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ly 5, 2012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3) 시기(Envy, 猜忌): 친구가 울 때 웃고, 웃을 때 우는 죄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3)
시기(Envy, 猜忌): 친구가 울 때 웃고, 웃을 때 우는 죄
교단 월간지를 펼치자 신학교 때 아주 친하게 지냈던 친구 스미스 목사에 관한 기사가 큼지막하게 실려 있다. 도시교회 부목사로 몇 년 일하다가 중소도시에서 1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하여 사역했는데, 몇 해 되지 않아서 그 교회가 급속도로 또한 모범적으로 부흥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5년 만에 500여 명이 회집하고, 2부 예배를 드리고, 각종 주중모임이 활발하고, 근래 예배당도 증축하면서 교회가 점점 더 흥왕 한다는 내용이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친구의 사진과 아름다운 신축 교회당 건물 사진을 보는 순간 머리가 멍해지더니 기사를 읽어 내려가는 내내 가슴이 조여 오면서 숨을 쉴 수 없게 되었다. 책을 덮고 한동안 묘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가슴이 싸늘해지고 쓰라렸다. 내가 이렇게 시기에 사로잡힐 줄 나도 몰랐다.

미국 목사들이 많이 읽는 어느 잡지에 실린 ‘비컨’목사의 고백이다. 그는 친구에 대한 기사를 접했을 때, 10년 동안 열심히 목회했지만 아직도 100명을 넘어서지 못하는 자신의 목회와 처지가 그렇게 초라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고 실토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본능적으로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쓰라리게 떠 올린다”고 했는데 이 경우 딱 해당하는 말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던가. 가까운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는 일은 결코 유쾌하거나 축하할 일이 못 되며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이것이 시기이다. 

가장 추하고 악한 죄 
토마스 아퀴나스는 시기에 대해 정의하기를 다른 사람의 불행에 기뻐하고, 행운에 애통하는 것이라 했다.1) 시기를 “가장 더러운 죄”, 혹은 “가장 악한 죄”라고 일컫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고 불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시기는 이웃의 추락을 도모하고 이웃의 행복을 무너뜨리려는 것으로 결국 나아간다. 그래서 도로디 세이어는 “시기란 자기 사랑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악”이라 했다. 자기를 만족시키고 사랑하는 길이라면 그것이 다른 사람의 불행이 되더라도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은밀하게 친구의 추락을 도모하기까지 한다. 이런 성격을 지닌 시기는 비록 ‘대죄’의 목록에서 교만 다음에 위치하지만, 그 악함에 있어서는 교만에 뒤쳐지지 않는다. 교만과 달리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그 점 때문에 교만 다음에 배치되었을 뿐이다. 남의 불행에 기뻐하고 그래서 그것을 은밀히 도모하는 시기는, 그래서 죄질이 가장 추하고 악하다. 이 시기가 작동하게 되면 어떤 집단도 살아남기 힘들다. 사회든 교회든, 그곳에 미움과 불화와 싸움이 생기고, 종국에는 분열로 귀착하게 되어있다.

녹색 눈의 괴물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궁정 작곡가 겸 지휘자인 살리에리가 궁정 홀에 들어서던 순간 하프시코드로 천재적인 음률을 연주하던 모차르트를 보던 그의 표정과 그 눈을 기억하는가? 놀라움과 쓰라린 감정과 부러움이 한데 버무려진 우울한 눈이었다. 그 눈에서는 요리를 앞둔 식탐가의 눈에서 볼 수 있는 광채나, 교만한 자의 눈에서 볼 수 있는 자신감 넘친 기운은 발견할 수 없다. 오로지 우울함과 쓰라림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시기(Envy)의 어원은 라틴어 ‘인비디아(invidia)’로서 ‘자세히 본다’는 의미이다. 시기는 보는 것, 즉 눈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친구, 상사의 칭찬을 듣고 활짝 웃는 동료, 예쁜 부인과 함께 고급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친구를 ‘보는 것’으로부터 시기는 시작된다.
시기는 종종 녹색 눈으로 묘사된다. 셰익스피어가 시기를 이렇게 묘사한 후 이 표현은 시기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녹색 눈으로 시기를 나타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초록은 덜 익은 것, 즉 먹으면 속을 쓰리게 하는 과일의 색이다. 덜 익은 과일처럼 시기는 속을 쓰리게 하기에 녹색으로 등치된 것이다. 둘째, 고양이가 쥐를 앞에 두고 골려가면서 잡아먹으려 할 때, 그 눈빛이 녹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시기는 대상을 결국 파멸시키는 것이기에 고양이의 눈 색깔인 초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시기는 “녹색 눈을 가진 괴물(green-eyed monster)”로 불리기도 한다. 
성경도 시기를 눈과 관련시키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블레셋과의 전쟁에 대승하며 개선장군으로 입성하는 다윗, 그리고 그를 환영하는 백성들의 연호, 그리고 춤추는 여인들의 노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 이 모습을 보는 사울은 걷잡을 수 없는 시기에 사로잡힌다. 자기에게 와야 할 백성들의 관심과 칭찬이 다윗에게로 쏠린 것이다. 사울은 “그날 후로 다윗을 주목하였다(삼상 18:9)”고 한다. 주목에 해당하는 단어인 ‘아인’은 눈을 의미한다. 그런데 새국제번역(NIV) 영어성경은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는 눈”(jealous eye)으로 바라보기를 시작했다고 번역하고 있다.2)
예수님도 시기를 눈과 관련해서 말씀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악한 것들인데 그 중 하나가 “나쁜 눈(aphthalmos paneres)”이다. 그런데 번역본들은 이것을 대부분 “질투(개역개정)”, “시기(NIV, NASV, NRSV)”로 번역했다. 이처럼 구약과 신약 모두 시기를 눈과 연관된 단어를 써서 표현했다는 것은, 시기는 바로 눈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생각을 낳게 해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증세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단테도 시기를 ‘눈으로 짓는 죄’로 묘사했다. 그의 책 신곡에서 시기 죄를 범한 자들은 연옥에서 눈꺼풀이 굵은 철사로 챙챙 꿰매진 채 살고 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에 처해져 있는 것이 그들의 형벌이었다.3) 그들은 눈으로 죄를 지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눈의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질투와는 어떻게 다른가 
시기는 ‘질투’와 비슷한 뜻으로 이해되고, 종종 혼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의미가 다르다. 시기(Envy)의 어원은 라틴어 인비디아(invidia)에서 왔고, 질투(jealousy)는 헬라어 젤로스(zelos)에서 왔다. 고대 헬라 사회는 시기를 ‘프토노스(phthonos)’라는 용어로 질투와 구분한다. 이 두 개념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질투란 내가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느끼는 비애라고 한다면, 시기는 그저 다른 사람이 뭔가를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느끼는 비애이다.4)
질투의 무게 중심은 본인에게 있다. 질투는 라이벌의 잘됨, 성공, 탁월한 업적 때문에 촉발되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내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발생하는 비애의 정서다. 질투와 같은 어원에서 ‘열정’을 의미하는 단어가 파생된다. 어원이 함유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이다. 그래서 질투는 자기도 그것을 갖고자 하는 마음으로 발전되면서,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곤 한다. 다시 말해서 이 감정은 일종의 경쟁심(emulation)과 같은 것이다. “왜 저 사람은 지니고 있는데 나는 갖지 못했을까?” 이런 생각이 “나도 가져야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손에 쥘 수 있을까?” 라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이런 경우의 질투는 악이 아니라 미덕(virtue)이 될 수도 있다. 사실 경쟁(emulation)은 모방(immitation)과 동전의 양면과 같다. 경쟁은 탁월한 사람을 닮아가려고 하는 단계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시기인 프토노스(phthonos)는 무게 중심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 단순히 다른 사람과 집단이 무슨 큰일을 성취하거나 뭔가 소유한 것을 보는 것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왜 저 사람이 저렇게 잘 되었지?”, “그렇게 탁월한 사람도 아닌데…” 이로 말미암아 속이 쓰리고 아픈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악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좋은 것을 갖고 있음을 두고 볼 수 없는, 용납할 수 없는 감정이다. 이점에서 질투와는 분명히 다르다. 질투는 자기에 관련한 것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시기는 늘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에 중심이 옮겨져 있다. 상대의 탁월한 것 때문에 비애를 느끼고, 상태가 몰락하는 것 때문에 행복해 하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시기의 죗값을 치르고 있는 사람이 순례자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지상에 있을 때 늘 내가 지닌 행운을 즐기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비통해 하는 것을 더 즐겼지요.”5) 헬라 사상가들의 글에서도 시기인 프토노스는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점에서 심리학자 슈크(Helmut Schoeck)의 설명은 매우 정확하다고 할 것이다. “시기하는 사람은 탐나는 물건을 갖고 싶어 하지도, 그것을 즐겨하지도 않고 다만 다른 누군가 그것을 갖는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형제의 불행과 자기 행복, 제로섬 게임
시기의 독특성은 주로 그 ‘대상’이 자기와 관계가 없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아주 친숙하고 가까운 자, 즉 같은 직업에 종사하거나 유사한 학력과 나이에 있는 사람이란 점이다. 같은 공간이나 분야에서 일하거나, 익숙하게 알면서 지내는 자들이 시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윌리암 메이(William May)라는 학자는 시기를 “형제에 대해 짓는 죄”라 했다.6)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가인과 사울 왕의 경우를 보면, 바로 곁에 있던 동생 아벨이, 곁에서 연주하며 함께 일하던 다윗이, 각각 시기의 대상이었다. 다른 지역의 선교사가 아니라 같은 지역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끼리 분쟁하고 미워하는 일이 잦은 것도 시기의 이런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동료의 불행을 은근히 즐기는 것은 심리학의 개념인 ‘샤던프로이데(Shadenfreude)’와 아주 유사한 성격이다. 이것은 악의적 기쁨(malicious joy)을 의미하는 것인데, 용어 그대로 친구의 어려움과 역경(Shaden)에 기쁨(Freud)을 느끼는 것이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인간의 이런 정서를 간파하고 다룬 바 있다. 그는 ‘사람은 이웃에 대한 감정에서 이웃이 부당하게 행운을 얻게 된 것에 대해 편치 않는 감정을 갖게 마련’이고, 이 감정을 ‘네메시스(nemesis)’, 즉 ‘의분’이라고 하면서, 이것에 있어서 중용을 지키는 것을 미덕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것이 지나치거나 모자랄 때 악덕이 되는데, 전자는 이웃의 잘됨을 시샘하는 프토노스 즉 시기이고, 후자는 친구의 불행에 대해 아파하지 않거나 혹은 즐기는 ‘에피카이레카키아(epichairekakia)’, 즉 고소해하는 것이다. 에피카이레카키아는 ‘불행‘(kakon)과 ‘즐기는 것’(chaira)으로 구성된 복합어로, 이를 독일어로 직역해서 옮기면 샤덴프로이데(shadenfreude) 그대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처럼 인간이 갖는 이웃의 대한 감정 중에서 고소해 함이 있음을 간파했고 악으로 경계했던 것이다. 시기와 고소해 함의 특징은 친구가 웃는 것만큼 자신은 우울해지고 이웃이 우는 것만큼 자신은 웃는 것이다. 이처럼 시기의 죄에서는 이웃의 행복과 나의 불행, 친구의 불행과 나의 행복이 철저히 제로섬(zero sum) 게임이 되는 것이다. 

잘못된 평등주의
이처럼 시기는 뛰어난 재능, 출중한 성품,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결과적 선 등을 용인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잘못된 평등주의 의식’이 일조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의식을 내세운 나머지 특출한 사람들이 재물과 재화를 많이 누리고 소유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또 생명권과 기본권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는 의미이지, 지적 능력과 예술적 재능 등 각 사람이 지닌 능력과 질이 다 동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들은 능력, 성품, 정서, 지혜 등 다양한 측면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고, 그로 말미암는 결과와 생산성에서 차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지적 능력과 인품은 물론 자기 노력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준 은사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주신 선물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나 바울 사도는 이것을 ‘토기장이의 비유’로 설명한다. 토기장이가 다양한 토기를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들을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각기 다르게 만드시고 각 사람에게 나름의 은사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기는 이것을 불평한다. 접시가 국이 담긴 그릇을 보고 난 뒤, 왜 자기는 국을 담을 수 없느냐고 불평하면서 그것을 만든 주인에게 원망하는 격이다. 이것은 창조자의 주권을 받아들이지 않는 악이다.7) 이것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고유한 재능과 은사를 공평하지 못한 처사라고 부정하는 교만인 셈이다.

선 총량 불변의 법칙 
시기하는 자는 정작 자신이 뭔가 부족하거나 궁핍하기 때문이 아니라, 친구가 번성하고 풍요롭게 지내는 것 때문에 심사가 불편해진다. 자신의 ‘없음’이 아니라 형제의 ‘있음’이 그를 더 힘들게 하는 요소인 셈이다. 내가 박수 받지 못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친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이런 감정에는, 친구가 받는 박수만큼 내게로 올 수 있는 박수가 줄어들거나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정서가 깔려있다. 특정 사회와 분야에서 존재하는 명예, 칭찬, 존경에는 그 총량이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시기하는 자는 어떻게든 친구가 누리는 것을 빼앗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8) 그들은 마치 ‘선 총량 불변의 법칙’을 굳게 믿고 암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은 그들을 그만큼 다급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만들기 일쑤다. 이런 근시안적 견해 즉 선은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생각에서부터 시기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나 그렇지 않다. 어거스틴은 이와 대조되는 사실을 주장한다. 물질적인 것은 나누면 감소하지만 영적인 것은 나누면 더 증가한다. 특별히 영적인 선은 더 그러하다. 그것의 핵심은 사랑이다.9) 이와 대조되는 근시안적 견해를 갖고 있는 시기는 극단에 달하게 되면 피학적(마조키스틱한) 형태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피학적 시기 
사람은 극한 경우에는 자기가 해를 당하더라도 상대의 잘됨을 막거나 행운을 빼앗으려는 ‘피학적인 시기(masochistic envy)’로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유대 전통에 전해오는 설화는 이런 종류의 시기심을 잘 담고 있다. 두 친구가 길을 가다가 왕을 만나게 된다. 이 둘 중 한 사람은 욕심이 많고 다른 친구는 시기심이 많았다. 왕은 두 사람에게 선물로 “만약 너희 중에 한 명이 나에게 요청하면 나는 요청한 대로 그대로 들어 주겠다. 단 조건은, 다른 친구에게는 그 요청한 것의 두 배를 주겠다.” 이렇게 제안했다. 시기심이 많은 친구는 자기가 먼저 요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친구가 두 배로 받게 될 것을 시기했기 때문이었다. 욕심 많은 친구도 먼저 요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차지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결국 눈치를 보다가 욕심 많은 친구가 시기심 많은 자를 보고 먼저 요구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자 이 시기심 많은 친구는 왕에게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임금님, 나의 왼쪽 눈을 빼 주소서!” 자기 눈이 뽑히는 한이 있더라도 친구가 더욱 불행해지는 길을 택한 것이다. 유대계 미국인 심리학자 솔로몬 쉽멜(Solomon Shimmel)이 소개하는 이 유대 민담10)은 극단적인 시기가 취할 수 있는 피학적인 형태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시사해 준다. 이것은 오늘 우리 사회, 심지어 교회에서도 볼 수 있다. 라이벌이 존경받는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자신의 출혈을 감수하면서 이런 일을 자행한다.

다른 대죄와의 연관성- 헛된 영광, 분노, 그리고 나태 
시기는 교만과 헛된 영광(vainglory)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교만한 자는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좋은 차를 타고 삶을 즐기며 호사하는 것을 볼 때, 허영(vainglory)에 차 있는 사람은 평소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박수를 받는 것을 볼 때 속이 더 쓰리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시기는 곧장 미움으로 발전한다’고 말한바 있다. 분노도 대상을 미워하는 마음을 낳지만 그것은 시간을 두고 발전한다. 그러나 시기는 즉각 미움으로 발전한다.11) 시기에 사로잡히면 금방 불편해지고, 얼굴이 일그러지고, 마음이 쓰리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진전된다. 이 점에서 시기는 분노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따라서 시기는 공동체의 하나됨과 화평을 깨트리는 주적이다. 신약에서도 다툼(고전 3:3; 고후 12:20), 분쟁(롬 13:13), 중상, 한담, 수군거림, 미움(딛 3:3; 벧전 2:1), 쓴 마음(bitterness), malice(적의) 등을 시기가 낳는 열매로 묘사한다. 일곱 대죄론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자였던 그레고리 대종은 ‘시기는 바로 미움(hatred)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또 은밀하게 수군거리는 것(whispering)으로 발전되고 나아가 노골적으로 험담과 중상(detraction)을 하는 악을 낳는다’고 보았다. 
시기가 많은 사람이 보이는 또 다른 특징은 기쁨이 없다는 것인데, 실제로 늘 만족하지 못하니 감사가 없고 쉽게 슬퍼하게 된다. 시기는 늘 “왜 나는 저 사람보다 주목을 받지 못하는가?” 등의 불만에 빠져서 기쁨이 사라진다. 그래서 우울해지기 십상이다. 이 우울함은 때로는 낙심으로, 그리고 의욕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시기가 낳는 낙담과 실의, 그리고 이것으로 말미암는 나태는 불타는 질투와 복수심보다 더 파괴적일 수 있다. 심리학자 캡스(Donald Capps)는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아들이 이에 해당하는 유형이라고 말한다. 탕자의 형은 돌아온 동생이 받은 터무니없는 환대를 보고 아버지와 집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싶은 의욕이 사라지게 되었다.12) 이런 면에서 시기로 말미암는 또 하나의 부산물은 자포자기, 의욕상실 그리고 나태한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받은 복과 은사 세어 보기 
그러면 이렇게 생활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악인 시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시기하는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을 쳐다본다. 그래서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만 있는 덕목과 달란트를 갖고 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눈을 자기에게로 돌려야 한다. 그리고 자기 안에 파묻혀 있는 보석과 같은 하나님이 주신 복과 은사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내고 갈고 닦아야 한다.13)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합당하고 족한 은혜와 은사를 주셨다. 물질과 지식과 명예가 모두 다 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다른 것에서 오는 잔잔한 보람과 행복과 만족을 누리고 사는 자들이 있다. 누구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은 그저 크게 보일 뿐이지, 실상은 행복을 주는 보물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울은 누구보다 준수한 용모를 가졌고, 겸손한 성품을 가졌었다. 그런 그가 다윗만을 주목하고 의식하게 되면서부터, 자신이 지닌 것에 대한 감사가 사라지고 삶이 우울해졌다. 자신이 받은 것도 누구 못지않게 귀하고 컸는데도 말이다. 
1970년대의 흑인 민권 운동가였던 말콤 엑스는, 흑인의 진정한 해방과 인권신장을 원한다면 흑인 스스로가 ‘흰 것은 원수이고 추악하다’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검은 것이 아름답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시각과 의식이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인이 누리는 것을 보고 불공평하다고 불평하거나, 백인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에만 머무르는 한, 결코 흑인은 진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자기들이 가진 것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자부심을 갖고 발전시키는 것이 시기를 극복하고 관계를 발전시키는 첫 단계이다.
이보다도 더 높은 수준은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면서도 감사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을 부족한 그대로 용납하고 사랑하고 계신다는 믿음에서 말미암는다. 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감사할 수 없을 만한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한다. 애통하는 것은 불행일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되다고 말한다. 고통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찾게 된 자들은 결국 그것을 통해 주의 위로를 받게 된다. 이 땅에서의 고통과 애통함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를 느끼게 될 수 있다.14)
원수가 아닌 동역자로 보기-인정하고 칭찬하기 
친구를 경쟁 상대가 아니라 동역자로 보는 시각 전환은 시기를 극복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방편이다. 자신이 받은 복과 은사를 발견하게 되면 친구를 바라보는 눈도 부드러워질 수 있겠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전히 친구를 경쟁상대로, 정해진 파이의 조각을 차지해가는 자로 보는 한, 그 친구의 잘됨과 성공은 나에게 손해이고 쓰라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친구를 함께 공동체를 일구며 함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갈 파트너로 생각하게 되면, 친구의 능력과 자질은 오히려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주요한 자산이 된다. 그가 발휘하는 탁월한 능력이 곧 내가 속한 집단과 공동체를 윤택하게 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진보를 앞당기는 힘이 된다.
이런 시각을 갖게 되면 동료의 재능, 탁월함이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과 칭찬과 감사의 대상으로 보이게 된다. 끊임없는 경쟁의식과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삶이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동역자’로 보게 되면 인생은 한없이 자유로워진다. 서로가 서로를 칭찬과 격려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면 본인과 그가 속한 공동체는 말할 수 없이 평화롭게 된다. 
고린도교회의 분쟁 사례도 이에 대해 시사점을 준다.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서는 ‘바울파’와 ‘게바파’, 그리고 ‘아볼로파’로 나뉘어 자주 분쟁이 일어났다. 서로를 경쟁의 상대로, 시기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질책한다. 서로에 대한 왜곡된 인식부터 바로잡아 준다.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는 복음의 씨를 심고 물을 주고 신자들을 믿게 한 자들이고, 자라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했다. 이 말은 바울과 아볼로가 서로 경쟁의 대상이 아닌, 주의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할 ‘동역자(9절)’임을 강조한 것이다.
다윗에 대한 사울의 태도에 있어서도 이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전쟁에 승리하여 개선 행진하는 다윗을 보고 환호하는 국민들에게, “백성들이여 오늘 이 유망한 젊은 장수를 보십시오. 이 장수가 있는 한 우리나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런 장수를 갖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한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면, 사울은 더욱 백성의 존경을 받고 계속해서 왕직을 잘 수행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궁극적 대안은 사랑
그러나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방안은 사랑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리고 그것으로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다. 시기의 대안이자 치유책은 단순히 자족과 감사를 넘어서는 것, 곧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보이는 형제조차 사랑하지 못하고 시기하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결코 사랑할 수 없다고 요한은 말한다.(요일 4:20) 바울은 시기와 그로 생기는 분쟁을 치유하는 근본적인 처방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서신 뒷부분인 13장, 소위 ‘사랑장’에 잘 나타난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 것(고전 13:4)”이다. 동료의 흠을 보기보다는 좋은 점을 보고, 동료의 탁월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어렵고, 이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사랑을 주셔야 한다.(요일 4:7-8) 하나님의 사랑은 성육신 사건과 십자가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났다.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인간이 되신 것이고, 십자가는 우리가 당할 고통을 당신이 당하고 죽으신 것이다.15) 그래서 예수를 더 깊이 묵상하면 이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씩 더 체득해 갈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형제에 대한 시각이나 태도도 변화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현 모습 그대도 용납한 것처럼 그 친구에게도 마찬가지로 사랑하시고 용납하신다. 그리고 우리도 이웃에게 동일하게 대하기를 원하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젖어들면 우리도 사랑 안에서 그가 될 수 있고 그도 내가 될 수 있게 될 것이다. 근사치적이라도 말이다.
사랑하게 되면, 즐거워하는 형제의 즐거움에 함께 즐거워하게 되고 우는 자와 함께 울 수 있게 된다.(롬 12:15) 성경에 나타나는 가장 아름다운 예는 바로 요나단과 다윗의 사랑의 관계이다. 요나단은 다윗의 탁월함 그리고 왕으로 기름부음 받음에 대해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인정하고 나아가 사랑하기까지 했다. 요나단의 사랑이 “여자의 사랑보다 승(勝)할” 정도였다.(삼하 1:26) 요나단은 사울의 암살계획을 다윗에게 알려주고 그를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내 자리를 차지할 사람, 내가 받을 수 있는 존경과 명예를 누릴 사람 심지어 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이것까지도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한담을 피하라 
시기는 눈에서 시작되지만 입으로 행동으로 연결되어 전 인격을 넘어뜨린다. 중세에는 시기를 종종 ‘Backbiting’ 즉, 뒤에서 씹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레고리 대종은 ‘시기는 수군거리는 딸이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의 명성과 업적을 심심풀이로 들고 나와서 화제를 잡고 한담(gossip)하는 것이다. 가볍게 여흥삼아 시작하는 한담이지만 미끄러지듯이 험담으로 빠지기 일쑤다. 그것이 한담이 지향하는 것이다. 다른 이에 대해 가볍게 이런 저런 말을 시작하지만, 그것은 곧 상처를 내는 말로 변한다. 한담은 이미 시작하는 순간부터 험담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16) 어쩌면 험담을 하기 위해서 한담을 시작한다는 말이 더 맞는 표현인지 모른다. 남의 이야기는 칭찬거리가 아니면 삼가야만 한다. “누가 그러던데….”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언어를 써서 위장한 것일 뿐 결국 자기 말을 옮기고 퍼뜨리려는 속셈이다. 한담 대신 진실된 언어, 긍정의 언어, 격려의 언어, 그리고 화평의 언어를 그리스도인들은 친구 삼아야 한다. 

나가면서
사람은 눈으로 보며 살아가는 한, 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박수 받고 누리는 친구가 눈앞에 있는 한, 언제나 우리는 시기와 씨름하며 살게 된다. 친구가 넘어질 때 기뻐하고 그것을 은근히 즐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성경은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고,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잠 24:17)”고 가르친다. 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고 명령한다. 
시기를 떨쳐버리겠다고 해서 눈을 감고 살 수는 없다. 한 눈으로는 대상을 보더라도 한 눈으로는 하나님을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친구의 가진 것만 보는데서 돌이켜야 한다. 자기에게 있는 것,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것을 보면서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친구를 경쟁자가 아닌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갈 동역자로 하나님 나라를 함께 만들어가는 역군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대응 무기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성육신한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면 그리고 그것을 나눌 수 있게 되면 시기는 그만큼 감소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수군거림이 사라지고 칭찬과 격려와 사랑의 언어가 많아지는 관계와 공동체를 꿈꾸어야 한다. 오늘 교회가 이런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신자도 기쁨이 회복되고 사회도 밝아진다. 시기가 힘을 잃어가게 되면 싸움과 분열이 잦아들게 된다. 대신 참된 형제의 동거함에서 오는 즐거움과 평화가 찾아들게 될 것이다. 



신원하 l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와 고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칼빈신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석사(Th. M.)와 보스톤 대학에서 사회윤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Ph. D.) 저서로는 『전쟁과 정치』,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 『가난과 부요의 저편』, 『시대의 분별과 윤리적 선택』 등이 있으며, 지금은 천안에 있는 고신대 신대원 교수이면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신학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글쓴이 / 신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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