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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October 25, 2013

한 날 묵상 - 막7:1-23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무엇이 가득 담겨 있는가? 형 식, 외식, 전통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문제는 마음입니다. 바리새인도 우리 도 보이는 것을 씻지 말고 마음을 씻어야 합니다. 마음을 씻기를 할 때 마음 에 거룩이 채워진다. 마음에 거룩이 채워질 때 행동 또한 거룩해진다.>

한 날 묵상 - 막7:1-23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무엇이 가득 담겨 있는가? 외식, 전통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드러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마음이었습니다. 보이는 것을 씻지 말고 마음을 씻으라. 마음을 씻기를 할 때 마음에 거룩이 채워진다. 마음에 거룩이 채워질 때 행동 또한 거룩해진다. 나는 내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 나는 내 마음을 잘 씻고 있는가?>

1.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또 다른 한 축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2. 예수님은 복음을 통해(복음을 주시고) 새생명을 주시기 위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힘없는 약자들을(섬기고 치료하시고) 위해 참 소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3. 그리고 예수님은 율법으로 인하여 돌같이 굳어버린 마음을 가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마음을 깨뜨려 온전한 율법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힘들고 어려운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4. 오늘 본문을 기점으로 예수님을 시험하며, 죽이기 위해 중상모략하는 한 축의 인물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5. 그들이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한 시비의 주제는 율법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일들을 통해서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예수님을 시험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율법으로 낱낱이 파헤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 제대로 그들은 걸려드렸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올 때 예수님은 그들의 나아옴이 진정 기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6. 5절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라는 말씀을 통해서 스스로 판단하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율법에 벗어나지 않았느냐고 묻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7. 예수님을 이들의 질문에 대답을 이사야의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너희들은 문제는 마음이다". - 율법의 문제를 율법으로 대답하시는 예수님
 6-7절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8.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것에 있음이 아닙니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계명으로 하나님을 경배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9. 하나님보다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이 더 컸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율법이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10. 그렇게 하나님이 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더 앞세우다보니 결국에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결국은 그들 스스로 만들어버린 전통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순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8절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11. 결국 이러한 모습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말씀을 계명으로 지키지 않고 스스로 만든 전통으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10-11절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부모를 공경하기 부모님의 필요을 채워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모님께 드릴 몫을 고르반이라 함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고 부모님게 드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13. 결국 그들은 12절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게 되었습니다.

14. 그들의 말씀을 잘못 적용한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잘못된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15.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16. 오늘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 말씀을 잘못 이해하며 적용하며 깨달을 때 하나님보다 성경으로 경배할 수 있습니다.

17. 또한 성경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적용함으로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고 포용하지 못하고,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것에 사랑을 할 여유를 갖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18. 이러한 모습이 전통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안에 지금 신학이라는 학문이 전통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용인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9. 이것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올바른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14절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20.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적용하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행한 오류의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21. 우리의 겉이 아니라 마음을 씻어내야 합니다. 속은 탐욕과 거짓으로 가득하여도 겉은 반지르하게 살 수 있습니다.

추가) 로마서 7장 18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갈고 닦고 기경해야 할 내 마음"

22. 목회자가 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목회자다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3. 많은 사람들앞에 목사인척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에도 진정한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24. 이는 겉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겉만 씻을 뿐 마음을 씻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을 보게 된다.

25.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된 14-19절까지 말씀의 요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26.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이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7. 내 안에 지금 무엇이 있는가? 그것이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28.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29.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가지고 있는 선함, 기쁨, 온전함을 올바르게 깨닫고 분별할 수 있을 때 우리 마음은 새롭게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다.

30. 하나님의 주신 말씀에는 율법적으로, 문자적으로 의미하는 것 이상이 있습니다.

31. 예수님은 자주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32. 우리가 영적인 예배를 온전히 드릴 때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성령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깨달을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33.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선진들이 외식함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식함을 그대로 본받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보게 되다는 것입니다.

34. 그들에게 무엇이 문제입니까?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온전한 말씀을 담지 못했고, 그래서 율법은 알지만, 외곡하였고, 온전한 뜻안에서 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35. 마음의 변화는 말씀의 깨달을 통해서 옵니다. 
14절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8절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36. 만약 우리가 온전히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설프게 이해하고 적용한다면, 더 큰 왜곡과 상대방에게는 더 큰 상처를 주게 됩니다.

37. 율법을 외곡한 상황에서는 그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속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은 무엇입니까?
21절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절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38. 그런데 만약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이 행하는 것보다 더 큰 상처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39. 믿음의 사람들은 깨어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주신 이 거룩한 말씀을 잘 분별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40. 외식함이나 가식이 먼저가 아닙니다. 어설픔 흉내가 먼저가 아닙니다. 진정성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마음이 가장 큰 것입니다.

41. 지금도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나의 외식함이나 율법의 전통이 아니라 내 전부인 마음을 드리는 것이 바로 새롭게 변화받는 길입니다.

42. 이 찬양이 생각납니다. "성령님"
  성령님 내 마음 드립니다
  지금 이시간 충만하게 임하옵소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주의 임재로 나를 둘러 덮으소서

  후렴
  
  십자가를 바라보며 온 맘 다해 예배하니
  사랑스런 성령님 임하소서
  십자가를 바라보면 온 맘 다해 예배하니
  사랑스런 성령님 충만하게 임하소서

43. 형식이 아니라, 전통이 아니라, 후패한 속사람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된 마음입니다.

44. 나의 전부인 마음을 주님께 내어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5.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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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은혜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P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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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사람과 예수님의 대화

1절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엿들었다가"
=> 예루살렘으로부터 무엇을 하기 위해 내려왔는가? 그들의 발걸음의 의미는? 그다지 선하지 못하다. 순수하지 못하다. 무슨 꼼수를 쓰기 위해 내려 왔을 것이다.

겉모습을 씻는 것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절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4절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 씻음이러라"

5절 "이에 바래시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겉을 신경쓰는 것과 지금까지 행해왔던 전통과 연결시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5절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덕을 먹나이까"

예수님의 대답
6절 "이르시되"

첫번째, 전통을 내세우는 그들에 율법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외식을 문제를 지적하신다.
6절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6-7절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망하는 백성이 되었다. 입술로는 찬양하며 예배하되 마음을 그렇지 못하엿다. 그들은 헛된 경배를 하였다.

=>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이해하며 실천하기 바란다. 하나님의 경외하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주신 것을 잘 이해하고 실천하며 행하기 원하셨다.

=>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형식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것이다.
8절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둘째, 그들은 지금 전통에 얽매혀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거기에서 멀리 떠나 있음을 보게 된다.
9절 "또 이르시되"
      "너희가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3절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 예를들어, 모세의 율법 "네 부모를 공경하라"(10절)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10절) 하였는데, 너희들은 이 말씀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11절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절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셋째, 겉만 씻을 뿐 마음을 씻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을 보게 된다.
14-19절 말씀입니다.
 -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이다.
 -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식함을 그대로 본받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 무엇이 문제인가?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마음에 온전한 말씀을 담지 못했다. 그래서 율법은 알지만, 외곡하였고, 온전한 뜻안에서 행하지 못했다.

14절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8절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 율법을 외곡한 상황에서는 그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은 무엇인가? 속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은 무엇인가?
21절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절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
계명은 깨달음을 통해 행하라고 주신 것이다.
계명을 마음에 담아 행하자.

===
찬양 - 성령님
성령님 내 마음 드립니다
지금 이시간 충만하게 임하옵소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주의 임재로 나를 둘러 덮으소서

후렴

십자가를 바라보며 온 맘 다해 예배하니
사랑스런 성령님 임하소서
십자가를 바라보면 온 맘 다해 예배하니
사랑스런 성령님 충만하게 임하소서

찬양 - "내 마음에 가득채운"
내 마음을 가득 채운 주 향한 찬양과 사랑 어떻게 표현할 수 있나
수 많은 찬양들로 그 맘 표현할 길 없어 다시 고백 합니다

주 사랑해요 온 맘 다하여 
말로 다 할 수 없어 오 주 사랑해요 찬양 받아 주소서

수 많은 멜로디와 찬양들을 드렸지만 다시 고백하기 원하네
주님은 나의 사랑 삶의 중심 되시오니 주를 찬양합니다

주 사랑해요 온 맘 다하여 말로 다 할 수 없어

오 주 사랑해요 찬양 받아 주소서

주님 사랑 다시 고백하는 새 날 주심 감사해요
주님 사랑 다시 고백하는 찬양 주심 감사해요

주님 사랑 다시 고백하는 새 날 주심 감사해요
주님 사랑 다시 고백하는 찬양 주심 감사해요

주 사랑해요 온 맘 다하여
말로 다 할 수 없어
오 주 사랑해요 찬양 받아 주소서

주 사랑해요 온 맘 다하여
말로 다 할 수 없어
오 주 사랑해요 찬양 받아 주소서

주님 사랑 다시 고백하는 새 날 주심 감사해요
주님 사랑 다시 고백하는 찬양 주심 감사해요

주님 사랑 다시 고백하는 새 날 주심 감사해요
주님 사랑 다시 고백하는 찬양 주심 감사해요 

===
참고도서
1. 마음 전쟁 -
2. 하나님의 모략 p467. 변화된 신념은 행동과 상품을 바꾼다  "우리는 다가가 섬기는 이들의 마음을 바꾸는데 집중해야 한다"
     P488 "제자들로 하여금 사고와 감정과 행동을 지배하던 구습과 그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요8:34, 롬 6:6).
===
참고 - 동물이 돌이 되는 호수
http://blog.naver.com/lemonade3939?Redirect=Log&logNo=140198422578

Thursday, November 8, 2012

한 날 묵상 - 갈 3:19-24 <율법이 무엇이냐?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한 날 묵상 - 갈 3:19-24 <율법이 무엇이냐?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약속과 율법은 왜 같이 주어졌을까? 약속와 율법은 서로 역할이 달랐다. 율법은 율버대로, 아브라함에 주신 약속은 약속(복음. 믿음)대로 그 역할이 달랐다. 지금도 우리에게 성경 말씀과 은혜가 함께 주어졌다. 서로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1.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 율법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습니다.

3. 앤드류 쥬크스(Andrew Jukes)는 "사단은 우리 사람이 율법을 사용하여 스스로 거룩한 존재라고 증명하게끔 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

4. 율법이 없는 곳에 죄가 있을리 만무하다.  율법이 있기 때문에 죄가 있다.

5. 우리가 지금 죄 아래 있다는 것은 곧 율법이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6. 율법은 우리에게 이처럼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완벽할 수 없음을 알려준다. 그래서 우리에게 율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 어떠한 것이 필요하게 된다.

7. 바로 그것은 율법도 어찌할 수 없는, 율법을 이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야 말로 진정 모든 율법을 우리도 초월할 수 있게 한다.

8.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거할 때 우리는 율법을 뛰어넘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

9. 그래서 율법은 율법 나름의 쓰임이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꼐 인도하는 초등학문이 된다.

10. 따러서 우리가 율법을의 깨달음을 통해 우리가 완벽할 수 ,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이 문제르 해결하기 위한 양심의 깨달음이 갖게 되는데 그게 바로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통로가 된다.

11. 율법을 초월하여 진리안에 자유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될 대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찾게 되면, 그 분에 품에 안기게 된다.

12. 율법에 관해 아주 재미있는 부분은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말씀안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13. "Jesus loves me this I know for the Bible tells me so"

14.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15. 말씀이 가까이 함에 진정 나를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할 뿐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 수 있게 한다.

16. 오늘 본문에서는 율법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바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으로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 까지 있을 것이라고 1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7. 결국은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15-18절)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8. 능히 우리가 율법에 기록된대로 살았더라면 우리는 율법으로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게 될 자가 아무도 없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는 로마서3장의 말씀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19. 우리는 약속의 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되며, 지금 우리 모두는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20.
믿음이 오기전에는 우리는 율법아래 갇혀 있었지만, 믿음이 온 후에는 우리는 초등학문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오기전에는 구약 시대의 백성들도 믿음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믿음이란, 성육신하셔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역사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21.
믿음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구속사역을 감당하시고 이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이시간 지금 우리를 위해서 그곳에서 중보하고 계십니다.

22.
오직 하나님의 은혜안에 거하길 원합니다. 오직 말씀안에 거하길 원합니다. 성경은 능히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오늘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그 은혜와 사랑을 말씀속에서 만나는 은혜가 있는 한 날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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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절 율법은 무엇인가? 범범하므로 더하여 진 것이라.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 까지 있을 것이라.

21절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절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3절 "믿음이 오기 전에"

24절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Wednesday, November 7, 2012

한 날 묵상 - 갈 3:15-18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유업의 은혜를 누리라>

한 날 묵상 - 갈 3:15-18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유업의 은혜를 누리라>

1. 갈라디아서 3장의 말씀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세 가지 현상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첫번째는, 7절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알지어다"
3. 두번째는, 14절 하반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4. 세번째는, 24절 히반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5. 그런즉,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 살아가게 됩니다.

6.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어게 됩니다.

7. 다른 것을 없습니다.

8.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율법과 약속이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살피는 시간입니다.

9. 여기서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율법이 약속보다 먼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10. 율법이 있기 430년 전에 이미 약속이 주어졌습니다(17절).

11.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앞서 언급한 6-14절에서 기록되고 있는 아브라함에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의 받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12.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자손을 향해 주신 약속입니다.

13.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손입니다.
  29절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14. 우리가 복의 유업을 받게 되는 것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통해서 받게 됩니다.

15. 내가 지금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복의 유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

16. 다시 정리하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유업을 이를 자는 오직 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7.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도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며,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을 상속받을 상속자가 됩니다.

18. 하나님은 이 약속을 유법보다 먼저 주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할례를 통해서, 혈통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유업입니다.

19. 이제, 우리는 어디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합니까?

20.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율법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오직 약속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21. 오늘 하루도 삶에서 은혜로 주신 유업을 기뻐 받은 자로서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22.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서 끊을 자가 없습니다.

23. 15절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24. 오직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어 은혜와 사랑의 매여 주님의 가신 길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그리고 오늘 한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5.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삶에 가득하며 충만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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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절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오직 한 사람을 가르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 약속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17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절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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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November 5, 2012

한 날 묵상 - 갈 3:5-14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율 법 의 행위로는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에 이 르 고 성령의 행하시는 일을 받게 됩니다.>

한 날 묵상 - 갈 3:5-14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에 이르고 성령의 행하시는 일을 받게 됩니다.>

1.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힘은 어디서 오나요?

2. 밥심! 지심(지식)! 권심(권력)! ㅋㅋㅋㅋ 뭐 대충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갈 힘은 어디서 오는가?

3. 성령의 역사하심은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을 넘어 삶의 전영역에서 역사하십니다.

4. 우리가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생각할 때 믿음으로만 제한시키면 우리의 삶이 율법에 매일 수 있습니다.


5. 5절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6. 신앙이 오래되다면 보면 잊어버리거나 익숙해지면서 초심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게 되는데, 초기의 은혜는 바로 믿음으로 성령의 은혜이다. 신앙이 오래되다면, 그리고 교회의 일들이 익숙해지다면 자신의 경험이나 능력을 의지하게 되는데, 이 때 늘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은혜이다.


7. 성령의 역사하심은 삶의 전영역에 미칩니다.

8. 우리가운데 성령을 주시고, 믿음으로 능력을 행하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입니다.

9. 우리의 그 어떠한 행위에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10. 믿음에 관한 성령이 주시는 선물은 아브라함의 의가 어디서 온 것인가에 대한 예를 통해 확증하고 있습니다.

11. 아브라함의 의는 믿음에서 왔습니다.

12. 결코 아브라함의 행위로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의 근원이 된다는, 즉 8절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14. 9절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5. 오직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습니다.

16. 그렇다면, 죄와 은혜를 논 할 때, 성령은 어떻게 죄 속에서 역사하는가?

17.   박총님 facebook에서...
  "너는 네 과거의 죄와 부도덕한 습관에서 온 모든 결함이 너를 위한 나의 사랑스런 섭리의 한부분이라는 것과, 그 결함을 지닌 너의 지금 모습 그대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단다. 
그러므로 너는 내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판단하는 습관을 극복해야 한단다.…
네가 나의 마음에 드는 길, 즉 내가 너를 사랑하기 원하는 길은, 너의 모든 결점과 결함을 지닌 채 지금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란다.
만약 내가 원한다면 순식간에 그 단점과 결점을 없애버릴 수 있단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내가 너를 사랑하기 원하는 방식으로 즉, 너의 지금 그대로의 모습대로 사랑할 수 없게 된단다."
_Julian of Norwich, Revelations of Divine Love.

18. 율법은 여전히 그 나름대로 필요성이 있습니다.

19. 율법의 행위가 그리스도의 의에 이르는 단초는 되지 못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율법의 행위속에서 우리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선물을 구하게 하는 상한 심령으로, 심령의 가난함으로 인도합니다.

21. 그래서 율법은 율법 나름의 역할을 잘 하고 있습니다.

22. 우리안에 있는 성령의 은혜와 율법의 행위의 전쟁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23. 물론 성령의 은혜가 승리하겠지만 말이지요.

24.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에 이르렀다는 말씀을 통해서, 모든 민족으로 구원의 선물을 받는 것이 결코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뿐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5.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은혜와 감사를 줍니다.

26. 성령이 여전히 내 안에 나의 잘남이나 못남이나 능력이나 무능력이나 나의 상태를 떠나서 여전히 계시다는 것입니다.

27. 왜냐하면 믿음이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28. 오로지 나는 하나님을 찾아 나서기 때문입니다.

29. 오늘도 그 은혜, 성령의 내주하심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0.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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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 신앙이 오래되다면 보면 잊어버리거나 익숙해지면서 초심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게 되는데, 초기의 은혜는 바로 믿음으로 성령의 은혜이다. 신앙이 오래되다면, 그리고 교회의 일들이 익숙해지다면 자신의 경험이나 능력을 의지하게 되는데, 이 때 늘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은혜이다.

6-12절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
 6절 아브라함의 의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으매"
 7절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8절 이방인 -=> 이방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미리 성경이 미리 알고
       아브라함에 전함 복음이란?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 복이란 복음을 통해서 온다. 따라서 복은 구원이다.
 9절 "믿음으로 말마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절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 -=> 저주 아래 있다.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절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롬3:9-18)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우리는 항상 죄가운에 있다.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율법아래 있으면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러나 죄아래 있기 때문에 은혜안에 있다.
  박총님 facebook에서...
  "너는 네 과거의 죄와 부도덕한 습관에서 온 모든 결함이 너를 위한 나의 사랑스런 섭리의 한부분이라는 것과, 그 결함을 지닌 너의 지금 모습 그대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단다. 
그러므로 너는 내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판단하는 습관을 극복해야 한단다.…
네가 나의 마음에 드는 길, 즉 내가 너를 사랑하기 원하는 길은, 너의 모든 결점과 결함을 지닌 채 지금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란다.
만약 내가 원한다면 순식간에 그 단점과 결점을 없애버릴 수 있단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내가 너를 사랑하기 원하는 방식으로 즉, 너의 지금 그대로의 모습대로 사랑할 수 없게 된단다."
_Julian of Norwich, Revelations of Divine Love.

12절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다.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음으로 오는 우리의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셨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 아래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 이 말씀의 저주가 신명기 28:15-69에 나오는 저주(질병, 가난, 줏음을 포함하는)와 동일하다고 확신하는 번영복음주의 자들이 있다.
여기서 바울의 관점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이다.


 
1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참고
갈 3: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 열방에 빛을, 마이클 고힌 pp79-84.

Thursday, November 1, 2012

한 날 묵상 - 갈 2:15-21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님이 허셨던 율법을 다시 세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한 날 묵상 - 갈 2:15-21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님이 허셨던 율법을 다시 세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1. 오늘도 나는 살아간다. 하루 쉼을 쉬고 호흡을 하며 자연을 보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다.

2. 어제와 오늘의 나는 큰 차이가 없는 듯 하다. 모든 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아주 큰 변화가 내 주변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어제와 오늘의 차이를 결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3. 바로 그렇다. 아주 큰 변화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큰 변화가 불쑥 찾아오면 모든 것은 다르게 보인다.

4. 좋은 던 것도 싫어지고, 싫었던 것이 좋아질 수도 있다.

5. 때론 이러한 큰 변화앞에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진정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지탱하는 무엇의 힘이 있다.

6. 바울에게 가장 큰 변화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찾아오신 사건이다.

7. 이 사건은 바울을 통채로 바뀌어 놓았다. 그의 이름부터 생각, 그리고 행동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가 변했다. 심지어 자연도 변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8. 이제 그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눈에 불을 켜고 죽이려 달려들 던 사람이 눈에 불을 켜고 살리고자 자신의 생명도 조금도 아끼지 않고 살아가게 되었다.

9. 이게 바로 아주 큰 변화이다. 아주 큰 사건이다. 바울을 완전히 바꿔버린 변화이며 사건이었다.

10. 바울은 이제 살아간다. 어떻게 살아가느냐? 내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은혜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11.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12. 이리 큰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야 살 수 있다고 한다면, 다시 돌아갈까? 아니 변화되어 이리도 좋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죽으면 죽었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13. 참으로 이 변화를 느낀 사람이기 때문이다. 

14. 바울 주변에 아직 자신이 이전에 살았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5. 그들은 다시 율법의 잣대를 들이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그들에게도 철저하게 은혜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초기 그의 사역과 싸움은  율법에 매여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6. 바울은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을 통해서 은혜의 복음을 우리게 주심을 통해 율법의 복음은 무너져 버렸다. 

17.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다. 

18. 율법의 행위로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 땅에 오셔서 철저히 율법을 무너뜨리셨다. 

19. 우리는 이제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20. 율법에 대하여는 죽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하기 때문입니다(19절).

21.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도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며 사는 행동을 해서는 결코 아니됩니다(21절). 

22. 오직 예수 이 땅에 살아가는 길은 율법이 아닌 은혜뿐입니다.

23. 이제 내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아네서 살아가기 원한다면 율법이 아닌 은혜앞에 서 있기 원합니다.

24. "나 다시 복음앞에 서네"는 1. 오직 은혜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2. 결코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 삶입니다. 3.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24. 오늘 하루도 이러한 은혜로 꽃피우는 한 날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5. 아멘. 


-=====1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에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8절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다"
   => 할례 행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할례를 행해야만 한다면 구원의 근거가 되는 복음의 진리가 무너지게 된다. 이는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 된다.
   => 율법의 복음이 아닌 은혜의 복음앞에 서라.

   참고) 갈라디아서 5장 2-4절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오늘의 찬양 - 나 다시 복음앞에
http://www.youtube.com/watch?v=ptD2BPszdNI&feature=related

==
International Theological Seminary
El Monte, CA 91731 길성남 교수 바울신학 수요일 오전강의 -2

N.T. Wright가 강조한 것 - “예수님의 언약적 진실성” –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언약적 신실성이다! 
갈 2:15-16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여기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헬라어로는 영어표현하자면, the faith of Jesus로 되어 있음. 이것이 예수님 자신의 믿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음. 전통적으로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보았는데, 주격적으로 해석. 예수 그분 자신의 믿음으로 
로마 가톨릭 견해 – 여전히 ‘의화’(義化)를 주장.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어진 것 결코 아니다. 다만 그 힘이 약해졌을 뿐. 하나님 은혜의 도움을 받아 협력할 수 있고 협력해야 한다. 트렌트공의회, “만일 누가 죄인이 의화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는 협력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에서 오로지 믿음만으로 의화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만일 누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로움만 힘입어서 인간이 의화한다고 주장하거나 성령에 의해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지고 자리잡은 은총과 사랑을 제외한 채 오직 죄사함에 의해서만 의화한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우리를 의화하는 은총은 오직 하나님의 호의일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당해야 한다.” 16세기 트렌트회의, 지금도 여전히. 사도 바울을 파문시키는 꼴이다. 
하나님의 은혜(선행적 은총)와 사람의 노력(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함. 그리하여 신인협력적 구원론이다. 그 근거는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다. 유대교와 비슷하나, 단지 예수님을 인정하느냐 않느냐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도바울의구원론 – 양자됨 (*법적으로 하나님자녀로 삼아주신다) 제임스 패커 – 사도바울 구원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양자삼는 일이 흔히 있었다. 양자됨이라는 단어가 5번 나옴. 그 중 바울서신에 3차례가 나옴. 
이신칭의는 가장 근거가 되는데,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자녀됨이 더 높은 개념이고 풍성한 특권이다. 법정은 차갑다. 친밀한 교제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구원이라는 큰 복을 설명하기 위한 것인데, 양자됨이 더 친밀하고 풍성하다.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겠다, 너희는 네 자녀다. 
갈 4:4-7, 
롬 8:15 우리가 다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 그래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엡 1:4-6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신약 메시지의 핵심이다. 하나님사랑을 통한 양자됨! 
휘오떼시아 – adoption. 갈 4:5,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고.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려고. 원래 자식이 아니고 원수 그 자체들이었으나 원수갚지 않으시고 자녀로 삼았다. 엡 1:5, 기쁘신 뜻,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 휘오떼시안. 
로마 시대 아들들을 입양. 법적으로 상속자 삼음. 상속자의 권리를 가진 자로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셨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복된 기업을 다 누릴 수 있도록 우리를 받아주심. 그의 당당한 자녀들, 아들들로 받으심. 원래 원수였던 자들임. 
칭의는 하나님을 심판자로 보는 법정개념인데 비해, 양자됨은 법정개념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는 가족개념. 하나님은 양자됨의 복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를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이끌어들이신다. 우리는 더 이상 외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며 상속자이다. 
입양하면 바로 엄마아빠라고 부르느냐? 성장하여 살펴보고 엄마아빠. 갈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참조) 개역개정: 아빠 아버지, 개역한글판: 아바 아버지. 
아빠는 원래 아람어에서 아버지. 회당에서 아람어로 통역. 탈굼. 아람어 단어를 헬라어로 음역해서 표현한 것이 ‘아바’(abba)임. 그대로 읽으면 ‘압바, 아빠’가 되는 것임. 소리나는대로 표기한 것임. 본래 발음에 가깝다. 
이 발음을 가지고 논쟁이 벌어짐. 요아킴 예레미아스, 예수님의 비유. 괴팅겐 대학교 신약학자. 열 살 때부터 17세까지 예루살렘에 가서 살았었음. 막 14: 겟세마네 기도에서. 예수님만의 독특한 어법, 아멘아멘, 인자, 압바. 여기에 예수님의 독특한 자기인식이 나온다. 최소한 당대의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압바라고 쓴 적이 없다. 아이들이 친밀하게 아버지를 부를 때 쓴다. 친밀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독생자로서의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이 있다. 친밀한 교제를 그를 따르는 하나님 자녀들도 똑같이 부를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과 그 자녀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게 하셨다. 
이에 대해 이런 저런 사람들이 비판. 특히 제임스 바. 연구해 보니까, 어린아이들만 아니라 장성한 어른들도 압바라는 말을 썼더라. 노인들을 부를 때도 압바라 불렀더라. 제자들도 자기 랍비들을 압바라고 불렀다. 어린애 용어가 아니다. 그러나 예레미아스가 양보하지 않음. 하나님을 부른 어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람어의 아버지라는 말이 따로 있다. 압바가 절대적으로 어린애용어는 아니지만, 친밀함을 나타내는 용어다. 그런데 그 친밀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른 유대인은 예수님 외에 없었다. 
바리새인들의 거룩은 ritual purity였다. 일상생활속에서 제사장 수준으로 거룩하게 살려고 했다. 그런데 그 거룩을 추구할 때, 하나님나라를 임하게 한다. 세리와 창기들과 구별. 손을 씻기. 바리새파 전통.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을 부정하지 않음.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 탕자의 비유에서 가장 잘 나타남. 세리와 창기들, 죄인들과 가까이 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비판. 이에 탕자의 비유를 베푸심. 큰아들. 어떻게 아버지가 불공평하냐? 바리새인의 하나님관과 예수님의 하나님관이 부닥침.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전체의 아버지로 자신을 드러내심. 그러나 개개인의 아버지로 드러내지는 않으심.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가 다임. “나의 아버지여”라고 부르면서 자기 개인의 아버지로 호칭하지 않음. 진정 개개인이 나의 아버지여 라고 부르짖는 일은 언제 가능해졌는가? 예수님이 오셨을 때 가능해진 것임. 그래서 제임스 패커, 헤르만 바빙크 – 하나님을 큐리오스(주님, 주재자)로 부르는 것으로는 신약시대에는 부족한 것이다. “아도나이” - 큐리오스. 구약의 하나님.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와부활 이후 모든 것 위에 가장 큰 이름을 주심. 주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우리 주 예수님이 되심.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셨음. 하나님은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심. 하나님이 정말 나의 아버지시구나! 라고 깨달으면서, 부르짖게 하심. 그냥 주님! 이라고만 부르면 하나님이 서운해 하실지도 몰라요. 내가 너희를 내 자녀로 삼기 위해서 내 친아들도 내어주셨는데, 여전히 그냥 주여 라고 부르느냐? 아버지라 부르라, 부르짖으라!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 
그의 아들의 영을 보내주셔서 진정 하나님이 내 아버지구나 라고 알고 부를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설복시키심. 헬라어 성경을 보면,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나 다 ‘크라조’를 사용함. 갈라디아서 krazon abba ho pateer. 여기서 크라존은 중성단수임. 일치하는 것은 to pneuma tou hyos – 즉 성령이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임. 그런데, 롬 8:15에서는 다름. en hoo krazomen abba ho pateer. 여기서는 우리가 부르짖는다. 양자의 영을 힘입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습니다. 너희들이 부르짖지만, 성령님이 너희가 그렇게 부르짖게 만들었다. 즉 아들의 영을 우리 안에 보내주셔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임을 인식하게 하셨고,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셨다. 육신의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을 하는 분들이 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짖고 있다면,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도 믿기 어려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우리를 돌보시고 가까이 계신 아버지로 인식하고 아버지라 부르느냐? 이것이 마음으로 설복되는 것. 성령님의 역할.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갈라디아서를 읽어봐도 이신칭의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확실하게 말하지 않음. 오히려 양자됨, 상속자라는 말을 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증거 -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확실한 증거가 됨. 갈 3:1 이하에서, 야, 이 어리석은 놈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홀리더냐? 홀렸느냐? 너희 성령 받았지? 그게 너희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듣고 믿음으로 받은 것이다! 그런데 왜 성령을 등장시키는가? 성령은 체험으로 아는 것 –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 것! 하나님 자녀가 된 것임. 이미 죄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임. 그래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임. 확인해야 할 것 – 내가 진정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인정하고 있느냐? 이 점을 확인해야 함. 어느 정도 믿어야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은 것이냐? 내 믿음의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내가 믿는 그 대상으로 인해서 내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 (칼빈) 믿음이 연약하다 할지라도 주님을 구원자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면 성찬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믿음이 있다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고, 연합되었다면, 그 연합으로 인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임. 그렇다면, 하나님 자녀가 된 것임.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의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 그 마음으로 무릎꿇고 기도할 때.. 이렇게 인도하시는구나! 가장 친밀할 때,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임. 그리고 공적인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느끼는 것임. 이것이 바로 자녀됨, 양자됨의 문제다!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후예들이 이신칭의만큼 양자됨을 강조했어야 했다. 제임스 패커의 글. Knowing God 중에서, 양자됨 부분을 꼭 읽어보실 것. 최고의 고전 중하나. 성도의 견인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가 뭐냐? 양자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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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시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에 속해 있다. 그들은 두려움없이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으며, 그분이 아버지로서 관심을 갖고 사랑으로 돌보실 것임을 언제나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이 신약메시지의 핵심이다.”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320)

“나
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가? 나는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아는가? 나 자신의 진정한 운명을 아는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다. 하늘나라가 나의 집이다. 나는 매일 거기에 가까이 간다. 나의 구주는 나의 형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나의 형제다. 이 말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밤에 잠자리에 들 때, 버스를 기다릴 때, 마음이 한가할 때 언제나 되풀이해서 스스로에게 말하라. 그리고 이것이 전적으로 완전히 사실임을 아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라. 이것이 행복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비결이다... 독자들과 나 자신이 이러한 비결을 완전히 지니기를 바란다”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36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