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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October 4, 2013

한 날 묵상 - 막 6:30-34절 <사역과 쉼 그리고 쉼가운데에서 목자없는 양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 날 묵상 - 막 6:30-34절  <사역과 쉼 그리고 쉼가운데에서 목자없는 양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역자의 마음, 쉼과 사역을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 사역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하나 더 아무리 사역을 위한 쉼이라 할지라도 쉬면서 간직해야 할 중요한 마음은 믿음없고, 믿음 약한 자를 바라보는 연민의 마음이다. 나를 향하고 있는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이것이다.

1. 사랑의 수고을 다한 사람들에게서 들려오는 달콤한 열매맺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참으로 좋습니다. 잠못이루고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거나, 열심히 일해서 목표한 것들이나, 수고의 땀흘림속에 수확의 기쁨은 달콤하기 짝이 없습니다.

2. 예수님은 열 두제자를 파송하였고, 그에 따른 보고를 받게 됩니다.
 30절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이"

3. 이 보고를 받는 예수님의 마음은 흐믓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기특하게 보셨을 것이라는 생각은 저만의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4.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다음의 말은 제자들에게는 최고의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수고했으니 좀 쉬어라'
 31절 "이르시되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쉼을 주십니다. 수고와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서 쉼입니다. 쉼은 필요합니다. 탈진은 아주 잘못된 자기 관리입니다. 몸도 거룩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추가) 일상으로부터 탈출. 육체적 쉼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은 너무 지쳐있다. 상당히 분주하다. 정신과 육체가 온전히 쉴수 없는 지경이다. 나도 좀 쉬고 싶다. 현재의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고 싶다. 나 뿐 아니라 아내도 이러한 쉼이 필요하다.^^

6. 그런데 쉼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가서 잠깐 쉬어라". 우리의 영원한 안식은 천국입니다. 이 땅의 삶은 나그네의 삶입니다. 그렇기에 계속 쉴 수 없습니다.

7. 믿음에 사람에게는 믿음의 사역과 섬김에 은퇴는 없습니다. 요즘 교회에서는 은퇴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문제가 일어날 때 많은 부분은 은퇴하신 분들로 인한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은퇴 목사님, 은퇴 장로님, 은퇴 권사님.

8.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잠깐 쉬어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 전까지 회복을 위한 잠깐의 안식과 쉼은 필요하지만 그 나라 갈 때까지 은퇴는 결코 필요치 않습니다.

9. 내 마지막 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해서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믿음으로 감당하기만 하면 됩니다.

10. 쉼이 길어지면 안됩니다. 쉼은 다음 사역을 위한 쉼입니다. 쉼이 길어지면 다음 사역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잠깐 쉼은 좋지만, 그 이상의 쉼은 안됩니다.

11. 예수님께서 쉼을 허락하시면서 현재의 자리를 떠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31절 "오가 가는 삶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12. 그래서 제자들은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잠시라도 쉬고 다음 사역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3. 다음 사역을 위해 잠시의 쉼을 가지십시요. 그래서 다음 사역에 기쁨과 감사함으로 집중할 수 있습니다. 사역은 기쁨과 행복과 감사함으로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육체적, 정신적 쉼이 필요합니다.

14. 그런데 그 잠깐의 쉼의 시간에도 우리가 늘 붙잡고 있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실은 정확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5. 33-34절입니다.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서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시시더라"

16. 바로 연민의 마음입니다. 목자없이 방황하는 양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입니다. 쉼가운데에서 그들을 향한 이 마음을 결코 놓쳐서는 안됩니다.

17. 잠시 쉬는 동안에도 목자에게서 양은 전부입니다. 양을 향한 근심과 걱정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목자 없는 양은 이리에 노출될 뿐 아니라,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무리에서 떠나 혼자 길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18. 그들을 향한 이 마음은 늘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쉼 이후의 사역을 쉼가운데 더 집중하여 준비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의 필요가 아니더라도 이 마음을 품고 안식하는 것은 쉼 이후의 사역에 더 간절함을 가지고 안식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됩니다.

19. 그리고 목자 없는 양들을 살피는 최적의 방법은 "가르침"입니다. 
34절 "불쌍히 여기서" 그들을 향해 하신 일은 다름 아닌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이빈다.

20. 가르침을 보다 양들에게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목자없는 양같은 우리게 가장 긴박하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21.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 말씀입니다.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22.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쉼은 예수님의 멍에를 멜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지셨던 그 목자없는 양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멍에를 멜 때 진정한 쉼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23. 여기에서도 그런데 중요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내게 배우라"

24.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예수님께 멍에를 넘기고 쉽고 가벼운 예수님의 멍에를 맬 수 있습니다. 

25. 목자 없는 양들에게 진정한 쉼을 주기 위해서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배우고 익혀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님께 드리고 쉽고 가벼운 주님의 짐을 그들이 멜 수 있습니다.

26. 목자 없는 양들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요? 빵이 전부일까요? 밥이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침이 전부입니다.
 이 말씀은 이어지는 막6장 35-44절의 비교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27. 짧게 요약하면, "가르침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빵이었습니다." 왜 먼저 가르침이었나? 지금 그들은 빵이 필요한 때가 아니었습니다. 혹여나 빵이 먼저 필요하였다면, 당연히 율법보다 그들의 생명이 우선임을 마가복음 앞장에서 우리는 충분히 살펴보았습니다.

 추가)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을 낭독하고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가난한 자, 병든 자, 억눌린 자들의 해방을 예고하는 메시어 사역의 메시지가 그 자리에서 선포되었다(예수, 한국 사회에 답하다. P378)

28. 진정한 쉼은 예수님의 멍에를 배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을 때만 누릴 수 있습니다.

29. 우리 안에 복음이 들어가야 길 잃지 않고 방황하지 않고 세상의 수고와 어려움에 짓눌지 않고 그 속에서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30. 제자들의 수고와 헌신에 예수님은 잠깐의 쉼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31. 그러나 그 한적한 곳의 쉼에서는 늘 마음에 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목자 없이 방황하는 양들을 향한 목자의 심정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최우선으로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진정한 쉼이시기 때문입니다.

32. 오늘 우리도 제자도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너무 지쳐 힘들어 다음 사역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적당히 쉼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잠깐의 쉼 동안에도 결코 잊지 맙시다. 내가 누구이며, 나는 누구를 위해 이 땅에 존재하며, 복음을 간직하지 못한 자들을 향한 연민과 긴박한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33.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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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1절 -사역과 쉼

32절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 쉬지 못하고 사역이 계속되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무리들이 따르다
33절


사역이 계속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 -
34절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34절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
평화의 장소  - 분주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연과 소통하라. 

19세기 중반을 살았던 소로는
분주함을 극복할 방안으로 평화의 장소를 마련했다.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도 집 안에서 구역을
나누는 방법은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어떤
집에서든 그와 같은 장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만으로
그런 공간을 창조할 수도 있다.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디지털 세상의
은신처가 될 수 있다.


- 윌리엄 파워스의 《속도에서 깊이로
》중에서 

1. 나는 오늘도 도서관에 와 있다. 

2. 창밖을 보니 평화롭기 그지 없다. 

3. 잠시 세상의 분주함과 단절하고 자연과 교통하고 쉽다.

4. 커피 한 잔의 여유까지 같이 간다면 더욱 좋겠다. 

5. 겨울에 세상은 푸르름과 앙상한 가지가 공존한다.

6. 자연은 시간에 맞추어 제 갈길을 가고 있다. 

7. 때가 되면 다시금 창밖에는 활기찬 푸르름이 피어오르겠지.

8. 나도 내 영혼 한편에는 푸르름과 한 편에는 앙상한 가지뿐일지라도 때가 되면 생명의 씨앗이 내 영혼과 함께 나의 온몸 곳곳에 찾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9. 마음의 여유를 간절히 찾고 싶다. 

10. 답답함? 불안? 초초? 쫓김? 두려움? 압박?

11. 나의 상태를 지금 돌아보니 이러한 것들로 가득하다.

12. 잠시 내려놓고 지금 여기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라.



Thursday, May 30, 2013

한 날 묵상 - 막 3:1-6 <마음이 완악함하여 봐야 할 것은 주시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한 날 묵상 - 막 3:1-6 <마음이 완악함하여 봐야 할 것은 주시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1. 외쳐도 반응도 없고 듣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 않는 세대를 가리켜, 아님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들으려 하는 세대를 가리켜, 무슨 세대라 말하는 것이 좋을까?

2. 음 성경적 표현을 빌리면, 완악한 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완악"하는다는 말은 '성질이 억세게 고집스럽다'는 의미가 있네요.

3. 그래서, 신구약 성경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완악함의 전형적인 모습들을 찾아 보았다.

4. 구약에서는 출 4-14장의 애굽의 바로왕의 완악함을 예를 살필 수 있다. 바로는 도무지 모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5.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11장 15-17절 "장터에서 피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6.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완악함은 바로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7. 이런 의미로 볼 때,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완악한 백성이었다. 사 6:9-10.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데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8. 이렇듯 "완악함"을 이기는 출발은 들음이다. 그래서 난 '들음은 섬김이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들음에서 출발하는 믿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들음은 이웃을 품는 출발이다.

9. 요즘 시대는 참으로 귀가 닫혀 있는 시대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불신의 시대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친밀한 교제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할 수 있다.

10. 완악함의 시대를 살아가는 복음의 빚진 자들의 삶을 어떤 삶이 되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님의 모습속에서 발견해 보도록 하자.

11. 복음에, 예수님께 마음이 완악함을 가진 자들을 향햐여 예수님의 반응은 이러하셨다.

12. 1) 탄식하셨다. 그리고 2)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셨다.

13. WHY? 탄식과 노하심을 예수님은 가지셨을까?

14. 예수님을 고발하려 예수님을 주시하는 완악한 마음을 가진 그들에게는 모든 사람에게 복된 소식인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삶 속에 누리지도 못하였다.

15.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그들을 향해 탄식하셨고,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세력에 대하여 노하셨다.
 탄식함과 노하심은 구별을 잘해야 한다. 절대로 반대로 해서는 안된다.

16. 그들이 복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누리지도 못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4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17. 세번째로 완악함 세대를 향한 예수님의 반응은 3) 복음의 길을 가라. 사랑의 길을 가라. 섬김의 길을 가라(5절)였다.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완악한 반응을 보이는 그들을 향해 복음을 가진 자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은 복음을 살아내는 인생이다.

18. 복음에 완악한 자들과 논쟁하지 않았으며,  긍휼과 사랑으로 복음의 삶을 살아가며, 복음이 말씀하신 사랑의 완성의 삶을 살아야 한다.

19. 당신은 지금 무엇을 주시하고 있는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런데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내 마음에 무엇을 담아 주시하며 바라보고 있는가? 이다.

20. 완악함인가? 열린 마음인가? 무엇보다 복음에 열린 마음인가?

21. 또한 완악함으로 당신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향한 당신의 반응은 또한 어떠한가?

22. 똑같은 완악함인가? 아니면 예수님 완약한 그들을 향해 보여주신 모습인가?

23. 완악한 세대, 백성을 향한 탄식함을 가지라. 그들을 행해 또한 분노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한 복음의 삶을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 완악한 세대와 백성들을 향한 복음의 삶임을 기억하자.

24. 오늘도 완악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남아있다. 비록 그 수가 적을지라도 말이다.

25.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는 나는 오늘도 예수님의 본받아 복음의 삶을 통해 완악한 세대와 백성들과는 대조적 삶을 살아가는 인생의 오늘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6. 그들의 완악함이 조금이라도 무너질수만 있다면....

27. 할렐루야! 아멘!

===
‘완악하다’ (hardening)는 것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과 사역에 대해 냉담하다는 뜻이다. 
 영적 완악함은 구약에서 30회, 신약에서 20회 언급된다. 대하 36:13절은 남 유다의 패망의 원인을 시드기야의 완악함-강퍅함이라고 본다: 
 “느부갓네살 왕이 저 (시드기야왕)로 그(의)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게 하였으나, 저 (시드기야)가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stiff-necked) 마음을 강퍅케 하여 (hardened his heart)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먼저 출 4-14장의 애굽의 바로왕의 완악함을 예로 들 수 있다. 사 6:9-10절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 완악함은 마음의 둔함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시 95:7-11절은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반역 사건에 대한 회고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의 완악함을 경고하기 위해서 시 95편을 인용한다 (히 3:7-4:11). 

 예수님께서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사 6:9-10절을 인용하신다 (마 13:13-15; 막 4:11-12; 눅 8:10).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이적을 유대인들이 보고도 돌아오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요 12:40). 그런데 예를 들어, 바로의 경우 그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분은 여호와라고 10번이나 말씀하신다 (출 4:21; 7:3; 9:12 등). 
 그렇다면 신적 목적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 졌다라고 수동형으로 말하는 구절도 있고 (출 7:14, 22; 8:19; 9:7, 35), 바로 스스로 완악한 마음을 먹었다고 능동형으로 말하는 구절도 있다 (출 8:32; 9:34). 

 롬 9:6-13절에서 바울은 혈통적인 이스라엘 가운데서 일부의 남은 자가 있는 반면에 다수는 남은 자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한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롬 9:18).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와 저주 받을 자를 예정하실 수 있다고 믿는 전통적인 ‘이중예정설’의 근거 구절이 바로 롬 9:18절이다. 주목해 볼 것은 완악하게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비롯되지만, 한편으로는 완악함이 영구불변의 상태는 아니라는 점이다 (롬 11:11-24). 완악해진 상태는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될 수 있다. 복음을 믿음으로 완악함은 변화 가능하다. 혈통적 유대인들 전부가 완악해진 (우둔해진) 사람들이 되어 넘어지기까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to fall beyond recovery) 실족하지는 않았다 (롬 11:7, 11). 그들은 믿음을 통해서 다시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다 (롬 11:23). 적용해 보면 마음의 완악함은 우리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실천이 중요하다. 우리의 사명은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가지고 100배의 결실을 하는 것이다. 

참고 

Moo, D.J. 2004. 완악. IVP 성경신학사전. IVP. p. 951-954. 

참고
“완전한 미움(perfecto odio)으로 악인들을 미워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악인들 안에 있는 죄악을 미워하되, 악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미움으로 미워하는 것이니, 곧 악 때문에 악인을 미워하게 되지도 않고, 악인 때문에 악을 사랑하게 되지도 않는 것이다.”
— 아우구스티누스, 『시편주석』 시편 139편 22절 주석 중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마가복음 <톰 라이트>
p55. " 왜 예수님은 그날(안식일)을 무시하는 듯이 행동하시는가? 안식일이 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배타적 민족주의의 표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Thursday, November 29, 2012

한 날 묵상 - 갈 4:21- 5장 1절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이제는 굳게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 우리는 어느때 자유할 수 있는가?

2. 율법안에 있을 때 결코 자유할 수 없다.

3. 은혜 안에 있을 때 자유할 수 있다.

4. 법은 우리를 억압하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지키려고 있다. 결국 법안에 자유할 수 있으련 법이 있는 목적을 깊이 알아야 한다.

5. 율법안에 있으면 우리는 결코 죄 아래 있을 수 밖에 없다. 율법에 완벽한 사람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6.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율법을 떠나서는 살 수 없지만, 율법을 초월하여 자유할 수 있다. 은혜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7. 예수님은 우리게 참 자유를 주셨다.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자유를 주신 것이다.
 5장 1절

8. 우리는 태어날 때 신분상 약속을 따라 났다.

9.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여종 하갈에게서 난 아들과 자유있는 여자에게서 난 아들이다.

10.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다. 그러나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을 따라 났다.

11. 육체를 따라 낳은 자녀는 시내 산으로부터 온 율법의 아들이다.(24절) 시내 산에는 속박이 있고, 억압이 있고, 죄가 있다.

12.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난 낳은 아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어머니로부터 나왔다. 예루살렘에는 약속이 있다. 그리고 자유가 있으며, 은혜가 있다.(24절)
 참고) 로마서 9장 1-18절. 약속의 자녀 약속의 말씀.

13. 믿음의 사람들은 시내산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이다.(28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여저히 육체를 따라 살아가고 있다. 29절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15. 로마서 7장에서는 혼인 관계로 비유한 율법과 죄에 대해서, 로마서 8장에서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

16. 우리는 로마서 7장 24절 말씀을 읽히 알고 있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17. 우리에게는 자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종의 멍에를 메는 것이 때로는 편하기 때문이다.

18.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출애굽기 16장 2-3절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19.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할까요? 왜 자꾸 종의 습성을 버리지 못할까요?

20.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1.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2.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23. 이게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녀들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다.

24. 우리가 자유할 수 있는 은혜를 갖는것에 아무런 조건이나 의무사항이 없습니다. 전적인 은혜 뿐입니다.

25. 하나님의 이 사랑을 받으십시오. 예수님의 이 마음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자유의 삶을, 은혜의 삶을 진정 누리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26.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삶입니다.

27. 자유하라.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리라. 나아게 믿음이 있기에 내가 무엇을 섬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버리라. 그져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안에 자유함을 누리라고 말씀하신다.

28.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 은혜의 복음은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29. 래디컬 투게더, p58-59에 실린 글이다.
 복음은 인류를 행위의 중압감에서 해방시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이들의 죄를 말소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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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떠한 행위나 공로로도 구원의 조건을 충족시킬 방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고 늘 떠올리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 오직 이미 할 일을 다 하신 그리스도를 신뢰해야만 주께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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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이 떨어지는 죄책감은 내면에서 솟아나는 자발적이고, 절박하며, 즐겁고, 단호하며, 은혜에 감격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고품격 순종에서 밀려난다. 어떤지 죄를 짓는 것 같아서가 아니라 한없이 큰 사랑을 받았으면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랑에서 큰 만족을 얻을 수 있기에 아낌없이 베푸는 삶을 살게 된다. 의무감이 아니라 기대감을 가지고 급진적인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게 된다는 뜻이다.

30. 그져 선물이다. 인생이 선물이다. 삶이 선물이다. 결코 인생이 불행이 아니다. 삶이 불행이 아니다.

31. 성령이 주시는 참 자유를 누리기 원한다. 성령이 주시는 참 자유속에서야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다.

3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