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October 26, 2012

한 날 묵상 - 갈 2:1-10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나 유력한 자들의 그 어떠한 유혹과 핍박에도 복음의 진리가 항상 우리가운데 있게 하며 충만하게 하라>

한 날 묵상 - 갈 2:1-10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나 유력한 자들의 그 어떠한 유혹과 핍박에도 복음의 진리가 항상 우리가운데 있게 하며 충만하게 하라>

1. 복음이 항상 내 가운데 있게 하라.

2. 페북에 글을 보고 잠깐 생각하게 한 글... 제목부터 깊은 생각을 갖는다 "생략된 복음"

[스크랩] 생략된 복음과 현재의 우리의 나은 점? 오
늘 아침 읽은 페친의 담벼락의 글이 하
루종일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와는 페친 관계가 아닌 한 분의 글이 나의 페친 가운데 한 분의 담벼락에 공유되고, 이 글이 내게까지 보이게 되었다. 먼저, 이 글을 다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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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적 성향의 선교사들은 피선교지인 조선에서 제국권력과의 마찰을 피하기위해 "생략된 복음"을 전했다. 출애굽의 해방적지평. 계약법전의 약자보호법 정신. 희년법의 혁명사상. 예언자들의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앞세운 정의실천의 요구 등이 생략된것. 교회의 자기 생존과 확대를 지키기위해 제국권력과의 야합 속에서 복음을 비정치화한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

김용의 선교사의 복음학교는 이러한 "생략된 복음"을 
확대 재생산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유기성이나 김길 등의 책도 마찬가지고. 아니 대부분의 교회가 그렇다. 대표적 친일파이자 감리교신자인 윤치호는 사회정의를 강조한 아모스서를 "신의 증오가 담겨진것"이라며 천대시했는데 지금의 우리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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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문단 가운데 두 번째 문단은 나로서는 간단히 다룰 성격이 못되므로 생략하고, 첫 번째 문단을 중심으로 내 소회를 간략하게 소개해 보려 한다. 이 첫 문단의 주장은 두 번째로 인용된 내 페친의 첨언으로 인해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데, 요약하면 이리 될 듯 싶다.

일제 강점기를 전후로 하여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기독교의 복음은 “생략된 복음”이었다. 다시 말해, 성경이 복음을 통해서 말하려는 공의적 측면- 출애굽의 해방적 지평, 계약 법전의 약자보호법 정신, 희년법의 혁명 사상, 예언자들의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앞세운 정의 실천의 요구 등이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필자에 따르면 이것은 결국 복음의 비정치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왜일까? “교회의 자기 생존과 확대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데 필자는 이렇게 ‘생략된 복음’을 한국에 뿌린 선교사들을 근본주의자라고 표현했다.

진술된 주장 가운데 몇 가지 확인을 위한 질문들이 있다.

1. 한국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이 근본주의자들이었나?

2. 이들이 소위 ‘생략된 복음’을 전한 것이 ‘교회의 자기 생존과 확대를 지키기 위해서’였나?

3. 선교사들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에서 ‘공의적 성격’을 생략한 채 한국에 전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선교사들이 길러진 토양, 즉 (주로)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 공의적 성격이 편만하게 전해지고 있었음이 입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자기의 신학과 사회의 토양에서는 당연시 되던 복음의 공의적 측면이 한국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선교사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생략된 정황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들을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인간은 그 시대의 아들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따라서 성경은 성령의 조명 아래 신학의 도움을 받아 해석되어야 한다고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자신을 세례한 문화와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세계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 성경을 점진적으로 이해하는 폭과 깊이를 더하신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그 시대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당신의 백성이 이해하기를 바라셨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가지고 지나간 과거의 시대의 성경 지식을 평가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히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약간 난폭한 질문을 하고자 한다. 복음의 진리됨은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의 태도와 삶의 열매를 통해 입증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그리고 우리’의 한계에 갇힌 복음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하고 있는가? 또 하나의 질문. 그 시대의 많은 신자들이 ‘생략된 복음’만으로도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렸다. 그럼, 우리는? 우리는 그 시절의 그들보다 어느 점에서 나은가?

3. 바울이 복음을 선포할 당시에 가장 큰 이슈는 바로 할례의 문제였다.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냐? 아니냐?하는 문제이다. 

4.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복음을 전파함에 할례는 필수조건이 아니다. 그래서 이방인 가운데 전파하는 복음에 결코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선포는 없었다.

5. 결국 이를 확증하기 위해 바울은 헬라인 디도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3절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도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6. 바울은 할례를 요구하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4절)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그들의 말에 복종하지 아니한 이유도 분명했다.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우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었다. 

7. 이게 진정 바울이 선포한 복음이다. 

8.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복음의 진리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할례가 문제가 된다면, 결코 자유함이 없습니다. 복음의 참맛은 아무 조건 없이 주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9. 따라서 할례의 율법의 매인바 되어서는 결코 자유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10. 예수님은 행10장 9-16절에서 "보자기 사건"을 통해서 분명히 사도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11. 바울은 이러한 확증은,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나서(3절), 디도가 왜 억지로 할례받지 않는지에 대한 언급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12. 만약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면 사도들이 왜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겠는가

13. 이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으로서,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 받으라고 하지 않은 주체는 바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루살렘의 사도들일 수도 있는데(2-3절에서 의미를 찾아보면..) 중요한 것은 헬라인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14.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할례를 행치 않았으며(5절), 할례를 행하는 것곧 율법에 따르는 것은 율법의 종이 됨으로(5절), 믿음으로 행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할례는 필요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16절).
갈 2장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마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리라"


15.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의 적용을 해 봅시다. 복음의 진리가 진정 나에게 참 자유를 주십니까? 아니면 자꾸 나를 옳아매는 밧줄이 되십니까?

16. 율법의 잣대로만 상황 논리에 빠져 복음을 스스로 제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7. 좋은 것을 취하고,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8. 다른 사람을 보는 잣대는 어떻습니까?

19. 진정 복음의 진리로 모든 상황을 보며, 헤아리려 힘쓰십니까?

20. 이 시대에 필요한 복음입니다. 상황 복음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 내 삶 가운데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21.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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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십 사년만에 올라갔는가?
그렇다면 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가?
굳이 여기서 "계시를 따라 올라가"라는 말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을 확중하기 위한 것인가?

이 질문은 이어서 나오는 "이방 가운데세 전파하는 복음"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1. 모두에게로 나아가라. 할례자에게로, 이방인에로
2. 각기 다른 사역의 길을 존중하라.
3. 왜냐하면 부르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4. 할례자에게 가는 야고보와 게바, 그리고 요한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방인에게로 가는 바울도 당연히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복음을 전파함에 할례는 필수조건이 아니다. 그래서 이방인 가운데 전파하는 복음에 결코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선포는 없었다. 결국 이를 확증하기 위해 바울은 헬라인 디도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3절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도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할례를 요구하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4절)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고 그들의 말에 복종하지 아니한 이유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우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었다.
이게 진정 바울이 선포한 복음이다.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난 얘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디도가 할례받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는 의도는 무엇인가만약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면 사도들이 왜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겠는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다.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 받으라고 하지 않은 주체는 바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루살렘의 사도들일 수도 있다.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할례를 행치 않았다고 한다(5절).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이것이 그리스도 안의 자유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할례를 행하는 것, 곧 율법에 따르는 것은 율법의 종이 되는 것이요(5절),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16절).
갈 2장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마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리라"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에게 부르심과 복음은 어떤 의미인가?



1절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3절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7-8절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심.

8절 우리는 이방인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 가게 하려 함이라


참고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1년간 사역을 한 후 떠났던 1차 전도여행 기간은 약 4년이었다(AD 46-49). 이 여행 말미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으며(15:1-5), 이것은 바울이 회심한 후 세 번째 예루살렘 방문이다(첫번째는 행 9:26, 두번 째는 행 11:30). 
그렇다면, 14년 중 나머지 기간에는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참고 행 9:26-30, 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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