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October 19, 2012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읽는 다니엘서 김회권


김회권 목사의 ‘하나님 나라 신학 강해 시리즈’ 제6권, 하나님 나라라는 키워드로 다니엘서 전체를 강해한 책이다. 어렵고 난해해서 부분적인 몇 가지 에피소드로만 알고 있던 다니엘서 전체를 읽고 묵상할 수 있도록, 권위 있는 주석과 해설 및 현실적인 적용점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특히, 묵시문학에 대한 해설, 신구약 중간기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예수께서 차용하신 “인자”라는 칭호 등에 대한 깊이 있고 탁월한 해설을 담고 있어,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뿐 아니라 성경을 통독하려는 평신도들에게도 유익한 강해서다.
바벨론의 세계주재권은 헛것처럼 사라지고 
인자(人子)의 나라만이 영영히 서리라!

다니엘서는 구약성경이라는 산맥 위에 솟아 있는 계시의 영봉이다. 산 아래(1-6장)는 성도들의 화려한 영적 분투와 승리를 보여주는 영적 풍광이며, 산 위(7-12장)는 악마적 세력과 혈투를 벌이는 성도들의 죽음과 부활을 보여주는 영적 고지다.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철저한 세계 통치를 믿으며, 아무리 세속적인 사회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간섭과 통치를 벗어난 세속사회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다니엘서는 온 세계, 세계 만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왕권을 찬양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바벨론 제국이나 페르시아 제국 같은 힘과 패권적·타인지배적 삶의 방식에 굴복하지 말고,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전향하도록 격려받는다.
이 강해서는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다니엘서 전체를 강해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세계 통치의 흔적이 사라진 시대에, 홀로 세상에 던져졌다는 외로움 속에서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아가기 쉽다. 이런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조와 절개를 지키기보다는 현재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짓 주(主)들의 유혹과 위협에 투항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참여할 기회를 잃게 된다.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는 바람에 날리는 겨가 되어 버린다. 기회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이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영토에 거주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칙령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 온갖 위험과 불편을 감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명령과 위로, 약속과 호소가 들린다. 악의 위협과 유혹 앞에서도 하나님의 참 자녀들은 신비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듣고, “내 백성아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호소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수 있다. 다니엘서는 그런 점에서 독자들 스스로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영토에 거주하는 하나님의 참 백성인지, 세상에 던져진 배교자인지를 검증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이 강해서와 함께 다니엘서를 읽는 동안,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이 밝아지며 하나님 나라의 영토로 돌아가려는 회개의 열정이 용솟음치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의 참 자녀이며 다니엘서의 주인공들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다 읽고 덮을 때 순교적 신앙의 위력과 그것의 종국인 부활의 소망으로 기뻐하게 될 것이다.

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지식"을 선사하시고 모든 책과 지혜에 능통하게 하시고 특별히 다니엘에게는 이상과 몽조를 깨닫는 특별 은사를 허락하셨다(1:17; 5:11-12). 이들에게서 알 수 있듯이, 경건한 기독청년은 단지 도덕적으로 선하고 윤리적으로 정결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경영하고 운영하는 일반 학문과 기술 분야에서도 탁월성을 과시할 수 있어야 한다. 탁월한 실력 자체가 도덕성을 대신할 수는 없으나 어떤 때는 굉장한 도덕적 의미를 가질 때가 있다. 억울한 해고나 죽음의 위기로부터 자신과 직장 동료를 구해 내는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니엘의 환상 및 꿈 해석 능력은 이런 의미의 전문가적 실력이 발휘된 좋은 예다.
- 2강, 101쪽
저자 서문
서론

1. 묵시문학과 다니엘서의 메시지
2. 다니엘서의 구조
3. 다니엘서와 마카베오 항쟁사와의 관계
4. 마카베오 상하서의 메시지
5. 다니엘서와 마카베오 상하서의 상응관계와 긴장점
6. 다니엘서에 대한 역사적-비평적 연구 성과와 이에 대한 보수적 연구자들의 반론
7. 우리는 다니엘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
1강_ 뜻을 정한 다니엘과 세 친구들(1장)
2강_ 이상과 몽조를 깨닫는 예언자이자 바벨론 제국의 국가경영 컨설턴트 다니엘(2장)
3강_ 왕이여, 우리는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3장)
4강_ 왕이여,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4장)
5강_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5장)
6강_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에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다니엘(6장)
7강_ 구름 타고 오는 인자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 앞에 무너지는 세계 제국들(7장)
8강_ 인자야, 깨달아 알라!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을(8장)
9강_ 우리 하나님이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9장)
10강_ 은총을 크게 받은 이여,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10장)
11강_ 오직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고 용맹을 발하리라(11장)
12강_ 많은 사람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은 궁창의 별처럼 빛나리라(12장)

다니엘서 전체 결론


책의 일부....

"신학적으로 보면,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집단이다. 현대 경제학에서 보면 이들은 경제 발전의 어둔 음영에 사는 자들로서 기껏해야 복지정책의 수혜자일 뿐 거의 "없는 자"처럼 취급당한다. 나라의 각종 경제지표를 하향 평준화하는 존재다. 한마디로 국민 대우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존재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력 있는 국경선은 미국과 러시아, 한국과 일본, 동구와 서구 사이에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가난하지 않은 자들 사이에 그어져 있다. 그 국경선 이쪽과 저쪽은 너무나도 다른 나라다. 가난한 자들이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곳은 하나님 나라밖에 없다. 그래서 경제학에서는 천대받는 가난한 자들이 신학적으로는 우대받는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상속 자산이기 때문이다(눅 6:20; 마 5:3). 이런 이유로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 계약으로 묶여 있는 특별 백성이라 불린다. 이 말은 어떤 특정 정치 이데올로기를 신격화 하는 말이 전혀 아니다. 공산당이나 노동당 등 특정 정당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정치 조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조차 하지 못할 연약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은 모세오경, 예언서, 잠언서와 시편, 공관복음서, 바울 서신 등 성경 66권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강조된다.


.....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도덕적 선량함 때문에, 또 가난한 자들이 순박하고 상대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상의 권력구조 속에서 아무에게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는 절대 고독자인 가난한 자들의 눈물과 탄식에 슬픔과 동정을 느끼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이시며, 착취와 압제, 자원 약탈과 기회 박탈 등 불의한 사회구조에 분노하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경제학과 정반대의 입장에서 가난한 자들을 바라본다. 가난한 자, 장애인, 연약한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 호의와 복을 촉발하는 신학적 자산이다. 그들은 결코 이방인도 아니요 주변인도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애로운 시선과 거룩한 보호를 누리는 선민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가난한 자들을 우대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와 동맹을 맺은 나라다."

"기독교 신앙이 지난 세월 동안 우리 겨레를 감화시켰던 불교나 유교처럼 공평무사한 지도자와 인재들을 배출해 내고 있는가? 참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같이 고민해 볼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우리 세대는 근현대사의 초입에 한국교회가 발휘했던 지도력을 충분히 계승하는 데 부족함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국교회의 영적 쇄신과 신학적 사유의 성숙, 신앙 실천의 심화를 통해 한국 사회를 공평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공동체로 변혁하라는 사명에 직면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한 나라의 중심 종교가 불교나, 유교나, 기독교냐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종교의 신앙 실천이 하나님의 통치 원리에 더욱 충실하느냐이다. 기독교회는 스스로 주창하는 그 절대적 진리(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신봉자답게 절대적 의미의 진리 실천에 투신해야 할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 옳음을 스스로에게 선포하고 그 실천의 책임을 능히 감당해야 한다. 
 타종교에 대한 피상적 우월감을 피력하거나 우리 민족사의 한 시기에 상당한 고등종교 역할을 맡았던 타종교를 폄하하는 것은 교회 본연의 복음 전파의 일부가 아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이 확실한 진리를,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각인시키고 실천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애국가는 대한민국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존속되기를(대한민국 만세!) 희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하나님 나라를 닮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다니엘서 5장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한 나라의 왕의 통치 연대를 정하시기 위해 가난한 자들에 대한 공동체의 사랑과 돌봄, 권력 엘리트들의 탈법과 불법에 대한 사법적 견제력, 그리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회 구성원들을 위한 사회적 재활 및 복구 에너지의 양 등을 측량하셔서 나라의 존속 연대를 정하신다는 사실을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진리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이런 벨사살 같은 자는 세계 도처에 있다. 그들은 자신을 존숭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이룬 성취에 도취되어 자신의 성취가 가져다 준 권력을 극단까지 사용한다. 멸망의 날 직전까지도 그들은 알지 못한다. 현대는 가히 자아숭배의 세기다. 자기를 숭배하고 자기 매력을 극대화하고 상품화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시대다. 과도한 자부심 문화와 자기선전 문화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때때로 교만은 악이 아니라 덕처럼 칭송받는다. 
 운동 경기나 전쟁,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서 이긴자들의 자기도취적 환호성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우승한 선수들의 자기영화적 도취, 이긴 자들의 함성 등, 세계는 온통 이긴 자들의 자기자랑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이들은 벨사살과 같은 인간들이다. 벨사살처럼 자기 권력과 부귀영화에 취해서 하나님의 저울을 무시하는 자가 바로 무신론자다. 그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전능하신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교만은 인간의 자아를 무한히 부풀려, 하나님은 너무 작게 보이게 하고 자신은 너무 크게 보이게 만든다. 부풀려진 자아를 가진 인간에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교만의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만든다."
--김회권,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읽는 다니엘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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