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1, 2012

한 날 묵상 - 갈 2:15-21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님이 허셨던 율법을 다시 세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한 날 묵상 - 갈 2:15-21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님이 허셨던 율법을 다시 세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1. 오늘도 나는 살아간다. 하루 쉼을 쉬고 호흡을 하며 자연을 보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다.

2. 어제와 오늘의 나는 큰 차이가 없는 듯 하다. 모든 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아주 큰 변화가 내 주변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어제와 오늘의 차이를 결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3. 바로 그렇다. 아주 큰 변화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큰 변화가 불쑥 찾아오면 모든 것은 다르게 보인다.

4. 좋은 던 것도 싫어지고, 싫었던 것이 좋아질 수도 있다.

5. 때론 이러한 큰 변화앞에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진정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지탱하는 무엇의 힘이 있다.

6. 바울에게 가장 큰 변화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찾아오신 사건이다.

7. 이 사건은 바울을 통채로 바뀌어 놓았다. 그의 이름부터 생각, 그리고 행동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가 변했다. 심지어 자연도 변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8. 이제 그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눈에 불을 켜고 죽이려 달려들 던 사람이 눈에 불을 켜고 살리고자 자신의 생명도 조금도 아끼지 않고 살아가게 되었다.

9. 이게 바로 아주 큰 변화이다. 아주 큰 사건이다. 바울을 완전히 바꿔버린 변화이며 사건이었다.

10. 바울은 이제 살아간다. 어떻게 살아가느냐? 내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은혜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11.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12. 이리 큰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야 살 수 있다고 한다면, 다시 돌아갈까? 아니 변화되어 이리도 좋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죽으면 죽었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13. 참으로 이 변화를 느낀 사람이기 때문이다. 

14. 바울 주변에 아직 자신이 이전에 살았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5. 그들은 다시 율법의 잣대를 들이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그들에게도 철저하게 은혜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초기 그의 사역과 싸움은  율법에 매여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6. 바울은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을 통해서 은혜의 복음을 우리게 주심을 통해 율법의 복음은 무너져 버렸다. 

17.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다. 

18. 율법의 행위로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 땅에 오셔서 철저히 율법을 무너뜨리셨다. 

19. 우리는 이제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20. 율법에 대하여는 죽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하기 때문입니다(19절).

21.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도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며 사는 행동을 해서는 결코 아니됩니다(21절). 

22. 오직 예수 이 땅에 살아가는 길은 율법이 아닌 은혜뿐입니다.

23. 이제 내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아네서 살아가기 원한다면 율법이 아닌 은혜앞에 서 있기 원합니다.

24. "나 다시 복음앞에 서네"는 1. 오직 은혜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2. 결코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 삶입니다. 3.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24. 오늘 하루도 이러한 은혜로 꽃피우는 한 날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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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에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8절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다"
   => 할례 행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할례를 행해야만 한다면 구원의 근거가 되는 복음의 진리가 무너지게 된다. 이는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 된다.
   => 율법의 복음이 아닌 은혜의 복음앞에 서라.

   참고) 갈라디아서 5장 2-4절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오늘의 찬양 - 나 다시 복음앞에
http://www.youtube.com/watch?v=ptD2BPszdNI&feature=rel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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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Theological Seminary
El Monte, CA 91731 길성남 교수 바울신학 수요일 오전강의 -2

N.T. Wright가 강조한 것 - “예수님의 언약적 진실성” –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언약적 신실성이다! 
갈 2:15-16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여기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헬라어로는 영어표현하자면, the faith of Jesus로 되어 있음. 이것이 예수님 자신의 믿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음. 전통적으로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보았는데, 주격적으로 해석. 예수 그분 자신의 믿음으로 
로마 가톨릭 견해 – 여전히 ‘의화’(義化)를 주장.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어진 것 결코 아니다. 다만 그 힘이 약해졌을 뿐. 하나님 은혜의 도움을 받아 협력할 수 있고 협력해야 한다. 트렌트공의회, “만일 누가 죄인이 의화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는 협력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에서 오로지 믿음만으로 의화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만일 누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로움만 힘입어서 인간이 의화한다고 주장하거나 성령에 의해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지고 자리잡은 은총과 사랑을 제외한 채 오직 죄사함에 의해서만 의화한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우리를 의화하는 은총은 오직 하나님의 호의일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당해야 한다.” 16세기 트렌트회의, 지금도 여전히. 사도 바울을 파문시키는 꼴이다. 
하나님의 은혜(선행적 은총)와 사람의 노력(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함. 그리하여 신인협력적 구원론이다. 그 근거는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다. 유대교와 비슷하나, 단지 예수님을 인정하느냐 않느냐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도바울의구원론 – 양자됨 (*법적으로 하나님자녀로 삼아주신다) 제임스 패커 – 사도바울 구원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양자삼는 일이 흔히 있었다. 양자됨이라는 단어가 5번 나옴. 그 중 바울서신에 3차례가 나옴. 
이신칭의는 가장 근거가 되는데,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자녀됨이 더 높은 개념이고 풍성한 특권이다. 법정은 차갑다. 친밀한 교제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구원이라는 큰 복을 설명하기 위한 것인데, 양자됨이 더 친밀하고 풍성하다.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겠다, 너희는 네 자녀다. 
갈 4:4-7, 
롬 8:15 우리가 다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 그래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엡 1:4-6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신약 메시지의 핵심이다. 하나님사랑을 통한 양자됨! 
휘오떼시아 – adoption. 갈 4:5,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고.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려고. 원래 자식이 아니고 원수 그 자체들이었으나 원수갚지 않으시고 자녀로 삼았다. 엡 1:5, 기쁘신 뜻,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 휘오떼시안. 
로마 시대 아들들을 입양. 법적으로 상속자 삼음. 상속자의 권리를 가진 자로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셨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복된 기업을 다 누릴 수 있도록 우리를 받아주심. 그의 당당한 자녀들, 아들들로 받으심. 원래 원수였던 자들임. 
칭의는 하나님을 심판자로 보는 법정개념인데 비해, 양자됨은 법정개념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는 가족개념. 하나님은 양자됨의 복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를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이끌어들이신다. 우리는 더 이상 외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며 상속자이다. 
입양하면 바로 엄마아빠라고 부르느냐? 성장하여 살펴보고 엄마아빠. 갈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참조) 개역개정: 아빠 아버지, 개역한글판: 아바 아버지. 
아빠는 원래 아람어에서 아버지. 회당에서 아람어로 통역. 탈굼. 아람어 단어를 헬라어로 음역해서 표현한 것이 ‘아바’(abba)임. 그대로 읽으면 ‘압바, 아빠’가 되는 것임. 소리나는대로 표기한 것임. 본래 발음에 가깝다. 
이 발음을 가지고 논쟁이 벌어짐. 요아킴 예레미아스, 예수님의 비유. 괴팅겐 대학교 신약학자. 열 살 때부터 17세까지 예루살렘에 가서 살았었음. 막 14: 겟세마네 기도에서. 예수님만의 독특한 어법, 아멘아멘, 인자, 압바. 여기에 예수님의 독특한 자기인식이 나온다. 최소한 당대의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압바라고 쓴 적이 없다. 아이들이 친밀하게 아버지를 부를 때 쓴다. 친밀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독생자로서의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이 있다. 친밀한 교제를 그를 따르는 하나님 자녀들도 똑같이 부를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과 그 자녀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게 하셨다. 
이에 대해 이런 저런 사람들이 비판. 특히 제임스 바. 연구해 보니까, 어린아이들만 아니라 장성한 어른들도 압바라는 말을 썼더라. 노인들을 부를 때도 압바라 불렀더라. 제자들도 자기 랍비들을 압바라고 불렀다. 어린애 용어가 아니다. 그러나 예레미아스가 양보하지 않음. 하나님을 부른 어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람어의 아버지라는 말이 따로 있다. 압바가 절대적으로 어린애용어는 아니지만, 친밀함을 나타내는 용어다. 그런데 그 친밀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른 유대인은 예수님 외에 없었다. 
바리새인들의 거룩은 ritual purity였다. 일상생활속에서 제사장 수준으로 거룩하게 살려고 했다. 그런데 그 거룩을 추구할 때, 하나님나라를 임하게 한다. 세리와 창기들과 구별. 손을 씻기. 바리새파 전통.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을 부정하지 않음.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 탕자의 비유에서 가장 잘 나타남. 세리와 창기들, 죄인들과 가까이 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비판. 이에 탕자의 비유를 베푸심. 큰아들. 어떻게 아버지가 불공평하냐? 바리새인의 하나님관과 예수님의 하나님관이 부닥침.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전체의 아버지로 자신을 드러내심. 그러나 개개인의 아버지로 드러내지는 않으심.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가 다임. “나의 아버지여”라고 부르면서 자기 개인의 아버지로 호칭하지 않음. 진정 개개인이 나의 아버지여 라고 부르짖는 일은 언제 가능해졌는가? 예수님이 오셨을 때 가능해진 것임. 그래서 제임스 패커, 헤르만 바빙크 – 하나님을 큐리오스(주님, 주재자)로 부르는 것으로는 신약시대에는 부족한 것이다. “아도나이” - 큐리오스. 구약의 하나님.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와부활 이후 모든 것 위에 가장 큰 이름을 주심. 주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우리 주 예수님이 되심.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셨음. 하나님은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심. 하나님이 정말 나의 아버지시구나! 라고 깨달으면서, 부르짖게 하심. 그냥 주님! 이라고만 부르면 하나님이 서운해 하실지도 몰라요. 내가 너희를 내 자녀로 삼기 위해서 내 친아들도 내어주셨는데, 여전히 그냥 주여 라고 부르느냐? 아버지라 부르라, 부르짖으라!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 
그의 아들의 영을 보내주셔서 진정 하나님이 내 아버지구나 라고 알고 부를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설복시키심. 헬라어 성경을 보면,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나 다 ‘크라조’를 사용함. 갈라디아서 krazon abba ho pateer. 여기서 크라존은 중성단수임. 일치하는 것은 to pneuma tou hyos – 즉 성령이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임. 그런데, 롬 8:15에서는 다름. en hoo krazomen abba ho pateer. 여기서는 우리가 부르짖는다. 양자의 영을 힘입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습니다. 너희들이 부르짖지만, 성령님이 너희가 그렇게 부르짖게 만들었다. 즉 아들의 영을 우리 안에 보내주셔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임을 인식하게 하셨고,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셨다. 육신의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을 하는 분들이 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짖고 있다면,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도 믿기 어려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우리를 돌보시고 가까이 계신 아버지로 인식하고 아버지라 부르느냐? 이것이 마음으로 설복되는 것. 성령님의 역할.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갈라디아서를 읽어봐도 이신칭의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확실하게 말하지 않음. 오히려 양자됨, 상속자라는 말을 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증거 -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확실한 증거가 됨. 갈 3:1 이하에서, 야, 이 어리석은 놈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홀리더냐? 홀렸느냐? 너희 성령 받았지? 그게 너희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듣고 믿음으로 받은 것이다! 그런데 왜 성령을 등장시키는가? 성령은 체험으로 아는 것 –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 것! 하나님 자녀가 된 것임. 이미 죄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임. 그래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임. 확인해야 할 것 – 내가 진정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인정하고 있느냐? 이 점을 확인해야 함. 어느 정도 믿어야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은 것이냐? 내 믿음의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내가 믿는 그 대상으로 인해서 내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 (칼빈) 믿음이 연약하다 할지라도 주님을 구원자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면 성찬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믿음이 있다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고, 연합되었다면, 그 연합으로 인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임. 그렇다면, 하나님 자녀가 된 것임.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의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 그 마음으로 무릎꿇고 기도할 때.. 이렇게 인도하시는구나! 가장 친밀할 때,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임. 그리고 공적인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느끼는 것임. 이것이 바로 자녀됨, 양자됨의 문제다!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후예들이 이신칭의만큼 양자됨을 강조했어야 했다. 제임스 패커의 글. Knowing God 중에서, 양자됨 부분을 꼭 읽어보실 것. 최고의 고전 중하나. 성도의 견인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가 뭐냐? 양자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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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시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에 속해 있다. 그들은 두려움없이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으며, 그분이 아버지로서 관심을 갖고 사랑으로 돌보실 것임을 언제나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이 신약메시지의 핵심이다.”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320)

“나
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가? 나는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아는가? 나 자신의 진정한 운명을 아는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다. 하늘나라가 나의 집이다. 나는 매일 거기에 가까이 간다. 나의 구주는 나의 형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나의 형제다. 이 말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밤에 잠자리에 들 때, 버스를 기다릴 때, 마음이 한가할 때 언제나 되풀이해서 스스로에게 말하라. 그리고 이것이 전적으로 완전히 사실임을 아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라. 이것이 행복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비결이다... 독자들과 나 자신이 이러한 비결을 완전히 지니기를 바란다”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3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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