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ly 5, 2012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2) 교만(驕慢): 모든 죄악의 뿌리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2)
교만(驕慢): 모든 죄악의 뿌리
들어가면서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받기를 좋아한다. 탁월한 업적을 성취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주목을 받지 못하면 은근히 섭섭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기분이 좋지 않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주목받으면 힘들고 화가 나기까지 한다. 탁월성을 인정받고 그것 때문에 칭찬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주위 사람의 주목과 인정 여부에 따라 상당히 지배를 받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이것은 자기 이름, 자기 높임 및 교만과 관련된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교만은 기독교 전통에서 인간 불행의 원인으로 간주되어 왔다. 성경은 첫 인간이 범죄도, 언어의 혼잡과 인류의 흩어짐도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한 인간의 교만 때문이었다고 가르친다.(창 11:4) 성서는 실제로 강성해진 나라와 왕이 교만하게 된 결과 패망하게 된 것들을 끊임없이 기록해 두고 있다. 성서는 각종 내러티브, 기도, 시, 사건, 비유뿐만 아니라 도덕적 교훈으로 교만이 직접적으로 패망의 선봉임을 보여주고 가르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교만의 악과 죄를 되풀이해오고 있는 불행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 교만의 매커니즘은 인간과 인간사회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인간의 유한성과 초월성 그리고 교만
현대 신학자 중 라인홀드 니버는 교만을 인간 존재가 지닌 이중적 성격과 연결시켜 설명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니버에 따르면 인간은 “유한함,” “한계,” 그리고 “불충분성”(insufficiency)의 성격을 지닌 피조물이다.1)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하나님과 소통하고 인간의 유한함을 초월하는 영원, 불멸에 대한 의식과 조명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영혼을 소유한 자로서 이성 지식을 지니고 자기 결정의 힘과 육신의 유한함을 초월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capacity)을 지닌 존재이다.2) 즉 인간은 피조물로서의 유한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자기 초월의 능력을 소유한 존재라는 것이다. 
니버는 인간의 이런 이중성이 불안(anxiety)의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유한과 불충분성으로 불안전(insecurity)감을 갖고 불안(anxiety)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두 가지 가능한 선택이 있는데, 그 첫째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을 완전히 의탁함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 것이다. 다른 방향은 자신이 지닌 자기 초월의 힘을 확장하여 불안을 스스로 극복하려 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유한함을 벗어나 자신의 운명과 세상을 주관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후자의 방향으로 유혹을 받고 선택하게 되는데, 니버는 이것을 교만으로 설명한다. 그는 교만이 바로 죄의 기원이라 했다. 그런데 니버는 비록 인간의 이중적 성격이 죄의 원인으로 작용될 수 있지만, 결코 필연적인 원인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교만 즉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 위치를 벗어나 자신을 높은 자리로 높이려는 의지 때문에 인간은 범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3)

자기 높임과 하나님을 경시
아퀴나스는 교만을 일곱 대죄론으로 연결하면서 도덕신학의 중요한 주제로 삼은 신학자다. 그는 교만을 “모든 죄의 어머니”라고 보면서, 교만이 다른 죄악들을 낳는 모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이해했다. 이 생각은 6세기 그레고리 교황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레고리는 교만을 “모든 악의 뿌리”요 “모든 죄의 여왕”이라 칭했다.4) 심지어 일곱 대죄들도 교만이라는 해로운 뿌리에서 나오는 자손들이라고 보았다.5) 그는 교만은 영적 전장에 나온 적군의 “대장”으로, 다른 일곱 대죄는 그의 지도를 따르는 장군들로 보았다. 일찍이 4세기 수도사 카시안은 교만은 천사도 대항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물리칠 수 있는 죄라고 평가했는데, 그레고리 역시 오직 그리스도만 교만이 낳은 일곱 대죄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를 구출할 수 있는 대장이라고 간주했다.6) 
그러면 정작 교만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퀴나스는 교만을 “본래의 자신보다 더 자기를 높은 데 놓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의했다. 어거스틴의 생각과 거의 다르지 않다. 어거스틴은 교만은 우뚝 솟고 저명해지고자 하는 욕구(desire for perverse eminence)로 이해했다. 교만은 쉽게 말하면 자기를 다른 사람들 앞에 세우고, 위에 높이는 것이라는 말이다. 단테는 『신곡』(the Divine Comedy)에 등장하는 연옥에 있는 교만한 사람들의 성격을 이와 비슷하게 묘사한다. 그들은 연옥에서 한결같이 무거운 바위를 등에 얹고 생활했는데 이 결과로 등과 허리가 굽어져 영원히 아래만 보며 살게 되었다고 묘사하면서 단테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늘 아래로 내려 보고 산 자들이기에 그런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단테도 교만은 사람들을 자기보다 낮게 보고 자기를 높이는 것의 의미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교만은 결국 하나님을 경시하고 대항하게 만든다. 어거스틴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경멸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7) C.S. 루이스는 교만이란 결국 하나님에 맞서는 악한 마음의 상태라고 이해했다.8) 그렇기에 교만은 하나님께 대항하게 된다. 이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약 4:6; 벧전 5:5)고 말한다. 
이제 이런 패망의 원인이 되는 교만을 경계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 교만이 지닌 몇 가지 특성을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기만, 이웃 비판, 그리고 공동체 파괴
교만은 자신을 부풀려 생각하고 왜곡시켜 이해한다. 교만은 조금만 깨끗하고 선행을 해도 스스로를 도덕적이고 의롭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셨다.(눅 18:9-14) 여기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자기를 기만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을 자세히 묘사한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1-12절) 

감사의 기도라고 하기 보다는 자기의 덕목을 하나님께 각인시키는 보고이다.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을 “자기 의”에 빠져 자신을 부풀려 의로운 자로 생각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기를 기만한 것이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일찍이 인간은 ‘자기 기만’이라는 기제를 가지고 종종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말한 바 있다. 임상심리학자이며 교수인 솔로몬 쉼멜은 이와 관련된 좋은 사례를 소개한다. 어느 날 쉼멜에게 자기보다 못한 동료가 연말인사에서 승진하자 화가 나서 심리적인 불안을 호소하며 찾아온 내담자가 있었다. 쉼멜은 “왜 그 사람보다 당신이 먼저 승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이유를 물었다. 그 내담자는 자신이 그 부서에서 제일 실력있는 자라고 대답했고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쉼멜은 시간을 들여 찬찬히 내담자와 대화하며 분석한 결과 마침내 그 내담자는 자기가 생각한 것처럼 자신이 탁월한 실력을 갖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내담자는 비로소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는 것이다.9) 쉼멜에 따르면 이 사람의 문제의 핵심은 바로 자기를 부풀려 생각한 자기 기만으로써의 교만이었던 것이다.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가 가득한 존재임을 부인하려는 욕구 때문에 스스로를 속이려고 한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는 인간의 이런 악한 동기를 알아야만 스스로를 기만하는 인간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10) 교만한 인간은 자기의 더러운 모습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속인다는 것이다. 성서는 만물보다 거짓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면서 인간의 마음을 속이고 거짓되는 것으로 묘사한다.(렘 17:9) 바울이 분파를 만들어 스스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스스로 속이지 말고 또 그것에 속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도 구약의 메시지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고전 3:13) 
또한 교만한 사람은 자기는 탁월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익숙하게 된다. 자기 기준이 틀릴 수도 있음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자기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견해와 생각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것에는 아주 인색할 수밖에 없다. 바리새인은 그 좋은 예이다. 그는 자신의 기준과 관점에서 세리를 보고 그를 불의한 자로 판단하고 멸시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달랐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자신의 파선된 상태를 알고 주 앞에 얼굴을 감히 들지 못하며 주의 긍휼만을 바라고 기도했던 세리를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교만한 사람은 이중적인 악을 저지르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에게 마땅히 돌려주어야 할 평가를 돌려주지 못하는 잘못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왜곡시켜 부당하게 대하고 멸시하는 잘못이다. 모두 정의에 역행하는 잘못이다. 이렇듯 교만한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일 수밖에 없다. 교만은 공동체 안에서의 상호 공존과 화목을 불가능하게 하는 악이다. 도로디 세이어는 분노, 정욕, 탐식, 나태와 같은 죄를 뜨거운 마음의 죄로 보면서 이것보다 시기와 교만과 같은 냉담한 마음의 죄를 훨씬 파괴적인 죄로 보았다. 그 이유는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냉혹하고 피해를 줌으로써 자기를 사랑하는 비틀어진 형태의 죄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영적인 교만 
일반인들과 달리 기독신자들에게 독특한 교만인 영적인 교만에 대해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레고리 교황은 영적인 교만이 지닌 폐해의 심각성 때문에 이것을 신자들에게 경계할 것으로 가르쳤다. 그는 영적교만이란 마치 화살과 같은 성격을 지녔다고 보았다. 화살을 맞는 사람들은 대개 그것이 언제 어떤 방향에서 날아올지 모르기 마련이다. 이처럼 영적인 교만도 화살처럼 의식하지 못하는 채 날아와 치명적으로 피해를 입힌다는 것이다.11) 
세이어(Dorothy Sayers)는 예수님이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위선을 지적하고 경고한 사실과 이유를 부각한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신학, 전통, 유전으로 인해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레고리는 이러한 영적인 교만은 그 피해가 심각해서 비록 자그마한 악들을 다 피했다하더라도 가장 큰 악을 저지른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화란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는 칼빈주의 전통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고 실제로 “사도적 기독교 복음에 가장 충실한 신학”이라고 여기고 또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런 식의 강력한 표현과 외침은 자칫 다른 신앙과 신학 전통에 있는 사람들에게 교만하게 들리고 승리주의적(triumphalistic) 느낌을 줄 수 있음을 우려했다. 그래서 그는 이 신학에 자부심을 갖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다른 신학전통에 속한 교회들을 판단하거나 또 그들에게 상처와 거부감을 주는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때론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 가운데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깊이 숙고하지 못한 채 진단과 조언을 하는 것은 전형적인 것이다. “기도가 부족해! 기도를 깊이 하면 해결돼!” “하나님이 더 기도하라고 하는 거야.” 이런 말들은 한편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옳은 권고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사람이 기도가 부족해서, 어떤 회개하지 않은 잘못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욥에게 닥쳤던 고난과 그가 당한 고통이 꼭 기도가 부족했기에, 죄를 지었기 때문인 것은 아니었다. 욥의 세 친구는 옳은 말을 했지만, 욥에게 해당되는 적절한 조언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살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부딪히곤 한다. 살아가면서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없다. 불가사의한 것이 있고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마치 자신이 정답을 아는 듯이 조언하는 것을 누구라도 조심해야 한다. 오히려 그 사람의 아픔을 가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그와 함께 아파하면서 고통을 나누려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에겐 하나님 나라의 비밀 곧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관련된 진리를 숨기시고 오히려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나타내신다고 말씀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오묘한 뜻이기 때문이다.(마 11:25-27) 영적으로 교만한 자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데 소외되고 오히려 세상의 미련한 자와 마음이 가난한 자가 그 비밀에 참여하고 알게 된다. 

자기 실상 바로 보기 
그러면 이처럼 자신, 이웃,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엄청난 폐해를 가져오는 죄인 교만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교만에 대응하는 겸손의 덕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겸손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예수님이 팔복에서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이 가난하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불교에서도 겸손을 마음을 낮춘다는 의미의 “하심”(下心)이라 부르면서, 종종 하심을 위해 백팔 배, 삼천 배를 하기도 한다. 높아진 마음을 굴복시키기(屈心) 위한 것이다. 그런데 겸손은 이런 것을 통해서 보다는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12) 감춰지고, 위장되고 부풀려진 모습이 아닌 자신의 실상 즉 부패하고 더럽고 사납고, 사랑이 없고, 시기와 분쟁과 악독이 가득 차 있는 자신을 직시하게 되면 사람들은 절망하게 되고 내세울 것이 없게 된다. 
그런데 과연 사람들이 이런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칼빈은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로 인간은 본성상 교만함으로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판단기준이 되는 세상의 도덕 자체가 크게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와 삶을 볼 때 세상의 기준보다 “덜 악한 것”이 보이면 그것을 “순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13) 또 사람들은 자신의 ‘덜 악함’을 ‘의로움’으로 생각하면서 스스로 만족해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부패한 인간의 “자기 기만”이라고 칼빈은 지적한다.
이런 부패함 때문에 칼빈은 사람들은 거룩하시고 의로운 하나님을 대면하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될 때 자신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14) 

그[하나님]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고 또한 그의 의와 지혜와 권능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완전한가를 생각하며, 또한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따라야 할 표준인 것을 생각하면 그 이전에 거짓으로 정의인 것처럼 뽐내어 우리를 즐겁게 하던 것이 그야말로 추악하고 더러운 것이 되고 말 것이며. 지혜라는 이름으로 인간에게 감동을 주던 것이 지극히 어리석음의 냄새를 풍기게 될 것이며 또 덕스러운 열심의 모습을 보이던 것이 지극히 비참한 무능함으로 드러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과 의를 접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이 비참한 존재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참된 겸손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의 앞에 자신의 더러움이 드러나면 자신은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자로 여긴다. 그에 따라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고 비로소 자기를 낮추게 된다.15)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의는 율법에 드러나 있기에 사람들은 이것에 자신의 실상에 비추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 율법이 마치 거울과 같이 인간의 불의함을 비추어 보여준다는 것이다.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소위 “거룩한 독경”(Lection Divina)을 빠뜨리지 않았다. 수도사들은 눈으로 보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고 귀로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마음에 새기고 묵상하는 일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의식은 수도사 자신들을 점검하게 조명하는 기능을 담담했다고 할 수 있다. 

자기부인과 비움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보게 되면 자신이 달라져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낮추게 된다. 우쭐거리고 제법이라고 생각했던 재능, 솜씨, 지식, 영성 등이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도덕과 자랑거리들이 이젠 부끄러워진다. 자연히 자신의 판단, 사고, 그리고 자신의 신학과 철학도 상대화시키고 내려놓게 된다. 
욥의 친구들은 스스로를 현자로 자처했기에 자기들의 신학으로 욥에게 충고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욥의 특수 상황을 알지 못하면서도 그들은 자기의 정통적 신학에서 욥을 판단하고 권면했다. 욥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자기 판단과 양심으로 볼 때는 이렇게 고난 받을 이유가 없었다. 억울했다. 변호사를 세워서라도 하나님과 법정에서 대면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말씀을 듣고 난 뒤 해소되었다.(욥 39장) 그들은 지혜가 짧고 제한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드디어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꾸중을 받는다. 욥도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는다. 자신의 의, 도덕, 판단, 신학을 내려놓고 회개한다. 
지혜와 지식이 깊고 부요한 하나님 앞에 서보면 비로소 자신의 생각, 지혜가 얕고 자신이 불의한 자임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 들이대던 판단, 비판과 권면을 조심하게 된다. “너는 더 기도해야 해!” “너는 돈에 대한 욕심을 더 버려야 해!” 등 이웃에 대한 이런 판단과 우월적 조언도 삼가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것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면서 그것을 포기하고 비우기 시작하면 그 자리에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가 채워진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친 것이다.(눅 19:14)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비우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게 되고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고 그의 형상을 이루어 가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을 “자기 부인”(sefl-denial)이라고 표현했다.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이라고 칼빈은 이해한다. 라인홀드 니버 역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부인과 포기의 관점에서 이해하기를 좋아했다. 누구보다도 교만한 죄의 심각성을 다루고 경고해왔던 신학자였기에 니버는 철저한 자기 부인의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파악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니버의 설교와 기도에서 이 주제는 아주 비중 있게 취급되었다. 

우리가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읽으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가르쳐 주셨던 주님, 오늘 우리에게 자신을 잃고 포기함으로 거듭난 참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또한 자신을 부인함으로 당신의 나라에서 기억되고 인정받는 은혜를 누리게 하옵소서

바울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겸손의 대표적인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의 케노시스를 제시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이시나,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4-8) 

공동체생활, 가면벗기, 그리고 겸손
이제 마지막으로 겸손을 더 구체적으로 익혀가기 위한 적극적인 길을 공동체 생활을 통해 제안해 볼 것이다. 6세기 수도사 베네딕트는 순종과 겸손을 수도사 영성의 정수로 간주하고 가르쳤다. 그는 73가지 수도사 규율을 만들었고, 겸손을 위한 12걸음도 자세히 다루었다. 그는 수도사들의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하면서 수도원에서 동료들과 함께 규율을 따르고 수도원장의 지도를 받아 생활하는 수도사(cenobites)를 가장 바람직한 수도사로 보았다.16) 대조적으로 누구의 지도를 받지 않고 규율도 없이 자기 원하는 대로 생활하는 수도사(sarabites)를 가장 혐오했다. 겸손의 훈련을 위해서는 공동체 생활이 꼭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신자들은 겸손하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길은 험난하다. 겸손은 단시간에, 혼자서, 신비한 방법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신자들은 공동체 생활을 해보면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알게 된다. 다른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자신이 인내, 관용, 사랑, 섬김과 같은 미덕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깨닫게 되고 점점 자신의 교만을 접게 된다. 교회는 대표적인 신자 공동체이다. 교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자기의 은사를 과신하다간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자기 말하기를 절제해야 하고 좀 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과정에서 신자는 조금씩 온유한 언어, 행동, 관용적 생각, 원만한 의사소통을 형성해 갈 수 있게 된다. 
공동체 생활이 주는 또 다른 유익은 가면을 벗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감추고 위장했던 가면을 쓰고는 되풀이되는 일상을 계속해 나가기 힘들다.17)하루, 이틀, 일년, 이년은 위장하며 지낼 수 있지만 오랫동안은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지속적인 공동체 생활을 하려면 가면을 벗지 않으면 안 된다. 신학자 옥홀름(Dennis Okholm)은 이것을 겸손이라고 했다. 자신을 포장한 외피, 그리고 다른 사람에 의해 포장된 것, 자신이 가린 것, 자기를 부풀려 미화시킨 포장들을 한 겹 두 겹 마지막까지 철저히 벗는 것,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겸손이라는 것이다. 성도의 공동생활은 겸손을 조성하는 훌륭한 훈련장이다. 

나가면서 
기독교 전통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가르쳐왔다. 이러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고 남의 인정을 받고 이름을 내고 싶어 하고 교만의 유혹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만큼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인정을 받는 것이 삶의 큰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교만이 인간 불행의 근원이요 개인과 나라의 패망을 가져오는 근본적인 악이라는 성서적 진리와 역사적 진실을 깊이 되새기고 교만을 대항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교부들과 수도사들도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영적인 전투를 하듯이 교만과 싸워나갈 것을 줄기차게 권고해 왔다. 
자신의 실상을 바로 보는 작업을 교만을 벗어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작업이기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자기가 의롭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는 자라는 사실을 늘 인식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조명해 보아야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꾸준히 비추고 살펴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행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탁월한 은사와 재능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하되 그로 인해 남을 비판하거나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크게 부흥했고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다. 한국교회는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교회는 자고(自高)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노릇이다. 동시에 이런 통계가 우리 교회의 도덕적 무능력과 미약한 대 사회적 영향력의 실상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겸손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와 신자는 교만이 교회와 신자를 병들게 하고 무너뜨리게 하는 근본적인 악임을 더욱 깊이 새기면서, 이전보다 더 겸손하게 자신을 살피고 또 겸손을 연습하고 훈련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신원하 l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와 고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칼빈신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석사(Th. M.)와 보스톤 대학에서 사회윤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Ph. D.) 저서로는 『전쟁과 정치』,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 『가난과 부요의 저편』, 『시대의 분별과 윤리적 선택』 등이 있으며, 지금은 천안에 있는 고신대 신대원 교수이면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신학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글쓴이 / 신원하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