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ly 5, 2012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7) 탐욕(貪慾, Avarice)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7)
탐욕(貪慾, Avarice)
경제, 최고의 이데올로기
“멍청아,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 1992년 클린턴을 미국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한 참모가, 다른 전략을 내놓은 참모들에게 한 말이다. 사람들의 “더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을 정면으로 겨냥하지 않으면 그 어떤 전략으로도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의 판단과 전략은 적중했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지고 냉전체제가 종식되면서, 또 미국이 걸프전쟁에서 성공을 거둔 직후, 부시 대통령의 지지도는 그야 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경기가 침체 조짐을 보이면서 여론은 조금씩 나빠졌는데, 바로 이 점을 클린턴의 선거 참모는 이용한 것이다. 늘 무엇인가를 더 갖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를 직접 자극한 것이다. 경제 발전을 통해 더 누리게 해 주겠다는 선거 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어 결국 철옹성을 무너뜨렸다.
“경제를 살리겠습니다” 2007년 한국 대통령 선거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경제 대통령”, “747” 등의 선거 구호 외에는 별다른 정책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이명박 후보의 선거 전략은 처음도 끝도 경제요, 더 잘살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누가 이 시대와 역사의 참된 지도자감인지에 대해서는 크게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보다는 과연 누가 경제를 살려줄 것인가, 내 집값을 올려주고, 펀드 수입을 높여 줄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심리를 이용한 선거전략은 그대로 적중했다. 더 갖고 싶어 하는 욕구를 자극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효과적인 정치 전략이다. 인간의 근원적 탐욕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세기 수도사 에바그리우스(Evagrius)는 탐욕이 식탐, 헛된 영광과 함께 인간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욕망이라고 했다. 그는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할 때도 바로 이 욕구를 건드렸다고 해석했다. “나에게 절하면, 내가 이 온 천하를 너에게 주겠다.” 이처럼 그는 다른 악들은 모두가 탐욕에서 비롯한다고 설명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도 같은 내용이다.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누구든지 이 탐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오히려 가진 자들에게 이 탐욕은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 돈이 주는 편리함과 힘을 이미 맛보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탐욕은 정욕이나 명예욕보다 훨씬 더 저항하기 힘든 악이라고 분석했다. 돈만 있으면 성욕도 채우고 권세도 누릴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 특히 소위 ‘풍요로운 선진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더더욱 이러한 탐욕에 휘둘린 삶을 살아가게 마련이다. 이미 돈이면 그 어떤 것도 다 누리고 살 수 있는 사회이자 소비지향적인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능력도 인격도 점점 소유의 과다와 소비의 유형에 따라 평가된다. 어느 지역에 살고, 어떤 아파트를 소유하고, 어떤 브랜드 제품을 소비하느냐 하는 문제는 곧바로 그 사람의 신분과 능력의 척도가 된다. 그야말로 소유가 존재를 규정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더 갖는 것,’ ‘더 소비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부추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곧 힘이며 권력이다. 돈이 있으면 생활이 편하다. 돈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거의 다 갖게 된다.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는 사람의 욕망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낸다. “더 소비하고 소유해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필요하지 않은 것도 꼭 필요한 것처럼 우리를 속인다. 광고가 그렇다. 배고프지 않은데도 더 먹고 싶게 만든다. 이미 부족함 없이 소유하고 있는데도 새로운 것을 찾게 만들고, 이미 가진 것도 더 갖고 싶게 만든다. 우리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거짓 허기(虛飢)에 주리고 놀아나는 셈이다.
사람들은 이런 사회 문화 속에서 점점 자신의 진정한 삶의 목적, 의미, 행복 등의 가치와 괴리된 채 살아가게 된다. 바로 이 점이 심각한 문제다. 한국 사회와 교회, 그리고 개인들은 이전에 비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고 모자람이 없이 소비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평온하고 행복한 삶(전 6:3)을 살고 있는 것일까?

조금 더: 축재와 탕진
탐욕(avarice)의 라틴어 어원 ‘아바라티아(avaritia)’는 재물을 더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이란 뜻이다. 즉 탐욕이란 돈, 재물, 명예를 더 소유하려는 욕심이다. 일찍이 단테는 “자신이 필요한 것보다 더 소유하려는 욕구”를 탐욕이라고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조금 더”이다. 권력, 재화 그리고 명예에 대한 욕구는 절제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탐욕은 영원한 것이 아닌 것들을 사랑하고 이것을 소유하려는 욕구라고 간주했다. 또 제러드 리드(Gerard Reed)는 탐욕을 “지배력에 대한 욕구”라고도 표현했다.
단테는 탐욕을 두 종류로 나누어 설명했다. 한 종류는 자기가 지닌 것을 쌓아놓고 다른 사람과 나누려 하지 않는 욕심인 축재(avarice)이다. 다른 종류는 물질과 재화를 스스로 끝도 없이 계속 흥청망청 소비하는 탕진(prodigality)이다. 이런 양면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같은 흐름에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도 과도히 물질을 잡고 베풀지 않는 것을 인색(aneleutheia ungenerosity)이라 했고, 반대로 물질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써버리는 것을 낭비(asotia, wastefulness)라고 하면서, 물질에서 자유로운 중용의 상태를 자비로움 또는 후함(eleuetheriotes, generosity)이라고 설명했다. 단테의 작품 좬신곡좭을 보면 연옥에서 탐욕의 벌을 받고 있는 두 유형의 사람들이 서로를 비난하는데 한 쪽은 재물을 탕진한 자들이고, 다른 한 쪽은 재물을 손에 쥐고 남에게 베풀지 않은 자들이다. 이들은 서로 반대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사실 양쪽 모두 이 땅의 재물에 대한 과도한 사랑과 집착으로 살아간 자들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에바그리우스는 탐욕은 마치 바다와 같다고 비유한 바 있다. 이 비유는 이미 성경의 전도서에도 나오는 것인데, 곳곳의 강물들이 모두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만 결코 그것이 바다를 채우지 못하듯이(전 1:7), 소유라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의 탐욕을 만족할 만큼 가득 채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욕망의 본질은 결코 만족을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페어리(Fairly)는, 탐욕은 ‘소유’ 즉 명사가 아니라 계속 ‘소유하는 것’ 즉 동사의 성격을 갖는다고 했다. 일찍이 전도자는 탐욕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잘 묘사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다.(전 5:10-11)” 즉 사람은 늘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언제나 조금 더 가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24시간 편의점의 대표 주자격인 ‘세븐 일레븐(7eleven)’은 이러한 인간의 소유욕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1927년 미국 달라스에서 시작된 이 편의점은 당시 오전 7시에서 밤 11시까지 영업하는 것을 마케팅 전략으로 내세우면서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그런데 1962년부터는 하루 종일, 즉 24시간 내내 일하는 체제로 바꾸었다. 다른 가게가 문을 닫는 밤 시간까지도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만큼 매출이 늘어나 돈은 더 벌었겠지만, 삶이 그만큼 고달파지게 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돈에 대한 욕망은 탐욕의 성격상 끝이 없다. 때론 정상적 경계를 넘어 확대되고 만다. 탐욕에 사로잡히면 그 욕망이 어디까지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은 적절히 제어되지 않으면 위험을 동반한 행동까지도 감수하게 만들고 사행심, 투기로 발전하여, 급기야 도둑질, 사기, 횡령 같은 불법까지도 저지르게 한다. 급기야 다른 사람의 재산과 아내까지 탐내고 소유하려 들게 만든다. 그래서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은 이 탐심을 특별히 경계하고 있다.

하나님도, 그리고 맘몬도
신자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신자들은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가 된다는 바울의 가르침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재물의 유혹은 결코 녹록치 않다. 그래서 대개는 하나님도 섬기지만 재물도 함께 소유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모두 취하는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자들도 재물과 소비를 통해 얻는 즐거움과 편리함을 동일하게 맛보며 살고 있고, 그 힘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재물의 유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훨씬 큰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어떤 사회나 경제 체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정 사회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도 늘 이 유혹 앞에서 흔들렸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배교하곤 했다.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신 바알과 아스다롯을 가까이 하고 섬기라는 유혹을 받았다.(삿 2:11-12) 백성들이 바알을 섬긴다는 것은, 그 저변에 탐욕이 철저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우상들은 곧 재물을 더 많이 얻고자 하는 욕심이 만들어낸 신들이기 때문이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땅의 소출과 생산을 관장하는 부부 신으로 생각했다. 이 땅의 자손, 가축, 곡식의 생산은 이 두 신의 힘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바알과 아세라가 부부행위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 생산의 기운이 땅에도 미쳐, 땅은 다산과 풍성한 소출을 얻게 된다고 이들은 생각했다. 가나안 사람들은 생산의 기운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부 신들이 성행위를 많이 하도록 신들의 성욕을 자극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바알신당에서 제사를 드릴 때 여자는 미동과 남자는 신정 창기와 성행위를 했던 것이다. 이것은 제사 행위의 일부지만, 그 진짜 의도는 바알과 아스다롯의 성욕을 부추기려던 행위였다. 그들로부터 생산의 기운을 끌어당기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적극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애굽에서 벽돌을 주로 만들었고 광야생활 도중 농사를 지어본 적도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바알 숭배는 절실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고, 그들은 탐욕으로 결국 야웨 하나님을 섬기면서 바알도 함께 섬기는 길을 선택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뼈를 썩게 만들었고 결국 패망에 이르는 주원인이 되었음을 성경이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현대 기독교회의 가장 큰 유혹 중의 하나도 탐욕이다. 미국이나 한국과 같은 선진 사회에서 이미 삶의 풍요를 맛보고 누리고 사는 신자들에게는, 물질이 주는 낙과 재미가 깊이 인박혀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물질도 놓치고 싶지 않다. 혹은,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하나님께 복을 받아 자기가 더 풍요롭게 살고 싶어 하는 데 있는 경우도 있다. 우리 안에 이런 모습들이 조금씩 다 있다. 이런 신앙생활은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것과 어쩌면 그렇게 닮았는지 모른다. 신앙생활과 예배에서 어쩌면 하나님 이름을 빼버리면 마치 바알을 숭배하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지난 30년 동안 급속히 경제성장을 했고 물질적 풍요가 주는 재미를 맛본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점점 두 주인을 섬기는 혼합 신앙에 익숙해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교회와 한국 교회와 기독교의 문화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삶에 별다른 불편함이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 교회의 힘과 영향력은 교인의 숫자나 헌금 액수로 평가되고, 사회적 명망이나 지위가 높은 교인들이 몇이냐에 따라 평가되고 있다.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입신과 양명을 도모하고, 교회는 점점 사람들의 소비유형에 맞추어 공급 내용을 리모델링해 나가는 묘한 회당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많은 교회들은 점점 의식하든 못하든 이런 욕망과 동맹 관계로 변해가고 있다. 강단의 메시지는 정의와 평화가 아닌 번영과 풍요를 약속하고, 부자 되는 것과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의 복으로 선언하는 제단으로 변질되고 있지는 않은지 뼈아프게 반성할 때가 아닌가.

소외와 유리 
재물과 권력 지향의 사람들은 늘 이익 지향적 삶을 살다보니 인간관계도 그만큼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기에게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되는 사람만 가까이하게 된다. 친구나 이웃과의 관계 그 자체에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는다. 뛰어나지도 않고 가진 것도 별로 없는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상대가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면 그 사람은 부담이 되는 존재인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을 대할 때 마틴 부버(Martin Buber)의 용어를 빌자면 ‘너(du)’가 아니라 ‘그것(es)’으로 대한다. 그래서 우정, 진리, 사랑, 이웃애, 공동체 등의 단어는 이들에게 아주 낯선, 아니 관심 밖의 개념인 셈이다.
공적 영역에 무관심해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페어리는 “오늘날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공적인 분야나 정치에 점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소외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변명에 불과할 뿐, 사실은 우리의 나태함일 뿐이다. 공공적인 일과 관심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사회적 나태는 바로 탐욕에서 말미암는 것이다.(페어리, 169-170)”고 말했다. 
야심과 욕망에 따라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결국 대상을 비인간화시키게 된다. 그러나 곧 자신도 친구와 공동체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심리학자 솔로몬 쉼멜(Solomon Shimmel)은 “탐욕에 이끌려 사는 사람들이 점점 우정을 나누거나 친분을 형성하려고 하지 않고, 동맹을 결성하려고 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이것이 현재 미국 사람들의 대인관계의 부정할 수 없는 한 모습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소외가 늘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유 양식적 삶 
탐욕의 성격을 설명하는 데에는 20세기의 탁월한 사상가인 에릭 프롬의 사용하는 소유 양식(mode)이라는 개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프롬은 인간 삶의 양식을 크게 존재양식(mode)과 소유양식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소유 양식의 삶이란 ‘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다’라고 말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권력, 지위, 재산, 특정상품 등 외부적인 것들을 소유함으로 자신을 규정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존재 양식의 삶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을 능동적으로 개발하고 발휘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소유 양식에 따른 삶은 끊임없이 뭔가를 소유하기를 도모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자신을 확인하고 또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급스럽고 탁월한 기능을 가진 새 물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물질문명 사회에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끝없는 소비지향적 삶의 양식으로 내몰리게 된다. 그런데 이 욕구는 온전히 충족될 수 없는 성격이기에, 이들의 삶은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다. 실제로 소유가 많아지면 번민이 따라서 많아질 수 있다. 재산을 늘리기 위한 고민과 노력 못지않게, 이미 가진 재산을 관리하고 지키는 것에도 신경이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재산이 많으면 염려가 늘게 마련이다. 유명한 그림과 문학작품에서 등장하는 수전노(miser)의 얼굴을 보면 한결 같이 어두운 얼굴로 묘사된다. 돈이 있기에 행복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이다. 돈주머니를 꽉 움켜쥐고 있기에 늘 경계하며 살기 마련이다. 영어로 구두쇠(miser)와 비참하고 피폐한(miserable)이라는 것이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자기과잉과 타자결핍의 제로섬 게임
욕망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기 소유를 더 늘려가고, 그것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흐뭇해한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고 흐뭇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한다. 소유 행위는 철저히 개인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소유 지향적 삶은 그 파장이 결코 개인의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미친다. 이것이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이다. 특정 지역에서 자원과 에너지는 보통 한정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만약 어떤 사람이 그것들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 남은 것을 가지고 나누어 사용할 수밖에 없다. 내 돈을 가지고 내가 더 쓴다는데 무슨 문제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고 또한 별 관심이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 현상은 국제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선진 국가들은 경제력과 정치력을 이용해 에너지를 쉽게 확보해서 넉넉하게 사용하며 지내왔다. 그러나 이것의 어두운 그림자는 개발도상국가들에 미치게 마련이다. 특정 시기에 생산되는 지구촌의 자원은 제한되기 마련인데 선진 국가들이 과도하게 그것을 소비하면 그 남은 것들의 가격은 상승한다. 결국 다른 국가들은 자원을 더 비싸게 구입할 수밖에 없고, 비싼 비용 때문에 필요한 에너지와 자원을 소비하기 힘들어진다. 부유한 국가가 자원을 넉넉히 소비하고 풍요를 구가하면 할수록 가난한 국가와 약자들은 그만큼 더 불편하고 힘들게 지낼 확률이 높아진다.
가진 자의 탐욕은 자연계에도 마찬가지로 미친다. 지구촌의 앞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성장과 개발을 내세우며, 자연을 파헤치고, 오염시켜 왔다. 인간의 과도한 자연 개발은 결국 생태계의 심각한 훼손을 가져왔고, 그 결과로 수많은 생물종들이 사라졌다. 수천 년 수만 년을 통해 형성된 생태계가 불과 최근 1백년 사이 엄청나게 파괴되었다. 음식과 자원에 대한 과잉소비는 과잉생산을 낳고, 이것 때문에 땅은 더 많이 경작되어야 했고, 산림들과 화석 자원들은 더 많이 벌목되고 채취되어 사라져갔고, 탄소와 오염물질은 더 많이 배출되었다. 이 결과로 대자연과 지구의 기후조차 변하고 있다. 숱한 생명체들이 지금도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오늘날 생태계는 거의 신음하는 상태에 처해있고 긴급 구호를 요구하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인간의 탐욕으로 공생해야할 생물들이 사라지거나 고통을 받고 있다. 지구 온난화는 이제 부메랑이 되어 대규모 자연 재해를 발생시키면서 인간에게도 흉기가 되고 있다. 자연은 이제 자기 방어용으로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발톱을 들이밀면서, 이기적인 인간에게 맞서고 보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탐욕스런 행위와 삶이 만든 지구온난화의 결과도 사람들은 피해를 입기 시작하고 있지만 그러나 불합리하게도 그 피해는 가장 약한 국가들에게 제일 우선적으로 임하고 있다. 벌써 몇몇 약소 해양 국가들은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의 수몰이 진행되면서 나라 자체가 사라질 위협에 처하고 있다. 부유한 국가의 사람들이 소유를 늘이고, 더 많이 쓰며, 시원하고 따뜻하게 지내는 동안, 가난한 국가의 사람들은 이제 생존의 위협을 받거나, 심각한 고통을 겪는 국면에 처하게 처하었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에 부유한 국가의 사람들은 원인 제공자라는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인간 욕망의 끝은 없다. 그 끝은 생태계와 지구촌의 파멸이 될 것이다. ‘인간 탐욕의 문명은 마치 거대한 집단 자살 체제와 같다’는 의식 있는 학자들의 경고는 풍요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이 깊이 새길 경고이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생태계의 교란과 파괴의 결과는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이미 우리 곁에서 나타나고 있다. 아토피 질환을 포함해서 흔히 ‘문명병’이라고 불리는 각종 질환 등이 발병하고 있고,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 자연은 개발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인간과의 공존과 공생이라는 큰 언약의 틀 안에서 개발되어야 한다. 자연은 결코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과 돌봄의 대상인 것을 기억해야한다. 이 공생과 연대라는 관계를 깨뜨리고 자연을 충족의 대상으로 대하고 폭력을 행사하면 자연은 인간에게 복수한다. ‘겸손’과 ‘절제’는 더 이상 도덕적 덕목이 아니라 과학이 가르쳐주는 생존을 위한 요청사항이다. 과학은 인간에게 욕망을 줄이지 않으면 같이 망한다고 말하면서, 자중할 것을 요구한다.
탐욕을 제어하지 않으면 개인도 망한다. 물질과 소유가 어느 정도 있어야 삶이 불편해지지 않는 것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도 다분히 일반적인 생각일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뭔가 달라야 한다. 성경이 재물과 행복에 대해 가르치는 바는 이 세상의 일반적인 것과는 아주 다르다. 신자들은 무엇보다 성경이 보여주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더 분명하게 의식화하고 가져야 할 것이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
탐욕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에게 양심과 공동체 의식이 각성되어야 하고, 거기에 추가로 윤리적인 덕목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해결책은 다름 아닌 ‘재물과 소유에 대한 바른 의식’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른바 ‘물질에 대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있는 것이다. 돈과 재물, 그리고 권력은 인간을 결코 만족시키지 못하며, 만족이라 하더라도 한시적인 가치만을 지닌 허무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마음에 깊이 새겨지지 않는 한, 탐욕을 정면으로 대처해 나가기란 어렵다. 성경은 이에 대해 수많은 곳에서 가르친다. 전도자는 ‘재물은 인간에게 궁극적인 만족을 줄 수 없다’고 말한다. 소유하면 할수록 더 배고프고 갈증이 날 뿐이라고 말한다.(전 5:10) 재물은 아무리 움켜잡는다고 붙잡아둘 수없는 허무한 것이라고 말한다. 잠언기자는 재물이란 마치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와 같아서 언제든지 날아가 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친다.(잠 23: 5)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재물은 때로 녹이 슬고 벌레가 먹어 못 쓰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힘으로 결코 재물을 온전히 보호하고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기독교적 세계관이 바로 출발점이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아가야 할 자라는 자기 정체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신자는 이 세상의 좋은 것을 추구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썩어질 재물과 일시적 갈증만을 해소해주는 소유와는 비교할 수 없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화평(롬 14:17)이라고 신자들에게 가르쳤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면 죄의 속박으로 자유하게 되고, 이것에서 오는 기쁨을 맛보고, 마침내 참 평화를 누리게 된다. 이것들은 영원한 천국에서 누리게 되는 것이지만 오늘 현실에서도 맛보고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역동적으로 임하였기에, 비록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맛보며 살 수 있는 실체이다. 신자들은 종말론적인 복을 현실에서 성령 안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즉 실현된 종말론적 평화를 맛보며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사는 이방인과 달리 성도들은 이것들을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 것’을 요구하셨다.(마 6:25-33) 이 세상 사람들은 먹고 입고 마시기 위해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의와 희락과 화평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 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만약 신자들이 그렇게 살면 하늘 아버지가 의식주의 문제도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자족에의 연습
이러한 ‘기독교적 세계관’의 안경을 갖추고, 살지만, 신자들도 물질이 부족하면 어려움을 겪게 될 수밖에 없고 더 갖추어 안락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똑같이 든다. 이런 마음을 잘 다스려서 욕심으로 나아가지 않기 위해 신자들은 우선 지니고 있는 것에 자족하고 감사하는 태도를 지니고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실제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로 심각하게 고통 받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활을 넉넉하게 여기며 만족하며 지내는 자들도 그렇게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절대적으로 부족해서가 아니라, 바라는 만큼 풍요롭게 지내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이렇지 않았다. 모두가 전반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지만, 의식주에 크게 걱정이 없는 상태이면 즉 연탄 몇 십 장을 창고에 쌓아 놓고, 김칫독과 쌀독만 떨어지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해 했다. 그에 반해 현대인들은 많은 것들을 이미 지녔고 실제로도 누리고 살지만 결핍감은 이전보다 더 커졌다. 오히려 궁핍할 때가 넘칠 때보다 더 풍요로웠던 셈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크게 부족함이 없는 상태이지만 욕심 때문에 자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4세기 교부 크리소스톰은, 진정한 부자는 재물을 많이 모은 사람이 아니라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만족하는 사람이고, 정말 가난한 자는 재물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탐욕이 가득해서 만족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했다. 신자들은 무엇보다 지금 지니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것이 자족이다. 살아가는데 의식주가 크게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을 족한 줄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 나가야 할 노릇이다. 바울은 사도로 살아가면서 때로는 궁핍에 처하게 되는 일이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하면서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자기를 본받아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족하고 감사하며 꼭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삶을 살 것을 당부했다.(빌 4:11-12) 

조금 덜 : 단순한 삶의 방식(simpler lifestyle)
가난의 문제에 대해 일생을 헌신하고 연구한 신학자 로날더 사이더는, 신자들이 단순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힘써야 할 것을 역설한다. 그는 오늘 지구촌의 많은 나라들이 기아와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너무나 풍요롭게 살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만족하지 못하고 더 풍요롭게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풍요에의 욕심을 벗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필수적인 길이라고 한다. 그는 이것을 위해서는 삶을 단순한 삶의 형태로 바꾸어 가야한다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신자들은 가능한 살림과 경제규모를 축소해서 단순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물품을 ‘의식주에 꼭 필요한 필수품’, ‘있으면 삶에 유용한 것’, ‘없어도 되는 것’, 그리고 ‘사치품들’로 각각 분류하면서, 필수품 이외의 것들은 단지 생활을 좀 더 편하게 해주는 ‘잉여의 소유물’로 분류하였다. 신자들은 필수적 것 외의 잉여소유물을 소비하는데 매우 조심해야하고 가능하면 그것들을 단계별로 줄여나가는데 힘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것이 단순한 삶의 방식이 지향하는 것이다. 그는 신자들이 이 땅에서 너무 풍요롭게 생활하면 그것에 익숙해져서 정작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해서는 소홀한 반면, 이 땅의 것을 조금 덜 가질수록 하나님 나라의 풍요함을 더욱 누릴 수 있다고 했다.
이와 관련한 보다 구체적 태도에 관하여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도 아주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해 준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물품을 구입할 때는, 사서 소유하고 싶거나 혹은 살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산다. 그러나 신자들은 달라야 할 것을 포스터는 주문한다. 경제적인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신자들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뻐하실까?’하는 의식을 갖고 고민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집을 구입하고 차를 바꾸려 할 때, “너는 그 정도의 집과 차를 살 능력이 있어!”라는 생각만을 따라 구입한다면, 그것은 돈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고, 돈이 우리 주인이 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이 과연 이것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실까 하는 관점에서 한 번 더 고민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신자들은 자그마한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소비에 더욱 절제하면서 단순한 삶을 연습해 가야 한다’고 했다. 이때 무엇을 덜 소유하였거나 혹은 적게 쓰는 단순한 삶은, 결코 궁색한 삶은 아니다. 신자들은 오히려 이렇게 삶 가운데서 더 풍요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있는 것으로 나누기
탐욕에 대한 가장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대처방안은 자기가 가진 것을 조금씩 내 보내는 것, 즉 ‘구제’하는 것이다. 신자들이 소비를 줄이고 단순한 삶의 방식을 도모해 나가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이웃을 위해 더 내어주고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식사시간에 손을 씻지 않은 채 식사하는 예수님에 대해 놀라워하는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것, 즉 악독과 탐욕을 씻고 제거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 방법까지도 구체적으로 가르치셨는데, 그것은 바리새인이 먹을 음식을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라는 것이었다. 자기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을 줄여서 그것을 다른 사람과 더 나누며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직접 제시하신 욕심을 내버리는 유용한 길이다. 소비를 줄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한 사람의 변화와 성화의 가장 두드러진 표시는 자기가 가진 것을 포기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행동에서 나타난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를 영접한 삭개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게 되었을 때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께 자기가 갖고 있던 소유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하고 만약 토색한 일이 있으면 그것의 4배를 갚겠다고 주님께 고백했다.(눅 19:8) 그 선언이 있은 직후 예수님은 구원이 삭개오의 가정에 임한 것을 선포했음을 신자들은 기억해야 한다. 탐욕에 대한 참된 회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에서 정점을 이루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 나누어 주는 것은 영성과 경건의 수월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지표인 셈이다. 5세기 베네틱트 수도원을 비롯한 중세 수도원에서의 수도생활은 명상, 노동, 성경읽기로 대표되는데, 그 중 노동의 한 주요한 목적은 그 소출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과 손님을 구제하고 대접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구제가 영성훈련에 있어서 주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의미이다. 
자기 것을 떼어서 나눠주는 일에 힘쓰는 일은 탐욕을 떼어내는 급진적인 방법이다. 사이더가 소비를 줄이고 단순한 삶을 살 것을 권한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더 많이 구제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사이더는, 신자라면 소득의 십일조를 내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점점 더 헌금의 비율을 높여가야 한다고 했다. 그가 제시하는 것은 누진적 십일조(graduated tithe)인데, 신자들은 가족 규모와 수에 따라 합리적으로 자녀 교육비를 포함한 생활비와 또 노후를 위한 적립금의 액수를 산출하고 난 뒤, 매달 그 이상의 여분의 소득이 발생했을 경우 점진적으로 잉여 소득에 대한 추가적 헌금을 단계별로 높여 나가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어느 일정 잉여 소득분에 대해서는 그것을 모두 헌금으로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누진 일조적 헌금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위한 구제를 목적으로 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성도들이 자신이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가진 재물로 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도록 권면하도록 당부했다.(딤전 6:18) 오스왈드 샌더스는 일찍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는 구절을 지적하면 이것은 바로 산상수훈의 팔복과 나란히 기록될 제 9복이라고 칭한 바 있는데, 나누기를 즐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각별한 복이 임한다는 것은 약속이요 위로인 셈이다. 

나가면서
오늘 물신주의 문화와 사회는 어떤 악보다도 탐욕을 더 조장한다. 신자들은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을 건성으로 듣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한다. 재물과 이 세상의 소유를 늘여나가는 생활이 주는 낙을 경계해 나가야 한다. 신자는 먼저 이 땅의 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우선하여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자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돈과 권력이 많으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될 수 있다는 사도의 가르침을 무겁게 새겨야 한다.(딤전 6:10-11) 돈과 권력 때문에 방자해져서 하나님보다도 그것을 더 의지하는 삶을 사는 것보다는, 조금 모자라게 살더라도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맛보며 사는 삶이 훨씬 복됨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이 사회는 ‘부자가 되어라’고 늘 권하지만 우리는 좀 덜 쓰고 좀 덜 소유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해 부요하고 이웃에 대해 후한, 그런 풍요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새해는 소유를 늘이는 것에 치우치지 않고, 단순하게 살고 덜 쓰면서, 자족하고 감사하며 가진 것으로 더 나누는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고 애써야 할 것이다.

신원하 l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와 고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칼빈신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석사(Th. M.)와 보스톤 대학에서 사회윤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Ph. D.) 저서로는 『전쟁과 정치』,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 『가난과 부요의 저편』, 『시대의 분별과 윤리적 선택』 등이 있으며, 지금은 천안에 있는 고신대 신대원 교수이면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신학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글쓴이 / 신원하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