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날 묵상 - 막 3:20-34절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이 땅에 누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인가?>
1. 집에서도 편히 쉴 수 없다면, 그는 진정 일중독자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일을 만드는 경우가 아니라, 찾아오는 이들로 인하여 쉼을 얻을 수 없다면, 그는 진정 사랑의 사람입니다.
2. 예수님은 집에서도 편히 쉬실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20절) 예수님은 결코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3.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의 섬김에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고, 또한 본문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서기관들입니다.
4.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의 친족"(21절)입니다.
5. 예수의 친족들이 예수님의 하시는 사역의 일을 듣고 찾아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가 미쳤다"(21절).
예수의 친족들은 지금 오해하고 있습니다. 진질을 알지 못하고 살던 지역에 떠 돌아다니던 헛소문을 잘못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들도 피해자 입니다. 진실을 알지 못하고 헛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22절에서 보듯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하는 말들이 여러 지역에서 들렸기 때문입니다.
6.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눈에 보일 때 미치셨습니다. 바로 사랑에 미치신 것입니다. 사랑의 미치지 않고야 어떻게 쉬고 식사 좀 하려고 찾아온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찾아온 무리들을 받아줄 수 있겠습니까.
7. 예수님의 진정 사랑으로 완전 무장된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사랑하고 사랑하며 사랑하였습니다.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8. 그 사랑의 힘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진실함에서 옵니다. 사랑에 진실함이 있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할 수 있었고, 어느 누구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9. 예수님의 사랑의 힘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반응은 앞서 언급한 사람들처럼 예수를 미쳤다 하거나 귀신에 홀렸다 말합니다(21-22절).
10.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도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낸다" 말합니다.
11. 이들의 말에는 예수님을 모욕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2. “바알세불”은 누구입니까? 왕하1:3 말씀에 의하면, “바알세불”(또는 “바알세붑”)은 블레셋의 다섯 중요한 성읍 중에 하나였던 에그론(Ekron)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원어적인 표현은 히브리어로“바알 즈브브(Ba’al Z’bub)” 즉,“파리떼의 주인(왕)”라는 뜻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 블레셋 지방에서 전염병을 옮기던 파리떼를 지칭했던 말입니다. 결국, 이러한 전염병(역병)을 옮길만큼 힘이 있는 파리떼의 능력이 신의 능력이라고 해서 이들 에그론 사람들은 “바알세불”을 자신들의 신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경멸하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즉, “바알세불”은 “파리떼의 왕”이라는 뜻 외에, “배설물의 주인(똥의 주인)”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바알세불”이라고 했다면, 이는 매우 경멸하며 모독하는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13. 이런 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반응은 사랑과 섬김으로 예수님이 하시고 싶으신 말씀을 단호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14.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주장에 가만히 묵과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그리고 용서받기 어려운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비난했던 적대자들의 생각이 자기 모순적인 것임을 지적하십니다. 한 마디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무너지고, 분쟁하는 집마다 망한다는 말씀입니다.
15. 나아가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심판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16.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17.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눅11:20 말씀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11:20)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18.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 임하였느니라"는 말씀입니다.
19. 예수님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20. 서기관들이 "바알세불"이나 "귀신"의 힘을 의지해서 예수님이 일하시는 문제제기를 결코 사탄은 사탄을 쫓아낼 수 없기에, 예수님의 손을 의지하여 이러한 일들을 하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셨음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21.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랑의 사역을 하심으로 이미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고,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자들에도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2.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는 혈족이나 친족, 이해관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23. 누가 예수님의 어머니이며 동생들이 될 수 있는가?
24. :예수의 친족"(21절)이라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35절)가 되십니다.
25.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에 반대자들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친족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따라서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의 이유를 분명히 이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만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며, 몸된 예수 그리스도안에 한 형제요, 자매가 됩니다.
26. 믿음안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형제, 자매입니다. 몸 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된 지체입니다.
친족일지라도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의 헛소문에 빠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거나, 하나님의 권능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제하는 사랑의 사역을 믿지 않는다면, 결코 예수님의 형제, 자매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일 수 없습니다.
27. 오늘 더욱 나의 가족과 친척을 위해 기도합니다. 영적으로 믿음안에서 한 형제 자매이기를 간구합니다.
28. 아울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로 하나님 나라의 임재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9. 이러한 은혜가 가득한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30. 할렐루야! 아멘!
===
20절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절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2절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낸다 하니
23-29절 예수께서 ...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31절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3절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절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미니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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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une 6, 2013
Tuesday, June 4, 2013
한 날 묵상 - 막 3:7-19 <많은 무리들이 나아오지만, 따로 제자들을 세우시다>
한 날 묵상 - 막 3:7-19 <많은 무리들이 나아오지만, 따로 제자들을 세우시다>
1.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가운데 하신 세 개의 사역의 틀은 이렇습니다.
2. Teaching 가르치시고, Healing 치유하시고, Educating Evangelizing 전파하시는 THE사역입니다.
3. 인간 관계에서 이 세가지 사역은 꼭 필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가정에서 자녀들과 부모의 관계속에서 이러한 사역의 틀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4.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세상의 지혜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상처받은 마음을 감싸줄 뿐 아니라, 후에 장성하여 어른이 될 때 자녀들도 자신과 같은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5. 그래서 교회 교회학교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아비된 마음으로 학생들을 양육할 것을 강조합니다.
6. 제자가 또 다른 제자를 세워가는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속에서 THE사역이 이루어질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아비된 마음으로 양육할 자녀들이 필요했습니다. 친히 함께 숙식하시면서 그들에게 THE사역의 진수를 보여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8. 그래서 예수님은 적당하 때에, 자신의 타이밍에 맞추어 특별히 구별된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시게 됩니다.
9.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10.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원칙이 있으셨습니다.
11. 먼저는 많은 무리들을 중에서 택하지 않았습니다.
7절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12. 한편으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을 잘 따르는 사람들 중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면 그들이 더욱 잘 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13. 그리고 예수님의 신분을 정확히 알 고 있는 사람들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11절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4. 귀신들려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귀신의 힘을 빌려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15. 그런데, 예수님의 선택은 그들도 아니었습니다.
16. 예수님께서 이렇게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신 후 그들을 부르셨다면, 그들은 더욱 은혜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잘 따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17. 그런데 예수님은 따른 무리들, 귀신들어 있는 사람들을 고쳐서 제자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18. 왜 그리하셨을까요? 제 생각에는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만약 그 목적이 사라진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다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 꼭 이런 원리가 아닐까요?
20. 체스터톤, <정통(오소독시)>에서 보면,
- 어떤 한 가지를 사랑할 때 그것이 주는 기쁨은 그것을 사랑하게 하는 이유이며 그것이 주는 슬픔은 그것을 더욱 사랑해야 할 이유이다(125페이지)
- 자신이 사랑하는 장소를 폐허로 만들기에 가장 알맞은 사람은 그곳을 사랑하는 어떤 이유가 정확한 사람이다. 반면에 그곳을 개선시킬 사람은 어떤 이유도 없이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이다(131페이지)
참고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trans01&logNo=140180658524
21. 그래서 예수님은 12절에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드러남은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속에 피어나는 사랑에 있는 것이며, 그 사랑을 함께 짊어지는 자들을 통해서 활짝 피우기 때문입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원칙은 분명했습니다.
13절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원칙은 자신의 일에 열심과 최선과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4. 다윗이 목동으로서 자신의 일을 충성되어 했을 때 그의 성실함과 진실함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25. 왜냐하면 자신의 작은 일에 충성할 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의 주신 사명을 큰 사명으로 알고 그 부르심에 잘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6. 지금 주어진 자신의 일에 충성할 줄 아는 사람이, 곧 큰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27.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교 교양" (De doctrina christiana)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것은 가장 작은 것일 뿐이지만, 가장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은 큰 것이다.”
(Quod ergo minimum est, minimum est,sed in minimo fidelem esse magnum est.)
28. 예수님을 원하시는 제자의 상은 예수님을 잘 따라다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명을 성실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9. 예수님의 사명을 잘 순종하는 사람들이 오늘 이 순간에도 제자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30. 예수님은 성육신의 이유이자 이 땅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 사명을 감당하신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야 함을 아셨습니다.
31. 그리고 이제 이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사람들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셨습니다.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남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32. 그래서 제자들이 필요했고, 제자들이 될만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정한 사명을 주십니다. 물론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동안 함께 하면서 훈련을 잘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14절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절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33. 예수님이 감당하셨던 THE사역을 동일하게 제자들도 감당해야 할 THE사역이었습니다.
34. 그래서 많은 무리들속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기적을 베풀어줌을 통해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극히 작은 일이지라도 자신의 일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자들중에서 따로 불러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35. 물론 많은 무리들중에서, 기적을 통해 은혜를 체험한 자들 중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들에게 충성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또한 제자로 부름받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것이 일상의 성실함과 예수님의 사명을 충성되이 지키는 사모함보다 앞설 수 없음을 제자들의 부르심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6. 이제 열 둘의 이름이 나옵니다. 물론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을 포함해서.
16-19절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37. 나는, 당신은 지금 제자로 부름받기에 합당한 자들인가?
아니면, 많은 무리들이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만 알고 신적인 능력이 내게 임하기를 기대하는 자들인가?
38. 오늘 하루 주어진 일과 감당해야 할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합시다. 그것이 가장 큰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39.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결단하는 삶이 결코 세상의 가치로 큰 것이 아니며,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큰 것이기에 어떤 고난과 아픔이 있는 길일지라도 감사함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그리고 그러한 한 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0. 할렐루야! 아멘!
1.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가운데 하신 세 개의 사역의 틀은 이렇습니다.
2. Teaching 가르치시고, Healing 치유하시고, Educating Evangelizing 전파하시는 THE사역입니다.
3. 인간 관계에서 이 세가지 사역은 꼭 필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가정에서 자녀들과 부모의 관계속에서 이러한 사역의 틀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4.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세상의 지혜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상처받은 마음을 감싸줄 뿐 아니라, 후에 장성하여 어른이 될 때 자녀들도 자신과 같은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5. 그래서 교회 교회학교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아비된 마음으로 학생들을 양육할 것을 강조합니다.
6. 제자가 또 다른 제자를 세워가는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속에서 THE사역이 이루어질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아비된 마음으로 양육할 자녀들이 필요했습니다. 친히 함께 숙식하시면서 그들에게 THE사역의 진수를 보여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8. 그래서 예수님은 적당하 때에, 자신의 타이밍에 맞추어 특별히 구별된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시게 됩니다.
9.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10.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원칙이 있으셨습니다.
11. 먼저는 많은 무리들을 중에서 택하지 않았습니다.
7절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12. 한편으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을 잘 따르는 사람들 중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면 그들이 더욱 잘 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13. 그리고 예수님의 신분을 정확히 알 고 있는 사람들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11절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4. 귀신들려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귀신의 힘을 빌려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15. 그런데, 예수님의 선택은 그들도 아니었습니다.
16. 예수님께서 이렇게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신 후 그들을 부르셨다면, 그들은 더욱 은혜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잘 따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17. 그런데 예수님은 따른 무리들, 귀신들어 있는 사람들을 고쳐서 제자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18. 왜 그리하셨을까요? 제 생각에는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만약 그 목적이 사라진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다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 꼭 이런 원리가 아닐까요?
20. 체스터톤, <정통(오소독시)>에서 보면,
- 어떤 한 가지를 사랑할 때 그것이 주는 기쁨은 그것을 사랑하게 하는 이유이며 그것이 주는 슬픔은 그것을 더욱 사랑해야 할 이유이다(125페이지)
- 자신이 사랑하는 장소를 폐허로 만들기에 가장 알맞은 사람은 그곳을 사랑하는 어떤 이유가 정확한 사람이다. 반면에 그곳을 개선시킬 사람은 어떤 이유도 없이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이다(131페이지)
참고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trans01&logNo=140180658524
21. 그래서 예수님은 12절에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드러남은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속에 피어나는 사랑에 있는 것이며, 그 사랑을 함께 짊어지는 자들을 통해서 활짝 피우기 때문입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원칙은 분명했습니다.
13절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원칙은 자신의 일에 열심과 최선과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4. 다윗이 목동으로서 자신의 일을 충성되어 했을 때 그의 성실함과 진실함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25. 왜냐하면 자신의 작은 일에 충성할 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의 주신 사명을 큰 사명으로 알고 그 부르심에 잘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6. 지금 주어진 자신의 일에 충성할 줄 아는 사람이, 곧 큰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27.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교 교양" (De doctrina christiana)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것은 가장 작은 것일 뿐이지만, 가장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은 큰 것이다.”
(Quod ergo minimum est, minimum est,sed in minimo fidelem esse magnum est.)
28. 예수님을 원하시는 제자의 상은 예수님을 잘 따라다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명을 성실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9. 예수님의 사명을 잘 순종하는 사람들이 오늘 이 순간에도 제자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30. 예수님은 성육신의 이유이자 이 땅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 사명을 감당하신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야 함을 아셨습니다.
31. 그리고 이제 이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사람들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셨습니다.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남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32. 그래서 제자들이 필요했고, 제자들이 될만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정한 사명을 주십니다. 물론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동안 함께 하면서 훈련을 잘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14절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절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33. 예수님이 감당하셨던 THE사역을 동일하게 제자들도 감당해야 할 THE사역이었습니다.
34. 그래서 많은 무리들속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기적을 베풀어줌을 통해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극히 작은 일이지라도 자신의 일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자들중에서 따로 불러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35. 물론 많은 무리들중에서, 기적을 통해 은혜를 체험한 자들 중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들에게 충성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또한 제자로 부름받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것이 일상의 성실함과 예수님의 사명을 충성되이 지키는 사모함보다 앞설 수 없음을 제자들의 부르심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6. 이제 열 둘의 이름이 나옵니다. 물론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을 포함해서.
16-19절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37. 나는, 당신은 지금 제자로 부름받기에 합당한 자들인가?
아니면, 많은 무리들이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만 알고 신적인 능력이 내게 임하기를 기대하는 자들인가?
38. 오늘 하루 주어진 일과 감당해야 할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합시다. 그것이 가장 큰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39.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결단하는 삶이 결코 세상의 가치로 큰 것이 아니며,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큰 것이기에 어떤 고난과 아픔이 있는 길일지라도 감사함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그리고 그러한 한 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0. 할렐루야! 아멘!
Thursday, May 30, 2013
한 날 묵상 - 막 3:1-6 <마음이 완악함하여 봐야 할 것은 주시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한 날 묵상 - 막 3:1-6 <마음이 완악함하여 봐야 할 것은 주시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1. 외쳐도 반응도 없고 듣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 않는 세대를 가리켜, 아님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들으려 하는 세대를 가리켜, 무슨 세대라 말하는 것이 좋을까?
2. 음 성경적 표현을 빌리면, 완악한 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완악"하는다는 말은 '성질이 억세게 고집스럽다'는 의미가 있네요.
3. 그래서, 신구약 성경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완악함의 전형적인 모습들을 찾아 보았다.
4. 구약에서는 출 4-14장의 애굽의 바로왕의 완악함을 예를 살필 수 있다. 바로는 도무지 모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5.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11장 15-17절 "장터에서 피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6.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완악함은 바로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7. 이런 의미로 볼 때,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완악한 백성이었다. 사 6:9-10.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데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8. 이렇듯 "완악함"을 이기는 출발은 들음이다. 그래서 난 '들음은 섬김이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들음에서 출발하는 믿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들음은 이웃을 품는 출발이다.
9. 요즘 시대는 참으로 귀가 닫혀 있는 시대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불신의 시대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친밀한 교제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할 수 있다.
10. 완악함의 시대를 살아가는 복음의 빚진 자들의 삶을 어떤 삶이 되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님의 모습속에서 발견해 보도록 하자.
11. 복음에, 예수님께 마음이 완악함을 가진 자들을 향햐여 예수님의 반응은 이러하셨다.
12. 1) 탄식하셨다. 그리고 2)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셨다.
13. WHY? 탄식과 노하심을 예수님은 가지셨을까?
14. 예수님을 고발하려 예수님을 주시하는 완악한 마음을 가진 그들에게는 모든 사람에게 복된 소식인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삶 속에 누리지도 못하였다.
15.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그들을 향해 탄식하셨고,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세력에 대하여 노하셨다.
탄식함과 노하심은 구별을 잘해야 한다. 절대로 반대로 해서는 안된다.
16. 그들이 복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누리지도 못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4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17. 세번째로 완악함 세대를 향한 예수님의 반응은 3) 복음의 길을 가라. 사랑의 길을 가라. 섬김의 길을 가라(5절)였다.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완악한 반응을 보이는 그들을 향해 복음을 가진 자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은 복음을 살아내는 인생이다.
18. 복음에 완악한 자들과 논쟁하지 않았으며, 긍휼과 사랑으로 복음의 삶을 살아가며, 복음이 말씀하신 사랑의 완성의 삶을 살아야 한다.
19. 당신은 지금 무엇을 주시하고 있는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런데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내 마음에 무엇을 담아 주시하며 바라보고 있는가? 이다.
20. 완악함인가? 열린 마음인가? 무엇보다 복음에 열린 마음인가?
21. 또한 완악함으로 당신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향한 당신의 반응은 또한 어떠한가?
22. 똑같은 완악함인가? 아니면 예수님 완약한 그들을 향해 보여주신 모습인가?
23. 완악한 세대, 백성을 향한 탄식함을 가지라. 그들을 행해 또한 분노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한 복음의 삶을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 완악한 세대와 백성들을 향한 복음의 삶임을 기억하자.
24. 오늘도 완악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남아있다. 비록 그 수가 적을지라도 말이다.
25.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는 나는 오늘도 예수님의 본받아 복음의 삶을 통해 완악한 세대와 백성들과는 대조적 삶을 살아가는 인생의 오늘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6. 그들의 완악함이 조금이라도 무너질수만 있다면....
27. 할렐루야! 아멘!
===
‘완악하다’ (hardening)는 것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과 사역에 대해 냉담하다는 뜻이다.
영적 완악함은 구약에서 30회, 신약에서 20회 언급된다. 대하 36:13절은 남 유다의 패망의 원인을 시드기야의 완악함-강퍅함이라고 본다:
“느부갓네살 왕이 저 (시드기야왕)로 그(의)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게 하였으나, 저 (시드기야)가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stiff-necked) 마음을 강퍅케 하여 (hardened his heart)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먼저 출 4-14장의 애굽의 바로왕의 완악함을 예로 들 수 있다. 사 6:9-10절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 완악함은 마음의 둔함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시 95:7-11절은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반역 사건에 대한 회고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의 완악함을 경고하기 위해서 시 95편을 인용한다 (히 3:7-4:11).
예수님께서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사 6:9-10절을 인용하신다 (마 13:13-15; 막 4:11-12; 눅 8:10).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이적을 유대인들이 보고도 돌아오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요 12:40). 그런데 예를 들어, 바로의 경우 그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분은 여호와라고 10번이나 말씀하신다 (출 4:21; 7:3; 9:12 등).
그렇다면 신적 목적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 졌다라고 수동형으로 말하는 구절도 있고 (출 7:14, 22; 8:19; 9:7, 35), 바로 스스로 완악한 마음을 먹었다고 능동형으로 말하는 구절도 있다 (출 8:32; 9:34).
롬 9:6-13절에서 바울은 혈통적인 이스라엘 가운데서 일부의 남은 자가 있는 반면에 다수는 남은 자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한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롬 9:18).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와 저주 받을 자를 예정하실 수 있다고 믿는 전통적인 ‘이중예정설’의 근거 구절이 바로 롬 9:18절이다. 주목해 볼 것은 완악하게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비롯되지만, 한편으로는 완악함이 영구불변의 상태는 아니라는 점이다 (롬 11:11-24). 완악해진 상태는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될 수 있다. 복음을 믿음으로 완악함은 변화 가능하다. 혈통적 유대인들 전부가 완악해진 (우둔해진) 사람들이 되어 넘어지기까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to fall beyond recovery) 실족하지는 않았다 (롬 11:7, 11). 그들은 믿음을 통해서 다시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다 (롬 11:23). 적용해 보면 마음의 완악함은 우리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실천이 중요하다. 우리의 사명은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가지고 100배의 결실을 하는 것이다.
참고
Moo, D.J. 2004. 완악. IVP 성경신학사전. IVP. p. 951-954.
1. 외쳐도 반응도 없고 듣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 않는 세대를 가리켜, 아님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들으려 하는 세대를 가리켜, 무슨 세대라 말하는 것이 좋을까?
2. 음 성경적 표현을 빌리면, 완악한 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완악"하는다는 말은 '성질이 억세게 고집스럽다'는 의미가 있네요.
3. 그래서, 신구약 성경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완악함의 전형적인 모습들을 찾아 보았다.
4. 구약에서는 출 4-14장의 애굽의 바로왕의 완악함을 예를 살필 수 있다. 바로는 도무지 모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5.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11장 15-17절 "장터에서 피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7. 이런 의미로 볼 때,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완악한 백성이었다. 사 6:9-10.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데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8. 이렇듯 "완악함"을 이기는 출발은 들음이다. 그래서 난 '들음은 섬김이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들음에서 출발하는 믿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들음은 이웃을 품는 출발이다.
9. 요즘 시대는 참으로 귀가 닫혀 있는 시대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불신의 시대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친밀한 교제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할 수 있다.
10. 완악함의 시대를 살아가는 복음의 빚진 자들의 삶을 어떤 삶이 되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님의 모습속에서 발견해 보도록 하자.
11. 복음에, 예수님께 마음이 완악함을 가진 자들을 향햐여 예수님의 반응은 이러하셨다.
12. 1) 탄식하셨다. 그리고 2)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셨다.
13. WHY? 탄식과 노하심을 예수님은 가지셨을까?
14. 예수님을 고발하려 예수님을 주시하는 완악한 마음을 가진 그들에게는 모든 사람에게 복된 소식인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삶 속에 누리지도 못하였다.
15.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그들을 향해 탄식하셨고,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세력에 대하여 노하셨다.
탄식함과 노하심은 구별을 잘해야 한다. 절대로 반대로 해서는 안된다.
16. 그들이 복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누리지도 못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4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17. 세번째로 완악함 세대를 향한 예수님의 반응은 3) 복음의 길을 가라. 사랑의 길을 가라. 섬김의 길을 가라(5절)였다.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완악한 반응을 보이는 그들을 향해 복음을 가진 자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은 복음을 살아내는 인생이다.
18. 복음에 완악한 자들과 논쟁하지 않았으며, 긍휼과 사랑으로 복음의 삶을 살아가며, 복음이 말씀하신 사랑의 완성의 삶을 살아야 한다.
19. 당신은 지금 무엇을 주시하고 있는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런데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내 마음에 무엇을 담아 주시하며 바라보고 있는가? 이다.
20. 완악함인가? 열린 마음인가? 무엇보다 복음에 열린 마음인가?
21. 또한 완악함으로 당신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향한 당신의 반응은 또한 어떠한가?
22. 똑같은 완악함인가? 아니면 예수님 완약한 그들을 향해 보여주신 모습인가?
23. 완악한 세대, 백성을 향한 탄식함을 가지라. 그들을 행해 또한 분노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한 복음의 삶을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 완악한 세대와 백성들을 향한 복음의 삶임을 기억하자.
24. 오늘도 완악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남아있다. 비록 그 수가 적을지라도 말이다.
25.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는 나는 오늘도 예수님의 본받아 복음의 삶을 통해 완악한 세대와 백성들과는 대조적 삶을 살아가는 인생의 오늘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6. 그들의 완악함이 조금이라도 무너질수만 있다면....
27. 할렐루야! 아멘!
===
‘완악하다’ (hardening)는 것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과 사역에 대해 냉담하다는 뜻이다.
영적 완악함은 구약에서 30회, 신약에서 20회 언급된다. 대하 36:13절은 남 유다의 패망의 원인을 시드기야의 완악함-강퍅함이라고 본다:
“느부갓네살 왕이 저 (시드기야왕)로 그(의)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게 하였으나, 저 (시드기야)가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stiff-necked) 마음을 강퍅케 하여 (hardened his heart)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먼저 출 4-14장의 애굽의 바로왕의 완악함을 예로 들 수 있다. 사 6:9-10절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 완악함은 마음의 둔함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시 95:7-11절은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반역 사건에 대한 회고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의 완악함을 경고하기 위해서 시 95편을 인용한다 (히 3:7-4:11).
예수님께서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사 6:9-10절을 인용하신다 (마 13:13-15; 막 4:11-12; 눅 8:10).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이적을 유대인들이 보고도 돌아오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요 12:40). 그런데 예를 들어, 바로의 경우 그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분은 여호와라고 10번이나 말씀하신다 (출 4:21; 7:3; 9:12 등).
그렇다면 신적 목적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 졌다라고 수동형으로 말하는 구절도 있고 (출 7:14, 22; 8:19; 9:7, 35), 바로 스스로 완악한 마음을 먹었다고 능동형으로 말하는 구절도 있다 (출 8:32; 9:34).
롬 9:6-13절에서 바울은 혈통적인 이스라엘 가운데서 일부의 남은 자가 있는 반면에 다수는 남은 자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한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롬 9:18).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와 저주 받을 자를 예정하실 수 있다고 믿는 전통적인 ‘이중예정설’의 근거 구절이 바로 롬 9:18절이다. 주목해 볼 것은 완악하게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비롯되지만, 한편으로는 완악함이 영구불변의 상태는 아니라는 점이다 (롬 11:11-24). 완악해진 상태는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될 수 있다. 복음을 믿음으로 완악함은 변화 가능하다. 혈통적 유대인들 전부가 완악해진 (우둔해진) 사람들이 되어 넘어지기까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to fall beyond recovery) 실족하지는 않았다 (롬 11:7, 11). 그들은 믿음을 통해서 다시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다 (롬 11:23). 적용해 보면 마음의 완악함은 우리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실천이 중요하다. 우리의 사명은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가지고 100배의 결실을 하는 것이다.
참고
Moo, D.J. 2004. 완악. IVP 성경신학사전. IVP. p. 951-954.
참고
“완전한 미움(perfecto odio)으로 악인들을 미워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악인들 안에 있는 죄악을 미워하되, 악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미움으로 미워하는 것이니, 곧 악 때문에 악인을 미워하게 되지도 않고, 악인 때문에 악을 사랑하게 되지도 않는 것이다.”
— 아우구스티누스, 『시편주석』 시편 139편 22절 주석 중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마가복음 <톰 라이트>
p55. " 왜 예수님은 그날(안식일)을 무시하는 듯이 행동하시는가? 안식일이 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배타적 민족주의의 표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마가복음 <톰 라이트>
p55. " 왜 예수님은 그날(안식일)을 무시하는 듯이 행동하시는가? 안식일이 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배타적 민족주의의 표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Saturday, January 14, 2012
한 날 묵상 - 창 37:5-11 <요셉의 꿈과 형들의 미움. 가족의 비극의 시작인가? 가족의 은혜인가?>
한 날 묵상 - 창 37:5-11 <요셉의 꿈과 형들의 미움. 가족의 비극의 시작인가? 가족의 은혜인가?>
오늘 말씀의 흐름..
요셉의 꿈(두번)
요셉은 자신의 꿈을 말했다.
아버지는 꾸짖었고, 형들은 더욱 미워했다.
반전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말씀의 흐름속에 특별한 관계를 찾을 있는가?
요셉의 꿈은 가족의 비극인가? 가족의 은혜인가?
오늘 말씀의 흐름에서 보면 가족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형제들안에 갈등이 시작되며, 서로 미워하며 시기하게 된다. 결국 요셉을 애굽에 팔게된다(37:12-36).
그러나 요셉 꿈 이야기의 끝은 여기가 아니다. 그는 후에 애굽에서 힘든 일들을 만나지만 애굽의 총리가 되고(41:37-57), 결국 가족을 구원하며,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된다(46장).
하나님은 꿈을 통해 요셉을 부르셨다. 요셉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요셉에게 찾아오는 것은 형들이 미움, 시기였다. 형제들끼리의 갈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요셉의 이러한 갈등은 결국 아름다운 이야기로 끝을 맺게 된다. 요셉의 꿈으로부터 시작된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주도권이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모든 사건과 상황들을 이끌어가신다. 이 때 요셉은 항상 하나님편에서 서 있었다. 그 편이 가장 지혜롭고, 모든 문제를 가장 잘 풀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도 때로는 심한 관계의 갈등을 가져올 수 있다. 가족간, 형제들, 친구들, 이웃과의 갈등이다.
예수님의 부르심도 그렇다. - 가족의 미움을 받았다(마13:46-50. 막3:31-35).
예수님의 가르침도 그렇다. - 가족의 미움을 받았을 것이다(눅9:59-60).
제자의 삶도 그렇다.
5절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절 "요셉이... 이르되 청하건데... 들으시오"
7절 "밭에서 곡식 단...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절 "그의 형들이 ... 우리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 왜 꿈이야기에서, 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이야기에서 왕의 이야기가 나올까? 누가 누구를 다스린다는 이야기가 나올까?
왜 이러한 말이 나오는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
9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절 "그가 ..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 "
11절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 형들의 미움은 3중 반복후 "그의 형들의 시기"에서 꽃을 피움.
아버지는 첫 행동이 꾸짖음이었지만, 결국 그 말을 마음에 간직하게 됨.
오늘 말씀의 흐름..
요셉의 꿈(두번)
요셉은 자신의 꿈을 말했다.
아버지는 꾸짖었고, 형들은 더욱 미워했다.
반전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말씀의 흐름속에 특별한 관계를 찾을 있는가?
요셉의 꿈은 가족의 비극인가? 가족의 은혜인가?
오늘 말씀의 흐름에서 보면 가족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형제들안에 갈등이 시작되며, 서로 미워하며 시기하게 된다. 결국 요셉을 애굽에 팔게된다(37:12-36).
그러나 요셉 꿈 이야기의 끝은 여기가 아니다. 그는 후에 애굽에서 힘든 일들을 만나지만 애굽의 총리가 되고(41:37-57), 결국 가족을 구원하며,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된다(46장).
하나님은 꿈을 통해 요셉을 부르셨다. 요셉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요셉에게 찾아오는 것은 형들이 미움, 시기였다. 형제들끼리의 갈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요셉의 이러한 갈등은 결국 아름다운 이야기로 끝을 맺게 된다. 요셉의 꿈으로부터 시작된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주도권이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모든 사건과 상황들을 이끌어가신다. 이 때 요셉은 항상 하나님편에서 서 있었다. 그 편이 가장 지혜롭고, 모든 문제를 가장 잘 풀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도 때로는 심한 관계의 갈등을 가져올 수 있다. 가족간, 형제들, 친구들, 이웃과의 갈등이다.
예수님의 부르심도 그렇다. - 가족의 미움을 받았다(마13:46-50. 막3:31-35).
예수님의 가르침도 그렇다. - 가족의 미움을 받았을 것이다(눅9:59-60).
제자의 삶도 그렇다.
5절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절 "요셉이... 이르되 청하건데... 들으시오"
7절 "밭에서 곡식 단...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절 "그의 형들이 ... 우리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 왜 꿈이야기에서, 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이야기에서 왕의 이야기가 나올까? 누가 누구를 다스린다는 이야기가 나올까?
왜 이러한 말이 나오는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
9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절 "그가 ..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 "
11절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 형들의 미움은 3중 반복후 "그의 형들의 시기"에서 꽃을 피움.
아버지는 첫 행동이 꾸짖음이었지만, 결국 그 말을 마음에 간직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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