?
 : 아니다.

12. 생의 어떤 부분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가?
 : 모든 부분에서 - 삶의 전부- 모든 시간과 활동을 불문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http://www.donghaero.org/technote/read.cgi?board=bible&y_number=80&nnew=1

Monday, December 24, 2012

환경이 말보다 강하다 - 소그룹 네트워크 361호 - 환경이 말보다 강하다


“당신이 교회에 다닌다면, 한 주 동안 접하는 메시지들 중에 가장 정교하게 꾸민 메시지는 무엇인가? 아마 주일 대예배 설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소통의 법칙은 이렇게 말한다. 설교의 진리와 환경의 진리가 서로 충돌할 경우, 시간이 흐를수록 전자가 패배하게 될 것이다. 비록 당신의 교회가 설득력 있는 말로 용서를 가르칠지라도, 만일 당신의 환경은 비판과 비난과 냉소로 가득 차 있다면, 교인들은 화해보다는 소외를 배우게 될 것이다. 여기에 담긴 함의는 우리의 교회 환경이 우리의 좋은 메시지와 충돌하지 않고 부합하도록 만드는 일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은혜의 공동체 혹은 은혜가 없는 공동체가 말보다 훨씬 더 그리스도인들을 훌륭한 모습으로 혹은 일그러진 모습으로 빚어낼 것이다.”(“제자도와 영성형성” p. 75)
많은 목회자들의 착각 중 하나가 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감동을 얻고 중요한 사실을 배웠다면 그 설교로 인해 청중들의 삶이 변화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아무리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자기 삶이 변화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설교자는 물론 정확한 메시지를 가진 감동적인 말씀을 전해야겠지만, 그것만으로 교인들이 변화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전해진 말씀은 그 환경 가운데 충돌하지 않고 그 안에서 부합하며 자라나게 해야 합니다. 좋은 말씀을 전했다면, 그 말씀의 메시지가 장애물 없이 자라나고 적용될 수 있도록 환경을 꾸며야만 합니다. 이것이 목회자들이 교회 내의 소그룹에 관심을 가지고 소그룹 지도자(구역장, 순장, 리더)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문제는 목회자가 교회 내의 소그룹을 자신이 직접 인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을 서서히 잃어가곤 하는 현실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대중으로 만날 뿐, 소그룹의 일원으로서 만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성향으로 인해 소그룹보다는 대그룹(목회자 자신이 인도하는)에 더 많은 관심이 가기 때문에, 결국 목회자는 교회의 모든 역량을 자기가 인도하는 대그룹에 쏟아야 하는 것처럼 강조하고 교회를 몰아가곤 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교회 내의 소그룹이 목회자들의 돌봄과 관심 속에서 꾸려지지 않고 방치된다면, 소그룹에서 나오는 이야기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관계들은 대그룹에서 선포되는 설교나 메시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어쩌면 반대되는 것으로 형성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예배 시간에는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고 그 자리에서 아멘을 외칠지는 몰라도, 그 삶은 소그룹에서 느끼고 체험한 것들을 기준으로 형성되어 가며, 결국에는 이 괴리감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또는 이런 괴리감을 당연하게 여기며 예배의 설교는 그저 하나의 “공연” 쯤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할수록, 소그룹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참석한 성도들의 숫자나 반응에 대해 관심이 간다면, 소그룹을 인도하는 리더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말보다 환경이 훨씬 강하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을 의미 있게 맞으려면 - 신국원 교수

성탄절을 의미 있게 맞으려면

Special Column|2012.11.30 19:04

최초의 크리스마스는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의 성취였지만, 그 이후 크리스마스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의미를 되새기는 축제가 되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성탄의 의미를 다음 세 가지로 보았습니다.

첫째, 목자들에게 주어졌던 메시지로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 기쁨을 주실 구주의 탄생 소식이었습니다. 둘째, 동방박사들에게 왕의 왕이 오심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시므온과 안나가 고백한 성탄 메시지(눅 2:25)로, 복음의 핵심인 죄와 고통에 시달리던 인류에게 주는 평화와 위로의 메시지였습니다. 이처럼 크리스마스는 구약에서 약속된 구원의 성취를 축하하며 그 의미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성탄절이 크게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축제는 상업화 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크리스마스뿐 아니라 추석이나 설날도 상업화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문화의 중심이 “소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소비가 따라붙지 않으면 축제 분위기가 나지 않습니다.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이 팽배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에도 쇼핑을 하고, 선물을 주고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심지어 교회와 성도의 가정에까지 침투했습니다. 교회에서 선물을 주고 받고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행사도 중요하지만 성탄의 의미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지낸다면 문제입니다. 특히 크리스마스는 연말과 함께 오기 때문에 교역자들이나 열심히 봉사하는 이들에게는 부담이 매우 큽니다. 모두가 바쁘다 보면 성탄절이 매년 돌아오는 하루의 축제가 되어 의미가 퇴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말연시준비로 인해 성탄절 준비에 소홀해서는 안됩니다.

성탄절 축하에 위로와 소망이 빠지고 즐거움만 남은 축제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위로와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오신 날입니다. 이 본래의 의미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목자와 동방박사, 천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증거했습니다. 수 천 년을 기다린 위로와 소망,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특별히 전도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를 교회와 성도들 가정 내의 하루 행사로 끝낼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복된 날로 삼았으면 합니다.

특히, 성탄의 메시지가 정말 복되게 들리는 곳으로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그 당시 가장 소외된 목자들에게 전해졌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그러한 대단한 소식이 왕궁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임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의 크리스마스 문화는 정말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정말 기독교의 메시지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진정한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는 분이 오셨다’는 말을 전해주는 모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상업화된 크리스마스 문화에 대해서는 교회가 무조건 비판하기보다 대안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이러한 것이라고 말해줘야 합니다. 진정한 크리스마스를 알릴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성도들이 앞장서서 대안적인 크리스마스 문화를 전해야 합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모든 성도들이 세상 문화보다 훨씬 더 수준 있는 모습으로, 널리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기회로 삼기를 기도합니다.

신국원 총신대 신학과 철학교수로 어바나 샴페인에 있는 일리노이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연구교수이며 본 단체 실행위원이자 세계관아카데미 소장이다. 저서로는『변혁과 샬롬의 대중문화론』, 『신국원의 문화 이야기』, 『포스트모더니즘』, 『니고데모의 안경』 (이상 IVP) 등이 있다.

Friday, December 21, 2012

한 날 묵상 - 갈 5:22-24 <성령과 믿음 3. 오직 성령의 열매는>


1.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사람이다.

2.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구주로 결코 고백할 수 없다.

3.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육체를 그리스도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는데,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으로 살아가는 인생이다.

4.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사람이며,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으로 살아가는 인생이다.

5.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아가야 한다.

6. 사과나무는 사과를 열매 맺듯이,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를 맺듯이 성령의 사람도 성령의 열매를 맺으로 살아가야 한다.

7. 성령의 열매는 이러한 것이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8. 성령의 사람들이 맺어야 하는 성령의 열매를 금지할 법은 결코 없다.

9.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십계명을 반드시 지켜야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울타리안에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성령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의 보호 아래 거할 수 있다.


10. 성령의 열매와 더불어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와 더불어 육체의 일의 뿌리가 되는 정욕과 팀심을 못박아야 한다.

11. 정욕과 탐심은 일만 악의 뿌리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죄아래 있는 모든 행위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아 죄의 영향아래 있는 정욕과 탐심으로부터 시작된다.

12.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어 아홉가지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정욕과 탐심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13. 결코 사람은 두 가지를 함께 가질 수 없다. 정욕과 탐심이 드러나면 성령은 사그라들게 되어 있다.

14. 반대로 성령이 살아나야만 정욕과 탐심을 버릴 수 있다.

15. 오직 정욕과 탐심을 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십자가에 못박는 것 뿐이다.

16. 십자가에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새로운 세상을 허락해주셨다. 그렇듯 우리도 죄아래 있는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달아 죽어야 한다.

17. 로마서 12장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8.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는 이제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나의 육체의 소욕이 되어야 한다. 바로 정욕과 탐심이다. 그리스도만 홀로 십자가에 두어서는 결코 안된다.

19. 오늘 나는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20. 오늘 나는 탐심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는가?

21. 이일에 집중하여 세상속에 거하기를 원한다.

22. 주님의 은혜를 구한다. 할렐루야. 아멘.

 =====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오직 성령의 열매

1) 사랑

2) 희락

3) 화평

4) 오래참음

5) 자비

6) 양선

7) 충성

8) 온유

9) 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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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

탐심

Thursday, December 20, 2012

Monday, December 17, 2012

한 날 묵상 - 갈 5:19-21 <성령과 믿음 2. 성령의 사람은 육체의 일을 버리노 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이를 버려 야 하노라>


1.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육체의 일을 버리는 삶이다.

2. 엡 5장 3절.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3. => 성도들이 행해야 하는 마땅한 것들은 육체의 일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닙니다.
4. => 이러한 것들은 그 이름 조차도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말이 씨가 됩니다. 아무 생각없이 말하는 것들은 실상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5. 한편으로 그렇든 아무 생각없이 하는 말일지라도 삼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을 생각이 되고, 행동이 되어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6. 19절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7. => 육체의 일이란 죄의 영향아래 드러나는 모습들이다. 죄로 인해 인간은 관계의 파괴가 몰아쳤다. 자신 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관계가 파괴되었다.
8. 이게 바로 죄의 영향력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9. 이 모든 것들이 죄로 인해 파괴되었다. 육체의 일이란 바로 이러한 죄의 영향아래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10.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11. => 가장 전형적인 육체적인 일이다. 이러한 일들이 가장 위험한 것은 이는 관계를 실제적으로 파괴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다. 가정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장 중요한 관계의 질서이다. 가정을 통해 가족을 이루고, 가족의 세대를 통해 민족이 이루어지게 된다.
12. 최근에 일어나는 성폭력과 성추행은 가정을 파괴하며 생명까지 앚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러한 일들을 고발하는 영화들이 있는데, "도가니", "돈크라이 마마"이다.
13. 성의 타락은 생명의 타락이며 가족의 파괴이며 새생명을 위해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시기까지 죄가운데 있지 않게 하시는 생명의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악이다.

14. 20절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 이러한 육체적인 일들은 바로 십계명의 제1, 제2, 제 3의 계명을 어기는 행위들이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된다.

14.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15. => 이러한 육체의 일을 가지고서는 이웃과의 관계를 바르게 이룰 수 없다. 인간의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홀로 있을 때에 일어나는 문제들이 무엇인지 우리는 충분히 잘 알고 있다.
16. 홀로 있지 않고 인간이 관계를 맺을 때 죄로 인해서 이웃과의 파괴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관계를 맺는데 바른 관계 맺기가 아니라 파괴된 관계 맺를 하게 된다.
17. 파괴된 관계 맺기는 끼리 끼리로 나타난다. 자기 당을 짖게 된다. 그리고 자기 당 이외의 사람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그들의 모임을 파괴하려고 한다.
18. 고린도전서에서 나타난 분쟁의 문제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고린도전서 1장 10-17절에서 바울은 말하고 있다.
19. 1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20. 12절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21. 분쟁, 시기, 분냄을 바로 이처럼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육체적인 일이다.

22. 21절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탐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23. => 탐욕, 한탕주의, 방탕함이는 바로 술취함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취해야 한다. 그런데 술에 취하게 되면 탐욕이 자라게 되고 방탕하면서 투기나 신실하지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한다.
24. 자신안에 있는 나와의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오직 물질이나, 돈이나, 재물이나, 탐욕이 자신을 이끌어가도록 내버려 두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25. 바로 투기, 술취함, 방탕함은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유물론적 삶을 살을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자신을 이끌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26.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7. => 이러한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렇다. 성령에서 떠나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이다. 자연스럽게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8. 결론.
이러한 모든 모습들은 다 성령에서 떠나 살아가기 때문에 드러난 일들이다.
29. 한번의 성령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육신과의 싸움은 한 번의 성령체험으로 되지 않고, 끊임없이 내 안에 성령의 거하도록 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
30. 바울은 갈라디아서 자유를 말하면서 성령안에서 자유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이기도 한다. 육체의 일을 떠나야 한다는 말씀이다.

31.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들" pp81-82.

성령을 체험함으로 우리는 옛자아의 실현이 아니라 죽음을 체험하낟. 옛 자아의 야망이 성취되기보다 좌절되는 쓰라림을 맛본다. 십자가의 은혜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사할 뿐 아니라 죄의 근원인 옛사람의 생명을 파괴한다. 그 욕심과 야망을 가차 없이 십자가에 못 박는다. 우리의 옛 자아를 죽이는 십자가의 능력을 매일 체험하지 않으면 부활의 능력을 결코 경험할 수 없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새사람으로서의 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령의 능력을 누리는 유일한 비결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는 것이다.

...

성령을 체험하면 나를 체험하는 동시에 또한 너를 체험한다. 인간은 진정한 자아뿐 아니라 타자를 잃어버렸다. 세상에는 오직 내가 이용할 '것'으로서의 너만 널려 있을 뿐 진정한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옥이 뒤틀린 관계에서 온다면 천국은 관계의 회복으로부터 온다.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바로 관계의 회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원수 된 것뿐 아니라 인간 서로 간에 원수 된 것을 소멸하였다(엡 :15-18 참조). 그분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 그리고 우리와 이웃 사이로 가신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고 또한 형제자매들과도 교제하게 하신다. 천국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된 곳이다.

32. 아직 미정리다. ^^

한 날 묵상 - 갈 5:16-18 <성령과 믿음 1.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한 날 묵상 - 갈 5:16-18 <성령과 믿음 1.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1. 갈라디아서의 믿음은 은혜이다.

2. 그리고 그 은혜는 결국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3. 은혜안에 자유함은 사랑으로 나타나게 된다.

4. 1-3번의 말을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역사
 2) 사랑으로 역사하는 힘
 3) 믿음은 사랑을 타고

5.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믿음안에서 사랑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6. 때론 사랑으로 역사하는 힘으로 살아가기 쉽지 않다.

7. 왜 그럴까? 바로 우리가 여전히 율법아래 있기 때문이다.

8. 율법아래 있는 육체의 일에 대해서 19-21절에서 말하고 있다. 이 말씀에 대해서 다음에 살피기로 하자.

9. 그렇다면 율법 아래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10. 18절에 보니,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랴"고 말씀하고 있다.

11. 우리의 삶이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될 때 사랑으로 역사하는 힘이 우리의 삶에 풍성히 드러나게 된다.

12. 이는 믿음이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일들이다.

13. 믿음은 결국 사랑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일을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14. 갈 5장 22-24절에서 "오직 성령의 열매"가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다. 성령의 열매가 우리 삶에 풍성히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15. 성령은 우리가 사랑하려 할 때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16. 여기서 잠깐, New 굿데이 성경" 신약 p309에서 있는 글을 보자.

17. "성령의 인도" 성령은 우리의 모든 삶을 변화시킴으로써 우리를 인도하신다.
 첫째, 우리가 지켜야 할 성경의 지침, 목표에 해야 할 성경의 목표, 닮아야 할 성경의 모델을 가르쳐 주신다.
 둘째, 독실한 생각과 조언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성경의 가리침을 가장 잘 따를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하신다.
 셋째,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 안에서 성장을 간절히 소망하게 하신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그것을 기뻐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인도하신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좋은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행하게 된다.

18. 16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9. 성령을 따라 행하려 할 때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육체의 소욕"이다.

20. 17절 "육체의 소육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21.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방향이 분명해진듯합니다.

22. 육체의 소욕은 버리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23. 보다 구첵으로 사도 바울은 육체의 소욕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19-21절에서, 성령의 열매는 무엇인 22-2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4. 다음에 이 두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25. 오늘은 정말 육체의 일보다 성령의 열매를 따르는 한 날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6. 그리하여 우리의 믿음이 사랑을 타고 흘러 흘러 온 세상을 적시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7. 오늘 한 날도 샬롬을 구하며...

28. 아멘.

===
사람의 마음 문을 여는 열 가지 무기

주위에 마음 문이 닫혀있는 사람이 있으세요? 
그 사람 때문에 힘이 드세요? 
마음 문만 연다는 악마가 천사로 변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그 사람 때문에 오히려 행복할 겁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과 같은 무기를 사용해 보세요.

1. 환한 미소
관계가 불편하다고 인상 쓰면 점점 더 악화됩니다.

2. 먼저 건네는 가벼운 인사
상대방이 인사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밝은 목소리로 먼저 인사하세요.

3. 구체적인 칭찬
틀에 박힌 칭찬보다는
상대방의 변화에 민감한 칭찬이 효과적입니다.

4. 상대방에 대한 경청
귀로만 듣지 말고 눈과 몸짓으로도 들으세요.

5. 즉각적인 작은 배려
요청하거나 표현하기 전에 먼저 필요를 채워줘 보세요.

6. 낙심한 순간의 격려
힘들어 할 때 잘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줘 보세요.

7. 긍정적 리액션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됩니다.

8. 미러 효과
호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무의식적으로 행동을 따라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에게 호감을 갖습니다.
상대방이 물을 마시거나 깍지를 끼는 것 같은 행동을
자연스럽게 따라해 보세요.

9.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
선물만큼 강력한 무기는 없지 않을까 싶네요.

10.기도
그래도 안 된다구요?
위의 것들을 실천하면서 매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 보세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 때문에 불편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보다는
그 사람과 좋은 관계에 있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을 갖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을 의미합니다.


-탁영철님이 담벼락에 남겨주신 글-

Saturday, December 15, 2012

내 마음의 밥상 - 히브리서 10장 24-25절 <서로 돌아보라.

<서로 돌아보라>

서로 돌아봅시다.

어떻게 서로를 돌아볼까요?

사랑으로,
선행으로,
사랑과 선행에 대해서 서로 격려함으로,
서로 돌아보라.

서로 돌아보기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라.
자주 모이라.
함께 모이라.
초청하여 모이라.
모이는 것이 돌아보는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요. 모일 때 잘 모여야 합니다.
잘못 모이면 아니 모인만 못합니다.

그렇다 모여서 무엇을 할까?

"격려하며" - 사랑과 선행으로 그들을 격려하자.  
"권하여" - 책망 할 것이 있으면 그들을 책망하자.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그런데 모여서 책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모여서 칭찬만 하면 좋지요. 모든 것이 좋지요.
그런데 모여서 칭찬만 하면
그냥 잠깐 즐거움을 맛보는 모임이 됩니다.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모임이 되려면
책망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책망을 해야 할까요?
 권계하며 
 격려하며
 붙들어주며
 오래 참으라

이렇게 네 가지가 꼭 책망할 때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주 모여서 무엇해요?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나도 자주 모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혼자 있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이러면 외로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찾아 만나러 간다.
대화한다.
그러면 좋다.

그런데 말이죠...
저처럼 하고 싶어도 잘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찾아가서 만나주지 않으면
쉽게 소그룹같은 모임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찾아가야 합니다.

모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주 나쁜 습관입니다.
사탄의 권법이지요.
거기에 넘어지면 안됩니다.
어색해도
불편해도
별 유익이 없다 생각이 들어도
모여야 합니다.

모여야 믿음이 성장합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더욱 그리해야 합니다.
그 날이 가까이 올 수록 더욱 그리해야 합니다. 

오늘도 찾아갑시다.

오늘도 만나러 갑시다.
오늘은 혼자 있지 맙시다.
오늘은 형제가 연합함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지를 아는 한 날이 됩시다.

===
히브리서 10장 24-25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모이기를 폐하는" ... 자꾸 모여야 한다. 소그룹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모여서 무엇을 할까?
"격려하며" - 사랑과 선행으로 그들을 격려하자.  
"권하여" - 책망 할 것이 있으면 그들을 책망하자.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어떻게 책망할 것인가?
권계하며 
격려하며
붙들어주며
오래 참으라

이 네 가지가 꼭 책망할 때 필요하다. 

===
교회가 시작되고 난 이후부터 여러 가지 방법들을 통해 영혼을 가꾸는 훈련들을 해왔습니다. 공동체 예배, 함께 떡을 떼는 일, 사도들의 가르침, 공동체 금식과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서로 책임을 지는 일 등입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가 교회의 목표이며 책임이었습니다. 교회가 그러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면, 성도들에게 어떤 행동들을 권하고 격려할 수 있는 권리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물론 용서하고 화해하고 망가지고 깨어진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수용한다는 것이 공동체에 들어오겠다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요구가 오늘날 교회를 찾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히 10:24-25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서로 돌아보아”라는 표현을 주목해서 보면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는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할지 신중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격려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서로를 고무시키고 자극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상호책임은 격려와 책망 사이의 곡예와 같습니다.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한눈을 팔거나 지쳤을 때 격려가 필요합니다. 격려는 서로를 책임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우리가 성공할 때 박수쳐주고 실패할 때 손잡아 일으켜줄 수 있는 믿음의 동지가 필요합니다. 

 격려는 또한 책망을 수반합니다. 책망하는 것은 경고하고, 주의를 주며,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특정한 사람들은 상황에 맞게 특정한 방법으로 대하라고 조언했습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이 구절에 나오는 동사들인 권계하며, 격려하고, 붙들어주며, 참으라 등은 공동체의 문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고 인내하는 데는 확실히 격려가 필요합니다. 이것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특성입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닌 오직 공동체를 통해서만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첫 번째 동사 ‘권계’는 우리 대부분이 불편해 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사랑의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를 사랑 안에서 돌보아야 한다면,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를 말하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속에 격려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지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 어떤 부분에서 어떤 격려가 필요한지,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데 방해를 하는 요소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사랑의 대화를 통해서 알아보고 격려하고 때로는 책망함으로 함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공동체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 글은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의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 6장 일부를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반석 위에 인생 세우기 - 국제제자훈련원, 목적이 이끄는 삶을 위한 매일의 묵상 1084호

반석 위에 인생 세우기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4)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면 우리가 그분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지난 몇 일간 우리는 야고보서 1:22-25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삶을 살기 위한 성경 연구 방법을 살펴보았다.
  • 성경을 읽고 해석하기 “…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
  • 성경을 기억하기 “…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
  • 성경에 반응하기 “… 실천하는 자니 …”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기억하지만 그것을 삶에 하나도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야고보서 1장 22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고 경고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우리는 말씀 중에서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긴 부분만 믿고 있는 것이다. 내가 견실한 가계 경제에 대한 성경적 원리에 대해 설명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 중에서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긴 부분만 믿고 있다.
내가 새들백 교회에서 전하는 말씀은 거의 예외 없이 모든 요점에 ‘동사’가 들어 있다. 왜 그럴까? 하나님은 우리가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좋은 성경 강의는 너무나 많이 듣지만 배운 것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모른다.
마태복음 7:24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성경 말씀을 삶에 적용하면 인생에서 폭풍우를 만나도 안정을 얻을 것이다.
우리 인생에는 언제 어떤 폭풍우가 몰아칠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 하나는 안다. 삶을 하나님 말씀 외에 다른 것 위에 세우면 역경이 닥칠 때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다. 동시대의 문화는 모래가 파도에 휩쓸리듯이 시시각각 변한다.
그 대신 우리는 변함 없는 하나님 말씀을 적용하는 것, 그 위에 삶을 세워야 한다. 그 반석을 이길 수 있는 폭풍우는 아무 것도 없다.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당신은 지금 현재 어떤 폭풍우를 만나 싸우고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심을 신뢰하고 그분의 인도를 바라며 말씀을 찾고 있는가?
  • 오늘 당신은 경건의 시간에 어떤 말씀을 읽었는가? 오늘 당신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 어떤 ‘행동’을 하겠는가?

Friday, December 14, 2012

한 날 묵상 - 갈 5:13-15 <'바보야 문제는 사랑이야' 오직 서로 사랑으로 종 노릇하라>


1.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값지게 됩니다.

2. 은혜입은 자들에게 율법은 은혜입기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3. 바로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4. 사랑하라. 사랑하라. 죽도록 사랑하라.

5. 사랑의 노래는 일반 가요에서도 주요한 주제입니다. 그만큼 사랑은 사람들의 삶과 밀접합니다. 사랑없이는 못삽니다.

6. 사랑의 진정한 일방적 주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Give and Take가 아닙니다. 일방적 사랑입니다.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7. 받을 사랑을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편에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이며, 다른 편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8. 로마서 13장 8-10절에서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9. 그리고 말합니다. 8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이루었느니라"

10. 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10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1. 사랑이란 사랑의 대상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생각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편에서는 사랑이라고 사랑의 대상에서도 사랑일 수 없습니다.

12. 이처럼 사랑은 이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13. 오늘 본문에서는 말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13절)

14. 갈 5장 2-12절은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을 각 개개인이 어떠한 힘으로 행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다면, 13-15절은 공동체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15. 앞서 갈 5:2-12절에서 사랑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며 행해야 하는 핵심 주제임을 말씀드렸습니다.

16. 그리고 우리는 사랑의 전사가 되어 작은 누룩이지만 온 덩이에 퍼지는 사랑의 누룩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7. 그리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공동체 안에서, 우리 안에서 사랑을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18. 그 방법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나니 서로 사랑하기를 종노릇하라는 것입니다.

19.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를 종노릇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
 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20. 율법은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14절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예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율법이 주는 어렵지만 고귀한 말씀일 친히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똑같이 사랑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게 바로 제자의 삶입니다.

21. 한쪽의 일방적은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면, 이는 사실 쌍방이 모두 일방적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22. 나도 내 아내에게 일방적 사랑을 하고, 아내도 나에게 일방적 사랑을 한다면, 이는 참으로 쌍방이 온전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3. 이러한 사랑이 13절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사랑의 방법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24. 이 시대에 진정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이면 허다한 허물을 덮을 뿐 아니라 공의와 공법을 하수처럼 흐르게 할 수 있습니다.

25. 모든 문제의 해결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면 모두에게 기쁘고 감사하게 마무리 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26. "바보야 문제는 사랑이야" 이 말이 가슴에 팍 와닿습니다.

27. 그래서 진정 십자가 사랑이 위대합니다. 바보처럼 진정 그 분은 사랑으로 모든 율법의 말씀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28. 우리 모두 피차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여 율법의 말씀을 완성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9. 진정 사랑합니다.

30. 아멘.

==
FB에서

한 날 묵상 - 갈 5:13-15 <'바보야 문제는 사랑이야' 오직 서로 사랑으로 종 노릇하라>
사랑의 진정한 일방적 주는 사랑입니다. 받을 사랑을 계산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 편에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이며, 다른 편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이루었느니라"말씀합니다.

 이처럼 사랑이란 사랑의 대상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생각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편에서는 사랑이라고 사랑의 대상에서도 사랑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이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갈 5: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그런데, 한쪽의 일방적은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면, 이는 사실 쌍방이 모두 일방적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 참으로 요묘합니다.

 나도 내 아내에게 일방적 사랑을 하고, 아내도 나에게 일방적 사랑을 한다면, 이는 참으로 쌍방이 온전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요. 이러한 사랑이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는 사랑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면 모두에게 기쁘고 감사하게 마무리 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바보야 문제는 사랑이야"
 이 말이 가슴에 팍 와닿습니다.

 사랑하는 청소년부 친구들 우리 우리 모두 이런 사랑 만들어갸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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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말씀 - 히브리서 10장 24-25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사람의 마음 문을 여는 열 가지 무기

주위에 마음 문이 닫혀있는 사람이 있으세요? 
그 사람 때문에 힘이 드세요? 
마음 문만 연다는 악마가 천사로 변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그 사람 때문에 오히려 행복할 겁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과 같은 무기를 사용해 보세요.

1. 환한 미소
관계가 불편하다고 인상 쓰면 점점 더 악화됩니다.

2. 먼저 건네는 가벼운 인사
상대방이 인사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밝은 목소리로 먼저 인사하세요.

3. 구체적인 칭찬
틀에 박힌 칭찬보다는
상대방의 변화에 민감한 칭찬이 효과적입니다.

4. 상대방에 대한 경청
귀로만 듣지 말고 눈과 몸짓으로도 들으세요.

5. 즉각적인 작은 배려
요청하거나 표현하기 전에 먼저 필요를 채워줘 보세요.

6. 낙심한 순간의 격려
힘들어 할 때 잘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줘 보세요.

7. 긍정적 리액션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됩니다.

8. 미러 효과
호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무의식적으로 행동을 따라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에게 호감을 갖습니다.
상대방이 물을 마시거나 깍지를 끼는 것 같은 행동을
자연스럽게 따라해 보세요.

9.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
선물만큼 강력한 무기는 없지 않을까 싶네요.

10.기도
그래도 안 된다구요?
위의 것들을 실천하면서 매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 보세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 때문에 불편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보다는
그 사람과 좋은 관계에 있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을 갖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을 의미합니다.


-탁영철님이 담벼락에 남겨주신 글-








Christmas 2012 primary program

Wednesday, December 12, 2012

한 날 묵상 - 갈 5:2-12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서로 사랑하라>


1.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2.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안에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3.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무시해도 되나? 아님 무엇이란 말인가?

4. 성경에서 흐르는 한 줄기의 물줄기는 사랑이다. 사랑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다. 사랑으로 성경은 관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의 실천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였다.

6.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는 사랑의 가득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7. 사랑은 동사이다. 고아와 과부를, 약한 자들을 사랑하는 것은 구약 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는 핵심의 주제이다.

8. 약한 자들, 죄인들의 친구로 예수님은 오셨다.

9. 오늘 나에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사랑을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10. 그렇다면 사랑의 실천이 율법이 되지 않고, 다시 이전의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과 힘은 무엇인가?

11. 오늘 본문이 이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12.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들이 율법의 말씀,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에 있어서 이전의 유대주의자들처럼 행하는 모습을 경계하였다.

13.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말하고 있다.
 3절 다시 할례로 가는 자들에게
 4절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14. 그렇다면, 어떻게 유대주의 자들처럼 율법ㅇ르 대하지 않고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5절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15. 말씀을 행하는 힘은 두 가지이다.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것과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다.

16. 이 두 가지 힘으로, "성령"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이는 철저히 은혜가 사랑의 실천의 중심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17. 성령은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들을 때, 깨닫게 하시고 행하게 하시고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끈다.

18.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무엇인가? 바로 적은 힘이지만 널리 퍼지는 힘이다.

19. 우리가 아무리 달음질을 잘하여도 한계가 잇다. 우리를 사랑의 실천으로 이끄는 힘은 그 분의 권면이다(8절).

20. 적은 힘들이 모여 큰 사랑의 강물을 흘러 바다로 이끌어 간다.
9절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21. 우리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한다. 오직 앞서 말한 두 가지 힘으로 전진하며 달려가야 한다. 10-12절.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22.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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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의 고백과 증거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23.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복음의 진리안에서 설 때 오는 핍박을 두려워말라. 기꺼이 감수하자. 우리의 작은 실천 하나 하나가 아름다운 십자가가 되어 빛나게 된다"

24.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들은 성경을 바라볼 때 율법주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그리고 사랑으로써 역하는 믿음으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행함을 실천해야 한다.

25. 오늘 본문 2-12절은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을 각 개개인이 어떠한 힘으로 행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다면, 13-15절은 공동체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26. 사랑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며 행해야 하는 핵심 주제이다.

27. 오늘 사랑의 전사가 되어 작은 누룩이지만 온 덩이에 퍼지는 사랑의 누룩이 되기를 소망한다.



Monday, December 10, 2012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하라 - 목적이 이끄는 삶을 위한 매일의 묵상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하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다음 두 가지를 해야 우리는 진짜로 성경을 연구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배운 것을 글로 적고, 둘째, 그것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할 때, 하나님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실 것이다.
성경으로부터 배운 것을 글로 적으면 그것을 기억하게 된다. 자리를 잡고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마다 종이와 연필을(또는 성향에 따라 컴퓨터를) 옆에 두라. 그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신 말씀을 듣고 적으라. 계속 기록해 가라. 몇 년 후 그 동안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말씀 안에서 배운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라. 바로 이 때문에 우리 모두는 어떤 종류든 소그룹 사역에 참여해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영적 훈련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렇게 했던 한 소그룹을 찾을 수 있다. 사도행전 17:11은 이렇게 말한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의 신자들은 성경을 상고(연구)했다. 그들은 소그룹으로 토론을 벌였다. 당신도 그렇게 하고 있는가? 소그룹에 참여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소그룹 참여를 미루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 학생이었을 때, 당신은 배운 것을 기억하기 위해 어떠한 전략을 사용했는가?
  • 때때로 가장 힘든 부분은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를 아는 것이다. 소그룹에 참여하기 위한 첫 발을 내딛기 위해 당신은 오늘 무엇을 하겠는가?

Friday, December 7, 2012

한 날 묵상 - 갈 2장 20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란?>

한 날 묵상 - 갈 2장 20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란?>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즉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강누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래디컬 투케더 p52-53.

하늘 아버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죄에 대해 절망적인 상황에서 불구하고 하나뿐인 아들(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자신)을 보내셔서 인간으로서는 겨코 살 수 없는 삶을 살아갈 길을 열어 주셨다.

...

예수님은 평생을 통틀어 죄와는 완벽하게 담을 쌓고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려 죄의 대가를 치르셨다. 마땅히 인간의 몫으로 돌아가야 할 죽음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 그리곤 죄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구세를 믿으면 주님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의로움의 옷을 덧입혀 주신다.
온전히 순종하는 삶의 출발점은 철저한 죽음이다. 자신에 대해 죽고 제힘으로 무얼 해서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을 얻으려는 시도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

복음은 인간을 행위에서 구원했다. 스스로 죄를 이기고 하나님 앞에 서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스스로 힘쓰길 중단하고 믿기 시작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지해 본 적이 없다면 당장 책을 덮고 그분을 향한 믿음을 재정비하라. 기도를 되풀이 하거나, 사명 선언문에 서명하거나, 뭘 팔아 치울 필요가 없다. 인간이 할 일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라신다.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를 입을 때만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설 수 있다.
"그게 전부야. 덧붙일 말이 없다고!"

하지만 복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을 일하게 한다.

바울은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뒤에 곧바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으 받은자"라고 규정한다.(에베소서 2장 8-10절)

야고보서 2장 1-14. 새변역.
요한일서 3장 16-18절, 새번역.

'일', '행함',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같은 어구를 중심으로 이런 본문들(다른 구절들도 다 마찬가지겠지만)의 의미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

"복음이 또한 그리스도인을 일하게 한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그 '일'의 의미를 분명히 해 두고자 한다.
성경에서 '일' 또는 '행위'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개념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육신의 의지에서 나온 행동으로 하나님을 높이거나 드러내지 못한다는 의미를 담기 일쑤다. 그런 뜻에서 바울은 행위의 문제를 자주 거론했으며 공로를 쌓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을 끈질지게 단죄했다(롬 4장, 갈 3장). 선한 행실로, 또는 공을 세워서 영원한 생명을 더는 길은 전혀 없다.
 제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내도 하나님 앞에 서기에는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엡 2:8-9).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복음은 이러한 행위의 올무에서 인류를 영원히 해방시켰다.

 하지만 때로는 성경이 긍정적인 뜻으로 '일'을 언급하기도 한다. 믿음의 산물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높이는 행위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일이니, 행위니, 행실이니 하는 주제를 거론하는 야고보 사도의 이야기에서는 부정적인 기운을 감지할 수 없다. 다만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토대로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사랑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보살피라고 가르친다. 바울 역시 같은 취지로 "믿음의 역사"(살전 1:3),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살후 1:11, 새번역). "믿음의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갈5 : 6, 새번역) 따위의 문구를 사용했다.

 ...

 성경에는 믿음이 행위로 이어지는 본보기가 차고 넘친다. 하나님을 믿엇던 아브라함은 자식까지 주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로 삼으려 했다(창 15:1-6, 22:1-9, 약 2:20-24). 하나님을 신뢰했던 라합은 목숨을 걸고 그분의 뜻을 좇았다(수 2장, 약 2:25-26).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므로 "더 많이 수고"한다고 했다(고전 15;10).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이 흘러넘치는 까닭에 열심히 일하고 애쓴다는 것이다(골1;27-29).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는가? 그러하다면 하늘 아버지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 동행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약 2:23). 이것이 진실이다.
 예수님은 거듭나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그 가르침에 순종하여 사랑을 흘려보내는 삶을 살게 하신다(요3:1-21; 15:1-17).

...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으면 주님을 위해 대단한 일들을 감당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사 보려는 육신의 의도가 깔린 행위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모든 걸 다 내던질 수 있는 믿음에 기초한 사역이다.
 출발점은 언제나 은혜다. 구원의 근거(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구원의 수단(믿음) 또한 주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구원의 열매(행위) 역시 그분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한없는 영광을 받으신다(고전 151-11, 엡 2:1-10).

복음은 그리스도인을 일하게 한다.

죄책감에서, 아니면 복음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