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강의안은 미래교회 연구회에서 "21세기설교어떻게 할 것인가?"의 주제로 발표했던 내용입니다.
“설교 이렇게 한다” 유기성목사 (선한목자교회)
군목 훈련소에서 드렸던 예배, 설교 시간에 얼마나 졸리는지, 혼이 났습니다. 그 때 “졸리게 설교하는 것은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달았습니다.
17, 18세기 종교개혁기는 설교가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때 상황과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너무나 다릅니다.
미국 뉴욕에서 목사님들이 모여 설교에 대한 연구를 한 결론이 두가지였답니다. 첫째, 설교를 잘하지 못할 바에야 짧게 하라 둘째, 은혜를 주지 못할 바에야 교인들을 화나게 하지는 말라
웨슬리나 루터, 칼빈의 설교는 그것이 지금도 과연 설교될 때, 교인들이 들어줄까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의 설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은 그 당시 사람들은 말씀에 굶주려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들 시대 이후에는 처음으로 청중들은 자신들의 말로 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개혁자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청중들이 몰려들게 된 것입니다.
선교지에 가든지 중국에 가서 겪는 놀라운 일, 설교를 자꾸 해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길게 해도 지겨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설교 하지마”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개혁시대의 상황과는 아주 정반대의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발달한 매스미디어와 서적의 범람으로 너무나 많은 설교를 접하고 있습니다.
또 17, 18세기의 청중들에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시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는 교육이 그리 왕성하지 못했으며 신문이나 그 밖의 대중 매체들이 발전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은 설교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만 들은 것이 아니라 부수적으로 설교자가 지니고 있던 여러 가지 지식들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 당시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교인들은 각 분야에서 전문가들로부터 많은 양의 최신 정보를 전해들어 그들이 지니고 있는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이나 영화, 음악회와 각종 오락 프로그램들은 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감성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설교의 위기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위기를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서 매주 1만 4천명 이상 모이는 윌로우크릭 커뮤니티교회 (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는 빌 하이블(Bill Hybels) 목사가 부머세대, 즉 1946년에서 1964 년 사이에 출생한 세대를 겨냥하여 시작되어진 교회이다. 그는 전통적인 교회의 죽은 의식과 같다고 여겨진 예배 형식, 그리고 대부분의 주요 교단 교회들의 급속히 떨어지는 출석율에 불만을 품고, 자신과 같은 세대인 베이비 부머들을 전도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그 결과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발견했다.
첫째, 사람들은 교회가 항상 돈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방문자들에게 헌금을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광고를 하게 되었다.
둘째, 사람들은 설교가 지루하고 판에 박혀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일반적인 교회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의사전달과 관련된 실험을 하기로 했다.
셋째, 사람들은 교회가 실생활과 관계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매일의 삶을 다루는 설교를 하게 되었다.
넷째, 사람들은 목회자들이 자신들을 무지하고 죄가 많다고 느끼게 만든다고 주장 했다. 이 비난을 들은 후 그는 결코 청중들을 무시하는 말을 하거나 그들에게 변화된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죄책감을 주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그러나 진정한 설교의 위기는 설교자 자신에게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설교자 자신이 복음을 잃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지고 상황이 바뀌어도 사람들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영적인 욕구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 영적인 욕구는 오직 설교를 통하여 채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만 바로 증거되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면 교인들은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1. “나는 복음과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 얼마나 분명히 알고 있는가?”
진흙으로 형상을 만들 때, 뼈대를 만들고 진흙을 붙이듯이 설교도 뼈대가 있어야 말씀들이 세워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설교하기 위하여 설교자인 저 자신에게 먼저 세워져 있어야 할 복음과 영적진리에 대한 뼈대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는 영적진리를 다룬 고전적인 책들을 많이 읽고 읽되 정독하고 요약 정리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984년 광주통합병원에서의 개인적인 회심을 체험했던 일
1994년 예배에 눈이 뜨이면서 진정한 예배를 드리게 되었던 일 등
불신자에게 전도하듯이 복음에 대하여 정리해 보았습니다.
전도 메시지: [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는가?]
새가족에게 가르칠 양육메세지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제 1 과 / 지금 당신은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제 2 과 / 왜 꼭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까요?
제 3 과 / 구원 받으면 어떤 축복을 받습니까?
제 4 과 / 예수 믿고 또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제 5 과 /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영적인 권세가 있습니다.
제 6 과 / 새로운 갈등에 도전하십시오
제 7 과 / 구원받은 성도는 기도하고 응답 받습니다.
제 8 과 / 구원받은 성도는 말씀에 잘 순종하여야 합니다.
제 9 과 /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구원받은 증거가 있습니다.
제 10 과 /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축복의 길이 있습니다.
교인들을 훈련할 제자훈련 교재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제 1 단원 십자가의 능력
제 2 단원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제 3 단원 성령 충만한 제자
제 4 단원 예배하는 사람
제 5 단원 기도로 사는 사람
제 6 단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제 7 단원 믿음으로 사는 사람
제 8 단원 항상 있어야 할 소망
제 9 단원 항상 있어야 할 사랑
제 10 단원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라
제 11 단원 천국 같은 가정
제 12 단원 전도자의 사명
특별새벽기도회 때나 제자훈련을 통하여, 십자가, 부활, 성령, 믿음, 소망, 사랑 등 복음의 핵심에 대한 주제 설교를 시리즈로 했습니다. 이 때 그 주제에 관한 관련된 영적인 서적을 많이 읽고,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 강의를 참고하여 나 자신이 그 주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말씀의 뼈대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뼈대같은 영적진리들이 것들이 매주 설교할 때마다 다양하게 반복증거되고, 또 보완되었습니다.
2. “나는 복음을 누리고 있는가?”
설교자가 복음을 증거할 뿐 아니라 설교자 자신이 복음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설교자인 제가 복음을 누리면 교인들이 사랑스럽고 감사하고 허물 조차 은혜로 보아졌습니다. 자연히 설교를 통하여 복음이 전해집니다. 은혜가 전해지고 사랑이 전해지고 치유가 전해집니다. 그러나 제가 복음을 누리지 못하면 설교가 율법적이게 되거나 교인들이 설교를 통하여 목사로부터 책망을 받는다고 느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 8:1-11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 한마디를 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게 된 여인의 편에 서시면서 스스로 위기를 떠 맡으시고 여인을 감싸시고 사랑을 표현하신 후에 맨 마지막에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죄를 짓지 말라”는 메시지만 선포하는 것이 설교가 아닙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느끼도록 해 주어야 교인들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 이연길목사, 둘째아들 이야기, 미국에서 자라니 미국 사람이 다 되어서 너무 개방적이고 활달하니까 자꾸 잔소리를 하게 되더랍니다. 아이가 점점 대화를 피하더랍니다. 전화를 걸면 “나 지금 도서관 가는 길이예요” “나 지금 수업들어갈 시간이예요” 대화가 끊어지더랍니다. 사모님과 의논하기를 절대 잔소리하지 않기로 했답니다. 그리고 전화가 되면 무조건 사랑한다는 말부터 하자고 했습니다. 하루는 전화가 연결되었는데, “아빠, 나 지금 도서관 가는 길이예요” 하더랍니다. 그 때 목사님이 “아들아, 난 널 사랑한다”했답니다. 그 날 도서관 간다는 아이와 30분 통화를 했답니다. 부모와 대화가 되면서 아이가 침착해지고 공부를 하게 되고 결국 미국 법대에 들어 갔답니다. 그것도 전체 10% 안에 드는 성적으로.
그래서 저는 율법적인 설교보다 복음적인 설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한 설교를 더 많이 하려고 애를 씁니다. 항상 그 관점으로 설교를 준비합니다. 그러러면 설교자인 저 자신이 항상 복음을 누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는데 교인들이 말을 듣지 않으니까 설교할 때 항상 매를 때리는 설교를 했습니다. 교인들이 주일 성수도 제대로 안하고 십일조 생활도 헌금생활도 안하고 봉사생활도 전혀 없으니까 이것을 본 목사님이 항상 설교할 때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여러분, 그렇게 예수 믿으면 지옥 갑니다. 주일 낮 한번 삐쭉 나오고 주일 밤도 주일날도 수요일도 새벽기도도 교회의 어떤 생활도 아무 것도 없이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은 참교회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들은 교인들이 그 목사님 앞에 거부반응을 나타내고 결국 목사님을 반대해서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후임 목사님이 오셨는데 후임 목사님도 교인들의 상태를 보니까 똑같은 설교를 하셨습니다. “주일 성수도 안하고, 주일 밤도 예배드리러 나오지 않고, 수요일 날도 나오지 않고, 새벽기도도 나오지 않고, 믿음의 삶도 살지 않고, 봉사생활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교인들에게 그렇게 미지근하면 지옥 갑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똑 같은 설교를 한 전임 목사님을 쫓아내고 후임 목사님은 쫓아내지 않고 환영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그 이유가 이상해서 한 교회 교인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왜 똑같은 설교를 하는데 전임 목사님은 쫓아내고, 후임 목사님은 그렇게 환영을 하고 있습니까?” 그 교회 교인이 하는 말이 “두 목사님 모두 다 우리들이 이렇게 믿으면 지옥에 합당하다는 설교를 하시는데, 전임 목사님은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것이 마치 고소한 것처럼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의 목사님은 그 말씀하시는데 자신이 안타깝고 자신이 지옥에 갈 것처럼 자신이 정말로 괴로워서 설교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최권능목사님이 한번은 시냇물을 건너려고 하니 강둑에 양반 하나가 담뱃대를 길게 물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보고 그냥 갈 수가 없어서 그 영감님에게 귀에다 대고, ‘예수천당’하고 지나갔습니다. 이 양반이 놀라서 “저 저 저 고얀놈 고얀놈”하지만 이미 징검다리를 건너가 버렸습니다. 아 그런데 이 양반이 집에 가셔서 자꾸 귀에서 ‘예수천당, 예수천당’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잠을 자도 자꾸 귀에서 메아리처럼 ‘예수천당, 예수천당’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귀신 붙었다고,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했습니다. 그런데 굿을 했는데도 안됩니다. 계속 귀에서 ‘예수천당, 예수천당’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서양귀신은 서양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야된다고 해서 교회 나가게 되고, 예수 믿게 되었는데, 이 양반이 누구냐 하면 고당 조만식 선생님의 부친인 조을선씨였습니다.
최권능(최봉석)목사님은 특별한 복음설교나 교리공부를 시킨 것도 아니고, 무조건 ‘예수천당 예수천당’ 하며 돌아 다녔는데도 이상하게 사람들이 예수를 잘 믿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수십 교회가 세워졌고, 수십만 명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때 세상은 어수룩하고, 사람들이 단순했기 때문에 그냥 예수천당만 해도 믿었을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분명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을 뿐 아니라, 주를 만나고, 주의 영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목사님 속에 예수의 영이 살아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찔리고, 회개를 하고, 자복을 하고, 견딜 수 없고, 눈물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천당이라는 말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최권능이라는 사람 속에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한번은 그 최권능 목사님이 신사참배 때문에 감옥에 갇혀서 매를 맞았습니다. 야구방망이 같은 배트로 두드려 팬 것입니다. 그때 이 최권능 목사님 한 대 치면 ‘예수’ 또 치면 ‘천당’ 때려도, 때려도 맞을 때마다 ‘예수천당’ ‘예수천당’ 그러니까 일본순사가 우습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해서 “야 너는 매를 맞으면 아이쿠 하거나 살려줘 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고 예수 그리고 천당하느냐”하고 물어보니까 최권능 목사님이 유명한 말을 했어요. 뭐라고 했습니까? “내 속에는 예수하고 천당으로만 가득 차서 입만 벌리면 예수 천당이 나옵니다.” 이렇게 그 분 속에는 예수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 때문에 감옥에 갔습니다. 예수 때문에 양반의 족보를 버렸습니다. 예수 때문에 울고 울었습니다. 예수 때문에 수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 속에는 예수로 가득 찼습니다. 돈으로 차고, 자식으로 차고, 자랑으로 차고, 시기로 차고, 원망으로 차지 않았습니다. 예수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의 영이 그의 인격과 모든 삶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분에게 권능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권능이 예수의 혼이 그 삶을 통해서 그 사람을 통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 강해 설교 방식으로 설교하기로 정했습니다.
매주 임의로 주제를 택하여 설교를 하다 보니 자꾸 같은 주제에 대하여 반복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중에는 제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설교한다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솔직히 내가 정말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을 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갈등이 생겼습니다. 제가 전하고 싶은 내용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내용에 맞는 성경본문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 본문을 내가 택하지 않고 주어진 본문으로 설교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시도한 것입니다. 교회력에 따라 본문을 택하는 방법도 생각했으나 저 자신이 성경을 깊이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강해설교 방식을 택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설교한 것을 보면 로마서 연속강해 설교, 요한복음 연속강해 설교, 에베소서, 야고보서 갈라디아서 연속강해 설교, 창세기 연속강해 설교, 구약인물 중심 강해설교 (모세, 여호수아, 엘리야 엘리사, 다윗)입니다. 신구약을 번갈아 설교하였습니다.
강해설교하면서 얻은 유익이 있었습니다.
1. 나의 설교가 아니라 성령께서 성경을 가지고 친히 설교하시는 담대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 장기적인 설교준비가 가능했습니다. 책별 주석, 강해, 성경공부 자료 등 충분한 설교자료를 확보할 수도 있었습니다.
3. 월요일부터 본문을 가지고 설교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목요일에는 설교문 초고를 완성하게 되었고, 토요일에는 충분한 기도로 설교준비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4. 강해 설교를 하다보니 설교 주제가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이 잡히게 되었고, 교회의 질서나 헌금 등 예민한 주제까지 부담없이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5. 저 자신에게는 성경에 대하여 많은 공부가 되었고, 무엇보다 성경적인 안목을 훈련하는 너무나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6. 성경 속에 감추어진 보화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주제 별로 설교하였다면 전혀 다루지 않았을 부분 속에 참 귀한 영적진리가 있었습니다.
4. “예수님께서 친히 설교하신다면 어떤 설교를 하실까?” 설교의 중심메세지
강해설교를 하지만 주석적인 설교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설교는 성경공부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예배 중에 임재하시는 예수님께서 설교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월요일 주어진 본문을 3번 이상 읽고, 기도도 하면서, 생각을 통하여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힘썼습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주님께서 주신 생각들을 기록해 봅니다. 기록하면서 주님께서 주신 생각들을 정리합니다. 주님께서 주셨다고 정리된 생각을 가지고 예배당 설교단 위에 서 봅니다. “예수님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말씀하실까?” 주님의 마음을 느껴 봅니다.
그 하나만 전하다가 내려와도 좋을 것 같은 그것, 제 마음에 눈물이 나고, 정말 전하지 않으면 안될 안타까움을 느끼려고 애를 썼습니다.
남이 모르는 유머 하나도 전하고 싶어지고 남이 모르는 사건 하나만 알아도 맑하고 싶어지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을 알게 되면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운지 전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제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설교준비입니다.
그 후에 주석을 참고하고 다른 목사님들의 강해설교를 읽으면서 주어진 영감이 진정 성경적인 메시지인지를 분별합니다.
5. 설교는 쉽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설교문을 작성할 때, 청중이 쉽게 들을 수 있는 표현으로 써 내려갑니다. 마치 어떤 한 사람이 앞에 앉아 있고 그에게 설명하듯이 설교문을 씁니다. 교인들의 이름을 몇몇 적어놓고, 그것을 간간히 보면서 "이 집사님이 이것을 이해 할 수 있을까?" , "이 성도가 직면한 문제에 이러한 설교가 맞을까?" 등을 질문해 봅니다. 이렇게 설교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위하여 설교가 준비되었다고 느끼는 것을 알았습니다.
쉽게 설교하려면 문장은 가능한 한 짧아야 합니다. 설교문은 들려주기 위한 것이지, 읽혀지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설교문을 작성하는 중에 소리를 내어 읽으면서 씁니다. 할 수 있는대로 설교가 끝난 후, 교인들이 내가 한 설교 내용을 머리에 기억하도록 준비합니다.
쉬운 설교를 하기 위하여 설교가 간단한 문장으로 요약이 되도록 준비했습니다.
전해야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써 보는 것은 논리 전달의 기본입니다. 듣는 사람은 기억의 한계를 가지기에 여러 가지를 말하면 아무 것도 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흔히 사용하는 세가지 대지도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기억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설교가 끝난 후 교인들의 마음에 설교가 한 문장으로 확실하게 부각된다면 설교는 성공한 것입니다.
"그래도 거듭나야 합니다"
설교 사이사이에 짧은 문장을 반복해줌으로써 듣는 교인들이 설교의 핵심 메시지를 놓치지 않게 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 꿈이 있다" 라는 설교를 읽었을 때, 반복하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가능한 한 설교를 외워서 교인들을 보면서 평상시에 이야기 하듯이 설교하기를 힘씁니다.
군목 시절 조는 병사들에게 설교해야 하는 고통 속에서 배운 교훈, 설교문을 덮고서도 그 내용을 설교할 수 있을 때까지 설교문을 외웁니다. 설교원고는 철저히 준비하되 설교 원고를 보지 않고 설교합니다.
6. 적용에 강한 설교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가장 은혜로운 설교는 적용이 쉽게 되는 설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교인들이 설교를 들으면 적용은 알아서 할 수 잇는 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느 권사님이 제 설교에 대한 평가를 해 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설교는 알아듣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라는 것인지 생각하기에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나는 내 설교로 하여금 "그래서요?" 테스트("So what?" test for relevance)를 거치게 한다. 성경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성경은 적절하다. 그러나 나는 설교를 성경만큼 적절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내가 사람들이 떠나면서, "그래서요?"가 아니라 "알았습니다"라고 말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믿음에 대하여 설교를 했으면 대개 설교 마무리를 하면서 “이제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했는데, 그것은 적용을 다룬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적용에 강한 설교를 하기 위하여 저는 항상 설교메시지가 나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확인했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가? 내가 진정 하나님을 믿음으로 행하였던 일은 무엇인가? 믿음으로 행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나의 삶을 점검해 보면 단순히 믿음으로 살라고 설교를 끝낼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제 설교준비의 큰 고비입니다. 본문에서 찾은 메시지를 설교자인 나 자신에게 적용되면 이미 반은 성공한 설교입니다. 그 적용과정을 설명하면 언제나 교인들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설교가 힘을 얻게 됩니다.
가정의 달 설교 중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아내에게 사랑을 표현하라”
나에게 적용된 부분을 드러내는 것은 나 자신의 실패 허물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나의 실패가 의외로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될 때가 많음을 보게 됩니다.
John Maxwell 목사 [성공적으로 실패하라]
저는 담대하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겪은 고통이나 느꼈던 기쁨에 대하여 말합니다. 물론 이것도 너무 많이 하면 지나친 것이 됨을 압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 전에 설교자인 나의 삶에 메시지가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궁금해 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교회 교역자들과 매일의 QT 나눔의 시간을 갖습니다. 설교훈련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7. 적용을 강조하다 보니 예화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예화를 많이 사용하셨고, 예수님의 설교는 대부분 이야기 형태였음이 적용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설교 메시지를 교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설교를 이야기처럼, 예화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부한 예화나 영감없는 예화는 오히려 역효과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해야 할 메시지와 관련되는 새로운 이야기를 일상생활 가운데서 찾습니다.
여러 종류의 일간 신문을 읽습니다. 시사 주간지를 샅샅이 살핍니다. 여러 종류의 잡지를 규칙적으로 탐독합니다. 그리고 각 이슈에 대하여 성경적인 관점에서 평을 해 봅니다.
자서전과 전기를 읽음으로써 삶을 통한 교훈들과 재미있는 일화들을 얻습니다. 현대 단편소설을 통해 시대의 흐름과 새로운 단어 사용을 경험합니다.
늘 메모지를 가지고 다니면 어떤 순간에도 그 사건과 사람이 주는 교훈을 생각해 봅니다. 언제나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영감있는 예화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예화는 일상생활 중에 경험한 예수님의 역사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설교 중에 증거될 때, 교인들에게 가장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금요 목회나눔의 시간: 매주 전 교역자들이 금요 철야기도 시간 전에 한 주간 사역 중에 경험한 예수님의 역사를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 때 교역자들이 은혜받을 뿐 아니라 많은 예화거리를 얻습니다.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혼자있을 때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타락하고 오락이나 잡기에 빠집니다. 이유는 영적으로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심에 서 있습니다. 강단 위, 담임목사실, 기획위원회 그러나 거기서 정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때 오는 영적인 공허감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돈에 집착하고 명예, 세상에 빠지는 것입니다. 무서운 내적인 타락, 불신, 율법주의, 거짓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매주 자기 사역에서 주님의 임재를 확인해야 합니다. 주님의 임재는 기도제목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누려야 할 체험입니다. 우선 믿어야 합니다. 임마누엘, 성령의 임재. 그리고 체험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듣는 훈련이 매우 필요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서 많은 실제적인 예화가 나옵니다.
8. 설교 마무리를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1. 설교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지를 확인합니다.
단순히 십자가와 부활이 언급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설교의 밑바탕에 있도록 설교문을 작성합니다. 설교의 가장 큰 목적이 교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바로 듣게 하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 누리게 하려는 것임을 반복하여 스스로 다짐합니다.
말씀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기에 (요 5:39) 설교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도록 준비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찰스 스펄젼(Charles Spurgeon, 1834-92) 목사님에 관한 한 가지 일화를 늘 기억하면서 목회하고 싶습니다. 일군(一群)의 미국 목사님들이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직접 들어 보기 위하여 영국을 방문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에 그들은 조셉 파커(Joseph Parker) 목사님이 시무 하시는 City Temple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약 2천 여명이 모인 가운데 과연 소문에 듣던 대로 파커 목사님의 설교는 감동적인 명설교였습니다. 예배당을 떠나면서 미국 목사님들은 이구동성으로 "조셉 파커 목사님은 정말 위대한 설교가야!"--What a wonderful preacher is Joseph Parker!--하면서 칭찬했습니다. 그날밤 그들은 찰스 스펄젼이 Metropolitan Tabernacle 교회에서 설교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물론 이 교회의 건물은 City Temple 교회보다 훨씬 더 컸으며 교인수도 두 배정도 많았습니다. 또한 소문에 듣던 대로 스펄젼의 목소리와 웅변술은 그들이 일찍 들었던 것 중에는 단연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인 목사님들은 곧 교회 건물이나 교인숫자, 목사님의 목소리, 제스추어, 웅변술 같은 것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펄젼 목사님을 파커 목사님과 비교하려는 생각조차도 다 잊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예배가 끝났을 때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딱 한마디의 말은 이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위대한 구주이셔!"--What a wonderful Saviour is Jesus Christ!"
2. 설교 제목을 창조적으로 정합니다.
교인들이 주목할 수 있는 제목으로 만듭니다. 설교는 제목이 소개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3. 도입부분을 어떻게 할지 정합니다.
설교 첫 5분이 설교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말합니다.
4. 끝내기를 잘 준비합니다.
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이미 했던 얘기를 반복하면서 설교를 끝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함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지 않아도, 교인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서론뿐 아니라 결론도 중요하기에 잘 준비하고 자신있는 태도와 힘있는 목소리로 청중과 눈을 마주치며 말해야 합니다. 말하는 속도를 약간 줄이고 마지막 말은 힘있게 전하되, 때로는 잠시 동안 움직임 없이 선 채로 있으면서, 설교가 청중의 가슴속에 계속 파고들게 합니다.
5. 설교시간이 길어지지는 않겠는지 점검합니다.
준비한 설교 중 일부를 잘라내는 것은 제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들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작 하나님이 주신 영감에 유익하지 못한다면, 과감히 잘라냅니다.
조지 버나드 쇼가 친구에게 했던 사과를 기억하라. "너무나 긴 편지를 써서 미안합니다. 편지를 짧게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6. 성령께서 친히 교인들에게 역사하실 시간을 준비합니다.
설교 후에 교인들이 각각 성령님의 역사로 결단할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 후에 부를 결단의 찬송을 택합니다. 그리고 통성기도를 합니다. 마무리 기도 때 결단을 표하게 합니다.
9.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설교를 준비하자!” 기도
설교를 하면서 괴로운 것은 나의 설교가 자꾸 교훈과 설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친구 목사, 부흥회 후, "유목사, 유 목사 설교 중에는 종이에 불이라고 써서 보여 주는 것 같은 설교도 있고 실제로 불을 붙여서 보여 주는 것 같은 설교도 있었어"
설교자로서 소원은 듣고 “참 좋다” 하는 그런 설교가 아니라 설교를 하고 나면 회개하고, 가치관이 바뀌고, 삶이 변화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하려면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여야 하는데, 반드시 기도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오몽근목사 “캐나다에 계신 베리 무어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셨을 때 잊을 수가 없습니다. 광주에 오셨을 때 그분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울고 가슴을 쳤습니다. 그분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냥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주 단순한 복음을 전하는데 이상하게 그분의 말을 들으면 가슴이 꽉꽉 메워옵니다. 그 후 6년 후에 서울에 또다시 오시게 되어서 제가 그때 총회신학교에서 신문을 만드는 편집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님들에게 부탁해서 그분을 우리 총신에 한번 모셔서 좌담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분에게 갈망해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6, 7년 전에 광주에서 목사님 오셨을 때에 설교를 듣고 아주 감동하고 이렇게 놀라왔는데, 그렇게 설교를 잘하시는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분이 웃으시면서 그러십니다. 자기는 하루에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주일에 책을 3, 4권씩 읽는다. 그리고 설교를 준비하는데, 다 준비하고 앉아서 쓰는 시간만 20시간을 쓴다. 그리고 그것을 쓰고 나서는, 설교를 가지고 밤새도록 설교하기 전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자기 기도하는 자기 교회 성도들에게 기도할 때 부탁하고, 자기 아버지가 다리가 불구자여서 걸어다니지 못하는데, 침상에서 기도를 많이 하시는 아버지 목사님이 계시는데, 자기가 아버지 목사님께 꼭 자기가 설교할 때마다 전화해서 “아버지 저 지금 설교하니까 기도해주세요.” 그렇게 하면 아버지께서 자기가 설교할 때 몇 분간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설교 내내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말을 듣고 그분이 정말 그렇게 능력 있게 설교하는 것은 준비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혼이, 성령의 역사가 그 가슴속에 철철 넘쳐흐르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영이 레이저빔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혼으로 파고드는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혼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혼을 그 설교에다 담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설교에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가슴을 치게 됩니다“
10. 설교 크리틱
나의 설교테이프를 들으며, 표현의 미숙함이나, 습관적인 어투를 다듬습니다.
설교 클리틱을 합니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는 전 교역자들이 설교자가 준비한 설교문을 읽으면서 설교를 듣고 회중의 입장에서 느낀대로 피드백을 하고 설교문을 분석하고 교정해 줍니다.
점검해 주는 사항들:
성경을 무미건조하게 인용하여 나열한 경우,
교리적인 딱딱한 설명이 되었을 경우,
잘 아는 것을 반복하는 느낌을 주는 경우,
논리적이지 못하거나 너무 복잡한 논리적인 구성을 보일 경우,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를 하는 경우,
구태의연한 얘기를 하는 경우,
일상의 생각으로부터 구출해 주지 못하는 경우
이 과정을 거치면서 증거해야 하는 복음의 핵심을 더욱 분명히 하고 메시지를 올바로 선포하기 위한 최선의 준비를 하게 됩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의 자기 스스로의 설교 크리틱입니다.
나는 내 설교의 무미건조 “얼마 전에, 나는 거부 당하신 그리스도에 관해 설교하고 있었다. 그렇게 친숙한 주제는 설교를 듣는 사람을 졸게 만들기 쉬운 주제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흥미를 추가할 수 있었을까? 감정이다. 나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전후(戰後)에 겪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나는 처칠의 팬이다. 그래서 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그의 엄청난 영향력을 회상 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딱딱 소리를 내는 라디오에서 그의 유명한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고 말했다. "우리는 해변에서 그들과 싸울 것입니다...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폭탄이 떨어지고, 대공화포 소리가 들리고, 밤하늘을 가로 질러 비취는 서취라이트의 섬광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불독 같은 결단은 우리가 그 끔찍스러운 시기를 통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처칠은 전쟁 중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선거가 실시되었을 때, 놀랍게도 처칠은 낙선했다. 처칠이 행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영국 사람들은 그를 수상으로 선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려 주었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그는 거부당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동안, 그들은 거부가 의미하는 바를 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감정을 끌었다. 처칠이 거부된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언짢게 만들었던 것이다. 거기서부터 그들의 감정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부당하신 사실로 옮기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때때로 이렇게 생각한다. '가만 있어봐. 이건 정말 무미 건조하군. 여기서 빨리 벗어나서 피해를 최소로 줄이자!'
[마무리] 설교자의 사명과 축복
나는 설교자로 사역하면서 설교자가 된 것에 대하여 너무나 큰 부담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부담감과 동시에 설교자가 된 것이 엄청난 축복이라는 것도 느낍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마다 능력주시기를 구하면서 동시에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함을 깨닫습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