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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October 24, 2012

한 날 묵상 - 갈 1:18-24 <그 후 삼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바울에게 삼 년은 핍박하던자에서 은혜받은 자로 변한 자신을 증명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한 날 묵상 - 갈 1:18-24 <그 후 삼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바울에게 삼 년은 핍박하던자에서 은혜받은 자로 변한 자신을 증명하는 시간이었습니다>

1. 나는 무엇으로 나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가?

2.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이 그리스도인인지를 증명해 보이십시오'라고 묻는 다면 나는 어떻게 내가 그리스도인인지를 증명해 보일 수 있을까?
 1) 큰 소리를 치면서 무조건 우긴다.
 2) 그냥 못 들은척하고 무시한다.
 3)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준다.

3. 바울은 수 많은 사람들로부터 '바울이 진정 예수님을 만났는지?',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해야 한다면, 바울의 사도권은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복음 전도자가 된 후에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4. 바울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5.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다.

6.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과 친밀한 만남과 대화를 한 후에 바로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7. 바울은 삼 년이란 시간동안 자신의 사도권을 몸소 삶으로 실천하여 결과물로 만들어 내었다.

8. 삼 년 동안 바울이 행한 수 많은 사역들은 그리스도께 직접 계시를 받았음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하여 자신이 전한 복음은 다른 복음이 아니라,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증거하면서 내가 전한 복음 이외의 복음은 다른 복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9. 우리가 살아가다 이 보다 더 억울한 경우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나 외에 다른 어느 누구나 몰라주는 일을 당할 때, 그 누구에게도 진실은 아무 영향이 없을 때,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삶으로 그 일을 증명시키는 것 뿐이다.

10. 바울은 3년 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철저히 자신은 숨기고 복음만을 들어내었다.

11. 그렇게 자신의 철저한 삶으로 복음을 증명하며 변증하였기에 3년 이후에 예루살렘에 떳덧히 서서 베드로를 만날 수 있었다.

12. 바울이 전한 복음에 바울은 드러나지 않고 오직 복음만이 들어났다함은 22-23절 말씀에서 볼 수 있다.

13.  22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바울의 얼굴은 알지 못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은 들은 것이다.

14. 23절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오직 믿음을 들은 자는 누가 복음을 전했느냐보다 복음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5. 그리하여 바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는 놀라운 고백이 백성속에서 터지게 되었다.

16. 바울의 복음을 듣고 초기에 행한 이러한 사역은 진정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17. 우리 모두는 죄인이었다. 바울만큼은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편에서 바울보다 더 했을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 모두 바울처럼 과거가 있다는 것이다.

18. 과거있는 사람이 바울처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크나 큰 은혜이다.

19. 그렇다면, 은혜받은 자들의 그 이후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20. 바울처럼 자신을 처서 복종시켜야 할 것이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지난 날의 죄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했던 것들에 대해서 용서 받았다며 자유함을 온 천하에 드러낼 것이 아니다.

21. 처음 진리안에서의 자유함은 혼자 조용히 누리라. 지난 날 나의 죄로 인해 고통 받은 자들을 기억하라.

22. 그리고 그들에게 진정 '나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 새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외침은 말로가 아니라 행함으로 그들에게 보이라.

23. 그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바울은 삼 년 이라는 시간을 그 일에 집중하며 철저히 자신을 죽였다.

24. 오 죄에서 돌아온 그대들이여!
     진정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주님과 만남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 앞에 크게 들어 내는 것을 조심하라!
     지난 날의 잘못을 구하는 용서는 철저한 침묵과 삶으로 변화된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그들의 마음에 성령의 열매가 가득하리라!

25. 복음을 핍박하던 자가 회심하였다면, 핍박받은 자들이여!
     진정 용서하라! 용서가 되지 않거든 그래도 용서하라! 그리되지 않더라도 용서하라!
     용서는 쉬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철저히 보지 말고 오직 복음만을 보아라!
     복음만이 그들을 받아 들일 수 있다네!
     당신들이여 진정 복음만 받아들이게나!

26.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바울이나 핍박받은 자들이나 사도들이나 유대 그리스도인이나 모두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27. 오늘 하루도 눈이 복음으로 사로잡히는 은혜가 있기를 구하며....

28. 아멘.

====
18절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 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내용을 강조한다.

19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1-24절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
 22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절 "다만 우리르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절 "나로 말마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주석

=====1:18
  그 후 삼 년 만에 - 본 구절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1)  바울이 회심하고나서 삼 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즉 문맥상 바울이 자신의 독특한 회심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회심에  역점을  두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Boice,  Huxtable,
Lenski).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돌아온 때로부터 삼년이 경과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에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게바를 만나기 전에  상당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어떤 학자는 3년이란 기간을 문제 삼아 본문의 기록이 행9장에 나타난 바울의 행적과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누가가 행 9장에서  바울의 행적에 대하여 기록할때 '아라비아로 간것'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의 침묵이 바울의 아라비아행을 부정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는 못된다. 누가는 단지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아니한 기간에 대하여 침묵한 것뿐이며, 그 반면에  바울은 본서에서 게바를 만나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재정립(再定立)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는것이다.

   게바를 심방하려고 - '심방하려고'의 헬라어 '히스토레오'(*              )는  영어의 '히스토리'(history, '역사')의 어원이 되는 말로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의미이다. NEB는 이를 '게바와 가까워지려고'(to get know)라고 번역하였다. 본 구절은 행9:26-30에 기록된 사건으로 바울은 바나바에 의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된  이후에 베드로를 찾아갔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주장하면서 베드로와의 만남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추측이 가능하다.
(1)  2절에서 언급한 자신을 지지하는 '형제' 가운데 베드로가 포함되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2)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 방문이 사적인 방문이며 어떤 인간적인 권위의 지지를 얻으려는 방문이 아니었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주께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양자가 조심스럽게 적용되어야 하겠으나 문맥상 후자를 택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사도는 지금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을  받지아니한 자신이 사도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15일 동안 머무르며 게바를 통하여 예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며, 바울은  그때에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과 가르침을 바르게 정립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설명하였을 것이다.

=====1:19
  주의 형제 야고보 - 바울이 만난 야고보가 세베대의 아들이면서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마 10:2)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 10:3)가 아니라 예수의 친형제 야고보라는 것을 분명히한다. 예수의 선교 초기에 그의 형제들과 친족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친 자로여겼다(막 3:21;요 7:5).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그들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었으며(행 1:14)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향력있는  지도자가  되었다(2:9,  12;행12:17;21:18 등).
 어떤 학자는 바울이 야고보를 사도로 인정하느냐 또는 인정하지  않느냐에 관심을 가지지만(Cole), 당시 교회의 보편적인 사도 개념으로 이해할 때  지도자인 야고보를 사도로 인정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바울이 왜 열두 제자 중 베드로 외에 야고보만을 보았다는 것을 강조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바울은 예수에 대한 보다 넓고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하여 수제자를 택했으며 또한 예수의 친형제를 택한 것 같다. 야고보는 이방인들에게도 너그러웠으며 온유한 인격을  소유하였으므로 바울에게도 친절하게 예수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1:20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 바울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갈라디아 교회의 구성원 중에는 아직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바울이 교회의 지도자들과 충돌할때에 발생되는 문제는 그의 진정한 사도권에 관한 것이었지만, 교회의 구성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자신이 지난 날에 그들을 핍박했던 사실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쓰라린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갈라디아의 교인들에게 거짓 교사들을  멀리하고 복음에서 떠나지 말라고 엄숙하게 권고하고 있다.

=====1:21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의 연대기적인 행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를  들러 길리기아 지방으로(행 9:30) 갔다가 안디옥에서 함께 사역하기를 바라는 바나바의 요청에 의해 수리아지방으로 갔다(행11:25, 26). 길리기아는 소아시아의 동남부  연안지대로서 바울의 고향인 다소를 포함하는 지역이며 수리아는 팔레스틴 북부지역으로 수도인 안디옥을 중심으로 하는지역이다.
 바울이 이 두 지역을 언급하는 것은 (1)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먼 곳에서 사역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며,  (2) 또한  예수를 만난 이후에 복음을 위해서 열심으로 헌신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1:22
  유대에...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 '얼굴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프로소포'(*           )는 '개인적으로'라는 의미이다(Longenecker). 행  8장에  나타난 박해로 인해 유대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어떤 인물인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어떤 인격의 소유자인지 구체적으로  아는사람은 예루살렘교회에 국한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변방(邊方)에 있던 유대인의 교회는 바울에 대해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Cole).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 바울이 13절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였는데 본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라고 표현한 것은 유대교의 회당과  구분짓기 위함인 것 같다(Cole). 또한 이러한 표현은 살전 2:14의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이라는 표현과 동일한 용어로 보인다(Longenecker).
 그러므로  본문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따로 교회로 모이는 것을 시사한다거나, 유대  지역의  교회가 구체적으로 지역 교회의 형태를 가졌음을 보여준다고 하기는 어렵다.  한편 '교회'를 복수인 '엑클레시아이스'(*                   )로 사용하는 것은 단지  유대  지역에 있는 교회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의 교회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시사한다(행 9:30).

=====1:23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 '지금'(*      , 뉜)은 현재 사실을 과거  사실과 대조하여 사도 바울이 회심한 사실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낸다.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이 회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과거 바울로부터 직접핍박을 받았던 유대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되고도 남았다. 본문은 바로 그와 같이 변화된 바울을 두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말을 인용한 것이다(Ernst Bammel).

=====1:24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돌리니라 - 본절의 이면(裏面)에는, 바울의 사도직과 메시지를 부정하면서 정면으로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에 대해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한 모습과 바울의 초기 선교 사역의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암시되고 있다. 한편 본절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에  관하여  말씀하신 부분인 사  49:3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Longenecker).

참고


퍼온글 - http://user.chollian.net/~skhong92/galatians/galatians_1t.htm
갈라디아서 1장

1.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 서두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 표현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고전, 고후, 엡, 골)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롬, 빌)이다. 이런 표현에 비하면 갈라디아서의 서두는 어떤가?
    아주 강성 발언이다. 퉁명스럽고 과격하게 책망하는 느낌이다.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강조하였다. 같은 회사의 비슷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끼리 다툼이 생기면 있을 수 있는 말 ‘월급을 네가 주냐?’, ‘네가 날 임명했냐?’ 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2. 바울은 왜 하나님을, 우리가 잘 쓰는 표현처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이라고 하는가? 이 두 가지 표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아무래도 우리와 거리감이 더 있어 보인다. 달리 말하면, 천지만물의 창조보다 우리에게 더 직접적이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살리신 일이다.
3. 바울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했기에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했을까?
    “누가 바울을 사도로 임명했느냐?”: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사건은 너무나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사건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깍아내리고 자격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다. 실력이 확실한데도 굳이 자격증이나 학위가 있느냐고 시비를 거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4. 일반적인 편지 서두에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해도 묻는 것은 안부나 건강이다. 이런 말을 하건 저런 말을 하건 간에 바울이 주로 쓰는 문안 인사의 골자는 무엇인가?
    은혜와 평강: 그것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이다. 이것이 건강보다 더 중요하고 요긴한 것은 건강한 생활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5.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드리지?
    찬송: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는 말씀이 찬송이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감격에서 나온 찬송없이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6. 성도들이 은혜(하나님의 자유와 용서)와 평강(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이루어진 평화)을 누릴 수 있는 이유(근거)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기 때문이다.
7. 바울이 일차전도 여행 때에 들렀던 도시들은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이다(행 13:16-14:25). 이들을 한꺼번에 표현하는 말은?
    갈라디아 지방: 소아시아의 중앙 고원지대를 가리키는 곳이다.
8. 사도 바울의 말이 여전히 격하다(6-10). 본래 그런 성품이었을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여기서는 무슨 이유로 이렇게 격하고 험한 말을 할까?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른 복음을 좇기 때문에, 그것도 이같이 속히(6): 초대교회 시절에 이단(?)을 박멸하겠다는 일념으로 정신없이 뛰어 다니던 사울의 모습을 보라. 이 정도 말은 격한 편도 아니다.
9. 성도는 사람들에게 좋게 해야 하나, 하나님께 좋게 해야 하나?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지: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과 동일한 경우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경우라면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하지만 형제를 기쁘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당연히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이 율법의 요구를 묵살하는 것으로 오해한 사람들이 바울을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10. 어떻게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만이 복음이고 다른 사람이나 천사가 전하는 것은 다른 복음 즉 이단인가?
    우리가 전한 것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계시를 받아서 전한 것이기 때문이다(11-12, 1:11-2:14). 그리스도께서 전한 것을 변하게 하는 것은 설령 천사가 전한다 해도 다른 복음, 즉 복음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을 계시의 완성이라고 한다. 이 말은 성경에 맞지 않는 다른 계시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어떤 꿈이나 환상을 보아도 그것이 성경에 맞는 것인지 검증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맞지 않으면 다른 복음이다.
11. 바울이 유대교에 있을 때 가장 앞장서서 성도들을 핍박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조상의 유전에 대한 뜨거운 열심이었다(14):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일이었지만.
12. 과거에 자신이 행한 부끄러운 일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전한 복음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이렇게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내가 어떻게 변했겠는가? 나 스스로 변했겠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겠는가? 또, 새삼스럽게 율법을 문자대로 강조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게 자신이 대선배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13.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전혀 몰랐던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보니 이게 자신의 노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자신의 출생을 포함해서 이 모든 일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4.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시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렇게 중요한 일에 대해서 왜 아무와 의논도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15.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아라비아(지금의 아라비아가 아니다. 당시에는 다메섹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메섹 근교일 수도 있다)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에 갔다가 3년 만에 예루살렘에 갔단다.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바울이 사도된 것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이나 회의에서 된 일이 아니다. 게바와 야보고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 때 바울을 사도들에게 인도한 사람이 바나바이다.
16. 수리아는 바나바와 바울을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가 있는 곳이며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 다소가 있는 곳이다. 이 지역에 오랜 기간 머물며 사역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쳤음을 말하는 셈인데 핵심은 뭘까?
    예루살렘이나 다른 사도들과 별로 상관이 없었다는 말이다.
17. 야고보는 행함에, 갈라디아서는 믿음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무슨 차이일까?
    바울의 관심은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의 삶에 관심이 더 있었을 뿐이다.


Saturday, October 20, 2012

한 날 묵상 - 갈 1:11-17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진정 제자 되기 원한다면, 특별한 경험이 진정 필요합니다. 그 특별함에는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한 날 묵상 - 갈 1:11-17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진정 제자 되기 원한다면, 특별한 경험이 진정 필요합니다. 그 특별함에는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1.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건 사람으로부터 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2. 이는 아주 특별한 경험입니다.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11-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3. 바울의 복음전도의 파워의 힘은 복음에 있습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다.

4. 또한 복음을 만나 사람 모두에게 이러한 힘은 주어집니다. 바울이 복음을 만났기에 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5. 복음은 자기가 가진 것이 많이 있었음으로 불구하고 복음외에 다른 것에 자신의 사도 됨을 뒤받침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내가 만난 그 특별함, 즉 복음과의 만남만으로 충분했습니다.

6. 결국 복음은 모든 제자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제자됨에는 반드시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7. 복음 자체에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누구나 포용하며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8. 진정 요즘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복음으로 포용하며 품을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9. 바울의 과거는 어느 누구보다 복음에 가장 멀리 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13-14절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10. 그런데, 그가 지금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오직 주님께 맡기며 자신의 전 삶을 내어 드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11. 이게 바로 복음의 힘입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12. 복음으로 세상의 못 품을 것이 없습니다. 복음으로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사랑하지 못할 것 없습니다. 복음은 전혀 영적이지 못한 사람을 온전히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그리고 능력이 있습니다.

13. 그런데 이 복음이 어디서 왔습니까?

14. 다른 이로서 올 수 없습니다.

15. 오직 태초부터 예정하시고, 바울이 태어나기 전부터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밖에 할 수 없습니다.
 15절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복음의 또 다른 힘은 복음을 만난 자는 분명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제시 받는 것입니다.
  16절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한 복음이 들어오는 것은 형식에 억매이지 않습니다.  복음이 교회를 통해서, 사도를 통해서, 목회자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18. 만약 그렇다면, 바울은 택정함을 입은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19. 그런데 그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만 예수님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곳만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소가 아닙니다.
 17절 "

20. 바울은 아라비라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21.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예수님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게 진정한 은혜입니다.

22. 이게 바로 뜻밖의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이런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23.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다른 은혜는 없습니다. 정해진 율법은 없습니다.

24. 오직 은혜, 오직 복음이 나에게 임할 뿐입니다.

25. 요나에게 임한 은혜처럼 은혜는 ....

26. 이런 은혜가 있는 복음의 참 맛을 아는 한 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7. 할렐루야!

Wednesday, October 17, 2012

한 날 묵상 - 갈 1:6-10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도 여러가지가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한 길, 오직 한 복음뿐입니다>


1. 나의 말이 너에게 다가가 다른 의미가 되거나 말의 의미가 퇴색이 될 때, 나는 정말 힘들고 괴롭다.

2. 만약 나의 말이 너에게 정확한 의미로 전달이 될 때, 나는 큐피트의 화살을 맞은 기분일 것이다.

3. 말에는 힘이 있다. 긍정의 힘도 있지만, 강한 상처를 줄 수 있는 힘도 있다.

4. 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좋은 길로 갈 수 있게 도울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5. 이런 두 갈래의 길의 차이는 어디서 올까? 말하는 이에게도 시작될 수 있고, 듣는 이로 인해서 시작될 수 있다.

6. 바울은 오직 복음만을 전했다. 그러나 갈라디아 지역에서 들리는 복음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아가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 자체에 문제가 있다며 바울을 몰아세우고 있다.

7. 바울은 생각한다. "나는 너희들이 이런 반응이 정말 이상하다. 내가 전한 복음에서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이 정말 이상하다."
6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8. 복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쉽게 생각한다. 바울의 편지를 보면 많은 부분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복음을 잘못 사용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는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쓰여 있다.

9. 결국 복음에 합당한 삶을 위해 조심해야 할 것들이 오늘에도 너무나 많다.

10. 다른 복음을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복음에 벗어난 사람들로 그들의 목소리가 복음보다 더 클 때가 많다. 그들이 전하는 말은 달콤하다. 왜냐하면, 본질에 벗어난 것이 진정 죄로 물든 세상안에서는 사탕처럼 달콤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게 된다. 그래서 넓은 길로 많은 사람들이 쏠리게 되어있다.
7절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11. 갈라디아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비단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도 많지만, 잘못된 복음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들도 많다. 다른 복음을 분별할 영적 지혜가 각 사람 우리에게 필요하다.

12. 바울이 전한 복음은, 율법에 사로 잡혀 있던 자들에게 진정한 은혜와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다. 진정 이게 복음이다.

13.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끝은 정해져 있다. 그들의 끝을 주목하면 된다. "열매로 알리라". 진정이 그들이 거두는 열매가 무엇인지를 주목하여 보자. 복음으로 그들의 열매를 바로바자.

14.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결국 임하는 저주를 받는 일 뿐이다.
8-9절,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5. 복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을지라도, 우리가 늘 붙잡아야 할 기준이 있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하랴"

16.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쁨을 주는 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좋게하며,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걸어가는 자가 되라. 그 길이 바울처럼 고난의 길일지라도 그리하라.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7. 복음은 우리에게 은혜와 자유를 준다. 복음은 그 어떠한 것들도 풀 수 있는 힘이 있다. 결코 다른 복음은 없다.

18.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다른 복음은 있다. 우리의 관심을 쏟도록 교란하여 변장된 복음이 우리를 유혹한다.

19. 거기에 넘어지지 말자. 현혹되지 말자. 그들의 열매를 보자. 그들의 행위를 보자.

20. 그리고 오직 바울이 전한 복음만을 따라가자. 그 길이 결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을지라도 그 길을 가자.

21. 그 길을 걷는 바울이 아름다운 것처럼, 그 길을 걷는 우리가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22. 오늘도 오직 복음에 매임바 되어 살아가는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3.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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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개인 간증문 - 비전성경, 두란노, p1470.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던 유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바울의 사도직까지 의심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계시로부터 온 것이며, 그의 사도직 역시 하나님의 직접적인 게시와 위탁을 통해서 얻은 것이라는 사실을 그의 개인 간증을 통해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의 찬양 - 오직 예수
http://www.youtube.com/watch?v=Yf7d1bUgcZ0&feature=fvwrel
http://www.youtube.com/watch?NR=1&v=a13LiXkq8zo&feature=endscreen

생각해보기...
현대에서 다른 복음은 무엇인가? "탐욕의 복음"
부와 건강의 번영복음이지 않을까.
물질적 번영. 육체적 건강.

"탐욕의 복음"은 다른 복음이다.
"탐욕의 복음 대 은혜의 복음"
참고도서 "탐욕의 복음을 버려라" 부와 건강의 복음을 해부한다. 새물결플러스, 김세윤, 고든 피, 월터 카이저, 더글라스 무 외 지음.


Monday, October 15, 2012

한 날 묵상 - 갈 1:1-5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니, 모든 영광을 그에게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한 날 묵상 - 갈 1:1-5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니, 모든 영광을 그에게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1. 갈기 갈리 찢긴 복음이라 해야 할까? .지난 시간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갈라진 복음"이라는 말을 듣곤 했다.

2. 복음은 오직 한 길, 오직 하나임에도 복음이 나누어졌다는 의미는 복음이 복음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할것이다.

3.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쓸 때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 우려의 말씀은 동일하게 우리에게 적요되어지고 있다.

4. 즉, 복음이 복음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각자 자기만의 복음이 믿음의 사람들 모습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5. 복음이 개인적으로 잘못 적용될 뿐 아니라, 그로 인한 복음의 참 맛이 희석되어 전해지는 모습을 볼 때, 목사인 나는 너무나 두렵고 떨린다.

6. 혹 '내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자신을 살피고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7. 갈라디아 지역에 사도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자신이, 또한 자신이 사도 됨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분명하게 1절에서 선포하고 있다.

8. 1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9. 사도 바울의 사도 됨이, 또한 그에게 임한 복음은 전적으로 주님께로부터 왔다. 즉 4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말씀의 주인공으로부터 직접 왔다.
 4절 "그리스도께서

10. 사도 바울 뿐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임한 복음도, 그리고 제자 됨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던지신 그리스도로부터 왔다.

11. 이 복음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리스도 보다 높은 곳에 교회도 없고, 목사도 없다. 우리 각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있을 뿐이다.

12. 제발 혼동하지 말자. 헷갈리지 말자. 복음을 보자. 복음을 통해서 보자. 그리스로를 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보자.

13. 인생의 제일 된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이다면, 우리가 올려드려야 할 영광의 대상은 오직 나의 복음이 되시어(4절) 나를 자녀 삼아주신(1절) 그리스도 뿐임을 기억하자.

14. 5절 "영광이 그 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로 오늘 우리 각자가 살아가야 할 인생의 방향이자 목표이며 살아가는 삶의 목적입니다.

15. 갈리진 복음, 찢겨진 복음을 회복하는 하는 길은 복음의 시작으로, 복음의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 뿐입니다.

16. 다른 방법이나, 다른 사람에게 복음의 나눠진 복음이 하나로 회복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한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그리고 성령님안에서의 복음 뿐입니다.

17.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왔습니다. 나의 몸 뿐만 아니라 나의 삶, 나의 가진 것,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전부 다 주님께로부터 왔습니다.

18. 그렇기에 모든 영광을 주님께 올려드려야 합니다.

19. 나의 몸 뿐만 아니라, 나의 삶, 나의 가진 것,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전부다 주님께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20. 다른 피조물은 참으로 잘하는데, 그것을 다스리고 경작하는 인간이 문제입니다. 최고의 작품 우리만 잘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창조의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21. 갈라디아서 묵상을 통해서 복음에만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깊은 묵상을 통해 복음의 참 맛을 느끼기 원합니다. 아울러 나눔을 통해 복음만이 영원토록 영광받은 일에 조금이나마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22. 샬롬의 마음을 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