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rch 8, 2012

청.매.묵 겔 31:1-9 <한 때 백향목 같았던 애굽. 화려함은 곧 물러가고 진짜만 남는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선교지에 건물이 없어 예배를 못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르칠 사람이 없어, 설교할 사람이 없어 선교지에 예배가 없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아직도 건물타령인가?>

청.매.묵 겔 31:1-9 <한 때 백향목 같았던 애굽. 화려함은 곧 물러가고 진짜만 남는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선교지에 건물이 없어 예배를 못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르칠 사람이 없어, 설교할 사람이 없어 선교지에 예배가 없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아직도 건물타령인가?>

1. 에스겔 당시에 상황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없었다.

2. 무엇이 문제인가?

3. 예배의 요소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장소도 필요하다. 모이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것은 섬기는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섬기는 사람이란?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 있는 "가르쳐 지키게 할" 사람을 가리킨다.

4. 에스겔 시대는 어떠한가? 성전이 없었는가? 아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래도였다.

5. 이스라엘 백성이 없었는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 갈길로 나아갔다.

6. 그렇다면, 누가 없었는가? 가르쳐 지키게 할 사람이 없었다.

7. 문제는 사람이다. 진정 가르칠 사람이 있는 그곳에 사람이 세워지고, 교회가 세워지고, 예배가 드리워진다.

8. 건물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9. 애굽은 외형에 치중하였다. 자신의 화려만을 가꾸는 것에 집중했다. 그들의 화려함은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10. 그러나 그러한 화려함은 곧 사그러진다. 타서 없어져버린다.

11. 등불에 기름이 필요하다.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태울 기름이 필요하다. 바로 사람이다.

12. 오늘 나는 얼마나 사람중심의 삶을 살고 있는가?
 외형이 아직도 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던져 버리길 원한다.

13. 남아공 선교를 취소되고 나에게 남는 질문은 바로 사람이다. 사람이 미래이다. 사람이 정답이다.

14. 내는 사람 중심의 삶, 사람을 키우는 삶에 최우선을 두고 싶다. 오늘도 이러한 고백이 나의 삶에 드러나기를 간절히 기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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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열한째 해 셋째 달 초하루에"

2절 "애굽의 바로 왕과 그 무리에게 이르기를 네 큰 위엄을 누구에게 비하랴"

3절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5절 "그 나무가 물이 많으므로 키가 들의 모든 나무보다 크며 굵은 가지가 번성하며 가는 가지가 길게 뻗어 나갔고"
6절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 외형보다는 사람이다.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교회 건물이 아니라 교회 구성원이다.
요즘 기부는 물질 기부가 아니라 재능 기부이다.
요즘 선교는 돈을 보내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가진 재능을 그곳에 전하며, 재능을 나누어주는 것이 선교다.
선교지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선교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보내 그들을 통해서 가진 재능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며 나누어주는 것이 선교다(재능 기부. 재능 선교).
선교는 모두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
선교지, 선교사, 선교지로 가는 자, 선교지로 보내는 자, 모두에게 유익이 아니라 교육이 되어야 한다.
선교지에 이름을 남기려고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아주 큰 문제이다.
사람은 건물을 남겨 이름을 남기려하지만, 사람들은 마음을 준 사람을 기억한다.

8절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어떤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9절 "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시기하였느니라"
=> 하나님보다 앞서 사람들. 오! 주님! 나는 아니길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섬김이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포장지에 가려 하나님의 보다 더 절대시 하거나, 하나님보다 더 앞서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하는 일에 하나님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 오늘 새롭게 본 선교
사회 선교라는 말을 듣다. - http://m.goscon.co.kr/articleView.html?idxno=28142


복음주의 시민단체에게 전하는 고언

[257호 연중기획 87년형 복음주의여, 안녕]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송인수 공동대표 인터뷰

2012.02.28  (화) 15:03:35[257호] 
이종연 (limpid@goscon.co.kr)
2008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라는 이름 긴 단체가 생긴다 했을 때,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시대의 난제, ‘교육’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하니, 사실 걱정이 더 많았다. 그러나 2012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대중운동으로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중의 호응과 언론의 관심이 이를 뒷받침한다. 단체 출범 3년 반 만에 후원 회원이 1600명이 넘었고, 온라인 회원은 2만 3000명이다. 학부모 강좌인 ‘등대지기 학교’를 3000명 이상 수강했다. 지난 3년간 각종 방송 매체는 매년 100회 가깝게 이 단체를 취재하고 인터뷰했다. 2009년, <MBC> 이재훈 기자는 사석에서 “‘9시 뉴스’에 가장 많이 등장한 외부 인터뷰 단체”로, 2011년 우석훈 교수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요즘 잘 나가는 시민단체 세 곳 중 한 곳”으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지목했다.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복음주의 시민단체의 새로운 운동 모델로 제시될 수 있을까. 기윤실교사모임, 좋은교사운동 등 복음주의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창립해 이끌고 있는 송인수 공동대표를 만났다. 복음주의권 안팎에서 활동해 온 활동가로서 복음주의 시민단체의 운동 내용과 방식을 고심해 온 송 대표의 고언을 듣는 자리였다. 인터뷰는 2월 3일 삼각지 근처 카페에서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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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수 대표는 1986년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교육대학원에서 교육철학 석사를 받았다. 1989년부터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교실 붕괴의 현실을 보다 못해 1996년부터 기독 교사들을 주축으로 시작한 것이 좋은교사운동이었다. 2003년 3월, 과감하게 학교를 퇴직하고 ‘좋은교사운동’ 대표직을 맡아서 활동하다가 임기 5년을 마치고 입시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8년 3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창립, 현재까지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다. ⓒ이종연

기윤실, 좋은교사운동 등 그간 기독교권에서 교육 운동을 해 오셨다. 그러나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일반 시민운동으로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시작할 때, 최근 <복음과상황>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87년형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반성적 입장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대학시절부터 교회가 시대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젊은이들에게 답을 주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기독교가 ‘종교적 상조회’처럼 대학과 직업 영역 및 사회 온 영역의 주변부에 머무는 것이 싫었다. 교회로부터 받은 정신적 자산이 빈곤했지만, 나와 동료들은 시대의 모순에 답하기 위해, 주변부가 아닌 중심부에서 문제의 핵심에 우리 자신을 던지고, 각자가 속한 그 영역을 바꿔 내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직 그 문제의식이 기윤실 교사모임에서부터 나를 격동시켰고 여기까지 밀고 온 힘이다. 

이 운동을 일반 시민운동으로 시작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사교육 문제는 한국 사회 모순의 핵심 중 핵심이다.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시작했는데, 이때 두 가지가 걸렸다. 첫째, 이 운동을 기독교인과 할 것인가, 일반인과 할 것인가. 이 운동은 궁극적으로는 법을 바꿔야 하는 운동이다. 사교육을 유발하는 여러 요인 중 대학 서열 구조, 학벌주의 관행이 70%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풀려면 채용 시장의 불공정 관행을 깨고, 대학체제를 개편해야 하며, 결국 법률 개편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운동의 동력을 기독교인이 아닌 온 국민들의 자산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은 비교적 분명했다. 둘째, 설사 기독교권에서 이 일을 할 수 있더라도, 이 운동은 기독 교사가 아닌 기독 학부모, 기독 오피니언 리더와 해야 한다. 이때 기독교권의 에너지와 인력 자원 등을 호출할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한데, 그 리더십을 기독교와 교회가 나에게 부여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87년형 복음주의운동을 극복하자는 것이 이 부분과 관련 있을지도 모르겠다. 교회의 자산과 동력을 활용하며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대체적으로 목회자나 신학교수 등이 제격이다. 나는 목회자도 교수도 아니다. 그렇다고 목회자와 교수 그룹을 리더십으로 모시며 그 뜻을 헤아리며 일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았다. 

왜 어렵다고 생각하셨나. 

목회자나 교수 그룹은 목양적으로 혹은 학문적으로 운동에 접근하는 게 익숙한 편이다.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차이를 품어내야 한다. 그러나 운동은 차이를 덮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야 하며, 그 차이를 예리하게 부각시키고 이슈화시켜야 한다. 목양적 감수성과는 맞지 않다. 학자들도 이론적 날카로움은 있을 수 있지만, 실천 영역에서는 날카로움이 무뎌지기 일쑤다. 운동에는 반드시 사회적 긴장이 생긴다. 이를 맷집 있게 받는 게 핵심이다. 그러나 목회자나 학자들의 경우 대체로 맷집이 부족하다. 그분들을 모시고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수많은 도전을 헤쳐 나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런 리더십을 제외하고 내가 기독교권에서 운동할 수 있을까. 직업 특성에 따른 묘한 위계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기독교권에서는 아무리 전문성을 갖추고 있더라도 교회 자원을 불러 모으는 데는 힘을 쓸 수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일반 시민운동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내용적 리더십이 있었다. 결론은 분명했다. 과제의 성격이나 내 리더십의 특성이 그러니, 새 운동은 기독교운동의 감수성을 활용하되 일반 대중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문제의식의 흐름은 잘 알겠다. 그러나 운동에는 재정과 사람이 필요한데, 어떻게 기반을 마련하셨나. 

비록 실패하더라도 내 인생을 여기에 던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실패가 이 운동의 실패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를 풀기 위해 100개의 계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치자. 나는 내가 5개의 계단만 만들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 5개의 계단을 보고 사람들이 뒷걸음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사람이 또 자신의 인생을 소진하면서 몇 개의 계단을 만들고… 집단적으로 성과를 축적해 가는 과정을 통해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에 이르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대한 애정이 커서 이룰 수 없는 과제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인생을 던지지 못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미국 노예해방운동은 400년이 걸렸다. 제시 잭슨 목사가 있었고 로자 파크스가 있었기 때문에 오바마가 있었던 것이다. 

구체적인 전략이 있었을 텐데. 

사교육 문제는 제도와 정책을 바꿔야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소수의 전통적인 운동가들이 아닌, 사교육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즉 ‘피해 당사자’를 결집해서 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대중운동을 위한 기반이 없었다. 타개책으로 ‘온라인운동’을 생각했다. 처음부터 홈페이지 대신 카페와 블로그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워낙 심각한 과제를 가지고 운동을 한다고 하니, 몇 언론사에서 관심을 갖고 취재를 해 줬다. 약간씩 사람들이 모였다. 헌신된 대중을 만들기 위해 국내 최초로 ‘학부모 종합 강좌’인 ‘등대지기 학교’를 시작했는데, 처음 모인 30명의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변화와 호응이 있었다. 자신들이 겪은 입시 고통을 자녀 세대에 재생산시키고 있다는 비애감에, ‘우리 자녀에게만이라도 입시 고통 없는 세상을 유산으로 물려 줘야 한다, 이 모순을 기성세대가 끊어야 한다’는 자각이 분출된 것이다. 학부모들이 피해자에서 세상을 바꾸는 대안 세력으로 전환되는 에너지를 보였다. 실제로 몇 가지 문제가 해결되자, 성취감과 의욕이 더해져 시너지를 일으켰다. 등대지기 학교가 대중 발굴과 성장 동력이 되어 지금까지 약 3000명 정도의 헌신된 대중을 결집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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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창립, 현재까지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는 송인수 대표.ⓒ이종연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1600명의 후원자, 23000명의 온라인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기반은 구축됐지만 후원자 1600명은 많은 수가 아니다. 이 운동을 규모에 맞게 펼치려면 5000명 내지 1만 명 정도는 돼야 한다. 거대 교원 단체를 제외하면 교육시민단체로서 사이즈는 제일 크지만 운동 과제의 규모에 비하면 우리는 골리앗 앞에 선 다윗과 같다. 그래서 작년 하반기에 위기를 겪었다. 직원 8명 중 일부가 떠났고 남은 이들도 업무의 과중과 리더십의 업무 요구에 흔들렸다. 왜 조직이 휘청거릴 정도로 상근자들이 힘들어하고 소진되나…. 내외 전문가들을 통해 진단해 보니, 운동 과제와 단체 사이즈의 심각한 불일치가 문제였다. 우리 단체를 사교육 문제를 푸는 ‘민간 정부’라고 자임하면서도, 고작 8명의 실무자가 일을 해 내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사고가 생긴 것이다. 인력의 한계에 맞추어 과제를 줄일 것인가, 과제에 맞게 인력의 늘릴 것인가 고민하다가 인력을 확충하기로 했다. 현재 16명이 일하고 있고 2~3년 내로 30명 체제로 갈 것이다. 우리보다 과제가 크다 할 수 없는 희망제작소, 아름다운재단 등도 50~80명 구조다. 우리가 내놓아야 할 정책은 정책 현실에 적용했을 때 빈틈없이 돌아가는 수준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책임감 있게 정책의 세미한 부분까지 통찰하고 이를 글로도 풀어내고 실행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사람들이 여럿 필요하고 그들을 위한 물적 지원 체제도 구축해야 한다. 그렇다고 기업이나 국가에서 재정을 지원받는 것도 없다. 결국 일반 시민의 후원에 호소할 길밖에 없다. 

후원자를 늘리는 건 어느 단체나 과제다. 

복음주의 시민단체에 후원이 왜 빈곤할까. 문제를 풀려고 하는 의지가 약하거나 과제를 풀어 본 경험, 성과가 빈곤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신도들은 운동에 열광하지도 않고, 자기 주머니를 열 필요도 없다. 할 수 없이 교회에 ‘의존’하지만, 이는 대중운동으로서는 썩 좋은 방법이 아니다. 어떨 때는 해롭기까지 하다. 교회가 아닌, 기독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그들의 후원으로 운동을 하는 것이 제일 좋다. 그들의 지갑을 열려면 진정성만 믿어 달라고 하면 안 된다. 그것은 87년형 복음주의든 2012년형 복음주의든 상관없다. 문제를 풀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고 운동하는 단체와 그렇지 않은 나른한 조직을 비교하면, 일을 푸는 방식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 차이가 변화를 이끈다. 

기독 시민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 것인가의 문제도 간단하지 않다. 아무리 개혁적인 교회일지라도 교회에 단체를 초대해서 교인들이 후원하고 참여하게끔 하는 게 쉽지 않다. 교회도 ‘기독 시민들의 월정 후원(헌금)으로 유지되는 비영리단체’고, 교회 자체 사업을 위해 교인들의 지갑을 지속적으로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매개 없이, 직업 영역이나 일반 시민 사회 영역에서 기독 시민을 만나야 한다. 다만, 그들을 어떻게 모을 것인가, 그들의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을 어떻게 기독교적 감수성으로 잘 담아낼 것인가 등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 단체의 실력이 드러난다. 치밀한 전략이 없으면 백이면 백 실패한다. 이는 복음주의 시민단체가 처한 냉정한 운명이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운동 방식이 복음주의 시민단체 운동 방식과 어떻게 다르다고 보시나. 

잘 모르겠다. 나에게는 사교육 과제를 실제로 풀어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사교육 문제의 요인이 워낙 복잡하고 사회 모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풀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과제를 분화시켜 접근성을 용이하게 하는 것’, ‘쉬운 과제에서 어려운 과제로 접근하며 성공 체험을 누적하는 것’ 등을 목표로 잡았다. 이때도 설정한 과제는 반드시 풀겠다는 자세가 중요했다. 즉, 대학 체제와 입시 문제, 노동 시장에서의 학벌 중심주의 해소가 중요한 걸 알았지만, 사교육 실상에 대한 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운동부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부분적 성과들이 모여 작년에 최초로 사교육비가 경감됐다. 외고 입시 문제가 개선됐기 때문에 사교육비가 줄어든 것인데 이는 우리가 2009년 한 해 동안 줄기차게 주장한 것이 관철된 결과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이런 정책을 정부가 추진했지만, 우리가 요구하고 정부가 수용하는 형태로 일이 진행되었다.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대안’이 아니다. 현실을 정확히 꿰뚫고 정보를 장악해야 한다. 그래야 대안도 보인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한 주제로 토론을 시작하면 짧게는 5회 길게는 30회씩 한다. 외고와 관련해서 6번, 학벌 관행 문제는 19회, 대학 문제는 23회, <아깝다 학원비!> 소책자 작업을 위해 20회의 토론회를 했다. 작은 문제라도 그것을 풀기 위해 우리는 그 영역을 전부 뒤졌다. 많은 복음주의 시민단체가 원론적 차원의 문제 제기만 하고, 현실에서 실제로 문제를 풀고 바로잡으려는 의욕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문제를 풀 수가 없다. 

단체들이 현실로 내려오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실을 샅샅이 뒤지는 과정은 정말 지긋지긋하고, 활동가들의 기력을 소진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을 생략하고는 길이 없다. 기업도 하나의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시장조사, 소비자의 필요에 맞는 제품의 개발, 제품 이름과 홍보 전략 등에 전력하는데, 운동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편지 제목 하나로 끙끙거리고, 기업의 마케팅 전략을 배우고, 소책자를 만들 때 대표들이 인쇄소에 가서 색깔 보정 작업까지 책임진다.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지치는 과정이지만, 그 결과에 시민들이 호응하고 후원자들이 박수 쳐 주면 모든 수고를 잊는다. 그때 활동가들은 성장을 경험한다. 

중요한 지적이다. 활동가들은 운동의 성과가 없거나 개인이 성장하지 못할 때 소진되기 쉽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어떤 전망을 가지고 활동가들을 키워내고 있나. 

사실 활동가의 성장에 관심을 두는 단체는 거의 없다. 관심이 있다면, 성장에 관한 지표가 있어야 하는데 지표가 없다. 희망제작소가 막 도입하려는 수준이다. 우리도 올해 이 작업을 하려고 한다. 활동가의 성장을 생각할 때 반드시 단체의 성장을 고려해야 한다. 단체의 성장 없이 활동가의 성장은 없다. 단체의 성장을 전제로 하는 활동가의 성장이란 무엇일까. 나는 원론적으로 운동가의 삶은 ‘십자가를 미분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즉, 운동가는 운동의 성공을 위해 자기를 잃어버리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운동가는 마땅히 소진되어야 한다. 문제는 현실 속에서 실제 활동가들이 느끼는 ‘소진’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으면서도 운동의 지평이 넓어지고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며, 이 운동에 내 인생을 어떻게 던질까에 대한 전망이 생긴다면 그것은 좋은 의미의 소진이요 성장이다. 그러나 업무의 주도성이나 기획력 혹은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을 때 나쁜 소진이 생긴다. 

모든 활동가는 더 많은 권한이 자신에게 위임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위임을 했는데 성과가 없으면 문제다. 목표와 역량에 차이가 나면, 목표를 낮추거나 역량을 끌어올려야 한다. 그런데 목표를 낮출 수는 없다. 활동가의 역량이 단기간에 커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 차이를 대표가 메워 왔다. 활동가가 쓴 보도 자료가 마음에 안 들면 대표가 새로 쓰는 거다. 그러면 활동가 기분이 안 좋다. 그런 것들이 누적되면 활동가는 소위 ‘소진’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올해부터는 팀 체제로 조직을 개편했다. 한 명의 팀장이 세 명의 활동가를 커버하도록 했다. 각 팀의 목표와 결과 평가는 통제하고, 과정은 팀에 위임했다. 그랬더니 각 팀 안에서 역동성도 생기고, 정기회의 때 개인 발표를 하도록 하니 긴장도 생겨서 좋았다. 그 긴장이 성장을 이끌겠구나 싶었다. 앞으로 활동가의 성장에 관한 지표 개발과 성장을 위한 지원 체계도 만들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리된 것을 매뉴얼로 만들어, 다른 단체들과 공유하는 것도 과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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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거듭 숙고하여 만든 각종 자료 총서들과 책자들. ⓒ이종연


대표와 활동가 사이의 시각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위임할 때 그 차이에 대한 불안은 없었나.


물론 불안하다. 하지만 불안한 건 활동가도 마찬가지다. 위임받은 사람이 책임까지 져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성과가 없으면 운동이 약화되고 회원이 떠나고 결국 활동가 본인도 떠날 수 있다. 리더의 권한을 위임받음으로 성과를 내야 하는 것은 숙명이다. 따라서 개인과 단체가 상호 소통과 지원을 통해 어떻게든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활동가의 태도도 중요하다. 자기 일뿐 아니라 전체를 보려고 해야 한다. 거기서 활동가의 마음가짐이 드러난다. 잠깐 일하고 다른 데 갈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은 이런 시각을 갖지 못한다. 운동을 통한 세상 변화에 의미를 두고 현재를 바라볼 때, 혹은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동을 해야 할 때를 염두에 두고 일할 때 자기 헌신이 가능하다. 그런 사람은 곧 대표 수준의 안목을 갖게 되고, 따라서 실무 책임도 맡을 수 있고 실제로 대표도 할 수 있으며, 그 단체를 떠나더라도 그만한 운동을 해 낼 수 있다. 


복음주의 시민단체들의 조직 구조는 대부분 역삼각형이다. 이사, 지도위원, 고문 등이 많고 상근 활동가는 적은 구조 말이다. 이런 조직 구조를 어떻게 생각하시나.


사실 문제다. 잘 나가는 단체치고 운동의 실질적 책임자가 상근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복음주의 시민단체의 경우 리더십이 상근하는 조직이 별로 없다. 자기 본업은 따로 있고 자신의 뜻을 헤아려 일해 줄 사람을 대신 세워서 운동하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자기 본업을 버리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왜 어려울까. 나는 이 대목이 중요하다고 본다. 대표이긴 하지만 자신의 직을 걸 만큼 그 일이 가치 있는 일이 아닐 수 있고, 상근하면서까지 그 일을 책임질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더라도 조직에 주는 부정적 영향은 분명하다.


그래서 리더십이 중요하다. 문제를 풀려는 갈망이 없진 않겠지만 경험이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곤혹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단체 컨설팅을 새로 하고 충심으로 단체 목적에 합당한 성공적인 조직 운영을 위한 지혜를 모아야 한다. 리더십이 이런 문제의식을 수용하지 않고 관성에 젖어서 늘 하던 대로 하겠다고 하면 그 조직은 밑에서 어떻게 해도 망한다. 만약, 리더십의 역량이 부족하면 그 단체 수준은 리더십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리더십이 수준을 끌어올릴 마음이 없는데 밑에서 일하는 사람의 역량만 크고, 그 리더십을 관리할 수 있는 이사 체계가 이런 구조에 대해 별다른 대안을 내놓을 수 없다면 그 리더십은 떠나야 한다. 그러면 또 적합한 리더십이 오게 돼 있다. 결국 리더십이 잘 판단해야 한다.


대학 시절부터 복음주의 운동권 청년들의 공동체라 볼 수 있는 대학촌교회에서 교회 생활을 하셨고, 23년간 그 교회에서 헌신하셨다. 그때 함께했던 동료, 선후배와의 남다른 친분이 있을 것 같은데, 그 관계가 지금 운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한국 사회의 변혁을 집단적으로 고민하는 공동체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좁게는 대학촌교회, 그들과 연결된 대학 캠퍼스 친구들, 87년 공정선거감시운동을 이끌었던 복음주의청년연합의 친구들…. 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고민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실제로 투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났고 거기서 많은 것을 경험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그 아픔이 다른 영역에 가서도 그 정신을 지키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친구들은 전문 영역에서 자기 기반을 잡았고, 졸업 후 다시 만난 후로 내가 하는 운동의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뭐니 뭐니 해도 오늘 내가 이렇게 이 운동을 할 수 있게 만든 공동체는 기독 교사 공동체다. 2003년, 누군가 교사직을 내려놓고 교육 문제에 투신해야 한다고 할 때, 나의 퇴직을 승인하고, 생계를 책임져 주기로 했다. 그런 강력한 헌신 공동체가 있었기에 좋은교사운동은 비약적으로 뻗어 갔다. 새로운 운동을 한다고 했을 때도 이 운동으로 나를 파송해 주었다. 그런 점에서 운동은 고립된 개인이 중뿔나게 하는 게 아니다.


운동을 시작하면 주변 사람들이 당장은 후원하지 않더라도 그 운동을 지켜본다. 그리고 중요한 순간에 요청하면 흔쾌히 거액을 지원해 주는 분들도 만날 수 있다. 가치에 공감하면 지원 세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럴 때 활동가는 실천적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 문제의식만 있으면 안 된다. 실천적 전문성은 한 영역에서 최소한 10년은 썩어야 나온다. 10년의 과정 없이는 어림도 없다. 현실에서 헌신하고 거기서 얻은 경험을 쌓고 반추하면서 만들어 내는 전문성은, 다른 운동을 해도 호환 가능성이 80% 이상이다. 그런데 많은 활동가들이 그런 썩어짐의 과정을 조급증 때문에 못 견딘다. 그 조급증이 복음주의 시민운동의 왜소화에도 영향을 준 것 같다.


마지막으로 운동가로서 개인적 바람이 있다면 말씀해 달라.


주께서 나를 새로운 길로 나서게 하실 경우, 기독교적 감수성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지원하는 교회 네트워크와 재단을 만들고 싶다. 즉, 우리 단체가 초기 2년간 기독 교사 공동체로부터 지원을 받아 독립한 것처럼, 교회가 사회 선교를 위해 일하는 개인과 단체가 독립할 때까지 전폭적 지원을 하는 것이다. 매달 10만 원 가량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한두 명의 활동가 급여를 2년 정도 책임지는 거다. 복지 재단 ‘컴패션’이 의미 있는 것은, 어려운 아이들을 지원하되 그들이 직업을 얻고 자립할 때까지 도와주기 때문이다. 사회 선교를 위해 교회 재정의 30% 이상을 쓰는 교회가 10개 정도 생기고 그 교회가 모여 사회선교재단을 형성할 때,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 운동은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시작하고 싶고, 그런 뜻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그 흐름을 만들기 위해 23년간 정든 교회에서 나왔고, 운동을 모색 중이다.


최근 복음주의권 목회자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모이고 있다고 한다.


나도 들었다.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그 일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려면, 그러니까 ‘기독교계의 아름다운재단’이 되려면 책임자가 풀타임으로 나서야 한다. 대행 체제로는 역사를 만들 수 없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참여연대를 버리고 아름다운재단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생을 던진 것은, 상근하지 않으면 천하의 선수도 대책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멋진 그림 그려 놓고 자족하는 방식은 안 된다. 단체를 돕는다는 것은, 내용적 성장을 돕는 일이 중심에 서면서 재정 지원이 붙어 주어야 한다. 돈만 지원하면 안 된다. 따라서 단체의 성장에 대한 자기 경험과 자산이 있고, 주변 단체의 역량을 결집시키며, 모금에 대한 관심과 이해, 타인에 대한 설득력 그리고 자기 시간을 다 써서 그에 투신할 것 등이 사회선교재단의 리더십이 가져야 할 능력이요 자세다. 왜 우리 기독교 진영에서는 박원순 같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가.


인터뷰 정정훈 편집위원 leftity@nate.com, 이종연 기자 limpid@goscon.co.kr
정리 이종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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