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ly 31, 2012

한 날 묵상 33:21-33 <죄와 행실, 입과 열매, 듣는 귀와 은혜>



1. 좋은 것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크리스쳔 중에서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다.

2. 요즘 한참 뜨거운 논쟁이 되었던 것이 "긍정의 힘"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에 대한 관점이다.
 한 참 긍정의 힘이 한국교계를 강타했을 때 한 번 쯤은 접해 본 사람들이 부지수일 것이다.
물론 그 중에 나도 포함이 된다. 물론 긍정적으로 보라본 사람도 있을 것이며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본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3. 그런데 왜 최근에 "긍정의 힘"에 대한 논쟁이 뜨거워지고 있는가?

4. 바로 기독교의 믿음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데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5.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창조주로 믿고, 주관자로 믿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죄 많은
나의 인생의 구세주로 믿는 것이 믿음이이다.

6. 아버지라고 해서 결코 아들이 원하는 전부를 주는 것이 아님을 안다. 왜? 위험하기 때문이다.

7. 따라서 인간의 죄성으로는 어떤 것이 가장 나의 삶에 안전한 것인지를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에
생각하는데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데로 곧이 다 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생각이다.

8. 믿음의 경주는 결코 좋은 것만을, 긍정적인 것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다.
 인간적으로, 이성적으로 가기 싫은 곳도 믿음으로 가야 하는 것이 믿음의 경주이다.

9.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성들은 참으로 염치가 없는 사람들이다.

10. 24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11. 어디서 이 마음이 왔는지 모르겠다. 참으로 안타깝다.

12.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백성들을 심히 질타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13. 주된 말씀의 내용은 무엇인가?

14. 죄에 찌들었으면서 행실은 거룩하다 한다. 왜? 자기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이란다.

15. 입에는 늘 하나님을 말씀으 듣겠노라고 하면서 모인다.
 그 입으로는 늘 백성을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만을 쫒아간다. 
 그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부르지만, 하나님의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다. 


16. 듣는 귀는 있으데, 은혜 받을 행함은 전혀 없다. 입은 믿음의 소리를 발하지만, 입의 열매는 자신의 이익만을 향해 나아간다. 


17. 요즘 나는? 요즘 크리스천은? 요즘 교회는? 어떠한가?


18. 백성들의 죄악앞에 하나님은 심판을 명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지?


19.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입으로는 좋은 것들을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살아가지만, 행함은 진정 좋은 것을 받을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곰곰히 자신을 살펴보자. 


20. 인간은 약한다. 그렇기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나의 약함을 내어드리고 약함이 강함이 되도록 훈련을 받아야 한다. 


21. 이 훈련이 생략되면 결코 듣는 귀와 입술의 소망과 행실의 열매는 함께 할 수 없다. 


22.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기 전에, 즉 오늘 말씀 33절에 나오는 "그 말이 응하리니" 심판이 응할 그 때가 되기 전에,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 


23.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스티그마',(흔적)을 보고 계신다.


24. 흔적이 아름다운 크리스천들이 됩시다. 떠나고 남은 자리가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됩시다. 


25. 아멘




ㅡㅡㅡㅡㅡㅡ
21절  "우리가 사로잡힌지 열둘째 해 열달 다섯째 날에"

22절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내 일을 여시더니"

24절 "이스라엘의 이 황폐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말하여"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느니라"
25절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26절 "너희가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하며 ...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27절 "주 여호와꼐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 황무지에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뜨리고"
29절 "내가 그들이 행한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그 땅을 홤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면 그 때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선지자의 말씀과 백성의 반응
30절 "네 민족이 ...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꼐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 하고"
31절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32절 "그들이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33절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

Thursday, July 26, 2012

마 22:37-39. 삶에서 우선 두어야 할 세 가지


하나님

다른 사람


마 22장 37-39절을 보니, 이런 말씀이 있군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삶에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할 세 가지 사랑
먼저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나 사랑요, 셋째는 이웃 사랑이다.

가만 보면 첫째와 셋째는 잘 하려고 무진장 노력하면서 한편으로는 쉬운데(보여주려고 하는 모습도 있기는 하지만)..

둘째 사랑은 쉽지 않다. 내 사랑이 잘못되면 자기만 사랑하는 것으로 비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쉬운 방법은, 나를 사랑하는만큼 이웃을 사랑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
나 사랑
이웃 사랑

오늘도 이 사랑을 위해 달려가는 한 날이 되기를 원하며


---
나를 사랑하며 이웃을 나 만큼 사랑하는 자세.
1.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는데, 다른 지체의 결점만 볼 수 있겠습니까...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p24. '나 같은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옆에 앉은 저들의 다른 결점을 보고 그들의 종교가 위선이자 인습에 불과하다고 단정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 '인종 화합"


사도행전 17장 26절 - 성경은 인류 전체가 '한 혈통'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종간의 화해를 이루도록 에너지를 공급하는 원천이다. 특히 창조에 관한 설명은 일종 편견의 중추신경을 밑동에서부터 싹뜩 잘라 버린다.  창조주가 아담을 지으시는 장면은 인종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유대인 학자들이 편집한 성경의 주요 주석서로 첫손에 꼽히는 미슈나는 이렇게 가르친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로 만드신 까닭은 무엇인가? 그래야 아무도 '내 아버지가 그대의 아버지보다 낫다'는 소릴 할 수 없을 것 아니겠는가!"

인종차별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바벨탑 이야기는 교만과 권력욕에 사로집힌 인류의 모습이 등장한다. 하나님은 그 오만함을 벌하시기 위해 "언어를 혼잡하게"하셨다. 인간의 교만과 권력욕으로 인해 인종과 국가가 여럿으로 분리되었고, 서로 갈등하고 미워하게 되었다는 창세기의 설명에는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어느 학자는 이 대목을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수많은 인간 집단으로 쪼개지게 된 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라는 말로 정리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곧바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구원을 약속하시면서 :땅에 사는 모든 민족(mispahah)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에 쓰인'민족'이라는 말은 인간들의 집단이나 민족, 또는 인종을 의미한다. 주님은 인류라는 가족의 연대가 깨어진 걸 안타까워하시고, 인간의 죄와 교만이 빚어 낸 인종차별과 국수주의의 장벽을 허무시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선포하신 것이다.

복음 안에서 인종의 벽이 허물어진다.
 신약성경은 이 주제에 대한 논의를 완결 짓는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을 맞아 한지리에 모여 있던 교회 위에 성령님이 강림하시사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바벨탑에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던 이들이 서로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는데, 오순절에서는 제각기 다른 말을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선포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빠짐없이 이해했다. 예수님의 은혜가 인종차별의 상처를 치유하고도 남는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오순절에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가 모든 언어로 전달됐다는 사실은, 어떤 문화도 '정통'을 주장할 수 없으며, 성령님 안에서 민족과 언어, 문화적인 장벽을 넘어 일치를 이룰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에베소서 2장 11-22절에 따르면, 그 결과 인종과 민족이 '동일한 시민'으로 참여하는 공동체가 탄생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그런 점에서 크리스천은 '새로운 종족'이라고 말한다.

 교회를 통해 인종의 벽을 뛰어넘는 파트너십과 우정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복음 임재와 권능의 증표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은 크리스천들을 익숙한 고향 문화를 등지고 한 번도 밝아 본 적이 없고, 그럴 일도 없는 땅으로 떠났던 아브라함처럼 만든다.

 성경의 마지막 장은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계 5:9; 7:9; 11:9; 14:6)에서 나온 백성이 하나가 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창세기 12장의 약속부터 요한계시록의 성취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인종차별을 맹렬하게 공격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팀 켈러, 두란노, pp.178-183.

Thursday, July 12, 2012

한 날 묵상 - 겔33장 10-20절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마지날까지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한 날 묵상 - 겔33장 10-20절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마지날까지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1. 요즘 사람들을 보면 쉽게 포기하고,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2. 축구 선수 이영표 선수와 만남을 여러 번 했습니다. 특별히 2012년 청소년부 수련회와 밴쿠버 유스 코스타에 오셔서 귀한 나눔을 해주셨습니다.

3. 그 때 이영표 선수가 했던 이야기가 기억에 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견디었더니, 나보다 재능이 많은 선수들이 중간에 하나 둘 포기하고 나만 남았다. 그래서 내가 국가대표 선수가 되었다"라는 말입니다.

4. 물론, 겸손에서 우러 나오는 말이었지만,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시대 젊은 사람들에게 끈기가 없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5. 노력보다 값지 열매는 없는 것 같습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는 자에게만 길이 보입니다.

6. 오늘 본문의 말씀은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의인의 범죄와 악인의 회개"의 제목에서 보듯이 의인이 범죄하면 심판을 받게 되며, 악인이 회개하면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7. 이 본문의 말씀속에서 저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오래참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8. 하나님은 어떠한 죄인이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기다리십니다. 은혜를 못누릴 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떠한 추악한 죄를 범했더라도 회개하면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11절 "나는 악인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12절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려뜨리지 못할 것인즉"

9. 반대로 아무리 의인이라 할지라도 범죄하는 날에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12절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받지 못할 것이요" 
 12절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10. 궁극적으로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죄인이든, 의인이든, 자신의 죄를 깨닫는 순간 회개해야 합니다. 
 20절 "그러나 너희가 이르기를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가 각기 행한대로 심판하리라 하시니라"


11. 의인에게 있어서 옛날의 공의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의인이 죄를 범하면 죄인이 됩니다. 죄인은 죄인일 뿐 옛날의 의인이었을 순간은 현재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현재의 순간에 죄인으로서 회개해야 합니다.


12. 벧후 3장 9절을 보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3. 하나님의 관심은 죄인들에게 있습니다. 결코 우리는 의인일 수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4.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인이기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인이라면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죄인이기에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의 품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15. 오늘 한 날도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Monday, July 9, 2012

한 날 묵상 - 겔 33:3-9 <진리를 품고 있는 이 시대의 한 사람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중요합니다>


한 날 묵상 - 겔 33:3-9 <이 시대의 한 사람의 파수꾼이 되라. 그러나 이 시대에 한 사람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 속에 진리의 메시지를 담으라>

1. 세상의 진정한 소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것들중에서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그 속에 참 소망, 희망의 불씨를 태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그들이 진정 이 시대의 희망입니다. 이 시대를 지키며 밝히 비추는 진정한 파수꾼입니다.

3. 그러나 파수꾼이 필요하다고 해서 누구나 파수꾼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혹 그들은 거짓 선지자처럼 거짓 파수꾼일 수 있습니다.

4. 그래서 무엇보다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매서운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매서운 눈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5. 파수꾼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보면 그 파수꾼의 정체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6. 거짓 파수꾼의 모습속에 보이는 희망의 메시지가 희망이 아닙니다. 그들이 전하는 소망의 메시지가 소망이 아닙니다.


7. 진정 파수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파수꾼이 소망이 아닙니다. 파수꾼이 희망이 아닙니다. 


8. 무엇이 소망이며, 무엇이 희망입니까?

9. 진리의 메시지가 희망입니다. 진리의 메시지가 소망입니다.

10. 그래서 진지의 메시지가 고통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메시지가 나의 전부를 전부를 포기하라는 명령일 수 있습니다.


11. 거짓 파수꾼은 고통의 길을 가지 않습니다. 자신의 것을 전부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러한 메시지를 선포할 수도 없습니다. 


12. 자신의 담고 있는 않는 것을 결코 선포할 수 없습니다.


13. 그래서 이 시대에 희망의 메시지가 난무하나 봅니다. 소망의 메시지가 흔한 것 같습니다. 


14. 그러나 고통 없는, 자기 포기 없는 희망과 소망은 진정한 희망과 소망이 아닙니다.

15. 이 시대의 진정한 메시가 담긴 파수꾼은 진정한 힘은 우리의 소망 되시는 예수님이 이십니다.

16. 그래서 고통이, 자기 포기가 곧 희망입니다. 소망입니다.

17.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고통과 자기 포기를 통해서 희망과 소망을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18. 이제 속지 마십시오.

19. 희망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소망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20. 이제 진짜는 진리의 메시지입니다.

21. 이 시대를 깨울 우리의 사명, 내가 감당해야 할 파수군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22. 바로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23. 제대로 불어야 합니다. 진리가 담긴 메시지를 제대로 불어야 합니다.

24. 고통과 자기 포기가 있는 희망과 소망의 나팔을 제대로 불어야 합니다.

25. 오늘 이 시대를 깨울 나팔 누가 불겠습니까?

26. 바로 접니다. 바로 나입니다. 바로 우리입니다.

27. 오늘 하루를 작아 보이는 이 일을 위해 달려갑시다.

28. 아멘!


Thursday, July 5, 2012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마지막 회) 정욕(Lust)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마지막 회)
정욕(Lust)
현대 문화와 에피큐리아니즘 
정욕은 일곱 대죄 가운데 비교적 잘 알려진 죄이다. 전통적으로 ‘부도덕’이라 하면 맨 처음 정욕을 떠올릴 만큼, 정욕은 모든 죄악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오늘날 정욕은 한층 더 대중적인 것이 되었다. 현대인들은 아침에 눈뜨면서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성과 관련된 정보를 접하며 산다. 성은 이제 은밀하고 사적인 영역에서 소통하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대중적 오락이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은 경제, 예술, 문화 등 사회 전 영역에 침투해 있다. 성적 어필이 빠진 상업광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만약 성이 제거된다면 현대 사회는 ‘경제적 대 공황 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만큼 성과 정욕은 현 사회를 구성하고 지탱해주는 일종의 미덕이 되어버렸다.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는 식의 스토익 사상은 오늘날 인기가 없다. 그 대신 “자신을 즐겨라”(Enjoy Yourself)는 에피큐리아니즘은 점점 더 세력을 얻고 있다. 인간의 몸은 도덕과 규범에서 상당 부분 자유롭게 되면서 바야흐로 ‘감각의 해방’을 누리고 있고, 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몸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가고 있다. 그리스 사람들이 여신 ‘비너스’를 숭배한 것과 같이 이 시대는 특히 아름다운 외모와 성적인 몸매를 숭배하고 있다. 발트라우트 포슈(Waltraud Posch)는 『몸 숭배와 광기』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몸 집착 현상은 거의 종교적 광기와 같다”고 말한다. 날씬함과 성적 어필은 곧 능력과 경쟁력, 즉 소위 ‘스펙’으로 등치되는 최근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성적 매력이 없다는 것은 무능하고 태만한 것으로 간주되기까지 한다. 뚱뚱해서 성적 매력이 떨어지는 것은 열등감과 수치감을 넘어 죄책감까지 안겨주는 현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처지를 피하고자 성형과 다이어트, 즉 소위 ‘몸만들기’에 내몰리게 된다. 시대가 만든 미의 기준에서 낙오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혹은 그 기준에 근접했다는 안도감,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이런 것들을 통해 얻는 심리적 보상감 등은 현대인의 중요한 지향점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얻는 대가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다. 이것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벌이곤 하는 몸과의 사투는 처절한 지경이다. 이런 분위기는 정욕 앞에 더 관용적인 사회와 문화로의 악순환을 부추길 뿐이다.
이런 문화 가운데 사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자신을 돌아보고, 정욕에서 자신을 보호하며, 건강한 성의 의미와 목적을 바르게 알고 누리면서 살아가야 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육체, 성, 성욕, 그리고 정욕 
성적 욕구를 갖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남성이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끌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욕은 결혼과 가정을 이루고 자신을 보존하고자 하는 본성임과 동시에, 사회를 존속 유지시키는 장치이기도 하다. 기독교회도 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요 ‘경건한 후손과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고 가르쳐왔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성에 대한 무수한 경고,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들의 부정적인 가르침, 사제들이 독신 생활 등은, 기독교가 대체로 성이나 육체적 쾌락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고 이해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실상 기독교는 몸의 중요성을 어느 종교보다도 강조해 왔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incarnation),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천국에서 거룩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 등과 같은 교리와 믿음들은 이 사실을 더 확고하게 한다. 육체적 욕망과 그로 말미암는 쾌락은 모두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허락하신 선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음식에 대한 욕구가 생존을 위해 필요하지만 지나치면 문제가 되듯이, 성욕과 성적 쾌락도 마찬가지이다. 
정욕(lust)은 지나치게 되기 쉽고 통제되기 힘든 성욕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성적 쾌락에 대한 바람보다 자기 육체의 쾌락을 위해 상대의 육체를 탐하는 것이다. 정욕은 인간의 타락과 죄로 말미암은 현상이다.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Rdinhold Niebuhr)는 일찍이 ‘죄는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성(self-centeredness)을 지닌다’고 했는데, 정욕도 다른 사람의 몸을 자기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죄이다. 구약성경에는 정욕과 관련된 대표적인 두 사람이 소개된다. 보디발의 아내와 압살롬이다. 그들은 준수하게 생긴 요셉과, 빼어난 용모를 지닌 이복누이 다말에 대한 욕정을 억제할 수 없었고, 끊임없이 매달리고 갖은 방법을 다하여 이들을 차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육정을 채우는 것 이상의 어떠한 것도 없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욕은 무절제한 성적 욕망”이라고 칭했는데, 이것은 정욕이 지닌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성격은 보디발의 아내와, 압살롬의 경우를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사람의 감정은 의지와 이성의 통제와 안내를 받게 마련인데, 정욕은 성적 욕구가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것이다. 
정욕은 인간의 육체가 약하기 때문에, 즉 육체적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 어려워 발생하는 것이기에, 교만, 시기, 탐욕 등과는 달리 죄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어왔다. 어느 정도 동정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욕은 결코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것만은 아니다. 간음의 경우는 적극적인 의지에 의해 동의되고 결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에 간음한 것이라고 했다.(마 5:28) 호색과 정욕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자극하려는 의도로 여자를 바라보는 자를 정죄한 것이다. 이 때 이미 의지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기에, 행동을 했든 아니든 이미 악이라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육체의 약함으로 일어났다 하더라도, 혹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과 상대방 및 그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 악한 결과를 생각해 볼 때 결코 죄와 무관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정욕과 사랑: ‘동반자만‘과 ‘동반자 의식도’
정욕은 그 성격상 동반자를 원하지만 그 이상은 원하지 않는다. 짜릿함과 때론 애틋함이 범벅이 된 욕정을 만족시키는 것 이상의 헌신, 사랑, 전인적 나눔과 같은 것에는 별로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정욕으로 인해 맺은 관계는 깨어지고 상대는 바뀌기 마련이다. 나아가 정욕을 잘 다스리지 않으면 욕구 충족을 위해 변태 도착증, 혼음, 동성애 그리고 스와핑과 같은 비정상적 형태의 성으로까지 문을 열고 나아갈 수 있다.
정욕은 사랑으로 포장되지만 사랑과는 너무나 다르다. 사랑은 지속성(continuance)과 헌신을 동반하는 반면 정욕은 순간의 만족(momentary gratification)을 추구한다. 헨리 페어리(Henry Fairly)는 정욕의 성격을 사랑과 대조하여 탁월하게 묘사한다. “사랑은 잠자리를 함께 들었던 그 사람과 또 다른 방식으로 함께 있고 싶어 한다. 가령 아침 식사를 같이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욕은 아침이 되면 늘 남의 눈을 피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고독으로 되돌아온다.” 이처럼 정욕은 처음부터 성숙이 아닌, 자기쾌락(pleasure)과 자아 만족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금방 색이 바래고 말라버리는 잎과 같다. 사랑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 서로를 절제하고 서로를 세워 가지만, 정욕은 오직 현재 자신의 감정과 자기만족에만 골몰한다. 정욕은 이처럼 지극히 비인격적이고 일방적이기에, 결국은 안정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정욕은 때로 육체보다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동기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특히 기혼자의 경우, 부부관계가 피폐해져 있을 때, 종종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정서적 보상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은 별로 다르지 않다. 이 경우도 상대에 대한 헌신과 상대를 풍요롭게 하는 것에 본질적인 관심이 없다. 그것은 “내게 다오 그러면 나도 너에게 줄게”라는 교환적 성격이 더 짙다. 이처럼 정욕은 육체적 쾌락, 정서적 애틋함, 짜릿함을 얻으려하고 이것을 서로 교환하는 것이다. 결국 자기를 위한 것이지 상대를 위한 것 아니다. 
4세기 사막수도사 에바그리우스(Evagrius of Pontus, 345-399)는 정욕은 “잔인한 죄”라고 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을 탐하는 것이기에 상대방을 인격체가 아닌 물체로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든지 깨뜨려지고 또 다른 대상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정욕은 성폭력과는 형태가 엄연히 다르지만, 자신의 성적 만족을 위해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고 유린한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유사하게 잔인하다고 할 수 있다. 
‘정상 정욕’과 ‘바닥 정욕’ 
수도사 카시안(John Cassian, ca. 360-435)도 정욕은 탐식과 아울러 육체에 속한 죄로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기에 시기, 교만과 같은 영적인 악들이 극복되고 난 뒤에도 사라지기 힘든 것이라고 했다. 식탐이 죽는 순간까지 존재하듯이 정욕도 끝까지 남기 쉽다는 것이다. 이들은 마귀들이 이러한 욕망과 생각을 부추긴다고 주장했는데, “마귀는 사람에 따라서, 또 때와 경우에 따라서,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정욕으로 유인한다”고 했다. 
영국의 극작가요 평신도 신학자인 도로디 세이어즈(Dorothy Sayers)는, 사람들은 보통 건강이 절정을 이루고 삶이 비교적 윤택하고 정상기에 있게 될 때 어느 때보다 정욕에 빠져들기 쉽다고 했다. 수도사들의 표현을 빌면, 마귀는 이런 상태에 있을 때 교묘하게 유혹하여 정욕으로 다가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그것을 억제하는 에너지와 정신적인 에너지도 강하게 작용을 하기 때문에, 육체의 욕구를 이성으로 적절하게 설득하고 통제만 한다면 절제도 그만큼 잘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루이스(C.S. Lewis)도 이에 관련하여 유사한 주장을 마귀 스크류테이프(Screwtape)의 입을 빌어 조카에게 조언하는 형식을 통해 전개했다. 그는, 인생을 파도치는 물결로 볼 때, 삶이 파도의 고점에 있는 것처럼 잘되고 활기찬 시기에, 사람들은 주로 정욕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때는 동시에 사고하고, 노동하고, 생산하는 데로 에너지와 정신의 물꼬를 쉽게 돌릴 수 있는 기간이기 때문에, 정욕에 대한 저항력도 함께 최고조에 달하게 마련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스크루테이프는 조카 마귀에게는 사람을 정욕에 빠뜨리기에는 이 때가 ‘최적의 때’는 아님을 명심하라고 충고한다.
한편으로 세이어즈는 사람들은 삶에 즐거움이 없고 별다른 의욕과 목표가 없어 활력이 없을 때, 즉 삶이 파도의 최저점의 바닥에 있는 듯한 때에 정욕에 깊이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마귀는 이런 때를 맹렬히 이용한다는 것이다. 인생에 대한 철학이 고갈되고, 삶이 재미가 없고, 그날그날을 그럭저럭 생활하게 될 때, 사람들은 짜릿한 자극에 부딪히면 동요되기 쉬운데 정욕은 그에 적절한 대체물이 된다. 이때에는 정상기와 달리 돌이키고 벗어날 수 있는 기운마저도 고갈된 상태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이 기간에 정욕에 빠지면 아주 치명적이 된다는 것이다. C. S. 루이스도 인간이 내적 세계가 황량하고 삶이 냉랭하고 허전할 때가 성의 유혹은 훨씬 강격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이때는 정상기에 비해 ‘사랑에 빠지는 듯한 감정’은 줄어들지만, 정욕과 같은 짜릿하고 애틋한 길로 빠지기는 훨씬 쉽다고 했다. 기쁘고 일이 잘 풀려서 술을 마실 때 보다, 삶이 무료하고 낙이 없어 술을 찾게 될 때 훨씬 더 깊이 취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술이 주는 낙으로 현실을 잊고자 하는 심리처럼, 사람들이 정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다윗의 음행사건도 어떤 의미에서 후자의 경우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다윗은 전장에 나가지 않고 궁에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게 되면서 정욕에 빠진다. 특별히 할 일이 없고, 삶에 목표가 없고 기쁨이 없을 때, 정욕은 더 치명적으로 작용한다는 분석은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 에바그리우스도, 수도사가 약간 해이해져서 규율대로 행하지 않고 그저 시간을 보내게 될 경우 마귀는 즉시 정욕을 일으키려 한다고 했다. 

쾌락, 우정, 그리고 결혼
이 사회가 점점 성을 결혼과 관계없이 취급하지만 기독교회는 그렇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관계를 세유형으로 분류하면서 이것 부부관계에 비유하여 설명한 바 있는데 그의 우정에 관한 윤리학은 쾌락이나 부부 관계에 관련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유형은 주로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맺는 친구관계이다. 소년일 때는 주로 즐기고 재미있게 지내기 위해 친구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지내보니 별로 재미가 없으면 더 이상 친구하고 놀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 이런 단순한 재미를 목적으로 맺어지는 친구관계는 시간에 따라 변하고 언제든지 끝날 수 있다. 청년기가 된 남녀가 서로 성적으로 끌려 친구사이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사귀어보니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고 느끼게 되면 그 두 사람은 헤어지게 마련이다. 쾌락과 즐거움을 위한 목적으로 형성되는 우정과 친구관계는 바로 이런 것이다.
두 번째의 유형은 상호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이런 친구간의 우정이라는 것은 그 유용성이 사라진다면 언제나 또 사라지게 마련이다. 주로 나이든 사람들이 맺는 친구관계 유형에 해당한다. 세 번째 유형은 선한 덕목을 지닌 사람들이 맺는 우정인데, 자신이 얻을 유익과 즐거움이 아니라 친구의 유익을 위해 친구를 위해 친구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친구를 사귄다. 이것이 온전한 우정이고 최선의 친구관계이다. 이런 관계는 어려움이 와도 여건이 바뀌어도 사람이 악해지지 않는 한 쉽게 깨지지 않는다. 우정은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부관계에도 이런 우정의 유형이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성적인 즐거움에 이끌려 부부가 된 사람은 그것이 사라지고 열정이 식으면 쉽게 와해될 가능성이 있다. 자기 앞에 다른 매력적인 사람이 나타나 어슬렁거릴 경우는 그럴 위험이 더 커진다. 또 서로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결혼한 관계는 결혼생활에서 어려움이 생기고, 이제 서로 더 이상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을 내리면 그 관계는 깨지게 마련이다. 결혼생활에서 상호 유익과 성적 쾌락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결혼생활은 우정의 세 번째 유형처럼 상대방을 채워주고 사랑하고 온전하게 해주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혼생활에서 어려움이 와도 성적 쾌락이 부족해도 결코 그 관계는 약해지거나 깨뜨려지지 않는 것이다.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우스(Stanley Hauerwas)는, 결혼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요소는 현재 사랑하느냐도 아니고 현재 만족하느냐도 아니라고 한다. 결혼 서약을 하면서 주례자는 배우자를 단순히 배우자를 ‘사랑하느냐’라고 묻지 않고, 남편이나 아내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어려울 때나 한결같이 사랑할 것을 약속하느냐’고 묻는다. 그 이유가 바로 ‘헌신하려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결혼생활의 핵심요소이고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적 욕망과 쾌락은 결혼생활에서 한 부분일 뿐 그것이 결코 핵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정신과 문화는 이것을 결혼관계에 있어서 중심적 가치인 것처럼 점점 자리매김하고 있다. 

결과: 오래가지 않는 쾌락과 불안한 행복
정욕의 결과는 늘 생각을 배신하게 마련이다. 잠언기자가 음녀의 입술은 꿀처럼 달콤하고 상대의 말은 부드러우나 오래가지 않아 곧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워지게 된다(잠 5:4)고 한 것은 결코 과장된 비유가 아니다. 인간의 연애감정과 이로부터 오는 행복감과 만족감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설레고 달콤한 감정이야 서서히 식게 마련이지만, 그것보다 상대에 대한 헌신이 없는 상태의 관계는 애초에 안정감이 결여되어 불안하기 마련이기에 더 그러하다.
성경은 이 관계는 마치 숯불을 밟고 다니면서 검게 그을리지 않고 데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잠 6:28) 정욕을 좇아가면 결국 그것으로 인해 화상을 입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압살롬은 다말을 범하고 욕정을 채운 후 다말을 버렸다. 압살롬은 다말의 인생을 추락시켜 버렸고, 다말의 오라비 왕자들과 원수가 되어 다윗 왕국의 분열의 씨로 작용하게 되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 대한 분노로 돌변하여 그를 모함하고 파괴하려 했다. 켄트 휴(Kent Hugh) 목사는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을 해석하면서, 이것은 단순히 간음행위로 7계명을 범함에 그친 것이 아니고 밧세바의 남편을 살해하여 6계명을 범한 결과도 낳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웃의 아내를 탐한 것을 금지한 10계명도 어긴 것이고, 결국 밧세바를 자기의 것으로 삼아 도둑질한 것이 되어 8계명 또한 범한 것이라고 했다. 다윗은 이 사건의 결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나단 선지자의 예언대로 왕자들 간의 칼부림이 끊이지 않았고, 다윗의 후궁들은 백주에 다른 이와 동침하게 되었다. 다윗의 왕국은 이 사건 이후로 내리막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잠언기자는 음행하는 자는 마치 새가 생명을 잃어버릴 줄도 모르고 그물로 들어가는 것(잠7:23)과 같고, 소가 푸주로 가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비참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마치 불나방처럼 불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방불하기 때문이다. 정욕에 빠진 자는 결국 한 조각 떡만 남게 된다는 말은 아주 현실적인 표현이다.(잠6:26) 실제로 패가망신하고 가산도 탕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인정하는 데는 특별한 통계와 검증된 이론이 필요하지 않다.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일어나는 상식적 사실이요 경험적 현실로 목도되곤 하기 때문이다. 바람을 피우고 호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시작과는 달리 비참한 종말을 보기가 다반사이다. 본인과 가족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결국 가정과 공동체에 무시하지 못할 해를 미치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이 치명적인 해악을 초래하는 정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피하고 끊어라
정욕에 대항하는 우선적인 길은 욕정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과 분위기, 대상을 피하는 것이다. 욥은 젊은 여인을 아예 보지 않기로 언약을 세웠다고 했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31:1) 아주 정직한 표현이다. 사람은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정욕이 일어나기 마련이기에 그 원인을 아예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잠언기자는 무릇 남의 아내를 만지는 것조차 피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켄트 휴 목사는, 자신은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여자에게 두 번째의 눈길을 주지 않고 외면한다고 했다. 수도사 에바그리우스는 자꾸 눈길이 가는 매력적인 사람이 보이면 그 자리를 피하라고 권고했다. 처음에는 눈을 밑으로 깔고 말도 안하다가 조금 지나면 가끔씩 눈을 마주치고 말을 붙이게 되고,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면 눈을 정면으로 대하면서 말을 하게 되고, 나중에 마음도 열게 되면서 정욕에 넘어가게 된다고 경고하였다.
에바그리우스는 정욕으로 인생의 결정적인 위기를 맞이할 뻔 했던 수도사였다. 4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단과의 신학논쟁으로 명성을 얻어 교회에서 신망과 입지를 굳혀가고 있을 즈음, 그는 교회의 중직자의 아내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신이 두려웠다. 걷잡을 수 없이 끌리는 마음과 아울러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신의 위치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에바그리우스는 그 여자의 남편이 군인들과 함께 집에 들이닥쳐 그를 끌어내어 감옥으로 집어넣는 꿈을 꾸었다. 꿈을 깬 에바그리우스는 결단을 내린다. 정욕의 수렁에 빠져 죽는 것보다는 지위, 명성을 잃더라도 그 수렁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한다. 그곳에서 그녀를 보고 만나는 한 그 수렁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박차고 예루살렘으로 피할 것을 결행했다. 더 이상 머물러 있다가는 더 빠져들고 결국 그의 인생이 파멸에 처할 수 있겠다는 정직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에바그리우스는 정확하게 판단한 셈이다. 그가 택한 것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피한 것이었다. 물속에 있으면서 햇볕이 쬐이는 곳을 찾아 옷을 말린다고 해서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흙 밭에 있으면서 바짓가랑이에 흙을 묻히지 않는다는 것은 진흙 밭에서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나 하는 비현실적인 생각일 뿐이다. 그곳을 벗어나는 길밖에 없다. 
요셉의 예는 이것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집요하게 그를 유혹하던 주인의 아내가 아무도 없는 공간을 만들어 몸으로 달려드는 상황에서, 요셉은 겉옷을 벗어던지면서까지 그 자리를 박차고 도망쳐 나왔다. 에바그리우스도 지혜로운 길을 택했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을 전화위복의 길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에바그리우스는, 마귀가 집요하게 수도사에게 성적 상상과 환상을 일으켜 육체적 욕정을 부추기면서 속이는 전략을 쓰되, “오늘 그 유혹을 피하지 못하면 내일 회개할 기회가 있다”며 교묘하게 유혹한다고 설명했다. 많은 위대한 수도사들이 이 속삭임에 넘어가 정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정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느끼고 깨닫는 순간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피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 

말씀을 새기라
이 시대의 철학은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과 함께 서로를 나눌 권리가 있다’, ‘성적 즐거움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즐기고 향유할 가치가 있다’고 가르친다. 때로는 남의 남편이라도 그 사람이 원하고 나도 원하면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설득한다. 그것으로 두 사람의 삶에 기쁨과 활력이 생긴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라고 한다. 사탄은 이렇게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추구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신자들은 성욕을 즐기되,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깨뜨려서는 안 된다. 7계명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10계명을 마음 판에 새겨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아내를 자신의 욕정을 위한 소유물로 삼아서는 안된다. 다윗은 청년의 정욕을 피하기 위해 주의 말씀과 율법을 늘 묵상하고 새긴다고 고백했다.(시 119:9, 11) 잠언기자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이것이 너를 지켜서 악한 계집에서, 이방 계집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잠 6:23, 24)고 권고한다. 말씀을 무겁게 듣고 그것으로 철저히 무장하여야만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다. 
누구보다 성직자들은 ‘나는 주의 거룩한 일을 할 사람이다’는 의식 가운데서, ‘내가 이것에 빠지면 결코 주의 사역을 섬길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지내야 한다. 더러는 목회자들 가운데 이런 실수를 하고도 회복되어 이전보타 더 능력 있게 쓰임 받는 자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이 유혹에 빠져서 실수하면 다윗처럼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사역은 그야말로 끝이 날 수밖에 없다. 유혹을 받는 순간 늘 이 생각을 해야 한다. 무엇을 택할 것인가? 이에 대한 성경의 경고와 말씀으로 의식을 날카롭게 해야 한다. 

배우자와의 친밀감과 공동체적 삶의 만족을 높이라
성경이 가르치는 성욕은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배타적으로 충족되고 만족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의 타락이후 이것이 깨어진 것도 원인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결혼관계 안에서 이것이 온전히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정욕적으로 되기도 한다. 낙원에서 두 사람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이 없었고 서로의 한 몸 됨을 온전히 즐겼다. 사람이 노출을 부끄러워하게 된 것도 죄의 결과이다. 타락이후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조차도 점점 부끄러워하게 되고 자연히 은밀하게 행하게 되었고, 그 즐거움도 그와 못지않게 되었다. 성적 욕구와 쾌락도 본질을 벗어나 정욕으로 발전되기 일쑤였다. 어거스틴이 성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가르치게 된 것도 이런 본질을 벗어난 것에 대한 고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로서 본래 창조 때 누리던 남녀의 부끄러울 것 없는 하나 됨과 그로 말미암는 성적 쾌락을 회복해 가야 할 것이다. 부부간에 성적 친밀감을 높이는 것은 정욕으로 빠지는 것을 막는 최상의 예방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위하여 욕구를 가꾸어가야 하고 상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권리이자 동시에 도덕적 의무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욕과 다른 극단에 있는 것도 죄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성에 대한 무감각(insensibility)과 성 혐오증(aversion to sex)이라고 했다. 결혼한 부부들은 부부생활을 통해 더 성적 즐거움을 누리도록 서로 노력해야 한다. 바울이 가르친바 자신의 몸은 자신이 아니라 배우자가 주관하도록 해야 한다는 권고(고전 7:4)에 따라, 서로의 욕구를 존중해서 마귀가 틈을 탈 기회를 주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근원적 즐거움을 더 누리기: 궁극적 처방
정욕을 극복하기 위해 실제적인 방안과 훈련들도 필요하지만 근원적인 해결책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한다. 세이어즈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살지만 정작 포르노와 음란에 더 탐닉하는 것은 사람들이 삶에서 참된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지루해하고 싫증을 느끼는 영적인 빈곤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정욕 자체의 문제만 가지고 그 대책을 강구하려는 그 어떤 방법도 성공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아퀴나스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기쁨과 만족이 없을 때 그 허전함을 달래고 채우기 위한 한 방편으로 정욕을 더 추구한다고 보았다. 성 어거스틴도 사람이 영적인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될수록 더 육체적 쾌락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욕을 통해 즐거움과 쾌락을 누리게 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근원적 기쁨을 대체할 수 없기에 여전히 허전하고 불만족할 수밖에 없음을 이들은 한결같이 강조한다. 성은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적으로 문란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어거스틴은 회심한 후 진리를 찾고 그 안에서 사는 삶의 엄청난 기쁨을 맛보게 된 이후, 비로소 정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독신으로 살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에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더 큰 기쁨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기쁨을 더 누리게 될수록 육체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덜해진다. 
이와 아울러 친구들 간의 우정과 공동생활을 더 풍성하게 누리고 즐기는 생활도 아주 긴요하다. 마음과 뜻이 통하는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고 삶을 나누는 것은 삶에 큰 활력과 기쁨을 준다. 특히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선한 목표를 공유하며 정서적으로 가깝게 생활하는 것은 정욕에 빠지는 것을 예방해 주는 실제적인 자원이다.(딤후 2:22) 크리프트 교수는 “천국에 성이 있을까?”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한 뒤,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성이 지닌 기능이 요구되지 않는 곳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성의 중요한 기능은 두 사람의 하나 됨과 연합을 위한 것인데, 천국은 부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사람들 간의 연합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성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동료와의 우정과, 공동생활에서 맛보는 기쁨과 만족이 더 크면 클수록, 정욕을 통해 쾌락을 찾으려는 욕구는 줄어들게 될 것이다. 

나가면서 
오늘날 이 시대사조는 성과 성욕을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한정된 사적인 문제로 취급한다. 그리고 개인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성적인 자유와 만족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이것을 그 어떤 국가나 사회도 간섭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과 성욕은 결코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할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 나아가 공동체와도 관련되는 것이기에 공적인 영역의 문제이다. 이것이 잘못되면 사회가 점점 도덕적으로 병들게 될 수밖에 없다. 신자는 정욕을 정당화하는 현 사회 문화에서 자신과 가정과 신자 공동체를 지켜나가기 위해 더욱 말씀으로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은 정욕에 탐닉함 없이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정욕에 대한 훌륭한 대안적 삶을 이 사회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신원하 l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와 고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칼빈신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석사(Th. M.)와 보스톤 대학에서 사회윤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Ph. D.) 저서로는 『전쟁과 정치』,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 『가난과 부요의 저편』, 『시대의 분별과 윤리적 선택』 등이 있으며, 지금은 천안에 있는 고신대 신대원 교수이면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신학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글쓴이 / 신원하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7) 탐욕(貪慾, Avarice)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7)
탐욕(貪慾, Avarice)
경제, 최고의 이데올로기
“멍청아,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 1992년 클린턴을 미국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한 참모가, 다른 전략을 내놓은 참모들에게 한 말이다. 사람들의 “더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을 정면으로 겨냥하지 않으면 그 어떤 전략으로도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의 판단과 전략은 적중했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지고 냉전체제가 종식되면서, 또 미국이 걸프전쟁에서 성공을 거둔 직후, 부시 대통령의 지지도는 그야 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경기가 침체 조짐을 보이면서 여론은 조금씩 나빠졌는데, 바로 이 점을 클린턴의 선거 참모는 이용한 것이다. 늘 무엇인가를 더 갖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를 직접 자극한 것이다. 경제 발전을 통해 더 누리게 해 주겠다는 선거 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어 결국 철옹성을 무너뜨렸다.
“경제를 살리겠습니다” 2007년 한국 대통령 선거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경제 대통령”, “747” 등의 선거 구호 외에는 별다른 정책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이명박 후보의 선거 전략은 처음도 끝도 경제요, 더 잘살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누가 이 시대와 역사의 참된 지도자감인지에 대해서는 크게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보다는 과연 누가 경제를 살려줄 것인가, 내 집값을 올려주고, 펀드 수입을 높여 줄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심리를 이용한 선거전략은 그대로 적중했다. 더 갖고 싶어 하는 욕구를 자극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효과적인 정치 전략이다. 인간의 근원적 탐욕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세기 수도사 에바그리우스(Evagrius)는 탐욕이 식탐, 헛된 영광과 함께 인간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욕망이라고 했다. 그는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할 때도 바로 이 욕구를 건드렸다고 해석했다. “나에게 절하면, 내가 이 온 천하를 너에게 주겠다.” 이처럼 그는 다른 악들은 모두가 탐욕에서 비롯한다고 설명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도 같은 내용이다.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누구든지 이 탐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오히려 가진 자들에게 이 탐욕은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 돈이 주는 편리함과 힘을 이미 맛보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탐욕은 정욕이나 명예욕보다 훨씬 더 저항하기 힘든 악이라고 분석했다. 돈만 있으면 성욕도 채우고 권세도 누릴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 특히 소위 ‘풍요로운 선진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더더욱 이러한 탐욕에 휘둘린 삶을 살아가게 마련이다. 이미 돈이면 그 어떤 것도 다 누리고 살 수 있는 사회이자 소비지향적인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능력도 인격도 점점 소유의 과다와 소비의 유형에 따라 평가된다. 어느 지역에 살고, 어떤 아파트를 소유하고, 어떤 브랜드 제품을 소비하느냐 하는 문제는 곧바로 그 사람의 신분과 능력의 척도가 된다. 그야말로 소유가 존재를 규정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더 갖는 것,’ ‘더 소비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부추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곧 힘이며 권력이다. 돈이 있으면 생활이 편하다. 돈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거의 다 갖게 된다.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는 사람의 욕망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낸다. “더 소비하고 소유해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필요하지 않은 것도 꼭 필요한 것처럼 우리를 속인다. 광고가 그렇다. 배고프지 않은데도 더 먹고 싶게 만든다. 이미 부족함 없이 소유하고 있는데도 새로운 것을 찾게 만들고, 이미 가진 것도 더 갖고 싶게 만든다. 우리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거짓 허기(虛飢)에 주리고 놀아나는 셈이다.
사람들은 이런 사회 문화 속에서 점점 자신의 진정한 삶의 목적, 의미, 행복 등의 가치와 괴리된 채 살아가게 된다. 바로 이 점이 심각한 문제다. 한국 사회와 교회, 그리고 개인들은 이전에 비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고 모자람이 없이 소비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평온하고 행복한 삶(전 6:3)을 살고 있는 것일까?

조금 더: 축재와 탕진
탐욕(avarice)의 라틴어 어원 ‘아바라티아(avaritia)’는 재물을 더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이란 뜻이다. 즉 탐욕이란 돈, 재물, 명예를 더 소유하려는 욕심이다. 일찍이 단테는 “자신이 필요한 것보다 더 소유하려는 욕구”를 탐욕이라고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조금 더”이다. 권력, 재화 그리고 명예에 대한 욕구는 절제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탐욕은 영원한 것이 아닌 것들을 사랑하고 이것을 소유하려는 욕구라고 간주했다. 또 제러드 리드(Gerard Reed)는 탐욕을 “지배력에 대한 욕구”라고도 표현했다.
단테는 탐욕을 두 종류로 나누어 설명했다. 한 종류는 자기가 지닌 것을 쌓아놓고 다른 사람과 나누려 하지 않는 욕심인 축재(avarice)이다. 다른 종류는 물질과 재화를 스스로 끝도 없이 계속 흥청망청 소비하는 탕진(prodigality)이다. 이런 양면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같은 흐름에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도 과도히 물질을 잡고 베풀지 않는 것을 인색(aneleutheia ungenerosity)이라 했고, 반대로 물질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써버리는 것을 낭비(asotia, wastefulness)라고 하면서, 물질에서 자유로운 중용의 상태를 자비로움 또는 후함(eleuetheriotes, generosity)이라고 설명했다. 단테의 작품 좬신곡좭을 보면 연옥에서 탐욕의 벌을 받고 있는 두 유형의 사람들이 서로를 비난하는데 한 쪽은 재물을 탕진한 자들이고, 다른 한 쪽은 재물을 손에 쥐고 남에게 베풀지 않은 자들이다. 이들은 서로 반대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사실 양쪽 모두 이 땅의 재물에 대한 과도한 사랑과 집착으로 살아간 자들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에바그리우스는 탐욕은 마치 바다와 같다고 비유한 바 있다. 이 비유는 이미 성경의 전도서에도 나오는 것인데, 곳곳의 강물들이 모두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만 결코 그것이 바다를 채우지 못하듯이(전 1:7), 소유라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의 탐욕을 만족할 만큼 가득 채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욕망의 본질은 결코 만족을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페어리(Fairly)는, 탐욕은 ‘소유’ 즉 명사가 아니라 계속 ‘소유하는 것’ 즉 동사의 성격을 갖는다고 했다. 일찍이 전도자는 탐욕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잘 묘사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다.(전 5:10-11)” 즉 사람은 늘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언제나 조금 더 가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24시간 편의점의 대표 주자격인 ‘세븐 일레븐(7eleven)’은 이러한 인간의 소유욕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1927년 미국 달라스에서 시작된 이 편의점은 당시 오전 7시에서 밤 11시까지 영업하는 것을 마케팅 전략으로 내세우면서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그런데 1962년부터는 하루 종일, 즉 24시간 내내 일하는 체제로 바꾸었다. 다른 가게가 문을 닫는 밤 시간까지도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만큼 매출이 늘어나 돈은 더 벌었겠지만, 삶이 그만큼 고달파지게 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돈에 대한 욕망은 탐욕의 성격상 끝이 없다. 때론 정상적 경계를 넘어 확대되고 만다. 탐욕에 사로잡히면 그 욕망이 어디까지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은 적절히 제어되지 않으면 위험을 동반한 행동까지도 감수하게 만들고 사행심, 투기로 발전하여, 급기야 도둑질, 사기, 횡령 같은 불법까지도 저지르게 한다. 급기야 다른 사람의 재산과 아내까지 탐내고 소유하려 들게 만든다. 그래서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은 이 탐심을 특별히 경계하고 있다.

하나님도, 그리고 맘몬도
신자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신자들은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가 된다는 바울의 가르침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재물의 유혹은 결코 녹록치 않다. 그래서 대개는 하나님도 섬기지만 재물도 함께 소유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모두 취하는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자들도 재물과 소비를 통해 얻는 즐거움과 편리함을 동일하게 맛보며 살고 있고, 그 힘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재물의 유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훨씬 큰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어떤 사회나 경제 체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정 사회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도 늘 이 유혹 앞에서 흔들렸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배교하곤 했다.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신 바알과 아스다롯을 가까이 하고 섬기라는 유혹을 받았다.(삿 2:11-12) 백성들이 바알을 섬긴다는 것은, 그 저변에 탐욕이 철저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우상들은 곧 재물을 더 많이 얻고자 하는 욕심이 만들어낸 신들이기 때문이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땅의 소출과 생산을 관장하는 부부 신으로 생각했다. 이 땅의 자손, 가축, 곡식의 생산은 이 두 신의 힘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바알과 아세라가 부부행위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 생산의 기운이 땅에도 미쳐, 땅은 다산과 풍성한 소출을 얻게 된다고 이들은 생각했다. 가나안 사람들은 생산의 기운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부 신들이 성행위를 많이 하도록 신들의 성욕을 자극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바알신당에서 제사를 드릴 때 여자는 미동과 남자는 신정 창기와 성행위를 했던 것이다. 이것은 제사 행위의 일부지만, 그 진짜 의도는 바알과 아스다롯의 성욕을 부추기려던 행위였다. 그들로부터 생산의 기운을 끌어당기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적극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애굽에서 벽돌을 주로 만들었고 광야생활 도중 농사를 지어본 적도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바알 숭배는 절실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고, 그들은 탐욕으로 결국 야웨 하나님을 섬기면서 바알도 함께 섬기는 길을 선택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뼈를 썩게 만들었고 결국 패망에 이르는 주원인이 되었음을 성경이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현대 기독교회의 가장 큰 유혹 중의 하나도 탐욕이다. 미국이나 한국과 같은 선진 사회에서 이미 삶의 풍요를 맛보고 누리고 사는 신자들에게는, 물질이 주는 낙과 재미가 깊이 인박혀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물질도 놓치고 싶지 않다. 혹은,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하나님께 복을 받아 자기가 더 풍요롭게 살고 싶어 하는 데 있는 경우도 있다. 우리 안에 이런 모습들이 조금씩 다 있다. 이런 신앙생활은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것과 어쩌면 그렇게 닮았는지 모른다. 신앙생활과 예배에서 어쩌면 하나님 이름을 빼버리면 마치 바알을 숭배하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지난 30년 동안 급속히 경제성장을 했고 물질적 풍요가 주는 재미를 맛본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점점 두 주인을 섬기는 혼합 신앙에 익숙해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교회와 한국 교회와 기독교의 문화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삶에 별다른 불편함이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 교회의 힘과 영향력은 교인의 숫자나 헌금 액수로 평가되고, 사회적 명망이나 지위가 높은 교인들이 몇이냐에 따라 평가되고 있다.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입신과 양명을 도모하고, 교회는 점점 사람들의 소비유형에 맞추어 공급 내용을 리모델링해 나가는 묘한 회당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많은 교회들은 점점 의식하든 못하든 이런 욕망과 동맹 관계로 변해가고 있다. 강단의 메시지는 정의와 평화가 아닌 번영과 풍요를 약속하고, 부자 되는 것과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의 복으로 선언하는 제단으로 변질되고 있지는 않은지 뼈아프게 반성할 때가 아닌가.

소외와 유리 
재물과 권력 지향의 사람들은 늘 이익 지향적 삶을 살다보니 인간관계도 그만큼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기에게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되는 사람만 가까이하게 된다. 친구나 이웃과의 관계 그 자체에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는다. 뛰어나지도 않고 가진 것도 별로 없는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상대가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면 그 사람은 부담이 되는 존재인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을 대할 때 마틴 부버(Martin Buber)의 용어를 빌자면 ‘너(du)’가 아니라 ‘그것(es)’으로 대한다. 그래서 우정, 진리, 사랑, 이웃애, 공동체 등의 단어는 이들에게 아주 낯선, 아니 관심 밖의 개념인 셈이다.
공적 영역에 무관심해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페어리는 “오늘날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공적인 분야나 정치에 점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소외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변명에 불과할 뿐, 사실은 우리의 나태함일 뿐이다. 공공적인 일과 관심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사회적 나태는 바로 탐욕에서 말미암는 것이다.(페어리, 169-170)”고 말했다. 
야심과 욕망에 따라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결국 대상을 비인간화시키게 된다. 그러나 곧 자신도 친구와 공동체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심리학자 솔로몬 쉼멜(Solomon Shimmel)은 “탐욕에 이끌려 사는 사람들이 점점 우정을 나누거나 친분을 형성하려고 하지 않고, 동맹을 결성하려고 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이것이 현재 미국 사람들의 대인관계의 부정할 수 없는 한 모습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소외가 늘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유 양식적 삶 
탐욕의 성격을 설명하는 데에는 20세기의 탁월한 사상가인 에릭 프롬의 사용하는 소유 양식(mode)이라는 개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프롬은 인간 삶의 양식을 크게 존재양식(mode)과 소유양식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소유 양식의 삶이란 ‘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다’라고 말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권력, 지위, 재산, 특정상품 등 외부적인 것들을 소유함으로 자신을 규정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존재 양식의 삶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을 능동적으로 개발하고 발휘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소유 양식에 따른 삶은 끊임없이 뭔가를 소유하기를 도모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자신을 확인하고 또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급스럽고 탁월한 기능을 가진 새 물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물질문명 사회에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끝없는 소비지향적 삶의 양식으로 내몰리게 된다. 그런데 이 욕구는 온전히 충족될 수 없는 성격이기에, 이들의 삶은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다. 실제로 소유가 많아지면 번민이 따라서 많아질 수 있다. 재산을 늘리기 위한 고민과 노력 못지않게, 이미 가진 재산을 관리하고 지키는 것에도 신경이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재산이 많으면 염려가 늘게 마련이다. 유명한 그림과 문학작품에서 등장하는 수전노(miser)의 얼굴을 보면 한결 같이 어두운 얼굴로 묘사된다. 돈이 있기에 행복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이다. 돈주머니를 꽉 움켜쥐고 있기에 늘 경계하며 살기 마련이다. 영어로 구두쇠(miser)와 비참하고 피폐한(miserable)이라는 것이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자기과잉과 타자결핍의 제로섬 게임
욕망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기 소유를 더 늘려가고, 그것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흐뭇해한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고 흐뭇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한다. 소유 행위는 철저히 개인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소유 지향적 삶은 그 파장이 결코 개인의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미친다. 이것이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이다. 특정 지역에서 자원과 에너지는 보통 한정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만약 어떤 사람이 그것들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 남은 것을 가지고 나누어 사용할 수밖에 없다. 내 돈을 가지고 내가 더 쓴다는데 무슨 문제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고 또한 별 관심이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 현상은 국제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선진 국가들은 경제력과 정치력을 이용해 에너지를 쉽게 확보해서 넉넉하게 사용하며 지내왔다. 그러나 이것의 어두운 그림자는 개발도상국가들에 미치게 마련이다. 특정 시기에 생산되는 지구촌의 자원은 제한되기 마련인데 선진 국가들이 과도하게 그것을 소비하면 그 남은 것들의 가격은 상승한다. 결국 다른 국가들은 자원을 더 비싸게 구입할 수밖에 없고, 비싼 비용 때문에 필요한 에너지와 자원을 소비하기 힘들어진다. 부유한 국가가 자원을 넉넉히 소비하고 풍요를 구가하면 할수록 가난한 국가와 약자들은 그만큼 더 불편하고 힘들게 지낼 확률이 높아진다.
가진 자의 탐욕은 자연계에도 마찬가지로 미친다. 지구촌의 앞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성장과 개발을 내세우며, 자연을 파헤치고, 오염시켜 왔다. 인간의 과도한 자연 개발은 결국 생태계의 심각한 훼손을 가져왔고, 그 결과로 수많은 생물종들이 사라졌다. 수천 년 수만 년을 통해 형성된 생태계가 불과 최근 1백년 사이 엄청나게 파괴되었다. 음식과 자원에 대한 과잉소비는 과잉생산을 낳고, 이것 때문에 땅은 더 많이 경작되어야 했고, 산림들과 화석 자원들은 더 많이 벌목되고 채취되어 사라져갔고, 탄소와 오염물질은 더 많이 배출되었다. 이 결과로 대자연과 지구의 기후조차 변하고 있다. 숱한 생명체들이 지금도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오늘날 생태계는 거의 신음하는 상태에 처해있고 긴급 구호를 요구하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인간의 탐욕으로 공생해야할 생물들이 사라지거나 고통을 받고 있다. 지구 온난화는 이제 부메랑이 되어 대규모 자연 재해를 발생시키면서 인간에게도 흉기가 되고 있다. 자연은 이제 자기 방어용으로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발톱을 들이밀면서, 이기적인 인간에게 맞서고 보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탐욕스런 행위와 삶이 만든 지구온난화의 결과도 사람들은 피해를 입기 시작하고 있지만 그러나 불합리하게도 그 피해는 가장 약한 국가들에게 제일 우선적으로 임하고 있다. 벌써 몇몇 약소 해양 국가들은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의 수몰이 진행되면서 나라 자체가 사라질 위협에 처하고 있다. 부유한 국가의 사람들이 소유를 늘이고, 더 많이 쓰며, 시원하고 따뜻하게 지내는 동안, 가난한 국가의 사람들은 이제 생존의 위협을 받거나, 심각한 고통을 겪는 국면에 처하게 처하었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에 부유한 국가의 사람들은 원인 제공자라는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인간 욕망의 끝은 없다. 그 끝은 생태계와 지구촌의 파멸이 될 것이다. ‘인간 탐욕의 문명은 마치 거대한 집단 자살 체제와 같다’는 의식 있는 학자들의 경고는 풍요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이 깊이 새길 경고이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생태계의 교란과 파괴의 결과는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이미 우리 곁에서 나타나고 있다. 아토피 질환을 포함해서 흔히 ‘문명병’이라고 불리는 각종 질환 등이 발병하고 있고,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 자연은 개발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인간과의 공존과 공생이라는 큰 언약의 틀 안에서 개발되어야 한다. 자연은 결코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과 돌봄의 대상인 것을 기억해야한다. 이 공생과 연대라는 관계를 깨뜨리고 자연을 충족의 대상으로 대하고 폭력을 행사하면 자연은 인간에게 복수한다. ‘겸손’과 ‘절제’는 더 이상 도덕적 덕목이 아니라 과학이 가르쳐주는 생존을 위한 요청사항이다. 과학은 인간에게 욕망을 줄이지 않으면 같이 망한다고 말하면서, 자중할 것을 요구한다.
탐욕을 제어하지 않으면 개인도 망한다. 물질과 소유가 어느 정도 있어야 삶이 불편해지지 않는 것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도 다분히 일반적인 생각일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뭔가 달라야 한다. 성경이 재물과 행복에 대해 가르치는 바는 이 세상의 일반적인 것과는 아주 다르다. 신자들은 무엇보다 성경이 보여주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더 분명하게 의식화하고 가져야 할 것이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
탐욕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에게 양심과 공동체 의식이 각성되어야 하고, 거기에 추가로 윤리적인 덕목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해결책은 다름 아닌 ‘재물과 소유에 대한 바른 의식’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른바 ‘물질에 대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있는 것이다. 돈과 재물, 그리고 권력은 인간을 결코 만족시키지 못하며, 만족이라 하더라도 한시적인 가치만을 지닌 허무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마음에 깊이 새겨지지 않는 한, 탐욕을 정면으로 대처해 나가기란 어렵다. 성경은 이에 대해 수많은 곳에서 가르친다. 전도자는 ‘재물은 인간에게 궁극적인 만족을 줄 수 없다’고 말한다. 소유하면 할수록 더 배고프고 갈증이 날 뿐이라고 말한다.(전 5:10) 재물은 아무리 움켜잡는다고 붙잡아둘 수없는 허무한 것이라고 말한다. 잠언기자는 재물이란 마치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와 같아서 언제든지 날아가 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친다.(잠 23: 5)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재물은 때로 녹이 슬고 벌레가 먹어 못 쓰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힘으로 결코 재물을 온전히 보호하고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기독교적 세계관이 바로 출발점이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아가야 할 자라는 자기 정체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신자는 이 세상의 좋은 것을 추구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썩어질 재물과 일시적 갈증만을 해소해주는 소유와는 비교할 수 없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화평(롬 14:17)이라고 신자들에게 가르쳤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면 죄의 속박으로 자유하게 되고, 이것에서 오는 기쁨을 맛보고, 마침내 참 평화를 누리게 된다. 이것들은 영원한 천국에서 누리게 되는 것이지만 오늘 현실에서도 맛보고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역동적으로 임하였기에, 비록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맛보며 살 수 있는 실체이다. 신자들은 종말론적인 복을 현실에서 성령 안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즉 실현된 종말론적 평화를 맛보며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사는 이방인과 달리 성도들은 이것들을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 것’을 요구하셨다.(마 6:25-33) 이 세상 사람들은 먹고 입고 마시기 위해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의와 희락과 화평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 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만약 신자들이 그렇게 살면 하늘 아버지가 의식주의 문제도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자족에의 연습
이러한 ‘기독교적 세계관’의 안경을 갖추고, 살지만, 신자들도 물질이 부족하면 어려움을 겪게 될 수밖에 없고 더 갖추어 안락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똑같이 든다. 이런 마음을 잘 다스려서 욕심으로 나아가지 않기 위해 신자들은 우선 지니고 있는 것에 자족하고 감사하는 태도를 지니고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실제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로 심각하게 고통 받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활을 넉넉하게 여기며 만족하며 지내는 자들도 그렇게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절대적으로 부족해서가 아니라, 바라는 만큼 풍요롭게 지내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이렇지 않았다. 모두가 전반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지만, 의식주에 크게 걱정이 없는 상태이면 즉 연탄 몇 십 장을 창고에 쌓아 놓고, 김칫독과 쌀독만 떨어지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해 했다. 그에 반해 현대인들은 많은 것들을 이미 지녔고 실제로도 누리고 살지만 결핍감은 이전보다 더 커졌다. 오히려 궁핍할 때가 넘칠 때보다 더 풍요로웠던 셈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크게 부족함이 없는 상태이지만 욕심 때문에 자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4세기 교부 크리소스톰은, 진정한 부자는 재물을 많이 모은 사람이 아니라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만족하는 사람이고, 정말 가난한 자는 재물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탐욕이 가득해서 만족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했다. 신자들은 무엇보다 지금 지니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것이 자족이다. 살아가는데 의식주가 크게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을 족한 줄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 나가야 할 노릇이다. 바울은 사도로 살아가면서 때로는 궁핍에 처하게 되는 일이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하면서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자기를 본받아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족하고 감사하며 꼭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삶을 살 것을 당부했다.(빌 4:11-12) 

조금 덜 : 단순한 삶의 방식(simpler lifestyle)
가난의 문제에 대해 일생을 헌신하고 연구한 신학자 로날더 사이더는, 신자들이 단순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힘써야 할 것을 역설한다. 그는 오늘 지구촌의 많은 나라들이 기아와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너무나 풍요롭게 살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만족하지 못하고 더 풍요롭게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풍요에의 욕심을 벗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필수적인 길이라고 한다. 그는 이것을 위해서는 삶을 단순한 삶의 형태로 바꾸어 가야한다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신자들은 가능한 살림과 경제규모를 축소해서 단순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물품을 ‘의식주에 꼭 필요한 필수품’, ‘있으면 삶에 유용한 것’, ‘없어도 되는 것’, 그리고 ‘사치품들’로 각각 분류하면서, 필수품 이외의 것들은 단지 생활을 좀 더 편하게 해주는 ‘잉여의 소유물’로 분류하였다. 신자들은 필수적 것 외의 잉여소유물을 소비하는데 매우 조심해야하고 가능하면 그것들을 단계별로 줄여나가는데 힘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것이 단순한 삶의 방식이 지향하는 것이다. 그는 신자들이 이 땅에서 너무 풍요롭게 생활하면 그것에 익숙해져서 정작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해서는 소홀한 반면, 이 땅의 것을 조금 덜 가질수록 하나님 나라의 풍요함을 더욱 누릴 수 있다고 했다.
이와 관련한 보다 구체적 태도에 관하여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도 아주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해 준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물품을 구입할 때는, 사서 소유하고 싶거나 혹은 살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산다. 그러나 신자들은 달라야 할 것을 포스터는 주문한다. 경제적인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신자들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뻐하실까?’하는 의식을 갖고 고민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집을 구입하고 차를 바꾸려 할 때, “너는 그 정도의 집과 차를 살 능력이 있어!”라는 생각만을 따라 구입한다면, 그것은 돈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고, 돈이 우리 주인이 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이 과연 이것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실까 하는 관점에서 한 번 더 고민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신자들은 자그마한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소비에 더욱 절제하면서 단순한 삶을 연습해 가야 한다’고 했다. 이때 무엇을 덜 소유하였거나 혹은 적게 쓰는 단순한 삶은, 결코 궁색한 삶은 아니다. 신자들은 오히려 이렇게 삶 가운데서 더 풍요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있는 것으로 나누기
탐욕에 대한 가장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대처방안은 자기가 가진 것을 조금씩 내 보내는 것, 즉 ‘구제’하는 것이다. 신자들이 소비를 줄이고 단순한 삶의 방식을 도모해 나가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이웃을 위해 더 내어주고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식사시간에 손을 씻지 않은 채 식사하는 예수님에 대해 놀라워하는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것, 즉 악독과 탐욕을 씻고 제거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 방법까지도 구체적으로 가르치셨는데, 그것은 바리새인이 먹을 음식을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라는 것이었다. 자기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을 줄여서 그것을 다른 사람과 더 나누며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직접 제시하신 욕심을 내버리는 유용한 길이다. 소비를 줄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한 사람의 변화와 성화의 가장 두드러진 표시는 자기가 가진 것을 포기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행동에서 나타난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를 영접한 삭개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게 되었을 때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께 자기가 갖고 있던 소유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하고 만약 토색한 일이 있으면 그것의 4배를 갚겠다고 주님께 고백했다.(눅 19:8) 그 선언이 있은 직후 예수님은 구원이 삭개오의 가정에 임한 것을 선포했음을 신자들은 기억해야 한다. 탐욕에 대한 참된 회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에서 정점을 이루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 나누어 주는 것은 영성과 경건의 수월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지표인 셈이다. 5세기 베네틱트 수도원을 비롯한 중세 수도원에서의 수도생활은 명상, 노동, 성경읽기로 대표되는데, 그 중 노동의 한 주요한 목적은 그 소출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과 손님을 구제하고 대접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구제가 영성훈련에 있어서 주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의미이다. 
자기 것을 떼어서 나눠주는 일에 힘쓰는 일은 탐욕을 떼어내는 급진적인 방법이다. 사이더가 소비를 줄이고 단순한 삶을 살 것을 권한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더 많이 구제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사이더는, 신자라면 소득의 십일조를 내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점점 더 헌금의 비율을 높여가야 한다고 했다. 그가 제시하는 것은 누진적 십일조(graduated tithe)인데, 신자들은 가족 규모와 수에 따라 합리적으로 자녀 교육비를 포함한 생활비와 또 노후를 위한 적립금의 액수를 산출하고 난 뒤, 매달 그 이상의 여분의 소득이 발생했을 경우 점진적으로 잉여 소득에 대한 추가적 헌금을 단계별로 높여 나가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어느 일정 잉여 소득분에 대해서는 그것을 모두 헌금으로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누진 일조적 헌금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위한 구제를 목적으로 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성도들이 자신이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가진 재물로 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도록 권면하도록 당부했다.(딤전 6:18) 오스왈드 샌더스는 일찍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는 구절을 지적하면 이것은 바로 산상수훈의 팔복과 나란히 기록될 제 9복이라고 칭한 바 있는데, 나누기를 즐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각별한 복이 임한다는 것은 약속이요 위로인 셈이다. 

나가면서
오늘 물신주의 문화와 사회는 어떤 악보다도 탐욕을 더 조장한다. 신자들은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을 건성으로 듣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한다. 재물과 이 세상의 소유를 늘여나가는 생활이 주는 낙을 경계해 나가야 한다. 신자는 먼저 이 땅의 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우선하여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자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돈과 권력이 많으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될 수 있다는 사도의 가르침을 무겁게 새겨야 한다.(딤전 6:10-11) 돈과 권력 때문에 방자해져서 하나님보다도 그것을 더 의지하는 삶을 사는 것보다는, 조금 모자라게 살더라도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맛보며 사는 삶이 훨씬 복됨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이 사회는 ‘부자가 되어라’고 늘 권하지만 우리는 좀 덜 쓰고 좀 덜 소유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해 부요하고 이웃에 대해 후한, 그런 풍요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새해는 소유를 늘이는 것에 치우치지 않고, 단순하게 살고 덜 쓰면서, 자족하고 감사하며 가진 것으로 더 나누는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고 애써야 할 것이다.

신원하 l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와 고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칼빈신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석사(Th. M.)와 보스톤 대학에서 사회윤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Ph. D.) 저서로는 『전쟁과 정치』,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 『가난과 부요의 저편』, 『시대의 분별과 윤리적 선택』 등이 있으며, 지금은 천안에 있는 고신대 신대원 교수이면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신학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글쓴이 / 신원하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6) 나태(Sloth, Acedia 懶怠): 정오의 마귀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6)
나태(Sloth, Acedia 懶怠): 정오의 마귀
새해가 되었다. 각종 새해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많다. “올해는 헬스클럽에 규칙적으로 나가야지”, “다이어트해서 10kg을 빼야지”, “어학공부 열심히 해야지”, “새벽기도 해야지” 등등. 그러나 대개 이런 계획은 실패하곤 한다. 게으름이라는 암초가 군데군데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웬디 와서스타인(Wendy Wasserstein)은 2000년대 초엽에 쓴 책에서 이런 결심과 계획은 ‘성취하기도 어렵지만 성취한다 해도 생각만큼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했다. 성취감보다도 오히려 그 과정 가운데 바동거리며 살거나, 쫓기듯 지내게 되고, 마음에 평화를 잃어버려 내몰리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와서스타인은, 사람들이 자기 계발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부지런히 일에 내몰리며 살아가지만 그 결과가 행복보다는 도리어 삶의 피폐함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21세기 사람들이 좀 더 풍요로운 삶,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이제부터라도 좀 더 게으른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게으른 생활을 통해 만족스런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제창하였다. 웰빙(Well Being)족, 다운시프터(Downshifter: 시골로 낙향, 일은 덜 해도 행복한 삶을 추구)족, 슬로비(Slobbie = Slow But Better Working people: 천천히 일하면서도 출세보다 가정생활을 중시)족 등의 새로운 삶의 형태와 함께, 게으름을 더욱 즐기고 그것에 더 관용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현대 문화 속에서 점점 더 높아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회 전통은 게으름에 대해 관용적이지 않다. 단지 좀 쉬는 것, 좀 여유를 갖는 것에 그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의 교부들과 특히 사막 수도사들은 게으름을 ‘대죄’의 하나로 취급할 정도로 경계했다. 성 베네딕트는 게으름을 일컬어 “영혼의 원수”라고 했다. 그는 수도사들이 게으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매일 노동을 해야 하고 정해진 시각에 함께 모여 경전읽기(lectio divina)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근면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게으름을 영적인 삶에 치명적인 독으로 보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단절되는 상태로 이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게을러지면 영적인 생활에 느슨해지고 결국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무뎌지게 마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가를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주장과 생각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느릿함을 넘어 무덤덤으로: 무의욕, 무감동, 무활동
나태라는 영어 단어 슬롯(sloth)은 나무늘보의 이름이기도 하다. 나무늘보는 중남미에 서식하는 것으로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가능한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동물이다. 움직이더라도 최소한으로, 꼭 필요한 만큼만 천천히 움직인다. 이처럼 나태라 하면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버릇”이 연상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나태를 몸이 좀 게으른 것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느긋한 습관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청소를 한 주에 한번 하느냐 마느냐의 차원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곱 대죄의 하나로 살펴보려는 ‘나태’라는 것은 그보다는 훨씬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나태는 어떤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없는 심각한 무기력과 무능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히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다분히 영혼의 무기력이고 곤고함이라 할 수 있다.
나태라는 의미의 슬롯(sloth)과 함께 쓰이는 어시디어(acedia)라는 말은 라틴어 아카디아에서 왔다. 이것은 또 헬라어 아케디아(akedia)에서 왔는데, 아케디아는 어떤 것에 대해 관심(kedos)이 없는 것, 즉 무관심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나태란 단순히 몸이 굼뜨고 행동이 느린 것과는 차원이 다른 도덕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중요한 일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으니 자연히 몸도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태의 대표적 특징은 ‘무활동’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마음이 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사에 감동도 없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무감동과 무의욕이 나태의 또 다른 특징이다. 새해가 되어도 뭔가 새로운 결심을 하거나 해보려는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아름다운 산과 호수를 보고도 마음에 별 감동이 없다. 마음이 무뎌져 있다는 것이다. 갑자기 사고를 당해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 처하게 된 친구의 소식을 들어도 별로 놀라지도 않고 마음이 아프지도 않다. 추운 겨울이 지난 뒤 갓 피기 시작한 노란 개나리와 하얀 매화를 보아도 별 감흥이 없다. 그렇다면 이는 심령이 거의 마비되었다는 것이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 누려온 아름다운 산하가 대규모 공사에 파헤쳐지고 유린되어도 분노하려는 마음이 없고, 선한 미담이 들리고 주위 사람들이 열심히 참여해도 자신은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이것은 거의 마비된 의지와 병적인 무활동의 상태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주위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자신은 가담하지 않고 그저 의자에 앉아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다. 이런 나태의 성격과 상태에 대해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L. Sayers)는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묘사했다. 

Sloth is the sin that believes in nothing, that care about nothing, that engages nothing, that sees no reason to learn or to grow, that see no purpose in life, that sees no reason to live, and yet lives because there is nothing for which it will die. (나태는 믿는 것도 없고 염려도 없고 다짐도 없고 배우거나 성장할 이유도 없고 인생의 목적도 없고, 살아갈 이유도 없고, 그저 자신이 죽을 이유도 없어서 살아가는 죄이다.)

4세기 수도사 에바그리우스는 나태하게 되면 결국 몸에 증세가 나타나게 된다고 했다. 무력증이 오고, 잠은 자꾸 쏟아지며, 그저 눕고 싶고, 한 군데 두 군데 몸이 아프기 시작하다가, 급기야 신경이 쇠약하게 된다는 것이다. 심해지면 감정과 몸이 마비된 것과 같고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웅크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태한 사람은 살아있기는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생기와 은혜에 대해서도 반응하지 못하는 ‘죽어 있는 자’라 할 수 있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편을 보면 이 게으른 자들은 진흙 창에 허우적거리면서 지낸다. 그들은 지상에 있을 때 자신들은 신선한 공기를 쐬면서도 늘 슬퍼했고 해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음에도 늘 우울했는데, 그것은 자신들 안에 늘 연기가 자욱하게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핑계한다. 이런 자들은 죄에 대해서도 별로 심각하게 느끼지 않고 그래서 회개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에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태는 어떤 악한 것을 ‘행하는 죄’라기 보다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죄’(not sin of commission but of ommission)라는 표현이 딱 알맞다. 마치 초대 소아시아 교회의 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교회와 같이 미지근한 상태이다. 이런 미지근하고 의욕 없는 자는 하나님이 쓰지 않으신다.

새로운 것에의 두려움과 용기 부족 
70-80년대 한국 청년 문화는 ‘분노’와 ‘열정’이란 두 단어로 성격 지을 수 있다. 대학생 청년들은 민주, 자유, 정의, 평등이라는 고상한 가치를 들고 민주사회를 열망하면서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갔고, 심지어 학교를 포기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고, 또 일부는 분신하며 생명까지 던지곤 했다. 무모할 정도로 열정이 있었다. 그러나 군사독재가 물러나고 어느 정도 민주화가 진행되고 경제적으로도 풍요한 사회가 되자 청년 대학생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정의니 평등이니 하는 공공적 덕목과 가치보다는 부자 되기, 성공, 스펙 쌓기, 펀드투자 등에 마음이 기울어 있다. 기독교 청년 문화도 다르지 않는 듯하다. 복음, 진리, 기독교 문화에 대한 열정도 현저히 식었다. 이전에는 IVF, UBF, CCC, 네비게이토 등의 선교단체들이 대학가에 왕성했으나 현재는 힘을 잃고 있다고 한다. 기독 청년들의 열정이 옅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열정을 잃어버리니, 뭔가 목표를 향해 전향적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수비 위주, 이미 갖고 있는 것 누리기, 그리고 굳히려는 태도를 지니기 일쑤다. 좋게 표현하면 욕심이 없고 소박한 삶이지만 그것과는 성격이 다른 소시민적인 삶으로 퇴각하고 움츠려 드는 것이다. 뭔가 도전적이고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고, 쉽고 일상적인 일만 하려고 한다. 그러려니 늘 이유 내지 변명거리를 찾는다. 잠언은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잠 22:13)라고 말한다. 게으른 자는 일반적으로 쉬운 길, 남이 다 닦아 놓은 길을 택하기를 좋아한다. 새 길은 아예 시도조차 하려하지 않는다. 쉬워 보이고 편한 길은 가지만, 힘들고 험한 길은 가려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는 원하지만,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 아는 길, 가본 길, 친구들이 많이 있는 길, 검증된 길을 가려 한다. 나이 40이 넘으면 새로운 것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대신 기존의 방식을 약간 고치거나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 보수적이 되는 것이다. 두려움이다. 진리라면 그것을 보수해야 하지만, 그 외에는 마음을 넓게 열고 진취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는데도 그것이 쉽지 않다. 밴 버드포드(Van Budford)는 사람은 대부분 인생의 하프타임을 갖곤 하지만, 실제로 후반전을 뛰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한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식기를 갖지만, 실제로 삶의 목표나 방향을 재조정하여 새로 출발하기를 머뭇거린다고 한다. 익숙하지 않는 삶을 새롭게 출발하려는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도중 끊임없이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을 되돌아보고 그리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과 같다.

사역에서 벗어난 엘리야, 자기연민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진이 빠지도록 대치하여 결국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한 엘리야는, 이어서 그 선지자들을 다 쳐 죽게 한 역사적인 선지자였다. 그러나 그는 다음날 왕후 이세벨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자 즉시 이스라엘 경계를 넘어 남쪽 유다지방의 광야로 도망했다. 그리고 로뎀나무 아래 누워 하나님께 죽기만을 간구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사역한 대가가, 보상은커녕 살해위협으로 돌아온 것에 그는 절망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기를 간청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내가 주를 위한 열심히 특심했으나…” 엘리야의 이런 모습을 단순히 탈진한 사역자를 향한 연민으로만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그는 자신의 특심한 헌신에 대한 결과로 뜻밖의 위협이 나타난 것에 좌절하고 자신을 연민한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 의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가운데 어려운 일을 당하면 맥이 풀리고 위축된다. 헤쳐 나가지 못하고 좌절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그에 관련한 일에 의욕을 잃게 되면서 점점 그 일에서 물러나게 된다. 많은 수도사들도 이와 유사한 경험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수도 생활에 매일같이 정진했지만 그리스도와 신령한 연합의 신비를 경험하지 못하고 기쁨을 맛보지 못하면,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구나 하는 좌절감에 시달린다. 일반 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특별 새벽기도를 통해 작정하고 새벽을 깨워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하고 선한 열심을 내었지만, 자신의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고, 상황도 나아지지 않는다. 이럴 때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신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응답이 더딤을 견디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은 종종 낙망하면서 의욕을 잃게 된다. 때때로 자신의 가정, 자녀, 또는 생업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치게 되는 경우 낙망과 좌절은 더욱 깊어지고,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열심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보상 대신 어려움만 더욱 생긴다는 생각에 분노와 자기 연민이 복잡하게 겹치기 때문이다.
사실 어떠한 좌절과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위로와 선하신 인도는 늘 함께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않게 만드는 것이 나태이다. 에바그리우스는 마귀가 이것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 왜 나입니까?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납니까?” 이렇게 거듭 절규하고 분노하는 자는 그나마 낫다. 하나님을 원망하더라도 이런 사람은 적어도 하나님께 향하고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는 하나님을 만나고 위로를 받게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나태에 빠지게 되면 이것을 포기해 버린다. 냉소적이 되면서 더더욱 물러나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없다, 관여하지 않는다, 이 부조리한 세상, 아무렇게나 살아버리자! 이렇게 되고, 기도하지 않는다.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는데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베네딕트 수사요 작가인 캐스린 노리스(Kathleeen Norris)는 ‘나태란 비록 척박한 곳이라도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보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귀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바보 같은 짓’이라고 현혹하면서 나태를 조장한다고 설명했다.
단테에 따르면 ‘나태는 이웃과 주위에 돌아가야 할 분량의 사랑과 관심을 자신에게 돌려 쏟는 것’이다. 이것 역시 매우 적절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나태는 맡겨진 일을 소홀히 하는 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태만히 하는 죄이고, 우리 이웃에 대해 무정한 죄이다. 우리 사회 속에서 약하고 억눌린 자들에 대해 그들이 고통을 받고 있어도 그들을 위로하거나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자기중심적인 삶이 나태의 죄를 유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웃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고 자신을 하나의 종교처럼 만들어 자신으로 관심을 집중시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로뎀나무 아래에서 자기의 특심을 거론하면서 죽기만을 간청한 엘리야의 모습은 나태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정오의 마귀와 “다음에…”
매사에 의욕이 없고 무엇을 새로 시작하거나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삶과 미래에 더 이상 특별한 꿈과 목표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기가 바라보고 나아가는 비전과 목표가 있으면, 그 꿈을 성취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시간을 쪼개 치열하게 살아갈 수 있다. 꿈이 없으면 당연히 치열하게 살 이유도 없다. 그래서 늘 그날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곤 한다. “꼭 지금 해야 할 필요가 있나? 내일하지 뭐! 다음에 하지 뭐!” 그러나 그러다 보면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큰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에바그리우스는 나태는 자꾸 뒤로 미루도록 유혹한다고 했다. 그는 나태를 ‘정오에 찾아오는 마귀(noonday demon)’라고 비유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정오를 전후해서 이 마귀가 집중적으로 찾아온다고 했다. 악마는 나태라는 죄, 악한 사상으로 수도사에게 엄습해서 “해가 중천에 떠서 지지 않고 50시간 동안이나 지속될 것처럼” 속삭이고는, 천천히 쉬엄쉬엄 하라고 유혹한다는 것이다. “그처럼 매일 기도해 봐야 뭐가 달라지나? 세상도 너 자신도 주위도 크게 달라지는 것 없어! 그렇게 지루하고 따분하게 계속 똑 같은 것이나 반복하며 살아갈 건가?”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긴긴 오후에 마귀는 또 이렇게 유혹한다. 기도해야 할 자리, 노동해야 할 자리를 벗어나서 조금 쉬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주위에 돌봐주어야 할, 자비를 베풀고 격려해 주어야 할 사람이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도록 혼미케 한다는 것이다.
마귀는 그렇다면 왜 정오에 찾아오는 것일까? 에바그리우스는 ‘어차피 수도사들은 2시 이후 저녁 먹을 때까지의 시간에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게 되는 경우가 많고, 저녁식사 후 저녁 기도시간 전까지는 식곤증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기에, 마귀는 그 시간에 수도사를 적극적으로 유혹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대신 마귀는 낮 10시부터 2시 사이에 집요하게 유혹하여, 수도사가 있어야할 자리를 이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날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도록 한다는 것이다.
한 시간 미루는 것은 두 시간으로, 두 시간 미루는 것은 내일로 미뤄진다. 이것은 또 다른 내일로 미뤄지면서 결국 목표의식은 완전히 사라진다. 일상이 점점 느슨해지고 마음은 방만해지면서 매번 적절한 시기와 기회를 놓치는 경우로 발전한다. 어느 겨울날 나이아가라 폭포를 향해 떠내려가던 빙판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죽은 동물의 시체가 있었다. 이를 본 독수리가 내려가 얼어붙은 사체를 뜯어 먹고 있었다. 폭포가 다다르기 직전에 날아올라 가려고 생각하며 피하기를 미루고 미룬 결과, 정작 날아올라야 할 때가 되었을 때는 자기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발톱이 빙판에 얼어붙어 아무리 애를 써도 날 수 없게 되었다. 독수리는 결국 그 동물과 함께 폭포에 떨어져 죽고 만다. 날아오르기를 미루다가 시기를 놓쳐 생각지도 못한 결말을 맞게 된 것이다. 다음에 해야지 하고 미루는 것은 종종 이와 유사한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자그마한 일이라도 그날 해야 할 일을 결코 미루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나태는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주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고 경계해야 한다.

목표와 훈련 
이러한 나태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태를 극복하는 첫 걸음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목표’를 확보하고 분명히 하는 것이다. 방향과 도달지점, 즉 ‘과녁’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추구해야할 가치와 성취해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를 정해야 푯대를 향해 달려갈 수 있다. 갈렙은 팔십이 넘은 나이에도 헤브론 땅을 치려는 목표가 있었기에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외쳤고 그 땅의 거민과 싸웠다.
목표가 분명하면 그에 따라 도달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고, 그 다음으로는 교통수단을 정하게 된다. 목표가 없이 그냥 걷는다면 방향을 잃을 수도 길을 잘못 들 수도 있다. 분명한 목표가 있으면, 그리고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고상한 목표를 세워 놓으면, 그것을 향해 나가는 사람의 자세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훈련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유명한 네비케이토 선교회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인 도슨 트로트맨(Dawson Trotman)이 한 말이다. 이것은 영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훌륭한 외과 의사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수련의로서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고 전문의가 되어도 그 분야에서 셀 수 없을 정도의 시술을 반복함으로써 한 분야의 깊이에 이르고 권위자가 되는 것이다. 끊임없는 반복과 훈련 없이, 마음과 머리만으로는 결코 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루아침에 보기 좋고 건강한 몸매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꾸준한 운동을 하고 음식을 절제해야만 한다. 우리의 영성과 경건, 성품도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한 순간의 은혜 체험으로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를 향해 꾸준히 노력하고, 적극적으로 죄와 싸우는 끊임없는 투쟁으로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예상치 않게 당하는 고통의 순간에 봉착했을 때 하나님을 의뢰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은, 이전에 그런 체험이 있던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미 맛보아 안 자, 그래서 그분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힘은 결코 한 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평소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가벼운 감기도 큰 병으로 발전할 때가 있다. 그러나 평소 운동을 많이 하고 꾸준히 건강을 다져온 사람은 면역 체계가 잘 형성되어 바이러스에 더 잘 저항한다. 우리의 경건과 영성도 마찬가지다. 경건의 훈련으로 믿음과 영성의 면역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 단기간에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말씀 묵상, 기도, 금식 등 이 모든 것이 쉬지 않고 계속되어야 할 일이다. 게으름과 타협하지 않도록 경건 훈련을 제도화하고 규칙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건강을 유지하겠다는 목표가 있으면 꾸준히 해야만 한다. 덕도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 아니다. 절제, 용서, 관용, 오래 참음, 그리고 훈련을 통해, 성화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다.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22-4)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골 3:16)고 일상적으로 경건한 삶을 훈련해 나갈 것을 주문했다. 삶에 분명한 목표가 있으면, 더욱 모질게 훈련하게 될 것이다. 믿음의 분량과 비전을 확장하고 목표를 더 높은 데 두며 훈련해야 할 것이다.
나가면서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게으름은 단순히 해야 할 의무를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발견하고 누리는 삶을 팽개치고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인 일, 의로운 일, 도덕적인 일들에 대해 소홀히 하고 꾸물거리고,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유혹에서 자신을 보호해 나가야 한다. 심지어 절망스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은혜 베푸실 것을 바라보고 그 은혜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나태한 자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또 거절하려 한다. 그래서 조금씩 우리 삶을 갊아 먹고 결국 무기력하게 만든다.
게으름은 은밀하게 찾아오기에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길을 걸을 때 큰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드물고 오히려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나태도 방심하는 사이에 자리 잡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특히 깨어있어야 한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에도 결국 정의가 승리한다는 분명한 성경적 진리를 소망하며, 그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 그분의 때에 역사하실 것을 믿는 신앙을 갖고서, 불의한 것을 볼 때 “아니오”라고 분명히 말하고, 불이 났으면 “불이야” 소리쳐야 한다. 내가 소리쳐도 효과가 없다는 패배적인 생각에, 그저 넘기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선을 행하는 것이 당장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 채 피곤만 가중시키는 듯이 보이더라도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두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갈 6:9) 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한 날을 다른 날들보다 낫게 여기거나 혹은 모든 날들을 똑같이 여기거나 관계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매 날이 모두 주께 속한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할 것을 강조했다.(롬 14:5-6)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날과 시간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기로 하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난 해 보다 더 열심히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성실하게 걸어 나가야 할 노릇이다.

신원하 l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와 고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칼빈신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석사(Th. M.)와 보스톤 대학에서 사회윤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Ph. D.) 저서로는 『전쟁과 정치』,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 『가난과 부요의 저편』, 『시대의 분별과 윤리적 선택』 등이 있으며, 지금은 천안에 있는 고신대 신대원 교수이면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신학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글쓴이 / 신원하

죽음에 이르는 일곱가지 죄(5) 탐식(貪食, Gluttony)


죽음에 이르는 일곱가지 죄(5)
탐식(貪食, Gluttony)
음식과 먹는 것: 건강과 몸매를 넘어, 정치와 종교의 문제
선진사회에서 꾸준히 잘 팔리는 책은 요리와 다이어트에 관한 책들이다. 이 사실은 의식주 문제가 해결된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먹고 찐 살을 빼는 일이 주요한 관심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시사한다. 20세기 들어 과학기술과 농축산 기술이 획기적으로 진보하면서 사람들은 생존과 기아의 위협에서 상당히 벗어나게 되었다. 대량으로 식량이 생산되기 시작하였고, 거대한 자본과 결탁되면서 음식은 진화하면서 상업화되어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대형 마트와 시장에는 먹을 것들이 가득 쌓여있다. 음식점과 외식 산업은 번성하여 구석구석 자리를 잡고 있다. 경제적 능력이 된다면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선진국가의 사람들은 음식과 먹는 것을 즐거움만이 아닌 두려움과 불안으로 대하게 되었다. 비만과 각종 성인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성인 가운데 10명중 9명 이상은 음식을 살 때나 먹을 때마다 비만을 의식하고 있다. 패스트푸드를 즐겨 소비하는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과 어린이들은 햄버거와 탄산음료로 말미암는 생계형 혹은 특수형 비만이 늘어나고 있다.1) 음식이 풍요로운 사회에서 음식에 대한 새로운 스트레스와 집착이 생기게 된 것이며, 세대와 계층을 초월하여 비만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그래서 다이어트 책은 이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리는 책이 되었고, 다이어트 산업과 몸을 관리하는 헬스클럽 사업은 융성하는 사업이 되었다. 음식과 이에 연계된 비만, 건강과 같은 문제는 어떤 이슈보다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가 되어있다. 
현대 선진 사회에서 음식은 이미 사회 정치적인 문제이다. 음식 및 그와 연관된 여러 문제들은 관련된 사람의 신분 및 사회적 관계를 드러내 주는 하나의 지표이기도 하다. 무엇을 먹느냐, 누구와 먹고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계층과 성향이 어느 정도 파악되고 평가되어질 수 있다. “어떤 드물고 희귀한 음식을 먹느냐?”, “어떤 희소한 고급 와인을 마시느냐?”, “어떤 레스토랑을 출입하느냐?”하는 것은 그 사람의 경제적 상태와 신분을 나타내 주는 한 지표가 된다. 또 “누구와 먹느냐?” “유력자의 파티에 초대를 받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회적 정치적 관계와 지향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식사와 식탁은 우정, 권력, 계층을 나타내 주는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울러 이것은 종교적이고도 도덕적인 성격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서방 사회는 역사적으로 음식과 먹는 것을 다분히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에서 취급하고 가르쳐왔다. 하버드 대학의 교수인 콜스(Coles)도 음식에 대한 태도와 현상은 정서적 심리적 차원을 넘어 도덕적이고 종교적 지향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화답한바 있다.2) 이것은 자연과 이웃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태도를 반영하는 성격을 띤다는 의미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회는 이것을 종교적 도덕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가르쳐왔다. 

음식과 탐식에 관련된 성경의 인물과 사건 
‘탐식’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거의 언급이 되지 않는 단어이다. 그러나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관한 기사와 교훈들 그리고 탐식의 예는 성경에서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범죄도 먹지 말라던 금단의 과일을 먹으라는 사탄의 유혹에서 시작되었다. 아담은 유혹을 이기지 못해 그것을 먹고 낙원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사탄의 유혹을 거부함으로서 이를 물리쳤다.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범죄들은 먹는 것과 연관된 것들이 많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어야할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이 있었다. 제사장들과 거룩한 일을 맡은 자들은 더욱 그러했다. 창세기를 보면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여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 인물들로서 노아, 롯 그리고 에서가 기록되어 있다.3) 술에 취해 벌거벗은 수치스런 모습으로 잠을 잤던 노아, 대취하여 정신이 혼미해져 자기가 딸들과 함께 자는 줄 알지 못했던 롯, 그리고 순간의 허기를 면하기 위해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가 하나님의 복을 잃어버리고 슬피 울던 에서가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밖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직접 공급해 주신 만나를 먹었고, 그것을 먹으면서도 고기를 달라고 불평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입에 문 채 죽게 된 것도 모두 탐식과 관련된 비참한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성경은 음식과 관련하여 복과 사랑과 교제의 아름다운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다음의 일들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던 5천 명의 무리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될 때 허기가 질까 연민하여 오병이어로 그들을 먹이셨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떡과 포도주로 애찬을 나누며 이것을 통해 자신을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 부활하신 뒤 예수는 새벽에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를 구워 드셨다. 말씀이 흥왕하던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서로 떡을 떼며 애찬을 나누었다. 고린도 교회는 여유 있는 신자들이 먹을 것을 많이 가져와서 가난한 성도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떡과 사랑을 나누었다. 
성경에는 아울러 윤리적 명령을 통해 직접적으로 교훈하기도 한다. 구약에는 잠언 23장이 대표적인 것이고 신약에도 복음서와 서신서를 통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마 4:4; 6:25; 7:18-9; 롬 14:3; 고전 8:8; 골 2:23; 빌 3:19; 딤전 4:2-4) 특히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 “배(belly)를 자기의 신”(빌 3:18)으로 삼는 자가 있다고 하면서 이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라고 경고했다. 또 바울은 로마서 16장 18절에 이런 자들에 대해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배를 섬기는 자”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로서 이들과는 달리 살아야 할 것을 권하고, 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즉각 반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쳤다. 

사막 수도사들의 가르침 
초대 교회 교부들은 음식의 양면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대체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통해 즐거움을 얻으려는 시도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초대 교부들의 이런 태도는 성경의 영향도 있지만 당시의 사회문화적 요소도 크게 작용했다. 그 첫째는 당시 로마사회의 상층사회의 식도락적 향연과 이로 말미암는 사회의 도덕적 기강해이, 그리고 국가의 쇠퇴에 대한 반작용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탐식에 대해 교회가 본격적으로 주목하게 된 것은 4-5세기의 수도원운동과 초기 사막 수도사들의 강력한 가르침에 크게 기인한다. 사회를 떠나 사막으로 수도원으로 은둔해서 산다는 것 자체가 세상의 욕망을 끊고 사는 것인데, 수도사들은 누구보다 육체의 욕구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것의 가장 기초는 먹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이집트의 사막 수도원 원장이었던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 345-399)는 수도사에게 가장 일차적으로 찾아오는 유혹이 탐식이라고 했다.4) 그는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에 넘어가기 쉬운 강한 적이라고 규정했다. 에바그리우스는 마귀는 수도사들에게 금식하거나 소식하다가 몸이 쇠약해진 동료들의 약한 모습을 부각시키며 그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한다고 말했다. 수도사들은 이 두려움 때문에 음식에 신경을 쓰게 되고 그것을 챙겨먹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식사시간 이전에도 가서 먹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음식이 넉넉하지 못했던 당시 시대상황과 수도원 생활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불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먹는 것도 탐식이라고 생각했다.
에바그리우스의 제자인 존 카시안(John Cassian, ca. 360-435)도 수도사들이 가장 먼저 직면하고 싸워가야 할 것을 탐식으로 생각했다. 그는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한 첫 단계인 출애굽으로 비유했다.5) 탐식의 악덕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서는 결코 영적인 싸움과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보았다.
카시안은 좀 더 구체적으로 탐식을 규정하길, ‘수도사들이 공동으로 함께 하는 식사시간 전에 먹는 것’, ‘먹고 있는 음식에 대한 음미와 의식 없이 게걸스럽게 먹는 것’, 그리고 ‘어떤 특정한 또는 귀한 음식만을 찾아 먹으려는 것’ 등을 들면서 이를 엄격히 금했다.
성 베네딕트(St. Benedict, ca. 480-ca. 543)도 수도사들이 지켜야 할 73개 규칙 중 먹는 것에 관련된 규칙을 3개항으로 무겁게 다루었다.6) 수도사는 하루 1파운드의 식사를 한다. 식사 회수는 2회를 넘어서는 안 된다. 고된 일을 한때에는 수도원장의 판단에 따라 음식을 추가할 수 있지만 이것도 결코 배가 부를 정도의 많은 양을 먹어서는 안 된다. 그가 이렇게 한때에 “방탕함으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한 것도 주님의 말씀(눅 21:34)을 판단사에게 적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에 탐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다운 삶과 배치되는 것으로 간주했기에, 그는 이 탐식에 엄격한 규칙을 적용했다.

다섯 가지 탐식의 유형 
초대 교황으로 불리는 그레고리는 탐식은 다섯 형태로 위장하여 유혹한다고 말했다.7)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도 이 분류를 그대로 따랐고 이를 좀 더 자세히 강해했다.
첫째, 급하게 먹는 것이다.(praepropere, too soon, too hastily)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먹을 것을 기대하며, 또 식사할 시간을 앞두고, 기다리지를 못하는 것이다. 식사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식욕이 동하면 그 시간을 기다리는 마음에 자신이 사로잡혀 급급하고 때론 참지 못해 먼저 먹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아주 빨리(fast) 먹는 것, 즉 속식(速食)하는 것이다. 입안에 든 음식을 몇 번 씹기도 전에 꿀꺽 삼켜버리고 또 음식을 집어 입에 넣는 것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음식을 대하면서 감사하지 못한다. 음식과 그것을 식탁에 오르게까지 해준 자들에 대해 생각할 마음의 겨를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게걸스럽게 먹는 것이다.(ardenter, too eagerly, too ravenously) 이는 몹시 굶주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먹는 것을 말한다. 공동식사를 할 때 자기가 원하는 맛있는 것을 더 먹고자 할 때, 대표적으로 이런 행동이 나타나곤 한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더 가져가기 전에 자신이 그것을 더 먹기 위해 허겁지겁 먹어버린다. 현대적 맥락의 뷔페식 식사에 적용한다면, 처음 가게 될 때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득 담아오는 것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다음에 갈 때 그것이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이 사람에게서 절제하기란 쉽지가 않다. 이미 습관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남을 생각할 수 있는 배려와 절제의 미덕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셋째, 많이 먹는 것 즉 과식(過食)하는 것이다.(nimis, too much, too excessively) 허기가 사라질 만큼 먹었지만 더 먹고 싶은 욕구를 물리치지 못해 또 먹는 것이다. 몸이 요구할 때 사람들은 그 요구를 통제하지 못하고 그 요구대로 따르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이것을 가리켜 활동하기에 적당한 분량의 음식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유형이라고 설명한다.8) 현대 사회에서 뷔페음식은 이런 것을 겨냥하는 대표적인 음식점이다. 대중적인 뷔페 음식점 간판에 “무한정 식사-당신이 먹을 수 있을 만큼(All you can eat)”이라는 문구는 이 유형을 겨냥한 상업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넷째, 까다롭게 먹는 것 소위 미식(美食)하는 것이다.(studiose, too daintly, too fastidiously) 이는 자신의 기호에 딱 맞는 상태나 그렇게 요리된 음식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그레고리가 말하는 이의 대표적인 경우는 C. S. 루이스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예를 든 한 유형이 적당하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은 잘 우려낸 홍차 한 잔, 제대로 익힌 달걀 하나, 그리고 적당하게 구운 빵 한 조각에 불과한데 문제는 이렇게 간단한 음식을 제대로 해내는 사람이 없다.” 이런 불평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음식은 값도 싸고 양도 많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9) 
다섯째, 호화로운 식사(豪食)를 의미한다.(laute, too sumptuously, too luxuriously) 이것은 식단이 적절히 배합되고 세련되게 진열된 정찬, 잘 선택된 메뉴, 아늑한 분위기, 장소 등의 여러 조건을 갖춘 상태에서 그런 식사를 고집하는 것이다. 이것은 음식과 아울러 정서적인 만족감(satiety)을 중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자들과 상류층 사람들이 즐기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로마 사회의 귀족들의 호사스런 연회가 이에 대한 대표적인 유형이다.
그레고리의 다섯 가지 유형의 탐식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시 두 성격의 범주로 구분하여 정리한다. 그는 앞의 셋은 어떻게 먹는 것의 범주와 뒤의 둘은 무엇을 먹는 것의 범주에 속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육신의 욕망에 따라 휘둘리는 탐식을 이기지 못하면 영적 싸움에 나갈 수도 없다고 하면서 이것을 일종의 영적 전투의 일환으로 가르친 점에서 이전의 수도사들과 같은 입장이다. 그러나 그레고리는 지나치게 멀리하는 것도 문제가 많음을 경계하였다. 탐식이 수다스러움 같은 다른 죄들을 낳는 것처럼 음식에 금욕적인 생활은 자칫 더 큰 죄인 교만이나 또는 견딜 수 없이 안절부절 하는 부덕을 낳게 됨을 그는 경고했다. 따라서 그는 신자들에게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도록 자신을 훈련해 나가야 함을 가르쳤다.

탐식이 왜 종교적 문제가 되는가?
이제 탐식에 대해 신학적으로 정리할 차례이다. 음식을 통해 즐거움을 조금 과하게 취하는 탐식이 왜 그토록 신학자들과 수도사들로부터 대죄로 취급받았을까? 그레고리와 아퀴나스는 탐식을 여러 유형으로 나누었지만, 사실 어느 정도 호화로운 음식을 먹느냐, 얼마나 많이 먹느냐 하는 기준과 차원에서 탐식을 설명하고 논의하는 것은 탐식의 본질을 정의하는데 핵심적인 질문이라 할 수 없다.
사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먹느냐, 어떤 음식을 먹느냐 하는 것은 사람의 육체, 건강, 나이, 문화, 계층 등에 따라 같을 수가 없다. 그토록 엄격했던 베네딕트 수도원의 규칙에서도 때로는 노동을 많이 한 경우에는 음식을 더 먹을 수 있도록 했고, 어른들은 소년들보다 더 먹는 것을 인정했다.10) 그리고 중세의 도덕주의자들도 어느 정도가 건강을 유지하기에 적당한 양이냐 하는 것에 생각이 서로 달랐다. 육체를 많이 쓰고 또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직업에 있는 사람들은 좀 많이 먹을 수 있는 것이고, 자란 가정의 환경과 배경에 따라 음식을 대하는 성향과 매너에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것은 조금만 관용적인 된다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탐식에 관한 논의의 핵심과 본질은, 과연 자신의 삶이 얼마나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지배받느냐, 먹고 마시는 것에서 오는 낙을 얼마나 추구하고 즐기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탐식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즉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먹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정말 포만감과 흡족감을 얻고자 하는 욕망 내지 마음으로 그것을 먹고 마시느냐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탐식이 지닌 문제의 본질로 본 점이다.11) 실제로 먹고 마시는 것에 우선적이고 또는 큰 가치를 두며 생활하는 사람들은 말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실제 삶으로는 이미 하나님, 하나님 나라, 그의 의, 그리고 교회와 이웃 등의 더 궁극적인 가치와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탐식자들은 신령한 것을 좀 희생하더라도 먹을 것을 기어이 입에 넣고 그것을 통해 삶의 낙을 누리고 보상을 받고자 한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교회가 탐식을 죄로 보는 것이다.12) 탐식자들의 관심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 결국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탐식을 죄로 본 것은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이라고 했다. 이미 탐식을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에 대한 무절제한 식욕(immoderate appetite)”으로 정의한 아퀴나스는 탐식이 죄이냐는 고전적인 질문에, 덕을 선하다고 간주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성의 통제를 따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덕에 반대하는 것은 이성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것이고 그렇기에 죄 라고 답하면서, 무절제한 식욕인 탐식도 이런 근거로 죄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탐식은 또 다른 죄들을 낳게 되므로 그것은 대죄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이것이 인간의 생존 욕구에서 말미암는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죄(venial sin)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의도적으로 이성으로 제어되기 힘들 정도로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거의 우상숭배와 같은 수준의 행동과 삶을 방불하게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탐식자는 하나님의 자비에서 끊어질 수도 있게 되고 용서받기 힘든 죄(mortal sin)로 변할 소지도 있다고 아퀴나스는 주장한다.

몸매 숭배: 건강과 성적 어필
종교개혁으로 인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이 약화되었지만 개신교회도 탐식에 대해 관용적인 것은 아니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세상 것에 대한 절제와 금욕을 강조했다. 칼빈은 제네바 시절에 위정자들의 식문화까지 제한을 가하는 법을 만들만큼 비교적 엄격한 태도를 유지했다. 근대에 이르러 사회에 대한 종교의 영향이 줄어들면서, 사람들은 현 세상에서 땀 흘린 노동의 대가로 얻는 정당한 부와 그로 말미암는 식탁의 풍요함도 인생이 누릴 수 있는 복과 즐거움으로 생각했다. 통통한 몸은 부요함의 표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먹고 즐기는 것에 훨씬 관대해지고 자유롭게 되었다. 개신교회도 교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현대에 이르러 이에 대해서는 관용적이 되어 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시각은 거의 새로운 차원을 맞이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음식을 건강, 장수의 차원에서 보기 시작하면서 비만과 각종 성인병의 원인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음식, 먹는 것, 그리고 탐식에 대한 관심과 논의는 거의 달라질 만큼 큰 변화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탐식의 유형이 이전과는 획기적으로 달라졌다.
이전처럼 그냥 음식을 편하게 먹을 수 없게 되었고 음식을 먹고 구입하는 것에 대해 신경이 아주 많이 쓰게 되었다. 칼로리가 낮은 음식, 저지방 식품, 설탕이 없으면서도 단맛이 나는 음식, 카페인이 없고 칼로리가 낮은 탄산음료 등을 생산하게 되고, 또 이것을 찾고 먹고 마시는 것이 트렌드가 되어 왔다. 그리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은 지방 없는(fat-free) 음식, 건강음식, 유기농 식품 등을 찾아 구입하며 음식에 각별히 신경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경향에는 특별히 날씬한 여성의 몸매를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의 기준으로 보고 인식하는 시대의 흐름과 그것을 조장하는 상업적인 대중문화의 흐름이 크게 작용하게 된다. 뚱뚱한 사람은 매력이 없는 사람, 시대의 문화에 뒤떨어지는 사람, 심지어 게으른 사람이라는 인식이 조성되어 있다. 심지어 뚱뚱함은 점점 도덕적인 부덕 내지 악으로 취급받는다.
반대로 날씬함은 흠모할만하고 아울러 사람의 호감을 살만한 미덕으로 숭앙받는다. 이 날씬함의 덕을 형성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 각고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신념에 따라 사람들은 날씬한 몸매를 만들기 위해 음식에 집착한다. 몸매가 통통한 사람들이 음식을 적게 먹고 삼가는 것만이 아니다. 평균적인 사람이나 심지어 날씬한 여성이나 사람들까지 살이 찌지 않도록 적게 먹거나 먹는 것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신경을 쓴다. 다이어트 음료, 무지방 식품, 저지방 우유, 유기농 음식 등 신경을 많이 쓰며 살아가고 때로는 살찌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음식을 지나치게 적게 먹거나 거부하고 굶기도 한다. 오늘은 날씬한 사람들도 새로운 유형의 탐식자가 되고 있다. 음식에 집착하고 날씬함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 문화는 모든 사람들을 점점 탐식자로 만들어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미셀 렐위카(Mitchell Lelwica)와 같은 신학자들은 이런 문화적 현상을 해석하면서, 이 문화는 날씬해지는 것을 거의 죄에서 벗어나는 구원받음의 차원으로 보고 있다고 보면서, 이런 “새로운 종교”의 교리에 영향을 받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 때론 굶고 체중을 줄이는 종교적 고행을 해 간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최근 선진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독특하고 특이한 탐식의 양상이다.
그런데 교회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이러한 믿음체계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편성하여 이런 신화와 믿음을 낳는데 직간접적으로 기여해 왔다고 렐위카는 비판한다. 뚱뚱한 여성은 매력 없는 사람, 시대의 문화에 뒤떨어지는 사람, 심지어 게으른 사람으로 간주하는 사회의 인식에 대해 교회는 교정할 생각은커녕 그냥 방관하고 받아들이고 교회도 다이어트 운동에 신학적인 반성과 검토 없이 무비판적으로 대해 왔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그리고 젊은이들이 이 새로운 이단 종교의 희생자들이 되어 가고 있다. 교회는 이에 대한 신학적 진단을 내고 새로운 유형의 탐식에 빠지는 선의의 희생자들을 돕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안내하는 새로운 과제를 수행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책임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금식-육체의 배고픔으로부터 전인의 풍요로
그렇다면 탐식을 극복하고 치유할 방안은 무엇일까? 음식에 대한 엄격한 규정에 따라 음식을 고르고 제한하는 식이요법 내지 다이어트일까? 성경과 기독교 신학자들은 금식(fast)을 그 치유책으로 제공한다.15) 물론 한시적이긴 하지만 음식을 끊는다는 것은 상당히 극한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자기 힘의 근원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이고, 자신 몸의 욕망을 부인한다는 의미이다. 어쩌면 몸의 욕구를 채우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조차도 제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식으로 표현하면 자기를 부인(self-denial)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자기를 살리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종종 금식하는 사건이 나온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개인이나 나라의 중요한 시점에 금식을 택하곤 했다. 자아 충족적 삶을 부인하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린다는 표시로 그의 긍휼을 받으려고 준비한다는 것이 음식을 일시적으로 끊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힘의 원천이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것을 바라는 기도의 다른 표현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사들에게 육체에서 타오르는 욕망을 끄게 하는 방편으로 “배고픔(hunger), 노동(toil), 그리고 독거”(solitude)를 권고했다. 그 중 배고픔은 금식을 의미한다.16) 허기를 채우고자하는 유혹을 물리치고 금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이 주는 힘을 의지하고 대망한다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때론 낮아지고 때론 주린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모세는 이미 주석한 바 있다.(신 8:3)
기독교회에서 음식과 관련된 중요한 상징적인 두 행사는 금식과 성찬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방편으로 금식했다. 그리고 성찬을 통해 떡과 포도주로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피부 가까이 받아들여 왔다.17) 초대교회 때부터 이것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났던 신앙생활의 핵심 구성요소였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신자들은 절기에 따라 함께 금식을 하고 이어서 함께 애찬을 나누었다. 대림절과 사순절에, 성탄과 부활의 축제를 앞둔 상태에서 성도들은 모두 함께 금식을 한다. 금식은 축제가 임하기 위한 준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금식은 자기를 부인하고 비움으로 그리스도와 부활의 주를 맞이하고 대망하는 준비의 표현이다. 이것은 악한 영을 쫓아내고 마음을 정화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였다. 이 금식이 있고 나면 이어 축제일에 교회적으로 성도들이 모두 함께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었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금식과 축제는 기독교인의 중요한 리듬이라고 표현했다.
금식은 육체를 비우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대망하고 기대하는 표현이고 방편이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조금씩 맛보아 알아갈 수 있게 된다.(시 34:8) 신령한 양식을 맛보고 즐기고 그것으로 자신의 궁극적인 허기를 달래어 갈 수 있다. 신령한 양식으로 자신이 채워지게 되면 육체의 양식을 통해 쾌락과 즐거움을 얻는 것에 대해 조금씩 자유로워지게 된다. 크리프트(Peter Kreeft) 교수는 탐식의 죄를 극복하고 치유하려면 탐식 그 자체에 집중해서는 해결되기 어렵다고 하면서 그 이유는 그것은 일종의 중독과 같은 죄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그는 추상적이고 무책임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그것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이 진정한 기쁨, 충족, 만족의 근원이심을 깨닫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18) 바로 그 한 방편이 금식이라는 것이다.

자선과 구제: 배고픈 자 돌아보고, 나누어 먹기 
탐식의 죄를 치유하는데 도움이 되는 또 다른 길은 구제와 자선(charity)을 행하고 연습하는 것이다. 수도사들과 그레고리 교황은 탐식에 대해 다루면서 무엇보다 배고파하는 사람과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이 그들에게 돌리는 것 또 돌려주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탐식하게 될 때 사람들은 스스로 마음이 불편하게 되고 자기들이 먹는 것을 줄여서 그것으로 그들에게 나눠줌으로 자선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19) 이것은 크리프트가 분석했듯이 탐식자체에 집중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해결방식이다. 실제로 수도사들은 구제하고 자선을 행하는 일을 수도의 길의 일환으로 삼고 힘썼다. 그들이 몸이 필요로 하는 것 이상 먹지 않는 것을 엄격하게 시행한 것은 자기 통제력을 키우기 위함도 있지만, 자기가 먹을 음식을 줄여서 빈핍으로 고통 받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나눠주려는 목적 때문이기도 했다.
교부들과 수도사들이 금식을 강조했을 때 금식은 이웃을 구제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을 연습하는 좋은 방안으로 그들이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려는 의도와 목적으로 그 만큼 자신의 것을 줄여보라는 것이다. 카시안은 금식은 구제하고 나누는 법을 배우고 익히는 주요한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금식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다른 선한 일을 위한 것이 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된다고 주장했다. 어거스틴도 자기 자신이 먹을 것을 줄이고 또 금식하여서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은 것이고 그것은 굶주린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금식을 구제를 행하는 것과 연결시켜 가르쳤다. 
음식의 유혹을 절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오늘 우리 주위에 여전히 배고픈 이웃들의 고통을 의식해야 할 것이다. 수도사들의 가르침처럼 우리는 가난한 자들과 빵을 함께 나누고 살아가야 한다. 자비를 베푸는 삶은 지금 당장 출발할 수 없다. 잉여 재산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수도사들과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신자들이 금식을 통해서라도 구제했던 것을 기억하고, 구제하고 선을 나누기 위해서 우리가 먹는 것을 줄여가도록 애써야 한다. 

나가면서 
탐식을 극복하는 길에 관해 기독교회가 제시하는 치유책은 일반 사회와 학문이 제시하는 방안과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다이어트, 식이요법, 심리요법이 아니다. 절제를 강조하는 도덕적인 것과도 다르다. 물론 이것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보다도 교회는 금식과 자선의 길을 제시해 왔다. 금식을 통해 자신이 욕망을 부인해 가는 법을 배우고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채움을 받는 길을 알게 된다. 금식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고 또 가난한 이웃에게 자선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여전히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는 현실에서 불필요한 음식을 줄이고 그것으로 나누고 구제하는 것이 기독교회가 탐식을 치유하는 유용한 길로 제시해 온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실제적인 적용으로 삼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새겨봐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을 대할 때마다. 우리의 삶의 존재가 언제나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에서 성찬을 받을 때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매번 음식을 대할 때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방편으로 인식하고 먹을 때마다 감사해야 한다. 매 식사가 성례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음식을 감사함 없이 또 별 의식 없이 대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음식은 나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지만 동시에 다른 이웃과 함께 나눠야할 성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이 어느 때보다 교회와 신자들에게 필요한 때이다.

신원하 l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와 고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칼빈신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석사(Th. M.)와 보스톤 대학에서 사회윤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Ph. D.) 저서로는 『전쟁과 정치』,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 『가난과 부요의 저편』, 『시대의 분별과 윤리적 선택』 등이 있으며, 지금은 천안에 있는 고신대 신대원 교수이면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신학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글쓴이 / 신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