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외쳐도 반응도 없고 듣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 않는 세대를 가리켜, 아님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들으려 하는 세대를 가리켜, 무슨 세대라 말하는 것이 좋을까?
2. 음 성경적 표현을 빌리면, 완악한 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완악"하는다는 말은 '성질이 억세게 고집스럽다'는 의미가 있네요.
3. 그래서, 신구약 성경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완악함의 전형적인 모습들을 찾아 보았다.
4. 구약에서는 출 4-14장의 애굽의 바로왕의 완악함을 예를 살필 수 있다. 바로는 도무지 모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5.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11장 15-17절 "장터에서 피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7. 이런 의미로 볼 때,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완악한 백성이었다. 사 6:9-10.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데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8. 이렇듯 "완악함"을 이기는 출발은 들음이다. 그래서 난 '들음은 섬김이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들음에서 출발하는 믿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들음은 이웃을 품는 출발이다.
9. 요즘 시대는 참으로 귀가 닫혀 있는 시대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불신의 시대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친밀한 교제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할 수 있다.
10. 완악함의 시대를 살아가는 복음의 빚진 자들의 삶을 어떤 삶이 되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님의 모습속에서 발견해 보도록 하자.
11. 복음에, 예수님께 마음이 완악함을 가진 자들을 향햐여 예수님의 반응은 이러하셨다.
12. 1) 탄식하셨다. 그리고 2)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셨다.
13. WHY? 탄식과 노하심을 예수님은 가지셨을까?
14. 예수님을 고발하려 예수님을 주시하는 완악한 마음을 가진 그들에게는 모든 사람에게 복된 소식인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삶 속에 누리지도 못하였다.
15.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그들을 향해 탄식하셨고,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세력에 대하여 노하셨다.
탄식함과 노하심은 구별을 잘해야 한다. 절대로 반대로 해서는 안된다.
16. 그들이 복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누리지도 못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4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17. 세번째로 완악함 세대를 향한 예수님의 반응은 3) 복음의 길을 가라. 사랑의 길을 가라. 섬김의 길을 가라(5절)였다.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완악한 반응을 보이는 그들을 향해 복음을 가진 자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은 복음을 살아내는 인생이다.
18. 복음에 완악한 자들과 논쟁하지 않았으며, 긍휼과 사랑으로 복음의 삶을 살아가며, 복음이 말씀하신 사랑의 완성의 삶을 살아야 한다.
19. 당신은 지금 무엇을 주시하고 있는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런데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내 마음에 무엇을 담아 주시하며 바라보고 있는가? 이다.
20. 완악함인가? 열린 마음인가? 무엇보다 복음에 열린 마음인가?
21. 또한 완악함으로 당신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향한 당신의 반응은 또한 어떠한가?
22. 똑같은 완악함인가? 아니면 예수님 완약한 그들을 향해 보여주신 모습인가?
23. 완악한 세대, 백성을 향한 탄식함을 가지라. 그들을 행해 또한 분노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한 복음의 삶을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 완악한 세대와 백성들을 향한 복음의 삶임을 기억하자.
24. 오늘도 완악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남아있다. 비록 그 수가 적을지라도 말이다.
25.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는 나는 오늘도 예수님의 본받아 복음의 삶을 통해 완악한 세대와 백성들과는 대조적 삶을 살아가는 인생의 오늘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6. 그들의 완악함이 조금이라도 무너질수만 있다면....
27.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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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악하다’ (hardening)는 것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과 사역에 대해 냉담하다는 뜻이다.
영적 완악함은 구약에서 30회, 신약에서 20회 언급된다. 대하 36:13절은 남 유다의 패망의 원인을 시드기야의 완악함-강퍅함이라고 본다:
“느부갓네살 왕이 저 (시드기야왕)로 그(의)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게 하였으나, 저 (시드기야)가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stiff-necked) 마음을 강퍅케 하여 (hardened his heart)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먼저 출 4-14장의 애굽의 바로왕의 완악함을 예로 들 수 있다. 사 6:9-10절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 완악함은 마음의 둔함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시 95:7-11절은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반역 사건에 대한 회고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의 완악함을 경고하기 위해서 시 95편을 인용한다 (히 3:7-4:11).
예수님께서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사 6:9-10절을 인용하신다 (마 13:13-15; 막 4:11-12; 눅 8:10).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이적을 유대인들이 보고도 돌아오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요 12:40). 그런데 예를 들어, 바로의 경우 그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분은 여호와라고 10번이나 말씀하신다 (출 4:21; 7:3; 9:12 등).
그렇다면 신적 목적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 졌다라고 수동형으로 말하는 구절도 있고 (출 7:14, 22; 8:19; 9:7, 35), 바로 스스로 완악한 마음을 먹었다고 능동형으로 말하는 구절도 있다 (출 8:32; 9:34).
롬 9:6-13절에서 바울은 혈통적인 이스라엘 가운데서 일부의 남은 자가 있는 반면에 다수는 남은 자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한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롬 9:18).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와 저주 받을 자를 예정하실 수 있다고 믿는 전통적인 ‘이중예정설’의 근거 구절이 바로 롬 9:18절이다. 주목해 볼 것은 완악하게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비롯되지만, 한편으로는 완악함이 영구불변의 상태는 아니라는 점이다 (롬 11:11-24). 완악해진 상태는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될 수 있다. 복음을 믿음으로 완악함은 변화 가능하다. 혈통적 유대인들 전부가 완악해진 (우둔해진) 사람들이 되어 넘어지기까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to fall beyond recovery) 실족하지는 않았다 (롬 11:7, 11). 그들은 믿음을 통해서 다시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다 (롬 11:23). 적용해 보면 마음의 완악함은 우리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실천이 중요하다. 우리의 사명은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가지고 100배의 결실을 하는 것이다.
참고
Moo, D.J. 2004. 완악. IVP 성경신학사전. IVP. p. 951-954.
참고
“완전한 미움(perfecto odio)으로 악인들을 미워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악인들 안에 있는 죄악을 미워하되, 악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미움으로 미워하는 것이니, 곧 악 때문에 악인을 미워하게 되지도 않고, 악인 때문에 악을 사랑하게 되지도 않는 것이다.”
— 아우구스티누스, 『시편주석』 시편 139편 22절 주석 중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마가복음 <톰 라이트>
p55. " 왜 예수님은 그날(안식일)을 무시하는 듯이 행동하시는가? 안식일이 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배타적 민족주의의 표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마가복음 <톰 라이트>
p55. " 왜 예수님은 그날(안식일)을 무시하는 듯이 행동하시는가? 안식일이 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배타적 민족주의의 표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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