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날 묵상 - 막 3:7-19 <많은 무리들이 나아오지만, 따로 제자들을 세우시다>
1.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가운데 하신 세 개의 사역의 틀은 이렇습니다.
2. Teaching 가르치시고, Healing 치유하시고, Educating Evangelizing 전파하시는 THE사역입니다.
3. 인간 관계에서 이 세가지 사역은 꼭 필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가정에서 자녀들과 부모의 관계속에서 이러한 사역의 틀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4.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세상의 지혜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상처받은 마음을 감싸줄 뿐 아니라, 후에 장성하여 어른이 될 때 자녀들도 자신과 같은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5. 그래서 교회 교회학교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아비된 마음으로 학생들을 양육할 것을 강조합니다.
6. 제자가 또 다른 제자를 세워가는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속에서 THE사역이 이루어질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아비된 마음으로 양육할 자녀들이 필요했습니다. 친히 함께 숙식하시면서 그들에게 THE사역의 진수를 보여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8. 그래서 예수님은 적당하 때에, 자신의 타이밍에 맞추어 특별히 구별된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시게 됩니다.
9.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10.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원칙이 있으셨습니다.
11. 먼저는 많은 무리들을 중에서 택하지 않았습니다.
7절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12. 한편으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을 잘 따르는 사람들 중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면 그들이 더욱 잘 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13. 그리고 예수님의 신분을 정확히 알 고 있는 사람들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11절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4. 귀신들려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귀신의 힘을 빌려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15. 그런데, 예수님의 선택은 그들도 아니었습니다.
16. 예수님께서 이렇게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신 후 그들을 부르셨다면, 그들은 더욱 은혜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잘 따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17. 그런데 예수님은 따른 무리들, 귀신들어 있는 사람들을 고쳐서 제자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18. 왜 그리하셨을까요? 제 생각에는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만약 그 목적이 사라진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다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 꼭 이런 원리가 아닐까요?
20. 체스터톤, <정통(오소독시)>에서 보면,
- 어떤 한 가지를 사랑할 때 그것이 주는 기쁨은 그것을 사랑하게 하는 이유이며 그것이 주는 슬픔은 그것을 더욱 사랑해야 할 이유이다(125페이지)
- 자신이 사랑하는 장소를 폐허로 만들기에 가장 알맞은 사람은 그곳을 사랑하는 어떤 이유가 정확한 사람이다. 반면에 그곳을 개선시킬 사람은 어떤 이유도 없이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이다(131페이지)
참고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trans01&logNo=140180658524
21. 그래서 예수님은 12절에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드러남은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속에 피어나는 사랑에 있는 것이며, 그 사랑을 함께 짊어지는 자들을 통해서 활짝 피우기 때문입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원칙은 분명했습니다.
13절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원칙은 자신의 일에 열심과 최선과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4. 다윗이 목동으로서 자신의 일을 충성되어 했을 때 그의 성실함과 진실함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25. 왜냐하면 자신의 작은 일에 충성할 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의 주신 사명을 큰 사명으로 알고 그 부르심에 잘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6. 지금 주어진 자신의 일에 충성할 줄 아는 사람이, 곧 큰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27.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교 교양" (De doctrina christiana)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것은 가장 작은 것일 뿐이지만, 가장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은 큰 것이다.”
(Quod ergo minimum est, minimum est,sed in minimo fidelem esse magnum est.)
28. 예수님을 원하시는 제자의 상은 예수님을 잘 따라다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명을 성실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9. 예수님의 사명을 잘 순종하는 사람들이 오늘 이 순간에도 제자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30. 예수님은 성육신의 이유이자 이 땅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 사명을 감당하신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야 함을 아셨습니다.
31. 그리고 이제 이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사람들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셨습니다.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남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32. 그래서 제자들이 필요했고, 제자들이 될만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정한 사명을 주십니다. 물론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동안 함께 하면서 훈련을 잘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14절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절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33. 예수님이 감당하셨던 THE사역을 동일하게 제자들도 감당해야 할 THE사역이었습니다.
34. 그래서 많은 무리들속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기적을 베풀어줌을 통해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극히 작은 일이지라도 자신의 일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자들중에서 따로 불러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35. 물론 많은 무리들중에서, 기적을 통해 은혜를 체험한 자들 중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들에게 충성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또한 제자로 부름받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것이 일상의 성실함과 예수님의 사명을 충성되이 지키는 사모함보다 앞설 수 없음을 제자들의 부르심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6. 이제 열 둘의 이름이 나옵니다. 물론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을 포함해서.
16-19절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37. 나는, 당신은 지금 제자로 부름받기에 합당한 자들인가?
아니면, 많은 무리들이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만 알고 신적인 능력이 내게 임하기를 기대하는 자들인가?
38. 오늘 하루 주어진 일과 감당해야 할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합시다. 그것이 가장 큰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39.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결단하는 삶이 결코 세상의 가치로 큰 것이 아니며,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큰 것이기에 어떤 고난과 아픔이 있는 길일지라도 감사함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그리고 그러한 한 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0.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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