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의 가르침 "오직 믿음으로" - 레슬리 뉴비긴의 "교회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갈라디아서
1:1-2:1:10
바울은 자신이 사람들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복음을 받았다는 것과, 자신이 이방인들 가운데 행한 사역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유대인들 가운데 행한 사역과 완전히 맥을 같이한다는 것을 확증한다.
2: 18
안디옥에서 유대인의 음식 규례와 관련하여 베드로와 충돌한 사건을 언급함으로써 이 문제에 곧바로 뛰어든다. 이어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서로 배타적 관계에 있음을 강력히 주장한다.
추론하건대, 베드로는 유대인의 의견에 굴복하여 이 두 세계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의 좋은 면들을 - 를 최대한 활용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가차 없는 논리를 편다. 유대인의 음식 규례를 지켜야 마땅하다면, 그것을 범하는 것은 죄다. 그런데 이방인들과 교제하기 위해 그 규례를 범했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죄의 앞잡이가 되신 셈이다. 아울러(신자로서) 허물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범법자가 된다.
이 둘은 완전히 상호배타적이다. 믿음의 의를 행위의 의로 보충하려 한다면, 그리스도를 죄의 앞잡이로 만드는 셈이다. 이 원리를 할례 문제에 적용하는 일은 너무 뻔한 것이어서 바울은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2:20
그러고는 바울 특유의 방식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 그분과 함께 살아남, 믿음 안에서 사는 삶 들을 자세히 묘사한다. 곧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사는 인생이다.
2:21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은 모두 은혜에 보답하는 믿음의 삶이다. 거기에 율법의 행위를 더하는 일은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것이다. "의롭게 되는 것이 윫법으로 말미암으로면 그리스도 께서 헛되 죽으셨느니라"
3:1-5
바울은 이와 똑같은 절대적 이분법-율법이냐 믿음이냐-을 3장에서도 주장한다.
첫째, 그는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했던 베드로와 같이, 성령과 그분의 사역이 모두 그들의 것이 된 것은 "듣고 믿음으로"라는 기정 사실(3:1-5)을 보라고 호소한다. 그러고는 모세의 율법 이전으로, 심지어 할례 제도가 생기기 전으로 돌아가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엄을 상기시킨다.
3:6-14
그러므로 아바르함의 참 자손은 믿음에 근거하고 있으며, 율법에 근거한 이는 율법을 모두 지키지 않는 이에게 임하는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한다. 율법과 믿음은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기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을 물려받고 믿음을 통해 성령의 약속을 받았다.
3:15-18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가 된 이들이 그 약속의 대상-씨앗-이다. 그리고 나중에 주어진 율법은 그 약속을 무료로 만들 수 없다.
3:19-29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 상번되지 않으며, 그 목적은 믿음의 길 외에 하나님께 이르는 다른 모든 길을 봉쇄하는 것이다.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없으나 우리를 그리스도께 안내할 수는 있다. 그는 말한다. "이제 너희는 다 믿음과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지체들,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되었다".
4:1-11
"너희가 이 감옥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영을 받고 그분의 자녀가 되었는데, 어떻게 감옥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가"
5:4
이어서 아주 부드러운 어조로 그들이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이전의 사랑을 그리고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려고 자신이 다시 겪는 해산의 고통을 상기시킨 다음, 이번에는 이스라엘과 이삭의 비유로 들어 다시 율법과 믿음이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고 그들을 설득한다. 그리고는 지극히 엄격한 어조로, 할례를 받는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끊어 진다"라고 증언한다.
5:2-12
그런 사람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함으로 아브라함의 씨앗인 그 '새로운 사람'에 속한 지체가 아니다. 그런데 그 참 씨앗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ㅇ의롭다고 하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히 기다린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고,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이 중요하기 땜누다."
5:13-6:10
여기서도 성령과 믿음이 핵심 단어로 등장한다.
참고: "기독교 고전교육" 24페이지. 롬 12:2; 엡 4:23-24; 골 3:10.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은 하나님 편에서는 성령의 선물에 의해, 사람 편에서는 믿음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 우리의 신분은 스스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가 갖는 신분이 아니다. 그 대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기다리며, 아브라함처럼 그분의 약속에 의지하는 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쌓아놓으신 모든 것을 보증하시는 그 성령 안에서 유업을 받은 자의 신분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임을 보여 주는 표지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니라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고, 바울이 나중에 지적하듯, 이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것과 같다. 믿음이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이유는, 믿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아 그 사랑이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를 가로질러 흐르도록 그 수문을 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다스리시고 그 열매를 맺으시는 새로운 창조 세계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 편지의 나머지 부분에서, 바울은 옛 창조와 새 창조를 대비하는 방시긍로 육체의 행실과 대조하여 이 열매를 묘사한다.
6;11-18
끝으로, 친필로 쓴 후기에서는 온 힘을 다해 유과 영, 옛 창조와 새 창조라는 두 영역사이에 존재하는 절대적 대립 관계를 보여 주려 한다. 할례를 강요하는 일은 육의 세계에 속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육신의 자랑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 곧 십자가라는 수치(scandal)를 피하려는 욕구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안에 그리그 그분과 더불어 옛 창조에 대해 죽고 새 창조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요약한 결과 , 이방인인 개종자에 대한 할례 요구가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단절을 초래하기에 사도 바울이 그것을 거부한다는 점과 이 거부의 근거는 그런 요구가 믿음으로 인한 의를 율법의 의로 보완하려는 것이라는 확신임이 분명해졌다. 그 핵심 사랑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인간이 몸담을 수 있는 영역은 두 가지다. 하나는 율법의 영역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그분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세계다. 사실 이 영역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다. 이는 육신의 영역이다. 다른 하나는 은혜의 영역으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그분께 인정받기를 바라는 세계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다스리는 영역이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믿음과 세례로 그것을 붙잡고 성령을 받음으로써 이 영역에 들어간다.
둘째, 이 두 영역은 완전히 배타적이다. 둘 사이에 어떤 조합이나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은혜를 행위로 보충하려 한다면, 이는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다.
셋째, 그렇다고 율법이 하나님의 목적에 상반된다는 뜻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의도는 율법을 통해 은혜와 믿음의 길 이외의 다른 모든 길을 막아 버리는 것이다. 또 율법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되었기에 다시 율법의 속박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넷째,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것은 율법의 영역 전체를 수용하는 것 곧 율법의 무한한 의무를 짊어지고 육체를 신뢰하머 그에 따른 저주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로부터의 단절을 뜻한다.
질문하기
1. 구약에서 나오는 할례가 갖는 충분한 의미와 상징적 위치를 이해할 것. 그래야 할례 대신에 율법 대신에 복음이 갖는 큰 은혜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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