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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January 7, 2012

한 날 묵상 - 창 35:8-29 <죽음이 새로운 시작이다. 죽음에는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한 날 묵상 - 창 35:8-29 <죽음이 새로운 시작이다. 죽음에는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물레방아 - 자신을 물속으로 죽이지 않으면 물을 길어 올릴 수 없다. 
구 세대는 물러나고... 신 세대가 전면에 등장하다.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은 시작이다.
죽음이 영적인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된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라는 고백을 합니다.
기독교의 역설은 나를 죽일 때 내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완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삭이 죽음으로 에세와 야곱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회복케 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화목케하는 직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때, 자신은 없어지고, 작은 죽어지고, 새로운 싹이 올라옵니다. 
죽음은 이처럼 신비롭습니다.
오늘 나는 날마다 죽기를 원합니다. 나의 세상적 자아가 죽고, 욕심이 죽고, 분노가 죽고, 나의 옛것은 다 죽고,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되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한 사람이 죽음을 맞이할 때, 한 사람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음
새로운 이름(새로운 인생 시작) 9-15절

  야곱 -> 이스라엘 -> 민족의 이름의 된 이스라엘.
  => 11절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15절 "하나님이 자기아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라헬의 죽음 
베냐민 

야곱의 아들들 - 전면에 등장한 12지판 이야기.
이삭의 죽음
 -> 이삭의 죽음으로 하나 된 에서와 야곱.
      29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Thursday, January 5, 2012

한 날 묵상 - 창 35:1-7 <세번째 만남. 아직도 부족한 야곱. 이 때 야곱은 어떠한 결단을 하는가?>

한 날 묵상 - 창 35:1-7 <세번째 만남. 아직도 부족한 야곱. 이 때 야곱은 어떠한 결단을 하는가?>

 하나님과 야곱의 만남은 계속됩니다.
이번이 벌써 세번째 만남입니다.
세번째 만남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세번째 만남에서 야곱은 떠나 보내는 훈련입니다. 처음과 두번째 만남이 하나님이 찾아와 만나는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하나님 홀로 내 마음에 계셔야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들을 버리는 훈련이 세 번째 훈련입니다.
 두 마음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만이 나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의 전부가 될 때, 비로서 세상을 품고 세상을 유혹당하지 않고 세상을 섬길 수 있다.

 먼저, 이방신을 버리는 훈련이다. 1-7절. 라반의 집에서 섬길 수 있었던 이방신들을 버리는 훈련이다. 이 때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모든 것을 버리는 일도 함께 하게 된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리라. 

 둘째,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훈련이다.
    1)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 8절
    2) 사랑하는 라헬. 19절.
    3) 아버지 이삭. 29절.
 오직 하나님만 영원히 함께 하신다.
 다시금 홀라 남았지만,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다. 하나님이 동행하는 삶이다.

1절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 세번째 만남.
     첫번째 만남. 창 28:10-15.  <피할 곳을 찾아 나서는 야곱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http://saltandlight21.blogspot.com/2011/12/2810-15.html
     두번째 만남. 창 31:3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귀향에서 길에서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야곱, 그러나 믿음의 거목의 세워가는 길은 쉬운 길이 결코 아님을 이제 보게 될 것이다> http://saltandlight21.blogspot.com/2011/12/311-16.html
     그리고 세번째 만남.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2절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 모든 것을 버리는 야곱. 지금까지 



3절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 정결케 하라. 


6-7절 벧엘... 제단... 엘벧엘...
 6절 "곧 벧엘에 이르고"
 7절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엘벧엘=> 벧엘의 하나님.




*다시금 처음 창세기 묵상의 때로 돌아간다.

한 번에 되지 않는 제자의 길

모두들 단 번에 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를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네요!

모두들 한 번에 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닮음을
그러나 그게 쉽지 않네요!

모두들 한 방에 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놀라운 기적을
그러나 그럴 수 없다네요!

한 번에 되지 않는 제자의 길을
날마다 경험합니다.
아브람을 통해서
모세를 통해서
제자들을 통해서

한 번에 되지 않기에 
오늘 인내하며 나아가렵니다.

* 창세기 말씀 묵상을 정리하면서.. 적어봅니다. 
더 큰 믿음을 사모합니까?그렇다면 말씀의 훈련을 받으십시오. 아브람을 묵상하면 묵상할 수록 더욱 크게 들리는 음성이 있습니다. 믿음은 훈련과 관계속에서 성장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2제자를 위한 예수님의 삼 년의 공생애의 마음을 쪼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습니다.

Friday, December 9, 2011

한 날 묵상 - 창 28:16-22 - <좋은 만남, 위대한 만남이 아닌,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결단하는 야곱>

한 날 묵상 - 창 28:16-22 - <좋은 만남, 위대한 만남이 아닌,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결단하는 야곱>

 하나님과의 만남은 결단으로 이어집니다. 신앙이란 참으로 묘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마음에서 오는 성령의 음성때문에 결단을 자연스럽게 만남은 결단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만났음에도 자연스럽게 결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만남이 온전한 만남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야곱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16절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 절로 신묘막측하심을 고백하게 합니다. 야곱이 처한 최악의 상황에서 찾아오신 하나님, 그리고 만남이어지며, 고백으로 나아가는 야곱의 모습이 너무나 신묘막측하시다.
 -> 하나님은 어디에든 계십니다. 어느 때에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느 순간이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 "과연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매일, 매순간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 순간, 오늘 어느 순간에 무엇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그러한 만남과 입술의 고백이 있는 결단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 우리의 가장 큰 결단은 매 순간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며, 그리고 인격적으로 그분을 삶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분을 인격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심을 고백하지만, 여전히 성령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은 인격적으로 성령님을 인정하는 삶이 아닙니다.


17절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절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절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2. 만남은 서원으로 이어집니다. 서원의 의미는 지금 이 순간을 넘어 한평생을 주님께 나의 삶을 드리겠다는 고백입니다.
 좋은 만남은 순간의 결심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좋은 만남은 좋은 결심으로서 거기까지입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위대한 만남은 마음에 잔양을 담게 됩니다. 그들의 걸어온 길을 듣노라면 절로 탄성이 나아옵니다. 본받고 싶은 마음이 절로 나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잔양이 위대한 결단으로  이어져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한 하나 아쉬움이 있다면 어려움을 만날 때입니다. 어려움을 만날 때 그것을 이길 힘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인간의 한계를 뒤어넘은 그 무엇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적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과 만남이 있는 사람은 기적이 상식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서원, 결단은 나 혼자만의 결단이 아닙니다. 성령님과 함께 한 결단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나의 한계와 상황을 뛰어넘는 놀라운 능력을 갖게 됩니다.
 오늘 하루 좋은 만남의 갖기 원합니다.
 오늘 위대한 만남을 할 수 있기 원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과 만남을 가장 먼저, 가장 소중히 생각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나의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일들이 나를 통해 일어날 수 있게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과 만남을 위해 자신을 순수하고 아무꾸밈없이 오픈할 수 있는 한 날 되기를 주님의 이름을 기원합니다.

20절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절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히시오면'

21절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절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중심" - 조신영
p78-79.
"소망이 중심에 닿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구체적인 소망의 내용을 담은, 열 개의 어절로 된 한 문장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은 말의 지배를 받는다. 말에는 각인력, 견인력, 창조력이 있어서 소망을 중심에 새기고 집중시키는 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순간 동기 부여를 받으면 강렬한 소망을 갖지만, 누군가가 곁에서 지속적으로 동기 부여를 해 주지 않으면 금세 싫증을 내거나 쉽게 포기해 버리고 만다. 자기 자신 안에 얼마나 강력한 점화 장치가 있는지 몰라서 지레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일쑤다." - 지속성. 하나님 만남. 말씀을 통한 임재가운데....

Wednesday, December 7, 2011

한 날 묵상 - 창 28:10 - 15 - <피할 곳을 찾아 나서는 야곱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한 날 묵상 - 창 28:10-15 - <피할 곳을 찾아 나서는 야곱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야곱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피할 곳을 찾아 허겁지겁 집을 나서게 됩니다.

11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 야곱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해가 진지라" 어둠과 두려움이 몰려오고, 외로움이 느끼는 순간입니다. 어느 곳에서도 소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돌아갈 집이 없습니다. 찾아 나선 곳도 미래를 알 수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유일한 친구는 "그 곳의 한 돌"이었습니다. 그걸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누워 잠을 잤습니다.


12-15절 야곱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리고 야곱에서 약속을 상기시키시고 확신을 주시는 하나님.
12절 "하나님의 사자들이 .. 오르락 내리락..."
13-14절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존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약속을 상기시켜 말씀하시는 것은 야곱을 일으켜 세울 힘이다. 야곱이 형을 속여 팥죽으로 장자권을 사고, 거짓으로 자신을 꾸며 이삭의 축복을 빼앗은 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잡고 살아갔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 들은 자신의 이야기, 살아오면서 들은 리브가의 말인 축복의 통로로서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약속의 말씀이 오늘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하였다.
 그런데, 이 밤에 홀로 있고 외롭고 두려움이 가득한 이 순간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약속의 말씀을 상기시켜주신 것이다.

 야곱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 두 가지를 깨닫게 된다.
 1.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2. 그가 걸어온 길은 잘못되지 않았지만 그것 걸어가려고 노력했던 그 길을 걸어가는 방법들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잘못을 깨닫고 자신의 방법들을 바뀌는 사건이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을 통해 얻은 신앙의 유익이다.

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 야곱에게 있는 두 가지 근심 걱정이 다 해결되었다.
 나아갈 길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시겠다 말씀하신다.
 또 하나는 가족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에 대한 염려이다. 기약없이 떠나는 길이지만 마음은 고향, 가족과 함께 있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올 기약을 할 수 없었다.
 이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하나님은 야곱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계셨다.


 - 전부
내 감은 눈안에 이미 들어와 계신 예수님 나보다 앞서 나를 찾아 주시네

내 뻗은 두손 위로 자비하심을 내어 주시니 언제나 먼저 나를 위로하시네

내 노래 가운데 함께 즐거워 하시는 늘 나의 기쁨이 되시네

수 많은 사람중에 나를 택해 잡으시고 눈물 거두워 빛살가루 채우시니

그분은 내 자랑 나의 기쁨 나의 노래 나의 전부 되시네







한 날 묵상 - 창 28:10-15 - 
<생명의 위협을 느켜 피할 곳을 찾아 나선 야곱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야곱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피할 곳을 찾아 허겁지겁 집을 나서게 됩니다. 태어날 때 있었던 일들과 리브가가 주었던 꿈들을 품고 오직 한 길 만을 걸어 왔는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외롭고 쓸쓸한 밤 돌을 베게 삼고 잠을 잡니다.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득안고 잠을 잡니다.


그 때 하나남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13-14절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존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약속을 상기시켜 말씀하시는 것은 야곱을 일으켜 세울 힘입니다. 야곱이 형을 속여 팥죽으로 장자권을 사고, 거짓으로 자신을 꾸며 이삭의 축복을 빼앗은 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잡고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면서 들은 자신과 관련 된 이야기, 살아오면서 들은 리브가의 말들은 축복의 통로로서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약속의 말씀이 오늘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밤에 홀로 있고 외롭고 두려움이 가득한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약속의 말씀을 상기시켜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1.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2. 그가 걸어온 길은 잘못되지 않았지만 그가 걸어가려고 노력했던 그 길을 걸어가는 방법들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잘못을 깨닫고 자신의 방법들을 바뀌는 사건이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을 통해 얻은 신앙의 유익입니다.


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 야곱에게 있는 두 가지 근심 걱정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나아갈 길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시겠다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는 가족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에 대한 염려가 잇었습니다. 기약없이 떠나는 길이지만 마음은 고향, 가족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올 기약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하나님은 야곱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상황과 형편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Monday, October 24, 2011

가라지는 추수때까지 내버려 두세요!

가을 추수 때 콩찌기를 도왔다. 


아직 익지 않은 것과 가라지를 구별하여 추수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만 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콩찌기 할 때 머리를 스친 생각은 "마지막때에 추수하자. 


지금이 추수할 때이다.가라지는 추수때까지 내버려 두세요!".




http://saltandlight21.blogspot.com/2011/12/blog-post_09.html


부흥과 개혁의 때일수록 모조품을 경계하라

소위 성령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몇몇 사람들이 심각한 실수들을 범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였다고 해서, 그 사역 전체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몇몇 가짜들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참되지 않다는 논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모조품들이 생기는 것은 개혁의 시기에 항상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들여다보면, 커다란 종교의 부흥 치고 많은 모조품들이 등장하지 않은 경우는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시대를 보면 이러한 종류, 즉 지독한 이단과 비열한 행동에 빠진 사람들의 사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당시에 있었던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성도들로부터 뛰쳐 나갈 때까지, 참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형제들로, 성도들의 한 부분으로 잠시 동안 받아들여졌으며, 그들과 다르다고 의심받지 않았습니다(요일 2:19).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교사들과 직분자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주신 몇몇 사람들 가운데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6장의 시작 부분에 나옵니다. 유다가 이러한 예입니다.

유다는 열두 사도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치욕스러운 행동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발각되거나 의심받는 일이 없이 참된 경험을 한 제자들과 한 무리가 되어 오랫동안 계속 연합하였으며, 친밀하게 대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부터도 모든 외적인 일들에 있어서 참된 제자인 것처럼 대우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그에게 사도의 지위를 수여해 주셨으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하셨고,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들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알고 계셨지만, 그 당시에는 전지(全知)하신 심판자와 마음의 감찰자로서의 신분으로 옷 입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시적 교회의 수종자로서의 직임을 수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아버지의 수종자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자신의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그를 배척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가시적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과 다스리는 자들에게 하나의 모범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즉 그들이 교회를 운영할 때에는 마음의 감찰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말고, 보이는 것과 공개된 것을 통하여 하도록 말입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중에도 배교자가 생길 수 있다

한동안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되었던 몇몇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특출하게 충만하다고 여겨졌던 몇몇 사람들 중에 그러한 배교자들이 있었던 예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던 니골라가 그 한 예입니다.

그는 성령의 비상한 부으심이 있던 그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로 많은 그리스도인의 무리 중에서 집사의 직분에 선출되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 3절부터 5절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배반하여 야비한 행동을 하는 일단의 비열한 이단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부터 니골라당이라는 파당의 이름이 나왔습니다(계 2:6, 15).

종교개혁 시대에도 배반자가 있었습니다. 교황 정치 때부터 종교개혁의 때까지, 잠시 동안 종교개혁자들과 연합한 것처럼 보였다가 배반하여 가장 야비하고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르고 혐오스러운 행동을 한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부흥 시대에도 배반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위대한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종교가 부흥할 때에, 한동안 거기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떨어져 나가서, 기괴하고 엉뚱한 잘못들과 심한 열광주의에 빠져, 높은 영성과 완전함을 이루었다고 자랑하며, 다른 이들을 육적이라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사도 시대에 영지주의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여러 재세례파 분파들이 그러했습니다. 이것은 안토니 버제스(Anthony Burgess)가 <영적인 강화>(Spiritual Refining) 제1부, 설교 23쪽과 132쪽에서 진술한 것과 같습니다.

“최초의 훌륭한 종교 개혁가들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도구들은 여기서 쓰라린 갈등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형식주의자들과 전통적인 교황주의자들에게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 편으로는 종교개혁자들보다 더욱 계몽되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렸다. 그들은 성경을 고수하며 성경을 근거로 계시들을 검증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문자주의자’(Literists and Vowelists)로 불렀다. 성경의 단어들과 모음들에는 정통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을 가지지 못한 자들로 보았다.

어떤 도시에서든 복음의 참된 교리들이 교황제도를 막 본격적으로 바꾸어 놓으려고 하면, 곧장 그러한 견해들이 일어났다. 마치 좋은 곡식 가운데 가라지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커다란 분열이 일어났고, 종교개혁은 세상 사람들에게 혐오스럽고 증오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벌레들과 뱀들에게 열기와 온기를 주어서 땅 속에서 기어 나오게 한 것과 같았다. 그들은 루터를 매도하였고, 루터가 단지 육적인 복음만 보급시켰다고 말하였다.”
그러한 거친 열광주의자들의 몇몇 지도자들은 잠시 동안 최초의 종교개혁가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고, 특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청교도 시대에도 배반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찰스 1세 때와 공위(空位) 기간에 올리버 크롬웰 때 생명 있는 종교가 매우 우세하였는데, 그 때 그러한 일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뉴잉글랜드 초기 가장 순수했던 시기에, 경건이 넘쳤을 때, 그와 같은 일들이 발발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그러한 가라지를 뿌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참된 역사가 영광스럽게 수행되고 있지 않다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