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October 24, 2012

한 날 묵상 - 갈 1:18-24 <그 후 삼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바울에게 삼 년은 핍박하던자에서 은혜받은 자로 변한 자신을 증명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한 날 묵상 - 갈 1:18-24 <그 후 삼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바울에게 삼 년은 핍박하던자에서 은혜받은 자로 변한 자신을 증명하는 시간이었습니다>

1. 나는 무엇으로 나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가?

2.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이 그리스도인인지를 증명해 보이십시오'라고 묻는 다면 나는 어떻게 내가 그리스도인인지를 증명해 보일 수 있을까?
 1) 큰 소리를 치면서 무조건 우긴다.
 2) 그냥 못 들은척하고 무시한다.
 3)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준다.

3. 바울은 수 많은 사람들로부터 '바울이 진정 예수님을 만났는지?',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해야 한다면, 바울의 사도권은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복음 전도자가 된 후에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4. 바울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5.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다.

6.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과 친밀한 만남과 대화를 한 후에 바로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7. 바울은 삼 년이란 시간동안 자신의 사도권을 몸소 삶으로 실천하여 결과물로 만들어 내었다.

8. 삼 년 동안 바울이 행한 수 많은 사역들은 그리스도께 직접 계시를 받았음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하여 자신이 전한 복음은 다른 복음이 아니라,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증거하면서 내가 전한 복음 이외의 복음은 다른 복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9. 우리가 살아가다 이 보다 더 억울한 경우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나 외에 다른 어느 누구나 몰라주는 일을 당할 때, 그 누구에게도 진실은 아무 영향이 없을 때,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삶으로 그 일을 증명시키는 것 뿐이다.

10. 바울은 3년 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철저히 자신은 숨기고 복음만을 들어내었다.

11. 그렇게 자신의 철저한 삶으로 복음을 증명하며 변증하였기에 3년 이후에 예루살렘에 떳덧히 서서 베드로를 만날 수 있었다.

12. 바울이 전한 복음에 바울은 드러나지 않고 오직 복음만이 들어났다함은 22-23절 말씀에서 볼 수 있다.

13.  22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바울의 얼굴은 알지 못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은 들은 것이다.

14. 23절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오직 믿음을 들은 자는 누가 복음을 전했느냐보다 복음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5. 그리하여 바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는 놀라운 고백이 백성속에서 터지게 되었다.

16. 바울의 복음을 듣고 초기에 행한 이러한 사역은 진정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17. 우리 모두는 죄인이었다. 바울만큼은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편에서 바울보다 더 했을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 모두 바울처럼 과거가 있다는 것이다.

18. 과거있는 사람이 바울처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크나 큰 은혜이다.

19. 그렇다면, 은혜받은 자들의 그 이후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20. 바울처럼 자신을 처서 복종시켜야 할 것이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지난 날의 죄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했던 것들에 대해서 용서 받았다며 자유함을 온 천하에 드러낼 것이 아니다.

21. 처음 진리안에서의 자유함은 혼자 조용히 누리라. 지난 날 나의 죄로 인해 고통 받은 자들을 기억하라.

22. 그리고 그들에게 진정 '나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 새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외침은 말로가 아니라 행함으로 그들에게 보이라.

23. 그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바울은 삼 년 이라는 시간을 그 일에 집중하며 철저히 자신을 죽였다.

24. 오 죄에서 돌아온 그대들이여!
     진정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주님과 만남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 앞에 크게 들어 내는 것을 조심하라!
     지난 날의 잘못을 구하는 용서는 철저한 침묵과 삶으로 변화된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그들의 마음에 성령의 열매가 가득하리라!

25. 복음을 핍박하던 자가 회심하였다면, 핍박받은 자들이여!
     진정 용서하라! 용서가 되지 않거든 그래도 용서하라! 그리되지 않더라도 용서하라!
     용서는 쉬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철저히 보지 말고 오직 복음만을 보아라!
     복음만이 그들을 받아 들일 수 있다네!
     당신들이여 진정 복음만 받아들이게나!

26.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바울이나 핍박받은 자들이나 사도들이나 유대 그리스도인이나 모두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27. 오늘 하루도 눈이 복음으로 사로잡히는 은혜가 있기를 구하며....

28. 아멘.

====
18절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 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내용을 강조한다.

19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1-24절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
 22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절 "다만 우리르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절 "나로 말마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주석

=====1:18
  그 후 삼 년 만에 - 본 구절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1)  바울이 회심하고나서 삼 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즉 문맥상 바울이 자신의 독특한 회심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회심에  역점을  두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Boice,  Huxtable,
Lenski).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돌아온 때로부터 삼년이 경과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에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게바를 만나기 전에  상당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어떤 학자는 3년이란 기간을 문제 삼아 본문의 기록이 행9장에 나타난 바울의 행적과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누가가 행 9장에서  바울의 행적에 대하여 기록할때 '아라비아로 간것'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의 침묵이 바울의 아라비아행을 부정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는 못된다. 누가는 단지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아니한 기간에 대하여 침묵한 것뿐이며, 그 반면에  바울은 본서에서 게바를 만나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재정립(再定立)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는것이다.

   게바를 심방하려고 - '심방하려고'의 헬라어 '히스토레오'(*              )는  영어의 '히스토리'(history, '역사')의 어원이 되는 말로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의미이다. NEB는 이를 '게바와 가까워지려고'(to get know)라고 번역하였다. 본 구절은 행9:26-30에 기록된 사건으로 바울은 바나바에 의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된  이후에 베드로를 찾아갔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주장하면서 베드로와의 만남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추측이 가능하다.
(1)  2절에서 언급한 자신을 지지하는 '형제' 가운데 베드로가 포함되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2)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 방문이 사적인 방문이며 어떤 인간적인 권위의 지지를 얻으려는 방문이 아니었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주께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양자가 조심스럽게 적용되어야 하겠으나 문맥상 후자를 택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사도는 지금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을  받지아니한 자신이 사도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15일 동안 머무르며 게바를 통하여 예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며, 바울은  그때에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과 가르침을 바르게 정립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설명하였을 것이다.

=====1:19
  주의 형제 야고보 - 바울이 만난 야고보가 세베대의 아들이면서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마 10:2)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 10:3)가 아니라 예수의 친형제 야고보라는 것을 분명히한다. 예수의 선교 초기에 그의 형제들과 친족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친 자로여겼다(막 3:21;요 7:5).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그들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었으며(행 1:14)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향력있는  지도자가  되었다(2:9,  12;행12:17;21:18 등).
 어떤 학자는 바울이 야고보를 사도로 인정하느냐 또는 인정하지  않느냐에 관심을 가지지만(Cole), 당시 교회의 보편적인 사도 개념으로 이해할 때  지도자인 야고보를 사도로 인정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바울이 왜 열두 제자 중 베드로 외에 야고보만을 보았다는 것을 강조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바울은 예수에 대한 보다 넓고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하여 수제자를 택했으며 또한 예수의 친형제를 택한 것 같다. 야고보는 이방인들에게도 너그러웠으며 온유한 인격을  소유하였으므로 바울에게도 친절하게 예수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1:20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 바울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갈라디아 교회의 구성원 중에는 아직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바울이 교회의 지도자들과 충돌할때에 발생되는 문제는 그의 진정한 사도권에 관한 것이었지만, 교회의 구성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자신이 지난 날에 그들을 핍박했던 사실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쓰라린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갈라디아의 교인들에게 거짓 교사들을  멀리하고 복음에서 떠나지 말라고 엄숙하게 권고하고 있다.

=====1:21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의 연대기적인 행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를  들러 길리기아 지방으로(행 9:30) 갔다가 안디옥에서 함께 사역하기를 바라는 바나바의 요청에 의해 수리아지방으로 갔다(행11:25, 26). 길리기아는 소아시아의 동남부  연안지대로서 바울의 고향인 다소를 포함하는 지역이며 수리아는 팔레스틴 북부지역으로 수도인 안디옥을 중심으로 하는지역이다.
 바울이 이 두 지역을 언급하는 것은 (1)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먼 곳에서 사역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며,  (2) 또한  예수를 만난 이후에 복음을 위해서 열심으로 헌신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1:22
  유대에...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 '얼굴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프로소포'(*           )는 '개인적으로'라는 의미이다(Longenecker). 행  8장에  나타난 박해로 인해 유대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어떤 인물인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어떤 인격의 소유자인지 구체적으로  아는사람은 예루살렘교회에 국한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변방(邊方)에 있던 유대인의 교회는 바울에 대해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Cole).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 바울이 13절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였는데 본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라고 표현한 것은 유대교의 회당과  구분짓기 위함인 것 같다(Cole). 또한 이러한 표현은 살전 2:14의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이라는 표현과 동일한 용어로 보인다(Longenecker).
 그러므로  본문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따로 교회로 모이는 것을 시사한다거나, 유대  지역의  교회가 구체적으로 지역 교회의 형태를 가졌음을 보여준다고 하기는 어렵다.  한편 '교회'를 복수인 '엑클레시아이스'(*                   )로 사용하는 것은 단지  유대  지역에 있는 교회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의 교회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시사한다(행 9:30).

=====1:23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 '지금'(*      , 뉜)은 현재 사실을 과거  사실과 대조하여 사도 바울이 회심한 사실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낸다.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이 회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과거 바울로부터 직접핍박을 받았던 유대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되고도 남았다. 본문은 바로 그와 같이 변화된 바울을 두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말을 인용한 것이다(Ernst Bammel).

=====1:24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돌리니라 - 본절의 이면(裏面)에는, 바울의 사도직과 메시지를 부정하면서 정면으로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에 대해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한 모습과 바울의 초기 선교 사역의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암시되고 있다. 한편 본절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에  관하여  말씀하신 부분인 사  49:3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Longenecker).

참고


퍼온글 - http://user.chollian.net/~skhong92/galatians/galatians_1t.htm
갈라디아서 1장

1.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 서두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 표현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고전, 고후, 엡, 골)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롬, 빌)이다. 이런 표현에 비하면 갈라디아서의 서두는 어떤가?
    아주 강성 발언이다. 퉁명스럽고 과격하게 책망하는 느낌이다.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강조하였다. 같은 회사의 비슷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끼리 다툼이 생기면 있을 수 있는 말 ‘월급을 네가 주냐?’, ‘네가 날 임명했냐?’ 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2. 바울은 왜 하나님을, 우리가 잘 쓰는 표현처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이라고 하는가? 이 두 가지 표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아무래도 우리와 거리감이 더 있어 보인다. 달리 말하면, 천지만물의 창조보다 우리에게 더 직접적이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살리신 일이다.
3. 바울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했기에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했을까?
    “누가 바울을 사도로 임명했느냐?”: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사건은 너무나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사건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깍아내리고 자격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다. 실력이 확실한데도 굳이 자격증이나 학위가 있느냐고 시비를 거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4. 일반적인 편지 서두에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해도 묻는 것은 안부나 건강이다. 이런 말을 하건 저런 말을 하건 간에 바울이 주로 쓰는 문안 인사의 골자는 무엇인가?
    은혜와 평강: 그것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이다. 이것이 건강보다 더 중요하고 요긴한 것은 건강한 생활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5.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드리지?
    찬송: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는 말씀이 찬송이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감격에서 나온 찬송없이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6. 성도들이 은혜(하나님의 자유와 용서)와 평강(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이루어진 평화)을 누릴 수 있는 이유(근거)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기 때문이다.
7. 바울이 일차전도 여행 때에 들렀던 도시들은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이다(행 13:16-14:25). 이들을 한꺼번에 표현하는 말은?
    갈라디아 지방: 소아시아의 중앙 고원지대를 가리키는 곳이다.
8. 사도 바울의 말이 여전히 격하다(6-10). 본래 그런 성품이었을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여기서는 무슨 이유로 이렇게 격하고 험한 말을 할까?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른 복음을 좇기 때문에, 그것도 이같이 속히(6): 초대교회 시절에 이단(?)을 박멸하겠다는 일념으로 정신없이 뛰어 다니던 사울의 모습을 보라. 이 정도 말은 격한 편도 아니다.
9. 성도는 사람들에게 좋게 해야 하나, 하나님께 좋게 해야 하나?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지: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과 동일한 경우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경우라면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하지만 형제를 기쁘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당연히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이 율법의 요구를 묵살하는 것으로 오해한 사람들이 바울을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10. 어떻게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만이 복음이고 다른 사람이나 천사가 전하는 것은 다른 복음 즉 이단인가?
    우리가 전한 것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계시를 받아서 전한 것이기 때문이다(11-12, 1:11-2:14). 그리스도께서 전한 것을 변하게 하는 것은 설령 천사가 전한다 해도 다른 복음, 즉 복음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을 계시의 완성이라고 한다. 이 말은 성경에 맞지 않는 다른 계시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어떤 꿈이나 환상을 보아도 그것이 성경에 맞는 것인지 검증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맞지 않으면 다른 복음이다.
11. 바울이 유대교에 있을 때 가장 앞장서서 성도들을 핍박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조상의 유전에 대한 뜨거운 열심이었다(14):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일이었지만.
12. 과거에 자신이 행한 부끄러운 일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전한 복음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이렇게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내가 어떻게 변했겠는가? 나 스스로 변했겠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겠는가? 또, 새삼스럽게 율법을 문자대로 강조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게 자신이 대선배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13.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전혀 몰랐던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보니 이게 자신의 노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자신의 출생을 포함해서 이 모든 일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4.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시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렇게 중요한 일에 대해서 왜 아무와 의논도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15.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아라비아(지금의 아라비아가 아니다. 당시에는 다메섹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메섹 근교일 수도 있다)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에 갔다가 3년 만에 예루살렘에 갔단다.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바울이 사도된 것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이나 회의에서 된 일이 아니다. 게바와 야보고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 때 바울을 사도들에게 인도한 사람이 바나바이다.
16. 수리아는 바나바와 바울을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가 있는 곳이며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 다소가 있는 곳이다. 이 지역에 오랜 기간 머물며 사역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쳤음을 말하는 셈인데 핵심은 뭘까?
    예루살렘이나 다른 사도들과 별로 상관이 없었다는 말이다.
17. 야고보는 행함에, 갈라디아서는 믿음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무슨 차이일까?
    바울의 관심은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의 삶에 관심이 더 있었을 뿐이다.


3 comments:

  1. 어느 페북에서 본 글...
    '복음의 진리됨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태도와 삶의 열매를 통해 입증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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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참고자료

    경영 컨설턴트 이해익씨의 책 <>에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퍼옴]
    프로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아마추어는 말로 보여준다.
    프로는 불을 피우고 아마추어는 불을 쬔다.
    프로는 자기 일에 목숨을 걸고 아마추어는 자기 일에 변명을 한다.

    프로는 여행가이고 아마추어는 관광객이다.
    프로는 뚜렷한 목표가 있지만 아마추어는 목표가 없다.

    프로는 리더이고 아마추어는 관리자이다.
    프로는 평생 공부하지만 아마추어는 한때 공부한다.
    프로는 강자에게 강하고 아마추어는 약자에게 강하다.
    프로는 사람을 소중히 하고 아마추어는 돈을 소중히 한다.
    프로는 사람이 우선이고 아마추어는 일이 우선이다.
    프로는 창조적 괴짜이고 아마추어는 전략적 노예이다.

    프로는 미래 중심적이고 아마추어는 과거중심적이다.
    프로는 이끌기 위해 솔선하고 아마추어는 주어진 직책에 안주한다.
    프로는 변화를 추구하지만 아마추어는 예측과 질서를 추구한다.
    프로는 실수를 하고 아마추어는 실패를 한다.
    프로는 웃지만 아마추어는 비웃는다.
    프로는 삶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아마추어는 직책으로 권위를 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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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참고 사도행전 21장 17-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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