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날 묵상 - 갈 2장 20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란?>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즉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강누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래디컬 투케더 p52-53.
하늘 아버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죄에 대해 절망적인 상황에서 불구하고 하나뿐인 아들(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자신)을 보내셔서 인간으로서는 겨코 살 수 없는 삶을 살아갈 길을 열어 주셨다.
...
예수님은 평생을 통틀어 죄와는 완벽하게 담을 쌓고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려 죄의 대가를 치르셨다. 마땅히 인간의 몫으로 돌아가야 할 죽음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 그리곤 죄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구세를 믿으면 주님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의로움의 옷을 덧입혀 주신다.
온전히 순종하는 삶의 출발점은 철저한 죽음이다. 자신에 대해 죽고 제힘으로 무얼 해서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을 얻으려는 시도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
복음은 인간을 행위에서 구원했다. 스스로 죄를 이기고 하나님 앞에 서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스스로 힘쓰길 중단하고 믿기 시작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지해 본 적이 없다면 당장 책을 덮고 그분을 향한 믿음을 재정비하라. 기도를 되풀이 하거나, 사명 선언문에 서명하거나, 뭘 팔아 치울 필요가 없다. 인간이 할 일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라신다.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를 입을 때만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설 수 있다.
"그게 전부야. 덧붙일 말이 없다고!"
하지만 복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을 일하게 한다.
바울은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뒤에 곧바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으 받은자"라고 규정한다.(에베소서 2장 8-10절)
야고보서 2장 1-14. 새변역.
요한일서 3장 16-18절, 새번역.
'일', '행함',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같은 어구를 중심으로 이런 본문들(다른 구절들도 다 마찬가지겠지만)의 의미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
"복음이 또한 그리스도인을 일하게 한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그 '일'의 의미를 분명히 해 두고자 한다.
성경에서 '일' 또는 '행위'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개념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육신의 의지에서 나온 행동으로 하나님을 높이거나 드러내지 못한다는 의미를 담기 일쑤다. 그런 뜻에서 바울은 행위의 문제를 자주 거론했으며 공로를 쌓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을 끈질지게 단죄했다(롬 4장, 갈 3장). 선한 행실로, 또는 공을 세워서 영원한 생명을 더는 길은 전혀 없다.
제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내도 하나님 앞에 서기에는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엡 2:8-9).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복음은 이러한 행위의 올무에서 인류를 영원히 해방시켰다.
하지만 때로는 성경이 긍정적인 뜻으로 '일'을 언급하기도 한다. 믿음의 산물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높이는 행위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일이니, 행위니, 행실이니 하는 주제를 거론하는 야고보 사도의 이야기에서는 부정적인 기운을 감지할 수 없다. 다만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토대로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사랑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보살피라고 가르친다. 바울 역시 같은 취지로 "믿음의 역사"(살전 1:3),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살후 1:11, 새번역). "믿음의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갈5 : 6, 새번역) 따위의 문구를 사용했다.
...
성경에는 믿음이 행위로 이어지는 본보기가 차고 넘친다. 하나님을 믿엇던 아브라함은 자식까지 주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로 삼으려 했다(창 15:1-6, 22:1-9, 약 2:20-24). 하나님을 신뢰했던 라합은 목숨을 걸고 그분의 뜻을 좇았다(수 2장, 약 2:25-26).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므로 "더 많이 수고"한다고 했다(고전 15;10).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이 흘러넘치는 까닭에 열심히 일하고 애쓴다는 것이다(골1;27-29).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는가? 그러하다면 하늘 아버지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 동행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약 2:23). 이것이 진실이다.
예수님은 거듭나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그 가르침에 순종하여 사랑을 흘려보내는 삶을 살게 하신다(요3:1-21; 15:1-17).
...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으면 주님을 위해 대단한 일들을 감당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사 보려는 육신의 의도가 깔린 행위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모든 걸 다 내던질 수 있는 믿음에 기초한 사역이다.
출발점은 언제나 은혜다. 구원의 근거(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구원의 수단(믿음) 또한 주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구원의 열매(행위) 역시 그분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한없는 영광을 받으신다(고전 151-11, 엡 2:1-10).
복음은 그리스도인을 일하게 한다.
죄책감에서, 아니면 복음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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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December 7, 2012
Thursday, November 1, 2012
한 날 묵상 - 갈 2:15-21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님이 허셨던 율법을 다시 세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한 날 묵상 - 갈 2:15-21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님이 허셨던 율법을 다시 세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1. 오늘도 나는 살아간다. 하루 쉼을 쉬고 호흡을 하며 자연을 보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다.
2. 어제와 오늘의 나는 큰 차이가 없는 듯 하다. 모든 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아주 큰 변화가 내 주변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어제와 오늘의 차이를 결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3. 바로 그렇다. 아주 큰 변화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큰 변화가 불쑥 찾아오면 모든 것은 다르게 보인다.
4. 좋은 던 것도 싫어지고, 싫었던 것이 좋아질 수도 있다.
5. 때론 이러한 큰 변화앞에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진정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지탱하는 무엇의 힘이 있다.
6. 바울에게 가장 큰 변화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찾아오신 사건이다.
7. 이 사건은 바울을 통채로 바뀌어 놓았다. 그의 이름부터 생각, 그리고 행동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가 변했다. 심지어 자연도 변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8. 이제 그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눈에 불을 켜고 죽이려 달려들 던 사람이 눈에 불을 켜고 살리고자 자신의 생명도 조금도 아끼지 않고 살아가게 되었다.
9. 이게 바로 아주 큰 변화이다. 아주 큰 사건이다. 바울을 완전히 바꿔버린 변화이며 사건이었다.
10. 바울은 이제 살아간다. 어떻게 살아가느냐? 내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은혜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11.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1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에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8절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다"
=> 할례 행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할례를 행해야만 한다면 구원의 근거가 되는 복음의 진리가 무너지게 된다. 이는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 된다.
=> 율법의 복음이 아닌 은혜의 복음앞에 서라.
참고) 갈라디아서 5장 2-4절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오늘의 찬양 - 나 다시 복음앞에
http://www.youtube.com/watch?v=ptD2BPszdNI&feature=rel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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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Theological Seminary
El Monte, CA 91731 길성남 교수 바울신학 수요일 오전강의 -2
N.T. Wright가 강조한 것 - “예수님의 언약적 진실성” –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언약적 신실성이다!
갈 2:15-16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여기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헬라어로는 영어표현하자면, the faith of Jesus로 되어 있음. 이것이 예수님 자신의 믿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음. 전통적으로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보았는데, 주격적으로 해석. 예수 그분 자신의 믿음으로
로마 가톨릭 견해 – 여전히 ‘의화’(義化)를 주장.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어진 것 결코 아니다. 다만 그 힘이 약해졌을 뿐. 하나님 은혜의 도움을 받아 협력할 수 있고 협력해야 한다. 트렌트공의회, “만일 누가 죄인이 의화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는 협력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에서 오로지 믿음만으로 의화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만일 누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로움만 힘입어서 인간이 의화한다고 주장하거나 성령에 의해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지고 자리잡은 은총과 사랑을 제외한 채 오직 죄사함에 의해서만 의화한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우리를 의화하는 은총은 오직 하나님의 호의일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당해야 한다.” 16세기 트렌트회의, 지금도 여전히. 사도 바울을 파문시키는 꼴이다.
하나님의 은혜(선행적 은총)와 사람의 노력(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함. 그리하여 신인협력적 구원론이다. 그 근거는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다. 유대교와 비슷하나, 단지 예수님을 인정하느냐 않느냐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도바울의구원론 – 양자됨 (*법적으로 하나님자녀로 삼아주신다) 제임스 패커 – 사도바울 구원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양자삼는 일이 흔히 있었다. 양자됨이라는 단어가 5번 나옴. 그 중 바울서신에 3차례가 나옴.
이신칭의는 가장 근거가 되는데,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자녀됨이 더 높은 개념이고 풍성한 특권이다. 법정은 차갑다. 친밀한 교제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구원이라는 큰 복을 설명하기 위한 것인데, 양자됨이 더 친밀하고 풍성하다.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겠다, 너희는 네 자녀다.
갈 4:4-7,
롬 8:15 우리가 다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 그래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엡 1:4-6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신약 메시지의 핵심이다. 하나님사랑을 통한 양자됨!
휘오떼시아 – adoption. 갈 4:5,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고.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려고. 원래 자식이 아니고 원수 그 자체들이었으나 원수갚지 않으시고 자녀로 삼았다. 엡 1:5, 기쁘신 뜻,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 휘오떼시안.
로마 시대 아들들을 입양. 법적으로 상속자 삼음. 상속자의 권리를 가진 자로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셨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복된 기업을 다 누릴 수 있도록 우리를 받아주심. 그의 당당한 자녀들, 아들들로 받으심. 원래 원수였던 자들임.
칭의는 하나님을 심판자로 보는 법정개념인데 비해, 양자됨은 법정개념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는 가족개념. 하나님은 양자됨의 복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를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이끌어들이신다. 우리는 더 이상 외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며 상속자이다.
입양하면 바로 엄마아빠라고 부르느냐? 성장하여 살펴보고 엄마아빠. 갈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참조) 개역개정: 아빠 아버지, 개역한글판: 아바 아버지.
아빠는 원래 아람어에서 아버지. 회당에서 아람어로 통역. 탈굼. 아람어 단어를 헬라어로 음역해서 표현한 것이 ‘아바’(abba)임. 그대로 읽으면 ‘압바, 아빠’가 되는 것임. 소리나는대로 표기한 것임. 본래 발음에 가깝다.
이 발음을 가지고 논쟁이 벌어짐. 요아킴 예레미아스, 예수님의 비유. 괴팅겐 대학교 신약학자. 열 살 때부터 17세까지 예루살렘에 가서 살았었음. 막 14: 겟세마네 기도에서. 예수님만의 독특한 어법, 아멘아멘, 인자, 압바. 여기에 예수님의 독특한 자기인식이 나온다. 최소한 당대의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압바라고 쓴 적이 없다. 아이들이 친밀하게 아버지를 부를 때 쓴다. 친밀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독생자로서의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이 있다. 친밀한 교제를 그를 따르는 하나님 자녀들도 똑같이 부를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과 그 자녀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게 하셨다.
이에 대해 이런 저런 사람들이 비판. 특히 제임스 바. 연구해 보니까, 어린아이들만 아니라 장성한 어른들도 압바라는 말을 썼더라. 노인들을 부를 때도 압바라 불렀더라. 제자들도 자기 랍비들을 압바라고 불렀다. 어린애 용어가 아니다. 그러나 예레미아스가 양보하지 않음. 하나님을 부른 어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람어의 아버지라는 말이 따로 있다. 압바가 절대적으로 어린애용어는 아니지만, 친밀함을 나타내는 용어다. 그런데 그 친밀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른 유대인은 예수님 외에 없었다.
바리새인들의 거룩은 ritual purity였다. 일상생활속에서 제사장 수준으로 거룩하게 살려고 했다. 그런데 그 거룩을 추구할 때, 하나님나라를 임하게 한다. 세리와 창기들과 구별. 손을 씻기. 바리새파 전통.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을 부정하지 않음.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 탕자의 비유에서 가장 잘 나타남. 세리와 창기들, 죄인들과 가까이 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비판. 이에 탕자의 비유를 베푸심. 큰아들. 어떻게 아버지가 불공평하냐? 바리새인의 하나님관과 예수님의 하나님관이 부닥침.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전체의 아버지로 자신을 드러내심. 그러나 개개인의 아버지로 드러내지는 않으심.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가 다임. “나의 아버지여”라고 부르면서 자기 개인의 아버지로 호칭하지 않음. 진정 개개인이 나의 아버지여 라고 부르짖는 일은 언제 가능해졌는가? 예수님이 오셨을 때 가능해진 것임. 그래서 제임스 패커, 헤르만 바빙크 – 하나님을 큐리오스(주님, 주재자)로 부르는 것으로는 신약시대에는 부족한 것이다. “아도나이” - 큐리오스. 구약의 하나님.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와부활 이후 모든 것 위에 가장 큰 이름을 주심. 주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우리 주 예수님이 되심.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셨음. 하나님은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심. 하나님이 정말 나의 아버지시구나! 라고 깨달으면서, 부르짖게 하심. 그냥 주님! 이라고만 부르면 하나님이 서운해 하실지도 몰라요. 내가 너희를 내 자녀로 삼기 위해서 내 친아들도 내어주셨는데, 여전히 그냥 주여 라고 부르느냐? 아버지라 부르라, 부르짖으라!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
그의 아들의 영을 보내주셔서 진정 하나님이 내 아버지구나 라고 알고 부를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설복시키심. 헬라어 성경을 보면,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나 다 ‘크라조’를 사용함. 갈라디아서 krazon abba ho pateer. 여기서 크라존은 중성단수임. 일치하는 것은 to pneuma tou hyos – 즉 성령이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임. 그런데, 롬 8:15에서는 다름. en hoo krazomen abba ho pateer. 여기서는 우리가 부르짖는다. 양자의 영을 힘입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습니다. 너희들이 부르짖지만, 성령님이 너희가 그렇게 부르짖게 만들었다. 즉 아들의 영을 우리 안에 보내주셔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임을 인식하게 하셨고,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셨다. 육신의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을 하는 분들이 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짖고 있다면,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도 믿기 어려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우리를 돌보시고 가까이 계신 아버지로 인식하고 아버지라 부르느냐? 이것이 마음으로 설복되는 것. 성령님의 역할.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갈라디아서를 읽어봐도 이신칭의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확실하게 말하지 않음. 오히려 양자됨, 상속자라는 말을 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증거 -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확실한 증거가 됨. 갈 3:1 이하에서, 야, 이 어리석은 놈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홀리더냐? 홀렸느냐? 너희 성령 받았지? 그게 너희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듣고 믿음으로 받은 것이다! 그런데 왜 성령을 등장시키는가? 성령은 체험으로 아는 것 –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 것! 하나님 자녀가 된 것임. 이미 죄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임. 그래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임. 확인해야 할 것 – 내가 진정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인정하고 있느냐? 이 점을 확인해야 함. 어느 정도 믿어야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은 것이냐? 내 믿음의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내가 믿는 그 대상으로 인해서 내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 (칼빈) 믿음이 연약하다 할지라도 주님을 구원자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면 성찬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믿음이 있다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고, 연합되었다면, 그 연합으로 인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임. 그렇다면, 하나님 자녀가 된 것임.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의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 그 마음으로 무릎꿇고 기도할 때.. 이렇게 인도하시는구나! 가장 친밀할 때,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임. 그리고 공적인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느끼는 것임. 이것이 바로 자녀됨, 양자됨의 문제다!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후예들이 이신칭의만큼 양자됨을 강조했어야 했다. 제임스 패커의 글. Knowing God 중에서, 양자됨 부분을 꼭 읽어보실 것. 최고의 고전 중하나. 성도의 견인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가 뭐냐? 양자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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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시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에 속해 있다. 그들은 두려움없이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으며, 그분이 아버지로서 관심을 갖고 사랑으로 돌보실 것임을 언제나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이 신약메시지의 핵심이다.”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320)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가? 나는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아는가? 나 자신의 진정한 운명을 아는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다. 하늘나라가 나의 집이다. 나는 매일 거기에 가까이 간다. 나의 구주는 나의 형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나의 형제다. 이 말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밤에 잠자리에 들 때, 버스를 기다릴 때, 마음이 한가할 때 언제나 되풀이해서 스스로에게 말하라. 그리고 이것이 전적으로 완전히 사실임을 아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라. 이것이 행복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비결이다... 독자들과 나 자신이 이러한 비결을 완전히 지니기를 바란다”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362-63).
1. 오늘도 나는 살아간다. 하루 쉼을 쉬고 호흡을 하며 자연을 보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다.
2. 어제와 오늘의 나는 큰 차이가 없는 듯 하다. 모든 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아주 큰 변화가 내 주변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어제와 오늘의 차이를 결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3. 바로 그렇다. 아주 큰 변화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큰 변화가 불쑥 찾아오면 모든 것은 다르게 보인다.
4. 좋은 던 것도 싫어지고, 싫었던 것이 좋아질 수도 있다.
5. 때론 이러한 큰 변화앞에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진정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지탱하는 무엇의 힘이 있다.
6. 바울에게 가장 큰 변화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찾아오신 사건이다.
7. 이 사건은 바울을 통채로 바뀌어 놓았다. 그의 이름부터 생각, 그리고 행동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가 변했다. 심지어 자연도 변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8. 이제 그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눈에 불을 켜고 죽이려 달려들 던 사람이 눈에 불을 켜고 살리고자 자신의 생명도 조금도 아끼지 않고 살아가게 되었다.
9. 이게 바로 아주 큰 변화이다. 아주 큰 사건이다. 바울을 완전히 바꿔버린 변화이며 사건이었다.
10. 바울은 이제 살아간다. 어떻게 살아가느냐? 내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은혜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11.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12. 이리 큰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야 살 수 있다고 한다면, 다시 돌아갈까? 아니 변화되어 이리도 좋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죽으면 죽었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13. 참으로 이 변화를 느낀 사람이기 때문이다.
14. 바울 주변에 아직 자신이 이전에 살았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5. 그들은 다시 율법의 잣대를 들이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그들에게도 철저하게 은혜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초기 그의 사역과 싸움은 율법에 매여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6. 바울은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을 통해서 은혜의 복음을 우리게 주심을 통해 율법의 복음은 무너져 버렸다.
17.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다.
18. 율법의 행위로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 땅에 오셔서 철저히 율법을 무너뜨리셨다.
19. 우리는 이제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20. 율법에 대하여는 죽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하기 때문입니다(19절).
21.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도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며 사는 행동을 해서는 결코 아니됩니다(21절).
22. 오직 예수 이 땅에 살아가는 길은 율법이 아닌 은혜뿐입니다.
23. 이제 내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아네서 살아가기 원한다면 율법이 아닌 은혜앞에 서 있기 원합니다.
24. "나 다시 복음앞에 서네"는 1. 오직 은혜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2. 결코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 삶입니다. 3.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24. 오늘 하루도 이러한 은혜로 꽃피우는 한 날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5. 아멘.
-=====1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에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8절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다"
=> 할례 행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할례를 행해야만 한다면 구원의 근거가 되는 복음의 진리가 무너지게 된다. 이는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 된다.
=> 율법의 복음이 아닌 은혜의 복음앞에 서라.
참고) 갈라디아서 5장 2-4절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오늘의 찬양 - 나 다시 복음앞에
http://www.youtube.com/watch?v=ptD2BPszdNI&feature=related
==
International Theological Seminary
El Monte, CA 91731 길성남 교수 바울신학 수요일 오전강의 -2
N.T. Wright가 강조한 것 - “예수님의 언약적 진실성” –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언약적 신실성이다!
갈 2:15-16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여기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헬라어로는 영어표현하자면, the faith of Jesus로 되어 있음. 이것이 예수님 자신의 믿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음. 전통적으로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보았는데, 주격적으로 해석. 예수 그분 자신의 믿음으로
로마 가톨릭 견해 – 여전히 ‘의화’(義化)를 주장.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어진 것 결코 아니다. 다만 그 힘이 약해졌을 뿐. 하나님 은혜의 도움을 받아 협력할 수 있고 협력해야 한다. 트렌트공의회, “만일 누가 죄인이 의화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는 협력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에서 오로지 믿음만으로 의화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만일 누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로움만 힘입어서 인간이 의화한다고 주장하거나 성령에 의해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지고 자리잡은 은총과 사랑을 제외한 채 오직 죄사함에 의해서만 의화한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우리를 의화하는 은총은 오직 하나님의 호의일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당해야 한다.” 16세기 트렌트회의, 지금도 여전히. 사도 바울을 파문시키는 꼴이다.
하나님의 은혜(선행적 은총)와 사람의 노력(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함. 그리하여 신인협력적 구원론이다. 그 근거는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다. 유대교와 비슷하나, 단지 예수님을 인정하느냐 않느냐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도바울의구원론 – 양자됨 (*법적으로 하나님자녀로 삼아주신다) 제임스 패커 – 사도바울 구원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양자삼는 일이 흔히 있었다. 양자됨이라는 단어가 5번 나옴. 그 중 바울서신에 3차례가 나옴.
이신칭의는 가장 근거가 되는데,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자녀됨이 더 높은 개념이고 풍성한 특권이다. 법정은 차갑다. 친밀한 교제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구원이라는 큰 복을 설명하기 위한 것인데, 양자됨이 더 친밀하고 풍성하다.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겠다, 너희는 네 자녀다.
갈 4:4-7,
롬 8:15 우리가 다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 그래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엡 1:4-6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신약 메시지의 핵심이다. 하나님사랑을 통한 양자됨!
휘오떼시아 – adoption. 갈 4:5,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고.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려고. 원래 자식이 아니고 원수 그 자체들이었으나 원수갚지 않으시고 자녀로 삼았다. 엡 1:5, 기쁘신 뜻,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 휘오떼시안.
로마 시대 아들들을 입양. 법적으로 상속자 삼음. 상속자의 권리를 가진 자로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셨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복된 기업을 다 누릴 수 있도록 우리를 받아주심. 그의 당당한 자녀들, 아들들로 받으심. 원래 원수였던 자들임.
칭의는 하나님을 심판자로 보는 법정개념인데 비해, 양자됨은 법정개념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는 가족개념. 하나님은 양자됨의 복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를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이끌어들이신다. 우리는 더 이상 외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며 상속자이다.
입양하면 바로 엄마아빠라고 부르느냐? 성장하여 살펴보고 엄마아빠. 갈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참조) 개역개정: 아빠 아버지, 개역한글판: 아바 아버지.
아빠는 원래 아람어에서 아버지. 회당에서 아람어로 통역. 탈굼. 아람어 단어를 헬라어로 음역해서 표현한 것이 ‘아바’(abba)임. 그대로 읽으면 ‘압바, 아빠’가 되는 것임. 소리나는대로 표기한 것임. 본래 발음에 가깝다.
이 발음을 가지고 논쟁이 벌어짐. 요아킴 예레미아스, 예수님의 비유. 괴팅겐 대학교 신약학자. 열 살 때부터 17세까지 예루살렘에 가서 살았었음. 막 14: 겟세마네 기도에서. 예수님만의 독특한 어법, 아멘아멘, 인자, 압바. 여기에 예수님의 독특한 자기인식이 나온다. 최소한 당대의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압바라고 쓴 적이 없다. 아이들이 친밀하게 아버지를 부를 때 쓴다. 친밀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독생자로서의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이 있다. 친밀한 교제를 그를 따르는 하나님 자녀들도 똑같이 부를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과 그 자녀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게 하셨다.
이에 대해 이런 저런 사람들이 비판. 특히 제임스 바. 연구해 보니까, 어린아이들만 아니라 장성한 어른들도 압바라는 말을 썼더라. 노인들을 부를 때도 압바라 불렀더라. 제자들도 자기 랍비들을 압바라고 불렀다. 어린애 용어가 아니다. 그러나 예레미아스가 양보하지 않음. 하나님을 부른 어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람어의 아버지라는 말이 따로 있다. 압바가 절대적으로 어린애용어는 아니지만, 친밀함을 나타내는 용어다. 그런데 그 친밀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른 유대인은 예수님 외에 없었다.
바리새인들의 거룩은 ritual purity였다. 일상생활속에서 제사장 수준으로 거룩하게 살려고 했다. 그런데 그 거룩을 추구할 때, 하나님나라를 임하게 한다. 세리와 창기들과 구별. 손을 씻기. 바리새파 전통.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을 부정하지 않음.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 탕자의 비유에서 가장 잘 나타남. 세리와 창기들, 죄인들과 가까이 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비판. 이에 탕자의 비유를 베푸심. 큰아들. 어떻게 아버지가 불공평하냐? 바리새인의 하나님관과 예수님의 하나님관이 부닥침.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전체의 아버지로 자신을 드러내심. 그러나 개개인의 아버지로 드러내지는 않으심.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가 다임. “나의 아버지여”라고 부르면서 자기 개인의 아버지로 호칭하지 않음. 진정 개개인이 나의 아버지여 라고 부르짖는 일은 언제 가능해졌는가? 예수님이 오셨을 때 가능해진 것임. 그래서 제임스 패커, 헤르만 바빙크 – 하나님을 큐리오스(주님, 주재자)로 부르는 것으로는 신약시대에는 부족한 것이다. “아도나이” - 큐리오스. 구약의 하나님.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와부활 이후 모든 것 위에 가장 큰 이름을 주심. 주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우리 주 예수님이 되심.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셨음. 하나님은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심. 하나님이 정말 나의 아버지시구나! 라고 깨달으면서, 부르짖게 하심. 그냥 주님! 이라고만 부르면 하나님이 서운해 하실지도 몰라요. 내가 너희를 내 자녀로 삼기 위해서 내 친아들도 내어주셨는데, 여전히 그냥 주여 라고 부르느냐? 아버지라 부르라, 부르짖으라!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
그의 아들의 영을 보내주셔서 진정 하나님이 내 아버지구나 라고 알고 부를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설복시키심. 헬라어 성경을 보면,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나 다 ‘크라조’를 사용함. 갈라디아서 krazon abba ho pateer. 여기서 크라존은 중성단수임. 일치하는 것은 to pneuma tou hyos – 즉 성령이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임. 그런데, 롬 8:15에서는 다름. en hoo krazomen abba ho pateer. 여기서는 우리가 부르짖는다. 양자의 영을 힘입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습니다. 너희들이 부르짖지만, 성령님이 너희가 그렇게 부르짖게 만들었다. 즉 아들의 영을 우리 안에 보내주셔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임을 인식하게 하셨고,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셨다. 육신의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을 하는 분들이 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짖고 있다면,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도 믿기 어려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우리를 돌보시고 가까이 계신 아버지로 인식하고 아버지라 부르느냐? 이것이 마음으로 설복되는 것. 성령님의 역할.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갈라디아서를 읽어봐도 이신칭의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확실하게 말하지 않음. 오히려 양자됨, 상속자라는 말을 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증거 -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확실한 증거가 됨. 갈 3:1 이하에서, 야, 이 어리석은 놈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홀리더냐? 홀렸느냐? 너희 성령 받았지? 그게 너희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듣고 믿음으로 받은 것이다! 그런데 왜 성령을 등장시키는가? 성령은 체험으로 아는 것 –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 것! 하나님 자녀가 된 것임. 이미 죄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임. 그래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임. 확인해야 할 것 – 내가 진정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인정하고 있느냐? 이 점을 확인해야 함. 어느 정도 믿어야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은 것이냐? 내 믿음의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내가 믿는 그 대상으로 인해서 내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 (칼빈) 믿음이 연약하다 할지라도 주님을 구원자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면 성찬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믿음이 있다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고, 연합되었다면, 그 연합으로 인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임. 그렇다면, 하나님 자녀가 된 것임.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의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 그 마음으로 무릎꿇고 기도할 때.. 이렇게 인도하시는구나! 가장 친밀할 때,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임. 그리고 공적인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느끼는 것임. 이것이 바로 자녀됨, 양자됨의 문제다!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후예들이 이신칭의만큼 양자됨을 강조했어야 했다. 제임스 패커의 글. Knowing God 중에서, 양자됨 부분을 꼭 읽어보실 것. 최고의 고전 중하나. 성도의 견인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가 뭐냐? 양자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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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시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에 속해 있다. 그들은 두려움없이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으며, 그분이 아버지로서 관심을 갖고 사랑으로 돌보실 것임을 언제나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이 신약메시지의 핵심이다.”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320)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가? 나는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아는가? 나 자신의 진정한 운명을 아는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다. 하늘나라가 나의 집이다. 나는 매일 거기에 가까이 간다. 나의 구주는 나의 형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나의 형제다. 이 말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밤에 잠자리에 들 때, 버스를 기다릴 때, 마음이 한가할 때 언제나 되풀이해서 스스로에게 말하라. 그리고 이것이 전적으로 완전히 사실임을 아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라. 이것이 행복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비결이다... 독자들과 나 자신이 이러한 비결을 완전히 지니기를 바란다”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362-63).
Wednesday, October 31, 2012
한 날 묵상 - 갈 2:11-14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날 때 분명한 목소리를 내라. 게바도 책망받았다면 나도 예외일 수 없고, 그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있는가? 그렇지만, 나에겐 말씀을 칼처럼 적용하라, 다른 사람에겐 관용함으로 보라.>
한 날 묵상 - 갈 2:11-14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날 때 분명한 목소리를 내라. 게바도 책망받았다면 나도 예외일 수 없고, 그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있는가? 그렇지만, 나에겐 말씀을 칼처럼 적용하라, 다른 사람에겐 관용함으로 보라.>
1. 갈라디아서는 은혜의 복음과 율법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된다. 우리는 나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따. 나의 구원은 어디서 왔는가?
2. 나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나를 사랑과 용서로 품으셨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기억할 때, 나를 보지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다.
4.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갖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
5. 아직도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지 못하고, 율법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6. 게바는 지금 안디옥에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아니함으로' 바울의 책망을 받고 있다.
7. 바리새인의 외식함이 게바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8.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날 때를 조심해야 한다. 사실 그외에 모든 것은 관용함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결코 복음의 진리에 따르지 않는 단 한가지 이것은 결코 관용함이 있어서는 결코 아니된다.
9. 교회안에, 공동체안에 이러한 모습이 드러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 잘 처리해야 합니다. 절대 관용함이 있어서는 안되면 신속정확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10. 바울이 게바를 책망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해 봐야 한다.
11. 첫째는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 보일 때, 책망해야 하며 바르게 세워야 한다. 그들의 말들과 논리가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12. 게바도 책망 받았다. 바나바도 책망받았다. 이들이 누구인가? 결국 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그 어는 것도 예외일 수 없다.
13. 둘째는,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행동들은 전염성이 아주 강하다는 경각심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외식은 우리의 삶에 아주 친숙하기 때문이다. 전혀 이러한 것들은 낯설지 않는다. 특별한 모티브가 없더라도 쉽게 외식에 유혹된다. 그래서 더욱 절처히 해야 한다.
영화 "연가시"에서 처음 동네 일가족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장이 제대로 위험성과 전염성의 경각심을 가졌더라면 하는 생각이 갖는다.
14. 게방의 영성은 뛰어나다. 또한 바나바도 그에 못지 않는다. 그러나 게바의 행동은 바나바에게도 쉽게 전염되었다. 이게 바로 악함의 힘이다.
15. 셋째, 책망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복음이 바로 서게 함에 있다. 책망 받는 사람을 사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떠나게 함도 아니다. 복음이 바로 서는 일에까지만 책망해야 하며 그 후 바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16. 교회안에 이단이 침투할 수 있다. 요즘은 더욱 그렇다. 어떻게 그들과 대처해야 하는가? 우리의 질문이며 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17. 복음의 진리에 벗어남에는 단호하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18. 또한 어느 위치에 있든, 공동체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매우 크다 할지라도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일이 보이면 단호하게 신속해야 한다.
19. 오늘도 거짓 선지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들을 경계하며 찾아내는 것, 그리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 또한 우리가 깨어 해야 할이다.
20. 주님의 은혜만이 가득하기를~~
====
11절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 할 말은 하는구나. 꼭 필요한 말은 하구나.
왜냐하면 14절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2장 5절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 복음의 진리가 항상 우리의 삶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게바의 책망 내용
14절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다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복음의 진리" => 율법으로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롬3:19-30).
12-13절 게바의 책망 받을 일 ...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를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 게바의 당시의 마음 이해하기. 율법이 무엇이기에... 율법은 유대인에게 무엇이기에 ..
13절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 갈라디아서는 은혜의 복음과 율법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된다. 우리는 나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따. 나의 구원은 어디서 왔는가?
2. 나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나를 사랑과 용서로 품으셨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기억할 때, 나를 보지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다.
4.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갖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
5. 아직도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지 못하고, 율법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6. 게바는 지금 안디옥에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아니함으로' 바울의 책망을 받고 있다.
7. 바리새인의 외식함이 게바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8.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날 때를 조심해야 한다. 사실 그외에 모든 것은 관용함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결코 복음의 진리에 따르지 않는 단 한가지 이것은 결코 관용함이 있어서는 결코 아니된다.
9. 교회안에, 공동체안에 이러한 모습이 드러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 잘 처리해야 합니다. 절대 관용함이 있어서는 안되면 신속정확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10. 바울이 게바를 책망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해 봐야 한다.
11. 첫째는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 보일 때, 책망해야 하며 바르게 세워야 한다. 그들의 말들과 논리가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12. 게바도 책망 받았다. 바나바도 책망받았다. 이들이 누구인가? 결국 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그 어는 것도 예외일 수 없다.
13. 둘째는,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행동들은 전염성이 아주 강하다는 경각심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외식은 우리의 삶에 아주 친숙하기 때문이다. 전혀 이러한 것들은 낯설지 않는다. 특별한 모티브가 없더라도 쉽게 외식에 유혹된다. 그래서 더욱 절처히 해야 한다.
영화 "연가시"에서 처음 동네 일가족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장이 제대로 위험성과 전염성의 경각심을 가졌더라면 하는 생각이 갖는다.
14. 게방의 영성은 뛰어나다. 또한 바나바도 그에 못지 않는다. 그러나 게바의 행동은 바나바에게도 쉽게 전염되었다. 이게 바로 악함의 힘이다.
15. 셋째, 책망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복음이 바로 서게 함에 있다. 책망 받는 사람을 사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떠나게 함도 아니다. 복음이 바로 서는 일에까지만 책망해야 하며 그 후 바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16. 교회안에 이단이 침투할 수 있다. 요즘은 더욱 그렇다. 어떻게 그들과 대처해야 하는가? 우리의 질문이며 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17. 복음의 진리에 벗어남에는 단호하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18. 또한 어느 위치에 있든, 공동체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매우 크다 할지라도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일이 보이면 단호하게 신속해야 한다.
19. 오늘도 거짓 선지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들을 경계하며 찾아내는 것, 그리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 또한 우리가 깨어 해야 할이다.
20. 주님의 은혜만이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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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 할 말은 하는구나. 꼭 필요한 말은 하구나.
왜냐하면 14절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2장 5절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 복음의 진리가 항상 우리의 삶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게바의 책망 내용
14절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다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복음의 진리" => 율법으로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롬3:19-30).
12-13절 게바의 책망 받을 일 ...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를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 게바의 당시의 마음 이해하기. 율법이 무엇이기에... 율법은 유대인에게 무엇이기에 ..
13절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Friday, October 26, 2012
한 날 묵상 - 갈 2:1-10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나 유력한 자들의 그 어떠한 유혹과 핍박에도 복음의 진리가 항상 우리가운데 있게 하며 충만하게 하라>
한 날 묵상 - 갈 2:1-10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나 유력한 자들의 그 어떠한 유혹과 핍박에도 복음의 진리가 항상 우리가운데 있게 하며 충만하게 하라>
1. 복음이 항상 내 가운데 있게 하라.
2. 페북에 글을 보고 잠깐 생각하게 한 글... 제목부터 깊은 생각을 갖는다 "생략된 복음"
나와는 페친 관계가 아닌 한 분의 글이 나의 페친 가운데 한 분의 담벼락에 공유되고, 이 글이 내게까지 보이게 되었다. 먼저, 이 글을 다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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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적 성향의 선교사들은 피선교지인 조선에서 제국권력과의 마찰을 피하기위해 "생략된 복음"을 전했다. 출애굽의 해방적지평. 계약법전의 약자보호법 정신. 희년법의 혁명사상. 예언자들의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앞세운 정의실천의 요구 등이 생략된것. 교회의 자기 생존과 확대를 지키기위해 제국권력과의 야합 속에서 복음을 비정치화한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
김용의 선교사의 복음학교는 이러한 "생략된 복음"을
3. 바울이 복음을 선포할 당시에 가장 큰 이슈는 바로 할례의 문제였다.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냐? 아니냐?하는 문제이다.
4.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복음을 전파함에 할례는 필수조건이 아니다. 그래서 이방인 가운데 전파하는 복음에 결코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선포는 없었다.
5. 결국 이를 확증하기 위해 바울은 헬라인 디도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3절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도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6. 바울은 할례를 요구하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4절)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그들의 말에 복종하지 아니한 이유도 분명했다.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우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었다.
7. 이게 진정 바울이 선포한 복음이다.
8.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복음의 진리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할례가 문제가 된다면, 결코 자유함이 없습니다. 복음의 참맛은 아무 조건 없이 주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9. 따라서 할례의 율법의 매인바 되어서는 결코 자유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10. 예수님은 행10장 9-16절에서 "보자기 사건"을 통해서 분명히 사도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11. 바울은 이러한 확증은,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나서(3절), 디도가 왜 억지로 할례받지 않는지에 대한 언급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12. 만약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면 사도들이 왜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겠는가?
13. 이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으로서,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 받으라고 하지 않은 주체는 바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루살렘의 사도들일 수도 있는데(2-3절에서 의미를 찾아보면..) 중요한 것은 헬라인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14.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할례를 행치 않았으며(5절), 할례를 행하는 것, 곧 율법에 따르는 것은 율법의 종이 됨으로(5절), 믿음으로 행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할례는 필요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16절).
15.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의 적용을 해 봅시다. 복음의 진리가 진정 나에게 참 자유를 주십니까? 아니면 자꾸 나를 옳아매는 밧줄이 되십니까?
16. 율법의 잣대로만 상황 논리에 빠져 복음을 스스로 제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7. 좋은 것을 취하고,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8. 다른 사람을 보는 잣대는 어떻습니까?
19. 진정 복음의 진리로 모든 상황을 보며, 헤아리려 힘쓰십니까?
20. 이 시대에 필요한 복음입니다. 상황 복음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 내 삶 가운데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21.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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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십 사년만에 올라갔는가?
그렇다면 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가?
굳이 여기서 "계시를 따라 올라가"라는 말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을 확중하기 위한 것인가?
이 질문은 이어서 나오는 "이방 가운데세 전파하는 복음"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1. 모두에게로 나아가라. 할례자에게로, 이방인에로
2. 각기 다른 사역의 길을 존중하라.
3. 왜냐하면 부르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4. 할례자에게 가는 야고보와 게바, 그리고 요한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방인에게로 가는 바울도 당연히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복음을 전파함에 할례는 필수조건이 아니다. 그래서 이방인 가운데 전파하는 복음에 결코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선포는 없었다. 결국 이를 확증하기 위해 바울은 헬라인 디도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3절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도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할례를 요구하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4절)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고 그들의 말에 복종하지 아니한 이유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우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었다.
이게 진정 바울이 선포한 복음이다.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난 얘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디도가 할례받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만약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면 사도들이 왜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겠는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다.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 받으라고 하지 않은 주체는 바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루살렘의 사도들일 수도 있다.
1절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3절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7-8절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심.
8절 우리는 이방인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 가게 하려 함이라
참고
1. 복음이 항상 내 가운데 있게 하라.
2. 페북에 글을 보고 잠깐 생각하게 한 글... 제목부터 깊은 생각을 갖는다 "생략된 복음"
[스크랩] 생략된 복음과 현재의 우리의 나은 점? 오
늘 아침 읽은 페친의 담벼락의 글이 하
루종일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와는 페친 관계가 아닌 한 분의 글이 나의 페친 가운데 한 분의 담벼락에 공유되고, 이 글이 내게까지 보이게 되었다. 먼저, 이 글을 다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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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적 성향의 선교사들은 피선교지인 조선에서 제국권력과의 마찰을 피하기위해 "생략된 복음"을 전했다. 출애굽의 해방적지평. 계약법전의 약자보호법 정신. 희년법의 혁명사상. 예언자들의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앞세운 정의실천의 요구 등이 생략된것. 교회의 자기 생존과 확대를 지키기위해 제국권력과의 야합 속에서 복음을 비정치화한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
김용의 선교사의 복음학교는 이러한 "생략된 복음"을
확대 재생산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유기성이나 김길 등의 책도 마찬가지고. 아니 대부분의 교회가 그렇다. 대표적 친일파이자 감리교신자인 윤치호는 사회정의를 강조한 아모스서를 "신의 증오가 담겨진것"이라며 천대시했는데 지금의 우리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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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문단 가운데 두 번째 문단은 나로서는 간단히 다룰 성격이 못되므로 생략하고, 첫 번째 문단을 중심으로 내 소회를 간략하게 소개해 보려 한다. 이 첫 문단의 주장은 두 번째로 인용된 내 페친의 첨언으로 인해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데, 요약하면 이리 될 듯 싶다.
일제 강점기를 전후로 하여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기독교의 복음은 “생략된 복음”이었다. 다시 말해, 성경이 복음을 통해서 말하려는 공의적 측면- 출애굽의 해방적 지평, 계약 법전의 약자보호법 정신, 희년법의 혁명 사상, 예언자들의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앞세운 정의 실천의 요구 등이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필자에 따르면 이것은 결국 복음의 비정치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왜일까? “교회의 자기 생존과 확대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데 필자는 이렇게 ‘생략된 복음’을 한국에 뿌린 선교사들을 근본주의자라고 표현했다.
진술된 주장 가운데 몇 가지 확인을 위한 질문들이 있다.
1. 한국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이 근본주의자들이었나?
2. 이들이 소위 ‘생략된 복음’을 전한 것이 ‘교회의 자기 생존과 확대를 지키기 위해서’였나?
3. 선교사들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에서 ‘공의적 성격’을 생략한 채 한국에 전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선교사들이 길러진 토양, 즉 (주로)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 공의적 성격이 편만하게 전해지고 있었음이 입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자기의 신학과 사회의 토양에서는 당연시 되던 복음의 공의적 측면이 한국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선교사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생략된 정황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들을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인간은 그 시대의 아들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따라서 성경은 성령의 조명 아래 신학의 도움을 받아 해석되어야 한다고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자신을 세례한 문화와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세계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 성경을 점진적으로 이해하는 폭과 깊이를 더하신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그 시대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당신의 백성이 이해하기를 바라셨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가지고 지나간 과거의 시대의 성경 지식을 평가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히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약간 난폭한 질문을 하고자 한다. 복음의 진리됨은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의 태도와 삶의 열매를 통해 입증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그리고 우리’의 한계에 갇힌 복음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하고 있는가? 또 하나의 질문. 그 시대의 많은 신자들이 ‘생략된 복음’만으로도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렸다. 그럼, 우리는? 우리는 그 시절의 그들보다 어느 점에서 나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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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문단 가운데 두 번째 문단은 나로서는 간단히 다룰 성격이 못되므로 생략하고, 첫 번째 문단을 중심으로 내 소회를 간략하게 소개해 보려 한다. 이 첫 문단의 주장은 두 번째로 인용된 내 페친의 첨언으로 인해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데, 요약하면 이리 될 듯 싶다.
일제 강점기를 전후로 하여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기독교의 복음은 “생략된 복음”이었다. 다시 말해, 성경이 복음을 통해서 말하려는 공의적 측면- 출애굽의 해방적 지평, 계약 법전의 약자보호법 정신, 희년법의 혁명 사상, 예언자들의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앞세운 정의 실천의 요구 등이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필자에 따르면 이것은 결국 복음의 비정치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왜일까? “교회의 자기 생존과 확대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데 필자는 이렇게 ‘생략된 복음’을 한국에 뿌린 선교사들을 근본주의자라고 표현했다.
진술된 주장 가운데 몇 가지 확인을 위한 질문들이 있다.
1. 한국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이 근본주의자들이었나?
2. 이들이 소위 ‘생략된 복음’을 전한 것이 ‘교회의 자기 생존과 확대를 지키기 위해서’였나?
3. 선교사들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에서 ‘공의적 성격’을 생략한 채 한국에 전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선교사들이 길러진 토양, 즉 (주로)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 공의적 성격이 편만하게 전해지고 있었음이 입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자기의 신학과 사회의 토양에서는 당연시 되던 복음의 공의적 측면이 한국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선교사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생략된 정황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들을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인간은 그 시대의 아들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따라서 성경은 성령의 조명 아래 신학의 도움을 받아 해석되어야 한다고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자신을 세례한 문화와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세계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 성경을 점진적으로 이해하는 폭과 깊이를 더하신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그 시대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당신의 백성이 이해하기를 바라셨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가지고 지나간 과거의 시대의 성경 지식을 평가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히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약간 난폭한 질문을 하고자 한다. 복음의 진리됨은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의 태도와 삶의 열매를 통해 입증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그리고 우리’의 한계에 갇힌 복음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하고 있는가? 또 하나의 질문. 그 시대의 많은 신자들이 ‘생략된 복음’만으로도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렸다. 그럼, 우리는? 우리는 그 시절의 그들보다 어느 점에서 나은가?
3. 바울이 복음을 선포할 당시에 가장 큰 이슈는 바로 할례의 문제였다.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냐? 아니냐?하는 문제이다.
4.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복음을 전파함에 할례는 필수조건이 아니다. 그래서 이방인 가운데 전파하는 복음에 결코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선포는 없었다.
5. 결국 이를 확증하기 위해 바울은 헬라인 디도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3절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도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6. 바울은 할례를 요구하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4절)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그들의 말에 복종하지 아니한 이유도 분명했다.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우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었다.
7. 이게 진정 바울이 선포한 복음이다.
8.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복음의 진리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할례가 문제가 된다면, 결코 자유함이 없습니다. 복음의 참맛은 아무 조건 없이 주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9. 따라서 할례의 율법의 매인바 되어서는 결코 자유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10. 예수님은 행10장 9-16절에서 "보자기 사건"을 통해서 분명히 사도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11. 바울은 이러한 확증은,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나서(3절), 디도가 왜 억지로 할례받지 않는지에 대한 언급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12. 만약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면 사도들이 왜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겠는가?
13. 이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으로서,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 받으라고 하지 않은 주체는 바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루살렘의 사도들일 수도 있는데(2-3절에서 의미를 찾아보면..) 중요한 것은 헬라인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14.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할례를 행치 않았으며(5절), 할례를 행하는 것, 곧 율법에 따르는 것은 율법의 종이 됨으로(5절), 믿음으로 행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할례는 필요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16절).
갈 2장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마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리라"
15.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의 적용을 해 봅시다. 복음의 진리가 진정 나에게 참 자유를 주십니까? 아니면 자꾸 나를 옳아매는 밧줄이 되십니까?
16. 율법의 잣대로만 상황 논리에 빠져 복음을 스스로 제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7. 좋은 것을 취하고,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8. 다른 사람을 보는 잣대는 어떻습니까?
19. 진정 복음의 진리로 모든 상황을 보며, 헤아리려 힘쓰십니까?
20. 이 시대에 필요한 복음입니다. 상황 복음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 내 삶 가운데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21.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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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십 사년만에 올라갔는가?
그렇다면 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가?
굳이 여기서 "계시를 따라 올라가"라는 말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을 확중하기 위한 것인가?
이 질문은 이어서 나오는 "이방 가운데세 전파하는 복음"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1. 모두에게로 나아가라. 할례자에게로, 이방인에로
2. 각기 다른 사역의 길을 존중하라.
3. 왜냐하면 부르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4. 할례자에게 가는 야고보와 게바, 그리고 요한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방인에게로 가는 바울도 당연히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복음을 전파함에 할례는 필수조건이 아니다. 그래서 이방인 가운데 전파하는 복음에 결코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선포는 없었다. 결국 이를 확증하기 위해 바울은 헬라인 디도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3절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도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할례를 요구하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4절)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고 그들의 말에 복종하지 아니한 이유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우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었다.
이게 진정 바울이 선포한 복음이다.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난 얘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디도가 할례받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만약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면 사도들이 왜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겠는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다.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 받으라고 하지 않은 주체는 바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루살렘의 사도들일 수도 있다.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할례를 행치 않았다고 한다(5절).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이것이 그리스도 안의 자유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할례를 행하는 것, 곧 율법에 따르는 것은 율법의 종이 되는 것이요(5절),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16절).
갈 2장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마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리라"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에게 부르심과 복음은 어떤 의미인가?
1절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3절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7-8절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심.
8절 우리는 이방인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 가게 하려 함이라
참고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1년간 사역을 한 후 떠났던 1차 전도여행 기간은 약 4년이었다(AD 46-49). 이 여행 말미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으며(행 15:1-5), 이것은 바울이 회심한 후 세 번째 예루살렘 방문이다(첫번째는 행 9:26, 두번 째는 행 11:30).
그렇다면, 14년 중 나머지 기간에는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참고 행 9:26-30, 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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