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일곱가지 죄(5) |
탐식(貪食, Gluttony) |
선진사회에서 꾸준히 잘 팔리는 책은 요리와 다이어트에 관한 책들이다. 이 사실은 의식주 문제가 해결된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먹고 찐 살을 빼는 일이 주요한 관심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시사한다. 20세기 들어 과학기술과 농축산 기술이 획기적으로 진보하면서 사람들은 생존과 기아의 위협에서 상당히 벗어나게 되었다. 대량으로 식량이 생산되기 시작하였고, 거대한 자본과 결탁되면서 음식은 진화하면서 상업화되어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대형 마트와 시장에는 먹을 것들이 가득 쌓여있다. 음식점과 외식 산업은 번성하여 구석구석 자리를 잡고 있다. 경제적 능력이 된다면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선진국가의 사람들은 음식과 먹는 것을 즐거움만이 아닌 두려움과 불안으로 대하게 되었다. 비만과 각종 성인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성인 가운데 10명중 9명 이상은 음식을 살 때나 먹을 때마다 비만을 의식하고 있다. 패스트푸드를 즐겨 소비하는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과 어린이들은 햄버거와 탄산음료로 말미암는 생계형 혹은 특수형 비만이 늘어나고 있다.1) 음식이 풍요로운 사회에서 음식에 대한 새로운 스트레스와 집착이 생기게 된 것이며, 세대와 계층을 초월하여 비만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그래서 다이어트 책은 이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리는 책이 되었고, 다이어트 산업과 몸을 관리하는 헬스클럽 사업은 융성하는 사업이 되었다. 음식과 이에 연계된 비만, 건강과 같은 문제는 어떤 이슈보다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가 되어있다.
현대 선진 사회에서 음식은 이미 사회 정치적인 문제이다. 음식 및 그와 연관된 여러 문제들은 관련된 사람의 신분 및 사회적 관계를 드러내 주는 하나의 지표이기도 하다. 무엇을 먹느냐, 누구와 먹고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계층과 성향이 어느 정도 파악되고 평가되어질 수 있다. “어떤 드물고 희귀한 음식을 먹느냐?”, “어떤 희소한 고급 와인을 마시느냐?”, “어떤 레스토랑을 출입하느냐?”하는 것은 그 사람의 경제적 상태와 신분을 나타내 주는 한 지표가 된다. 또 “누구와 먹느냐?” “유력자의 파티에 초대를 받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회적 정치적 관계와 지향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식사와 식탁은 우정, 권력, 계층을 나타내 주는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울러 이것은 종교적이고도 도덕적인 성격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서방 사회는 역사적으로 음식과 먹는 것을 다분히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에서 취급하고 가르쳐왔다. 하버드 대학의 교수인 콜스(Coles)도 음식에 대한 태도와 현상은 정서적 심리적 차원을 넘어 도덕적이고 종교적 지향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화답한바 있다.2) 이것은 자연과 이웃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태도를 반영하는 성격을 띤다는 의미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회는 이것을 종교적 도덕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가르쳐왔다.
음식과 탐식에 관련된 성경의 인물과 사건
‘탐식’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거의 언급이 되지 않는 단어이다. 그러나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관한 기사와 교훈들 그리고 탐식의 예는 성경에서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범죄도 먹지 말라던 금단의 과일을 먹으라는 사탄의 유혹에서 시작되었다. 아담은 유혹을 이기지 못해 그것을 먹고 낙원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사탄의 유혹을 거부함으로서 이를 물리쳤다.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범죄들은 먹는 것과 연관된 것들이 많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어야할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이 있었다. 제사장들과 거룩한 일을 맡은 자들은 더욱 그러했다. 창세기를 보면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여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 인물들로서 노아, 롯 그리고 에서가 기록되어 있다.3) 술에 취해 벌거벗은 수치스런 모습으로 잠을 잤던 노아, 대취하여 정신이 혼미해져 자기가 딸들과 함께 자는 줄 알지 못했던 롯, 그리고 순간의 허기를 면하기 위해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가 하나님의 복을 잃어버리고 슬피 울던 에서가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밖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직접 공급해 주신 만나를 먹었고, 그것을 먹으면서도 고기를 달라고 불평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입에 문 채 죽게 된 것도 모두 탐식과 관련된 비참한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성경은 음식과 관련하여 복과 사랑과 교제의 아름다운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다음의 일들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던 5천 명의 무리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될 때 허기가 질까 연민하여 오병이어로 그들을 먹이셨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떡과 포도주로 애찬을 나누며 이것을 통해 자신을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 부활하신 뒤 예수는 새벽에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를 구워 드셨다. 말씀이 흥왕하던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서로 떡을 떼며 애찬을 나누었다. 고린도 교회는 여유 있는 신자들이 먹을 것을 많이 가져와서 가난한 성도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떡과 사랑을 나누었다.
성경에는 아울러 윤리적 명령을 통해 직접적으로 교훈하기도 한다. 구약에는 잠언 23장이 대표적인 것이고 신약에도 복음서와 서신서를 통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마 4:4; 6:25; 7:18-9; 롬 14:3; 고전 8:8; 골 2:23; 빌 3:19; 딤전 4:2-4) 특히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 “배(belly)를 자기의 신”(빌 3:18)으로 삼는 자가 있다고 하면서 이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라고 경고했다. 또 바울은 로마서 16장 18절에 이런 자들에 대해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배를 섬기는 자”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로서 이들과는 달리 살아야 할 것을 권하고, 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즉각 반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쳤다.
사막 수도사들의 가르침
초대 교회 교부들은 음식의 양면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대체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통해 즐거움을 얻으려는 시도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초대 교부들의 이런 태도는 성경의 영향도 있지만 당시의 사회문화적 요소도 크게 작용했다. 그 첫째는 당시 로마사회의 상층사회의 식도락적 향연과 이로 말미암는 사회의 도덕적 기강해이, 그리고 국가의 쇠퇴에 대한 반작용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탐식에 대해 교회가 본격적으로 주목하게 된 것은 4-5세기의 수도원운동과 초기 사막 수도사들의 강력한 가르침에 크게 기인한다. 사회를 떠나 사막으로 수도원으로 은둔해서 산다는 것 자체가 세상의 욕망을 끊고 사는 것인데, 수도사들은 누구보다 육체의 욕구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것의 가장 기초는 먹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이집트의 사막 수도원 원장이었던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 345-399)는 수도사에게 가장 일차적으로 찾아오는 유혹이 탐식이라고 했다.4) 그는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에 넘어가기 쉬운 강한 적이라고 규정했다. 에바그리우스는 마귀는 수도사들에게 금식하거나 소식하다가 몸이 쇠약해진 동료들의 약한 모습을 부각시키며 그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한다고 말했다. 수도사들은 이 두려움 때문에 음식에 신경을 쓰게 되고 그것을 챙겨먹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식사시간 이전에도 가서 먹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음식이 넉넉하지 못했던 당시 시대상황과 수도원 생활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불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먹는 것도 탐식이라고 생각했다.
에바그리우스의 제자인 존 카시안(John Cassian, ca. 360-435)도 수도사들이 가장 먼저 직면하고 싸워가야 할 것을 탐식으로 생각했다. 그는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한 첫 단계인 출애굽으로 비유했다.5) 탐식의 악덕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서는 결코 영적인 싸움과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보았다.
카시안은 좀 더 구체적으로 탐식을 규정하길, ‘수도사들이 공동으로 함께 하는 식사시간 전에 먹는 것’, ‘먹고 있는 음식에 대한 음미와 의식 없이 게걸스럽게 먹는 것’, 그리고 ‘어떤 특정한 또는 귀한 음식만을 찾아 먹으려는 것’ 등을 들면서 이를 엄격히 금했다.
성 베네딕트(St. Benedict, ca. 480-ca. 543)도 수도사들이 지켜야 할 73개 규칙 중 먹는 것에 관련된 규칙을 3개항으로 무겁게 다루었다.6) 수도사는 하루 1파운드의 식사를 한다. 식사 회수는 2회를 넘어서는 안 된다. 고된 일을 한때에는 수도원장의 판단에 따라 음식을 추가할 수 있지만 이것도 결코 배가 부를 정도의 많은 양을 먹어서는 안 된다. 그가 이렇게 한때에 “방탕함으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한 것도 주님의 말씀(눅 21:34)을 판단사에게 적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에 탐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다운 삶과 배치되는 것으로 간주했기에, 그는 이 탐식에 엄격한 규칙을 적용했다.
다섯 가지 탐식의 유형
초대 교황으로 불리는 그레고리는 탐식은 다섯 형태로 위장하여 유혹한다고 말했다.7)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도 이 분류를 그대로 따랐고 이를 좀 더 자세히 강해했다.
첫째, 급하게 먹는 것이다.(praepropere, too soon, too hastily)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먹을 것을 기대하며, 또 식사할 시간을 앞두고, 기다리지를 못하는 것이다. 식사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식욕이 동하면 그 시간을 기다리는 마음에 자신이 사로잡혀 급급하고 때론 참지 못해 먼저 먹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아주 빨리(fast) 먹는 것, 즉 속식(速食)하는 것이다. 입안에 든 음식을 몇 번 씹기도 전에 꿀꺽 삼켜버리고 또 음식을 집어 입에 넣는 것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음식을 대하면서 감사하지 못한다. 음식과 그것을 식탁에 오르게까지 해준 자들에 대해 생각할 마음의 겨를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게걸스럽게 먹는 것이다.(ardenter, too eagerly, too ravenously) 이는 몹시 굶주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먹는 것을 말한다. 공동식사를 할 때 자기가 원하는 맛있는 것을 더 먹고자 할 때, 대표적으로 이런 행동이 나타나곤 한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더 가져가기 전에 자신이 그것을 더 먹기 위해 허겁지겁 먹어버린다. 현대적 맥락의 뷔페식 식사에 적용한다면, 처음 가게 될 때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득 담아오는 것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다음에 갈 때 그것이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이 사람에게서 절제하기란 쉽지가 않다. 이미 습관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남을 생각할 수 있는 배려와 절제의 미덕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셋째, 많이 먹는 것 즉 과식(過食)하는 것이다.(nimis, too much, too excessively) 허기가 사라질 만큼 먹었지만 더 먹고 싶은 욕구를 물리치지 못해 또 먹는 것이다. 몸이 요구할 때 사람들은 그 요구를 통제하지 못하고 그 요구대로 따르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이것을 가리켜 활동하기에 적당한 분량의 음식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유형이라고 설명한다.8) 현대 사회에서 뷔페음식은 이런 것을 겨냥하는 대표적인 음식점이다. 대중적인 뷔페 음식점 간판에 “무한정 식사-당신이 먹을 수 있을 만큼(All you can eat)”이라는 문구는 이 유형을 겨냥한 상업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넷째, 까다롭게 먹는 것 소위 미식(美食)하는 것이다.(studiose, too daintly, too fastidiously) 이는 자신의 기호에 딱 맞는 상태나 그렇게 요리된 음식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그레고리가 말하는 이의 대표적인 경우는 C. S. 루이스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예를 든 한 유형이 적당하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은 잘 우려낸 홍차 한 잔, 제대로 익힌 달걀 하나, 그리고 적당하게 구운 빵 한 조각에 불과한데 문제는 이렇게 간단한 음식을 제대로 해내는 사람이 없다.” 이런 불평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음식은 값도 싸고 양도 많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9)
다섯째, 호화로운 식사(豪食)를 의미한다.(laute, too sumptuously, too luxuriously) 이것은 식단이 적절히 배합되고 세련되게 진열된 정찬, 잘 선택된 메뉴, 아늑한 분위기, 장소 등의 여러 조건을 갖춘 상태에서 그런 식사를 고집하는 것이다. 이것은 음식과 아울러 정서적인 만족감(satiety)을 중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자들과 상류층 사람들이 즐기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로마 사회의 귀족들의 호사스런 연회가 이에 대한 대표적인 유형이다.
그레고리의 다섯 가지 유형의 탐식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시 두 성격의 범주로 구분하여 정리한다. 그는 앞의 셋은 어떻게 먹는 것의 범주와 뒤의 둘은 무엇을 먹는 것의 범주에 속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육신의 욕망에 따라 휘둘리는 탐식을 이기지 못하면 영적 싸움에 나갈 수도 없다고 하면서 이것을 일종의 영적 전투의 일환으로 가르친 점에서 이전의 수도사들과 같은 입장이다. 그러나 그레고리는 지나치게 멀리하는 것도 문제가 많음을 경계하였다. 탐식이 수다스러움 같은 다른 죄들을 낳는 것처럼 음식에 금욕적인 생활은 자칫 더 큰 죄인 교만이나 또는 견딜 수 없이 안절부절 하는 부덕을 낳게 됨을 그는 경고했다. 따라서 그는 신자들에게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도록 자신을 훈련해 나가야 함을 가르쳤다.
탐식이 왜 종교적 문제가 되는가?
이제 탐식에 대해 신학적으로 정리할 차례이다. 음식을 통해 즐거움을 조금 과하게 취하는 탐식이 왜 그토록 신학자들과 수도사들로부터 대죄로 취급받았을까? 그레고리와 아퀴나스는 탐식을 여러 유형으로 나누었지만, 사실 어느 정도 호화로운 음식을 먹느냐, 얼마나 많이 먹느냐 하는 기준과 차원에서 탐식을 설명하고 논의하는 것은 탐식의 본질을 정의하는데 핵심적인 질문이라 할 수 없다.
사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먹느냐, 어떤 음식을 먹느냐 하는 것은 사람의 육체, 건강, 나이, 문화, 계층 등에 따라 같을 수가 없다. 그토록 엄격했던 베네딕트 수도원의 규칙에서도 때로는 노동을 많이 한 경우에는 음식을 더 먹을 수 있도록 했고, 어른들은 소년들보다 더 먹는 것을 인정했다.10) 그리고 중세의 도덕주의자들도 어느 정도가 건강을 유지하기에 적당한 양이냐 하는 것에 생각이 서로 달랐다. 육체를 많이 쓰고 또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직업에 있는 사람들은 좀 많이 먹을 수 있는 것이고, 자란 가정의 환경과 배경에 따라 음식을 대하는 성향과 매너에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것은 조금만 관용적인 된다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탐식에 관한 논의의 핵심과 본질은, 과연 자신의 삶이 얼마나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지배받느냐, 먹고 마시는 것에서 오는 낙을 얼마나 추구하고 즐기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탐식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즉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먹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정말 포만감과 흡족감을 얻고자 하는 욕망 내지 마음으로 그것을 먹고 마시느냐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탐식이 지닌 문제의 본질로 본 점이다.11) 실제로 먹고 마시는 것에 우선적이고 또는 큰 가치를 두며 생활하는 사람들은 말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실제 삶으로는 이미 하나님, 하나님 나라, 그의 의, 그리고 교회와 이웃 등의 더 궁극적인 가치와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탐식자들은 신령한 것을 좀 희생하더라도 먹을 것을 기어이 입에 넣고 그것을 통해 삶의 낙을 누리고 보상을 받고자 한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교회가 탐식을 죄로 보는 것이다.12) 탐식자들의 관심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 결국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탐식을 죄로 본 것은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이라고 했다. 이미 탐식을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에 대한 무절제한 식욕(immoderate appetite)”으로 정의한 아퀴나스는 탐식이 죄이냐는 고전적인 질문에, 덕을 선하다고 간주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성의 통제를 따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덕에 반대하는 것은 이성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것이고 그렇기에 죄 라고 답하면서, 무절제한 식욕인 탐식도 이런 근거로 죄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탐식은 또 다른 죄들을 낳게 되므로 그것은 대죄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이것이 인간의 생존 욕구에서 말미암는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죄(venial sin)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의도적으로 이성으로 제어되기 힘들 정도로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거의 우상숭배와 같은 수준의 행동과 삶을 방불하게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탐식자는 하나님의 자비에서 끊어질 수도 있게 되고 용서받기 힘든 죄(mortal sin)로 변할 소지도 있다고 아퀴나스는 주장한다.
몸매 숭배: 건강과 성적 어필
종교개혁으로 인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이 약화되었지만 개신교회도 탐식에 대해 관용적인 것은 아니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세상 것에 대한 절제와 금욕을 강조했다. 칼빈은 제네바 시절에 위정자들의 식문화까지 제한을 가하는 법을 만들만큼 비교적 엄격한 태도를 유지했다. 근대에 이르러 사회에 대한 종교의 영향이 줄어들면서, 사람들은 현 세상에서 땀 흘린 노동의 대가로 얻는 정당한 부와 그로 말미암는 식탁의 풍요함도 인생이 누릴 수 있는 복과 즐거움으로 생각했다. 통통한 몸은 부요함의 표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먹고 즐기는 것에 훨씬 관대해지고 자유롭게 되었다. 개신교회도 교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현대에 이르러 이에 대해서는 관용적이 되어 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시각은 거의 새로운 차원을 맞이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음식을 건강, 장수의 차원에서 보기 시작하면서 비만과 각종 성인병의 원인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음식, 먹는 것, 그리고 탐식에 대한 관심과 논의는 거의 달라질 만큼 큰 변화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탐식의 유형이 이전과는 획기적으로 달라졌다.
이전처럼 그냥 음식을 편하게 먹을 수 없게 되었고 음식을 먹고 구입하는 것에 대해 신경이 아주 많이 쓰게 되었다. 칼로리가 낮은 음식, 저지방 식품, 설탕이 없으면서도 단맛이 나는 음식, 카페인이 없고 칼로리가 낮은 탄산음료 등을 생산하게 되고, 또 이것을 찾고 먹고 마시는 것이 트렌드가 되어 왔다. 그리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은 지방 없는(fat-free) 음식, 건강음식, 유기농 식품 등을 찾아 구입하며 음식에 각별히 신경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경향에는 특별히 날씬한 여성의 몸매를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의 기준으로 보고 인식하는 시대의 흐름과 그것을 조장하는 상업적인 대중문화의 흐름이 크게 작용하게 된다. 뚱뚱한 사람은 매력이 없는 사람, 시대의 문화에 뒤떨어지는 사람, 심지어 게으른 사람이라는 인식이 조성되어 있다. 심지어 뚱뚱함은 점점 도덕적인 부덕 내지 악으로 취급받는다.
반대로 날씬함은 흠모할만하고 아울러 사람의 호감을 살만한 미덕으로 숭앙받는다. 이 날씬함의 덕을 형성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 각고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신념에 따라 사람들은 날씬한 몸매를 만들기 위해 음식에 집착한다. 몸매가 통통한 사람들이 음식을 적게 먹고 삼가는 것만이 아니다. 평균적인 사람이나 심지어 날씬한 여성이나 사람들까지 살이 찌지 않도록 적게 먹거나 먹는 것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신경을 쓴다. 다이어트 음료, 무지방 식품, 저지방 우유, 유기농 음식 등 신경을 많이 쓰며 살아가고 때로는 살찌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음식을 지나치게 적게 먹거나 거부하고 굶기도 한다. 오늘은 날씬한 사람들도 새로운 유형의 탐식자가 되고 있다. 음식에 집착하고 날씬함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 문화는 모든 사람들을 점점 탐식자로 만들어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미셀 렐위카(Mitchell Lelwica)와 같은 신학자들은 이런 문화적 현상을 해석하면서, 이 문화는 날씬해지는 것을 거의 죄에서 벗어나는 구원받음의 차원으로 보고 있다고 보면서, 이런 “새로운 종교”의 교리에 영향을 받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 때론 굶고 체중을 줄이는 종교적 고행을 해 간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최근 선진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독특하고 특이한 탐식의 양상이다.
그런데 교회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이러한 믿음체계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편성하여 이런 신화와 믿음을 낳는데 직간접적으로 기여해 왔다고 렐위카는 비판한다. 뚱뚱한 여성은 매력 없는 사람, 시대의 문화에 뒤떨어지는 사람, 심지어 게으른 사람으로 간주하는 사회의 인식에 대해 교회는 교정할 생각은커녕 그냥 방관하고 받아들이고 교회도 다이어트 운동에 신학적인 반성과 검토 없이 무비판적으로 대해 왔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그리고 젊은이들이 이 새로운 이단 종교의 희생자들이 되어 가고 있다. 교회는 이에 대한 신학적 진단을 내고 새로운 유형의 탐식에 빠지는 선의의 희생자들을 돕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안내하는 새로운 과제를 수행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책임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금식-육체의 배고픔으로부터 전인의 풍요로
그렇다면 탐식을 극복하고 치유할 방안은 무엇일까? 음식에 대한 엄격한 규정에 따라 음식을 고르고 제한하는 식이요법 내지 다이어트일까? 성경과 기독교 신학자들은 금식(fast)을 그 치유책으로 제공한다.15) 물론 한시적이긴 하지만 음식을 끊는다는 것은 상당히 극한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자기 힘의 근원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이고, 자신 몸의 욕망을 부인한다는 의미이다. 어쩌면 몸의 욕구를 채우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조차도 제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식으로 표현하면 자기를 부인(self-denial)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자기를 살리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종종 금식하는 사건이 나온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개인이나 나라의 중요한 시점에 금식을 택하곤 했다. 자아 충족적 삶을 부인하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린다는 표시로 그의 긍휼을 받으려고 준비한다는 것이 음식을 일시적으로 끊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힘의 원천이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것을 바라는 기도의 다른 표현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사들에게 육체에서 타오르는 욕망을 끄게 하는 방편으로 “배고픔(hunger), 노동(toil), 그리고 독거”(solitude)를 권고했다. 그 중 배고픔은 금식을 의미한다.16) 허기를 채우고자하는 유혹을 물리치고 금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이 주는 힘을 의지하고 대망한다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때론 낮아지고 때론 주린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모세는 이미 주석한 바 있다.(신 8:3)
기독교회에서 음식과 관련된 중요한 상징적인 두 행사는 금식과 성찬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방편으로 금식했다. 그리고 성찬을 통해 떡과 포도주로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피부 가까이 받아들여 왔다.17) 초대교회 때부터 이것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났던 신앙생활의 핵심 구성요소였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신자들은 절기에 따라 함께 금식을 하고 이어서 함께 애찬을 나누었다. 대림절과 사순절에, 성탄과 부활의 축제를 앞둔 상태에서 성도들은 모두 함께 금식을 한다. 금식은 축제가 임하기 위한 준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금식은 자기를 부인하고 비움으로 그리스도와 부활의 주를 맞이하고 대망하는 준비의 표현이다. 이것은 악한 영을 쫓아내고 마음을 정화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였다. 이 금식이 있고 나면 이어 축제일에 교회적으로 성도들이 모두 함께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었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금식과 축제는 기독교인의 중요한 리듬이라고 표현했다.
금식은 육체를 비우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대망하고 기대하는 표현이고 방편이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조금씩 맛보아 알아갈 수 있게 된다.(시 34:8) 신령한 양식을 맛보고 즐기고 그것으로 자신의 궁극적인 허기를 달래어 갈 수 있다. 신령한 양식으로 자신이 채워지게 되면 육체의 양식을 통해 쾌락과 즐거움을 얻는 것에 대해 조금씩 자유로워지게 된다. 크리프트(Peter Kreeft) 교수는 탐식의 죄를 극복하고 치유하려면 탐식 그 자체에 집중해서는 해결되기 어렵다고 하면서 그 이유는 그것은 일종의 중독과 같은 죄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그는 추상적이고 무책임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그것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이 진정한 기쁨, 충족, 만족의 근원이심을 깨닫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18) 바로 그 한 방편이 금식이라는 것이다.
자선과 구제: 배고픈 자 돌아보고, 나누어 먹기
탐식의 죄를 치유하는데 도움이 되는 또 다른 길은 구제와 자선(charity)을 행하고 연습하는 것이다. 수도사들과 그레고리 교황은 탐식에 대해 다루면서 무엇보다 배고파하는 사람과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이 그들에게 돌리는 것 또 돌려주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탐식하게 될 때 사람들은 스스로 마음이 불편하게 되고 자기들이 먹는 것을 줄여서 그것으로 그들에게 나눠줌으로 자선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19) 이것은 크리프트가 분석했듯이 탐식자체에 집중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해결방식이다. 실제로 수도사들은 구제하고 자선을 행하는 일을 수도의 길의 일환으로 삼고 힘썼다. 그들이 몸이 필요로 하는 것 이상 먹지 않는 것을 엄격하게 시행한 것은 자기 통제력을 키우기 위함도 있지만, 자기가 먹을 음식을 줄여서 빈핍으로 고통 받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나눠주려는 목적 때문이기도 했다.
교부들과 수도사들이 금식을 강조했을 때 금식은 이웃을 구제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을 연습하는 좋은 방안으로 그들이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려는 의도와 목적으로 그 만큼 자신의 것을 줄여보라는 것이다. 카시안은 금식은 구제하고 나누는 법을 배우고 익히는 주요한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금식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다른 선한 일을 위한 것이 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된다고 주장했다. 어거스틴도 자기 자신이 먹을 것을 줄이고 또 금식하여서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은 것이고 그것은 굶주린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금식을 구제를 행하는 것과 연결시켜 가르쳤다.
음식의 유혹을 절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오늘 우리 주위에 여전히 배고픈 이웃들의 고통을 의식해야 할 것이다. 수도사들의 가르침처럼 우리는 가난한 자들과 빵을 함께 나누고 살아가야 한다. 자비를 베푸는 삶은 지금 당장 출발할 수 없다. 잉여 재산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수도사들과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신자들이 금식을 통해서라도 구제했던 것을 기억하고, 구제하고 선을 나누기 위해서 우리가 먹는 것을 줄여가도록 애써야 한다.
나가면서
탐식을 극복하는 길에 관해 기독교회가 제시하는 치유책은 일반 사회와 학문이 제시하는 방안과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다이어트, 식이요법, 심리요법이 아니다. 절제를 강조하는 도덕적인 것과도 다르다. 물론 이것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보다도 교회는 금식과 자선의 길을 제시해 왔다. 금식을 통해 자신이 욕망을 부인해 가는 법을 배우고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채움을 받는 길을 알게 된다. 금식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고 또 가난한 이웃에게 자선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여전히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는 현실에서 불필요한 음식을 줄이고 그것으로 나누고 구제하는 것이 기독교회가 탐식을 치유하는 유용한 길로 제시해 온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실제적인 적용으로 삼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새겨봐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을 대할 때마다. 우리의 삶의 존재가 언제나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에서 성찬을 받을 때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매번 음식을 대할 때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방편으로 인식하고 먹을 때마다 감사해야 한다. 매 식사가 성례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음식을 감사함 없이 또 별 의식 없이 대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음식은 나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지만 동시에 다른 이웃과 함께 나눠야할 성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이 어느 때보다 교회와 신자들에게 필요한 때이다.
신원하 l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와 고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칼빈신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석사(Th. M.)와 보스톤 대학에서 사회윤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Ph. D.) 저서로는 『전쟁과 정치』,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 『가난과 부요의 저편』, 『시대의 분별과 윤리적 선택』 등이 있으며, 지금은 천안에 있는 고신대 신대원 교수이면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신학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글쓴이 / 신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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