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ly 5, 2012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1) 사막 수도사가 전해준 목록 죽음에 이르는 일곱 죄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1)
사막 수도사가 전해준 목록 죽음에 이르는 일곱 죄
들어가며
기독교 전통이 전해준 ‘죽음에 이르는 일곱 죄’는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이다. 이 죄는 1500여년 이상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로 자리 잡아 왔다. 본래 이 죄의 목록은 4세기 경 사막수도원에서 만들어졌다. 수도사들의 삶을 방해하는 것에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6세기 초대 교황으로 간주되는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는 이 목록을 수도원에서 교회와 사회로 내려오게 했다. 수도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어야 할 것들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레고리가 이것을 교리로 공식화한 이후 신학자들은 이것을 체계화시켰고 교회는 이를 정기적으로 가르쳐왔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교리를 보다 정교하게 교리화 했다. 
이 죄는 교리이지만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소설, 시, 그림, 조각 등 문화예술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넓게 스며들었다. 종교개혁이후 이 교리가 성경적 근거가 약하다는 이유로 개신교회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계몽주의 이후 사회에서 점점 종교의 역할이 축소되고 탈종교화, 세속화 경향이 진전되면서 이 교리의 그 영향력이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곱 죄론은 서양문화와 사회 전반에 깊게 뿌리 내려 있고 넓게 스며들어 있기에 서구의 종교, 정치, 사회 그리고 예술의 전반을 통해 여전히 묻어 나오고 있다. 이 주제에 관련한 작품들과 연구가 문학, 종교, 철학, 그리고 영화분야에 걸쳐 계속 나오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부에 들어오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더니 특히 개신교회가 부쩍 이 대죄론에 이례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이 주제에 관해 앞 다투어 책을 내거나, 설교를 하고 있다. 이 주제가 설교할 거리가 궁한 목사들에게 2달간의 설교할 거리를 주는 좋은 주제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설명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이 이유에 대해 뒤에서 잠깐 언급하겠지만, 이 주제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생존하는 한 계속적으로 다뤄질 수밖에 없는 주제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인간본성에서 말미암는 근본적인 죄로써 인간 누구나 갖고 씨름하는 보편적인 악(vice)이요 죄이기 때문이다. 일곱 죄 하나하나의 특징과 의미와 이것이 개인과 사회에 낳는 결과가 무엇임을 이해하고 나아가 이에 대한 처방을 기독교 전통은 어떻게 제시했는지를 살피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경건과 영성의 진보를 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를 살리며 또한 건강하게 만드는데 아주 유익할 것이다. 하나하나를 다루기 전에 먼저 서론적으로 이에 관련한 몇 가지 의문과 이 죄들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성격들을 간단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죽음에 이르는 죄’(deadly sins), 대죄(capital sins)? 
이 주제에 관련된 책을 읽다보면 ‘seven deadly sins’ ‘seven capital sins’ ‘seven cardinal sins’ ‘seven root sins’와 같은 용어들을 접하게 된다. 직역하면 ‘죽음에 이르는 죄’ ‘대죄’(혹은 머리 되는 죄), ‘가장 중요한 죄’, ‘뿌리 죄’이다. 그런데 과연 이 용어들은 각각 다른 죄들을 지칭하는 이름인가 아니면 동일한 죄를 가리키는 다른 명칭인가? 
마지막 세 이름은 모두 동일한 죄를 지칭하는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들은 라틴어 어원을 가진 단어들인데, capital은 머리라는 라틴어 ‘caput’에서 cardinal은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의 ‘cardinalis’ or ‘cardo’에서 그리고 root는 뿌리라는 의미의 ‘radix’에서 왔다. 세 가지 이름은 차이가 있지만 머리, 가장 중요, 뿌리라는 의미가 시사하듯 가장 크고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들 죄는 모두 가장 중요한 ‘대죄’를 의미하는 명칭이다. 이들 중에서 capital sins와 cardinal sins가 많이 사용된다.(이들은 앞으로 ‘대죄’로 칭할 것이다.)
그렇다면 seven deadly sins와 seven capital sins는 어떤가? 이 둘은 개념적으로 분명히 다르다. 명칭이 시사하듯이 deadly sins는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s)를 의미하고 대죄(capital sins)와는 다르다. 로마 가톨릭 신학은 두 종류의 죄를 엄격하게 구분해 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용서받을 수 있는 죄’(venial sins)와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로 구분했다.1) 후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charity and grace)에서 끊어져 저주에 이르는 죄이다. 그러나 ‘머리되는 죄’(seven capital sins)는 다른 죄들의 근원이 되는 ‘대죄’일 뿐, 죽음에 이르는 죄는 아니다. 그러나 현재 이 두 명칭은 대죄를 지칭하는 다른 표현처럼 이해되고 있고 실제로 이 두 표현은 모두 일곱 가지 죄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블룸필드(Bloomfield) 교수는 이 현상의 이유를 후기 중세시대 교회와 신자들의 고해성사와 참회 기도에서 찾는다.2) 그레고리 교황이 대죄(capital sins)의 목록을 확정한 이래 대죄는 표준화되어 내려왔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s/deadly sins)는 그렇지 못했다. 신자들은 이 죄를 회개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고 그런 과정에서 capital sins의 목록들은 참고 자료로 삼았다. 12세기 이후 이 죄들은 문학과 예술 작품의 소재로도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에 대해 친숙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인들이나 신학자 개인들도 대죄의 목록들을 참회 자료로 활용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죄와 대죄를 점차 혼동하게 되었다.3) 이런 경향과 현상은 14세기 말 이후부터는 더욱 일반화되다시피 하였다. 일반인들의 글에서도 이런 혼동과 혼용 현상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seven deadly sins라는 표현이 점점 대죄(seven capital sins)의 명칭으로 더 익숙하게 사용되어 갔다. 
정리해본 바대로 현재 교회나 사회가 사용하는 ‘죽음에 이르는 죄’(seven deadly sins)라는 용어는 ‘대죄’(seven capital sins)의 다른 표현이다. 그렇다면 전자의 표현 대신 정확한 용어인 ‘대죄’를 사용하는 운동을 해야 할 것인가? 그럴 필요는 없다. 또 가능하지도 않다. 언어는 습관이기 때문이다. 이미 사회와 신학계에서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seven deadly sins라는 용어를 볼 때 이것은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s)가 아닌 ‘대죄’(seven capital sins)를 가리키는 것임을 인식하고 사용하면 될 것이다.

2. 대죄와 일곱 대죄는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 
그럼 과연 ‘대죄’는 성경적인가? 이 용어는 성경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단지 초대교회 교부들의 문헌에서 이런 표현들이 나온다. 그런데 성경의 일부 구절은 죄에 경중이 있고, 어떤 특정한 죄는 다른 죄들에 비해서 훨씬 죄책이 크다고 가르치고 있다. 요한일서 5장 16절은 대표적인 구절들이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사도 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a sin unto death),” “사망에 이르게 하지 않는 죄(a sin which is not unto death)”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예수님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함받지 못하고”(마 12:31)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용서받지 못하는 죄’로 해석할 수 있는 가르침이다. 또 히브리서에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타락한 자들은” 회개케 할 수 없다(히 6:4-6)는 내용이 나오고, 바울서신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죄로 “음란, 우상숭배, 간음, 남색”, “시기” “술취함” “방탕함”같은 죄를 지정하고 있다.(고전 6:9) 
이런 구절들에 근거하여 초대교회의 몇몇 교부들도 대죄 개념을 발전시켰다. 헤르마스, 오리겐 제롬, 터툴리안, 키프리안은 “대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특히 3세기 교부요 변증가인 터툴리안은 마시온을 반박하는 글에서 “septem maculae capitalium delictorum” 즉 “일곱 대죄”(seven capital sins)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그 죄들은 우상숭배, 망령되이 일컬음, 살인, 간음, 음행, 거짓증거라고 구체적으로 묘사했다.4) 그가 이것들을 대죄라고 생각한 것은 이것이 십계명과 연관된 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5)
엄격하게 말하면 대죄라는 명칭은 성경에 직접 나오지는 않는다. 그리고 초대 교부들 몇몇이 사용했지만 교회가 공식적으로 사용했거나 받아들인 명칭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 명칭이 나오지 않는다 해서 이 대죄의 개념이 비성경적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성경이 죄의 경중을 말하고 있으며 근본적인 죄가 있고 그에서 파생적인 죄가 서로 구분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고 이런 것에 근거해서 초대교부들도 이를 발전시켜 가르쳤기 때문이다. 
3. 일곱 대죄의 기원과 역사: 에바그리우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까지
오늘 우리가 전해 받은 죽음에 이르는 일곱 죄 혹은 일곱 대죄의 목록은 성경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가장 유사한 목록이 잠언 6장 16-19절에 등장하기는 한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그러나 이것은 일곱 대죄의 목록과는 현저히 다르다. 터툴리안이나 다른 초대교부가 제안한 것도 그 목록이 다르다. 이 죽음에 이르는 목록의 가장 오랜 기원은 사막 수도사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 에바그리우스 (Evagrius of Ponticus, 345-399)
4세기 이집트의 사막 수도사였던 에바그리우스는 현재 우리에게 전해진 일곱 대죄의 가장 유사한 최초의 목록을 만들었다. 에바그리우스는 소아시아 폰투스 지역의 기독교 사제 가정에서 태어났고 콘스탄티노플로 이주한 뒤 주교 나지안수스의 그레고리(St. Gregory of Naziansus, c330-390) 밑에서 수학했다. 그는 이단과의 신학논쟁을 통해 탁월한 명성을 얻었지만 곧 유부녀와 가깝게 지내는 유혹을 받게 되면서 결국 이것을 피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다가 결국 이집트 니트리아 사막의 수도원에서 그의 남은 생애를 보내게 된다. 그는 의도적으로 사막으로 들어가 죄와 대면하며 씨름하면서 신령한 지식에 이르고자 하였다. 그는 헬라어에 능통하였고 탁월한 지적 능력을 지녔지만 수도사들을 괴롭히는 실제적인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실제적 지침을 만드는데 주력하였다. 이는 자신이 그런 유혹을 받은 실존적인 경험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일곱 대죄의 원형으로 간주되는 여덞 가지 “악한 사상”(logismoi)을 만들어 내었다. 그가 규정한 악한 사상들이란 탐식(gastrimargia), 정욕(porneia), 탐욕(philargulia), 우울(lupe), 분노(orge), 나태(acedia), 헛된 영광(kenodoxia), 교만(huperphania)이다.6) 
그는 “악한 사상”을 사람들의 영혼에 격정적 감정(passion)을 일으켜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지각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힘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외적의 힘과 세력으로 수도사에게 가해지는데 곧 마귀가 일으키는 것으로 간주했고, 이 악한 사상은 곧 죄와 같은 것이고 이것은 바로 마귀로 보았다.7) 이처럼 그는 죄, 악한 생각은 마귀에게서 온다고 생각했다. 에바그리우스 사상의 특징은 바로 마귀론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와 씨름했듯이 수도사들도 이 마귀와 그가 변장해서 나타나는 악한 생각과 싸워야 한다고 가르쳤다.8)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사들은 이런 악한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온전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기도와 관상(comptemplation)의 방편을 통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 기도도 하나님이 주는 은혜의 선물로 그는 보았지만, 동시에 그는 겸손이나 견딤(endurance)과 같은 덕목을 함양함으로써 깊은 기도로 나아갈 수 있고 이를 통해 악한 생각의 장애를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2) 존 카시안(John Cassian of Marseilles, c 360-435) 
존 카시안은 에바그리우스의 제자였고, 이집트의 마르셀레스 부근에서 두개의 수도원을 세운 수도사였다. 그는 수도원 생활에 관련한 규칙과 영성훈련 지침 등을 자세하게 다룬 Conference와 Institutes를 남겼다.9) 그는 이 책을 남김으로 사막 수도사들의 영성과 가르침을 서방 교회와 사회에 소개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수도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이 두 책들에서 여덟 가지 중요한 죄들을 비교적 자세히 다루었는데, 그가 규정한 여덟 대죄는 탐식(gastrimargia), 정욕(fornicatio), 탐욕(filargyria), 분노(ira), 우울(tristitia), 나태(acedia), 헛된 영광(cenodoxia), 교만(superbia)이다.10) 
카시안의 목록을 에바그리우스와 비교하면 우선 죄의 목록과 가지 수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통해 그가 에바그리우스의 제자였다는 것이 더 확실히 드러난다. 둘째 카시안은 죄를 영적인 죄(spiritual sins)와 육적인 죄(carnal sins)로 분류했다. 그는 육체적 죄를 구분하여 먼저 배치하였다. 그는 탐식을 첫 자리에 두었고 이것이 다른 죄들의 뿌리라 주장했다. 그것은 그가 육체적 욕구가 인간에게 우선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에서 영적인 죄도 나온다고 보았다. 그는 수도사들이 약한 육체적 죄와의 전투(battle)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더 힘든 영적 전투에서는 승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셋째 카시안은 처음 여섯 악들은 마치 혈연을 나눈 가족(kinship)과 같다고 말한다. 그는 앞의 죄로부터 다음 죄가 유출되어 나온다고 주장한다. 탐식을 하게 되면 그것은 정욕으로 나아가게 된다. 정욕에 빠지면 또 욕심이라는 죄악에 빠진다. 이런 이해 때문에 그는 에바그리우스와는 달리 욕심을 분노보다 앞에 배치했다. 죄의 극복 방안에도 이 관점을 적용하였다. 정욕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탐식의 죄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3) 그레고리 대제(Gregory the Great 1, 540-604)
6세기 말, 그레고리는 구약 욥기를 설교하는 방대한 작업을 하는 가운데서 일곱 가지 죄를 대죄로 분류하고 설명하였다. 그는 헛된 영광(inanis gloria), 시기(inuidia), 분노(ira), 우울(tristitia), 탐욕(auaritia), 탐식(ventris ingluuies), 정욕(luxuria)을 대죄로 규정하였다.12)
그레고리가 만든 이 목록은 오늘 우리가 전해 받은 것에 가장 가까고 또 오래된 목록이다. 이것을 카시안의 것과 비교해 보면 첫째 그레고리는 대죄의 숫자를 일곱으로 줄였다. 그는 교만(superbia)을 다른 일곱의 뿌리 되는 죄로 생각해서 아예 다른 범주로 독립시켰다. 그리고 ‘우울’이라는 죄 안에 ‘나태’의 성격이 있다고 보면서 나태를 삭제하였다. 그리고 ‘시기’를 새로운 목록으로 첨가하였다. 
둘째 그는 카시안처럼 육적(carnal)인 죄와 영적인 죄로 나누었지만 영적인 죄를 첫 부분에 배치했다. 카시안은 죄를 지나침 즉 과도함으로 등치하면서 지나친 욕망, 감정을 죄로 간주 했지만, 그레고리는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권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보았다.13) 그래서 하나님의 법과 권위를 떠나 자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권세를 지향하는 교만을 가장 심각한 죄로 여겼다. 그가 교만을 모든 악들의 “뿌리”, “여왕”으로 칭한 것 그리고 교만으로부터 일곱 죄악이 차례로 나왔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죄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4)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5)
토마스 아퀴나스는 『악에 대하여』 라는 책에서 이 일곱 죄를 자세히 다루었다. 아퀴나스의 목록은 헛된 영광, 시기, 나태, 분노, 탐욕, 탐식 그리고 정욕이다.14) 아퀴나스는 그레고리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다. 교만을 죄의 뿌리로 규정하고 일곱 대죄의 목록에서 독립시킨 것과 대죄를 일곱 개로 확정한 것도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우울함을 나태로 대체한 것과, 분노와 나태의 순서를 바꾼 것이다. 아퀴나스는 그레고리가 목회적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한 것과 다르게 철학적이고 조직적으로 이 죄들을 다루고 설명한 면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현재의 칠대 죄악 목록
현재 우리가 전해 받은 대죄는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식탐, 정욕이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출판된 책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그렇게 취급하고 있다. 그레고리와 토마스가 전해준 죄의 목록에서 한 가지가 줄었고, 또 헛된 영광은 교만으로 융합되어졌다. 
이 현상의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는 연구서는 찾기 힘들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그렇게 사용해 왔고 그 결과 이렇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교만과 헛된 영광은 유사한 점이 있고 그 둘 중 교만이 더 친숙한 용어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가면서 교만으로 통일하여 사용했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전부터 내려오던 우울과 나태를 연합내지 병합하여 나태로 확정지은 것과 같은 현상이다. 어쨌든 현재 일곱 대죄의 목록은 이와 같이 그레고리와 아퀴나스가 전해준 목록에서 약간 변형된 것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때로는 그레고리 전통을 따른 아퀴나스의 목록을 사용하는 학자들과 사람들도 있다. 

4. 일곱 대죄의 의미 
그럼 과연 대죄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죄를 대(capital)라고 부를 때 그 본래의 라틴어 의미는 머리(caput)이다. 머리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의미를 가리키는데 그 첫째는 문자 그대로 몸의 일부로서의 머리이다. 둘째로 머리는 숨 쉬며 사는 생명체의 근원(source)이기에 “모든 종류의 근원”(every kind of source)을 가리키는 의미로 지닌다. 셋째 머리는 한 국민을 다스리는 지도자, 통치자의 의미이다. 그런데 이런 의미들이 있지만 대죄라고 부를 때는 머리라는 의미는 다른 죄의 근원의 의미를 뜻한다.15) 일찍이 그레고리(Greate the Great)는 대죄는 다른 죄들의 샘인 죄라고 성격 지웠다. 아퀴나스도 이 성격을 강조한다. 
대죄가 다른 죄의 근원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죄들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는 죄라는 의미이다. 어떤 죄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죄들을 짓게 한다면 그것이 대죄이다. 예를 들면 탐욕은 과장, 사기 등의 행위를 유발할 수 있다. 욕심에 눈이 멀면 목적 즉 돈이나 소유물을 획득하기 위해 그런 악한 행동들을 하기도 한다. 이럴 때 사기치고, 공갈하고, 속이는 죄들은 탐욕의 목적을 위해 발생되는 죄들일 수 있다. 이런 여러 죄들은 탐욕 때문에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탐욕은 근원이 되는 죄 곧 대죄인 것이다. 일곱 죄를 대죄라고 부르는 것은 이 죄들로부터 많은 다양한 종류의 죄악들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5. 일곱 죄의 성격 분류

육적인 죄 영적인 죄
일곱 죄는 육적인 죄와 영적인 죄로 나눌 수 있다. 카시안 그레고리 그리고 아퀴나스는 모두 이렇게 분류했다. 그레고리는 탐식, 정욕을 육체에 관련된 죄로, 다른 다섯을 영혼에 관련된 죄로 보았다. 카시안은 육체적 죄에 속하는 탐식을 제일 첫 자리에 두면서 이 죄가 기본이 되는 죄이고 다음에 나오는 죄들의 뿌리라 주장했다.16) 아퀴나스는 이 두 종류의 죄들 가운데 영적인 죄가 더 책임이 크다고 말한다. 죄책은 죄를 범하게 하는 충동의 강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육체의 죄는 육체의 강력한 재촉 때문에 불가피하게 행하는 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비정상적 사랑(Disordered Love)
단테는 일곱 죄를 잘못된 형태로 표출된 사랑으로 설명했다. 그는 세 가지로 나누어서 보았다. 첫째, 교만, 시기, 분노의 성격을 굴절된 사랑의 죄(sin of perverted love)으로 규정했다. 자기를 사랑하는 방식이 이상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함으로 자기를 기쁘게 하고 사랑하는 형태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자신에 대해 집착하는 것에서 말미암는 잘못된 방식의 자기 사랑이다. 둘째, 나태는 불충분한 사랑의 죄다.(sin of insufficient love) 이 죄는 특정한 상황에 처해서 그 상황에 적합한 정도의 사랑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현저히 부족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다. 셋째, 탐욕, 탐식, 그리고 정욕은 돈, 정욕, 그리고 음식을 과도하게 사랑하는 죄(sin of excessive love)라고 할 수 있다. 먹는 것, 소유, 그리고 정욕을 채우는 것을 과도하게 사랑함으로써 마땅히 사랑해야 할 다른 것들을 적절하게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일곱 죄를 이런 세 가지 종류의 ‘비정상적 사랑’이라는 이해의 틀로 보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다. 

‘차가운 마음의 죄’와 ‘뜨거운 마음의 죄’
도로디 세이어(Dorothy Sayers)는 이 일곱 죄는 마음에서 나오는 “마음의 근본적으로 나쁜 습관들”로 이해하면서 정욕, 분노, 탐식을 뜨거운 마음의 죄(warmhearted sins), 탐욕, 시기, 나태 그리고 교만을 차가운 마음의 죄(coldhearted sins)로 이름 붙였다. 세이어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파괴적인 것으로 보았다. 예수님은 이 후자의 죄를 훨씬 더 신랄하게 책망하셨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일반인들보다 바리새인, 종교인들 곧 자칭 자기 의에 가득 찬 사람들이 이런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이었다.17)

6. 일곱 대죄론, 기독교 영성 운동 그리고 덕과 성품 윤리학 
최근 개신교회에 이 주제에 관해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현상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분석하고 답하는 것은 일곱 대죄를 연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답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분석할 수 있다. 

영성신학 관심 고조 
첫째,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개신교회 내에서 영성(spirituality)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어 온 것과 관련된다. 20세기 후반 신학계의 화두는 영성이라고 할 만큼 이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대단했다. 당시 사회적으로도 명상 참선 등의 영성에 대해 뜨거운 관심이 일어난 것도 이에 크게 작용을 했다.18) 교회와 신학계는 영성,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 이라는 개신교에 상대적으로 낯선 신조어가 만들어 졌고, 영성 훈련(spirituality discipline)과 영성형성을 소개하는 다양한 성격의 실제적인 책들이 출판되었으며 기독교 출판계의 새로운 분야로 자리 잡게 되었다.19) 
신학계에서는 영성에 관해 전문적인 연구 작업이 진행되어 왔고 이런 과정에서 영성신학(spiritual theology)이라는 새로운 신학분과가 실천 신학의 한 분과로 자리 잡을 정도까지 되었다.20) 영성신학은 죄인인 인간이 죄로 말미암는 장애 즉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를 제거하고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습으로 회복되어 나아가는 것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신학이다.21) 학자들은 우선적으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역사 가운데 있어왔던 영성과 관련된 인물들의 사상과 실제적 사례들을 찾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신비적 동방교회 전통과 금욕적 수도원 전통의 신학과 운동이 중요한 연구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를 통해 에바그리우스와 카시안과 같은 동방 수도사, 베네딕트, 그레고리와 같은 고대의 초기 서방 수도사의 사상과 구체적인 가르침에 대한 연구가 이전보다 훨씬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즉 에바그리우스의 기도의 신학 및 그가 수도사들을 위해 만든 지침들과 다양한 가르침들을 발굴하고 번역하는 작업과 아울러 이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책들이 잇달아 출판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곱 대죄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증가하면서 학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차원에서도 재조명받게 되었다. 최근 많은 곳에서 수사와 수도원 관련 단체들이 자기 고유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대상으로 영성훈련 운동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일곱 대죄론은 이와 같은 교회와 신학의 분위기에서 이전보다 훨씬 비중 있게 취급되게 되었다.

덕과 성품 윤리학의 대두 
둘째, 1980년대 전후에 들어와서 일반 사회와 신학계에 밀어닥친 덕과 성품을 강조하는 덕의 윤리의 부활의 영향을 들 수 있다.22) 신학계에서는 1970년대 중반에 스탠리 하우워스(Stanley Hauerwas)라는 걸출한 젊은 학자가 그동안 행동과 행동 결정을 위한 규범을 중시해온 기독교 윤리의 경향을 비판하고 덕과 성품을 강조하는 새로운 흐름을 일으켰고 많은 학자들이 호응하고 이 흐름에 동조하였다. 하우워스는 그동안 기독교 윤리학의 중심적인 질문은 “무엇이 선한 행동을 구성하는가”에서 “무엇이 선한 사람을 구성하는가”로 옮겨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행동에서 존재로 그리고 행동을 위한 규범에서 점점 선한 사람을 구성하게 하는 성품과 덕으로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와 그 전통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독교 윤리는 행동에 앞서 선한 존재 그리고 선한 존재와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그러한 덕과 성품에 관한 이론과 실천의 학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3) 사실 하우워스의 이런 윤리학적 주장은 당시의 도덕철학자 알라스대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가 잃어버린 이전의 도덕을 재도입하면서 덕의 윤리를 추구할 것을 강조한 것과 보조를 같이 했고 또 그 영향을 받은 바 있다. 맥킨타이어가 말하는 과거의 도덕은 행위결정을 앞두고 준수해야 할 규칙이 무엇인가에 대해 자료가 되는 도덕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해 주었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선한 삶을 구성하게 하는 덕, 성품, 즉 존재의 윤리였다.24) 맥킨타이어의 이런 주장이 당시 윤리학계에 학문적 전환을 야기하는데 크게 작용한 것과 유사하게 하우워스의 주장은 당시 기독교 윤리학의 주된 흐름에 대한 반성을 유도하고 덕의 윤리학,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는데 크게 작용했다. 
이런 덕, 성품, 공동체의 윤리가 고조되면서 그동안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의 전유물처럼 생각해 왔던 아퀴나스의 덕윤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선한 삶의 윤리에 대해 개신교 신학자들이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곱 대죄 주제는 자연히 더 친근한 주제로 자리 잡고 또 조명을 받게 되었다. 즉 대죄 교리는 단순히 버리고 경계해야 할 죄만이 아니라 거룩한 삶, 경건한 삶을 위해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이고 습득해 나가야 할 덕과 성품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교리인 것이다. 

7. 연재를 시작하면서 
일곱 대죄는 수도원 전통에서 형성되었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오랫동안 가르치고 전해 준 교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교리라고는 할 수 없다. 이 죄들은 인간본성에서 말미암은 악이기 때문에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누구든 이 악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 대죄론이 일반 사회의 제반 영역에서 꾸준히 스며들어 내려 올 수 있었던 것도 인간모두에게 보편적으로 공감되고 적용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대죄론은 우리 가운데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를 소재로 한 영화와 문학, 예술작품, 그리고 학문적 연구물이 계속 끊이지 않고 나오고 것도 바로 그 증거이다. 
이 대죄론이 보편적 공감을 얻는 주제이지만 이의 독특한 성격과 현상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법에 대한 이해와 처방은 학문적 종교적인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일반 인문학이나 비기독교적 종교와 기독교도 서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제 앞으로 대죄를 하나하나 다루어 나가게 될 것이다. 시작하면서 이 글은 기독교 전통과 신학에 근거하여 이 죄들을 이해하고 분석할 것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물론 일반 학문의 지혜와 통찰력의 도움을 받고 활용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글은 성경과 교회 전통에서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이를 어떻게 취급했고 이해했는지를 우선적으로 존중해서 보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출발할 것이다. 그리고 난 뒤 이 죄가 오늘 현재의 우리의 일상에서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인간관계에서 나타나고 공동체와 사회관계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검토하고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모색해 나갈 것이다. 

신원하 l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와 고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칼빈신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석사(Th. M.)와 보스톤 대학에서 사회윤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Ph. D.). 저서로는 『전쟁과 정치』,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 『가난과 부요의 저편』, 『시대의 분별과 윤리적 선택』 등이 있으며, 지금은 천안에 있는 고신대 신대원 교수이면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신학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글쓴이 / 신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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